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조직신학
구원론 중 (선택 1-1)
05. 5. 9일 강의 이근호
(이번 강의부터는 부천에서 서울 의존교회로 옮겨서 합니다. 그래서 서울 경기 강의로 제목을 붙이지만 부천강의와 계속 연결됩니다. 녹취자 주)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자 두 손 모으고 기도해요 학생들!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함께 들음-너무나 집중해서 강의를 잘 듣는 것을 여름수련회 때 확인하였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또 저희들을 만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저희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 시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께서 사람만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지옥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최근에 제가 쓴 책이 지옥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천국의 하나님에 익숙하여 져 있는데, 저는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취지입니다.
그리고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별난 사람들이 가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옆집 아저씨가 지옥을 가고, 옆집에 있는 아주머니가 지옥을 가고, 우리 학교 선생님이 지옥을 가고, 우리 교회 목사님이 지옥을 가고, 우리 교회 집사님이 지옥을 가요! 지옥을 안 가고 싶은데도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들어 놓았기에 지옥에 사람들을 보내어 지옥을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옥의 하나님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옥에 사람을 보내실 때에 그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너는 이러 이러 해서 지옥에 가야 돼! 하는 그런 기준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알아야 할 것은 다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는 자도 있으니 지옥에 가는 기준을 알아야 되고, 둘째로는 그 기준을 누가 지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옥에 안 가고 싶은데도 안갈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안 가고 싶더라도 지옥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면 지옥에 들어가야 합니다. 지옥에 갈 수 있는 능력, 말이 이상합니다만 지옥에 가는 능력, 이상하게 들리지요! 그러나 지옥에도 능력이 있어야 들어갑니다. 아무나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점지 해 준 사람이만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 지옥에 갈 능력이 임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지옥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천국에 가야만 합니다.
천국 가는 것만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지옥 가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사람만, 지옥의 능력이 임한 사람만 지옥에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지옥에 못갈 사람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야만 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천국 갈려고 하여도 천국에서 내려오는 능력을 못 받으면 그 사람은 지옥갈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은 그 심판의 기준이 결정하는 것이지 우리가 어느 쪽을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어느 쪽을 마음대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자녀들의 직업이나 학교 성적에 관심이 많은데, 하나님이 없다면 그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의 하나님이 버티고 있다면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급선무이지, 남편의 수입이 얼마나 자녀의 성적이 몇 점이냐는 것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닙니다. 제일 큰 문제는 지옥에 가는 기준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서울 인천에서 강의한 것은 조직신학의 고속도로입니다. 고속도로 알지요! 조직신학의 고속도로에서 오늘은 어느 부분인가 하면, 구원론 중에서 선택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무엇이냐? 이 선택의 문제가 지옥에 대한 심판의 기준과 관련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선택을 하면서 심판의 기준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지옥에 가야 하는 사람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그 기준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에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에 지옥에 간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 2:19절에 보면 마귀들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19-21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해서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나님 여호와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 판을 두개 들고 산 밑으로 내려온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돌 판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손으로 써준 돌 판인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옥 갔습니다. 하나님도 알고, 하나님의 돌 판도 믿고, 어떤 부자청년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지옥에 갔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의 기준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니라 딴 데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잘 섬기고 계명을 지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런 욕을 하였습니다.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들이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면할 수가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느냐 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강의에서 사두개인들이라고 하였는데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서기관으로 되어 있어서 고쳤음)들이야말로 전형적인, 진짜로, 꼭 지옥에 갈 폼을 다 잡고 있는 자들의 대변자들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판결을 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지옥에 갈 대표적인 자들이라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욕하신 것입니다. 그 앞에 하나 더 붙입니다. 화가 있을 진저 큰 벌이, 재앙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지옥이 분명히 있고, 어떤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가 하는 것이 참 궁금할 것입니다. 그러나 궁금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사시면, 그렇게 사시는 분들이 지옥이라는 한 곳에 모이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가는 대표자들도 있을 것 아닙니까? 천국에 가는 대표자들은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백부장이 나오는데 요즘말로 중대장이 나오는데 그 중대장을 보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중대장님 당신 같은 사람이 천국에 가는 사람이고 천국에 간다고 하는 사람들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친절하게도 지옥 가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 지옥에 간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친절하게도, 고맙게도 이런 사람은 천국에 앉게 될 것이라고, 천국에 갈 경우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양쪽을 다 보면서 천국과 지옥의 기준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단번에 눈치 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았지요! 이 중대장이 무엇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너희 같은 자가 천국에 앉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중대장이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겠습니다. 제가 이것을 한번 써보겠습니다. 천국 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한번 써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이 믿음이 중대장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기준 제일 앞에 예수님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사람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천국의 주인공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쉽게 예를 들면, 이 의존교회가 약도에 보면 청기와 모텔에서 150미터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런 낭설을 적어 놓아가지고 제가 아는 150미터로는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참을 헤맸습니다.
그래서 제가 따졌습니다. 목사님 제가 보기에는 150미터가 넘는 것 같은데 200미터도 넘는 것 같은데 왜 150미터라고 하였습니까?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만 의존교회 목사님이 이렇게 말할 수가 있지요! 내가 150미터라고 하면 150미터인 줄 알아! 왜 말이 많아! 당신이 150미터라고 주장하는데 당신이 의존교회 목사도 당회장도 아니면서 내가 150미터라고 하면 그런 거야! 당신 지옥한번 가볼래?
우리의 조상 아담이 범죄하고 나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범죄 한 아담의 속성을, D.N.A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아서 되지도 않는 고집이 다 셉니다. 천국은 이래야 천국답고, 메시아는 이래야 되고, 예수님은 이래야 되고, 개 코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나님은 이래야 된다고 자기 딴에는 안다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천국의 주인장이 누구십니까?
천국의 주인장이 예수님입니다. 어디에 나옵니까? 골로새서 1:10절에 보면 나옵니다. 천국이 아들의 나라입니다. 상당히 어려운 부분인데 이 말씀이 눈에 잘 안 뛰는 구절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모든 심판권을 아버지가 하시지 않고 아들에게 예수님에게 다 넘겨주었다고 요한복음 5장에도 나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심판을 하나님이 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세히 내막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이미 이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양심상 신에 대하여 착하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죄송합니다. 지옥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제가 잠시 일반인들이 사고방식을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신이 만들었다. 신은 저 하늘에 계시고 신이 만든 나는 이 지상에서 살고 있다. 신은 지금 천국에 살고 있고 나는 지상에 살고 있지만 지상에 살고 있는 나에게는 양심이 있다. 이 양심은 누구 주신 것이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에게 착한 양심을 주었다.
그러면 나는 죽어서 좋은 나라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내 속에 들어있는 신이 주신 착한 양심대로 바르게 살면, 물론 완벽하지는 않지만, 인간인 이상 실수는 있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착하게 살려고 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고, 순전무구하게 깨끗하게 살려고 하면, 예수님은 잘 몰라도, 죽어서 하나님이 양심이 있다면 나를 나쁜 나라로 지옥으로 보내지는 않을 거야!
이것은 모든 인간이 타고난 것입니다. 북한에 있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고, 아프가니스탄에 사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고, 나 홀로 집에 나오는 강원도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하고, 저 백령도에서 교회 한번 나가지 않은 어부도 그렇게 생각하고, 중국의 소림사 스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모든 인간은 한 아담이라는 조상에서 태어났기에, 품성 자체가 이렇습니다. 내가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데 이 순수한 마음을 신이 알아주지 않으면 누가 알아주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나 같은 착한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그래! 나 같이 착한 사람,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부부유별하고 나 같이 성실하게 산 이런 사람을 지옥에 보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지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양천구 주민들도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모르고 있는, 죄 지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죄 없으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그 이야기가 성경 아닙니까? 죄 있는 우리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죄 없으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이야기 하셨던 그 내막을 들춰 보니, 제가 방금 길게 말한 것들은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자기의 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하여 발악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한 발악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다 위임하시고 손 털고 나신 이후의 일입니다.
제가 이쯤 강의하면 처음 강의한 것을 슬슬 잊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억을 한번 되살리겠습니다. 처음에 이야기 하였는데 학생여러분도 알고 있지요?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는 사람의 대표라고 하였습니까? 보세요! 벌써 다 잊었지요! 설교하다보면 처음에 한 것은 벌써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처음에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는 대표자라고 하였습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참조> 바리새인-대한성서공회 성경시디 *******
'구별된 자'라는 뜻. 마카베오 전쟁 이후로 가장 강력한 종교적인 당파인데, 이들은 이스라엘이 물려받은 율법 및 선조들의 전통을 존중하고 일상생활의 사소한 데에 이르기까지 이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려는 열정을 품고서 메시야에 대한 약속들의 성취를 인간 편에서 확보하려고 분투했다("규정되어 있는 대로 이스라엘이 두 번만 안식일을 지키면, 구원이 동터 오리라"). 바리새인들은 시험 기간을 거친 뒤에 십일조* 및 결례 규정*을 아주 엄격히 지키기로 약속하는 사람을 자기들의 공동체에 받아들였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에 적힌 것뿐만 아니라 입으로 전해 내려온 정확하고도 엄격한 적용 규칙들, 곧 '장로(=이전의 율법 스승)들의 유전'(마15:2)도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것으로 여겼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여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었다. 바리새인들의 움직임이 처음에는 평신도 운동이었지만,
오래지 않아 이들은 서기관*계층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이들의 위험성은 율법적인 데에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이들은 자기들이 옳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냉혹한 엄격성을 띠었으므로 예수께서는 이러한 경건성을 사정없이 공격하실 수밖에 없었다. 바리새인들이 처음에는 백성의 지도권을 두고 사두개인들과 다투었지만, 주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로는 유대교 사상을 주도하고 결정하게 되었다.
사두개인********
유력한 제사장 가문들과 세속 귀족 대표자들이 속한 종교적인 당파. 이 이름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의 우두머리 제사장으로 삼은 사독*(삼하8:17; 왕상2:35)에게서 비롯된 듯하다.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의) 율법*에 문자적으로 포함된 것을 넘어서는 가르침은 모두 거부했다. 그리하여 이를테면 죽은 자들의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이들은 공회*에서 지도적인 당파이어서 정치적인 책임을 주로 맡았다. 사두개인들은 로마 사람들과 타협하더라도 유다 백성에게 남아 있던 정치적인 자유의 마지막 몫이라도 지켜보려고 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파괴와 아울러 사두개인들은 유대교 역사에서 사라지는데, 그 때부터는 서기관들이 전적으로 바리새파 성향을 띠게 된다('바리새인*').
서기관******
옛 중동에서는 글을 배우는 데 특별한 교육이 필요했으므로 서기관은 학자이거나 관리였다. 구약 성경에서는 나라의 매우 높은 관리를 서기관이라고 했다(삼하8:17 등). 종교적인 율법이 유대인들의 생활에 점점 더 중요하게 된 포로기 이후 시대에는 전문 교육을 받고 임직한 유대교 학자들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들의 임무는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모세 오경이 시민 생활을 위한 율법 모음집으로 통하기도 했으므로 이 학자들은 법률 전문가이기도 했다. 이들은 자기들의 지식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었다.
이런 율법학자들이 모범으로 삼던 훌륭한 인물은 '학사' 에스라였지만(스7:6,10,25 참조), 이들이 처음 언급된 곳은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이다(1마카7:12; 2마카6:18). 신약 시대의 율법학자들을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보통 '서기관'이라고 부르는데(어쩌다가 나오는 '율법사'란 칭호도 뜻은 비슷하지만 그 헬라 낱말은 다르다), 이들은 종교적으로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고, 지도적인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의 우두머리들이었다.
이 서기관들은 촘촘히 짠 율법 규정의 망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계명(안식일에 일을 쉬라는 계명 같은 것)을 어떤 경우에라도 어기지 않게 하려고 했다(막2:23-3:6 참조). 마13:52; 23:34에 따르면 그리스도교회에도 '서기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산상수훈(마5-7장)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은, 예수님의 율법 해석을 교회의 실제 상황에 적용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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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하나님과 직접 맞상대해서 그 중간에 누구를 필요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착하게 살면 이 착한 나를 죽어서 좋은 나라 가게 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너무나 확신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인데 그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 진저 독사의 새끼들아 새끼들아 하면 학생들이 있어서 교육상 안 좋으니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합시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천국 가고자 하느냐 너희들이 바로 지옥 갈 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강의 두 번째로 말씀드린 것은 모든 심판권은 예수님께서 가지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 5:22-24절입니다.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2)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게 되면, 제 말을 듣는 사람은 한 가지 부담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부담이란 지금까지 내가 양심적으로 살았다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 다는 그 생각을 알아서 다 때려 부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와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론이 차 들어와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이점을 왜 이야기 하는가 하면, 이것이 참 중요한 것인데 제가 이점을 꼭 이야기해야 될 이유가 무언가 하면 보통 사람들이 교회 오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제가 대신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나라는 인간이 착한데 평소에도 착하게 살았는데 이왕 착한 것 어느 정도까지 착한지 한번 측정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곳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지금도 착하지만 교회 다닌다는 이 놀라운 착한 것을 하나 더 보탠 것이니 신이 보시기에 더 착하다고 보시겠지!
그런데 막상 교회 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목사님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착한 것에다가 무얼 더 보탠 것입니까? 교회 오는 것도 착하고, 거기에다가 이왕 잘나가는데 예수 믿어주는 착한 것까지 보탰으니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천국 갈 것이라고 하겠지요! 이게 바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진짜로 예수 믿는 사람 같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야 하는가 하면, 예수 믿는 것이 나의 착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만약에 나의 착함으로 예수 믿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바리새인처럼 사두개인처럼 예수님 잘못 믿게 된다는 것에 해당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여러분들의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내가 너무나 착하기에 지독하게 착하기에 이 착함에다가 교회까지 나와서 목사님 말씀 듣고 예수까지 믿어주니 나 얼마나 착하느냐고 이렇게 나오신다면 그런 예수 믿는 것까지 몽땅 쓰레기통에 버려야 합니다. 여기는 교회 내에 쓰레기통이 없네요! 우리교회는 쓰레기통이 있습니다. 그것 버려야 합니다. 큰일 날 소리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은 성경에 나와 있는데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를 하는데 제가 십일조도 하고 구제도 하고 전도도 하고 바르게 살고 금식도 합니다. 오 신이시여! 저는 저 옆에 있는 더러운, 돈만 아는 세리와 같이 되지 않고 딴 사람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기도를 하였습니다. 이 기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칭찬하셨습니까? 책망하셨습니까? 책망하셨습니다. 누가 복음 18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인 그 사람이 그렇게 지독하게 무시하는 세리가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나 같은 나쁜 놈이 또 있겠습니까? 나는 하나님보시기에 고개도 못들 정도로 지독한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라고 기도를 하니 그것을 보고 있던 예수님께서 네가 바로 의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점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본성을 뒤엎어 버리는 엄청나게 중요한 심판의 기준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과 지옥에 보내는 기준입니다. 자기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자는 지옥 보내고 자기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자를 천국에 보내는 새로운 방식을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는 제가 할말이 참 많습니다. 할말이 많기에 여기서 진도가 더 나갈 수가 없고 이 문제를 좀더 따져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따져 봅시다. 예수 믿는 착한 일을 내가 더 추가하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예수 믿는 마음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아! 저 십자가를 믿어야지! 한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아! 내가 정말 죽어야 할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에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뉘앙스가 좀 다르지요!
여기 김 목사님이 교인들이 하도 안타까워서 삼일 반 동안 기도하다가 굶어 죽었습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또 모르지요 그럴 일이 있을지 그렇게 되었을 때에, 어떤 교인이 저 목사님의 기도덕분에 내가 살았구나 하면서 휘파람을 불면 그 사람은 많이 수상한 사람입니다. 그 목사님의 굶어죽은 모습을 보고서 아 내가 지독히도 엉뚱한데 관심을 갖고 살았구나! 정말 미안하고 죄송스럽고 나란 인간은 저 정도로 나쁜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아신다면 그 사람이 바로 목사님의 아픔에 동참하게 되겠지요!
구원이란 것은 마트에 가서 물건 고르듯이 골라서 카트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으로 푹하고 들어가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겠습니다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내 인생은 삭제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을 갉아먹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인생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죠스입니다. 죠스 알지요! 무서운 백 상어, 예수님은 무서운 백 상어입니다. 그 무서운 백 상어에 삼켰기에 예수님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어떤 제가 아는 목사님이 태국에 들어갔습니다. 상당히 존경스러운 목사님이신데 대구에서 수십 년간 목회를 하셨는데 환멸을 느꼈습니다. 복음을 전해도 교인들이 아무른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어느 정도로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하였는가 하면, 교회 장로님들이 노회의 다른 목사님들과 비교하여 봉급을 올려준다고 하여도 그 목사님은 예수님 같으면 이런 식의 풍족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종이기에 기존의 목사들이 어떻게 사는가에 대하여서는 관심이 없고 그 정도의 월급을 받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올리고자하는 것을 깎았습니다. 초임을 4년 동안 한 푼도 올리지 않고, 교육비도 안 받고 하였습니다. 이 교회 목사님께 도움이 되는 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목사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기존교회가 목사들은 돈만 가지고 있으면 얼마든지 농락이 되더라는 인식이 있어서, 목사에게 돈 줄 테니 우리가 원하는 설교를 해달라는 것에 대하여 이 목사님은 단호히 거부하고 교회가 잘되고 못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지옥과 천국의 심판의 기준이 문제이기에 당신들 같은 그런 사고방식은 교회 다녀도 소용없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큰일 납니다는 식으로 공격하는 적극적인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깊은 의중을 교인들이 눈치를 채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갔는가 하면 다 그만두고 태국으로 오지로 갔습니다. 그것도 가족과 같이 간 것도 아닙니다. 태국에 선교사로 간 사람들이 처음에는 오지로 갔다가도 나중에 다 도시로 나옵니다. 자녀들의 교육 때문에, 애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태국의 밀림 속에 일년 정도 있다가 방콕으로 나와 버리는 것입니다.
한국인 학교가 있기에 그곳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서는 이 목사님은 가족들 놔두고 삼년 내에 안 돌아온다고 하면서 생이별을 한 것입니다. 마치 계백장군이 자기 가족의 목을 치고 가는 그런 각오로 나갔습니다.
그 목사님이 가신지 얼마 되지 않는데 만약에 여기서는 제가 가상해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태국에서 그렇게 가셨는데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니 진짜 목사님이 오셨다고 호응이 있고 안정이 되었다고 합시다. 교인이 많아지면 월급도 많아지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른데서 이상한 거짓 목사가 와서 이 목사님을 모함에서 그곳에서 쫓아내었다면 그 목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목사님 내가 이렇게 고생해서 희생해서 이렇게 안정된 교회,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교회, 요즈음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없으면 안정된 교회 아닙니까? 이렇게 되어 있는데 나쁜 목사가 와서 쫓아내었다면 자기 청춘을 바쳐 희생하여 이루어놓은 것에 대하여 억울하다고 기도할 수가 있느냐 없느냐는 이 말입니다.
아까 제가 천국 가는 원리가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한번 적용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할지라도 억울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알아서 나쁜 목사를 보내신 것입니다. 나쁜 목사가 자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나쁜 목사를 보내서 나쁜 목사가 승리하고 자기는 패배하게 만드신 분이 누구라고요? 주님이십니다. 그것을 두자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갑자가 분위기가 싸늘합니다. 완전히 우리의 예상과 어긋나지요? 아까 백부장의 이야기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라는 그 이야기 들을 때는 신났지요! 그러나 막상 예를 드니까 이것은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겁이 덜컥 나지 않습니까?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대부분 반발합니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아마 백이면 백 다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4장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사도를 이 마지막 때에는 미말에 처한 쓰레기처럼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주님이시여!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기도하면 주님께로부터 오는 응답은 하나 밖에 없지요! 비참하게 망해라 네가 예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비참하게 망해라 그리고 그렇게 망할 수 있는 능력은 너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 비참하게 하실 지를 네가 멋들어지게 맛 좀 보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는 비참하다 처참하다고 상상할 수 있는 것을 다 끄집어 내어보아라. 그 보다 더 비참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망하게 인도하시더라도 내가 가라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듣기 어려운, 전하기도 곤란한 이런 말을 결론으로 내리는가 하면, 제가 지금까지 공부를 하면서 무수하게 들은 가짜 복음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짜 복음중의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어려우면 참으세요!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텐데 그것 잘못되었습니다. 사람이 어려울 때 참게 되면 참았다는 의로움이 점점 더 부각이 됩니다.
너 못 참았지, 나는 참았잖아 나 믿음 대단하잖아! 이렇게 되면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지요!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저는 그 찬송을 부르면서, 신학교 가고 나서 부른 적이 없습니다만 그 찬송을 듣고 있으면 약간의 역겨움이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는 것이 거룩해 보입니까? 아니면 집 세 채에다가 부동산 15만평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복음 믿는 것이 어렵습니까?
질문이 좀 이상합니다만 다시 해봅시다. 아골 골짝, 사창가에 가서 복음 전하는 것이 자기 딴에는 거룩해 보입니까? 건평 150억에 대가 시가 65억짜리 아파트 꼭대기에 살면서 예수 믿는 것이 어렵습니까? 어느 것이 어렵습니까? 아파트 꼭대기에 살면서 예수 믿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왜? 그렇게 풍족하게 살면서도 그것을 포기할 마음상태가 항상 되어 있다는 것이 보통 능력이 아닙니다.
갑자기 또 희망이 생기지요! 제가 비참하게 망해라고 하면서 아골 골짝을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집을 가져도 괜찮구나 하는 방향으로 머리가 굴러가지 않습니까? 수입이 천 만 원이 되어도 괜찮겠구나! 천당 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지요? 예 맞습니다. 천당 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가난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해졌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면 그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돈 있든 없든, 가난해도 지옥 갑니다. 그 점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것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도 지옥 갑니다. 태국 오지에서 선교해도 지옥 갑니다. 환경을 임의로 바꾸지 마세요! 환경을 거룩한 모습으로 그럴 듯 하게 바꾸지 마세요. 그것은 장난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임의로 만들어 장난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무시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이 무시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심판의 기준은 세상이 어떻게 좋든지 나쁘든지, 바울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비천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안다고 했습니다. 양쪽이 어떻든 간에 기준은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삼킨바 되어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이런 믿음이 연약할 때에는 임의로 믿음의 상황을 조작해 냅니다. 마치 천주교 신자들이 가정마다 조그마한 마리아상 놓고 성경책 펼쳐놓고 아침마다 제단 쌓는 것처럼, 가정의 어떤 분위기를 기독교분위기로 바꾸면 그것이 자기의 경건생활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없더라도 경건생활일 될 정도로 매일같이 주님께서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하면 가야 됩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라는 것이 안 되니까, 주님 보시기에 미안스러우니 그런 분위기라도 만들어서도 주님! 제가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시지요? 그러니 저를 괄시하지 마세요. 라는 식으로 자기를 연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연출이 자기의 솔직함을 방해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성경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을 때는 보시고 덮을 때는 덮게 항상 주님께서 나를 주님의 소유 삼았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것을 어렵게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이 능력으로 확산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천년 전에 일어났잖아요! 이천년 전의 그 십자가가 가만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확산이 됩니다. 마지막 재림 때까지 확산이 되는데 그런 확산이 일어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모든 소유성에 대하여 공격합니다. 소유성에 대한 공격, 이 성경책은 내 것이야, 안경, 마이크 이것은 내 것이야 하는 그 소유성에 대하여 공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버린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를 한다고 구원되거나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소유에 대하여 공격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 몸은 누구 것입니까? 내 몸을 내 소유라고 여기는데 그렇다면 내 몸을 자살하면 구원받습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 집도 주님이 주신 것이고, 이 직장도 주님이 주신 것이고, 이 자고 있는 아이도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사고의 전환이라고 할까요?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까요? 발상의 전환을 하면 아무문제도 없는 것을 가지고, 마치 애를 신학교 보내야 되는 것처럼, 집을 팔아서 교회 바쳐야 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무성의하게 해결 하려고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런 짓을 잘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신학의 깊이를 잘 모르기에 쉽게 하고 있는데, 사실 어렵게 하려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였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어떠한 신학을 갖고 있는가를 설명하면 그것이 엄청나게 많고 깊은 신학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신학을 열어서 가만히 들어보면 참 기가 찹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그대로 다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신학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말씀을 생활화하자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모토였습니다. 말씀은 지식으로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실천에 옮겨야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 성취라고 가르친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은 놀랍게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365가지의 보조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보조 법은 원래법인 십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주저리주저리 달려있는 것이 365가지입니다.
안식일에 계란을 삶아야 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것도 있습니다. 안식일에 이불을 털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하는 것 까지 나옵니다. 요즈음 같으면 365가지가 아니라 36000가지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면서 버스를 탈 때, 교통카드로 할 것인가 동전으로 내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아이 기저귀를 오다가 갈아야 하는지 예배를 마치고 갈아야 하는지의 문제, 중국에서 시간이 두 시간 빠르니 중국에서 안식일을 지켰다가 한국에 왔다면 시차로 인하여 다시 안식일이라면 지켜야 하는지? 아마 요즈음 법령을 만들려면 더 많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많아지는 것입니까?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시면서, 너희들이 겉으로는 그렇게 법을 지키고 있지만 너희들이 지금 무엇을 모르느냐하면, 속에서 울컥 울컥 순간순간 솟아나는 그 욕망을 왜 감추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솟아나는 욕망과 탐욕을 365가지 법으로 감추어질까요?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스스로 구원받고자 한다면 이것은 해결책이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면 바리새인과 똑같이 지옥 갈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일임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 몸, 내 운명과 내 남은 팔자는 내 팔자로 만들지 말고, 내 소유의 팔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끌어 가지고 주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인생으로서 전환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지난주에 야외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대구대학교에 갔는데 아주 좋습니다. 넓은 교정에 족구장도 있고 농구장도 있고 발야구 하는 곳도 있고 푸른 잔디밭도 있고 좋습니다. 예배드리기 위하여 사도신경 하겠습니다. 하는데 한 쪽에서 누구야 오너라하고 운동경기 한다고 온갖 소리가 다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중이 안 되어 예배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렇게 잘 안하는데 몸짓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몸짓을 시범으로 한번 보이겠습니다. 여기서 종이 하나 없습니까? 제가 준비한 종이를 말을 하지 않고 찢었습니다. 먼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힘으로 자기를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이 제가 쥐어박아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쥐어박는다고 하는 말은 순 경상도 말인데 이 말은 때립니다. 꿀밤 줍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오지 말고 영생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찢은 종이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자기 숙제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에게 영생을 주려 하심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는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리는 이것이 내가 나에게 행하는 나의 숙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구원이 우리의 숙제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나에 관한 문제라고 여긴 것입니다. 구원이 나에 관한 문제라고 여기는 것은 아직도 자기를 자기의 소유로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착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착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내 구원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잘못 되었는데, 우리는 범죄 한 그 죄의 본성이 있어가지고 내 구원문제 내 천국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고치시면서 구원에 관한 문제는 너는 손떼라는 것입니다. 다시 보여주겠습니다. (종이를 찢는 소리가 들리면서) 나중에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영생 써서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성령이 없으면 이런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조금 이해를 하고 조용해 졌습니다. 설교를 하면서 쇼를 다 했습니다. 야외예배이기에 그랬습니다. 교회에서 하면 동영상 캡쳐가 되기에 동영상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되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부모로부터 죄악을 물려받고 나서는 내 구원을 내 문제로 여기는 말도 안 되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좋은 나라에 올려 보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착각이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고치시려 오셨습니다. 너는 구원될 수 없는 죄인이다. 하지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의인되게 하시는 숙제를 내가 하고자 했는데 거기에 동원되고 붙잡힌 사람들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 믿게 된 너희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예수님께서 영생 주시는 방법입니다. 바리새인들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은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왜 내 몸은 내 것이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너는 너의 소유성을 가질 권리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예수님 것입니다. 예수님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삼키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삼킴 받은 사람은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온다는 것입니다.
간다 온다 해서 여기서 대전으로 이사 가라는 말이 아니고 지금 이 동네에서 살고 있더라도 이 집과 내 몸과 자식과 교회가 내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은혜로, 자기 숙제로 주신, 복음 전하라고 주신 터전이라고 여기시면 그것이 바로 천국 가는 기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오 분간 쉽시다.
녹취: 050819 이장우
구원론 중 선택 1-2
(음성 강의는 2,3번으로 되어 있지만 계속 연결되는 강의라서 한꺼번에 녹취하였습니다)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시간 요약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심판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심판이 일임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 마귀도 있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있었지만 이들 유대인들은 조상으로부터 받은 죄가 있기에, 죄가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생각하였기에 그 하나님을 잘못된 하나님으로 오해해서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을 들으며 지옥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만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조상으로부터 죄를 물려받기에 잘못된 하나님을 갖고 있습니다. 잘못된 하나님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착하게 살면 복 받고 나쁘게 살면 저주받고 지옥 간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들을 보고 너희들은 지옥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사가 무엇인가 하면 마지막에 지옥 가는 기준이 무엇인가? 다른 말로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인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을 첫째 시간에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이냐에 대하여서는 아직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기준은 일단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한 심판과 지옥의 기준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 따로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첫 시간 말미에 잠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선택한 사람만 구원받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 사람은 천국가지 못한다는 그 기준은 예수님 자신의 일방적인 선택에 두었다는 것을 이 두 번째 시간에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기준에 대하여 여러분이 어려울 것 같아서 김 목사님을 예로 들은 적이 있지요! 다시 이야기 할 까요? 자꾸 해야 합니다. 150미터라는 이야기입니다. 150미터라면 150미터인 줄 알아야지, 의존교회 당회장은 김 목사님이지 제가 아니거든요!
천국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문제가 있어서 추방되어 놓고 우리가 우기면 안 됩니다. 천국은 이렇게 되어야 돼! 지옥은 이렇게 되어야 돼! 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쫓겨난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쫓겨났다면 쫓겨난 줄 알고 뽑아주면 고맙다고 여기면 되지, 하나님 일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하면서 쓸데없이 하나님께 조언하면 안 됩니다.
이미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쫓겨났으면, 쫓겨난 대로 있다가 천국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내가 너를 택하였다고 내 백성이라고 뽑아주시면 고맙게 여기며 천국가시면 됩니다. 이것이 천국의 기준입니다. 제 말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왜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면 제가 이 집의 주인이라면, 여기 열 사람이 있다면 앞에 한 사람이 끝에 한 사람을 초청해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입니다. 그런데 초청받지 여덟 명이 데모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집은 내 집이기에 저쪽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하들의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쉽게 예를 들면 여러분이 충분히 이해는 하는데 듣고 보니 기분이 나쁘잖아요! 이해는 하는데, 천국은 아까 무슨 나라라고 하였습니까? 주인이 누구입니까? 아들의 나라라고 하였지요! 골로새서 1:13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러므로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이지 우리나라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것은 주인장 되시는 분이 뽑아주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충분히 논리상 맞는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사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듣는 인간 편에서는 찝찝하고 대단히 기분이 나쁘게 들리는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왜 기분이 나쁜가 하면, 내가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도 저 주인 되시는 분의 허락이 떨어지지 아니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열어달라고 요청을 하여도, 나는 너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딱 한 마디에 천국이나 구원이란 다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가고 싶어서 아무리 매달리고 아무리 발버둥치고 금식하고 회개하고 예수도 믿고 삼위일체도 믿는다고 노력해도 나는 너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한 마디로 그 모든 노력이 허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그렇게 노력한 가치와 그 의미, 인간이 애쓰고 노력한 그 보상을 어디에서 받고 어디에 하소연 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되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성도 짓밟히고 자존심도 묵사발 되고 신을 향하여 애타게 기도하면 벌린 이 두 손도 부끄럽고 움츠려들고 모든 시도가 다 깨어지니, 차라리 그럴 바에야, 예수님으로부터 서러움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내 쪽에서 알아서 교회에 발길을 끊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토라지고 삐지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내가 천국에 안 가고 말지 나도 자존심이 있다면서 토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린 취지를 잘 아시겠지요!
천국은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뽑아서 세우겠다는데 우리가 거기에 대하여 이를 달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맞는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상당히 기분 쁜 이야기로 들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국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하지만 천국에 들어가고자 노력하는 그 가상한 마음까지라고 짓밟을 수가 있느냐! 하나님이면 다냐! 하는 반발이 나올 수가 있지요!
여기에 대하여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은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마지막이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은 분류하는 작업입니다. 다 천국에 넣어주거나 다 지옥에 넣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은 양과 염소,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알곡과 가라지, 이렇게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란 분류작업이고 패를 가르는 것이 심판 작업입니다.
같이 살아도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같이 살아도 알곡이 있고 가라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옆집에 사니까 같은 인간으로 보겠지만 하나님의 영안으로 보면, 따로 따로 떨어질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수님 재림 할 때에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지 못하는 그런 처지에 이 지구상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주님에 의하여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고 거부당하는 그런 모습으로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현실을 똑바로 보면 그런 쪽으로 세상을 보아야 세상을 똑바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낚시 좋아하니 동우회잖아. 우리는 서로 동창이잖아 하면서 서로 어울려 논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안목처럼 우리가 세상을 분류해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심판을 하는데 심판의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심판 받는 대상은 누구인가 하면 모든 인간입니다. 양이 되었든 염소가 되었든, 알곡이 되었든 가라지가 되었든 모두가 인간입니다. 이 인간들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천국과 복을 생각하고, 나름대로의 구원을 생각하고, 놀라운 사실은 나름대로의 지옥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관이라 복이나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맞지를 않고 틀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모습으로 오신 이유는 예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하늘에 속한 사람의 뜻과 땅에 속한 사람의 뜻과 너무 다르기에 어떻게 땅에 속한 너희들이 어떻게 하늘의 속한 나의 말을 알아듣겠느냐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뜻이 달라요! 예를 들면 세상 사람들의 복이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시간 관계상 다 말할 수는 없고 이러면서 다 말하지만, 세상에서 사람들의 복이 무엇인가 하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인간에게는 고통이 옵니다. 괴로움과 고생입니다. 그래서 고생과 괴로움으로부터 빠져나오고 면제받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복이 무엇이라고요? 고생을 덜 하는 것, 편안하게 사는 것 이것을 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이란 한 평생 살면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복이고 고생스럽게 사는 것은 저주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렇게 말하니 목사님! 그것은 바로 우리들 생각인데! 그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지만 교회 다니든 안 다니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처를 찾든 예수를 찾든 하나님을 찾든 신을 찾든 애들이 징크스를 찾든 전부다 고생을 덜하고 줄이기 위하여 편안하게 사는 것이 복이라고 여기고 그런 복을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복임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누가 들어왔다고 하였습니까? 하늘에서 사시던 예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죄를 씻어주시는 것이 복입니다. 죄를 씻는 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이란 죄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나를 편하게 해달라는 그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나는 죄 지어서 이런 고생을 해도 마땅합니다. 그런 생각을 우리는 죽어도 안 갖습니다. 당연합니다. 제가 나쁜 여자고 나쁜 놈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살다가 객사를 하여도 노숙자가 되어도 저의 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나와 보면 머리를 쓰는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 앞에 죄가 너무 나쁜 짓을 하였습니다. 이런 멋진 고백을 하니 저를 편하게 살게 해 주옵소서! 요런 머리를 착착 굴리는 사람이 있어요! 다들 그렇게 하시는지 조용한데,,,,,
주님 제가 잘못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잘 못 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형편이 확 펴이게 해주셔야 합니다. 라고 여기는 사람은 무엇을 빠뜨리는가 하면 진정으로 자기가 죄라는 것이 없습니다. 잠시 실수한 것은 있어도 죄라는 사고방식은 없습니다.
애들이 집에 있는 비싼 화병을 깨뜨렸습니다. 애가 하는 말이 내가 비싼 화병을 깨뜨렸으니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 거야. 그렇다면 내가 어떤 조치를 해야 하나! 옳지!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 때에 내가 이렇게 빌어야지! 아버지 제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 아끼는 화병을 깨뜨렸으니 나는 너무나 큰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안 때리시겠지 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머리를 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머리를 굴리는 것은 자기의 죄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안 맞겠다는 하나의 수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이런 것이 어려운데, 그 집에 화병이 천오백개가 있었다고 합시다. 애가 화병을 깰 때마다 아버지가 잘했다! 우리 애는 힘도 좋지! 또 깨뜨리면 엄마가 잘했다! 깨어지는 소리가 얼마나 청아한지! 하면서 평소에 애가 깨뜨릴 때마다 부모가 잘했다고 하면 그 천오백개 중에 한 개를 깨뜨렸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겠습니까? 천 만의 말씀! 깨어 놓고서는 엄마 또 깼다. 나 잘했지 이럴 것입니다.
평소에 인간이 선악과 따 먹고 난 뒤에, 인생 자체가 고통이니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하는가?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신에게 벌을 받아서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교회 나오는 목적이 무엇이냐? 교회 나오는 이 착한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이 저주를 복으로 전환시켜 주실 것이라는, 순전히 자기 편하게 살겠다는, 내가 죄는 지었지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 한 평생 편하게 해 주시겠지, 자기 죄는 생각 안하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내가 편하게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자는 그런 노림수를 가지고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무어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입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복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금요철야 기도하면 철야기도하고, 십일조 하면 십일조 하고, 교회 봉사하라면 봉사하고, 무슨 짓이든 하라면 다 할 테니 저의 남은 인생이 확 펴지는, 자식은 공부 잘해, 남편은 돈 잘 벌어, 자기는 몸이 튼튼해져, 자기 취미는 쇼핑으로 바뀌고, 골프를 치며, 좋은 옷 입고, 넓은 아파트살고, 예수 믿고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것을 그들을 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복이라고 여기는 것은 모든 인간이 타고 난 것입니다. 아까 애들이 무슨 신학을 배웠겠습니까마는 무언가 잘못 되었을 때에 엄마 나 잘못했어요! 하면서 비는 것은 자기 방어본능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은 다 이런 것을 복이라고 여기는 것은 타고 난 것입니다.
그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와 가지고 너는 죄를 모른다. 너는 죄를 모르기에 얄팍한 수를 가지고 섬기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시자 그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이 부활됨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 사건은 본격적으로 믿는 사람들 속에 새롭게 파고드는 것입니다. 너도 옛날처럼 날 죽일래? 너도 그때처럼 날 떠밀 거야? 라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직도 네가 생각하는 그 복을 위하여 나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지 묻습니다.
제가 성경을 보면서 잘 안 우는데, 볼 때마다 눈물을 찔끔거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이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 동리에서 행실이 나쁘기로 소문난 더러운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향수를 뿌리고 예수님의 발이 행여나 더렵혀질까 봐서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대목이 나옵니다. 나 같이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신 주님의 그 사랑에 제가 무엇으로 보답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이것이라도 바치겠습니다하면서 자기의 온 몸을 바쳐서 예수님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럴 때 그 주변에 있던 신사 양반들이 예수님께 하는 말이 예수님 당신은 저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여자인지,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당신은 모르지요? 저 여자는 아주 더러운 여자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500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자가 나를 더 사랑하겠느냐? 아니면 50데니리온 탕감 받은 자가 나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당연하게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사랑하겠다는 답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자기 죄가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나를 많이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자 묻습니다. 그 여자가 남은 생애를 평안하게 살기를 원했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그 여자의 남은 생애가 예수님 때문에 편안하기를 원하였겠습니까? 원하지 않았겠습니까? 안 원하였습니다. 평생을 두고 예수님께 고맙다는,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어준 것을 평생에 되풀이 하여도 감지덕지입니다.
무얼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자기 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신사양반은 인간 대 인간의 죄를 측정하지만 놀랍게도 그 행실 나쁜 여자는 인간 대 인간의 죄를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제대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나를 많이 사랑하는데 제발 너희들 시비 좀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강도가 있었습니다. 평생 동안 강도짓만 했지요! 그 강도가 예수님의 무엇을 보고 낙원에, 천국에 갔습니까? 예수님 저 죄인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저를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너는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가리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편 강도는 십자가 형틀에서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형틀에서 내려가서 다시 땅에서 살수 있도록 살려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짜 구원받은 강도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자기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예수님 덕분에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나라에서 살고 싶은 것, 그것 하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 강도에게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 지금 천국 가 있습니다.
천국은 어떤 사람만 가는가 하면,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처음부터 죄인인 것을 눈치 채는 그 사람이 천국 갑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 가는가 하면, 예수님 앞에서, 그 십자가의 피 흘림 앞에서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 그 사람이 천국 갑니다.
태어나서 나쁜 일을 조금 많이 하고 적게 하는 상대적인 문제가 아니라, 나는 출생부터가 이 땅에서 조상의 죄로부터 태어나서 마땅히 고생함을 당연하게 인정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예수님의 용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아는 것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행실 나쁜 여인과 강도가 구원받는 것을 가지고 로마서 3:21절에서 그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 외에 한 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겠다는 것은 그 당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면, 지금 천국 가는 사람은 율법 외에 한 의로 말미암아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율법 외에 한 의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을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음으로 의인 되는 것인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받은 의는 아직도 모자라기에 예수님의 의로 받아들이고 거기에다가 보태서 성경 말씀 지켜야 의인되고 구원받는 다는 생각은 잘못 된 생각입니다.
율법 외의 의가 됩니다. 우리가 구원되는 의는 율법적이 의가 아니고 율법 외에 다른 법, 즉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는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인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지켜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법을 지켜낼 능력이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몇 년 후에 보니 그 사람이 천국에 가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천국 갔습니까? 말씀을 지킬 능력도 없으면서 천국 가는 것은 분명히 그 사람이 말씀을 지킨 능력 때문에 천국 간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 사람 속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의가 그 사람 속에 스며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율법 외에 나타난 의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 구원방법 외에 다른 구원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아십니까?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려면 교도소 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다 국가에서 제공됩니다. 물론 몇 년 묵은 사람들입니다만.
세상에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애들 피아노 가르쳐야 돼, 유치원 보내야 돼, 인터넷, 전화비 내어야 돼, 어떻게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는 말씀을 지켜서 구원 받으려면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안 들은 척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씀이 있습니다. 일만 악의 뿌리가 되지 않으려면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게 성경에 나옵니다. 성경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 지어내어서 여러분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말씀 지켜서 구원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없는데, 분명히 없는데 천국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니 어린 양의 피로 하얗게 씻음을 받은 사람은 천국에 모이고, 어린 양의 피가 안 묻은 사람은 그냥 지옥에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이 왜 있습니까?
그것은 잘난 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다녔다고 잘난 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다닌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잘난 체를 하게 되면 잘난 값을 하게 됩니다. 잘난 체 하면 그만한 보상을 또 요구하게 됩니다. 내가 교회에서 이만큼 충성과 헌금을 다 했는데 왜 하나님은 우리 가정의 형편을 나아지게 하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하나님 책임지시오! 반드시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자기 의라고 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말씀을 지켰다고 여기면 그 다음부터 누적이 됩니다. 마일리지가 쌓이는 것입니다. 마일리지가 쌓이면 경품권을 주지요! 주유소에서, 카페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오래 교회 다니면 마일리지가 쌓여서 하나님께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삶, 고생으로부터 면제되는, 편하게 사는 경품이 보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고생 더해야 합니다. 그 오해가 풀릴 때 까지. 주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이용하는지 아니면 도리어 예수님이 나를 이용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 바로 오늘 이야기 하려는 선택의 문제가 있습니다. 선택의 문제에 대하여 결론을 내린다면, 다음 시간에 내리겠습니다만, 미리 당겨서 내린다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이용하시는 것을 선택이라고 합니다.
이런 철없는,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고, 교회 다녔다고 보상을 요구하는, 너무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도 모르면서, 교회 좀 충성 했다고 해서 단박 어떤 행운이 로또 복권 당첨되듯이 행운이 찾아오는 것처럼 여기는 이런 철딱서니 없는 것을, 주님께서 선택하심으로 말미암아 네가 평생토로 나에게 대들고 반항하고 하였지만 봐! 너는 구원받았잖아!
너는 평생 교회 다니면서 기도할 때마다 숨쉴 때 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정말 이러기예요? 다음주부터 내가 의존교회 나오지 않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지 데모하는지 분간도 안 되는, 매일 자기 한풀이 하면서 두드려가면서 내주를 가까지 하려함은 이라고 찬송하면서 이래도 복 안 주시렵니까? 이렇게 철없이 굴었는데도 나중에 가보니 천국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철딱서니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철저히 이용한 것입니다. 봐라 저런 인간도 구원되잖아! 그것이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가만히 이야기 들어보니 계속 철없이 놀아라! 하는 것으로 들립니다만 제가 강의를 하면서 보니 속기를 하듯이 다 받아 적습니다. 놀라운 현상입니다. 다른 교회에서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교회에서 해야지! 우리교회에서 한참 설교하는데 띠리 띠리리 하면서 핸드폰이 울리는데......... 로마서 9장 9절을 봅니다.
제가 자꾸 걱정이 되는데, 걱정이 되는 것은 믿음이 없어 그런 것 같습니다만 다시 이야기 하는데, 심판이 있는데 심판은 분류작업이라고 하였습니다. 양과 염소,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분류하는 것이 심판인데 심판 하는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법이 있고 천국관이 있고 구원 방식이 다 따로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심판 주 되시는 예수님이 등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등장하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서 예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피가 흘러나오는데 그 피가 이철 없는 이쪽 사람을 구원하시고 저쪽 사람은 구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피는 용서하는 권한이 있는데 이 피가 양쪽 다 용서 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이 피를 흘린 당사자의 권한으로서 이 철없는 자를 용서 하시는 것입니다.
다 같이 철없는 자라는 것을 명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강의하고 가고 나면 여러분들이 헷갈리는 것이 무언가 하면 예수 믿지 않는 저 사람들보다 예수 믿는 우리는 철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저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지만 예수 믿는 우리들은 돈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러한 잘못 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헌금하고 싶은데 돈을 안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돈을 안 좋아하는 척할 뿐입니다. 목사라도 돈 줘보세요! 입이 쩍 벌어집니다. 자꾸 자기를 속이지 마세요! 이근호 목사 그렇게 말했으니 이제 교회 다니면서 고생을 하더라도 그것을 복이라고 여기겠습니다. 그런 인간 없습니다.
제가 백날 강의해 봤자, 그래도 하나님 교회 다녔는데 애 성적 좀 팍팍 올리주소!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안 다니는 사람이나 노림수는 똑 같고 철딱서니 없는 것은 동일합니다. 나이 들면 철든다고요? 천만의 말씀, 나이 팔십이 되어도 구십이 되어도 힘이 없어서 못하지 마찬가지입니다. 새벽기도 나와서 은혜 받아도 오후 되면 다 사라집니다. 에프 킬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에프 킬라 뿌리면 모기약 냄새나지요! 오후 되면 다 날라 가버립니다. 자기감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다 같이 철없는데 다 같이 부족한데, 사람에 의해서 밀침을 당해서 결국은 죽어서 흘린 그 피가 가해자, 놀랍게도 자기를 가해 한 자를 용서 하는 피가 화목제물의 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피가 양쪽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 쪽은 지옥이고 한 쪽은 천국 보내기 위해서 이 철없는 자를 용서하는 작용을 할 때 이 사람이 천국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간 사람의 특징은 예수님의 피 때문에 왔다는 것입니다. 너는 왜 천국에 왔어? 예수님의 피 때문에 왔습니다. 천국은 어린 양의 피만 영광 받는다고 요한계시록에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맥락입니다.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로만 구원받습니다. 다른 구원방식은 없습니다.
사람이 교회에 십년을 다니고 이십년을 다닌다고 철난다고요? 철나는 것은 철나는 것이고, 실제로 그것을 지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탐내는 것이 죄인 줄 아셨다고요? 잘 하셨습니다. 하지만 탐내는 것이 죄인 줄 알지만 탐내고 싶습니다. 탐납니다. 남이 좋은 차타고 다니는 것 보면 탐이 나고, 남이 좋은 옷 입고 다니 것 보면 탐이 나고, 남이 좋은 아파트 사는 것 보면 탐이 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내 마음 내가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이 관리가 안 됩니다. 이것 솔직 합시다. 이것이 솔직한 것입니다. 사람이 이런 것에 솔직하지 않으면 점점 위선자가 됩니다. 사람들이 교회 다니고 난 뒤에 정신병자가 많은 것은 자꾸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다 보니 정신의 용량이 넘쳐서 미친 자가 됩니다.
죄 지었다고 손 열 번씩 씻고, 죄 지었다고 성경 두장 보던 것 열장 보고, 죄 한번 지었다고 기도 두 시간 하던 것을 거의 네 시간 합니다. 이런 것은 거의 정신병 수준입니다. 그것을 흔히 우울증이라고 하지요! 조울증 우울증입니다. 예수 믿고 정신병 들고 그게 무슨 난리입니까?
그러지 맙시다. 예수 믿고 도리어 자기 자신을 압시다. 나는 내 힘으로 구원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 주님은 애초부터 아시고 오직 자기 피로만 앞으로의 모든 죄도 이미 끝내셨구나! 앞으로 살 일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년을 더 살더라도 이미 저쪽 선에서 해결 다 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피의 효력인데 성령을 받은 사람만 믿게 되지 다른 사람은 못 믿습니다. 다른 사람은 자기의 행위를 믿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 9절을 봅니다. 사라와 리브가가 나옵니다. 그리고 11절에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여기서 때가 나옵니다.
여기서 때란 구원받을 당사자가 이 땅에 아직도 태어나지 아니할 때입니다. 천국 갈 사람도 아지 태어나지 아니하고 지옥 가야할 사람도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때에,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야 말이지 어떤 행동을 할 사람도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야곱은 사랑 받기로 작정되어 있고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쉬운 이야기입니다. 야곱이나 에서는 아직 없습니다. 점선으로 표시합니다. 아직 가시화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없는 야곱을 만들었습니다. 야곱을 만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사랑 때문에 천국 간다는 사실을 온 우주에 보여주기 위해서 없는 야곱을 만드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없는 이근호, 없는 김재열, 없는 김명현을,,, 없는 사람을 목적이 먼저 있고 그 목적을 담기 위한 비품으로서 하나의 재료로서 이용하기 위한 선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을 채우고 지옥을 채우기 위해서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했는데 태어나야 할 목적, 이런 사람은 천국 가야 돼!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없는 야곱을 만들어 천국으로 당기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당깁니까? 그 사람의 착함으로? 아닙니다. 그 사람의 죄로? 아닙니다. 애초부터 그 사람에 담긴 사랑 때문에, 사랑의 고무줄에 의하여 도로 끌려 천국에 골인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러면 지옥 갈 사람은? 지옥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이 텅텅 비면 안 되거든요! 지옥을 채우기 위하여 지옥에 갈 사람을 작정하시고 그 목적을 부합한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목적이 먼저이고 그것을 구체화 하는 사람은 나중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자가 에서인데 그가 태어나서 이웃을 구제하든 선한 일을 하든, 교회 목사가 되든지, 장로가 되든지 상관없이 그 인간은 지옥으로 가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목적이 그 사람을 지옥으로 가도록 만드셨기에 그렇습니다.
개집 만들어놓고 사람 집어넣는 법은 없습니다. 말 되지요! 개집 만들어 놓고 개를 사서 그 집에다 넣습니다. 개집 만들어 놓고서 아무리 자식이 술 먹고 개 같은 짓을 하여도 개집에 넣는 그런 부모는 없습니다. 개는 개 집에 사람은 사람 집에, 천국 사람은 천국에 지옥 사람은 지옥에 천국 표어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도권입니다.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대단한 하나님을 증거 하기 위한 증거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착한 일을 많이 해도 지옥 보내더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증거 하고, 우리는 이런 나쁜 인간인데도 천국 가더라는 것을 보여주는 천국의 증거물로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갑니다.
제가 이야기 하면서도 정말 신납니다. 믿는 사람 같으면 신나는 이야기인데, 믿지 않는 사람 같으면 지금 저 쇠문 열고 뛰쳐나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엄성은 다 날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치, 인간의 판단력, 인간의 굳건한 의지들이 방금 제가 한 말에 완전히 다 날아가는 것입니다. 완전히 묵사발 되어 버립니다.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는 열의와 욕망들이 불도저 밑에 완전히 다 깔려버리는 것입니다. 다 소용 업습니다. 목적 없는 인간은 한 명도 없지요!
자 하나 정리하고 둘째시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지금 세 번째 쓰는데 잘 보시기 바랍니다. 심판이 있고 심판주가 있는데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라고 했습니까? 또 잊었습니까? 세 번째 강조하는데 왜 제게 이 점을 강조하는가 하면, 심판주를 인간의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누가 죽입니까? 섬기기 바쁘지요! 인간들은 하나님이라면 껌뻑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 되었습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셔서 오시니, 사람들은 뺨을 때리면서 네가 메시아냐? 그러면 누가 너의 뺨을 때렸는지 알아 맞춰보라고 하였습니다. 가위 바위 보해서 옷을 빼앗고,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서는 네가 메시아고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 자신을 구원해보라고 모욕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하나님과 직접 우리 코앞에 나타난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된 죄성으로 인하여 엄청난 간격과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주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심판주가 무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살해된 이유가 무언가? 그 이유는 우리 속에 있는 잘못된 구원관, 잘못된 축복관, 잘못된 천국관 이런 것들을 조상 때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구원관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고생에서 편하게 살자는 것이지요. 고생에서 벗어나 편하게 살자는 이 방법에서 나온 종교가 불교입니다.
불교는 생로병사를 고뇌로 봅니다. 사람이 왜 고생스러운가 하면 환경이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이 고생스러워서 그렇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에서 욕심을 버리고 소유를 버리면 된다고 도를 닦은 성철스님이 이야기 한 것입니다. 제가 한 십초 동안 이야기 하였습니다만 그 도란 마음을 비우면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이 불교가 이미 한국 땅에 자리 잡았잖아요! 그 불교가 어설픈 기독교로 변질 된 것이 오늘날 교회 아닙니까! 내 마음 바꾸면 복 받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교회 십년 다니고 이십년 다니고 목사 된다고 해도 마음 안 바뀝니다.
내가 이것만은 해결하였다고 하는 어떤 성깔도 다시 새로운 환경을 접하면 다시 도집니다. 다시 발생됩니다. 사람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이 여러분 자신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편하고 여유가 있을 그 때는 교양 있는 척을 합니다. 하지만 남자들 예비군 군복 입혀주면 신사에서 갑자기 불량배로 바뀝니다.
사람이 환경이 어려우면 교양이고 예의고 그런 것 한 순간에 다 날려버립니다. 열 사람이 있는데 밥그릇이 열개 있었습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열명인데 밥그릇이 하나라고 하면 난리 납니다. 원수 됩니다.
십억 대 가진 아버지가 병들었습니다.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자식이 열명입니다. 아버지가 10명 중에 누가 착한 자식인지 심사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식들은 서로 우애가 넘칩니다. 왜 우애가 넘치는가 하면 유산 10억을 노리면서 우애가 넘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난리 납니다. 자식 열명만이 아니라 마누라까지 달려들어 20명이 달려듭니다. 형제간에 재판합니다. 이 원한이 자식과 손자까지 가는 것입니다. 아마 증손까지 내려갈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이, 재산이 있는 사람이라고 유산을 탐내지 않는 줄 아십니까? 있는 집 없는 집 상관없이 공짜라면 다 좋아합니다. 없는 형제 좀 더 줍시다. 그것은 빈말이고 나중에 나눌 때 되면 똑같이 나누자고 나옵니다. 그런 일은 장례식 끝나고 한 달 뒤면 난리 납니다.
형님은 장로고 형수님은 권사고 동생은 집사고 막내는 목사고 해도 목사고 집사고 간에 돈 앞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목사가 돈 됩니까? 누가 돈을 선점하는 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뭐 성화되고 거룩한 생활하고 그런 것은 아까 말한 대로 머리 굴리는 것입니다. 성화되면 돈 더 줄 줄로 아는 하나의 제스처를 부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스처입니다. 무슨 이야기 하다가 흥분해가지고 이까지 왔습니까?
불교에서는 마음을 비우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세상에서 구원관이 예수님을 못 박을 수밖에 없는 구원관이란 것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구원관은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이 예수님의 구원관이라면 인간의 구원관이 뭐냐 하면 인간의 자질과 인간의 능력을 누가누가 더 잘 관리하고 시합해서, 말씀을 더 많이 지킨 사람이 더 많은 복을 받고 말씀을 적게 지킨 사람은 지옥 보내기로 그렇게 합의한 것입니다. 그렇게 합의 본 것이 바로 독사의 자식들이 한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기 위한 보조 법이 365가지이지요! 그러니 성직자들은 90%, 그리고 백정들이나 창기나 세리 같은 자들은5% 그러니 당연히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천국 갈 것이고 세리와 죄인들은 지옥에 가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이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9장에서 말한 창세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의 피로서 완전히 종결되고 구체화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씻어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외에는 다른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영생이고 부활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선택론과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둘째 시간을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목적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출현한 것이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태어나고 보니 목적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창세전에 목적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너는 사랑 받아야 돼, 너는 나에게 예쁨을 받아야 돼,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저주 받기 위하여 따로 태어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시간에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하면, 그러면 이 땅에서 어떤 사람은 사랑 받기도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분류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저주 받기로 작정되어 있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를 셋째 시간에 이야기 하겠습니다.
5분 쉬겠습니다.
녹취 050824 이장우
구원론 중 선택 1-3
05. 5. 9일 강의 이근호
세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둘째 시간의 강의를 요약하겠습니다. 왜 요약을 하는가 하면 강의를 하다보면 둘째 시간 하면 첫째를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첫째 시간에서 제가 이야기 한 것은 심판의 기준에 대하여 우리가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심판의 기준을 제시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 지옥 가는가에 대하여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지옥 간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아 하셔서 그렇게 결정 내리신 것입니다. 천국 가는 사람은 역시 예수님께서 기준을 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면 오고 가라 하시면 가는 이런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중이떠중이 같은 제 3의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 죄송합니다. 없습니다.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그런 곳에 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들지를 않았습니다. 왜 그런 사람을 안 만드셨는가 하면, 그것이 어렵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천국이란 것은 지옥을 바라보고 지옥은 천국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국이 있기 때문에 지옥이 지옥다운 것입니다. 아 나는 천국도 못 가고 이곳이 지옥이구나! 지금 지옥인 것을 아는 것은 천국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지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어중간한 제 3의 지대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난 두 번째 시간에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가 하면, 제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세전에 사랑받기로 되어 있는 사람,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나야만 해서 태어난 사람들, 하나님께로부터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은 천국 가고, 바로 이것이 저주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저주 받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이 바로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사랑도 아니고 저주도 아닌 제 3의 인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쉽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갑니까? 이 천국의 사랑의 법칙에 대하여 대드는 사람은 백퍼센트 지옥 갑니다. 천국의 원리,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만 구원받는 다에 대해서 대드는 사람, 이의를 거는 사람은 백퍼센트 지옥 갑니다.
이유가 무언가 하면, 천국에 가는 당사자도 자기가 원해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여기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데 네가 잘했는가? 내가 잘했는가? 하면서 싸우면, 제 3의 사람이 와서 누가 잘했는지를 판단하면 되는데, 지금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대드는 사람은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상대로 싸우는 것입니까?
바로 구체적인 하나님, 예수님을 상대로 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그 공로에 대해서 시비를 걸기 때문에, 천국의 주인과 천국의 심판주에게 대드는 것이기에, 구원 받는 사람과 상관없이 예수님께 대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결국 지옥 갈 수밖에 없지요! 천국 가서 데모할 일이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6: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기 않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저는 그 대목을 생각하면서 노태우 전두환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해 봅니다. 두 사람은 전직 대통령이고 한 사람은 현직 대통령입니다. 그들이 죽어서 어디에 갈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록 직책은 대통령이지만 문제는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대통령이든 소통령이든 국무총리든 노숙자든 백수든 상관없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인간들이 머리 맞대고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확정된 원리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또 대듭니다. 지옥 갈 사람들은 아주 머리가 좋아서 잘 대듭니다. 이렇게 대듭니다. 그러면 목사님 물어보겠습니다. 물어보든지 꼬집어보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우리나라에 복음이 천 팔백년 말기에 들어왔는데, 그러면 세종대왕, 이성계, 왕건, 강감찬, 을지문덕 아는 장군 다 대봅시다. 그런 훌륭한 사람, 세종대왕 같은 그런 성군이 단순히 예수라는 남의 나라 메시아, 남의 나라이지요! 이스라엘이니 그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을 몰라서 지옥 갔다면 얼마나 억울하냐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주시라는 그 복음을 듣지 못하여서, 듣기만 하였다면 믿을 가능성도 있었을 텐데, 못 들어서 못 믿은 사람은 기회조차 박탈되었기에 기회 균등의 원리에 어긋나서 지옥 가는 것은 얼마나 억울한가 하는 것입니다.
또 가까운 예로, 저의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너무나 잘하여 주었는데, 그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내가 오늘날 목사도 되고 무엇도 다 되었는데, 단지 그 어머니의 약점이 하나 있다면 교회를 다니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그 작은 것 하나인데 그 어머니가 죽어서 지옥 불구덩이, 구더기도 타지 않고, 물 한 방울도 없는 그 곳에서 영원히 고통 받을 수 있느냐고 하지요!
거기에 대하여 두 번째 시간에 이미 말씀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신자는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불신자는 어떤 능력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향하여 욕을 하도록 되어 있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욕을 하는 능력인데,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는, 교회가 오기 전까지는 예수님께 욕하는 능력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라든지 강감찬 이라든지 세종대왕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모든 사람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그 은혜에 대하여 모독하는 잠재능력이 있었는데, 그 능력이 세종 대왕의 아들 같은, 그 아들이 이씨지요! 저도 이씨지만 전주이씨, 이성계의 아들들에 그런 모독하는 능력들이 번식되어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복잡하여 졌는데 이성계 속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를 모독하고 예수님께 욕을 하는, 예수의 뺨을 때리고 지금 예수라면 죽여 버리는 그런 능력이 있었는데 그 능력이 발휘되기는 19세기말 20세기 초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에 그 능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현재 교회가 있고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만 안 믿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복음을 듣지 못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안 믿는 본성, 그 유전자를 누구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까? 이성계라는 조상으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파되지 않아서 믿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들 속에 믿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지하로 흐르다가 복음이 전파되니 우리나라 전부가 복음을 거부하는 사실을 인하여 들통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몇몇이 구원을 받더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면 다 믿을 것이라는 그런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분류작업입니다. 일종의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라는 식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구원 받기로 작정된 사람이 맞습니까? 하는 식입니다.
사람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피만 있으면 천당 갑니다. 아무리 나쁜 인간이라도 용서받고 천국 간다고 했을 때에, 그 따위 소리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 엉터리 하나님 같으면 나 안 믿겠어! 하는 반응이 나온다면,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비로소 들통이 난 것입니다. 아 이 사람은 구원 안 받기로 작정이 된 사람이구나! 이 사람의 이런 자질은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것이구나! 그렇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고서, 아 그렇습니까? 놀라운 복음이군요! 나는 그동안 구원받기 위하여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했는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나를 구원하는 것 인줄도 모르고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잘 못 되었습니다. 하고 나온다면 그 사람의 자질은 이성계로부터 내려오는 혈육이 아니라, 지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혈육과 상관없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혈이나 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딱 마주치게 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속에 말씀이 역사하셔서 놀랍게도 그것이 믿어지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모이게 만나고 모이게 된 두 사람을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란 피 때문에 모인 사람입니다. 피만 전파하지 않으면 백 명이 모여도 그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곳은 절입니다. 아까 말하였듯이 고생을 면하기 위하여 신에게 예수께 비는 신종 조계종입니다. 대한예수교 조계종 무슨 교회 이지요!
교회란 것은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피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부름을 받아 그 피에 담긴 용서의 깊이와 넓이에 대하여 더 폭넓게 은혜에 감사하게 하기 위하여 모인 곳이 바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교회에다가 여러분! 피만으로 안 됩니다. 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명령을 다 지켜야 합니다. 피만 믿다가는 도중 탈락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 사람은 피는 일단 제치고 그 다음부터 자기 의를 행사하기 위하여 애를 쓰겠지요!
그러면 그곳에서 경쟁이 생기게 되고, 우월반과 열등반이 생기고, 내신 성적이 생기게 됩니다. 내신 성적에 대하여 목사들이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더 많다고 보너스를 더 준다합니다. 보너스가 없는 사람은 팬티바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기 위해서 승진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사에서 권사로 장로로 승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곳은 자기 자랑하는 곳이 되어버립니다.
지금 제가 아직 셋째 시간 이야기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시간 둘째 시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를 끄집어내겠습니다. 아까 예고한 어떤 사람이 창세전부터 사랑을 받을 사람으로 판정되고 어떤 사람은 저주받을 사람으로 되어 있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 부분은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2;12절입니다. 여기서 참고로 말씀드릴 것은, 목사님 당신의 말대로 구원이 이미 창세전에 확정되고 종결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막살아도 괜찮지 않습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는데 언제는 막살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막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막살지 않고 나름대로 조절하여 온 것이 착한일 하고 싶어서 환장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혹시나 나쁜 짓하면 벌 받을까 싶어서, 남은 생애를 고통 중에 보낼까? 아픈 것이 두렵고 죽는 것이 두렵고 남에게 망했다는 소리 듣는 것이 두려워서 자체적인 조절에 나선 것이지 사실은 그것만 없으면 우리는 막사는 사람입니다. 사실을 그것이 막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편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편안한 여생을 위하여 막산 것입니다. 하나님 좋아서 그렇게 산게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막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가 요한일서 3: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2장의 말씀을 보기 전에 먼저 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알았으면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못 들었습니까? 다시 할까요? 이런 말씀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기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는 것입니다.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제가 오늘날 교인들이 막산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인들이 자기 나름대로 성결한 생활하도 자기조절하면서 이러면 안돼! 술 끊고 담배 끊어야지 하면서 노력하는 것은 일단 자기가 생존해야지요! 자기가 살고 봐야지요! 살아남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왕 살아남은 것 복 받고 행복하게 돈 많이 벌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3:16절 말씀에는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 예수 믿습니까? 예! 그러면 죽으세요. 이 말입니다. 아니 예수 믿고 죽을 것 같으면 안 믿고 말지 뭐하려고 믿고 죽습니까? 예수 믿고서 일주일 만에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 나오는 보상이 무엇입니까? 없잖아요?
교회 다녔다! 오래 살았다! 재벌 되었다! 이러면 알겠는데 요한일서 3:16절에 의하면, 교회 다녔다. 일주일 후에 교회 형제가 위태한 처지에 있었다. 자신이 대신 뛰어들었다. 형제 살리고 자기는 죽었다. 그러면 그 가족들 할렐루야 하겠습니까? 목사 너 이리와 봐! 목사 네가 우리 동생 죽였어! 보상 합의합시다. 이렇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말 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성경을 대충 보면서 자기가 복 받을 수 있는 것만 끄집어 내지 요한일서 3:16절 이런 말씀을 보지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고서는 능히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아니 교회 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소유를 증식하기 위하여 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 말씀에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고서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내가 온 것은 집안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시어미니와 며느리가 싸우고 아버지와 아들이 싸우고 형제끼리 싸우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교회에서 좋은 아버지 되기 위한다는 프랭카드 걸고 가정 화평을 위한 세미나 열고 그게 무슨 짓입니까? 무슨 그런 짓이 다 있습니까?
어버이 주일, 어버이 주일하고 예수님의 피가 무슨 관계있습니까? 어린이 주일하고 예수님의 피와 무슨 관계있습니까? 어린이는 잠언서에 보면 애를 패라고 되어 있습니다. 애를 패지 않으면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효도하라는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 예수님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이 외에 다른 효도가 없습니다. 돈 더 드릴까요? 이것이 효도가 아닙니다. 아버지! 왜 그래 이놈아! 아버지 주제파악하세요! 내 주제가 무언데? 지옥 갑니다. 이보다 더한 이웃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 때문에 예수님 죽으신 줄 모르십니까? 이 불효자식! 누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더냐? 예! 아멘, 할렐루야!
예수님께 어떤 제자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수님 방금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장례 치르고 따르겠습니다. 하였을 때에 효자 났다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어버이날 설교해야 합니다.
어린이를 때리지 아니하면 아이를 망친다고 어린이날 설교 해야 합니다.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 같이 하라는 말씀과 인자가 올 때에 사람들이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갈 때에 주님께서 갑자기 재림하신다는 이 말씀을 결혼 주례 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있으니 아끼지만, 마지막 심판 때에는 그 있음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부모가 구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내 삼촌이 내 대신 십자가에 죽은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우리 엄마가 내 대신 피 흘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모두다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이 하신 업적으로 통일되라고 인간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성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너무 심한 말을 해서 후회되는 감이 있습니다만, 말은 맞지 않습니까? 말은 맞은데 제가 하는 취지는 이것입니다. 심각하지도 않은 문제인데 심각하게 하면 시험 듭니다. 너무 부모 자식 가족 결혼 되도 안한 이런 일, 마지막 때에 중요하지도 않는 이런 일 가지고 거기에다 사활을 걸면 잘못하면 자살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 못하였다고 가슴앓이 하는 것 좋지 않습니다. 살아생전 부모한테 못한 것이라고 불효자식이라고 후회하는데, 후회하는 그 자체가 자기 마일리지 쌓여서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원래 그런 놈이야 하면 될 것인데, 아버지 살아계실 때에 왜 따뜻한 소리 못했고 하며 후회하지만, 다시 살아나 보세요! 따뜻한 소리 나오는지, 사람이 머리로는 무엇이 옳은지 알아요! 그런데 행동은 머리보다 자기 욕망에 따릅니다. 그 욕망이란 내 살고보자는 것입니다.
내 살고보자는 것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자식이고 부모고 그렇습니다. 이게 인간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에게 요한 일서 3:16절 말씀, 네 형제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 말씀을 누가 지킵니까? 아무도 이 말씀을 지킬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몇 가지 지켜 놓고서 복달라고 합니까? 이 말씀 들이대면 무슨 복이 옵니까? 자기를 미워하면 살 것이고 자기를 사랑하면 죽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자기를 사랑하지요! 자기를 미워한다면 다 죽어야 하지요!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에 자기가 지킬만한 것만 뽑아내면 안 됩니다. 그것은 비겁한 짓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봐야지요! 울고 통곡하라 그러면 기쁠 것이다. 이런 말씀은 우리의 예상을 능가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사를 갔습니다. 입 댁 예배를 드려 주세요!
저는 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가서 본문은 무엇인가 하면, 마태복음 8장을 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참새도 깃들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말씀을 봅니다. 집하나 챙겼다고 복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집 챙긴 것이 복이 아니라 나는 집이 있더라도 예수님만 믿겠습니다. 하는 그런 마음가짐이 복 받은 것입니다.
집 팔아서 교회 바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는 그런 사람도 없겠지만, 집이 있든 없던 간에 주시는 것은 챙기고- 이야! 중요한 말이다. 이것 놓치면 큰일 날 뻔 했다 주시는 것은 일단 챙기고-,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했잖아요!
자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그런 원리가 어디서 나오는가? 고린도 전서 2:12절을 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주가 나타났습니다. 심판주가 예수님입니다. 여기에 인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똑같이 엉터리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류작업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과 이성과 성경해석으로는 스스로 자기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분류를 하는 것은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어떻게 심판을 하시는가 하면, 한쪽은 영을 주고 한쪽은 영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영을 안 준 쪽은 육만 남는 것입니다. 지금 제 말이 맞지요! 이 쪽도 육인데 이 육은 영이 들어온 육이고, 이 쪽은 영이 안 들어 왔으니 육만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에 의하면,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영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지 육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3:6절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육이 천국에 들어간다? 심판을 통과한다?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도저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강의한 것을 정리하면 간단합니다. 영만 받으면 됩니다. 이것입니다. 제 취지가 무언가 하면, 어떤 사람이 천국가고 지옥 갑니까? 어떤 사람이 창세전부터 천국 가기로 작정되고, 어떤 사람이 창세전부터 지옥가기로 결정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제 답변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영을 받은 사람은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육 그대로 있기에 이런 사람은 지옥 갑니다. 일단 이렇게 정리 해봅시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기독교 신자 가운데 영을 받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영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순복음도 그렇게 말하고 다 주장합니다. 고린도전서 2:12절에 보면 영을 받게 되면 그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즉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하면, 내 자질과 내 능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내 능력과 자실과 윤리와 도덕과 내 종교심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기도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2:9절을 봅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함과 같으니라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것입니다. 인간의 상상이나 생각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적인 사람은 신을 그리워하고 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기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착한 일, 기도 열두 시간하기, 방언하기, 병 고치기, 어떤 성경적인 해박한 지식을 가지기, 헬라어 히브리어 좔좔 외우기, 자기 딴에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2:2절처럼 말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하였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압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는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만으로 우리의 모든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만은 모릅니다. 아무리 신학지식이 능통하고, 아무리 마음이 청결하고, 스님처럼 순수하고 순백의 마음을 가져도, 십자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따로 영을 받아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제가 기도도 많이 했지만 그것으로 구원되지 않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무어냐?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제가 신학공부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 죄만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구원받는 것은 십자가뿐이기에 십자가만 붙듭니다.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결국 강도처럼, 강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창녀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에 강도가 되어서 옆에 누구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예수님! 예수님의 피의 의미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한 평생 살아온 것은 제 자랑밖에 없는데 제가 이제부터 살아갈 것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인 십자가만 자랑하겠습니다.
목사라고요? 그 목사 되었다고 얼마나 행세했습니까? 목사 되어서 죄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장로 되어 죄 지었는데 저는 목사 되어 죄를 지은 것을 알라고 목사 시킨 줄 알겠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아는 것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기도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마음으로 깨달은 것도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십자가의 영으로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2장 2절에서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2:4-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아직 제 말의 결론이 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입니다. 영을 받은 사람,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남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이야기 하면 됩니다. 영을 받았기에 자기가 육임을 압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영을 받았기에 자기가 육임을 압니다.
좀더 어렵게 합시다. 모든 인간은 아담아래 있습니다. 아담아래서 죄를 받지요! 아담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동그라미가 하나 더 있습니다(그림을 그리면 강의하기에 추측하시기 바람). 영을 받은 사람은 아담아래 있으면서 또 어디에 있는가 하면 바깥에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가하면, 은혜를 줍니다. 무슨 은혜? 십자가의 은혜를 줍니다. 십자가의 피는 무슨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용서하는 기능입니다. 여러분 이해되십니까?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은혜를 받았다는 말이고 은혜를 받았다는 아까 고린도 전서에서 보면 무엇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인간은 다른 것은 다 아는데 십자가는 모르지요! 십자가를 알려면 은혜를 받아야지요! 은혜를 받아 십자가를 알게 되면,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줍니까? 용서를 주지요? 요까지 이해가 되십니까?
용서가 되면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완벽한 게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특징은 죽을 때까지 점점 더 무엇을 알게 됩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없고, 평생 살아보았자 죄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죄와 용서가 결함됨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예수님의 공로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만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행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는 것이 갈라디아서 2:20절에 나오지요!
따라서 이 성경 말씀은 무엇을 공격합니까? 현재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계속 공격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 말씀은 마땅히 우리보고 하는 말씀이지요!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는 미쳤나? 아니 살려고 교회 오는데 형제를 위하여 죽는 그런 미친놈이 어디에 있어요! 다 살고자 오는데!
그런데 그 말씀이 딱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내 살기 위해서 교회에 돈 수천만 원 바치고, 내 살기 위하여 내 가정 잘되고 내 자식 공부 잘하라고 열심히 봉사하고 청소다 했는데, 요한 일서 3:16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죽어야 되는데 그렇다면 내가 해도 남는 장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실컷 봉사하고 헌금 할 때는 우리교회에서 나처럼 착해서 복 받을 사람 있다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러다가 목사님이 요한일서 3:16절을 말씀하시니, 야! 내가 바로 간사하기 짝이 없고, 내가 통박을 굴리는 아주 교묘하게 교회 나오면서 머리를 굴렸구나 하는 것을 알았을 때, 성경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주여! 이런 인간을 예수님의 용서로서 감싸주시고 더욱 은혜를 은혜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죽더라도 구원받는 것은 내가 착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신다면, 정답은 예수님의 공로만 자랑합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죽을 때까지 죄인 일 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는 듯한데, 성경적으로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데,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예수! 예수! 예수! 하고 다니고, 아까처럼 부모에게 용돈도 안 드리고 전화로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그런 식으로 막말을 해야 합니까? 잠언서에서 아이를 때리라고 하였으니 막 때리면 됩니까?
여기서부터 여러분이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 까지는 되었지요? 나는 말씀 앞에 죄인 이며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습니다. 이것 까지는 되었지요!
그 다음에 남들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면, 남을 징치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아담의 속성을 놀랍게도 불신자도 공통분자로 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예수 믿고 난 뒤에 무엇을 알았다? 예수 믿고 나서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자기 자랑을 하면, 성령을 받기 전에는 목사님이시니 그런 능력을 받았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성령을 받고 나니, 아하! 저것이 성령 받지 못한 목사의 특징이구나! 파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파악을 하고 나면 그 사람을 욕하라는 것입니까?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다고 욕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나도 저랬었지! 나도 저랬었지!
그러니 모든 사람을 보면서 자기는 잘났고 다른 사람은 못났다는 것이 아니라 나도 저랬었지! 지하철에서 소매치기 하는 사람을 보면서 나도 배고프면 저랬을 거야! 그러니 저놈 잡아서 집어넣어야겠어! 왜? 나도 누가 잡아주었기에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그러니 너도 경찰서로 가자. 왜?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집어넣어야겠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십니까?
제가 목욕탕에 가면, 담배피우는 사람을 관리합니다. 좀 후진 목욕탕에 가면 남탕에는 담배피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 아무도 말 안하는데 저는 가서 말합니다. 여기 금연 보이지요! 담배 피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새마을타고 오다보면 휴대폰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수원역에 학생들이 많이 내리는데 학생들이 전화를 오래하면 제가 말합니다. 학생 공공장소에서 오래 하지 마! 너희 집 아니니 빨리 끊어! 그렇게 말합니다. 남들은 가만히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지적하는 이유가 저게 바로 내 모습이기에, 자기만 알기 때문에 누가 이야기 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만약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 같으면, 불신 남편이 술 먹고 구타하면 천사 같은 내가 참아야지 이렇게 나갑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저 때리는 남편이나 내나 똑 같은 인간인데, 만약 저 남편이 내 같으면 어떤 사람이 와서 고소해서 인간 만들면 내가 얼마나 그 사람에게 고마워하겠나! 그래 저 남편 고소해서 잡아넣어야지! 여보 같이 갑시다. 왜? 그게 사랑입니다. 그게 내가 당신보다 낫다는 것이 아니라 그게 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안되면 그만이고! 그게 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매일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공부도 하지 않고 노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은 뭐 대충 하지 내가 한다고 인간 되는 것도 아니고, 이근호 목사님 말씀을 들어보니, 하나님이 택하여야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내 버려두라 그러겠지만 그러나 성령을 받고나면, 봐라 저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구나! 누가 나무라 주면 나중에 커서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겠느냐? 그래서 막대기 들고 공부할래? 안할래? 이게 사랑의 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고 나서는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으니 간섭한다는 것이 아니라, 둘 다 못났으니 이 못난 것을 알게 된 내가 아직도 잘난 줄로 알고 있는 당신이 주제파악을 하라고 한마디 해야 되겠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제가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인가? 세상 사람들의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전에 자기 눈에 있었던, 지금도 있지만 들보를 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그 모습이 자기가 옛날에 잘난 체 하면서 살아가던 그 모습을 재판하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다는 차원이 아니라 나도 그 느낌을 안다는 의미에서 다가가서 아저씨 이런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너 뭐야? 나도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나서 내가 부족함을 알았습니다. 이러시면 안 되지요!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습니다. 라고 사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서로 권면하고, 서로 관심을 가지고, 서로 돌보아 주라고 로마서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이것은 잘 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절대로! 자기의 처지를 너무 알고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그저 사랑으로 권면해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예를 들었습니다만 다시 한번 걱정이 되어서 이야기 합니다. 흔히 교회에서 예수 믿고 나서 불신 남편에게 말하기를 나는 성령 받은 아름다운 천사, 너는 개 같이 예수도 믿지 않는 나쁜 남자, 그러니 때려라 나는 천사가 되어서 맞겠다. 이런 되지도 아니한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는데, 맞는 그 사람이 바보입니다. 같이 패든지 ??, 아니면 말리든지, 상대방에게 이야기해서 당신 이러면 안돼! 라고 충고할 수 있는, 그런 겁날게 없는 여러분 되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그게 바로 자유입니다. 그것 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니까, 이미 구원받았으니, 마음껏 여러분의 과거의 모습이 있거들랑 남들을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용서를 받고 보니, 세상이 제대로 보이고, 우리 자신도 제대로 알게 되었고, 예수님이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는 지도 알게 되었사오니, 이제 남은 생애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와 세상이 심판 받음을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녹취 050830 이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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