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남자를 안은 여자

아빠와 함께 2022. 2. 26. 02:43

남자를 안은 여자

2011년 5월 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21-22

(렘 31:21, 개역)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렘 31:22, 개역)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말씀이 먼저 있고 사람은 나중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말씀 지켜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란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잡혀 가는 그 과정을 말해줍니다. 이방나라에 잡혀가는 그 경로를 잘 표시해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멸망당하는 그 경로가 곧 구원이 되는 경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버림’이 곧 ‘자기 백성 찾아내심’의 과정 중의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갈 때는 인간의 죄의 결과가 가지만 올 때는 그 죄인들을 이끄시는 동행자가 따로 계십니다. 이는 곧 말씀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곧 ‘혈육적인 이스라엘 민족 국가’의 멸망입니다. 이는 곧 인간 혈육의 한계를 나타냅니다. 인간들이 말씀을 지켜봤자 혈육의 집합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구원이란 혈육과 혈육의 만남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20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결코 인간의 힘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구성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구성을 참된 현실로 드러나는 시기가 온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현실 빼놓고서는 모두다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 환상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징벌과 멸망만 주어질 것입니다.

바로 그 흔적을 표시하라는 겁니다. 그리하면 인간의 생각하는 현실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다가오는 것이 곧 구원이란 참된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를 집을 떠났던 그 경로가 자신이 구원되는 경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경로를 통해서 구원자도 등장하고 그 구원자에게 구원받을 자도 등장합니다. 이것은 곧 역사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시작했다가 오늘 본문에서는 드디어 ‘아들을 안는 여자’로 정착이 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겁니다. 즉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았지만 실은 아들은 따로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의 아들은 완전히 소실해버리는 겁니까? 아닙니다. 여인으로 변해져서 아들을 안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2:1-2장에 보면,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적’이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이적이란 이 지상에서 인간들의 안목에서는 현실성없는 이적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여자의 발 아래에 달이 있고 그 머리에 열두 별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자연 세계가 여자와 그리고 여자를 안게 될 아들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인데 이것말고 달리 현실이 없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2:3에 보면 또 다른 기적이 나오는데 거기에 ‘붉은 용’이 나옵니다. 옛 뱀입니다. 이로서 참된 현실이란 인간 대 인간으로 규합해서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필히 악마와 맞닿은 그 지점에서 비로소 피어오르는 겁니다.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세우시는데 거기에 뱀과 대결하는 분이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입니다.

이는 뱀과 첫 번째 접촉자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를 핵심으로 일을 진행해야 악마를 불러낼 연결선이 수립됩니다. 뱀을 불러내야지만 제대로 현실을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악마의 존재를 이끌어내지 못하게 되면 영적 현실을 말하는 것 아니라 기껏 인간의 행함과 행함으로 시도되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고린도후서 11:3-4에 보면,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의 복음 전파는 필히 현실과 환상간의 차이점을 언급하면서 진행됩니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을 언급하지 못하면서 예수, 복음, 성령은 기껏 인간의 옛날 행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 인간이 자기 몸에 이상이 생길 때, 하나님보고 고쳐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인간이 행한 조치란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직접 아담 부부를 찾아오시는 현실에 직면할 때, 그 모든 것은 다 거짓 조치임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조치는 인간의 ‘가리는 조치’를 벗기는 작업부터 시작이 됩니다.

벗기시고 가죽옷을 입힙니다. 벗기는 작업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이것은 복음과 예수와 십자가와 성령을 동원해서 아무리 가려보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마저 환상이라고 벗겨내십니다. 결국 노출되는 것은 애초부터 죄인인 우리 자신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십자가로 달려간다고 말입니다.(빌 3:10) 십자가에 처박히지 않고서는 부활 세계는 국물도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들이 동원하는 그 어떤 성경 구절이나 용어도 주님 보시기에 환상에 불과한 무화과 나뭇잎에 불과하오니 친히 오셔서 늘 벗겨내시고 늘 피를 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9강-렘31장21-22(남자를 안은 여자)11050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21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02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31:21-22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우리가 생각하기는 이 성경말씀을 우리가 지킨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성경을 처음부터 살펴보면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 다 이미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마치 바다위에 나뭇잎이 떠 있으면 나뭇잎은 자기가 헤엄을 친다고 생각하지만 물결이 그 나뭇잎을 받치고 떠내려가도록 하지 않습니까?


말씀이 우리보다 더 크고 우리가 있기 전에 말씀이 먼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코끼리든 사자든 있고 우리 인간도 태어났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평소에 나 먼저 있고 말씀은 나중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잘못된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성질이 더러워서 그래요.


말씀께서는 오늘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이렇게 봐야 될 텐데, 우리는 성경말씀을 지킬 수 있으니까 복을 달라고 자기 자신이 우선이고 언제든지 자기 자신이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되고 말았어요.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말씀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마치 말씀이 나를 위해서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우기고 있습니다. 성경을 천 독 하든 백독을 하든 말씀이 먼저고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우리라는 관계가 먼저 수립이 되어야 성경말씀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처녀 이스라엘아”라고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을 처녀, 남자가 아니고 여자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가 애굽에 내려가서 자기 백성을 데려올 때는 이스라엘은 딸이 아니고 아들로 되어 있어요. 22절에 보면 “패역한 딸아” 딸로 되어 있어요. 왜 아들로 시작했다가 딸로 변화가 되는가, 그 내막이 본문에 나옵니다.


본문은 이렇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에 포로 잡혀 가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갈 때 여러 나무에 표시를 해 놓아라. 가면서 지금 이 길로 접어들었고 왼쪽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간다는 것을 다 표시 해놓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식으로 구원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것은 그 멸망시키는 과정이 구원과정에 하나의 스케줄로 포함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멸망에 처박히게 함으로서 구원을 시키는 겁니다. 자기가 멸망당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구원노선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아, 이래서 내가 멸망당할 수밖에 없구나.’를 아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주어지는데 구원이라는 길이 여기 있다가 하늘로 쑥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처박히고 그 십자가 자리에서 구원되는 겁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바울이 ‘내가 어찌하든 십자가로 달려가는 이유는 그 십자가 자리가 부활로 이어지는 자리.’라는 거예요. 십자가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다른 자리에 서 있으면서 구원된다든지 부활의 세계를 본다는 이것은 환상이고 거짓말입니다. 성경 자체가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 당시에도 고린도교회의 당회장 목사가 새로 왔는데, 당회장인지 뭔지 사도라 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나중에 사도바울이 그 교회의 소식을 들어보니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을 전하는 마귀의 종, 마귀의 일군이 고린도교회의 당회장으로, 설교자로 와 있어요. 그래서 편지를 보내서 ‘그 사람은 마귀의 하수인이다.’라고 하지요.


‘그들이 예수를 이야기해도 다른 예수고 성령을 이야기해도 다른 성령이고 복음도 다른 복음이다. 어떻게 너희들은 마귀의 종을 주의 종 인양 섬기고 있느냐. 한심스럽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도바울만이 참된 주의 종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사도가 없어요.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지만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 ‘나만 가수다.’라는 식입니다.


사도바울 ‘나만 사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지거든요. 거기서 무엇이 궁금하고 무엇을 생각해야 되는가, 예수와 다른 예수의 차이점, 성령과 다른 성령의 차이점, 복음과 다른 복음의 차이점, 그 차이점을 알고 있어야 돼요. 항상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다른 복음을 같이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다른 십자가가 이런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 줘야 돼요. 성령 이야기를 하면서 ‘성령 받아라.’ 하지 말고 ‘다른 성령은 이런 겁니다.’라고 이야기를 해 줘야 된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고 했으니까 복음이라는 용어 가지고 장난치지 않도록 해야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원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들을 멸망시켜서 멸망될 수밖에 없는 자에게서만 구원이라는 것이 실감 있게 현실로 다가오는 겁니다. 자기가 멸망된 사람임을 알지 못하면 구원이란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그저 보너스, 이런 것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원래 이 이스라엘은 혈육 적으로 뭉쳐진 부족국가, 같은 아브라함 혈통끼리 뭉쳐진 민족국가라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 민족이 약속의 땅을 차지했으니까 ‘이 나라는 피로 묶여진, 할례로 묶여진, 대부분이 같은 혈통으로 뭉쳐진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보통 교회도 보면 가족끼리 많이 오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20절의 대목을 제가 읽어드릴 테니 이것이 혈통이나 혈육인지 그것이 아닌지를 여러분이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아버지 안에 예수님 계시고 예수님 안에 너희가 있고 너희 안에 예수님 계시고 예수님 안에 너희가 있고 또 하나님 안에 너희가 있고, 그날에는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혈통이고 혈육입니까? 만약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뭡니까, 라고 물어보면 교회의 문화적인 관습이나 제도, 이런 것을 자꾸 거론해요.


‘교회라 하는 것은 일요일 11시에 예배드리는 것이고 설교시간 끝나면 광고하는 시간이 있고 그 다음에 축도로 끝납니다.’ 자꾸 그런 문화적인, 인간이 해 낼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성경에서 교회라는 것은 예수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예수님 있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혈육으로 될 문제입니까? 베드로가 고백하니까 예수님께서 ‘이것을 네게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했는데요.


적어도 베드로처럼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을 바로 고백하는 사람 같으면, 인간이 할 수 있고 흉내 낼 수 있는 단체로서의 교회와 진짜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안에 있는 것과의 차이점을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학생들에게 시험문제 출제할 때, 저도 해 봤습니다만 항상 신경 쓰는 것이 뭐냐, ‘이 아이가 정답인 것과 정답 아닌 것과의 차이점을 아느냐,’를 보는 거예요.


그래야 양쪽 다를 아니까. 남의 것 베껴서 답 쓰면 안 되잖아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것이 왜 7이 아니고 6인지 그 차이점을 알고 차이점을 발견해야 됩니다. 그냥 친목단체와 교회로 모이는 것과의 차이점이 뭘까, 그 이점을 찾아내야 되고 그것이 느껴져야 됩니다. ‘아,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인간이 세울 수 없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불가능한 단체인데 이것이 생겼구나.’


어디서?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말씀 지켜서 교회 세운 것이 아니고, 교회 만들라는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그 교인 안 되고자 해도, 성도 안 되고자 해도, 천국 안가고자 해도 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존재가 되었구나.’하는 그 차이점을 알아야 돼요. 천국 가려고 애 쓰는 사람과 안 가려도 해도 천국 가고 있는 사람과의 그 차이.


그것이 육과 영의 차이점이지요. 성령을 받지 못한 교회는 자기 혈육중심입니다. 출발점이 자기 몸뚱이기 때문에 자기 복 받으려고 와요. 복 받기 위해서, 내 자식 공부 잘하는 것을 위해서, 자기 혈육을 더 얻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이 있는 사람은 ‘예수 안에 내가 내 안에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내가 내 안에 하나님이…….’


이렇게 성경에 나온 대로 그것을 그대로 만끽하기 위해서 나오면서 ‘나는 옛날에 저런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은혜 주셨는지, 나도 전에는 저런 것을 추구하고 저런 것을 기도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차이에서 나온 은혜에 대해서 새롭게 느껴지는 겁니다. 혈육의 이스라엘은 멸망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멸망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남자가 아니었어요. 남자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면 될 텐데 그 버림받은, 멸망당한 이스라엘 그 아줌마 품에 진짜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을 안게 된다는 것은 말씀의 스케줄, 말씀의 시나리오를 따라서 새롭게 주어지는 겁니다.


자기가 아들이라고 여겼던 것은 아들이 아니고 보자기로 변하고 나중에 보자기로서 다시 올 때 그 보자기 안에 하나님의 진짜 이들이 있을 때 ‘아, 이 분이 메시아구나. 이 분 때문에 내 죄가 사라졌구나. 나는 전에는 말씀 지켜서 의인되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죄밖에 없는 보자기 속에 의인되시는 메시아가 오셔서 그래서 이 의로 말미암아 내가 가뿐하게 천국 들어가는구나.’ 이것을 느끼도록 말씀으로 이끄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경로가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봐야 되겠지요. 다시 말씀드려서 육적인 이스라엘은 멸망하는데 멸망할 때 그게 그냥 사라짐으로 그 멸망이 공연히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멸망하는 그 길을 잘 표시해 놓아라. 왜, 결국 구원받을 때 그 길 따라서 구원될 것이다.’ 자기 힘대로 자기 행함대로 살다가 멸망당한 그들이 자기 행함에 의해서 다시 되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행함은 결국 지옥 갈 수 밖에 없는데 저주받은 지옥의 자리에 있는 자기 백성을 끄집어 낼 때 되돌아오는 것은 홀로 오는 것이 아니고 바로 메시아가 동행해서 그 돌아오는 길을 주께서 이끄실 때 그 때는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구원 받습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되는 거지요.


뉴스에 나왔는데 문경의 어떤 아저씨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어요. 제가 그 뉴스를 보면서 ‘저것이 행함이다.’ 믿음으로 살아야 될 텐데 행함으로 사는 거예요. 자기 신체에 손도 대지 마세요. 손대시는 분 따로 계십니다. 그걸 믿어야 될 텐데 자기 신체에 손대시는 분이 따로 없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의 신체에 손을 대서 구원받은 자의 폼을 내야 되거든요.


그 사람이 양봉하는 사람이라는데 전에 목회를 좀 했답니다. 목회 하다 양봉하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니니까요. 내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행함으로서의 의로 구원받고자 하는 겁니다. 순복음 교회, 그냥 복음이 아니고 순~! 복음입니다, 그 교회에서는 몇 가지 행함을 이야기해서 그것을 갖추면 구원 받은 것으로 해 주겠다는 겁니다.


얼마나 행함입니까? 얼마나 엄청난 행함이에요. 여의도 순복음교회 말고 서울에 있는 영락교회를 비롯한 기존교회는 뭐냐, 선하고 바르게 살면 그것이 구원받은 증거라는 거예요. 이것도 행함이에요. 구원받고 봉사하면 이게 구원받은 행함이라는 겁니다. 그 행함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그 행함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 교회에서 돈 바치고 시간 바쳐 착한 일 하는 행함, 이 행함의 자극이 더 강렬하게 되어서 도수가 높아지면 문경 채석장 가는 거예요. 스스로 십자가 지는 거예요. 이게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그러면 영생을 얻는다.’ 그 사람은 극단적으로 십자가 졌지만 극단적 방법이 아닌 상식적인 방법으로라도 교회에 맹신하고 교회 충성 봉사하는 것, 그것은 행함입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헌금이라도 내고 꽃꽂이라도 하고 봉사라도 해야 자기가 생각하기에 믿는 것 같거든요. 전보다 더 착해지는 것이 있고. 여러분, 다시 이야기합니다.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손댑니다. 멸망하는 것도 말씀대로 멸망했고 멸망의 자리에서 돌아오게 하는 것도 말씀대로 주께서 우리를 돌아오게 하는 겁니다. 그런 동행을 가지고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은 우리에게 지시와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맘속에, 우리 품안에, 우리 영혼 속에 아예 동행, 동석을 해버려요. 아예 깊숙이 침투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끌어 내는 겁니다. 그렇게 이끌어내면 어떤 변화가 있는가, 전에는 육으로 생각했던 모든 세상을 하나님의 영으로서 해석을 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부터 영으로 해석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요한계시록에서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절, 2절입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방금 우리가 본문에서 보았던 ‘여자가 아이를 안으리라.’ 한 예레미야 31장 32절의 말씀이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여자가 있고 아기를 배어 해산하게 되었는데 그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한 큰 붉은 용이 아기를 잡으려고 했고 아기는 붉은 용을 피해서 하늘로 올라가 버렸고 그 아기를 놓친 붉은 용이 화가 나서 나중에 뒷북치듯이 아이를 해산한 여인에게 달려들고 있는데 그 여인이 오늘날 교회, 믿는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이 해석이 얼마나 어려운지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도 나와 있듯이 이것을 하나의 이적으로 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교회라 하는 것은 사람 손으로, 구원이라는 것이 사람 손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 손으로 못하면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성경은 사람 손으로 되지 않는데 이게 현실로 나타나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사건이고 부활 사건이고 그리고 예수 믿는 자들이 등장하는 그 하나하나가 다 기적의 쪼가리들, 십자가를 보여주는 기적의 파편들입니다.


그것을 짜 맞추면 십자가가 등장하는 겁니다. 약간 어렵지만 다시 하게 되면 요한계시록 12장의 말씀에 의하면 여자가 등장하고 아들인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우리 보기에는 우리 인간이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성경에 의하면 모든 것은 기적인데 그 기적은 어떤 의미에서 기적인가하면, 그 중심이 여자와 아들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그것이 진리라고 우리에게 현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의 그 여자를 보면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모든 천지 만물이 그 여자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에요. 왜 그런가, 여자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 여자가 임신한 그 예수님, 처음부터 천지창조가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기에 그 아기예수를 해산하기 위해서 짜이고 벌어질 모든 사태들이 결국 예수님과 여자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말씀도 그렇고 이스라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방금 요한계시록 12장 1절과 2절의 말씀에 그런데 3절에 보면 또 다른 이적이 나타나고 그 다른 이적이란 붉은 용이 나타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옛 뱀이죠. 그렇다면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라고 되어 있거든요.


여기에서 왜 하나님께서는 남자의 후손으로 하여금 뱀을 맞닥뜨리도록 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즉 아담이 있는데 왜 아담의 후손, 남자의 후손으로 뱀을 상대하도록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처음에 하나님께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을 주실 때 뱀, 악마를 끄집어낼 때 악마와 처음에 접촉한 그 사람이 남자가 아니고 여자입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을 거론함으로 말미암아 진정 이 세상의 현실이라는 것이 악마가 등장해서 악마의 활동과 접촉이 되는 그 접촉점에서 모든 현실은 만개, 다 펼쳐져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일반적인 철학, 역사, 학문, 세상 적 과학에서는 악마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악마 없이 인간들끼리의 갈등과 투쟁으로만 하니까 그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고 환상이 되고 말아요.


진정한 현실은 악마가 나와야 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설교하는 그 당회장을 악마의 종이라고 이야기한 것도 그 사람이 미워서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가 그래서 그래요. 우리가 믿고자 하는 그 십자가 복음, 예수님, 성령 이 모든 것은 악마와 연결된 상태에서 설명이 돼야 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보고 우리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설득하고 ‘제발 좀 믿어줘.’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을 잡고 있는 악마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탕자처럼 마귀의 본색 그대로 타락과 멸망의 길로 가 있어야 되지요. 멸망의 길로 가라는 말이지요. 멸망의 길로 가야, 탕자가 되어야 돌아오는 과정 속에서 그게 구원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점잖은 인간아, 훌륭한 인간아, 선비 같은 인간아!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라.’ 이런 식으로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선비에다가 어지신 분들은 바리새인들이 다 독차지 하고 있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오늘날 기독교 만들었다 하면 크리스마스 지키고 부활절 지키고……, 잘 했을 겁니다.


얼마나 훌륭하신 분들입니까? 흔히들 사람들이 자기보고 죄인이라 하는데 그런 사람보고 물어봐야 돼요. ‘당신은 어떤 근거, 어떤 기준에 의해서 당신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합니까?’ ‘나는 성경말씀 이것도 못 지키고 저것도 못 지켰습니다. 그래서 죄인입니다.’ 한다면 ‘그러면 당신은 죄인이 아니고 반성해서 의인될 의인의 여지가 많은 겁니다.’


진정한 죄인이라 하는 것은 마귀를 알고 십자가를 알아서 ‘야, 나는 마귀한테 매여 있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나는 날마다 죽을 수밖에 없지 내 힘으로 뭔가 착한 일을 한다는 시도 자체가 마귀가 은근히 노리고 있구나.’라는 겁니다. 여러분,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 초청한 적 있습니다. ‘하나님, 내 몸이 이상해 졌어요. 어서 와 주세요.’라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먼저 초청하니 하나님께서 ‘무슨 문제가 생겼는데?’라고 한 것이 아니지요.


인간은 자기 몸에 이상이 생기니까 기껏 자기 안에서 처리했어요. 그게 뭐냐, 자기의 수치스러운 것을 가리는 것으로 대충 때우려고 했어요. 그걸로, 자기 수치를 가리는 그것으로 이제는 하나님도 필요 없고 ‘이제 그만 이 정도면 되었다.’ 하는 식이에요. 결국 사람들이 교회 와서 예수 믿고자 하고 천국 가고자 하고 뭘 어떻게 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고 교회 와서 들은풍월로 죄를 어설프게 가리는 것밖에 안돼요.


‘믿습니다.’ 해서 그걸 가리는 거예요. ‘나도 복음 압니다.’ 복음 가지고 가리고, 십자가 가지고 가리고, 언약 가지고 가리고, 피 가지고 가리고, 정작 피 흘리신 분의 신음소리는 들어보지도 못하고 피 흘리신 분의 고통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이만하면 됐지.’ 하고 스스로 자족하고 만족해서 ‘나도 이제 복음 알았으니 구원받는다.’고 스스로 자기 도취에 빠지는 거예요. 자기 수치를 스스로 가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바울 찾아갈 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뭉개버렸어요. 그래서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아주 즐겁게 고백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주께만 범죄 했습니다. 나는 모친에게서 죄인으로 태어났다.’ 이 말은 잘 만 하면 착할 수 있다는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잘만하면 의인될 수 있다는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겁니다.


차라리 예수 믿고 난 뒤에 ‘아, 나는 애초부터 의인될 수가 없었던 존재구나. 애초부터 의인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구나. 나의 행함으로 의인되는 것이 애초부터 성사가 될 수 없는 일이구나.’ 이것을 아주 감격스럽게 현실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것은 마귀의 손아귀에서 내 힘으로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이 세상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자신이 멸망했다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세상을 끊고 세상 유혹을 벗어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하지만 우리 속에 침투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세상을 좋아하고 돈을 좋아하는지를, 구원받게 하시면서 가로수에 적혀 있는 ‘세상 좋아함, 세상에서 출세함,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음, 남에게 기죽기 싫음’ 그러한 요소가 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전부 다 나의 현주소, 나의 본 모습이라는 것을 만끽하면서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되도록 이끄시는 겁니다.


이것도 모르고 예수 피로 일단 자기 수치를 가려놓고 그 다음에 ‘무슨 착한 일을 하면 됩니까? 헌금 낼까요? 교회 봉사할까요?’ 이런 것을 덧붙이면 그것이 구원되는 겁니까? 그 자체가 무화과 나뭇잎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우리 쪽에서 초청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찾아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먼저 찾아오시는데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우리가 가린 그것을 벗기는 겁니다.


벗기고, 입히고! 벗겨보면 ‘아이고 부끄러워라.’ 하지요. 그 때 입히지요. 예수님의 가죽옷 입히고 우리 것은 벗기고, 우리는 입혀놓으면 곧 우리 것이 되면 내 것이 된 그것을 또 벗기고 부끄러워하면 또 입히고, ‘나는 15년 믿었다.’ 그것 확 벗겨버리고, ‘나는 목사다.’ 하면 그 목사 확 벗겨버리고.


다시 구원하는 겁니다. ‘나는 의사다, 판사다, 변호사다, 가수다.’ 이것 아무 소용없어요. 다 벗겨버립니다. 그런 것으로 남에게 기 안 죽으려고 하는 그것, ‘나는 재산가다. 나는 백억을 가졌다.’ 그런 것을 홀랑 다 벗겨버립니다. 오직 주님께서 ‘너 같은 죄인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통스럽고 신음소리 내면서 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이처럼 항상 마귀의 정체를 드러내는, 접촉하는 그런 데에 가요. 그럴 때 우리는 예수를 아는 여자로서 마귀 만나러 가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전도할 때 그렇게 합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이다. 그때에 네가 무슨 말 할지 걱정하지 마라. 네 속에 있는 예수님의 영이, 성령이 말을 할 것이다.’


이 말은 인간 대 인간의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 예수님이 봤던 그 안목, 예수님이 바라본 그 마귀의 세계에 보내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세상 불신자 모두는 그게 대통령이 되었든 국무총리나 국회의원이나 장관이든 다 관계없이 전부 다 뱀입니다. 전부 다 뱀으로 봐야 돼요. 어제 산책 하다가 뱀 한 마리 봤어요. 겁나서 돌로 치려고 가만 보니 누가 벌써 돌로 쳐놓았어요.


뱀이 얼마나 징그럽습니까? 예수 안 믿는 모든 사람은 다 뱀입니다. ‘나는 뱀이다!’ 안 믿는 사람들의 동창회에 한 백 명이 모이면 독사, 살무사 이런 것이 한 백 명 모였다고 보면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도 ‘나는 성공했다.’고 우기는 사람입니다. 백 살을 살든 이백 살을 살든 뱀으로 이백 살을 사신 거예요. 국회의원이 되면 국회의원이 된 뱀입니다.


왜 그걸 봐야 되는가, 바로 우리가 그런 존재였기 때문에. 뱀인 줄 모르고 뱀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주님께서 십자가 들이대면서 우리 안에 예수님을 안게 하는 새로운 실존,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현실로 산다고 우겼지만 성경으로 보니 다 환상이었고 현실은 우리가 늘 뱀과 마주하고 있고 악마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구원될 수 없음을 다시 깨달았고 우리는 죄밖에 지을 수 없으니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과 십자가의 피의 공로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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