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조직신학
구원론 1-1 05.4.11일 이근호목사
오늘은 구원론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179페이지입니다(조직신학의 고속도로). 이 책의 내용에 보면 독특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자기가 어떻게 구원되느냐는 것은 이 세상의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론이고,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셨는가 하는 것이 기존의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구원론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님을 구원하시는가 하는 것이 구원론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하는 것은 구원론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제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기발한 발상이고, 도발적인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를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고 할 때에 모든 사람을 다 말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것도 아니고, 이 말씀은 어떤 계층이나 신분적인 차별에 관련 없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는 무조건 다 구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도 다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는 그 사람이 반항을 하든지 저항을 하든지 상관없이 구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65장에 보시면 신약에서 어떻게 구원될 지를 미리 예언한 내용이 있습니다. 구원론을 하는 내내 이 말씀을 잊으면 곤란합니다. 이사야 65장 1절입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그런 하나님이 있고 없고도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주여! 라고 반응이 일어나는 현상이 언제냐 하면, 마지막 때에 그런 현상이 꼭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여호와를 불렀던 사람들은 여호와를 배척하고 거부하게 되고, 반대로 여호와를 찾지도 않던 족속과 이방민족에게서 부름을 받았는데, 그렇게 된 것이 이사야나 다른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 미셨기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결국 무엇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알아서 구원 받겠다고 선뜻 나서는 그런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순전히 하나님께서 강력한 손길을 내민 그 사람에게만 당첨되고 뽑혀 나와서 구원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날 때 그것이 마지막 때의 구원되는 방식입니다.
처음부터 엄청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데 어렵다는 것은 처음에 말한 대로 구원받고자하는 것은 일반종교, 불교나 기독교라 하는 것도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되지 하면서 신을 찾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어야겠다는 것으로 자기 구원을 담보하고, 자기 구원의 근거로서 신을 찾는 이런 양상이 일반적인 종교라면, 그런 것은 구약 때에 이미 다 해본 것인데 그런 것이 다 실패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구원되기 위하여 나오기 전에 이미 방패막이로 율법을 주었기 때문에, 인간이 율법을 받은 이상은 이 율법을 침투해서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에덴동산과 같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아버립니다. 안된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일종의 불도저처럼 하나님 쪽에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금지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들이 헛되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기 위하여 율법이라는 강력한 방패박이로 내미시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하였을 때에, 네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 앞에서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우리생각 같으면 그 부자 청년을 일단 제자 삼아놓고 제 3의 작업 제 4의 작업으로 들어가도 될 텐데,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이 어떻게 나올지 이미 그 속내와 속셈을 다 읽고서, 그 부자 청년이 아무리 십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주님께서 그 청년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부분을 터치하시니 근심하며 돌아섰잖아요!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이 이사야 65장의 말씀을 성취하려고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를 성취하려고 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구약의 성경말씀을 성취하시려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알아서 구원받겠다는 시도는 강력하게 저지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지, 즉 막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구원노력을 저지시키고 무산시키고 철회시켜서 불가능하게 하셨다면, 인간이 구원되지 않으면 구원자체가 성사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 구원을 배제하고 무슨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느냐고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나는 저 강아지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서 밥을 했는데 밥을 하고 있는 중에 강아지가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면 그 밥이 필요하지 않잖아요? 먹을 대상자가 없어졌으니,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겠다면 사람이 있음을 기정사실로 해서 그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손길을 내미신 것이지, 사람이 구원받겠다는 것도 저지하신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대상이 없기 때문에 구원 자체가 성사될 리가 없지 않느냐고 아마 그렇게들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렇지요! 구원할 대상자를 배척하여 놓고서는 무슨 구원이라는 말이 성사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65장 1절을 다시 읽어보면,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고자 애초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나서지도 아니한 자들이 구원받는 일이 나온다는 것은 무언가 그 전에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때에 메시아가 한 어떤 작업 때문에 이러한 희한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무슨 작업을 하였느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과정에서 이사야 65장 1절의 말씀이 성취되게 하시다는 것입니다. 일종에 하늘에 계신분이 에스코트해서 구원받을 자가 없는 이 마당에, 에스코트하는 그 차에 의하여 구원받는 자가 불쑥 불쑥 나타날 때, 그 때에 이사야 65장 1절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하던 자들이 하나님을 구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찾게 되는 이러한 특이한 일들이 불쑥 불쑥 일어나는 것은 마지막 때에 어떤 분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것이 구원이라고 앞장서서 에스코트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자국이 있기에 그런 자국에 의하여 걸려든 사람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함께 구원되는 양상으로 이루시겠다는 것이 신약의 구원관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구원관입니다. 그래야 이사야 65장의 이 말씀이 성취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발적으로 구원되고자 폴짝 뛰는 사람은 거부해버리고, 나는 구원이 필요 없어 구원이란 천국이 있어야 구원이지 천국도 없는데 무슨 구원이야, 사람이 죽어봐야 알지 안보고는 몰라 하면서 삐딱하게 일체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관심이 없든 자들이 사도행전의 말씀에 의하면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나더니 갑자기 놀랍게 변화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라고 외칠 수밖에 없지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 아닙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고넬료도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기잡이 하던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시몬에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고기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며 주님께서 먼저 오셔서 뽑아내신 그 수자가 열두 명이었습니다.
열두 명이 맞지요? 그 열두 명을 주님은 이스라엘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수자가 열두 명입니다. 인물 좋아서가 아니지요. 그래서 가룟 유다가 배신하고 나갔을 때에 끝까지 그 열두 명을 채운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열둘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열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구약에서 나왔습니다. 구약 말씀을 주신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 본인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구약의 말씀을 주시고, 그 주님이 혼자 말씀을 다 이루시고 그 이루신 결과에 의하여 편성되고 동참된 사람을 가지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구원이란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 홀로 하실 일입니다. 주님홀로 시작하셨고, 홀로 중간과정 다 이루시기 위하여 중도금 다 내시고, 잔금까지 다 치루시고 우리를 납치하시듯이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구름타고 천사와 함께 주님 재림하실 때에 죽은 우리를, 무덤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듯이 죽은 우리까지 끄집어 내셔서 너는 처음부터 내 백성이었어! 하면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계획은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이미 창세전에 있었습니다. 창세전부터 이미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없는 누구를 일부러 만들어서 만든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접근하셔서 성령세례를 주어 믿음이 생기게 만들고 믿음이 생긴 그자를 내가 다시 납치하듯이 하늘로 채가서 주님과 함께 더불어 살게 한다는 이 모든 복안과 프로젝트와 시나리오와 계획은 우리 인간 선에서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 윗선에서 이미 윗분들의 결제가 나서 옮긴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결제되었기에 그 뒤풀이로 일어난 현상이 아무개 아무개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 곁에 주님이 붙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8:9-10절입니다.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전도의 실적을 위하여 새삼스럽게 수고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가려고 계획 잡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의하여 고린도에 와보니 거기에서 제 2의 지시가 여기서 두려워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곳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 백성이 구원을 받는데 그 일에 너와 만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시간에 천사가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가 되도록 중매를 해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만나보니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무엇부터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안에 보니 변함없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짐승들이 들어 있는데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해야 율법에 맞는데 반대로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기존의 율법에 저촉되는 것은 유대인으로 족하고 이미 끝났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다루든 대상은 유대인으로서 이미 끝나고 종결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은 율법이 아닌 방식입니다. 베드로보고 율법을 어기라고 촉구한 것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베드로보도 율법을 어기라고 촉구하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율법이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시대에 접어 들었음을 정신 차리고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환상을 보고 나서 나는 이방인에게도 보냄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의 말씀에 나오는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구함이 되었고,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음이 되었다는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율법에 어긋난 것을 먹으라고 주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즉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구원이 너희자신이 너희들의 방식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란 애초부터 너희들의 손에 있지 않고 오직 내 방법으로만 구원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인간들끼리 경쟁 붙어서 일등으로 온 사람은 구원시켜 주고 뒤에 온 사람들 자격이 미달 된 사람은 떨어지게 하는, 인간들끼리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방식에 있어서 새로운 구원 방식이 돌입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31장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와 새 언약을 맺으리니 이 언약은 옛날 애굽에서 나올 때 주어진 율법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는 율법을 지키면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법칙이지만 새 언약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은 너희들이 무엇을 해라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완제품으로 우리들 속에 쑥 들어와 버리는 것입니다.
저항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건전지라면 그 건전지가 아예 우리 마음속에 내장되고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 배터리가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서의 언약이 우리 속에 내장되면 하나님의 언약이 박힌 사람이 되고 그 심지가 박힌 사람은 그 언약 때문에 그 언약을 겨냥해서 주님은 그 언약을 보고서 건져 낼 자와 건져내지 아니할 자를 저 쪽에서 결정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전까지는 무엇이냐? 그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셔도 그 주신 약속을 우리가 지키는 조건하에서 언약과 관계있는 사람이었는데, 새 언약은 우리가 지킬 사이도 없이 그냥 우리 허락도 안 받고 싹 우리 속에 내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내장된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자청년은 그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부자 청년을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율법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켜왔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지키라고 주신 율법이니 다 지켜 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 지킨 것은 아니지요! 열심히 노력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때에는 그런 방식으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옛 부대에 새 술이 담겨지는 것을 주님께서는 허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러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이사야 미가야 그런 긴긴 역사 걷어치우고 아담이 타락하면 바로 구원하시면 되실 텐데 왜 그런 긴긴 절차들이 필요한가? 예수님 보내셔서 바로 구원하시면 되실 텐데 왜 그런 귀찮은 절차를 사용하셨는가 하면, 그런 선지자를 양산하는 집단은 아담의 끝을 보기 위함입니다. 아담의 본질 아담의 끝이 누구와 손잡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데 악마와 손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에도 나오잖아요! 다니엘의 짐승이 어디서 나옵니까? 느부갓네살이 세웠던 그 나라가 우리 보기에는 나라이지만 다니엘의 입장에서 보면 나라가 아니라 바다 속에서 올라온 짐승입니다. 그 특징은 인자의 나라, 인자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오실 메시아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 핍박하는 특징이 무엇이냐 그것이 인간 세상의 특징입니다. 그러한 짐승이 느부갓네살의 바벨론만이 짐승이 아닙니다. 만약 바벨론만이 짐승의 나라라면 그 다음에 나오는 나라들 매대 바사 헬라 로마제국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선배 느부갓네살왕이 겁도 없이 여호와를 믿는 유대 나라를 핍박하다가 혼났으니 우리가 다른 나라는 건드려도 그 나라에는 조심하자고 하면서 반성하고 개과 선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아닌 것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꿈에 큰 금신상이 나오는데 머리부분은 바벨론이요 마지막 발 부분이 어느 부분인가 하면 메시아가 오시는 것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아니한 뜨인 돌이 어디에 맞습니까? 이마에 맞습니까? 골리앗 같으면 이마에 맞는데 그 돌이 그 우상의 발에 맞는 것입니다.
발에 맞는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 바벨론으로부터 매대 바사 마케도니아 헬라 로마라는 모든 줄기가 아무리 정권이 바뀌고, 2백 나라가 되고, 월드컵이 열리고, 유엔 총회가 열리고, 교황이 까불어도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메시아가 올 때 까지 그 속성은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잖아요! 여자의 남은 자와 대적하기 위하여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 나오지요! 아들을 잉태한, 예수님을 잉태한, 보여준, 그 남은 여자를 향하여 싸우기 위하여, 남은 자와 싸우기 강가에 서잖아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지요! 그것이 다 구약의 다니엘서의 완성입니다. 다니엘서를 예수님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요한계시록에 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역사, 인간 역사는 끝장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나라가 망한 이유도 유대나라의 왕이 누구를 핍박하는가 하면 유대나라에 있는 참된 선지자, 장차 올 메시아의 영을 받은 선지자를 누가 핍박하는가 하면 유대 나라의 왕들이 핍박을 한 것입니다.
결국 구약의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담의 끝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진짜 깊이 있는 인간의 정체란 무어란 말인가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사야 예레미야 등을 통하여 완전히 까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때에 메시아가 오시는데, 메시아가 어떻게 오시는데 위에서 낚싯대로 건져내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 인간 속에 확실히 들어와 버리는 것입니다. 종의 형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그 영광을 취할 자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죽기 까지 낮아지심으로 십자가에 죽기 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림을 그려보면 아담이 있는데 아담을 관통합니다. 위에서부터 밑바닥까지 아담을 두 조각내면서 그 밑바닥이 무언가 하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아담을 통과한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지요. 누구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 저주를 받습니다. 십자가가가 저주라는 말씀이 갈라디아서 3:13절에 나오지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개역한글판 갈 3:13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이 모습은 모든 인간은, 예수님께서 인간을 통과하셨으니,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야 마땅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동일성,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동일성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빠지고 이삭 빠지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자기 죽음과 동일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한 사람이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개역한글판 고후 5:14절)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산자로 간주 되지 않고 죽은 자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백날 살았다고 떠들어도 죽은 자라는 것을 십자가를 통하여 다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저주 받으셨다는 것은 율법으로 저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의하여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결국 율법이 우리에게 가져온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너 나 할 것 없이 율법에 의하면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인 것을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무서운 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도 모르고 좋다고 했습니다. 우리 이것을 지켜서 복을 받자고 한 것입니다. 전부다 그렇게 까불고 촐랑댄 것입니다.
지금도 교인들이 말씀을 지키라고 하면 좋아하잖아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면 그 말씀을 지키면 월급을 더 줄줄 알고 범사에 감사하잖아요! 그래서 악을 써서라도 말씀을 지키려고 하잖아요! 무시로 기도하라고 하니 기도하려고 하고 전도하기위하여 돌아다니면서 바울사도의 명령법을 따라 순종하기 위하여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 하지 않습니까?
어제 오후에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면 아내들이 교회 안 나왔으면 안 나왔지 그런 소리 안 들으려고 합니다. 복종할 무슨 거리가 있어야지요! 발 꼬고 앉아서 재떨이 가져오라고 하는데 그것이 복종이 됩니까?
그리고 남편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내 사랑하기를 주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자가 그렇게 없습니까? 아니 세상에 여자가 많고 많은데 그 한 여자를 위하여 나의 청춘을 다 바치라고요 내가 바보입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둘이 잘해보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이혼하고 갈라서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좋아요! 술김에 아내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런데 술 깨면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한 순간에 기분 좋을 때에 이웃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4시간동안 안 됩니다. 24시간 안 되면 그 인간은 말씀 안 지킨 것입니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되고 오후 4시부터 안 된다면 그것이 말씀을 지킨 것입니까? 그게 말이 안 되지요!
그리고 말씀을 지킬 수 있다면 매직으로 다 지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말씀인데 성경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못 지키니 들여다보기 위하여 있는 것인데 다 지키면 무엇 하려고 가지고 다니겠습니까? 아니 대학 합격하고 나서 고등학교 참고서 들고 다니는 그런 바보를 보았습니까? 다른 과 가려고 재수하려고 들고 다닙니까? 다 주어버리는 것입니다. 교복 고등학교 때 입었으면 진저리나게 입었습니다. 그래서 졸업식 때 교복을 핍박하지 않습니까? 밀가루 붓고 면도칼로 찢고 하지요! 우리 고등학교 때 그랬습니다.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만 다른 친구들이 그랬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과거는 가라는 것입니다. 지긋 지긋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찢어진 그 교복을 왜 입는 것입니까? 바보병신이지 않습니까? 병신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만 도대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복 받겠다고???
어떤 사람이 구원은 십자가 믿어서 받고 복은 말씀 지켜서 받는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말씀을 지켜서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러면 반대로 지키지 못하면 무엇을 받습니까? 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도 같이 붙어야 합니다. 한쪽만 따로 떼면 안 됩니다. 동전은 양면이지 한 쪽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은 한 3초 복 받고 23시간 59분 57초 동안 저주받습니다.
(한 숨 소리가 들림) 사람이 아담에 속하여 있으니, 구원론 강의 시작한다고 하면, 구원받을 준비 되어 있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라는 태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만 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켜 내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 받았으니 성령 받은 솜씨 한번 내어서 말씀 한번 지켜보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보자기에 무엇이 쌓여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법으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때 그 시절은 이미 건너 간 것입니다. 그 법은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해당된다는 이 말은 그냥 법만 지키라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이 이제는 우리보고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을 통하여 명령문이든 서술문이든, 범사에 감사하라, 술 취하지 말라 명령이잖아요! 이런 모든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으로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교회 와서 술을 끊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성경 에베소서에 보니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내가 술 끊은 것은 주님께서 하신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서 범사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이 사람을 보고서 예수 믿고 나서 범사에 감사하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누구의 은혜입니까? 예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지켜서, 범사에 감사하도록 하는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공로가 누구에게 돌아갑니까? 공로는 예수님께 돌아가고 자신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이 말씀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은 성령께서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켜서 적용하는 것 중의 하나가 우리의 생활에 성경 말씀이 툭툭 튀어나오게 그렇게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부대에 새 술을 담는 새로운 양상의 구원의 세계입니다.
교재(조직신학의 고속도로) 한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면서 고함을 안 지르려고 누누이 애를 쓰지만, 또 생각하면 가슴이 괴롭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04페이지 밑에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잘못된 구원관에 의하면, 자기 자신이 깨끗하고 자기 자신이 훌륭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여기 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지금부터 행동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영역과 이 공간이 십자가의 능력이 펼쳐지는 공간입니다. 지금 여기 구원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제자리에서 도를 닦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순간부터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래서 오, 여기 스탠드가 있었네. 나는 몰랐잖아. 여기에는 선풍기가 있었네. 오, 저기는 쓰레기가 있네!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도를 닦거나 윤리나 도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구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예쁜 인형도 있었네라고 말입니다. -중국에서 강의할 때에 아파트 방인데 그 집에 인형 장사하는 할머니가 있어서 중국에서 한국에 수출하는 인형 같은 것이 많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준 그 구원의 영역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한 자리에 앉아서 도를 닦아서 점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서 미처 몰랐던 십자가의 넓은 사랑을 구석구석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 여기 선택적 사랑이 있었네. 오, 불러 주심으로 내가 구원받았네. 아, 하나님께서 중생케 하셨구나. 오, 회개케도 하셨네. 오, 견인도 하시고, 거룩케도 하시고, 의롭다고 하시네. 오, 영화롭게도 하셨네.라는 것입니다.)
장차 영화롭게 될 것이 아니라 이미 영화롭게 하셨다는 로마서 8장의 말씀을 이렇게 설명해야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혼자 도 닦는 것이 아니라, 아! 내가 이렇게 구원받았구나. 아! 내가 이렇게 영화롭게 되었구나. 내가 이렇게 거룩하게 되었구나! 라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삶의 구석구석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한군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지요! 1차전도 하면서 터키 쪽으로 한바퀴 돌고 왔습니다. 2차 전도는 터키로 가다가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고서 고린도 아테네 에베소 쭉 돌고 왔습니다. 3차전도 여행에서는 갔던 곳 한바퀴 더 돌고 터키 북쪽에 돌고, 4차는 잡혀서 로마로 가면서 로마서가 나오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한군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느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의 정도를 얼마나 경험하였는지 심지어 어느 정도까지 입니까? 내가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까지 확인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한번 찾아봅시다. 이 대목은 잊으면 안 됩니다. 빌립보서 1:21절입니다. 저는 진짜 목사인지 가짜 목사인지 이 대목으로 확인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 이 말씀이 되면 목사감입니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지금 서울에 광성 교회가 개판치고 있지요! 싸우고 있는데 그 교회 목사에게 이 대목의 말씀을 전해보세요! 거부합니다. 전부다 원인이 목사 하나 때문입니다. 나 죽을게 하면서 조용히 나가면 아무 문제없는 교회를 내가 뭐 잘못되었는데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잘못했느냐 안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너 지금 죽어도 괜찮으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주님께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 지금 목회 십년 했는데 교인도 별로 없지, 그러니 마 죽지?
예 알겠습니다. 이것을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살아서 무슨 낙을 보겠다고, 이 더러운 세상에서 더 살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죽는 것도 유익하고, 죽는 것도 내게 다행스럽다는 마음에, 교회 차지해서, 교회를 자기 소유화 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들겠습니까? 저 사람도 내가 구원했고, 저 사람도 내가 전도했고, 내가 알아서 했고 라는 생각이 자기가 죽는 마당에 어떻게 자기 업적이나 실적이 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지금 신학교 많잖아요! 신학생들에게 이 말씀해보세요. 안 들어갑니다. 기다려라 몽고야! 기다려라 러시아야! 내가 들어가서 선교사 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지금 신학 하다가 2학년인데 지금 죽는 것도 나에게는 후유! 다행입니다. 살아 있어보아야 죄 더 짓는 것일 텐데 지금 죽게 하시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 몸무게를 줄여 주옵소서!
그러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사도바울의 모습인데 이것은 사도바울의 실력이 아니라 사도바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새 언약이라는 칩이 장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칩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실력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마음이 들어와 버리니까 사도 바울은 안에 있는 예수님을 그냥 표현하고 바깥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잠시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구원을 하시는데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구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구원받을 자격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하시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어디서 만드시는가 하면 이 세상의 인간의 몸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구원하시는데 우리는 그의 지체가 되어 딸려 나와서 구원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만 구원하시는데 고 몸의 지체로서 구성되는 자가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에 의하여 선택되어 예수님께 붙은 자들입니다. 그것이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비록 이근호라는 자기 이름이 있더라도 이근호라는 이름으로 기도할 자격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잊어버리던 관계없이 어떻든지 구원받은 사람은 직장이 있든 없든 알래스카에 가서 살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것이지 나라는 인간의 삶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니 사람들이 안 믿지요! 교회는 사람을 바꾸어 주는 데가 아닙니다.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몰랐던 자기의 주제를 파악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었어! 비로소 교회 와서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 창세전부터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었구나! 그동안 안 믿었는데 이제 믿고 보니 알았네! 그 사람의 실체를 일깨워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목사가 어떤 쇼를 벌려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딴 인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새 인간 되세요! 외쳐 보았자 교회에서 그렇게 행동 좀 하다가 집에 돌아가면 딴 짓 나옵니다. 지금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아 나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었구나! 아하 바보같이 왜 그것을 몰랐지? 성령이 오셔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니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임을 새삼 발견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속했는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였지요!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것은 내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 의미에서 개인구원은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노력해서 내 나름대로 기술을 발휘해서 구원받는다면 이것은 나만의 구원입니다. 너희는 이런 기술이 없지! 나는 이런 기술을 발휘해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가 독자적으로 일궈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나 나나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놓고 어떻게 자기 구원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구원이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제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입니다.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이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가 되자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 된 것을 왜 잊어버리느냐는 이 말입니다.
요즈음 아버지 유산 남겨보았자 자식들 사이 안 좋습니다. 아버지 죽는 것은 뒷전이고 아버지 죽고 나서 땅은 누가 하고 집은 누가 하고 그것 싸우기 바쁩니다. 시집갔다고 덜 주고 하면 시집 간 사람이 가만히 있습니까? 시집 간 것이 죄가? 더도(곳곳에 나오는 방언은 다 해석 못하니 알아서 해석하시기 바람) 하면서 민사소송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를 나눈 한 몸 한 형제라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있을 때만 한 형제입니다. 돈 떨어지면 형제간이 아닙니다.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가 옛날이야기인줄 아십니까? 흥부는 밥풀떼기라도 얻어먹었지만 요즈음을 국물도 없습니다.
어떤 남자가 가정을 버리고 자식 넷, 아들 셋 딸 하나를 버리고 돌아다니다가, 여보 내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돌아올게 할 때에 그 아이의 엄마가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가라! 너 같은 인간 필요 없다고 하니 그 남자는 술 취하여 죽어 버리고 그 엄마는 아직 아이들 잘 키우면서 살고 있습니다.
뭐가 한 몸입니까? 인간의 힘으로 한 몸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부부가 한 몸이라고요? 텔레비전 채널가지고 싸우다가 텔레비전 박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집집마다 티브이 두 세 대식 있는 것입니다. 한쪽은 드라마보자하고 한쪽은 개콘 보자고 싸우고, 한 몸 인체 하지요!
정 있을 때는 한 몸인데 정 떨어지면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것입니다. 문제가 없어서 같이 붙어사는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사는 것이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처음에야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었지요! 이 이야기를 제가 여러 번 하였는데 사람들이 잘 안 듣는데 창세기 2장에서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는 이 말씀은 두 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그 말씀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예수 믿고서 이제 그 시절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 받았으니 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성령 받고서 결혼해보세요! 그 시절로 돌아가는가? 세상이 그런 거짓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거짓말인 것 같은데도 신학자들이 이야기 하니까, 칼빈이 이야기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면서, 로이드 존스가 그런 이야기 하니 맞는 것처럼 여기지만 한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진짜 그렇게 해보라 되는 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하품이 나면 하품을 하는 것이지 눈 감았다고 하품이 나오지 않습니까?(강의 중에 누가 하품을 한 모양?) 어떤 기린이 사자가 오니 고개를 흙에 파묻고 있어요! 왜 파묻고 있는 줄 알아요? 안 보이니 안 죽는 줄 알았습니다. 대가리를 흙에 파묻고 있으면 사자가 안 보이잖아요!
세상에 오늘 교회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네가 어느 말씀도 24시간 지키는지 한 번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마음에 가린 것 떼놓고 이야기 하면 내말이 다 맞아요! 그런데 교회가면 이상하게도 전부다 나 성화 많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성화된다고 이 따위 소리를 합니다. 속일 것을 속여야지, 못난 이근호도 안 속는데 마귀가 속을 까요? 주님이 속아 넘어가겠습니까? 눈 감고 아웅 하는 것이지!
다시 이야기 합니다. 창세기 1장 2장은 두 번 다시 그렇게 못 돌아갑니다. 성령 받고 무엇을 받고 해도 못 돌아갑니다. 이미 이러하였기에 우리는 마땅히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이 한 몸이었는데 타락 하고 난 뒤에는 우리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기에 주님 아니면 구원 될 길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하여 창세기 1장 2장이 있는 것이지 그때로 돌아가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내지 말라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데, 분노하지 말라는 이 말씀도 우리가 못 지킵니다. 성질나는데!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인간은 이성이 우선이 아니라 감정이 우선이라고 말입니다. 감정이 먼저 나오는데 이성은 감정을 보고서 좀 참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사람들 있으니 좀 참으라고 해서 내 자아 속에서 타협해서 적당한 윤리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쌓이는 것입니다. 억압된 것은 쌓이게 되는데 나중에 무엇이 한잔 들어가면 폭발해버리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폭발해버리면 정신 나갔지요! 정신없이 설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구원을 다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구원관들을 다 버리고 성경에서 구원이 무엇이냐를 다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손길을 내밀지 아니하면 어떤 사람도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사야 65장과 구약의 모든 선지서가 예언한 바입니다. 내가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함이 아니라는 말씀이 기억이 나지요! 주님의 손길이 닿을 때에만 오는 것입니다.
지옥의 하나님이란 책의 소제목에 이런 제목이 있습니다. ?���해골이 일어선다!?��� 해골이 무슨 힘으로 일어섭니까? 제가 이 제목을 쓴 것은 예수 믿거들랑 비록 가진 것 없고 돈 없더라도 해골이 사람 되었다고 여기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에 예수님이라는 칩이 장착이 되어 있거든, 그것이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사랑의 증표라고 아시고, 죽어도 좋습니다. 지금 죽어도 좋습니다. 라는 그런 무한한 사랑의 감격에 흠뻑 젖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에스겔서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일으키시는데, 어디 지가 반창고 붙이고 해골에 본드 붙여서 사람이 되었습니까? 해골이 사람이 덜 되었다고 수리하고 보수해서 되었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니 해골이 건장한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는데, 그 군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직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새 언약의 군대로서 우뚝 선다는 에스겔의 예언입니다. 새 언약의 증거, 즉 주님께서 오셔서 자기 사람 자기가 챙겨서 데려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걸려든 것이 내가 걸려들었다. 이것은 창세전부터 이일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몇 십 년 전에 태어나야만 했었고, 얼마 전에 믿어야만 했던 것이 주님의 일관된 계획이 차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오류도 없고, 실패도 없이, 하나의 탈락도 없이 주님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한 구절 찾아보고 첫 시간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대구 서문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이 대목을 강조하였는데 사람들이 저 사람 무슨 소리 하는지 말귀를 못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놀랐습니다.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개역한글판 요 6장 39절)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자기 행동 개차반이라고 해서 탈락한다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내 손에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사로잡힌바 된 채로, 양과 목자의 관계로 끌려갈 뿐입니다. 그것으로 구원이 종결 된 것입니다. 목자가 시시한 목자가 아닙니다. 나에게 사정하는 목자가 아닙니다. 막대기와 지팡이로 때려서라도 우리를 기어이 천국에 집어넣는 그러한 놀라운 능력을 지금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내 구원은 주님의 십자가의 은덕입니다.
라는 고백이 가끔씩 툭툭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 오 분간 쉬겠습니다.
녹취 050707 오후 4시 50분 이장우
구원론 1-2
05. 4. 11일 강의 이근호
오늘 두 번째 시간에는 아까 이야기 한 예수님이 구원, 예수님이 구원되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기존의 신학에서는 예수님의 구원이라는 말이 가끔은 들어 있습니다. 제가 본 것으로는 가끔은 있는데 그것은 본격화 시킨 사람은 제 기억으로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이라는 말을 왜 안 쓰려고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죄 지은 것도 없는데, 구원이란 말은 죄와 지옥에 있는 자를 천국에 데려가는 것이 구원인데,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늘에 계시는 분인데 예수님께서 왔다 갔다 하시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해 버리면,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죄인이 되고, 자기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기에 다른 분이 구원하여 내어야할 그런 관계성 같은 것이 더불어 생기고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하여 예수님의 구원을 잘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 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기존의 상식입니다. 우리가 근성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2:5-8절을 봅니다.
5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6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7 저를 2)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3) 8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시편 8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시편 8편을 보면서 백이면 백 다 이 말씀은 사람 다윗이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지, 하나님께는 적용될 리가 없는 말씀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원하실 분이고 사람은 구원되어 할 대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자가 부족하고 천사보다 못하고 하는 이런 부분은 사람에게 해당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이 말씀을 예수님께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봅니다. 다윗이 장차 오실 예수님을 예언해서 다윗이 시편 8편에서 자기의 신앙 고백을 그렇게 하였다는 식으로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성도 안에 그리스도의 칩이 들어있다고 했지요! 다윗은 선지자 인데 다윗 속에 성령이 들어있고 그 성령에 의하여 다윗은 말을 해야만 하는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장차 오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구원되실 지를 그 표준적인 경로를 이미 다윗이 앞당겨서 다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말은 예수님의 구원이 없으면 인간의 구원이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기에 전체 구원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은 외곽에 빠져 있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외곽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관한 문제는 예수님이 들어가면 안 되고, 죄인인 우리 인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구원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론을 할 때에 설마 예수님의 구원도 포함되겠느냐는 것을 어느 조직신학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아이디어가 안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여! 저 못난 인간입니다. 저를 건져주세요! 저 성경보고 구원론 만들겠습니다. 어때요? 잘 만들었지요! 그러면 이 구원론을 가르치겠습니다. 이러한 의식의 밑바닥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찾으면 그 찾는 것이 너무나 선량하기에 하나님께서 구원받고자 하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보편적인 종교성을 이 성경과 얼키설키 대충 끼워 맞추려고 하는 그런 의도가 강렬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 있을 수가 없는가 하면 인간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쫓아내지 않고 에덴 동산 안에서 어떻게 처리하였을 것입니다.
저 한 쪽 구석에 가서 손들고 서있어!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 물론 나도 잘못이 있다. 선악과를 안 보이는 곳에 두어야 하는데 이렇게 중간에 두었으니 따 먹었구나. 나도 좀 미안하기는 하다. 그리고 선악과를 보면 따 먹기에 흉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게 탐스러웠으니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쨌든 따 먹었잖아! 그러니 벌을 주시되 에덴동산에서 안 쫓아내고 그 안에서 징계하시고 처리하시면 그것도 대단한 사랑이 아닙니까?
잘못은 인간이 저지르고 사랑은 하나님이 주시고, 인간은 자기 잘못으로 징계를 받고,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주심으로 자기의 공의를 드러내시고 또 용서함으로 사랑을 드러내시고, 이렇게 하면 공의와 사랑을 에덴동산에서 다 일구어 냈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시고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속성을 다 드러내실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였다는 것입니다. 추방하시고서 추방 받은 그곳을 임시장소로 잠시 대기하시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저주하여 버리신 것입니다.
바깥에 추울 텐데 좀 참아라! 참아라! 내가 구원해줄게 이것이 아닙니다. 아예 저주이며 결국 아담에게는 무엇이 돌아갑니까? 흙으로 돌아가게 한 것입니다.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돌아가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만 남는 것입니다. 아담은 죽기 전에 약속을 믿고 구원받고, 결국 하나님의 약속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진짜 모든 구원은 예수님 안에서 해결되어야지,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여! 죽어서 고생하는데 저는 고생하지 않고 쉴 쉼터가 하늘나라에는 없습니까? 안식을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그런 자신의 구원욕구 행복욕구에 끼워 맞추시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추방한 것부터 잘못입니다. 그렇게 착한 인간을 왜 추방하는 것입니까?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영화를 보면, 비가 주룩 주룩 오는데 삼촌 가지 마세요! 삼촌이 아니라 사실 자기 아버지이지요! 이 영화 보셨나요? 그 영화를 보고 울어요! 그 아역이 얼마나 연기를 잘합니까? 그걸 보면서 저래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매몰차게 내어보내면 그것이 사랑이 아니지요! 헤어지면서 그 애틋한 아버지의 사랑, 사람들은 사랑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영화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한번 재현해 봅시다. 하나님 저 부족합니다. 저 죄인입니다. 성경 보니 죄인이라고 하시는데 저 인정합니다. 나 같이 나쁜 놈을, 어떤 사람은 자신을 똥이라고 합디다. 나는 똥입니다. 똥 맞습니다. 저가 똥 인줄 아니 하나님 저를 구원하여 주세요! 장난 하냐? 이것이 신판 교회에서 나오는 미워도 다시 한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애틋한 신에 대한 갈구, 신에 대한 사모, 흠모 이런 것을 사랑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내미신 사랑만 사랑인 것입니다. 자기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이시는 그것만이 사랑이지 신이시여! 구원하소서! 하는 그런 애틋한 하소연을 사랑으로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 일서에서 보면, 너희들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 해봅시다. 예수님의 구원은, 구원자가 되신다는 너무나 일반적인 인식 때문에 예수님이 구원받는다는 대상에서 빼버리고 우리만 달랑 구원 받는다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린도후서 13장에 어긋납니다.
고린도후서 13: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셨습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도?���가 나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구원받는 것과 동일한 능력입니까? 아닙니까? 동일한 능력입니다. 이해가 안 되십니까? 이해되시죠!
우리도 주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의 안에서 함께 산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빼 놓고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하는 이런 구원론은 성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구원 속에 약하신 예수님께서 합류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 구원하셨는가를 보아서, 예수님을 구원하신 방식 그대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 무엇이라고 표현하였는가 하면 맏아들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2장에서는 그것을 형제라고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을 봅니다. 히브리서 2장 9절 끝부분입니다.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누가 말입니까? 우리는 아닙니다. 누가요?
예수님께서 죽으심을 맛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을 맛보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서, 예수를 믿는 자도 예수님과 더불어 죽음을 맛보았지만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하신다는 것은 앞장서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취지를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저 죽어 가고 있습니다. 고생 실컷 했습니다. 못 견디겠습니다. 차라리 자살할 까요? 어찌하든지 죽고 나서는 죽음도 고통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라고 했을 때에 우리는 무어라고 합니까? 자신의 죽음을 느끼고 맛보았다고 여깁니다. 거짓말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자기 죽음을 맛보지 못합니다. 진짜 죽음이 무서움을 맛보신 분은 한사람뿐입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만이 죽음을 압니다. 죽음에 대하여 예수님만이 아시지 우리가 무슨 죽음을 압니까? 자기 육체의 고통만 알지요!
석가모니가 무엇을 알았습니까? 보리수 밑에서 도 닦다가 갈빗대가 다 드러났지요!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자기 딴에 무엇을 맛보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까? 죽음이 얼마나 처절한지 맛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불교의 승려들이 무슨 짓을 합니까? 동안거라 해서 밥도 잘 먹지 않고 해서 이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죽음의 고통을 맛보고자 해서 도를 닦는데 그것이 죽음입니까? 장난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죽음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죽음의 진수를 맛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죽음이 무엇입니까? 자기 숨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죽음이라면 자살 사이트 들어가서 자살하면 됩니다. 그러면 자살하면 죽음을 맛보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진짜 죽음을 맛보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맛보아야 제대로 죽음을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유일하게 십자가에서 예수님만 맛보셨습니다. 석가모니도 아니도, 공자도 아니고, 교황도 아니고, 유일하게 죽음이 무섭고 하나님의 저주가 치욕스럽게 무섭다는 것을, 지옥이 무섭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인간의 행함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이런 것은 이단입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영광 돌린다는 것이 이단입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킬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맛본, 부활을 맛본 그분에 의하여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사도는 어디에서 죽음을 맛보았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예수님을 만날 때에 빛에 의하여 눈이 가버리고 다만 입만 벌려서 주여 누구십니까? 하였지요! 그때 주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사도바울과 예수님의 만남은 죽음에서의 만남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나는 진작 저주 받아도 마땅하고 죽어야 되는 자임을 알았습니다. 누가 핍박자입니까? 십자가 달릴 당시에 못을 박는 로마 군병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치를 모르고, 예수님을 필요치 않고, 예수님이 있으나 마나 여기는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폭행자요 핍박자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종들을 핍박하는 모든 인간들이 다 사실은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이것을 앞당겨 보여준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 자기가 들은풍월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들었지요! 별미를 갖다 바치면 복을 받는다고 그래서 속여서 별미를 갖다 바쳤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연극입니까? 인생은 연극입니다. 상호기만과 상호위선 속에서, 그러니 복주겠다는 그 이삭도 웃기는 사람이고, 그 복을 받겠다고 엄마와 아들이 공모해서 나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속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디 바보입니까? 그런 일에 속아 넘어갈 그런 바보 같은 하나님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세상은 하나님은 뒷전이고 인간만 속이면 만사가 복이 오는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하나님을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얍복 강가 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나는 죽어 마땅한 인간임을 알았습니다. 그다음부터 살려 달라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복 더 달라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주여! 제가 바로 하나님과 더불어 싸웠던 희한한 인간입니다. 야곱의 자기 본성이 얼마나 더러웠으면, 자존심이 얼마나 셌으면 하나님을 적으로 여기고 상대할 정도였겠습니까?
살려달라고 애걸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합니다. 이제부터 이름을 바꾸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야곱은 날아가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 고유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선봉장이 되어서 앞으로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이런 부분이 어려운 점인데,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면 왕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허리에서 왕들이 나옵니다. 그 왕들이 모이는 초점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유다의 왕 계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면 장차 올 메시아를 자기 일상 속에서 앞당겨 그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살려주시고 축복해주신 분이 내 허리를 통하여 장차 오신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끝장났고 다른 세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폐허의 더미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남의 교회 와서 폐허라고 하면 곤란하지만, 폐허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폐허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으로 죽음을 맛 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아담은 약속을 받고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에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할 때에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길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할 때에 비로소 진짜 내 모습은 흙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찍는 그런 스티커 사진들이 자신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실제 내 모습은 흙덩어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앨범에 흙덩어리로 장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밑에 고 이근호, 고 김재열 이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내 모습입니다. 이 정도는 다른 종교도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 아예 지옥의 저주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입니다. 저주 받아야 할 이근호 김재열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성경대로인데 성경대로 해도 사람들은 안 들은 것으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 직장이 있으니까, 가족이 있으니까, 자녀가 있으니까, 더구나 교회가 있으니까, 집에 가면 신지도 않은 구두가 있으니까, 내 차가 있으니, 주가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래서 제가 교인들에게 하는 말이 제발 십자가를 잊지 마세요! 십자가가 회상이 되거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이 나와 동일시되거든 성령이 역사하신 줄 아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반드시 십자가가 크게 보이고 성령이 약화되면 십자가가 보이지 않고 자기 잘난 것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야심 때문입니다. 야심, 야망이 있으면 거기서 결핍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결핍이 메워지지 않으니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냈습니다. 야심이 있습니다. 제는 천재이니 1등을 해야지 하는 것은 내 마음인데 1들이 될까하는 것은 현실문제이지요! 1등 되기를 바랐는데 5등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격차가 4등이 나왔습니다. 내 마음은 1들인데 격차가 4등이나 생겼으니 거기서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저러다가 10등이 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움이 있는 곳에 반드시 마귀가 역사합니다. 기도 더 해야 돼! 기도 더 해야 돼! 기도 그것밖에 안하니 4등 되지 그러니 기도 바짝 조아봐 그러면 2등 되지! 그러니 두려움에 의하여 무엇이 생기는 것입니까? 종교가 생기는 것입니다. 주여 전에는 제가 성경을 두장 밖에 안 읽었는데 이제는 석장을 읽겠습니다. 전에는 예배시간에 지각했는데 이제는 당겨서 오겠습니다.
우리교회는 주로 11시 10분에 옵니다. 교인들이 목사 약 올리기로 작정을 하였는지 11시라고 하면 11시에 오든지, 실실 와서는 부인이 11시 5분에 들어옵니다. 남편은 주차하느라 사도신경, 교독문 다 빼먹고 설교시간에 들어와서는 설교만 들으면 되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제가 일반교회에 나가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교회 등록하면 30분전에 옵니다. 아무도 와 있지 않지만 그 다음주는 20분전에 옵니다. 거리와 시간을 예상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5분 늦게 오는 것입니다. 시간을 예측하여 왔는데 늦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주는 지각하지 않기 위하여 서둘러 오니 10분 당겨 왔습니다. 그러니 꼭 손해 본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늦는 한이 있더라도 시간에 맞추어 오자는 식입니다.
그렇게 되면 꼭 그 시간에 깨이는 것입니다. 왜? 생체 리듬에 의하여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하였습니다. 예배 시간을 11시 10분으로 늦추면 어떨까요? 그러나 막상 늦추면 처음 한달 정도는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맞추어지면 이제는 11시 20분에 맞추어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밤중에 해보세요! 그러면 그 다음날 아침에 옵니다. 죽었다가 깨어도 안 됩니다. 무엇하다가 이렇게 되었지요? 아 결핍!
그러니 목사가 되어 가지고, 아까 진짜 목사는 어떤 목사입니까?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죽어도 행복합니다. 말은 이렇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적용시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예배 전에 가만히 있다가 보면, 나는 지금 이 설교를 코피 나게 준비 해 놓았는데, 교인이 엉성하게 앉아있으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래도 설교한다고 정신없이 하다보면 나중에는 가득하게 앉아 있으면 기분이 좋지요!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숭숭 비어 있으면 그것도 허망하지요!
이게 무엇인가 하면, 성경 말씀에는 죽는 것도 유익이라고 말씀하지만,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끊임없이 야심과 야망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없는 야망 만들어 내어서라도 야망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루 일과에 야심 없고 야망이 없는 일과는 사는 보람이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그 야망이 채워지지 않으니 결핍을 느끼고 그 결핍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을 차단하기 위하여 사전에 착한일 하기 위하여 나서는 그런 생활의 반복인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을 그냥 방치하면 구원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예수님은 죽으심을 맛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맛보신 죽음을 가지고 계속하여 순간순간 우리의 틈새를 수시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네가 죽음을 맛보았느냐? 네가 하나님의 저주를 아느냐? 죽음을 맛보신 분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기에 항상 들락거리면서, 우리가 야심과 야망이 사로잡혀 있을 때에 그 틈새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순간순간 생각나게 하셔서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을 맛보아 버리면 우리에게 죽음도 유익한 것입니다. 내가 죽는 마당에 무슨 야심이 있습니까? 죽는 마당에 흙이 된 아담에게 무슨 야심이 있겠습니까? 그 순간만큼이나 야심이 없으니 결핍 또한 없어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나옵니다. 시므이가 아기 예수를 안고 이제는 주께서 종을 평안하게 놓아주시는 것이라고 찬양합니다. 이것이 결핍이 없는 것입니다. 평안한 것입니다. 결핍이 없으니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싱긋이 웃는 것입니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분신하는 사람은 아직도 야심이 있고 결핍이 있고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못 참아서 분신자살하는 것입니다. 안중근이 이토오 히루부미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 분석 해보면 두려움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시대에 이등박문이 있었다면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사도바울 손에 권총을 쥐어 주었다면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쏘았겠습니까? 그 인간 쏘나 안 쏘나 죽을 인간인데 내가 무엇을 하려고 쏘는 것입니까? 가만히 놔두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 흘러가는 대로 그냥 방치하고 놔두면 돼요.
아이가 떠들든, 문에 받치든 그냥 놔두면 됩니다. 자기 인생 자기 것이기에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닙니다. 도와 달라고 하면 도와주고, 학원 다니고 싶어 하면 학원 보내주면 되지만, 내가 안달 낸다고 천재, 지금도 천재지만 더 천재가 되겠습니까?
교회 와서 성도가 되었으면 아까 말씀처럼 주님과 형제가 되었으면, 적어도 교회 온 만큼은 세상만사 잊어버려야 합니다. 바깥에 비가오든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든, 우산 없으면 빌려주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교회 까지 와서 집에 가스 불 끄지 않은 것 걱정하면, 그 것이 순간적이나마 천국이겠습니까?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주님 때문에 살았습니다하는 고백, 감격, 그때 그 공로가 우리의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성경 공부한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에게 유발시킨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그 은혜가 너희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한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봉투에 돈 넣어서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이야기 하면서 너 속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디서나 충만하기를, 그것으로 기뻐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흥분해서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오늘날 교회가 장난하고 있습니다. 정말 장난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제가 큰 교회가 부럽고 하겠는데, 성경을 알고, 성경을 보게 되면 이것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절하고 교회하고 차이점이 없습니다. 절에서는 점쳐 줄께 돈 내라고 합니다. 빌어라 복 줄께 부처한테 빌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치라 복 줄께입니다. 이것은 좀 노골적입니다. 좀 깨어있는 교회라면 착한 일하면 복 준다는 것입니다. 착한 일하면 복 준다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도 답답해서 어제 오전에 이런 설교를 하였습니다.
세상에 가난한 것이 죄냐? 예수님께서 가난한 것이 죄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보다 더 죄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들이 다 망하였는데 그 사람들보다 더 죄인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이상하게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가난하면 죄지은 것처럼 수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동창회 같은데 가는 것을 겁을 내는 것입니다. 마치 전과자 같이 못 가는 것입니다.
이 사회 자체가 죄지은 것하고 가난한 것하고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반대는 무엇일까요? 부자와 착한 사람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그런 교육을 받아 왔기에 주눅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그런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심지어 교회 와서도 신앙생활 잘하면 착한사람 되고 착한사람 되면 복을 받는데 그 복이 부자 되는 것이랍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본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이 복이 아니라 성경에도 없는 복을, 성경에도 없는 복이 무엇입니까? 부자 되는 복인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다니다가 가난해지면 교회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 나오는 것이 무섭잖아요! 왜요? 가난한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몸에 우리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를 씻기 위하여, 다른 말로 이 가난을 씻기 위하여 교회 찾아가서 하나님께 고개 숙이고 잘못되었습니다. 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다른 말로 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철야하면서 까지 기도하면서 만들어진 오늘날의 종교단체가 대한예수교 장로회라는 교회가 아닙니까?
어제 제천에 어떤 전도사님이, 그 사람은 국문학 석사학위를 받으시고, 지금 신학석사 2학기 남겨 놓았는데, 국문학중에 전공한 부분이 한국의 토속연극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제천에서 민간 연극단체에 종사하시는데, 얼마 전에 전도사 하다가 자진해서 그만두었습니다. 기존교회에서 이것은 도저히 아니다. 너무 아니라서 전도사를 그만두고 제천에서 얼마 전에 저희교회까지 와서 만났습니다.
그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조직신학이나 이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졸업하고 난 뒤에 사회복지 계열이나 상담심리, 정신분석, 좋은 아버지와 좋은 가정 만들기, 돈은 있는데 마음이 불편할 때 어떻게 하면 마음이 심리적으로 안정되게 조절할 수 있는가 하는 그런 기법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신학교 졸업생들에게 기본적인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기술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학교라는 간판을 달아놓고 복음을 이야기 하지 않고,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 되어 가지고 요런 기술을 발휘하면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돈 번다고 너무 정신적으로 피폐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안정을 줄 수 있는 심리적인 기법을 배워 가서 교회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돈도 계산해야 되니 병원보다 싸게 먹히고 마음의 위로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사도바울이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과 사도바울과 관계없는 신학교인 것입니다. 보세요! 얼마나 심각합니까? 처음부터 심각하였지만, 이것입니다. 가난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한 그 사람은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었고, 죽은 아버지의 장사조차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8:35절을 봅니다. 지금 구원론을 하고 있는데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 말씀을 바꾸어서 ?���제 목숨을 잃고자 하며 구원되고 잃고자 하면 구원되리라?��� 이 말은 아닙니다. 이런 말은 불교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그것이 아닙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식으로 구원이 성사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된 자의 표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보다 이 세상에서 더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이 이미 구원받은 자의 증표라는 것입니다.
돈이 아닙니다. 돈을 위하여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돈보다도 예수님과 복음이 나에게는 더 보물입니다. 하는 의식이 아무에게나 생기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구원된 자에 한해서만 발생되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목사가 강단에서 하는 것도 겁이 납니다. 기존의 큰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 하게 되면 그 목사 결국은 밉상 받고 그래서 사표 쓰고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면 눈총 많이 줍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 했다는 것을 빌미로 쫓아내지는 않습니다. 자기도 보는 눈에 있으니, 목적은 그런 설교가 싫은데, 트집은 다른 조그마한 것들을 트집삼아 그동안 목사에게 쌓였던 것들을 폭발시켜 좇아내는 것입니다.
제일 트집 잡는 것이 헌금 안 나오고 교인 수 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교회도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요! 그러니 항상 보따리 싸고 준비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쫓겨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제가 겁나는 것은 이제 예수 믿었으니 슬슬 복주세요! 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올까봐 더 겁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까지 책도 열 몇 권내면서 십자가마을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50넘어서 시근 들고 보니, 그게 좀 좁은 생각이고,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구원은 십자가로 하지만 복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기에 기도하면 다 복 받습니다. 이런 쪽으로 나갈까봐 겁이 납니다.
그 순간은 무엇을 잊어버리는 것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신, 연약하심으로 죽으심, 예수님께서 씩씩한 가운데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연약하신 가운데 죽었고, 오직 예수님의 구원은 아버지의 능력으로 구원하였다는 사실, 돈의 힘이 아니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 중에 슬며시 걱정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믿음이 지금 있다고 하여도 내일 없어지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맏아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맏아들이란 맏물입니다. 구약에서 맏물은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맏물이란 먼저 태어났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장자의 특징은 그 뒤에 오는 형제들을 대신 또는 대속의 일을 처리하는 기능을 듬뿍 안고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양의 첫 새끼는 나머지의 양에게 복을 주는 첫 새끼입니다. 잔소리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잔소리해서 된다면 우리는 늘 잔소리 들어야 할 것입니다. 잔소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맏아들이 희생을 하여서, 이것이 중요합니다. 희생을 함으로 그 희생의 효력, 십자가의 피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라는 것이 두 시간동안 계속 되었는데, 두 시간 반이 지나고서 내가 미쳤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나, 무슨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하시는가? 내가 착한 일해야 구원을 받지! 야 정신 차려! 정신 차려! 그런 것에 넘어가면 안 돼! 성경에 그런 것이 있더라고 성경은 잊어버려! 성경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동화책이고 전설이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그것도 하나의 맹신이야! 성경 없어, 그냥 참고서야! 요즈음 자유주의 목사들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착하게 살자는 하나의 교훈과 참고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만 보지 말고 공자도 맹자도 보아서 서로 융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황과 천주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해 볼 때에 나만 믿음이 날아가 버리고 죽지 않겠는가 하겠지만, 죽음을 맛보신 주님의 새 언약의 법칙에 의하면, 그냥 혼자만 달랑 구원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 가운데서, 아까도 보았지만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믿게 한 자도 반드시 끝까지 마지막 살려내는 그 마무리까지 예수님의 일은 중단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매일같이 믿음을 날려 보내는 짓을 계속하게 때문입니다.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맨 날 이 짓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임지고 구원하여 내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좀더 어렵게 합시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자식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자식 없습니다.
있다.
없습니다.
어허, 있다니까! 내년 이맘때 있으리라!
없습니다. 그런 자식
계속 없다고 하다가 결국 자기 아내의 태가 멈추었습니다. 정말 자식이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남자가 임신할리는 없을 것 아닙니까? 자기 아내의 태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없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식도 아직 없고, 아내의 태는 죽었고, 이름은 말도 안 되는 열국의 아비라는 자기 처지와 전혀 걸맞지 않는 이름이 있고, 그런데 한 가지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쇠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주를 만드는데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달랑 들어간 사람은 자기 집안 식구뿐입니다. 김재열 목사님처럼 자기 집안 식구뿐입니다. 아무도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도 믿지 않겠다고 한번 해보세요! 의도적으로라고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정말 인 믿어지거든 처음부터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십자가 사건을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망치고 안 믿고 싶어도 안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분과 내가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성령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 마음은 독일가든 미국에 가든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꽉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어려움을 줍니까? 이래도 믿을래? 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디서 나옵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이 나오지요! 그러니 환난 없는 소망은 껍데기입니다. 환난 중에 비로소 하늘나라가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환난 중에 소망이 보이도록 주님께서 이 계획대로 일을 잘 처리하고 계십니다.
교인이 없다고 해서 걱정하시는데 마치 그것은 무엇과 같은가 하면 자식 없다고 걱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하나 밖에 없다고 걱정하신다면 그러면 열명을 낳으면 하나 잃어도 아홉이 남으니 괜찮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열명이 있으면 열명 모두가 한 자식 같습니다. 열명 중에 하나가 집에 늦게 오면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다는 것이 그만큼 든든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많으면 그만큼 걱정거리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몸이 튼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복음 전하기 위하여 몸 튼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씩이나 기도하였는데 네 은혜가 충분하다고 하시면서 그 기도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고보서는 기도하고 받은 줄로 알라고 하셨는데 바울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주시는데 그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맛본, 그 죽음의 의미, 그 죽음의 깊은 맛을 보도록 우리 안에 집어넣는 일을 지금도 주님께서 실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이루시는 구원과 우리가 결탁되어 있는 관계입니다.
두 번째 시간을 정리 해봅시다. 다윗이 인자를 다른 피조물보다 못하게 하셨다고 한 것은 다윗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죽음을 맛보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슨 뜻인가 하면, 구원받는 어떤 인간도 예수님이 고난 받은 그 범위를 못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으셨는데 주여! 고생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지어낸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통 총량 일정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모두 아담 안에 있습니다. 아담 안에 있으면, 아담을 다루는 고생은 다 같이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부자는 고생을 덜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자기는 이혼하고 아이들 죽고 해서 고생이 심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담아래 있기에 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마음고생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양이 같은 것입니다. 왜? 둘 다 아담이기에 둘의 고통이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는 제일 많이 고생하고 남들은 늘 즐겁고 행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일요일이나 휴일 날 공원에 보면, 엄마와 아이들이 잔디밭에서 풍선 들고 놀면서 하하거리고 아이에게 넘어지면 안 돼하면서 노는 그런 정경이 멀리서 보면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운지, 옛날 생각도 나고 눈물도 나고 그렇겠지요! 자기는 집구석에 들어가면 어질러져 있고, 라면 끓어먹은 냄비 엎어져있는데 바깥의 애들은 고급차에 랜드에 가서 환호성을 지르며 있는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나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군에 간 사람은 압니다만 보초서면서 이등병의 편지를 읽고 눈물 흘리면서,,,, 누구는 지금 술집에 놀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뺑뺑이 돌고, 이게 무슨 짓이고! 내가 돈이 없어서 못 빠지고 돈만 있었다면 빠졌을 텐데 우리 엄마는 돈 안 벌어놓고 뭐했노! 하면서 눈물 질질 흘리면서 자기가 고생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지요! 그러나 그 한 순간 두 사람 딱 마주쳐서 이야기 해보면 둘 다 고생입니다. 있는 집은 있는 집대로, 없는 집은 없는 집대로 어떤 집이나 고생의 총량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같은 아담의 항아리 속에서 동일합니다. 그런데 자꾸만 남들이 행복해 보이죠! 그렇게 보이는 것이죠! 성냥팔이 소년이 어디서 죽었습니까? 창문가에서 죽었습니다. 매리크리스마스 하면서 케이크 자르고 있는 그 집의 창문가에서 엄마 아빠도 없는 성냥팔이 소년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케이크 자르고 매리크리스마스 하는 그 집안에 들어가 보세요! 케이크 서로 먹는다고 싸우고, 많이 먹어 배 아파서 난리고 멀리서 보니 자기가 그렇게 꾸며서 보니 행복해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그 장면은 안 행복한 것입니다.
멀리 나는 파랑새는 아름다워요! 그러나 그 파랑새를 손에 잡아 보세요! 냄새나고 똥 싸는 것입니다. 유명한 동화 파랑새라고 있습니다. 멀리 볼 때에 파랑새입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멀리 볼 때에 행복 이지! 내 손에 있는 행복은 행복이 아닙니다. 허구입니다. 안개입니다. 손에 쥐었는데 날아 가버린 것입니다.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그 동화의 취지는 내가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 자체가 행복한 인간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다른 옆 사람의 행복 빼앗지 말고, 남의 행복 부러워하지 말고,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것이 충분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적이지는 않지만 동화에서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두 번째 시간 끝맺음을 이렇게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도 만드시고 우리의 귀도 만드시고 우리의 발걸음도 헤시고 우리의 머리카락도 헤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현재 저와 여러분이 처하여 있는 현실이 동일하게 은혜인 것입니다.
교인이 얼마나 되든지, 한 달 수입이 얼마나 되든지, 한 목사님이 수입이 뻔하지요! 그런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고려해서 그 사람에게 그것이 적당하기에 그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주님에 대한 고마움,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셔서 이것 밖에 주지 않으셨다는 그 은혜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5분간 쉽시다.
구원론 1-3
첫째 시간, 둘 째 시간까지는 인간의 구원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구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원하신 것이 있고 그것이 구원론이며 인간 구원은 없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시간은 예수님께서 인간을 어떤 식으로 구원하고 어떤 취지로 구원하시는 지를 생각해 봅시다.
이런 것을 왜 생각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구원하시면 구원하시는 것이고, 십자가로 구원하신다면 구원하시는 것이고 구원하지 않으신다면 구원하지 않으시는 것이지, 그것을 따지고 내용이 무어냐 알 필요가 있는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 그렇지가 않는가 하면, 예수님이라고 마음대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구원해야 할 틀이 있습니다. 세 번째 시간은 약간 난해합니다. 그 틀이 무엇인가 하면 요한복음 1:49-51절입니다.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생뚱맞게 왜 이 본문을 보았습니까? 여기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상당히 궁금할 것입니다. 그게 무어냐면,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형의 분노를 피하여 삼촌 집으로 도망가다가 광야에서 돌베개 베고 자고 있는데 꿈에 천사들이 사닥다리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꿈을 꾸고 야곱이 잠시 착각을 하였습니다. 그 많은 천사들이 야곱 자기를 보호한다고 여겼습니다. 비록 형을 피하여 도망가고 있었지만 축복받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천사가 동원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마하나임 이라고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 자기 하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는 천사의 숫자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께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나를 지켜 주시면 자기가 십일조를 하겠고 하나님의 전도 짓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잘못된 생각입니다. 천사들이 떼로 몰려 온 것은 야곱 한 사람구원하기 위하여서 온 것인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천사들의 영적인 활동개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천사 무리가 마하나임, 우리말로 하면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해골 무더기를 보는데 그 해골이 나중에 하나님의 군대가 되지요! 이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달랑 나 하나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집단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아까 보았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구원되실 때에 예수님 본인만 구원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실 일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니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라는 나다나엘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다 구원해낼 책임자로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임금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을 드리는 것은, 구원문제에 있어서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는데 나는 죄가 있어서 구원을 못하신다. 그래서 중간에 누가 있어야 하는데, 옳지! 잘 됐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구나!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날 구원하였다.
이렇게 되면 내 개인 구원되었지요! 잘 들어 보세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 나만 구원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구원이 되었지요! 그리고 한 형제라고 합니다. 그래 친하게 지내야지! 서로 사랑하고 권면하고 도와가면서 한 교회로서 교제하고 떡 떼고 서로 친하게 지내면, 나도 구원되었고 너도 구원되었으니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교회라는 하나님의 몸을 이룬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엄청 오해입니다. 내 구원되고 너 구원되고 모여서 구원 된 사람 두 사람, 또 한 사람 더 모여서 구원 받은 사람 세 사람, 이렇게 모여서 교회가 되고, 또 한 사람 더 와서 네 사람으로 교회가 더 커졌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러나 처음부터 개인 구원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어떤 집단속에 집단의 이름으로 편입되기 위하여 구원되었지 개인 구원이 없습니다.
개인구원이 생겨 버리면 그 다음에는 사회 구원까지 나옵니다. 개인 구원이 생겨버리면 또 집단의 구원이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개인구원이나 집단구원 사회구원이란 없습니다. 구원자체는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라는 말도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구원이지 내 개인의 구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12지파 12제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부분은 조금 더 있다가 설명하겠습니다.
만약 개인구원이 성립이 생긴다는 사람들은 그것을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는가 하면, 개인구원이 개인 경건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개인이 구원되었다는 것은 개인이 경건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되었다면 교회가 경건하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건과 거룩이 교회에만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안 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서 그 국가와 민족이 구원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총체적으로 영광을 받는 다는 이론입니다. 이것이 캘빈주의입니다.
이게 정말 말도 안 됩니다. 터무니없이 비 성경적이고 비 복음적인 환상입니다. 이 캘빈주의 이론을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한 것이 개신교 600년의 역사입니다. 제일 먼저 시도한 곳에 네덜란드입니다. 네덜란드는 국가 자체가 교회입니다. 지금은 신앙이고 뭐고 없고 처음에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의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에서 회중교회와 만나서 서로 단짝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먼저 온 것은 필 그림이라고 회중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회중교회와 청교도들이 서로 만나서 이루어낸 것이 미국의 독립선언이었습니다. 미국의 혁명, 독립을 다 이루었고 지금 미국의 건국정신이 이 청교도 정신입니다.
뭐냐 하면, 개인구원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고, 반드시 국가와 민족 사회 전반의 모든 분야에서 거룩한 모습을 보여줄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국가가 되고 민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대 주체사상으로 봐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올바르고 박수칠만한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엄청나게 잘못된 사상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개인 구원이란 것이 어떤 사람이 기도교로 개종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원이란 복음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은 반드시 망해야 돼! 그리고 예수님의 세계만이 영원한거야! 라는 하나님의 취지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야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세상은 더럽고, 더럽다는 말이 윤리적으로 더럽다는 말이 아니고, 세상 자체가 복음을 모른다는 의미에서 더럽고, 두 번째로 아무리 전도해도 이 세상이 멸망될 대상이지 회개할 대상은 아닌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회개하게 되면 심판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말은 이 세상 자체를 네가 알아서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구원이란 말이 그런 뜻입니다. 모세보고 네가 애굽에 들어가서 바로 왕을 회개시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왕은 계속 강퍅하여야 하고 애굽은 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네가 애굽 나라 멸망하지 않도록 전도하라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딴 살림 차리는 것입니다. 애굽은 애굽이고 너는 그곳에서 빠져나오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은 멸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롯의 마누라는 뒤로 돌아보고 소금기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롯은 빠져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구원이라는 말이 성사가 되고, 구원의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개인구원에 경건이 있다는 말은, 개인 구원에 개인 경건을 끄집어 낸 다는 그 발상 자체가 하나님의 이런 구원이 마음에 차지 않는 것입니다. 왜 마음에 차지 않는가 하면, 아직도 미련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미련인가 하면, 아! 내가 착할 수 있는데! 내가 지금 보다 더 완벽할 수 있는데, 지금보다 내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그 미련을 못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구원하시지 않고 잔소리로 구원하셨다면 그 잔소리 듣고 더 착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구원하셨다는 이 말은 우리가 아무리 경건의 티를 내어도 예수님님께서 설정하신 산상수훈의 범주를 뛰어넘을 수가 없고 지켜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인간이 오른 눈이 범죄 하였다고 그 범죄 한 눈을 빼어낼 수가 있습니까? 옛날 교회사에 보면 그런 미친놈이 있어요! 오른 눈을 뺀 놈이 있어요!
그리고 산상설교에 보면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맹세하지 않으면 무슨 보람으로 삽니까? 오늘 하루 이것을 하리라고 맹세하며 사는데요! 또 기절초풍한 말은 돈을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저 주어라고 합니다. 미쳤어요! 만약 그런 교회가 있다면 좋습니다. 저 교회 다니거든요! 4천만 당겨주세요! 그러면 그 교회에서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내가 말씀을 지키는지 시험하러 온 것이다. 그러므로 지켜야지 하면서 4천만 원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갚지 않아도 됩니까? 예 갚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산상설교를 지키는 경건한 교회입니다. 그러면 아멘 할렐루야 하고서 받아오면 되겠지요!
어느 인간이 돈 빌려주는데 거저 주는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형제간이라도 부모자식간이라도 안 됩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있습니다. 똔 떼인 양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 받고 싶은데, 자식이기에 그래 가져가라 하면서 더러워서 주는 또는 어쩔 수 없이 주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제발 돈 좀 가져가 주세요! 마치 집안에 똥오줌 치우듯이, 돈이 보기 싫어서 빗자루로 쓰레기 쓸어 내어 버리듯이 그렇게 내어버리는 심정인 것입니다. 어디 그런 미친 사람 없나? 돈 좀 줍게,,,,, 세상에 이것이 산상설교입니다.
도대체 산상설교를 지킨다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정말 멱살잡고 한 번 해보고 싶어요! 너 집에 돈 있지! 돈 좀 빌려도! 한 마디만 해보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러한데 어느 인간이 돈 빌려달라는데 거저 줄자가 누가 있습니까? 빼앗겼으면 빼앗겼지 거저 줄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말씀을 못 지키기에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구원되었다면, 우리는 오직 하늘을 바라보면서, 땅의 것을 생각지 않고, 우리의 생명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것이 구원이라면, 어떻게 사회구원이라는 여기에 신경을 쓸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회부수라는 말이 아니지요! 그냥 사는 대로 놔둬버리는 것입니다. 독도가 너희 땅이라고 하든지 말든지, 독도가 저희 땅이라고 하면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하면 되고, 그런 것이 하늘나라 영광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 강의하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란 요한복음에 있는 대로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다른 영광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누구시라고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할 때에 그 때 예수님께서 인자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여파로 나다나엘이 이스라엘 사람으로 뽑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쉽게 정리 해봅시다. 무엇이 구원인가 하면, 예수님이 임금 됨을 알리기 위하여 예수님이 뽑아 세우는 그 형상을 구원이라고 하지, 개인 구원, 나 지옥가면 안 돼, 천당 가야 돼, 하늘에서 누가 오신 분이 없나 내가 믿어줄게! 이런 구원은 이 세상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천사가 활동하는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한 구원은 있지, 개인을 구원하는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된 자의 특징은 우리의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나는 그분의 백성이고 신하임을, 그분의 형제임이라는 것이 그것이 구원의 종료입니다. 그것이 끝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임금이십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나다나엘아 네가 간사한 것이 없다. 네가 참된 믿음이구나! 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임금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꿈속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서 착각하기를 자기가 앞으로 무엇을 하여도 자기 잘 되는 쪽으로 축복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기에 천사가 그만큼 많이 필요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성에 있을 때에 아람군대가 포위를 하였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자기와 엘리사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현재 엘리사 편에 눈이 보이지 않던 수천수만의 천사들이 아람군대와 싸우기 위하여 대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옆에 천사의 군대가 서 있는데 어떻게 눈에 보이는 적과 자기 군대만 보면서 나는 어떻게 구원될까를 생각하겠습니까? 천사님 나 지금 무엇을 할까요? 복음을 위하여야지요! 그러면 저 복음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이렇게 되어야지요! 우리의 적이 많지만 내편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 없이 지금 고생하지만 죽어서 좋은데 갈래! 하는 식의 자기 달랑 구원받는 그런 구원이 성경에서는 없습니다. 그것은 동양적이고 종교적인 구원이지 성경의 언약적인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니 개인구원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회 구원이 없습니다. 개인과 대비되는 사회개념이란 것이 없습니다. 제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를 아셔야 합니다. 기존에 이런 강조를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7:5절을 봅니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좀 난해해서 1절부터 보아야 하는데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에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이 말씀은 스가랴에서 나오는 내용인데 스가랴의 주제가 무언가 하면 마지막 때에 일을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가 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사방에 돌아다니며 저주의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스가랴의 내용이 십자가 이후에 완성태로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5절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해서 각 지파마다 일만 이천씩 나옵니다. 제가 지금 개인구원은 없다고 하면서 이 대목을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지파 일만 이천입니다. 열둘이 왜 나오는 것입니까? 개인구원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원에서 구원이란 확정된 것이고, 이스라엘의 임금 된 예수님은 아무나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확정된 그 사람들만 구원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제가 말하는 취지는. 예수님께서 길 가시다가 아무나 너 구원받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의논하실 때에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할 때에 언약대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언약대로 구원하시는 그 일에 그 언약보다 뒤에 태어난 제 삼자인 내가 그 언약에 개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12지파로 확정된 데만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사만 사천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에 가시다가 자기 원하시는 자를 마음대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속한 열두지파를 예상하고, 이스라엘은 열두지파에 속한 자만 이스라엘이지 그 외에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열두지파만 구원하기로 이미 성부와 성자 사이에 약속이 되어 있기에 나머지기는 구원 안 해 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구원 받고 안 받고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온 것을 수용하느냐의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임금이신데 다니엘서에 보면 ?���인자?���입니다. 한문 그대로는 사람의 아들인데 그렇게 풀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대로 ?���인자?���로 보아야 합니다.
인자되신 분이 어떤 분이신가 하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오셔야 되고,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할 일이 있고, 그 일은 이스라엘에 속한 자를 건져내실 임무가 있는 것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정리되면 되는데 그런데 내가 구원되었는가? 아니 되었는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 구원받고 싶습니다!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죠! 그것은 개인구원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이스라엘이 영원하다고 하셨는데 그 이스라엘의 임금이 와야 구원된다는 그 이스라엘이 바로 접니까? 라고 해야지요!
그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사도행전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될 때가 이 때이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그 때는 너희는 몰라도 되고, 장차 보혜사가 오시는데 보혜사가 오시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12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가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창세전에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난 것입니다. 이스라엘만 구원하신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속한 자로서 이스라엘만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긴 이야기 짧게 합시다. 제가 지금까지 개인구원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이스라엘로서 ?���로서?���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로서만 구원이지 개인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에스겔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군대라도 합니다. 아까 야곱에게 내려왔던 군대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마하나임,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이야기를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군대만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라면 이 군대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전쟁입니다. 전쟁이니 하나님 앞에서 무슨 전쟁입니까? 창세기 3:15절의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싸우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따져보니 구원이란 문제가 내 개인의 구원하고 내 죽어서 좋은데 가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 3:15절의 전쟁에 병력 동원 차 지금도 끄집어내어서 전쟁 시키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군대로서 일을 시키시고자, 보초를 쓰든지, 통신병을 하든지, 정비병을 하든지, 운전병을 하든지 어떻든 병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구원된 것입니다.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군대로서 구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성도가 하나 출몰하였다는 것은 성도의 주변에 무엇이 같이 출몰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군대가 하나 등장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과 싸워야 할, 창세기 3:15절에 의하여 악마의 세력이 등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방금 이야기 한 이 이야기를 사람들이 안 믿어요!
목사님!
예
제가 교회 나와서 어떻게 하면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갈 수 있습니까?
예수 믿으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 다음주 교회 나오면 되지요
예, 직장은?
사업하고 있는데요.
그러면 다음주에 봅시다.
이것으로 끝나요! 개인이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하여 보험하나 들기 위하여 주일마다 교회 오면 그것으로 끝나요. 성경 전체의 흐름을 몰라요. 목사님 말씀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면 되었지 성경 보기도 싫어요.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도 싫어요. 나는 지금 사업하는 사람이라서 내 하는일이 일주일간 바빠요. 그러니 가끔 교회 나오고 떡 받고 잔 받고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확인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험 들어놓고서 매일 보험회사 찾아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차사고 났을 때에, 건강을 잃었을 때에 보험회사 직원 만나면 되지 매일같이 만날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 정분날 일이 있습니까? 마치 오늘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이런 것입니다. 교회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늘 상 가까이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에게 교회란 보험회사이기에 가끔 일주일에 한번씩은 들러주고 내 구원받은 것 확인하고서는 얼른 나와서 돈벌이하고 자식들 먹여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장례식 치러 줄테니 그러면 천당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들이 하는 말이 여러분 너무합니다. 일주일에 주일날 한번 코빼기 보이고는 안 보입니까? 여러분 개인구원은 맞습니다. 하지만 개인구원만 하지 않고 그 다음에 무엇입니까? 아까 이야기 하였지요! 개인구원에서 개인이 경건해야 하고, 경건한 개인이 모여서 교회 거룩이 되고, 교회 거룩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사회 구원을 이룰 때 이 전체가 모여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너무나 개인주의에 빠지니, 교회가 운영이 안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이기주의라서 주일날 달랑 코빼기만 보이고 돌아 가버리니, 그래 가지고서는 빛과 소금의 역할이 안 되니, 교인이 이 사회에 몇 퍼센트인데 이런 모양이냐면서 교회가 나서서 이 세상을 개혁하여 이 민족이 총체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구상을 해보는데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야기를 좀더 진전시켜 봅시다. 아까 한 중요한 이야기를 다시 합니다. 성도가 하나 떴다고 하면, 영적으로 주위에 뭐가 싹 깔리는가 하면, 뱀의 후손에 속한 사람들이 성도가 떴다고 하면 막 달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에 나오지요! 두 증인이 나오니 그 증인을 주위에서 알아보고 그 사람을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지요! 그 일을 통하여 그 도성이 소돔과 고모라 애굽이라는 속성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그럴 때에 성도는 죽지만 성도를 죽인 그들은 선물을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기뻐합니다.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지요!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성도와 뱀의 후손이 만남이 창세기 3:15절을 그대로 실시한 것이고, 결국 성도는 뱀의 후손의 정체를 ,그 숨어 있는 정체를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이 성도는 하나님의 군대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그 성도는 구원이라는 것을 확인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성도가 교회 나올 때가 아니고, 주변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데, 이상하게 나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그들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에 비로소 자기가 성도됨의 정체성이 확인 되는 순간입니다. 복음과 예수 이름으로 핍박을 받을 때에, 예수 이름으로 고난을 받을 때에 이 마지막 시대에 성도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영적 전쟁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지금 이 이야기를 강단에서 교인들에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말씀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얼른 듣기로는 성경적으로 맞는 것 같습니다. 고난의 길로 십자가의 길로 가라는 말을 어디서 들은풍월이 있으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가 세상에서 고난 받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합니까?
시어머니가 교회 가지 말라고 하는데 억지로 가다가 머리 뜯겨지는 것이 고난입니까? 아니면 회사에 나가서 회식자리에서 나는 예수 믿어서 술 먹지 않는다고 하다가 고난 받을까요? 어떤 식으로 고난 받을 까요? 고난 받으면서 내가 성도임을 확인할 만한 어떤 규칙, 어떤 세칙을 말씀해 주셔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라고 요구 하겠지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고난과 고생을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는 것은 고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생은 누구나 받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 하였지요! ?���고생 총량 일정의 법칙?���이라고 고통을 다 합쳐보면 다 똑같은 것입니다.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인간이나 다 고생길을 갑니다. 누가 더 고통을 많이 당하고 덜 고통당하고가 없습니다. 아담이기 때문에 큰 교회 하든지 개척교회 하든지 다 고생합니다. 자기 혼자만 고생하는 것 같지만 모두가 다 고생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라는 것은 이 고생하는 것과 다릅니다. 고난은 어떤 반응이 나타나야 고난인가 하면, 회개가 나타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 내가 저 사람 때문에 고난당합니다. 이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고생하는 것입니다. 진짜 고난이 무엇입니까? 진짜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을 아는 순간이 나옵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돌아가셨구나! 나 같이 시근 없는 자 때문에 예수님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셨구나 하고 깨달을 때에 그것이 고난입니다. 그때만 고난이고 나머지기는 고난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시니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야외로 가고 있습니다. 모두 막춤추고, 버스 안에서도 흔들고 하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을 보고서, 너는 교회 다니니 찬송가 불러가면서 춤 한번 춰보라고 합니다. 이근호 목사 말 들으니 유행가 안 부르고 찬송가 부르다가 당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고생이라고 하였으니 찬송가 부르다가 이 분위기 파악하지도 못하는 놈아 하면, 그런 것은 고난이 아니고 고생이거든요! 그럴 때에 하나님 내가 이렇게 고난당하는데 도와주시지 않습니까? 하는 식의 노림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유행가 부르면서 놀다가 버스타고 집에 오다가 집에 다가오다가, 이상하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 라는 이 되지도 안한 인간 때문에 주님께서 그 귀한 목숨을 버리셨구나! 그때에 잠시 한 2초 순간 찔끔 눈물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옆에 술이 깬 친구가
야 너 울지?
아니 그냥 눈물이 조금 났어!
노는 날 왜 우냐?
잠시 딴 생각하다보니 인생이 서글퍼서 눈물이 나온다. 그럴 때에
얘는 우리하고 달라! 우리와 다르다는 이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드러내는 구별점입니다.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을 누가 드러냅니까? 내가 드러내면 그것은 고생입니다. 하나님이 저 다르게 살았습니다. 이런 것은 고난이 아니라 고생입니다. 그러나 다름이란 다른 사람이 아는 것입니다. 오늘 중요한 이야기 합니다. 당신은 다르다고, 다른 사람이 이야기 합니다. 뭔가 달라, 설명은 할 수 없는데 무언가 달라, 생각하는 것과 최종적인 관심사가 다르다고 저쪽에서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경계선이 생기는데 그 경계선을 저쪽에서 치는 것입니다. 이쪽에서 나는 술 안 먹고 찬송가 부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우리가 원치도 않는 경계선을 만들어 안겨 주는 것입니다. 다음에 또 놀러가는 일이 생기면 너는 좀 다르기에 꼭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분위기 맞추지 못해서 그러나 유행가 부를게라고 하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저쪽에서 영적으로 악마가 역사하는 것이 그렇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그렇잖아요! 한쪽이 성령이 역사하면 반드시 악령도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귀가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고 하였습니다. 어디서 네가 나에게 명령하느냐? 너는 내 부하이면서, 그러니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도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마귀도 다 압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아는 마귀가 이상스럽게 너는 뭔가 달라 너 혹시 교회 다니느냐고 하면서 무언가 사고방식이 우리하고 달라 하면서 저쪽에서 이야기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언가 어울릴 수 없는 단절 같은 것을 저쪽에서 제시 해 줍니다. 그때 우리 느낌은 외롭지요! 외롭습니다. 외로운 순간 마태복음 7장의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은 멸망의 길이고 좁은 길로 가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좁은 길로 가라고 해서, 우리가 자진해서 억지로 고난 받으면서 순교하겠다고 뛰어다니며 가는 것이 아니고, 저쪽에서, 저쪽이 누구입니까? 악마이지요! 악마위에 누가 있지요? 하나님이 계시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악마를 이용해서 의도적으로 택한 자와 택하지 않은 자를 이 세상에서 갈라내고 있습니다. 저쪽에서 갈라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 것은 고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과 고난은 다릅니다. 종교자유를 달라고 금식을 하거나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밥벌이 차지하기 위하여 자기 정체성 과시하는 것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고생이고 고난은 저쪽에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저쪽에서 만들어 줄때 베드로전서에 보면, 네가 외롭고 서럽거든 주의 영이 함께 있는 증거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에 성도는 다른 길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조차 주님께서 다스리기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택한 자는 어떤 경우라고 이 땅에서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니 인위적으로 세상 사람과 분리해서 떨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친하게 지내세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서로 화평하라고 하였습니다. 평화를 유지하세요! 그러나 저쪽 세계에서 우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꾸만 밀어냅니다. 밀어낸다고 해서 직장 그만두게 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의 어두운 면, 그들의 세속적인 모습이 수치스러워서, 예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밀어내듯이 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시거든 이것이 바로 전쟁 중에 있는 구원의 속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총체적인 구원의 속성입니다.
제가 오늘 결론을 내리면서 무엇은 없다? 개인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구분하시는 악마의 세력과 성령의 세력, 하나님께서 임의적으로 조정하시는 그 구분은 아마 우리 인생 끝날 때 까지, 세상 끝날 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질문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라고 할 때에 ,,,, 잘 들리지 않음, 추측컨대 이스라엘의 구원의 특징이 무엇이냐는 질문 같음.
답변, 예. 아까 제가 이야기 하였는데,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지혜 이 세대의 변사가 어디 있느냐? 하면서 우리는 다 못나고 천한고 가진 것도 없는데 다만 특징은 그리스도만 자랑하기 위하여 모인자입니다. 그러니 같은 이스라엘 같은 교인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세상의 것을 가지고 높낮이를 경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경쟁이 없습니다. 발이 눈더러 쓸데없다고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사람이 술을 두병 먹든지 담배를 두 갑을 피우든지 관계없지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그 사람이 그런 것을 끊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배후에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이 약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에 보면 누가 믿음이 약하다고 함부로 대하느냐? 주께서 죽으신 자를 네가 함부로 힐문할 수 있느냐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복음 하나 때문에 우리가 모였다는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스라엘의 임금이고 우리는 싸워야 할 문제이지 나 구원받았는데 너도 구원받는가 한번 보자는 식의 개인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개인 구원이 아니라는 말은 개인구원은 성경에서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처럼 구원받으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박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구원이 곧 우리 구원이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몰랐던 사람이고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인데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도 알고 형제도 알고 주님도 알았사오니 이 모든 축복을 세상 것과 바꾸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녹취 050722 오후 7:30 이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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