파기될 수 없는 언약
2011년 7월 1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3:19-22
(렘 33:19,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렘 33:20,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할 수 있을진대』
(렘 33:21, 개역)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렘 33:22, 개역)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구원을 생각하고 신을 생각하면서 만들어냅니다. 구원받는 방법도 다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바로 이 고해와 고통과 괴로움이 있는 세계에서의 탈출인데 그 탈출 방법도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동원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면 구원된다는 겁니다.
마치 바닷가에서 서핑하는 사람이 보드 위에 배를 얹고서는 열심히 물살을 저어서 앞으로 나가는 식으로 저 멀리 보이는 천국을 향하여 열심히 노를 저어나가는 이 방식이 과연 하나님의 언약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짜 하나님의 언약실행은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있어 그분에 의해 완료가 되어버립니다.
그분이 바로 ‘다윗 언약’에 의해 오시는 다윗의 자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낮과 밤의 규칙성을 언급합니다. 즉 “낮과 밤이라는 질서가 깨어지지 않는 것처럼 다윗 자손을 통해서 메시아를 보내겠다는 약속도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낮과 밤에서 메시아를 끄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즉 해와 달과 별을 아무리 연구해도 거기서 예수님이 나오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해가 거기에 왜 빛나고 있는지, 달은 왜 쓸데없이 지구를 한 달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도는지, 별은 왜 가끔 떨어지는지 그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모릅니다. 이점을 모른다는 말은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 본인이 왜 여기 존재하는지, 무엇 때문에 있는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해와 달과 별은 모두 다윗 언약을 이루기 위해 배경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모두 다 오실 메시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언약을 자기네들의 종교심, 즉 자기 구원성과 관련시켜서 이해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구원받기 위해 뭘해야 하나”와 말씀을 연결시키는 겁니다.
이것은 크나큰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기에 계속해서 추방된 취지가 간직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추방의 취지’를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추방을 무효화 시키려는’ 의도로 움직입니다. 당연히 악마가 배후에서 조종하는 결과입니다. 즉 기어이 구원되어서 천국가야 원이 풀린다는 겁니다.
언약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인간이 만들어 낸 그 하나님상’과 일치되는 우상을 섬기는 바가 됩니다. 언약의 참된 뜻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심판 안에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죄들을 쏟아내도록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저주가 퍼부어지는’ 제단이 있는 겁니다.
그 무서운 제단에서 나오는 숯불로 이사야는 입술을 지지게 되고, 그 지져진 입술에서 유다 나라에 대한 전면적인 심판의 예언을 하게 되고, 그 심판 속에서 비로소 그루터기가 나오는데 그 그루터기는 곧 이사야의 아들처럼(남은자는 돌아오리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로서 나타나는 메시아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메시아는 이 세상이 곧 어두움이며 ‘이미 심판 아래’, ‘이미 저주 아래’ 있음을 확인하고 분명히 하는 가운데 자기 백성을 구출해 내십니다. 이렇게 해서 구출된 자는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죄로 나온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 죄와 십자가의 만남이 곧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는 언약의 속성이 작렬하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어두움이 죄뿐인 곳에서 과연 인간의 행함이란 어떻게 예수님과 연결될까요?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7:27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잡아 입을 벌려서 거기서 얻은 동전으로 세금을 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무리를 향해 관리들이 성전세 내라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먼저 언질을 던집니다. “성전세를 누가 누구에게 내는 것이 마땅하냐? 사람들이 참된 성전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도리어 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그런데 왜 너희들은 아들인 나보고 내라”고 하느냐 하십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예수님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주고 동시에 인간의 모든 행위가 어떻게 예수님과 관계 맺는지를 보여줍니다.
즉 인간들이 돈 있어 그냥 성전세 내는 방식으로 성전세를 예수님과 연결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들의 무능과 그리고 불가능성을 그 안에다 담아버리는 겁니다. 즉 인간은 아무리해도 제대로 성전세 하나 제대로 낼 수 없는 존재임을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겁니다. 어부가 고기 잡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에게 일부러 고기가 잡히지 않게 하셔놓고서는 배 오른편에서 크게 잡히게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베드로의 태도를 보세요. “주는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떠나소서”라고 합니다. 즉 저는 나 중심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생각했으니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잃으면 얻으리라”고 했습니다.(마 16:24-25)
즉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허락받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구원밖에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구원욕구가 죄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9강-렘33장19-22(파기될 수 없는 언약)11071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3장 19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08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33:19-22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때를 읽게 할 수 있을찐대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 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 인을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서 ‘인간은 이렇게 행해야 된다.’라는 내용이 없지요.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고 약정, 약속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먼저 있고 그 언약에 맞추어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의 밤 되고 낮 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밤이 되고 낮이 된다는 겁니다.
이 성경 덮고 성경 모른다고 칩시다. 밤과 낮을 아무리 연구해도 거기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이 나올 리가 만무합니다. 나오지를 않아요. 아무리 연구한들. 왜 그것이 안나오는가하면, 인간은 자기 몸으로부터 출발하거든요. 자기 몸으로부터 출발해서 이것 이해된다, 그 다음에 이것이 이해되니까 이것 이해된다, 그 다음에 그것 이해되니까 그 다음 것 이것 이해된다, 자기가 자기에게 이해되는 것만 다듬어서 가다보니까 그냥 대자연,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무의미해져버리는 거예요.
별이 왜 빛나는지, 해가 왜 빛나는지 달이 왜 공중에 떠 있는지, 왜 가라앉지 않고 지구를 도는지, 나사(미우주항공국)의 직원들에게 물어보세요. 아무 이유도 없어요. 그냥 그것들이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그것들이 그냥 그 자리에 있다는 거예요. 왜 있는가, 그런 것은 나는 모르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달이 왜 있는지, 별이 왜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저게 달이다, 저게 별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내가 왜 살아 있어서 달이니 별이니 그 이름을 짓는 이유를 본인이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인간들은 자기의 불편한 것만 생각합니다. 불편한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뭔가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없을까, 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래서 지어낸 것이 천국이고 지옥이고 하나님이라는 것을 지어낸 겁니다. 누구 좋으라고? 자기가 납득이 되니까 자기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에는 자기를 싫어하는, 자기를 저주하는 사람은 천국가면 안돼요.
왜, 천국은 내 천국이니까. 그런데 저쪽은 자기천국 따로 있어요. 모든 인간은 자기로부터 모든 생각이 출발하는 겁니다. 서핑이라는 스포츠가 있습니다. 작은 보드를 타고 파도타기를 하는 거예요. 그 보드위에 올라서서 파도를 타면서 묘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천국이 저기 있다면 인간은 자기가 만든 보드 위에 배를 깔고 저 수평선 넘어 천국까지 가려고 시도합니다.
그게 자기중심의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밑에 깔린 이 보드는 결코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에요. 자기가 연구한 겁니다. 철학이고 신학이고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인간은 하나님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어요.
너희들이 개인이든 민족이든 신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지금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 것들은 다 가짜고 엉터리고 진짜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무슨 언약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을 통해서만 자기를 계시하는 겁니다. 단 이스라엘도 인간이고 블레셋같은 이방민족도 인간이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을 만들어서 ‘지금은 고생스럽게 살지만 죽고 나서는 신의 나라에 들어가겠다.’라는 이것은 누구나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에요.
심지어 교회 안다니는 사람도 그런 아이디어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이 누구에게서 나온 것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서 나온 겁니다. 인간이 그렇게 신을 만들 줄 알아요. 잘 만듭니다. 그리고 그 신에게 다가가는 방법이라 하는 것은 자기 행함을 얹어서 열심히 노를 젓지요.
아무것도 안하면 구원 못 받는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하는데 구원받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인간이 만들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제시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21절에서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 앞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찐대.”라고 되어 있어요. 말이 복잡하게 되어 있는데 정리정돈하면 이렇습니다. ‘갑자기 낮과 밤이 없어지고 해와 달이 없어지면 너희가 놀라겠지?’ ‘예, 놀라겠습니다.’ ‘그렇게 획기적이고 놀랄 일이 있으면 다윗에게 주신 약속도 깨질지 모르겠지만 지금 네가 아무리 봐도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밤이 있고 낮이 있고, 그것은 전혀 변할 기미가 없지?’ ‘예, 전혀 변할 기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자도, 다윗의 약속을 통해서만 구원자가 오는 것도 변함이 없다.’ 그런 뜻입니다.
저것이 깨어지는 일이 있을 수 없다면 내가 다윗에게 준 ‘메시아를 보낸다.’ 하는 것도 필이 이루어질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해는 왜 만들어 놓았고 별은 왜 만들어놓았는가, 그것은 다윗의 자손이 메시아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달이 있고 별이 있고 해가 있는 겁니다. 왜, 그것들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달아, 달아! 너 꼴 보기 싫다. 꺼져라.’ 하면 달이 꺼집니까? 그런 발언은 누가 할 수 있는가,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천지창조가 연결되어 있어요. 그 천지창조, 해와 달과 별 가운데 따로 만들어놓은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을 만들어놓았거든요.
인간도 다윗자손과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끊어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왜 있는가, 과학자들은 몰라요, 내가 왜 있는지. 성령이 오면 알게 돼요. 선지자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베드로전서 1장 10절과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이 그들에게 임한 겁니다.
오늘날도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이 임하면 모든 것이 예수님과 엮여져 있다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과 연결되면 여기서 뭐가 없느냐, 나의 구원이라는 것이 없어져요. 나의 구원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나의 구원이라는 생각이 언제 있느냐하면, 옛날에 서핑보드 타듯이 그 보드위에 배 깔고 자기 잘남, 자기 행함을 누적시켜 실어서 내 쪽에서 천국가려고 할 경우에나 자기구원이 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오고난 뒤에는 예수님의 구원밖에는 없어요. 나의 구원은 없습니다.
왜냐,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알려준 성경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그 취지가 우리에게 그대로 남아 있어야 돼요. 계속 우리는 추방됨이 마땅함이 있어야 돼요. 추방된 것은 잘못이다,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주여, 제가 이런 행동 하는 것 보니 추방되어도 쌉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마땅히 추방되어도 쌉니다. 성령 받아서 주의 증인되었다고 까부는 것을 보니 이것은 추방되어도 쌉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복음 전한다고 돌아다닌다고 까불거리는 이것도 마땅히 추방되어야 쌉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이 될까를 생각한다는 거예요. 복음 실컷 전해 놓고 내가 전한 그 복음이 나를 구원해야지 복음전한 나의 행위가 나를 구원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의 구원을 생각하게 되면 예수님과 엮여있는 것이 내 중심으로 끊어져 버려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님중심의 언약이 아니고 갑자기 내 중심 언약으로 쏠리게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내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한 것이 돼요. 오늘 본문에서 낮과 밤은 다윗의 언약, 다윗의 자손을 위해서 배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왜 유다백성들은 모르느냐, 하는 거예요. 모르니까 멸망당해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무리한 요구를 하신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서는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몰랐으니까 쫓겨나고 몰랐으니까 멸망당하지요. 주께서는 유다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멸망당한 이유를 대는데 그 이유가 뭐냐, 황당무계합니다. 하늘의 별과 달이 장차 오실 메시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왜 네가 믿지 않았느냐, 이렇게 나오시더라는 말이지요.
그동안 그들이 그것을 못 믿었던 것은 하나님이 자기구원중심으로 연관되었다고 생각한 니다. 해와 달이 다 자기 때문에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자기가 메시아가 아닌데, 자기가 다윗의 자손이 아닌데 자기가 구원되어야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유다나라가 그런 오해를 하게 된 것이 주님께서 그런 언약을 주니까, 언약백성이라고 하니까 자기들이 언약 백성인줄 아는 거예요.
‘너희는 나의 언약백성이다.’ 할 때 그 말을 듣고, 그 율법이 들어오면서 자기속에 잠자고 있던 죄가 마중을 나온 겁니다. ‘그렇지! 하나님은 내 구원중심이지. 그렇지 이 말씀 들으면 구원받지.’ 하고 평소에 잠자고 있던 우상적인 요소가 율법과 만나면서 ‘이것 지켰다. 저것 지켰다.’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 3장에서 ‘율법에 속했다, 율법 아래 있다 하는 것은, 네가 율법 지키면 의롭다, 가 아니라 저주 아래 있다, 를 통보한다.’ 하는 거예요. 뮤슨 말이냐,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너희들은 이미 심판가운데 있는 겁니다. 심판 가운데서 인간들은 자꾸 죄를 안 지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언약백성이다. 우리는 모세율법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수한 민족이라고 여겨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었다.’ 이렇게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심판받았기 때문에 죄가 나온 것이지 죄를 지어서, 율법을 어겨서 심판받는 것은 아니에요. 에덴동산 쫓겨날 때부터 이미 심판 속에 있는 겁니다.
심판 속에 있으면 나올 것은 죄밖에 없지요. 왜, 그래야 심판아래 가두어둔, 율법아래 가두어둔, 저주아래 가두어둔, 주님의 말씀의 취지가, 냄새(모습)가 막 풍겨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의인이 없고 하나도 없다.’는 말은 그냥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줘서 왜 그 말씀이 타당한 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하늘나라 천사가 메가폰 들고 ‘여기 죄인밖에 없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 우리는 ‘말로만?’ 이렇게 하거든요. 그래서 율법 주니까 그것을 지킨다고 난리가 났어요. ‘우리는 언약백성이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래서 이 말씀 지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의로운 행위라고 인정해줄 거야.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하기에 이것을 의롭다고 할 것이다.’
난리 났어요. 평소의 자기행세, 자기구원밖에 모르는, 모든 것을 자기구원중심으로 생각하는 그 본색들이 난리가 났어요. 막 일어나는 거예요. 꼭 라면 끓이는 것 같아요. 보글보글! 교인 열 명이 있으면 열 명이 다 자기 잘났어요. 백 명이 있으면 백 명이 다 자기 잘났어요. ‘성경 말씀 봐라. 이 말씀은 나한테 해당되는 것이다. 나 이 말씀 지켰다.’ 보글보글, 난리가 났어요.
그것을 선배들이 했습니까? 누가요? 유다나라 선배들이 그 짓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8절에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주님께서 이 세상에 떴다 할 때부터 이미 이 세상 자체가 어두움이 되어 있어요. 이 중에 누가 어둠이 있다가 아니고 전부가 다 어두움이에요.
전부 다 어두움인데 그 중에서 빛의 자녀를 만들기 위해서 온 거예요. 어둡지 않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어두운 자중에서 구원받는 겁니다. 이미 심판 속에서 구원받아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어둠속에서 심판받아야 마땅한 자가 빛 때문에 구원받게 되면 그 사람은 비로소 주님과 같은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자기 자리를 봅니다.
‘아, 다 어두움이었구나. 나는 이 중에서 착한 사람 따로 있고 죄인이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다 어두움이었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언약이라 하는 것은 출발점이 심판부터 출발합니다. 심판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어디 있는가, 나납과 아비후가 성소에 들어갈 때 제단에서 나온 불로 지펴야 되는데 제단불로 하지 않고 엉뚱한 불로 하다가 죽었거든요.
그러면 제단이 뭐냐 하면, 심판받아 마땅함을 보여주는 것이 제단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천사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제단에서 나오는 숯불 가지고 입을 지졌지요. 그 숯불은 제단에서 나온 숯불이고 그 지져진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들은 곧 살아서 움직이는 제단입니다. 이제는 심판이 움직이는 거예요.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심판이 실시되는 거예요. 다 잘려버려요.
십분의 일이 남아도 다 잘리고 그루터기만 남아도 다 잘려버려요. 그 그루터기는 인간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처녀가 아들을 낳으면 그것이 그루터기가 되는 거예요. 마치 이사야의 아들 하나 나오듯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는 그것이 유일한 그루터기에요.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언약이라 하는 것은 심판에 둘러싸여 있어요. 꼭 블랙홀 같아요. 그 안에서 시커매요.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어이, 제자들아!’ ‘나를 따라올래?’ ‘예, 따라가겠습니다.’ ‘맨손으로? 너의 잘난 것으로?’'제가 고백했잖아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그것을 누가 고백했습니까? 베드로가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어요. 베드로고 뭐고 그런 고백을 했다고 해서 구원이 안돼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것이 끝입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면 불교가 돼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예수님)따라 오너라.’ 해요. 그냥 따라오지 말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한 번 졌으면 이제 부활의 새 생명이 있는데 왜 집니까?
계속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거예요. 왜 자기 십자가인가 하면 계속해서 인간의 몸은 썩어야 될 몸이고 썩는 이유는 죄 때문에 썩습니다. 죄가 뭐냐, 내가 행한 것을 끌어 모아서 서핑보드위에 배를 깔고 노저어서 자기가 평소에 육적으로 생각했던 고해 같은 세상 저 수평선 너머 아름다운 천국, 기생들이 노는 그 천국, 아름다운 골프장 같은 잔디밭이 있는 그 천국, 여호와의 증인처럼 또는 이슬람사람들처럼 분수가 넘쳐나는 그 천국, 그것으로 가겠다는 거예요.
그것은 모든 인간이 너무나 이 세상이 고생스럽기 때문에 그런 소망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곤하지만 언젠가는 낙이 있을 것이다. 지금 주의 말씀대로 참고 살면 언젠가는 그 천국에 갈 것이다.’ 이것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모든 종교의 공통점입니다. 기독교도 그렇고 심지어 유대교도 그랬어요. 예수님이 누구에게 죽었느냐하면 가장 인간들이 만들어낸 극상품, 인간이 지어낼 수 있는 최고수준의 하나님의 계시를 집대성해서 이만큼 완벽한 구원은 없다고 하는 그 자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길은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진리는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네가 만드는 하나님을 좀 버려줘. 네가 평소에 생각하는 하나님, 네가 평소에 생각하는 예수 좀 버리라.’ 하는 거죠. 매일 같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와서 질책하고 책망하시는……, 또 예수님 고맙습니다, 해놓고는 자기구원만 생각하는, 나 구원받았다,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목욕탕에 샴푸, 빗, 타월 들고 가는 아줌마가 목욕하면서 주인이 경유 값 오르는 것 걱정하는 것까지 다 생각합니까? ‘목욕비가 올랐구나. 때 확 벗기고 나오자.’ 이렇게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목욕탕을 가도 자기만 생각하지 목욕탕 주인이 경유 값 오른 것 걱정하기 때문에 내가 대충 목욕 끝내고 물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다.
예수 부활하니까 그것도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니까 그것도 자기를 위해서, 생명도 자기를 위해서, 다 자기를 위해서 끌어오는 이것이 성령받기 전에 육적으로 있던 인간들,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에요. 그러면 다윗의 자손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다윗의 자손은 주와 관련되어 있어요.
우리는 하늘나라와 통하는 휴대폰이 없습니다. 시편 110편의 말씀처럼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밑에 둘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있어라.’ 이것이 창세기 3장 15절의 뱀의 머리를 홀로 밟는 일을 하시는 여자의 후손의 기능을 오실 메시아가 하는 겁니다. 그 분이 책임지고 전체를 다해요. 정말 구원되는 사람은 예수님의 증인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나는 죄인중의 괴수니까, 내 안에서 계속해서 죄가 나오니까.
나와도 괜찮지요. 주께서 죄가 나오게 하시는 이유는 그것을 용서하기 위해서 죄를 나오도록 하시는 거예요. 왼쪽으로 굴러도 죄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굴러도 죄가 나오고, 우리 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되기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죄를 끄집어내서 주님의 용서하심이 얼마나 참된 축복이고 고마운 것인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항상 우리를 책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말씀이 오면 우리를 산산조각 낸다고 하지요. 어느 날 내가 말씀 지켰다고 하지만 조금 지나고 보면 그때 그 말씀 지켰다고 하는 것이 참 철없는 짓임을, 그 때는 말씀 지켰다고 까불었는데 그 때 말씀 지켰다고 하는 것이 말씀 지킨 것도 아니고 혼자 착각한 거예요.
말씀 지킨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 지켰습니다.’ 하고 까불었던 그 순간에도 주님의 피가 그 어설프고 철없음을 용서해 주니까 구원한 거예요. 이 철없음이 우리 죽을 때까지 계속 됩니다. ‘그러면 이 땅을 살 때 다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돈이고 뭐가 다 버려야 되는가?’ 주님께서 어떤 일을 일으켜요. 어떤 일을 일으키는가,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가는데 누가 시비를 걸어요. 성전세 받는 인간들이 ‘어이, 스톱! 검문 있겠습니다. 당신들 왜 성전세 안내?’ 하나님께서 일부러 예수님과 제자들 무리에 사건을 일으키죠. ‘왜 성전세를 안내는가?’ 그렇게 되었어요. 제가 운을 떼기를 ‘다 죄니까 돈도 필요 없고 다 필요 없고 백수로 지내면 그만인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인간이 보는 돈과 하나님이 보는 돈이 어떻게 쓰이는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전세를 내라고 한 거예요. 그 때 회계담당이 가룟유다잖아요. ‘어이, 돈 있나?’ ‘돈 없는데요.’ ‘그런데 돈 내라고 난리다.’ 왜 때 맞춰서 돈 내라는 사태가 벌어질까요? 여기서 주님은 출애굽기 30장의 성전세의 의미를 예수님 자신과 엮어 버립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했지요. 모든 세상이 누구와 엮였다고요? 해와 달 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일상들, 안 믿는 사람들과 불교신자들이 범어사 종치는 것도 다 예수님과 엮여져 있어요. 축구, 야구, 비오는 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예수님과 엮여져 있어요. 제자들은 난감한 거예요. 돈은 없고 안주면 잡혀가게 생겼지요.
그때 주님께서 가룟유다 시켜서 미리 돈 준비시켜놓고 ‘준비된 돈 내라.’ 하면 제자들도 이해가 돼요. ‘역시 주님께서는 사전에 돈 준비를 잘 하셨어.’ 하면 좋은데 돈이 없어요. 주님께서 고기를 잡아서 고기 아가리를 벌리니까 딱 성전 세만큼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전세는 누가 누구한테 내야 됩니까?
예수님이 그 성전담당자인 사두개인에게 내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오히려 성전세를 예수님께 바쳐야 되는데 이 세상이 거꾸로 된 세상이잖아요. 거꾸로 된 세상이기에 그것이 어두움이고 거꾸로 된 세상이기에 거기서 구원이 되어야 되고 거꾸로 된 세상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모습으로, 이단의 모습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귀신의 대장의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모든 것이 거꾸로인데 그 거꾸로가 무엇이라고요? 내가 어떻게 행함으로 구원받느냐 하는 그 사고방식이 전부다 거꾸로, 그런 사고방식을 전부 다 거꾸로 꽂아버리는 거예요. ‘너희가 누구한테 성전세를 내는 것이 합당하냐.’라고 하시면서 본인이 물고기 잡아서 아가리 벌려서 성전세 냈어요. 그러면 그 준비된 고기와 그 고기가 동전을 무는 것과 그 모든 것이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어요.
베드로가 고기 잡을 때 고기가 모이지 않는 것도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해서 그대로 하니까 고기가 잡혔어요. 그 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 덕분에 고기 많이 잡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했습니까? 그 때 나온 말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그 때 나는 죄인이라는 말이 누구 때문에 나온 겁니까?
고기가 많이 잡혀서? 아니죠. 고기가 적게 잡혀서? 아니요. 고기문제가 아니고 고기 안 잡힘을 통해서 내가 비로소 예수님 앞에서 죄인 됨을 깨닫는 겁니다. 이것은 고기 안 잡아 본 사람은 몰라요. 베드로가 아니면 다른 사람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이것은 지금 베드로가 나의 구원이 아니고……베드로가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하는 것은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 앞에 서니 비로소 알았습니다. ‘나는 구원받을 자격도 없어요.’
이것이 성령을 통해서 계속 되는 거예요. ‘오직 예수의 피 뿌림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지요. ‘그분이 죽어서 구원된다. 그분이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대신 죽은 것이다.’ 입을 벌려서 예수님의 행함 이야기밖에 안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했습니까? ‘봐라, 나 베드로 예수 잘 믿으니까 이 베드로 인정해 줘.’
베드로가 이런 소리 했습니까? ‘나 베드로는 잘난 사람이잖아. 왜, 예수 잘 믿으니까.’ 이렇게 자기를 정립했습니까? 자기를 정립한 것이 아니고 ‘주님 피 아니면 자기는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죄인이고 내가 구원받고자 한 그것도 죄였으며 주께서 구원시키니까 구원되었지 구원받고자 한 노력도 다 쓸데없는 짓들이었다. 나 그 정도로 지금 죄인이다.’ 그것을 이야기하지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마지막에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를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오해받는 그 이야기가 그대로 다 나오는 거예요. ‘인간들은 봐라, 끝까지, 끝까지, 끝까지 내 세울 것이 없잖아.’ 그것을 증거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를 증거 하는 겁니다. 그렇게 증거 하니까 ‘나 의인 맞잖아. 나 잘났잖아. 나 구원받았잖아. 나 성도잖아.’ 라는 것은 주님 앞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언약이라는 것은 우리가 창세전부터 이미 있던 것이 그대로 현실로 풀어 놓은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그리고 말릴 수도 없는 겁니다. 주께서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책망하는데, 책망 받고 싶어서 성경 보는 것이 아니고 사사건건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내 구원위주로, 내 행함 위주로, 내가 얼마나 잘 났는가 자기 관찰위주로, 자기 소유위주로,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닫게 하는 쪽과 성령을 안 받아서 마귀가 와서 그것을 막아버리는 쪽, 그것은 우리가 손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증거 할 것은 오직 주님밖에 없는데, 우리가 주님만 쳐다보고 있는데 왜 자꾸 우리가 관찰자로서 관찰자의 자리를 따로 마련하고 있는지, 주여, 그러한 행세가 저주받아 마땅하고 심판받아 마땅한 죄의 모습인줄 압니다. 우리가 자신을 평가하지 말고 주님을 평가하지 말고 그저 주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내는 말씀의 위력과 주님의 살아계심과 주님의 용서하심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