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형제 판단

아빠와 함께 2022. 2. 1. 13:14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10-12)

1.“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겔16;63) 에스겔 16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영원한 언약을 세울 것이다.” 이미 용서를 해주고 난 뒤에 “네가 어떤 죄에서 용서받은 줄을 아나? 우리 같이 손잡고 네가 저지른 일을 평생토록 관람해보자. 바로 이 죄거든? 그런데 다 용서되었거든. 우리로 하여금 그 결과가 뭐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이미 용서를 해 놓고 그 용서는 새 언약 안에 뭐가 들었는가를 열어 보니까 용서하고 난 뒤에 새삼스럽게 죄를 지적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필연적으로 몰고 가신다는 겁니다.

 

2.방금 읽은 에스겔 16장 63절을 필연이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 로마서 14장에서 먹어도 된다, 안 먹어도 된다, 신앙 없니 있니, 이것을 저는 우연이라고 합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우연이에요. 사람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모습은 자기는 필연 속에 존재하는 그런 존재이고 싶어 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우연의 덩어리고 우연의 뭉치다. 네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되어가는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에요. 나는 절대로 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런 주장도 사실은 우연에 불과하다는 것을 네가 왜 모르냐는 거예요. 필연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미 용서했다는 그 용서의 사건, 십자가 사건, 새 언약의 사건, 그것만이 필연이고 나머지는 전부 다 우연인 겁니다. 내가 이 집안에서 출생한 것도 우연이고 모든 만남 같은 것이 우연이에요. 이 세상은 서로가 우연으로 다른 우연에 영향을 줘서 그쪽에 변화를 유발시키면서 상호 소통하고 영향을 주면서 누가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그냥 주님의 용서에 의해서 추가적으로 자기의 죄를 까발리고 들추어지는 방식의 인생을 살지 내가 너를 용서한다든지, 이런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주님의 심판대를 언급한 것은 그런 취지입니다. 따라서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면, 예수 믿었고 이미 용서받았기에 때문에 술 먹어도 된다, 이것도 잘 못이고 예수 믿었으니 나는 정신 차리고 평생 술 먹지 않겠다는 이것도 잘 못이고. 경상도 말로 곱표(가위표). 술 먹든 술 안 먹든 뭘 해도 그것이 바로 이미 용서가 완료된 상태에서 되돌아 봤을 때 다시 파악되는 나의 죄가 되는 겁니다.
왜?, 나는 술 먹지 않았습니다, 하는 것을 하나의 절대적, 필연적인 존재로서 자기를 다시 정립해 있다는 그 죄이기에 그렇습니다. “주님이여, 지금까지 저는 술 한 모금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자신은 우연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절대적인 존재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제가 우연이 산에 갔다가 배고푸고 목말라 미칠 때 포도주가 있는 것을 봤다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먹었을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누가 방해를 하느냐 하면, 소위 예수 믿었다는 본인이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고 있어요.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천국에 올라온 사람을 보고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라고 하니까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린양은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가면 어떤 절대적인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어린양의 보좌이고 그게 천국이에요. 어린양의 보좌가 보이지 않는 곳을 사람들은 천국이라고 간주하는 버릇이 있어요. 성경이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괜히 요한계시록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 가야 돼요. 어린양의 보좌에서 뭘 하느냐 하면, 어린양의 피로만 씻어서 천국 가거든요.
이미 용서를 해놓고 이 땅에서 용서된 사람에게 손 잡고 데려가면서 세상 구석구석 보면서 “봐라, 세상 모든 것이 죄악이었잖아.” 그런데 네가 그 죄 속에 같이 미쳐서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세상에 미쳐서 호들갑을 같이 떤 거예요. 뭐가 안 보이니까? 어린양의 보좌가 안 보이니까. 선장이 없어. 자기가 선장노릇을 해야 되고 자기가 항해사 노릇을 해야 되니까 자기 절대성, 자기 잘남, 나는 채소를 안 먹기 때문에 누가 채소를 먹는다면 불신자야, 나처럼 채소도 먹고 고기도 먹지 아니하면 신자 아니야, 라고 자기가 선장노릇 한다는 말이지요.
양쪽 다 뭐가 안 보이냐 하면, 어린양의 보좌, 뭔가 씻어주는 피가 보이지 않는 곳이에요. 로마서 14장에서 사도바울은 상당히 격앙하고 격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전부다 우연이거든요. 모든 만남이 우연이에요. 왜 인간들은 그걸 필연인 것처럼 바라보는 안목이 왜 장착되어 있느냐. 그것은 우리 인간 자체가 재난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자신을 절대화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해를 만드시고 별을 만드시고 바다를 만드시고 뭍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만들었잖아요. 누굴 위해 그걸 만들었습니까? 그걸 인간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천국을 위한 바다고 하나님을 위한 바다다 그 말이지요. 바다가 있고 인간이 있는 것은 전부 다 우연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것이 뭐냐, 절대적인 것은 하나님의 새 언약에서 나와야 돼요. 절대적인 원리와 원칙에서 나오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선악과라는 것은 먼저 만들어 놓고 “네가 따먹는 날에는 죽어.”라고 하시면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뭐가 절대적이냐 하면, 선악과가 있는 것도 절대적이고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는 것도 절대적인 겁니다. 절대는 절대적으로 유지가 되어야 하고 고수가 되어야 하고 확정이 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인간이 죽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예요. “제가 선악과 따먹고 죽어가면서 선과 악을 안다는 자체가 나를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군요. 고맙습니다.” “그게 왜 고마운데?” “내가 절대가 아니고 따먹지 말라는 그 말씀 자체가 절대라는 사실을 내가 이 땅에 살면서 죽어가면서 깨닫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이러면 될 텐데 “왜 저를 죽이십니까?” 하고 호들갑을 떠니까 도대체 누가 절대고 누가 우연이라는 말입니까? 죽으라, 그 말입니다. 그냥 죽어라, 에요. 그 죽으라는 말을 제대로 알아먹고 미소를 띠면서 당황하지 말고 그냥 천천히 살다가 윽, 하고 죽는구나, 끝. 이 모든 것이 절대적인 원칙 속에 그냥 갈 뿐이거든요. 그런데 마귀가 나서서 이렇게 해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절대로 우리를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 맞지요? 그렇지요?” 라고 마귀가 인간을 앞장세워서 인간중심으로 절대를 구성하게 새롭게 확정해 버린 거예요. 나는 채소를 안 먹는다, 절대적이다. “어, 너는 고기를 먹네? 너는 신앙이 아니야.”라고 해 버리면 그것은 마귀가 그렇게 노렸던 그 노림수에 말려든 게 돼요.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줄 너희가 앎이니라.”(엡6;8-9)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네가 사장되고 그 회사 사원되는 것이 전부 다 우연의 산물이라는 거예요. 이게 전부 다 우연이라는 거예요. 내가 사장되고 싶어서 사장 되는 것이 아니고 파도에 밀려서, 세상 파도에 밀리다 보니 사장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사장 되고 싶어도 세파에 시달리다 보니까 우연히 말단 직원이 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와 있던 거예요. 그럴 때 뭐가 절대냐를 찾아보면, “누가 나를 이렇게 했습니까? 사장님도 아니고 종업원도 아니고 자기 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께서 이미 용서되고 난 뒤에 내 죄가 무엇인지를 까발리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사장되게 했고 나로 하여금 내가 진짜 미워하는 그 사장의 말단 직원이 되게 하셨다.”하는 겁니다.
그 자리에 왔을 때 우리는 그 자리에서 평소에 내가 악마와 같이 한통속이 되어서 “사장님이 너무 심하게 굴어요.” 또는 “내가 사람 하나 잘못 들여서 얼마나 애를 먹는지. 장부조작에 돈을 횡령하지 않나. 저런 인간은 내가 때려죽이고 싶다.” 하는 정도로 그 직원하나에 대해서 미워하는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평소에 자기가 그런 사람을 우연히 만나지 않았더라면 미처 내가 내 중심인 것을 몰랐었는데 우연히 그런 직원과 사장, 사장과 직원의 만남을 통해서 나의 죄, 모든 것을 내 절대 중심으로 살았다는 것이 까발려지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이 자기중심이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세상은 자기가 그림을 그리는 대로 그려져야 자기가 행복한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업신여긴다는 말이 나와요. 네가 빠져줘야 내가 구축해 놓은, 내가 행복하다고 확정된 공간에서 네가 방해 놓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누가 너의 공간이래? 누가 너의 시간이래? 네가 지금 네 인생을 고집하고 있는데 네 인생은 네 인생이 아니야.” 그것은 우연이고 절대적인 공간은 뭐냐,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한 인간을 뒤 늦게 손잡고 다니면서 어느 것 하나 죄 아닌 것이 없다고 다시 한 번 용서의 가치, 용서의 의미를 높이기 위해서 주께서 다니고 있는데 너는 손잡고 계시는 주님은 생각 안하고 ‘저 인간은 제 눈에서 좀 꺼져줬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그 주장은 “네가 주야? 네가 뭐야?”라는 식으로 지금 지적하고 계시는 거예요.

3.신앙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절대로 우리가 주인의 자리에 앉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은 거예요. 용서를 받았지 용서를 해 달라고 해서 용서를 소유한 것이 아니에요. 용서를 소유한 내가 된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용서라는 그 사랑을 늘 얻어맞는 자리에 와 있어요. 용서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인이고 우리는 항상 용서가 되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그 용서가 되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항상 죄가 있는 자리에 있어야 저쪽에서 용서가 이쪽으로 날라 오잖아요.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롬14;14-15)라는 이 말씀을 했습니다.
오해하는 해석  “그거 봐라. 내 말이 맞잖아.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먹어도 되잖아. 그런데 왜 너는 ‘고기도 못 먹겠다. 나는 채소만 고집한다.’ 하느냐.? 다이어트 하냐? 그러니까 믿음 없다는 소리와 합치되는 것이고 합당한 거다.” 
올바른 해석  주 안에서는 다 같이 용서받는 입장에 있기에 어떤 사람도 그 주 안에 있는 원칙을 자기한테 집어넣어서 자기를 절대화 시킬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전혀 우리는 이렇게 해라, 하는 해답을 전혀 얻을 수가 없고 결론을 내리려니 결론을 내릴 수가 전혀 없게 되었어요. “이 본문을 통해서 사도바울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지요.
로마서 14장11절에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아직은 저로 하여금 채소만 먹게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이여, 저에게는 채소도 먹어도 되고 고기도 먹어도 된다고 그렇게 시켰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살아가시라는 말입니다. “아직은 술 먹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해서 그렇게 살게 하셨습니다.”라고 직고하라는 그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제가 된다는 그 말입니다.  
사람은 자꾸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면서 그걸 주님, 특정목사, 복음 아는 목사를 집어넣는 경향들이 있는데 ‘나는 이제는 술 먹어도 죄가 아니고 마음 놓고 술 먹어도 된다.’ 하는 그 자체가 형제를 자빠트리는 일이 된다는 말이지요.
바로 주님을 보고 해야 할 이야기를, 자랑도 아닌 것을, 그게 무슨 자랑입니까, 그걸 형제를 경유해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기가 절대적이 돼요. 술 먹기 싫어라 하는데 우연히, 우연히 술을 한 잔 먹은 것이 결코 우리로 하여금 천국 지옥을 결정하는 요소는 아니다, 라는 식으로 술을 먹으면 되는데 인간이 우연히 한 잔 먹어놓고는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느냐? ‘술 먹어도 되네?’ 그 다음부터는 술 먹는 공간이 자기의 절대공간, 절대카페가 되는 거예요. 내 공간에는 술 먹어도 되는 공간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게 우연이 아니고 절대가 되어서 자기가 신앙의 기준이 되면 이것은 그야말로 자기부인을 엎어놓고 때리는 것과 똑같이 되는 거예요.
제가 하는 이야기는, 우연히, 우연히 술집에 갔는데 우연히 치맥을 먹었는데, 진짜 우연히 위스키와 폭탄주를 마셨는데, 안 먹으려고 했는데 우연히 손이 갔는데, 안 하려고 했는데 우연히 손이 가서 우연히 손이 그 잔을 들었는데 우연히 그게 목으로 넘어갔거든요. 우연히 넘어가서 우연히 얼굴이 뜨거워지고 벌게지는데, 우연히 비틀거리다가 차 못 몰아서 우연히 대리 불러서 우연히 집에 갔는데 우연히 취중에 떠들다가 잤는지 어쨌는지 우연히 깨보니까 우연히 술을 마셨더라. 그 ‘우연히’만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입니다.
자기 정당성, 이거 먹어도 구원된다, 이런 것 하지 말고 모든 것이 ‘안하려고 했는데.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서 성경말씀 알면서도 우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라고 해야 돼요. ‘내가 이렇게 술을 먹으면 지옥가기에 나는 절대로 술 끊겠습니다.’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술 먹은 적이 있는 형제를 모독하는 것이 되고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고 그것이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우연이고 모든 것이 죄를 들추어내는 것이거든요. 이런 말이 있답니다. 바람을 안 피운 사람은 있어도 바람을 한 번 피운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남자들은 압니다, 무슨 뜻인지.
바람을 한 번도 안 피운 그런 사람은 있어도 한 번 피워놓으면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두 번 세 번 계속 피운다는 그 말이에요. 왜, 자기의 절대공간, 절대시간,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그래요. 세 번을 피우든 네 번을 피우든 이것도 우연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무 제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미치겠다! 항상 말씀 앞에 우리는 어린양의 보좌, 어린양의 보좌가 아니면 여러분은 망해요. 어린양의 피가 보이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지금 엉뚱한 ……, 차리라 세월 호 타고 바다에 빠져야 돼요.
하여튼 어린양의 보좌가 보이는 곳에 가면 여러분은 안전 빵입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 자기 스스로를 부추기고 자기를 절대화시키는 나 자신이 내 구원을 방해하는 하나의 재난처럼, 그것이 바로 죄였구나 하는 것을 되돌아서 깨닫게 하시고 그렇게 이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도바울은 깊이 있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채소 문제, 고기문제 하다가 단번에 심판대를 언급하는 이유가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서 제발 입 좀 다물라, 아까 본 에스겔에서 입을 열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저 모든 것에 이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핑계, 핑계, 변명, 변명, 한평생 변명과 핑계로 된 이런 죄를 이미 용서했기에 ‘아, 내가 핑계 대는 이런 죄가 살아가면서 날마다 나오는구나.’ 주여, 이것도 어린양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용서받은 것에 감사하고 새 언약에 감사하는 바로 그런 모임이 형제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복음이고 뭐고 다 까먹어버리고 같이 호들갑을 떨면서 주께 원망하고 불평하고 어느새 우리가 절대자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악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바다고 세상이어야 되는 것처럼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갔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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