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용도
2022년 3월 2일 본문 말씀: 미가 2:12-13
(2:12)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2:13)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그냥 ‘남은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곧 인간은 ‘나는 성도다, 혹은 나는 신자다, 혹은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고 규정할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순수 중립의 위치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가졌기에 어떻게하든지 ‘악’에 있지 않고 ‘선’에 자신이 위치에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남은 일은, “내가 왜 살아남을 가치있는 존재이냐”를 확인하고 증명하는 일 뿐입니다. 이 일을 위해 인간들은 그 누구라도 붙들고 물어보고 싶어합니다.
타인에게 잘해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람을 통해서 ‘나의 가치 있게 존재함’을 확인받고 싶어합니다. 인간이 평생을 걸쳐 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이 일 뿐이다. 내가 귀한 존재인 것을 알지만 어느 정도도 귀하며 어느 정도로 대단한지를 확고하게 정립하고 싶은 겁니다. 인생사를 통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통해서 파악하려고 합니다. 진정 ‘내가 누군지’를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함께 하셔서 확인하신 바는, 인간은 결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인데 그 이유는, 인간은 이미 자신을 궁극적 존재로 행세하는 본능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 나오는 말씀, ‘이스라엘의 남은자’라는 개념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당연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포함된다고 자부하기 마련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가지고 그냥 ‘남은 자’로 여깁니다. ‘이스라엘’의 규정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을 만드신 하나님 몫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없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없어진 상태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없어지는 경로는,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의 원형되시는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그들 이스라엘에 의해서 배척받는 경우를 통해서입니다. 이는 곧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께서 양떼 속에 들어오셔서 그 양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거부당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은 조치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양이라고 자부하기에 목자를 그들은 찾고 싶은 겁니다. 양과 목자의 만남이 온전히 성사시키고 싶은 겁니다. 시편 23:1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참된 목자를 자신들이 알아보고 받아들이면 자신들은 참된 양이 되는줄 압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참된 목자 곁으로 다가설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자 찾음이나 목자 구함은 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정하기 위해 필요에 의해서 시도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분명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란 결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모든 시도를 통해서 문재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시작한 일을 자신이 끝내고 싶은 겁니다. ‘나는 나를 천국에 올려보내고 말겠다’는 그 집념의 시작은 본인으로부터 나온 겁니다. 그 정도로 자신은 가치 있는 존재인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진정 자신을 속이는 자는 자기 자신입니다. 본인이 본인에게 속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규정할 자격조차 없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시작한 일을 거절하시는 겁니다. 그 증거가 에스겔 37장에 나옵니다. 에스겔 37:1-3에 보면, “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께서는 ‘인자(人子)’라는 이름을 가진 선지자와 대화합니다.
나머지는 다 뼈들입니다. 그것도 바짝 마른 뼈들이라서 자생적으로 절대로 살아나지 못합니다. 도로 산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즉 인간들은 당연히 뼈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뼈가 살아 있는 이스라엘이 되고 말고는 결코 뼈들의 관심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인자(人子)에게 명령합니다.
이 인자(人子)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신약시대에 등장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곧 장차 목자되시는 분이 양들 사이에 끼어들자, 양들은 하나 둘씩 이 예수님을 배척하기 시작합니다. 결코에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전체 집합에서 예수님은 홀로 잔여로서 그 집합에 끼지 못하고 버림받게 됩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 예수님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3:33-35) 목자는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어떤 양도 이 목자가 가시려는 죽음에 함께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유일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그렇다면 ‘보스라’ 곧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서 부름받은 양떼 속에는 ‘양에게 버림받은 목자’라는 취지가 주도적으로 작용합니다. 이렇게 되면 참된 남은 양은 더는 자신을 위한 용도로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을 바짝 마른 뼈에 불과했기에 도리어 자신이 ‘예수님의 용도’가 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에게 주어진 그 어떤 것 하나라도 자신이 시작하고 자신의 기대한 결과물이 아님을 압니다. 즉 ‘자신이 시작한 일’과 ‘주님께서 시작한 일’이 구분이 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가장 무거운 주님의 저주는 주님께서 ‘보스라’ 곧 ‘양들의 성채; 밖으로 그냥 내어버려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도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확인하려 살아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성도는 실수나 실패나 절망 같은 것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미가 2장 12-13절(주님의 용도)2203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2장 12-13절까지입니다.
미가 2:12-13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여기 ‘남은 자’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그냥 ‘남은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되려면 이스라엘이 깡그리 다 소실되어야 됩니다. 없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어요.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고 규정을 하시는 분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보고 그렇게 규정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나는 성도다’ 그렇게 내가 나를 규정하면 안 돼요.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나는 하나님의 신자다.’ 내가 나를 규정하면 안 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규정했던 그 과오가 결국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습니다. 똑같은 잘못과 실수를 오늘날 신약에 있는, 성도가 아니고 교인들, 교회 교인들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남의 일로 취급하면 안 돼요. 하나님과 함께 있었는데 왜 망했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든든한 분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분의 그 나라가 망했어요. 뭔가 그쪽 인간들도 아담의 족속이고 오늘날 우리도 아담의 족속인데 그들은 우리하고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부터가 무리한 생각이에요.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도 망했다는 말은, 똑같은 현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선배가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대학교 처음 들어가면 선배 있지요. 대학교 들어왔다고 좋다고 공부 안 하고 술 먹고 미팅하고 그렇게 할 때 그들은 결국 세월 지나면 손에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는 것을 선배들이 후배보고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지요. 마찬가지로 이 두꺼운 구약 얼마나 구약이 두껍습니까? 두꺼운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같은 인간들끼리한테는 평가 못 하고 내가 나를 평가 못 해요. 하나님이 평가를 했는데 결국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이 평가 내리기를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이게 바로 구약시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최종 내린 결론입니다.
그러니 교회 좀 다니고 복음 좀 들었다고 해서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뭐 백 프로입니다. 본인이 본인을 속이고 있는 겁니다. 세상 살면서 보증 서서 돈 떼였다, 사기꾼한테 당했다, 남 탓하지 마세요. 천하의 사기꾼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속이는 천하의 사기꾼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굳이 속일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라고 생각하겠지만 인간은, 살아가면서 딱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사람들은 움직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누구냐?’ 하는 거예요. ‘혹시 나를 아시는 분이 있어요?’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아무나 붙들고 묻고 싶은 게 인간입니다. 내가 누군지가 궁금한 거예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약간 더 정확하게 말해서 내가 얼마나 잘났기에 이 땅에서 더 오래 살아야 될 가치가 있는가, 누가 옆에서 호응을 해줄 수 있는 사람, 나 잘났다는 것, 내가 살 만큼 잘났다는 것, 이 땅에 내가 죽으면 안 될 정도로 잘났다는 것을 누가 옆에서 이렇게, 누구라도 좋아요, 친구라도 좋고, 동창이라도 좋고, 아내라도 좋고, 남편이라도 좋고, 자식이라도 좋으니까 제대로 ‘너 이런 인간이야.’라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규정을 옆에서 해주기를 바라면서 사람들은 찾아다닙니다. 나를 알기 위해서 타인을 만나요.
그렇다면 자꾸 남을 만나서 그 사람 의견을 듣는다는 그 말은, 나는 진정 나를 누군지 모른다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물어봤자, 사정해봤자 ‘내가 누굽니까?’ 물어봤자 그들도 그들 자신을 몰라요. 경북의 의성이나 안동 거기에 사투리가 있습니다. 얼른 외지인이 들으면 욕하는 것처럼 들리는 사투리가 있어요.
그 사투리가 뭐냐? ‘지끼는대로 이야기하나?’ 예천 이런데요. ‘지끼는대로’ 지껄이는대로 이야기한다는 뜻입니다. 상당히 상스러운 말 같은데 그쪽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고 욕이 아닙니다. 지끼는대로 이야기한다.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내가 이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남에게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에게 자기평가를 이야기하지요. 서로서로 위로해주고 서로 좋게 하게 되면 서로 좋지 않으냐,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진정 내가 누군지를 제대로 이야기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인간의 끝이 주님의 시작이다.’ 인간의 유한적인, 인간의 모든 유한적인 것, 유한(有限)이란 한계 있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끝’이라는 뜻이지요.
인간의 끝을 알기 위해서 인간은 똑같은 인간 붙들고 묻고, 목사님에게 묻고, 선지자에게 묻고, 제사장에게 묻고, 구약에서도 자꾸 물어요. 만나고 모이고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초막절), 이게 삼대 절기, 이 절기에 왜 모입니까? 모여야 내가 누군지를 알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모이고 집합하는 것,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주 모였어요, 모인다는 말은 유한성의 집합입니다. 유한성이 하나 예외 없이 다 모일 때, 그 모일 때 잔여 남아있는 것, 유한성이 다 모였을 때 남아있는 그 무엇, 그 무엇이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유한성끼리 모였기 때문에 모이다 보니까 ‘다 모였다. 자, 빠진 사람 없지? 번호! 하나, 둘, 셋, 카운트 할까? 다 모였지? 더는 없지?’ 더는 없지, 하는 순간 빠져나간 어떤 분, 그분이 진리에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지만, 그냥 ‘남은 자’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요. 이 차이점이 뭐냐 하면, 그냥 ‘남은 자’라 하면 어떤 오해를 하느냐 하면, 그 구원받기로 ‘남은 자’ 속에는 필히, 반드시 내가 거기에 포함된 그 상태일 때만 그 ‘남은 자’를 진실로 인간들은 그걸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사기꾼이잖아요. 자기가 ‘남은 자’ 바깥에 있다는 생각은 본인이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거짓인 거예요. 일단 나는 챙기고 보자, 나는 일단 좋은 자리 챙기고 그다음에 나를 포함해서 몇몇은 하나님의 유일한 성도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고 생각하기를 원하고 있어요. 나만 그렇게 원합니까? 아닙니다. 다들 그렇게 원하니까 ‘남은 자’가 너무 많아져 버렸어요. 너무 많아진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만 구원한다고 계속 이야기했을 때에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나는 반드시 필수적으로 ‘남은 자’ 리스트에 그 몫에 내가 들어갈 거라 여기면서 ‘남은 자’ 남은 자들, 그 많은 남은 자들이 결국은 예수님 오실 때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 떠났습니다. 제자들마저 ‘남은 자’가 아니었던 거예요.
누가복음 13장 33, 34절에 제가 방금 이야기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예수님 홀로 가신 길이에요.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죽음 속으로 쏙 들어갑니다. 인간들은, 제자들은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채로 산 사람, 괜찮아진 사람, 하나님의 백성들의 집합, 이렇게 구성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죽음 없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괜찮은 살아 있는 집단을 하나님께서 ‘남은 자’라는 이름으로 만드셨겠지, 라고 오해하는 거예요.
이런 오해는 오늘날 모든 교회가 다 그래요. ‘우리 교회는 역사가 150년 되었다. 150년 되었지만 신사참배하지 않고 일제시대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는 저항하면서 남은 자, 그러니까 이 남은 우리가 진정한 이 땅에 유일하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성도가 아닌가? 우상을 섬기지 않는 진짜 말씀대로 전통을 이어온 교회가 아닌가?’ 이러고 있다고요. 재건파가!
그리고 역사가 오래된 교회, 예를 들어 어떤 서울의 오래된 교회가 있다. ‘수많은 다툼과 분쟁이 있었다. 위층에서 목사가 예배드리고 아래층에서 또 다른 목사가 예배드리고 그렇게 해도 기어이 우리는 그 말썽꾸러기들 다 내보내고 지금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진짜 정통적인 신앙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남은 자다.’ 이것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하는 거예요. 자기를 포함하니까요. 자기를 현재 포함하니까.
이 세상에 인간 치고 ‘남은 자’ 없습니다. 성경 구약에 오늘 본문에도 ‘이스라엘 남은 자’ 있으니까 이 ‘이스라엘 남은 자’가 확 욕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야, 하나님께서 다 망해도 남은 자 있대. 야, 이거 획득해야 돼. 여기에 끼어 들어야 돼.’ 끼어들어야 돼, 정도가 아니고 ‘그래, 이 사람이 나야!’ 일방적으로.
이거 무슨 배짱인지, 무슨 자신감인지 아무 근거도 없이 이스라엘 남은 자가 자기 자신이라고. “네가 무슨 배짱으로 여기 ‘이스라엘 남은 자’가 너라고 하느냐?” “내가 믿거든! 내가 이 말씀을 믿습니다!” 하고 믿고 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믿어서 망한 나라에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행함으로 망한 나라가 아니고 믿어서 망한 나라에요. 이스라엘이 믿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여호와를 믿어서, 사울이라는 사람이 여호와를 믿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던 겁니다. 다메섹에서 내려가면서. 서기관들이 여호와를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자, 이 믿음이 문제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내가 누구냐에 대한 그 집착을 스스로 버리지를 못해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내가 누구냐를 물을 자격이 나한테 없어요. ‘내가 누구냐?’ 하는 그 문장 자체가 이건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마귀가 준 거예요. 악마가!
악마가 선악과를 따먹고 ‘네가 신처럼 되리라.’ 했기 때문에 그다음부터 나오는 것은 뭐냐? 신이 되긴 되었는데 내가 어느 정도 신이냐, 어느 정도 나의 활동력과 나의 영향력은 어디까지 미치며 나의 받을 복은 어느 정도로 범위가 넓으냐, 그때부터 그것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본능적으로, 본능적으로 그래요
성경에 나오는 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나라고 집결시키는 그 수작, 그 작업은 인간들이 마귀적 본능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성경의 모든 말씀, 어느 말씀도 예수님이 개입해서야 이루어질 말씀의 성취에요. 성경의 모든 말씀도 예수님이 개입해야 완성되는 말씀이에요.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고 이 인간의 힘으로 말씀 성취될 말씀은 어느 한 구절도 없어요. 없다고요.
미가 2장 12절에 보면 “보스라 양 떼 같게 하며”라고 하는데 ‘보스라’의 뜻이요, 분깃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지만, 보스라가 벽으로 둘러쳐 있다는 뜻이에요. 벽으로 빙 둘러쳐 있다는 겁니다. 보스라, 라는 것은 벽이 있다는 겁니다. 성벽이 있다는 거예요. 성벽은 바깥에 있는 인간이 자력으로 그 성벽 안으로 들어올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그 장소가.
‘보스라’라 하는 것은 지금도 에돔 땅에 보스라 성읍이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보스라’라는 것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계시는 어떤 요새 같은 것, 그걸 여기 ‘보스라’라는 지명으로 설명을 하는 겁니다. 그 ‘남은 자’들을 한 처소에 두는데 그 처소가 보스라고요, 요새고요, 철벽같은 요새고 거기에 “초장의 양 떼 같게 하리니” 했으니까 이것은 거기에 목자가 함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는 것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요한복음 10장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들으면 양들이 오게 되어 있고 목자의 음성을 들고 양들이 보스라에 모이면 그들이 유일하게 ‘남은 자’가 되는데 그 점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를 해요. 문제는 목자가 우리를 부르잖아요. 그리고 이 말씀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래, 나는 양이야. 양이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목자야. 목자를 내가 찾아야지.’ 이런 생각이 절로 날 거예요.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미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여호와를 목자라 했기 때문에 내가 진정 구원받으려면 목자만 잘 만나면 된다는 그런 생각이 누구나 든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목자만 만나면 내가 진정 누구라는 것을 안다는 거지요.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인간은 내가 누구냐, 나는 어떻게 하면 외롭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을 가질 자격조차 애초부터는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없는데 마귀에게 속아서 자꾸 그런 질문을 내부적으로 일어나도록 마귀가 부추긴 거예요.
그것이 마귀적이고, 하나님 뜻이 아니고, 네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과의 만남을 추진을 하신 거예요. 추진을 했는데 그 결과가 뭐냐? 예수님 빼놓고는 다 떠나고 말았어요. 가버렸습니다. 왜 그런가? 이유가 뭐냐?
목자를 찾아가지요. 여호와, 목자, 뭐 나중에 사도바울이 된 그 사울도 여호와를 목자로 생각했지요. 목자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마귀가 가만두지 않습니다. 내부적으로. ‘너는 너를 챙겨야지 뭐하냐? 너는 너부터 챙겨. 왜 목자만 찾고 있어?’ 목자를 찾아가면 찾아갈수록 더욱더 큰 앰프, 마음의 스피커가 쟁쟁 울리게 되어서 결국 우리는 목자를 만나는 것보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시작해서 내가, 내가 끝낸다는 그 의식이 결국은 나를 버리지 못하게 만들어요.
나를 위한, 내가 누구냐를 알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목자를 내가 골라잡게 되어 있습니다. 백 프로 가짜 목자입니다. 왜냐하면 목자는, 진짜 목자는 죽음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3장 33, 34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이 예루살렘이 그냥 예루살렘이 아니지요. 여호와를 목자로 여기는 자들의 집합체지요. ‘여호와를 목자로 보는 사람 다 모여.’ 이 대표성을 갖고 있는 것이 예루살렘이라는 말이지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방금 우리가 보았던 미가 2장 12절 말씀 그대로죠. 목자가 양들을 보스라에 모으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느냐. “그러나 너희는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목자를 보지 못한다. 아니 그들이 목자를 보지 않으려고 했지요. 목자를 버렸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 다 모여!”라고 모든 유한성을 다 집결했는데 집결한 그들 속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버렸어요. 필요치 않다고. 내가 하나님의 백성됨을 규정하는데 예수님은 전혀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그런 발언들을 쏟아냈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밀쳤습니다.
아무도 오늘날 미가 2장 12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 될 자격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양들, 12절에 나오는 보스라의 양 떼같이 주님의 마지막에 남아있는 이 양 떼, 이 양 떼의 성격과 본질을 위해서 목자를, 그 양들이라고 우기는 집합 속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보냈어요. 보냈는데 하나 떠나고, 둘 떠나고, 셋 떠나고, 나중에 제자들마저 다 떠나버려요.
결국 ‘남은 자’가 누구만 남았느냐 하면, 예수님 본인만 남았어요. 그래서 예수님만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돼요. 예수님만 ‘남은 자’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만! 예수님만 성도에요.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다른 사람은 아들 없어요. 다른 사람은 마귀의 종이에요.
그 이유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요, 내가 시작한 일을 내가 마무리 지으려고 해요. 내가 시작한 일. 그러면 인간들이 시작한 일이 뭡니까? 내가 죽어서 천당 가는 일이지요. ‘지금은 고생이지만 죽어서는 호강해야지.’ 이건 누구의 아이디어냐? 내가 내 속에서 낸 아이디어에요. 누구의 가치, 나의 가치를 죽음으로써 끝낼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본질입니다. 이 내 일을 위해서 내 마음에 맞는 목자와 내 마음에 맞는 하나님을 그리고 성경해석을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하겠다는 거예요.
이러한 시도에서 예외 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모든 인간이 이런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예수님 빼놓고 심지어 제자들마저 이런 시도를 했어요. 예수님을 버린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이 자기가 원했던 그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버린 거예요. 제자들 모두 다 뿔뿔이 다 도망친 겁니다. 오죽했으면 이사야 53장에서는 양을 가지고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간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잔뜩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이가 90이 되어도 주위에서 “이제는 아버지, 이제는 그만 원없이 세상 떠도 괜찮습니다.” “내가 왜? 아직도 내가 십 년이나 더 산다.” 고집은 갈수록 더 세지요. 상대성원리에서 빛의 속도로 가면 갈수록 중량이 더 커지는 법칙처럼 인간이 죽을 때가 오면 올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은 더욱더 심한 겁니다. ‘내가 이래도 하늘이 도와주면 내가 천하를 얻는다.’ 이걸 사자성어로 화천대유라고 하는 겁니다.
하늘만 도와주면 천하를 얻는다, 하나님만 함께 할 수 있다면 나는 살 수 있다, 이거 이스라엘 2 천년 역사에 한 번도,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한 번도 이것이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그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나님만 도와주신다면 이 3차대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감람산에서 메시아 올 때 뜰 수 있다, 그러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인데 본성은 고치라 하는 게, 본성한테는 고치라는 말을 하면 안 돼요. 본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왜 하나님이 먼저 그들과 함께 있었지만 왜 그들은 결국은 하나님을 버릴 수밖에 없었는가, 그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주변에 신들을 깔아놨어요. 구약에서는 그걸 우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 현실 속에서 그들은 신들이에요, 신들. 신들을 주변에 깔아놨거든요.
깔아놓으니까 그들은 여호와 신보다 자기보다 더 풍족하게 사는 그 이방 민족의 신들에 대해서 마음을 다 빼앗긴 거예요. ‘아, 우리도 저런 신 섬겼으면 좋겠다.’ 마음이 그쪽에 다 가 있는 거예요. 그 말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상들을 그들에게 배치한 것은 인간들 속에 결코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는 요소가 이스라엘속 에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함께 있을 수 없음을, 하나님 스스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인 네가 어떤 존재냐를 주께서는 증명해 주신 거예요. 네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할 수 없는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자꾸 신을 찾는데 그래서 찾는 신이 뭐냐? 그게 구약에서는 뭐냐?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우상이라는 신과 함께 하고 싶어하는 그 본성이 인간 속에 누구나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아닌 가짜 하나님인데 이상하게 끌리는, 내 맘에 쏙 드는, 화천대유같은, 나를 지켜주는 그런 하나님을 그들은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망할 때 그만한 근거가 되었던 겁니다. “나 외 다른 신을 섬기면 망한다고 했지? 그래, 망해라.” 그래서 망하게 하신 거예요.
인간은 자기 위주고 자기만 최종적으로 챙기기 때문에 결코 부부라도 자식이라도 결코 똑같이 남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궁극적으로 관심 있는 것은, ‘내가 시작한 일 내가 끝까지 끝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목자가 되려면, 진짜 하나님이 ‘남은 자’의 목자가 되려면 목자라는 것을 아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이것은 신약의 성령 받은 성도만 아는 건데요. 내가 시작하지 않은 일이 곧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 땅에서 목숨 없어지기 전에, 이 땅에 있을 때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확연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내가 시작하지 않은 일을 주께서 시작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시작한 일과 내가 시작하지 않은 것의 그 차이성이 있다면, 그것이 구별된다면 여러분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심지어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일도 ‘아, 이것은 내가 원했던 일인데.’ 전부 다 자기가 구분이 안 돼요. ‘내가 원했던 일을 주께서 도와주시려고 이렇게 하시는구나.’ 전부 다 자기가 생각했던 것만 성경에서 다 비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부정하는 성경 말씀으로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이 성경 말씀이, 진짜 하나님이 내가 시작하는 것은 모조리 막고, 망치고, 파괴하고, 부숴버린다는 그 하나님이 얼마나 고마우신 하나님인 것을 몰라요. 이것은 불신자들도 알고 있어요. 이런 노래 가사가 있는데요. 노래 가사를 한번 읽어볼게요.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김민기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입니다. 60세 이상이면 다 아는 노래입니다. 연못이 깨끗했는데 맑은 연못인데, 거기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두 마리가 서로 싸워서 한 마리가 죽었어요. 죽으니까 그 썩은 시체 때문에 연못이 더러워지니까 승리한 남은 붕어도 같이 썩어서 나중에는 둘 다 다 썩어버리고 오랜 세월 뒤에 연못에는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다.
바로 인간은 아무리 사이좋게 사이좋게 하지만 이 ‘사이좋게 지내자.’ 이게 바로 사기 치는 거예요. 이게 자기 본성을 애써 감추는 짓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인간은 뭐냐? 인간은 어떻게 같이 행복하게 사느냐, 가 아니라 ‘내가 누구냐’를 알기 위해서,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 남이 필요한 거예요.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싶어서.
왜? 몸은 이미 신인데 어딜 봐서 신인지를 그걸 증거수집에 나서는 겁니다. 자료수집에 나서는 거지요. 자, 그렇다면 이제 나의 일에서, 내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전환 되어야 되는데 내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전환되려면 여기서 오늘 본문처럼 ‘남은 자’라는 것 남고, 남고, 남는 최후의 ‘남은 자’는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 믿는 사람이 다 집결했는데 그 안에서 그 집결된 사람에 의해서 추방당한 사람이 하나님의 ‘남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 ‘남은 자’ 이름이 구약에 나옵니다. 에스겔 37장에 나옵니다. 1, 2절에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자, 이름이 나옵니다. 3절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체를 완전히 바짝 마른 뼈로 전환 시켜 놓았습니다. 뼈, 바짝 마른 뼈로 전환 시켰기 때문에……, 왜냐하면 말씀과 떠났기 때문에 자기가 살았다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뼈에요. 뼈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이 뼈는 뭐냐? 스스로 다시 살 가능성은 전무에요.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그들의 최후는 뼈에요. 그것도 바짝 마른 뼈에요. 살 여력이 전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광경을 두 분이 보고 있는데 누가 보느냐? 하나님이 그 광경을 보고 있고 그 하나님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뭐냐? 인자야. 그 인자가 신약시대에 누구 이름이냐?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인자야, 이 뼈가 능히 살겠느냐?” 지금 인자로 불리우는 에스겔은 그 뼈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최후를 바라보고 있어요.
그렇다면, 머리가 뛰어난 여러분이 생각하면, 그렇다면 뼈부터 보여준 거예요. 뼈부터 보여주고 만약에 이 뼈들이 살아난다면, 진짜 그럴 가능성은 일체 없지만, 뼈들이 만약에 다시 살아난다면 그 살아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우상에 넘어가지 않은 진짜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되겠고 그들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오직 하나님만 상대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하나님의 명령만 받는 그런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뼈를 통과해서 뼈라는 것에서 인자 되시는 분에 의해서 인자 되시는 분의 말씀 성취와 인자의 영,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났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용도에 대해서, 쓰일 용도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지요.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인간은 내가 어떤 괜찮은 존재인지를 하나님이나 누구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지요. 이럴 때 내 용도는 내가 알아서 결정하고 내가 정하는 거지요.
그런데 뼈가 되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때부터는 내가 나의 용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 주님이지요, 주님이, 하나님 쪽에서 나를 예수님을 위하여, 인자를 위하여 쓰실 용도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수했다든지, 인생 실패했다든지, 인생에 절망한다든지 이런 것은 본인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쓰일 뿐이기 때문에, 자기가 이미 뜨였기 때문에.
그걸 에스겔 37장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3절에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께서 4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이건 에스겔이 대신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이 갈빗대야, 대퇴부야,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렇게 하는 순간 생기가 그들 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게 하니까 6절에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창세기 2장에서 주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집어넣는 그 창조, 그 창조가 새로운, 이제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충분히 보시고 이스라엘이 아무리 하나님과 함께 있었지만 그들은 함께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해 주시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달라는 사람은 다 죽여버리고 일방적으로 예수님에 의해서, 인자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은 이제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세요.’라고 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모든 매사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순간순간이 되는 겁니다.
이럴 때 성령 받아서 이렇게 새사람 된 사람의 특징이 뭐냐? 그 특징을 제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지금 잘 싸우고 잘 버티고 있는 이유는, 자신이 이미 버림받았기에 자신의 것이 이 우크라이나에 하나도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해서 지금부터 싸워서 얻어진 모든 것은 애초에 내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싸울 수 있는 겁니다. 싸우러 나가는 거예요.
뭐든지 내 것이 있다고 한다면요. 우리는 자꾸 양보해요. ‘협상할까? 러시아하고 대충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서 하나라도 얻어내면 고마운 것 아니냐.’ 끝까지 내 것, 내 것, 내 것, 요거라도 감사해야지,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우크라이나는 지금 고맙게도 푸틴이 뭐 한쪽만 잡겠다고 거짓말 해놓고는 나중에 키예프까지 다 쳐들어 왔잖아요.
그러면 이미 자기 것은 없는 거예요. 섬뜩하게도 자기가 평소에 시장 다니던 그 길에 러시아군대, 침략군이 서 있을 때에 ‘아, 이 나라는 이미 내 것이라고는 없구나.’ 내 것이라고는 없다면 그다음부터는 뭐냐? 하나하나가 다 얻어진 것, 하나라도 얻어진 것이면 이것 웬 떡이냐, 웬 은혜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입니다. 전에 나를 지키기 위해서 살았다는 것은 이것은 보스라 성벽 바깥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에요. 세상 모든 인간들이 다 하는 일이에요. ‘내 것 내가 챙겨야지. 내가 시작한 일은 내가 알아서 마무리를 지어야지. 끝내야지. 그래야 내가 잘났음이 증명되기 때문에.’ 이것은요, 뭐 9 0된 노인뿐만 아니고 심지어 어린애들도 마찬가지예요. 애들에게 과자 달라고 해서 과자 주고 난 뒤에 2초 내에 달라고 해보세요. 절대로 안 줍니다.
내 것으로 들어왔으면 이미 내 것이기 때문에 안줍니다. 모든 방향이, 우주와 해와 달과 별과 모든 방향이 나한테 다 내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어요. 인간은 완전히 씨름 선수에요. 샅바 싸움이에요. 그저 잡아당겨서 내 것 만드는데 90 평생을, 모든 정력을 거기에 다 소비합니다. 90 평생을!
요새는 백 세까지, 90도 욕합니다, 백 세로 늘립시다, 백세까지 평생을 내 것 만들기 위해서, 내 것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하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요. 그런 사람이 성경을 보면 “오, ‘남은 자’ ‘이스라엘의 남은 자’ 이거 딱 나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지요. 에스겔 37장의 뼈다귀 된 것도 모르고.
뼈가 되지 아니하면 ‘남은 자’ 안 됩니다. 내가 시작한 일은 성령이 와서 다 꾸겨버리고 부숴버릴 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너는 바짝 마른 뼈 쪼가리’라는 것을 다시 인식시켜 주는 성령님의 친절함이고 애틋함이고 살펴주심입니다.
자, 그렇다면 제가 마지막 말씀드릴 것은, 이제 여러분이 보스라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여러분의 목자가 되셔서 지켜줍니다. 그러면 보스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 신약에서 예수님의 양, 양만 모이는 그 천국 백성 안에 모인 것과 그리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은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 그 차이점을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지금 보스라,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 ‘남은 자’의 집합체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진짜 예수님이 우리 인간들 집합체, 완전체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그 안에 계속 살아나고 있어요. 우리 인간에게 버림받은 분이 도리어 우리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통보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내가 몰랐던 나, ‘내가 잘났다. 나를 지켜야 돼. 나는 구원받아야 돼, 라는 이 모든 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버림받게 했다. 하나님을 배척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그걸 알아야 이제부터는 그분의 용도대로 쓰인다 그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보스라 성벽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관계가 되는데, 하나님의 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최고의 저주가 뭐냐? 그것은 바로 로마서 1장 24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그러니까 하나님께 있어서의 최고의 저주는 뭐냐? 그냥 버려두는 거예요. 버려두는 방법은 뭐냐? 이 십자가 복음, 너희들이 나를 밀쳤다는 것 나를 짓밟았다는 것, 거리에 있는 꽁초 밟듯이 밟아서 나를 내쳤다는 그 사실, 그 사실을 못 알아듣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최고의 저주입니다. 영원히 버림받는 것, 영원히 내버려 두는 거예요. ‘네 마음대로 해라.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이런 이야기 해봐야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듣고 어디가느냐? 열심히 교회 충성하고 있습니다.
아예 절에 가는 사람들 말고요. 교회 안 나오는 그 사람은 기본이고 교회 전체가, 교회 전체가 복음을 거의 못 알아들어요. 그것은 저주받아서 그래요. 자기 챙기려고 교회 와요. 자기 미래 챙기려고 교회 오는 거예요. 어디 보험 하나 들으려고 오는 거예요, 보험. 하나님, 내 것 귀하니까 지켜달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교회 오는 거예요.
‘좀 버려주시옵소서, 나를. 하나님이여, 자꾸 저는 제가 인간이라고 남한테 사랑받고,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는데 이게 하나의 뼉다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좀 알려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필요도 없이 이미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내가 아무것도 실수하거나 실패하거나 절망하거나 나는 누구입니까, 그런 말 할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려주옵소서, 알려주고 할 것도 없이 이미 성령 받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지요. 그 사람만이 보스라, 이미 건짐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지 않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남은 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모든 말씀이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지킨다는 사실을 이제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서 그 주님 온전히 지킨 것 안에 있음을 최고의 행운으로, 복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