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라
2022년 2월 23일 본문 말씀: 미가 2:10-11
(2:10)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2:11) 사람이 만일 허망히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내 입에선 포도주와 소주가 나온다." 신들려서 이런 흰소리나 하며 이 백성의 예언자들은 돌아다닌다.(공동번역)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이 와서 '너희에게 포도주와 독한 술이 철철 넘칠 것이다' 하고 예언하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 백성의 예언자가 될 것이다!(표준새번역) 만약 허풍과 허위에 찬 사람이 속이기를 ‘내가 너희를 위해 포도주와 술에 대해 예언하겠다’ 하면 그가 바로 이 백성에게 적합한 예언자일 것이다.(우리말성경) If a liar and deceiver comes and says, `I will prophesy for you plenty of wine and beer,' he would be just the prophet for this people!(NIV) If a man walking in the spirit and falsehood do lie, saying, I will prophesy unto thee of wine and of strong drink; he shall even be the prophet of this people.(KJV) "If a man walking after wind and falsehood Had told lies [and said], ' I will speak out to you concerning wine and liquor, 'He would be spokesman to this people.(NASB)
“떠나라!” 참된 선지자인 미가 선지자를 말합니다. 인간들의 현재의 삶이란 과거를 재범주화해서 적용하는 식으로 삽니다. 과거를 자꾸만 다른 식으로 해석하면서 지금과 연결시키는 생활을 하는 겁니다. 이러한 태도는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과거를 결코 떠날 수가 없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대중들로부터 호응을 얻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괜찮았던 과거를 이어서 번창시켜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포도주와 독주는 여유있는 시절의 모습을 말하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과거로부터 살았던 그곳을 떠날 이유가 없고 계속 살아도 무방하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사람에게 “떠나라!”는 말은 곧 “죽어라!”는 말과 같습니다. 멀쩡하게 잘∼살고 있는 사람에게 ‘죽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을 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죽어 있는 사람에게 ‘죽어라’고 말하는 것은 바르게 지적해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통보하기를 “떠나라!”고 하신 것은 여기 함께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들은 이미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보면서 자기를 탐구합니다. 같은 인간들을 참고로 해서는 본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계속 거짓 선지자와 거짓 목사들에게 속고 싶은 겁니다. 아니, 스스로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점을 어디서 발견해야 할까요?
현 세상 자리에 살다가 떠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놓으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인간은 진짜 자기를 발견합니다. 죽은 자로서 말입니다. 그런데 “떠나라!”라는 말씀, 그 말씀이 곧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전체 말씀에 포함된 말씀이 됩니다.
“죽어라!”는 말씀이 곧 “너 살아나라”는 명령이 되고 지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택한 백성에게 떠나라고 하시면서 따로 다른 자리, 다른 공간을 마련해두셨습니다. 그곳은 더는 죽음이 없는 곳이요 생명이 기다리는 곳이요 모든 율법이 완성된 채 형성된 공간이요 하나님과 백성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스라엘의 처음 자리는 시내산에 내려오신 하나님과 관련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꼭대기에 자리를 펴시고 그곳으로 모세를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올라가니 그곳에서 나팔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모세가 말하고,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어서 모세에게 대답하셨습니다.”(출 19:19)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즉 율법이 온전히 완성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가능하고 그 인간은 더 이상 죽지 않는 겁니다. 모세는 그 율법을 가지고 산 밑으로 내려옵니다. 그런데 거기서 우상숭배에 한창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게 됩니다.
모세는 화가 나서 돌판을 깨면서, “우상숭배로 인하여 하나님의 계약이 성취될 수 없다”고 했는데, 백성들은 미리 돌판에 쓰인 내용을 본 적도, 알리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 말은 곧 생명이란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아 실천에 옮기므로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편에서 스스로 말씀을 성취해나가는 가운데 생겨난다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율법을 가동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을 제공하는 겁니까? 그것은 기존의 공간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위한’ 시간을 가동시켜 그들의 시간성을 버리게 하는 겁니다. 즉 인간들에게 있어 공간은 기본적인 겁니다. 시간이란, 이 구축된 공간을 계속 미래로 이동시키는 식입니다.
인간들의 공간은 동시성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탁자와 피아노가 동시에 같은 공간이 놓여 질 수가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시간이란 이러한 공간을 계속 미래로 모셔가는 식입니다. 현재가 과거를 늘 재정립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억에는 시내산 그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만남의 장소를 수립하시려고 한 겁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동시적으로 여러 개체들이 함께 놓여 살 수가 있습니다. 각자의 고유성을 유지한 채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일기를 매일 꾸준히 쓰는 것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일기는 일기 쓰는 나의 보존을 기념해서 쓰는 겁니다. 하지만 죽음이 오면 인간은 일기를 멈추게 됩니다. 과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그 과거를 재정립해 줄 미래가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제물의 피를 뿌려, 이스라엘은 죽은 자로 삼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개개인은 피 밑에서 무의미합니다. 동시적인 공간이 사라집니다. 이제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시간입니다. 그 하나님의 기억이 담긴 곳이 율법입니다. 레위기 23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절기가 다 나와 있습니다.
그 절기에 ‘자기를 괴롭게 하는 절기’가 있습니다.(레 23:29) 대속죄일입니다. 이는 7월 달에 있습니다. 7월 1일을 나팔절이라고 합니다.(레 23:24) 나팔절은 하나님의 기억의 시작이요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만나겠다고 제안하신 그 자리 만들기와 관련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란 인간에게 모든 죄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7월 10일난은 대속죄일이 됩니다. 일년 단 한 번에만 대제사장이 하나님 만나려 갑니다. 시내산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막의 제일 깊숙한 은밀한 장소인 지성소로 갑니다. 거기에 천사가 기다리고 있고 천사는 인간의 죄를 씻는 그 장치를 위에서 지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대제사장이 죽고 않고 무사히 나오게 되면, 이는 전 이스라엘의 죄가 일거에 다 하얗게 사해진 것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공간이 됩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성막 밖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괴롭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죄를 다 알지 못합니다.
온전히 스스로 괴롭게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죄라는 것은 순수하게 혼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미정리된 상태로 있다가 자체적으로 상황따라 개발되어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율법의 온전한 상태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지 않고 말씀 스스로 성사시키는 방법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하여금 도로 이방나라에 포로잡혀 가게 하셔서 ‘괴로운 시절’을 보내게 하시는 겁니다. 바로 이런 시간이 인간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 성취를 위해 보내시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해서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공간’에 새로운 백성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생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생명 안에 우리들이 놓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강-미가 2장 10-11절(떠나라)2202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2장 10-11절까지입니다.
미가 2:10-11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찌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사람이 만일 허망히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여기 본문에서 주님께서 ‘그곳을 떠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 미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것입니다. 덩달아, 더불어서 거짓 선지자, 엉터리 선지자의 특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에 대해서 네게 예언하리라, 하는 이것은 지금의 이 풍족한 생활이 계속 되리라, 고 언급하는 그러한 예언자 선지자가 있거든 그 사람이 바로 가짜고 엉터리다,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지자, 미가 선지자는 이곳을 떠나라고 했고, 거짓 선지자는 그곳에 머물러도 이 풍족함이 유지된다, 계속 된다고 생각했고, 그러면 간단하게 정리되지요. “이곳을 떠나라” 하는 것은 진짜 선지자, “이곳에 계속 머물면서 복을 누리자. 성공과 번영을 누리자”고 하면 거짓 선지자, 이걸 오늘날 목사로 바꾸면 “이 세상을 빨리 후딱 떠납시다” 참된 선지자, 참된 목사, “오래오래 복 받아 사세요” 거짓 목사, 잘못된 엉터리 목사,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됩니다.
살아 있는 게 자랑이 아니고 살아 있는 게 영광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이 선지자의 내용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장소와 관련되어 있고 자리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본문 하나 가지고 이 선지자의 내용이 장소와 자리와 관련되어 있다고 이렇게 제가 언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에 보게 되면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길게 여러 군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16절에 보게 되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닌 이 선지자들 그 선지자들 중에서 예레미야 27장 16절에 보면 “내가 또 제사장들과 그 모든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여호와의 집 기구를 이제 바벨론에서 속히 돌려오리라고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이는 그들이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가 약속의 땅을 떠나서 바벨론, 남의 나라에 다시 포로 잡혀 가는 것은 일시적인 일이니까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세요.” 이렇게 하거든 그것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레미야 29장 31, 32절 거기에 거짓 선지자의 대표적인 사람 이름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31절에 “너는 모든 포로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느헬람 사람 스마야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스마야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로 거짓을 믿게 하였도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참석한 적도 없고 천상회의의 그 영을 받은 적도 없는데 그들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게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아주 집중적으로 공략을 한 거예요. 예레미야 23장 32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보냈는데 이상하게 진짜 예언자 예레미야,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참석했던, 하나님의 성신을 받아서 예언했던 그 예언자 옆에는 뭐가 그리 꼬이느냐 하면, 거짓 선지자들이 그렇게 꼬이는 거예요. 비교가 되도록, 어떤 데서 차이가 나는지를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예레미야 선지자나 오늘 본문의 미가 선지자가 나타낸 것은, 너희들이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아요. 그러니까 사람을 볼 때 “당신, 죽은 자요” 그러면 진짜 선지자예요. “아이고, 성공하셨습니다. 국회의원 보좌관 되셨네요.” 그러면 그것은 전부 다 거짓 선지자들이에요. 아무 의미도 없는, 예를 들어 좋은 대학, 서울대학 나오셨습니까, 뭐 어떻게…….
하나님의 선지자는 그런 것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대학 나왔어요? 진짜 묻고 싶어요. 예수님이 수능 몇 점 맞았습니까? 예수님이 연금 얼마 탔는데요? 예수님이 의료보험 얼마 내지요? 차 몇 대 갖고 탔습니까? 누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했습니다. 여우보다 못하고 새보다 못한 처지고 신세입니다.
아무도 갈 수 없는 그곳으로 가시기 위해서 예수님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 만이 살아 있는 인간입니다. 참된 인간이에요. 나머지는 죽은 인간입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이야기할 때 너희들이 다른 나라 같으면 마치 살아 있는 그들과 동급으로 너도 살아 있고 나도 살아 있다, 우리는 아무 문제 없다, 이렇게 되지만 약속의 땅, 하나님이 계시는 약속의 땅에 딱 있을 때에 주님께서 “나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가! 너는 죽은 자야. 나가! 같이 살 수 없어.”
주님이 계시는 그 약속의 땅에 갔을 때에 자기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성공하느냐, 출세하느냐, 그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지금 살아 있는지 아니면 죽은 인간인지를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그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어요. 그 약속의 땅에 있던 사람들의 집단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인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택함을 받은 적이 있던 사람들 이스라엘. 세상 사람들, 이방 나라들은 그저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격려하고 위로하는 데 급급했지만 이스라엘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똑바로, 제대로 그들의 본 모습을 알려줍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너희들은 죽은 자다.” 그냥 죽은 자가 아니라 다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의 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죽은 자가 돼요.
그렇다면 선지자를 보낼 필요가 없지요. 선지자 안 보내도 그들은 죽었으니까. 이방 민족도 죽었고 이스라엘도 죽었고 따라서 굳이 선지자를 보낼 필요가 없는데 선지자를 보내는 이유가 있어요. 죽은 자라고 하는 그 이야기가 그들을 살려내는 겁니다. 죽은 자는 어떻게 사느냐? 말씀으로만 살 수 있어요. 말씀이 없으면 그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살리는 양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죽었다는 그 자체가 미가에 보면 그게 말씀에 포함되는 내용이에요. “너희들은 죽었다.” 쉽게 말해서 “너희는 죽었다, 부터 시작하자. 우리 죽었다, 부터 시작하자. 잘났다, 부터 시작하지 말자. 우리는 이미 죽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죽은 것을 모르는데 네가, 말씀 앞에서 네가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를 네가 알아라.” 그 말이지요.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로 규정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는 더 살 여망은 없어요. 생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택배로 도달했잖아요. 도착했다면 죽었다는 그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죽은 우리를 살리는 그 내용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선지자를 보낸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 자신을 보고 “너희들은 나가! 죽은 자니까 이방 나라에 도로 포로 잡혀 가! 바벨론으로 가!”라고 명령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그들은 고마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감사할 줄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포로 잡혀 가! 다시 노예 생활해.”라는 그 말씀이 비록 포로 잡혀가는 날이 있더라도 그 포로 잡혀 가, 라고 하는 그 말씀이 그들로 하여금 생명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록 포로 잡혀가더라도 생명을 제공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말씀 안에 ‘하나님의 기억’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이라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인간이 현재를 살 때는 그냥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있는 사실을 재범주화 하면서, 그걸 현재로 구성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그래요. 그게 기억이에요.
기억은 과거가 없으면 기억이 생성되지 않아요. 기억이라 하는 것은 과거를 다시 보기, 과거 다시 해석하기, 그게 지금이에요, 지금. 지금 현재 내 삶을 사는 방식입니다. 오늘 시내에 갔다가 급행 1번 버스 타고 돌아오는데 나이가 한 80 넘은 할머니가 자기 가는 행선지도 몰라요.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 운전사에게도 묻고 해요. 그러면서 “옛날 전신전화국 앞에 내려주세요”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전신전화국 옮긴 지가 벌써 몇 년인지 옛날에 옮겼어요. 그러니까 운전사가 “아, 옛날 전신전화국이요.” 그렇게 해서 “두 정거장 더 가서 내리시면 됩니다, 할머니.” 해서 내려줬어요. 자, 전신전화국이라는 것은 그 할머니에게는 과거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전신전화국이 이사 가고 없어요. 없는데 전신전화국에 있던 그 자리, 과거에 있던 자리 가지고 자기가 재해석한 겁니다. 재범주화 시킨 거예요. 삶의 범위를 그렇게 한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70, 80, 90, 죽을 때까지 계속 됩니다. 죽을 때까지. 나이 60이 되어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내가 열 몇 살 때 그때 고모와 삼촌들하고 잘 놀고 지내고 그분들이 날 예뻐했다, 그 이야기하면서 60대 중반을 보내고 있어요. 내 동생이. 계속 과거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너무나 이게 심각한 일은요, 그 과거를 재범주화 하면서, 과거 생각하면서 현재를 구성하는 그것이 어디에 멈추느냐 하면, 죽을 때까지만 하고 그 이후에는 멈춰버립니다.
그러면 그것은 뭐냐? 이 세상은 인간의 기억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억 속에 우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억. 자, 하나님의 기억은 어떤 기억이냐? 간편하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은 특정 장소를 인간과의 만남의 장소로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기억이에요.
그것이 바로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19장 19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시내산이 나오는데요, 그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만났습니다. 만나면서 모세가 빈손으로 산에서 내려오지를 않았어요. 만나고 난 뒤에. 모세가 만나려고 한 게 아니에요. 산 위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모세는 생각도 못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어떤 자리를 만들어요. 만남의 자리를 하나님 쪽에서 만든 거예요.
하나님이 있는 시내산 위에 올라가 보니까 거기서 하나님께서 뭘 준비했어요. 뭘 준비했느냐? 생명의 말씀을 준비하신 겁니다. 그게 바로 율법이에요. 제사법이고 율법이고. 그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40일 동안 모세에게 보이게 하시고 앞으로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청사진, 하나님의 계획, 설계도죠, 하나님과의 만남을 설계하기, 만남의 장소를 만들기, 하나님이 자기 사람과 함께 만날 수 있는 그 영역 만들기를 위하여 모세에게 율법을 주었고, 모세는 그 율법을 그대로 전달해야 될 책임을 지고 산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기억 속에 뭐가 있느냐? 하나님과 함께 40일 동안 있으면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는데 멀쩡했다는 기억,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는 그 기억, 내가 밥이나 먹고 농사지어서 사는 이런 것 말고, 그런 것은 그냥 목숨 유지책이고, 진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살려줄 때 진짜 사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살려준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든 공간에 우리가 거기에 합류해야 진짜 사는 거예요. 그 공간에 합류해요. 그 공간이 공간으로 유지되는 조건이 뭐냐? 율법대로 완전하게 완성이 되는 그 조건 하에 유지가 되는 그 자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마련되는 겁니다.
그게 말씀의 자리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하나님의 계약, 십계명 계약에 보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그들은 이미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어요. 이게 뭘 뜻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미리 보고 우상을 섬긴 게 아니라 그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우상을 섬겼고 자기가 나름대로 여호와 섬기는 이것이 우상이라는 것은 어느 쪽에서만 아는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만 아는 이야기고 거기에 십계명을 들고 왔던, 십계명의 내용을 미리 보았던 모세나 아는 이야기지 백성들은 모르는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뭔가 계약을 할 때는 계약서를 쌍방 간에 다 봐야 계약이 되는데 이것은 한쪽은 계약서 내용을 알려주지도 않고 계약서부터 성급하게 막 찢듯이 모세가 성질 급하게 돌판을 깨버린 거예요. 너희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겼다고, 우상 섬겼다고 모세 쪽에서 일방적으로 치고 들어온 겁니다.
아론과 백성들은 황당한 거예요. ‘뭐? 뭐 어쨌다고?’ 마치 오늘날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십자가 복음 앞에서 ‘뭐! 우리가 뭐 어쨌는데? 직장 다니고 애 키우고 잘 사는데 이게 왜 죄냐?’ 똑같은 거예요. 뭐 이렇게 알려주고 “왜 이렇게 안 살았느냐?” 하고 때리면 우리가 할 말이 없는데 그게 아니에요. 십계명의 내용은 인간이 이미 위반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제시된 계명이에요. 이미 위반하고 있고 그 위반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해서 제공된 계명입니다.
사람들이 ‘원죄’라고 하잖아요. 저는 전부터도 원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냥 죄라고 하든지 죄의 내용이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면 ‘순수한 죄’라고 하는 게 좋아요. 순수한 죄. 순수한 죄라는 것은 뭐냐?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은 여러 가지 죄들이 같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 정리정돈이 안 된 상태의 순수의 죄에요. 정리정돈이 안 된 상태에서 일단 모판 같은 거예요.
거기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다양한 죄들이 계속해서 여기서 개발되어서 나오는 거예요. 저는 그걸 순수한 죄라는 명칭을 붙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죄가 앞으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어떻게 계속해서 이게 다양성 있게 터져 나오는지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을 주시는데 오늘 본문은 네 자리에서 떠나라, 했어요. 네 자리에서 떠나라.
“네 자리는 있을 곳이 못 돼. 떠나버려!” 자리를 떠난다는 말은 공간에서 떠나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공간에서 떠나서 어디로 갈 건데? 바벨론으로 가면 바벨론은 공간 아닙니까? 바벨론도 공간이거든요. 바벨론으로 가면 천국 갑니까? 구원받습니까? 아니다 이 말이지요. 떠나라, 할 때는 기존에 있는 모든 공간에 대해서 이미 이것은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는 계산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말하는 겁니다.
좀 더 어렵게 말씀드릴게요. 자, 공간이라 하는 것은 시간의 요소가 개입될 필요가 없는 곳을 공간이라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여기 피아노 있잖아요. 그리고 여기에 탁자 있잖아요. 이 탁자 있고 피아노 있을 때 같은 시간대에 따로 놓일 수 있는 것, 이게 공간이에요. 피아노는 피아노 자리에 있고 탁자는 탁자 있고 같은 시간대에 따로 동시적으로 놓일 수 있는 것, 이게 공간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공간의 특징은 개별적인 것이 개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 이게 공간의 특성입니다. 그걸 양이라고 할 수 있고 또는 개체가 개체로서 자기 고유의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그러한 현상들, 그게 공간이고 그게 양(量)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뭘 로 바꿔야 되느냐 하면, 이걸 하나의 동질, 질(質)로 바꿀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질로 바꾸려면 이게 하나의 질로 응축이 되어야 돼요.
예를 들면 사람이 일기를 쓴다. 사람이 일기를 쓰는 것은 누굴 위해서 일기를 쓰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기를 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개체라 하는 것은 어디와 연결되어 있느냐 하면, 총체적인 전체와 연결된 개체에요. 개체가 독단적으로 같이 여기 있는 개체는 없다 이 말이지요.
과학적으로 말해서 지구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 있는 달의 인력에 의해서 조수간만의 차이가 나는 것처럼 우주의 모든 것은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게 되어 있어요. 이걸 뉴턴은 만유인력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전 우주는 중력,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하나로 묶어져 있다고 본 거예요. 그걸 수학적으로 표현이 가능한 그런 질서로서 뉴턴이 발견했으니까 대단한 발견이지요.
그런데 이런 발견을 했지만, 그걸 문장으로 풀어보면 ‘개인은 홀로 있지 않고 전체와 관련된 채 개인이다.’ 그런데 개체, 개체, 우기다 보니 전체가 보이지 않잖아요. 그러면 전체가 뭔데? 어떻게 전체가 나타나는데? 그걸 알기 위해서는 개체를 질로 바꿔야 돼요. 이게 하나로 응축이 되어야 됩니다. 응축이 되는 방법은 공간요소를 빼버리고 시간 요소를 가지고 시간 요소를 주입해 버려요. 시간 요소를.
인간으로서 시간이라 하는 것은, 현재 단일집단, 피아노는 피아노 탁자는 탁자대로 이렇게 있으면서 같이 유지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간의 공간을 이렇게 운반하듯이 그걸 그대로 살리면서 운반하는 게 시간이에요. 그러나 시간 요소를 집어넣으면 주님의 시간은 일체 인간의 개체를 전체로 묶기 위해서는 개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어떤 개체를 내세워서 다른 개체를 전부 하나의 개체로 묶기 위해서 다른 개체를 다 죽여버리고 없애버리는 방법을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실시해버린 거예요.
그게 뭐냐? 인간들에게 개체가 있다는 말은 그들에게 뭐가 있다? 이름이 있다는 거예요. 개체에 이름이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단 하나의 이름을 줘버립니다. 그 이름이 뭐냐? 여호와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그러면 인간이 알고 있는 시간 개체중심의, 나 중심의 시간, 일기장 쓰는 거요, 오늘은 뭐 했고 내일은 뭘 하고, 그 일기장 쓰는 그 시간 말고, 이 공간을 살려주고 개체를 인정해주는 그런 시간 말고 주님만 인정하는 새로운 시간이 와 버렸으면 우리 개체는 어떻게 되느냐?
질로 넘어갈 때 그냥 넘어가지 않아요. 죽음으로써 넘어가는 겁니다. 죽음이 뭐냐? 죽음이라 하는 것은 나의 과거를 재해석하는 그 범주가 모조리 다 막혀버린 것을 죽음이라 해요. 어떤 사람이 나이 90 되도록 계속 과거 이야기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죽었다. 그때부터는 과거 생각을 못 하지요. 끊어졌으니까.
나 위주로 지금의 나는, 지금 나 살아가는 것은 과거가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과거 때문에 지금 나는 여기 엄연히 있다, 라는 그 생각을 주님께서는 무산시켜 버리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한 게 다 무용지물로 만드는 겁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한 그것이 소용이 없어요.
왜? 예수님의 기도로 우리는 일찌감치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한 분의 개체 안에 모든 것이 응축되는 거예요. 마치 꽃봉오리 안에 수천 개의 작은 꽃잎들이 그 꽃봉오리 안에 응축되어 있어서 나중에 개화되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양상,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 내 안에 너무도 많은 것, 주님 안에 너무나 많은 일어날 일을 주님께서 시간을 통해서 그걸 바깥으로 하나둘씩 젖혀서 현실화시키는, 현시(顯示), 실재화, 현실화시키는 그 작업을 주께서는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가시는 그 주의 이름이 꽃봉오리처럼 뭉친 그것이 뭐냐? 율법이고 그게 말씀이에요. 사람은 말씀 안에서 사는 겁니다. 말씀의 일부가 되어서 사는 거예요. 내가 단독적으로 말씀을 지켜서 사는 게 아니고 말씀 안이, 말씀이 나를 그 안에 있다는 조건하에 우리를 말씀의 세계로 이끌게 되면 그게 천국이고 그게 구원이에요.
그렇다면 그 말씀, 이제는 공간에서……, 오늘 본문의 미가 선지자가 네 자리에서 떠나라, 하는데 공간에서 떠나면 어디로 가는가? 시간 속에, 말씀이라는 시간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말씀의 시간이라 해도 되고 곧 말씀의 공간이라 해도 되고, 말씀 안에서는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말씀의 공간 또는 말씀의 세계, 말씀 안에 들어 있는 시간성 안에 우리가 포함되는 겁니다. 그 안에서는 말씀이 말씀대로만 진행될 뿐이에요. 그 말씀이 진행될 때 그 모든 지향점은 어디냐? 전에는 일기를 써도 기도를 해도 날 위해서 하다가 말씀 안에서는 전부 다 누굴 위해서? 오실 주님을 위해서 피어나는 꽃봉오리가 바로 주의 율법이고 말씀입니다.
길가는 사람보고 “당신 죽은 사람입니다. 당신이 근육을 움직여서 걸어가도 당신은 죽은 자야.” “누가 그러던데?” “십자가 지신 주님이 당신보고 그렇게 이야기하더라.” “믿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산 거예요. 그 사람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한 과거재범주화를 그만두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자기의 현재를 정당화하는 일을 그만두기 때문에.
그러면 말씀 중에 많이 있지만,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레위기 23장 25절을 보겠습니다. 레위기 23장에 보게 되면 절기에 대해서 나옵니다. 절기가 7월 중심으로 7월을 산정상이라고 한다면 양쪽으로 7월 되기까지의 절기가 있고 7월 이후에 나오는 절기가 있어요. 7월 이후에 나오는 절기를 초막절, 수장절이라고 하고 7월 이전에 나오는 것을 가지고 유월절, 그다음에 무교절, 초실절, 그다음에 같은 날인데 오순절, 칠칠절, 맥추절, 같은 날이에요. 7*7=49나 50이나 같은 거지요. 오순절, 칠칠절, 맥추절이 같은 날.
유월절 지나고 그다음 날부터 무교절입니다. 유월절이 1월 14일, 무교절은 1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 그러면 1월 21일 되지요. 그리고 1월 22일을 초실절이라고 합니다. 유월절, 그리고 일주일 지나고 그다음 날 초실절, 초실절 다음에 일곱 번째 안식일,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바로 칠칠절, 같은 말입니다, 맥추절, 오순절, 그렇게 해요.
그러면 7월 전에 오는 절기들은 곡식의 열매와 관련되어 있어요. 곡식의 열매와. 초실절, 첫 이삭 팰 때, 그때부터 해서 다음에 오순절, 칠칠절, 밀을 드리는 그 날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왜 산 정상을 7월로 잡느냐 하면, 원래 7월 1일을 1월 1일로 보는 거예요. 그 증거가 7월 1일을 나팔절이라고 해요. 나팔 부는 날.
나팔을 분다는 것은 하나님과 모세가 처음 만났던 그 자리, 하나님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자리부터 새로 시작하자. 매년 1년 돌아가면서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기백성과 함께 만남의 장소를 만들어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나타났던 그 시간을 매년 반복해서 기억하게 하시는 거예요.
7월 1일에는 나팔을 붑니다. 레위기 23장 24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다시 말씀드리면 나팔을 분다는 것은 시내산에서 그때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서 처음 만났던 그 날이에요.
그날 모습이 출애굽기 19장 18, 19절에 나옵니다.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그 나팔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에 압도되는 거예요. 아까 제가 인간세계에서는 개체가 중요하다 했지요. 개인이 중요하다 했지요. 모세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 꼭대기에 올려세웠을 때에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진동하는 그 땅과 천사들의 그 합창 소리에 압도되어서 개인 사정, 개인적인 문제, 개체적인 것은 싸그리 다 날라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개인의 시간과 개인의 공간마저 다 날라가 버려요. 이것은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는 그러한 상황과 동일한 상황이에요. 거기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다는 말은 뭐냐? 율법, “Are you ready? 들릴 준비 되어 있습니까? 당신을 버리고, 개체를 버리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그 전체에 합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런 뜻이에요.
그게 데살로니가 4장 16절에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천사장 나팔 소리가 날 때 들리는 것, 휴거 되는 것, 당신은 하나님께 휴거 될 준비되어 있습니까, 하고 마찬가지예요. 같은 뜻이에요. 이게 나팔절이에요.
그러면 시간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그 나팔절 7월 1일부터 시작해서 그 위엄, 10일 동안 그 위엄을 유지하는 거예요. 유지하면서 7월 10일에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나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 7월 10일이 뭐냐? 대속죄일이에요, 대속죄일. 레위기 23장 29절에 보면 “이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스스로 괴롭게 한다. 오늘 이것이 설교의 핵심입니다. 대속죄일을 맞이한다는 것은 이게 조건이거든요. 하나님의 나라에 합류하는데. 만약에 대속죄일이 없으면 “가자, 시내산으로. 다시 돌아가 2천몇 미터 그 높이, 그 장소로 올라가자” 이렇게 할거예요.
그러나 백성들이 힘들게 시내산 꼭대기에 또다시 올라가는 게 아니고 그들의 대표자를 뽑아요. 대표자가 누구냐? 대제사장이고 대제사장이 어디로 가느냐? 산 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성막이 있는데 성막 중에서 아무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제일 끝자리, 제일 은밀한 자리, 제일 깊숙한 자리에 뭐가 있느냐?
거기에 천사가 엎드려서 이렇게 있어요. 언약궤 위에 천사가 양쪽에 엎드려 있는 거예요. 언약궤 속이 궁금해요? 그러면 뚜껑을 살짝 밀어봅시다. 밀어서 보자 그 말입니다. 밀어서 보니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 그리고 깨진 돌판을 대신한 돌판, 아이고, 얼른 닫읍시다. 얼른 닫고 거기에 제사장이 피를 부어야 돼요.
거기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서 만나겠다는 거예요. 너무나 무서운 분이기 때문에 아론의 드레스 밑에 방울이 있어서 방울이 딸랑딸랑, 할 것 같으며 밖에서 듣고 ‘아하, 살아 있구나.’ 그런데 한동안 방울 소리가 안 들린다? ‘죽었구나’ 죽었을 때 어떻게 끄집어내는가? 그쪽을 보지 않고 뒤쪽으로 등을 돌려서 발 잡아서 끌어낸다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자세한 내용은 성경에 안 나오는데 그들은 상상을 해서 뒤로 해서 발을 잡아 끄집어낸다고 해요. 안 그러면 끄집어내는 자기도 죽으니까.
하나님이 율법 안에 계시는 거예요. 율법으로 만든 성막 안에 계시는 겁니다. 거기서 만약에 제사장이 무사히 피를 뿌리는데 성공하고 지성소에서 다시 빠져나올 수 있다면 백성들은 환호를 지르는 거예요. 왜? 자기가 1년간 지은 죄는 깨끗하게 다 씻어져서 ‘빨래 끝!’이에요. 모든 것이 눈처럼 하얘져 버렸어요. 순수한 죄가 뭐로 바꿨느냐? 순수한 의로 바뀌어버렸어요.
그러면 제사장이 그렇게 할 때 그 바깥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뭘 준비해야 되느냐? 레위기 23장 29절에 보면 “스스로 괴롭게”하라는 거예요. 자,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괴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죄가 자기의 아는 것만 죄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현재를 보면서 과거를 생각할 때 과거 체험 중에서 현재 필요한 것들만 골라 하다 보니까 자기가 놓쳐버리고 미처 알지 못하는 그러한 죄의 다른 요소들에 대해서 본인들이 그걸 기억해내지를 못해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죄라 하는 것은요, 그냥 전체를 죄라 하지 않습니다. 그중에서 일부의 죄를 죄라고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초등학교 때 시험문제 낼 때 이런 것이 있잖아요. 일대일로 줄긋기 있잖아요.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가 멜버른이냐 캔버라냐, 그런 거요. 캐나다의 수도가 오타와냐 몬트리올이냐, 이런 것. 갑자기 어렵지요. 미국의 수도가 뉴욕이냐 워싱턴DC냐, 그런 것. 줄을 잘 그어야 돼요. 일본의 수도가 오사카냐 도쿄냐, 그런 것. 한국의 수도가 세종시냐 서울이냐?
우리가 죄라 하는 것은 지금 내가 과거를 순간적으로 재해석해서 만든 그 죄를 일대일로 해서 그걸 죄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로 괴로움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미가를 통해서 “이 세상 네가 있는 자리를 아예, 하나님과 있었다고 여기는 그 약속의 땅을 아예 떠나버려라.” 하는 그 말은, 너희들이 할 수가 없었던 너희 스스로 괴롭게 하라고 한 그 괴로움을 주의 말씀으로 괴롭게 해줄게, 그런 뜻이에요.
아주 알기 쉽게 말할까요? “그만 살아라. 그만 살아. 이제 살 만큼 살았잖아. 얼마만큼 죄를 지었으면 죄지은 것도 기억 못 해, 너희는! 너는 네가 놓쳐버린 죄가 더 많아.” 놓쳐버린 죄가 더 많다고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어떤 집사님이 주식 투자를 했다. 주식 투자 했는데 갑자기 주식값이 올랐어요. ‘아이고, 내가 회사를 잘 선택했구나.’
선택 잘한 게 아닙니다. 임플란트 회사 있지요. 오스람이란 회사에서 직원이 횡령하는 바람에 회사 말아먹어서 그 덕에 집사님 주식값이 오른 거예요. 다른 90퍼센트가 망해줘야 내 쪽 10퍼센트가 먹는 거예요.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한쪽이 망해줘야 한쪽이 혜택을 입는 세상이에요, 이 세상이. 물침대하고 마찬가지예요. 한쪽 눌러줘야 다른 한쪽이 붕 뜨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는 스스로 선택 잘해서 돈 벌어서 내가 살 자격이 있어서 살았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존재한다는 자체가. 주님께서는 주의 말씀으로 시간을 압축해버려요. 시간 압축이라는 말이 어려운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시간이 흐른다. 그다음에 시간이 멈춘다. 언제인가? 꽃봉오리가 확 피어버리면 시간이,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율법이 완성되면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십자가 이후에 시간은 의미가 없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내가 누구냐를 알 때에 내가 모르는 죄가 있었고, 그 모르는 죄로 인하여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어 마땅한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십자가 앞에 나타나야 아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 나타나야. 그 십자가에서 모든 시간은 멈췄고, 주님의 시간이 멈췄다는 말은 내 시간도 십자가 앞에서 멈춘 거예요. 내 시간도!
그게 뭐냐? 시간의 압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종말 이야기할 때 시간이 흐른다, 멈췄다, 그 사이를 아주 콤팩트(compact)하게 압축을 해요. USB로 압축을 해버리면 우리가 그걸 해석할 때는 ‘이거 뭐 언제 오신다는 이야기야? 도대체 가까이 오신다, 속히 오신다, 속히 오신다, 한 지가 벌써 2 천년이 넘었는데!’
주님께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압축하고 확장되는 그것은 이 세상에 따라서 조절되는 겁니다. 시간은 주님을 위하여 시간이 조정되고 압축되고 확장되고 하는 것이지 내가 그걸 계산하라고 시간이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나를 위한 구원은 없어요. 나를 위한 천국도 없고요. 왜? 그럴 자격이 안 되기 때문에. 이미 추방된 입장에서.
그래서 오늘 본문 해결 다 됐어요. 나가! 나가면 어떻게 되는가? 나가면 고생이지요, 뭐. 나가면 자기 자리 없잖아요. 괴롭지요. 그 괴로움이 속죄일이에요. 스스로 괴롭게 할 때 ‘아, 나는 이 자리에 살 이유가 없구나. 왜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게 하지? 내가 죄도 잘 모르면서 왜 이렇게 이 세상에 내 자리가 없지?’
그런데 보니까 자리가 따로 만들어졌어요. 하나님의 언약궤에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피뿌림을 받은 단일집단이 하나님에 의해서 구성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과 자기 백성과 함께 살 수 있는 공간은 지성소였어요. 그러니까 네 자리 말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이뤄버린 그 장소가 있기 때문에,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코로나에 시달리면서 더 살 이유가 없잖아.’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모조리 죽을까요? 자살할까요? 아니요. 그 공간이, 하나님이 함께 있는 공간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미 찾아와 버렸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죽기 전부터 ‘예수 안’이 되고 ‘십자가 안’이 되고, 성령 안에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있는 처소로서 우리가 쓰이고 있는 겁 니다.
끝으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인기 있는 스타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게 대단하나? 뭐 대단해? 노래나 좀 부를 뿐이지 뭐 우리나 같은 보통 인간이지.” 이렇게 하지만 그 연예인을 흉내 내고 모방해서 노래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노래나 연기를 모방하는 사람들을 보다가, 그러니까 예를 들어 “나훈아가 뭘 그렇게 대단해?” 하지만 너훈아 노래 한 번 들어보세요. 너훈아 라든지 나운하, 그중 한 사람은 죽었습니다만, 너훈아 노래 듣다가 진짜 나훈아 노래 들으면 대단하지요.
주님께서는 가짜 이스라엘을 먼저 깔아놓고 진짜 이스라엘이 얼마나 대단하냐? 주께서 이루심이,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이 진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일깨워주는 이것이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뭘 알아야, 죄를 알아야 괴롭게 할 텐데 괴로워하려고 하지만 그 율법을 제대로 못 지키는 우리, 그러나 십자가 안에 있을 때 그 주님의 괴로움이 우리가 당할 괴로움인지 알아서 그 자리가 괴로움의 이 세상의 자리를 일찍부터 교체해서 영원한 천국을 미리 마련하신 그 기쁜 소식으로 인하여 어떤 자리에 있든지 간에 주와 함께 있는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