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홀로 살기

아빠와 함께 2021. 10. 21. 08:56

369강-YouTube강의(홀로 살기 이사야 47:8)20211019-이 근호 목사


제369강, 제목은 ‘홀로 산다는 것은’. 홀로 산다는 말을 하게 되면 사람은 더불어 산다고 주장하게 될 겁니다. ‘사람이 혼자 살면 외롭고 쓸쓸해서 못 삽니다. 누구라도 대화상대가 있어야 이 힘든 세상 위로 받고 또 위로 주고... 그 가운데서 식구라는 거, 가족이라는 거 있어줘야 인간은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러나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 말이 있어요. 굉장히 많은 사람이 파티장에 운집하잖아요, 뭐 즐기겠다고. 원 없이 술 먹고 일탈해보겠다고 모이잖아요, 파티장에. 그러나 그 파티장에도 삐에로는 있어요. 울고 있는 삐에로.

위선과 위선의 만남이 너무나 답답하고 그들이 하는 위선의 말을 들어준다는 게 너무 괴로워서 가면 뒤에 숨어서 울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덜 외로운 게 아닙니다. 오히려 외로움이 더 짙을 수가 있어요.

가족이 다들 퇴근해서 TV앞에 있다고 해서 가족이 한마음 되는 게 아니에요. 이상스럽게 인간은 홀로 되고 싶어해요. 뭐 ‘홀로 된다는 것은’ 그런 노래도 있지만... 자꾸 홀로 있고 싶어요. 뭐 하하, 호호 하지만 같이 있다는 것은 사람에게 긴장도를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보통 가장들, 아버지들이 식구들 앞에서 어른인 체 하고 뭐 훈계도 놓지만 한 10분 동안 훈계하고 난 뒤에 ‘가만 있어봐. 나 잠깐 밖에 좀 쉬었다 올게.’ 쉬었다 오는 것은 뭐냐. 담배 피러 가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하느라 지 딴에 힘들었어요. 어른인 체 한다고 품격 지키느라 힘들어가지고 담배 피우고 난 뒤에 담배냄새 팍팍 피우면서 들어와가지고 또 괴롭히죠.

말을 하는 순간 인간은 홀로가 됩니다. 입을 다물고 그냥 듣기만 하면 혼자라는 느낌이 안 드는데 말을 하는 순간 갑자기 자기가 주목을 받게 되고 자기는 남들이 주시하는 남보다 높은 강단 또는 강대상에 강제로 올라와 있는 느낌이 들어요.

직장에서 회의할 때도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끄트머리에 가서 신입, 쫄병한테 ‘네가 의견 이야기해봐.’ 그때 한 1분, 2분 이야기하는 그 순간 자기는 몸둘 바를 모르죠. 군중들 속에 숨어있는 것이 습성화되고 이게 일상화되었는데 ‘어이, 신입이. 네 의견 한번 들어보자, 우리끼리만 이야기했는데. 너도 뭐 좋은 의견 있을 거 아니야?’ 하는 순간, 갑자기 경직되죠.

머리가 하얘지면서 ‘잠깐만요. 좀 쉬었다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건 뭐 어느 교회 기도하는 것처럼. 기도하는데 ‘잠깐 기다려주세요.’하는데 내가 얼마나 감동받았는지요. 저게 바로 성령의 기도다. 비비 꼬는 거 아닙니다.

듣기만 하는 경우에는 수용자이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어도 들려져요. 들려질 때는 뭐 남한테 이야기 안 해도 속으로 막 평가하고 점수 매기고 난리도 아니죠. 그러나 막상 자기가 딱 강단에 서게 되면 주목을 받으면서 홀로 되는 겁니다. 이것이 훅 하고 들어오게 되면 당황스럽죠. 그런데 자기가 말할 기회를 빈번히 가져버리면 자기가 드디어 이제 마귀가 되는 겁니다. 악마가 되는 거죠.

그게 이사야 48장과 40장 뒷부분 쭉 보면 우상이야기가 나오고요. 거기 우상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는 홀로된다는 것이 우상의 특징이에요. 세상에서 자기를 돋보이는 거예요. 나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다, 라는 식으로 우상이 나오는데 그게 이사야 47장 8절에 나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평소에 사람들과 섞여있을 때는 이런 느낌을 못 느껴요. 자기 깊숙이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러나 앞에 강대상에서 ‘당신 의견 이야기해보라. 당신 뜻은 뭡니까?’ 하는 순간, 자신의 깊이 잠복되어 있던 깊이 잠재되어 있던 자기의 본성이 유감없이 나오는 겁니다. 이게 훈련이 안 된 사람은 버벅거리고 못하지만 이걸 자꾸 되풀이해보세요. 지가 대장질해야 속이 시원해요. ‘됐고! 내가 이야기할게요.’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됐고. 이게 이제 한두 번 해본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입만 살아가지고’ 그런 이야기 듣잖아요.

그럼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최고고 ‘나는 나뿐이다. 나는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가 평소에 인간의 깊은 본성처럼 자리 잡은 겁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악과 따먹을 때에 인간의 공통된 본성이에요.

그러면 이사야 45장 15절에 하나님 뜻이 나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스스로 숨어 계시는 분이에요.

숨어 있다는 것은 군중 속에 숨어 있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야기를 해도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식으로 드러내는데 이게 숨어있는 형식이에요, 드러내는데. 나에게 주목하고 나의 말에 호응하도록 하시는 분이 아니고, 너희들은 백날 들어도 나밖에 없고 내가 최고고 나는 나만 행복하고 잘 되면 되고 나만 챙기면 그만이다, 라는 본성으로 장착되어 있는 어떤 인간도 숨어있는 하나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너는 너밖에 모르기 때문에.

나밖에 모른다는 뜻은 뭐냐 하면 나만 안다는 뜻이 아니고 나와 관련된 사람만 내가 챙기고 싶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관련된 식구를 챙길 때 내가 다시 단상에 선 사람이 되기 때문에. 내가 너 챙겨줬잖아. 어려울 때 도와줬잖아. 네가 잘못할 때 내가 용서했잖아. 이 용서가 권력이 돼요, 용서함이.

사람은 착함이 권력이 된다니까요. 착함이 착함으로 소멸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착해버리면 착하게 한 사람에 대해 자기는 갑이 돼요. 그 사람은 나한테 을이 되고. 본성이 뭐냐. 내가 하는 행동이 결국은 나는 나뿐이라는 쪽으로 전부다 의미가 응축되고 집합돼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못 고칩니다, 타고났으니까.

다만 이런 본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할 때 하나님은 왜 숨어계시는지 그 이유를 바로 나 자신에게 찾아야 돼요. 내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고 내 구원, 내 천국, 천당 가는 것만, 내 행복만 챙기기 때문에 주님께서 난 너하고 안 놀아, 하고 숨어 계시는 겁니다.

이것은 성령이 와서 나의 본모습이 나만 챙기는 인간이라는 그것을 죄로서 다 들추어내게 하시는 그 작업을 통해 우리 뜻에 의해서 발각되지 않고 왜 숨어계시는지, 비로소 숨어계시는 하나님과 나밖에 모르는 오만한 나와 연결되면서 그 사이에서 구원이 성사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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