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강-YouTube강의(부끄럽지 않는 일 로마서 1:16)20210907-이 근호 목사
제362강, 제목은 ‘부끄럽지 않은 일’.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몸에 일어난 현상이 부끄러움과 수치라는 겁니다. 과학으로 파악할 수가 없어요. 부끄러움이라 하는 것은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느 대목에 부끄러움이 있는지 이게 파악이 안 되거든요.
왜 그 부끄러움이 일어났는지 다소 감추기 위해 하체에 치마를 입었는데 그것은 옷 의존적이죠, 옷 의존적. 인간이 벌써 누구한테 의존적이었어요. 나설 때 그냥 벗지 못하고 옷을 입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미 의존적이라 하는 것은 자립성, 독자성이 깨어진 겁니다.
그럼 부끄러움이란 여기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이라 하는 것은 결함이 생기는 것, 이게 부끄러운 거예요. 온전하지 못하다는 의식. 내 자체로서 불만족스러운 것. 이게 전부다 부끄러운 현상을 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을 전체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원래 하나님이 만든 존재가 아닌 것, 그 인간이 아닌 것, 그게 부끄러움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부끄럽고 난 뒤에 옷을 만들었잖아요. 이것은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현상이 자기에게 일어났고 인간의 모든 행동의 기저, 그 바닥에서는 부끄러움을 덮고 해소하고 제거하고 그것을 처리하는 본능에 준해서 모든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정리하면 돼요.
거기서 나온 행동이 바로 과학이고, 철학이고, 문학이고, 소설 쓰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의학적으로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더 개발하고, 경제적으로 새로운 상품 거래처를 트기 위해서 열심히 홍보하고 영업하는 행동, 그 바닥에는 부끄러움이 있는 거예요. 결함이 있는 거예요.
옷이라 하는 것은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함 없다’라고 하고 싶어서 자기를 결함 없는 사람으로 조작해내는 그러한 성향이 바닥에 깔려서 모든 행동이 개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다 완전한 사람을 좋아하고 보다 온전한 사람을 찾길 원하죠.
창세기 10장에 보면 그것이 어떤 단어로 되어 있느냐 하면 “당대의 영걸이라”. ‘영웅’이다. 영웅은 나보다 더 온전해 보여요. 나보다 더 완전에 가까이 간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 국가라 하는 것은 온전하고 완전한 영웅중심으로 뭉치게 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국가의 시조이고 가인의 7대손 라멕도 국가 위주로 나갑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서 완전함이라 하는 것은 조화입니다.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방출하는 것. 남성들은 모든 행동이 ‘나는 거침없이 모든 난관을 이긴다.’는 영웅적인 기질을 굉장히 강조해요. 나한테는 어려운 일이란 없다. 나를 믿어라. 내가 이 모든 난관을 다 헤치고 나갈 테니까 너는 내 안에, 내 뒤에 딱 있어라. 내가 다 책임질게. 둥지를 나한테 틀어라. 이런 식으로.
여자의 모든 관심사는 완전한 아름다움이에요. 미(美)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여성을 다 모아서 종합한 것이 아니고 바로 에스더 성경에 보면 나오죠. 가인도 권력이고 라멕도 권력인데 그 남성의 그 권력을 누가 이기느냐 하면 에스더라는 여자의 미모가 여지없이 이겨버립니다. 그 아름다움에 반해가지고 나라의 반을 거침없이 주겠다고 제안하죠, 나라의 반을.
오늘 당신이 맛있는 거 해주면 내 보너스 숨겨놓은 거 반을 줄게, 뭐 이런 식이죠. 오늘 맛있는 해물탕을 해준다든지 하면 숨겨놓은 내 비자금 반을 이 자리에서 줄게. 왜냐하면 요리 자체가 아름다움이니까. 요리 자체가 여성에서 나올 수 있는 아름다운 솜씨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미모만 아름다운 게 아니에요. 여성이 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고 남성 입장에서 사랑스러워야 되고 그렇죠.
이 모든 것이 세상은 부끄러움을 감추는 데에 급급하면서 서로가 조작된 자아상을 가지고 늘 만나는 거죠. 어제보다 더 부끄러움이 없이 완전한 사람을 원하죠. 애가 전교에서 10등 했다면 보다 더 완전한 것은 뭐냐. 미흡한 게 뭐냐. 1등, 2등,……,9등이 아직 남아있죠. 다음에는 7등으로 다음에는 5등으로. 우리 애가 전교 10등이지만 1등에서 9등까지 모인 그 애들과 학부모 앞에서는 내가 미흡함,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예요. ‘음메, 기 죽어.’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예요.
그처럼 모든 인간의 행동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그러한 부끄러움에 휘둘리면서 인간세계에서 인생은 살아갑니다. 이것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누구의 강압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보기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대체하다보니까 힘 있는 사람, 영웅적인 것에게 고개 숙이고 그렇죠.
모든 원인은 남 탓하지 마세요. 본인 자신이 본인을 불만스러워하는 거예요. 나 인생 실패 같아. 남한테는 그런 소리 안 하죠. 그러나 혼자는, 본인은 본인한테 그런 소리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은 실패작 같아, 실패작. 그럼 성공작은 뭔데? 성공작하면 또 옆에 사람 찾는다고요. 친구 찾고 뭐 찾아가지고. 아, 저 가정은 굉장히 행복해 보이는데 우리 가정은 왜 이렇게 그에 비해 뒤떨어지는가? 귀에 병이나 생기고 말이죠. 춥다 하고 이런 거. 본인 생각에 자꾸 미흡함을 찾게 되죠.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상당히 동떨어진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성도한테는 인간이 이미 그런 존재이고 그렇게 수치스러움에 휘둘리면서 쫓기듯이 살아간다는 것을 뻔히 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여기에 능력을 주십니다.
그 능력이 뭐냐 하면 로마서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건 사도 바울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로 국한된 게 아니에요. 사도 바울에게 주신 능력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과 동일한 고백이 나와야 되죠. 나는 부끄럽지 않다. 왜? 어떤 능력이 임하는데 그 능력이 뭔지 궁금해? 그게 복음의 능력이에요.
그 복음의 능력은 우리가 평소에 하는 행동, 다시 말해서 내 수치를 내가 알아서 감추려고 급급한 거,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거 그만 두지. 고만하지, 고만.” 이런 식으로. 왜? 행함으로 수치는 감추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거거든요.
내가 의인이라고 불러줄 테니까 네가 스스로 죄에 쫓기는 그 짓 그만하지? 그만해. 그러지 마. 지금 그런 너의 행동 하나가 나의 복음을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바로 그런 자, 그런 자를 주께서는 받아주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돼요. 되게 겸손해보이고 자기 부정같이 보이지만 이것은 완악하고 오만한 겁니다. 주께서 하신 일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끝까지 자기를 믿으려고 해요. 그래, 하면 할 수 있어. 그래, 나는 가능성이 있어. 끝까지 자기 자신을 믿는 것, 이게 바로 행함입니다. 이게 불신자에요.
사도 바울은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했어요. 나의 행함을 제치고, 나의 행함 아예 보지도 않고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그것이 우리에게 도달하게 되면 거침없이 우리 입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는 매사에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게 사도 바울이 받았던 그 능력이고 오늘날 우리가 받았던 믿음의 능력, 복음의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