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강-YouTube강의(중심부 누가복음 17:21)20210907-이 근호 목사
제363강, 제목은 ‘중심부’. 사람들은 그 중심부에다가 그럴싸한 것을 자기가 무대 세팅하듯이 설정을 딱 해놓고자 하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그런데 이 교회라는 것이 성경에서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구약 때에 성전이 있었습니다. 성전이 있기 전에 성막이 있었고요. 성막과 같은 단어로 ‘회막’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회막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기 위한 장소가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기 위해서 만든 장소에요. 그러니까 인간 쪽에서는 감당 못하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추잡하고 더러운 인간 속에 온다는 그 자체는 인간에게 재앙이에요, 파멸이고. 거룩과 속됨은 같이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만나겠대요. 그러면 사전에 만나는 장소가 뭔가 정비가 되어야 되고 만나기에 합당한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건 조건이 뭐냐 하면 일단 나는 죄 있는 것들은 안 만난다. 죄 있는 것들은 안 만나지만 나는 내 백성과 만나야 되겠다.
두 가지 조건이 다 합치되어야 돼요. 죄 있는 자는 못 만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왕으로서 자기 백성 만나는 일은 성사가 된다. 그럼 그 중간에 뭐가 있어야 되겠죠. 죄 있는 자가 죽어있다면, 죽어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안에 들어온 자는 이미 죄 있는 자는 죽어있으니까 죄 있는 자가 현장에 없는 셈이 되고요. 그리고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가 있는 겁니다.
이 아이디어는 인간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하나님이 만날 수 있는 그런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설비, 장치를 하늘에서 이미 모세에게 전달하셨고 모세는 땅에 내려와서 그 제작에 나섰습니다. 하나님이 땅에서 인간과 만날 수 있는 그런 설비나 장치, 그러한 공간에 대한 제작.
여기에 여러 가지, 인간세계에는 아무 짝도 쓸데없는 그런 것들이 만들어져요. 언약궤라든지 제사장의 복장이라든지, 출애굽기에 보면 세세하게 그 치수에다 크기, 그 모양, 색깔, 원단 등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만들어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을 위한 설비의 특징은 기구들뿐이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기구를 만들어놓고 ‘기구들뿐’이라는 말은 그 기구이외에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빈 터 같아요, 빈 공간. 공백, 빈 자리.
그래서 회막이나 성막이나 성전의 특징은 중앙이 비어 있어요. 비어있다는 말은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내가 들어갈게요.”라고 손들고 나설 위인은 단 한사람도 존재할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 중앙을 비워놓고 그 주변에 있는 자들은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죽은 자가 그 중앙을 차지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는 무엇이 허락되느냐 하면 인간과 만나기 위해 오신 그 메시아, 언약적인 분을 만날 수 있는 그 기회는 부여받게 돼요. 그러면 기다려야죠. 기다릴 때 누가 오시느냐 하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시는 겁니다.
그 빈 공간에서, 오직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죽음이 있어야 되는데 그 죽음도 아무나 죽는 죽음이 아니고 흠 없는 제물이 반복해서 죽어야 그 공간이 유지가 돼요. 그러면 죽었다는 최종 증거물은 거기다가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피라는 것은 뭔가 죽어야 생겨나는 게 피잖아요. 죽어야 생겨나는 게 피라고요. 피를 자꾸 뿌리는 거예요, 중앙에. 언약궤에다가 피 뿌리고 제사장은 그 제물의 피를 가지고 제단에도 뿌리고 그 회막 들어갈 때 입구, 천으로 만든 입구에 들어갈 때도 뿌려요. 물론 지성소에도 뿌리지만 성소에도 뿌리고 피를 자꾸 뿌립니다. 피를 뿌림으로써 속죄가 될 때 나타나는 결과는 거룩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더러워서 안 받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이 자기가 죽어서 흘리는 피 있잖아요. 그것도 안 받아요. 대신 죽어야 되는데 그 대신 죽어야 될 제물의 특징은 뭐냐? 흠이 없어야 돼요.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흠 없는 것을 받는다는 것, 죄는 안 받는다는 것. 두 번째, 흠 없는 자가 죽어야 된다는 것. 그러니까 첫 번째는 흠이 없어야 된다. 두 번째는 죽어야 된다. 죽어야 됨으로써 결국 흠 없이 죽은 그 제물만 받는 조건이 갖추어질 때 그 조건의 확장으로서 새로운 인간이 성사되어야 돼요, 죽은 인간 말고.
그럼 여기에 메시아는 인간으로 오셔야 되는 거예요. 새로운 인간의 시조로 오셔야 돼요. 죽었다가 하나님께 인정받은 그 분으로 시작되는 자리. 그게 바로 중앙자리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만 중앙자리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죠. 이게 상당히 중요한 겁니다. 중앙자리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만약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또는 목사한테 설교 듣고 ‘주님을 모신 가정은 그게 교회다.’ 라는 얘길 듣고 이제 가정을 교회라고 꾸밀 때, 그 중앙자리에 남편이 들어갈까요, 믿음 좋은 아내가 들어갈까요, 누가 들어갈까요? 아무도 들어가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남편이 남자라고 들어가면 안 되고. 여자는 남편 말을 들어야 된다는 디모데전서 말씀 듣고 자기가 차지하면 안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목사가 중앙에 들어서면 안 됩니다.
그러면 누가복음 17장 21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이게 약간 어려운데요. 어려우면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20절부터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바리새인들은 하늘나라가 어떤 시간적으로 임하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시간적으로, 어떤 시간 가운데 임하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사람들은) 시간도 유지되고 시간 안에서 올 때도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21절에,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여기 있다’란 눈에 보이는 여기 있다, 눈에 보이는 저기 있다, 거기에 메시아가 구세주가 온다. 이것이 아니라 구세주가 오는데 보이지 않는 분이 오게 되면 그 공간은 분명히 보이지 않는 공간을 형성해요.
우리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고 우기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겁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성령 안’이라고 했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 안’이라고 했고 이것을 가지고 ‘주님 안’, ‘예수 안’이라고 한 거예요. 예수 안, 주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같은 이야기입니다.
같은 이야기가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는 뭐라고 표현되어있느냐 하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것을 ‘충만’이라고 했어요. 그득 참, 가득함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득 찼다, 충만하다, 모자람이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뭔가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그득 찬, 가득 찬 공간이 바로 중심부를 차지할 때, 그걸 느낄 때 그 사람이 바로 주의 몸의 지체요, 교회요, 그게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지금. 인간에게 일어난 모든 일, 코로나 사태나 뭐 선풍기 돌아가는 이 모든 사태, 여기 우리가 모인 이것도, 모였다는 것은 구청에는 알리지 마시고, 그득한 분의 조치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에요.
어느 하나도 그 그득함, 충만함, 가득 참에서 누락되고 모자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누린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주님의 한 가운데에 있는, 중심부에 있는 그 그득함이 오늘날 우리를 다루고 있고 살게 만들고 숨 쉬게 만들고 우리를 부리고 우리에게 지시를 내리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