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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의 꿈(창41;1-8) 1809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9. 27. 07:46
2018-09-26 20:52:16조회 : 18         
   바로의 꿈 180926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바로의 꿈(창세기 41:1-8)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KcEAeqVQeX0, Hit:0

 이근호18-09-26 21:28 
바로의 꿈 

2018년  9월 26일                     본문 말씀: 창세기 41:1-8 


(41:1) 만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하숫가에 섰는데 

(41:2) 보니 아름답고 살찐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41:3) 그 뒤에 또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하숫가에 섰더니 

(41:4) 그 흉악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찐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41:5)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41:6) 그 후에 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41:7) 그 세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 

(41:8) 아침에 그 마음이 번민하여 보내어 애굽의 술객과 박사를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 꿈을 고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배제된 가운데, 바로왕에서 하나님께서 꿈을 주십니다. 꿈이란 소지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꿈으로 인하여 기존의 인간들이 생각한 모든 현실관을 붕괴시키는 꿈입니다. 기존의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현실을 구성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론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가의 구성을 이루는 것들이 비록 눈에 보인다 할지라도 국가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들은 신봉하고 있는 겁니다. 국가가 품고 있는 것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입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개인이 관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것을 법으로 연결시키는 국가의 권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모여서 국가를 만든다고는 하지만 이것조차도 본인들의 의견이나 의사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일방적으로 고집하지 못하고 집단의 의사에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으나 국가 그 자체는 개인이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항상 국가 속에서 작용하는 권력의 법을 의식하면서 인간들이 자기 행동에 조심하게 됩니다. 충동대로, 자기 의견대로, 내끼는 대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겁니다. 게다가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국가의 대표자로 왕을 세워놓았다면 그 왕은 더 이상 국민의 입장에서 1:1로 상대할 대상이 아니라 우러러 볼 대상이 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바로의 두 신하의 운명은 바로 왕의 위지에 의해서 결정 지어졌습니다. 한 사람은 복권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처형당했습니다. 그들 신하들도 나름대로 자기 집이나 자기 동네에나 개인적으로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자기 의사결정에 의해서 인생을 살아왔을 겁니다. 

하지만 왕의 눈치를 보고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권력의 종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왕은 국가를 대표합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국가 권력에 붙잡힌 채 살아가면서 그 국가를 현실 세상의 대변한다고 믿게 됩니다. 요셉도 예외가 아닙니다. 

국가의 권력이 그 어떤 권력보다 실질적이고 실재적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왕의 신하의 도움을 받아 다시 복권되기를 원했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왕에게 하나님께서 꿈을 주셨다는 것은 단순한 바로왕이라는 개별적인 운명을 관련된 꿈이 아닙니다. 그 꿈은 애굽의 운명과 관련있습니다. 

일단 요셉은 그 꿈이 바로왕에게 임하는데 있어 아무런 관련성이 없습니다. 요셉이 도와주어서 바로왕이 꿈을 꾼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과 바로왕만의 사이에서 꿈이 제시된 겁니다. 그렇다면 외형적으로 봐서 바로왕 개별적인 꿈입니다. 그런데 바로왕은 꿈을 꾸고 난 뒤에 결코 이 꿈이 개인적인 꿈이 아님을 직감합니다. 

애굽나라의 파괴적 미래상에 관한 꿈이라는 사실을 예상입니다.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냥 넘어갈 사항이 아님을 왕을 알고 꿈의 해석자를 찾게 됩니다. 여기서 그 어느 신하에 감히 나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꿈을 해몽하는 정도에 머물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긍정적으로 해몽해서 왕의 마음을 달래줄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고 있습니다. 남의 꿈, 곧 왕의 꿈에 자신의 사활을 걸 그런 무모한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꿈을 해몽한다는 것은 곧 애굽의 장래를 전적으로 보장하고 책임질 사람이 됨을 의미합니다. 그 정도로 꿈은 포괄적입니다. 

감히 나설 자가 없지요. 꿈의 해석자는 참으로 그 꿈의 내용으로 앞으로 애굽의 사정이 전개시킬 자신감이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더 이상 바로왕이 애굽을 책임지고 통솔할 실질적인 통솔자로서 무능함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시면서 바로의 꿈에서는 요셉과 의논하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꿈과 관련한 진정한 개별자는 하나님 본인 이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곧 애굽 나라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나라를 구현하시려는 겁니다. 이는 요셉이라는 개인의 나라가 아닙니다. 비록 요셉이 나중에 애굽의 실질적인 통솔자가 되더라도 그것은 요셉을 위한 나라는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니, 현 애굽 나라의 특징이 ‘존재자’를 위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즉 국가 안에 있는 인간들은 그 국가 안에서 소박하게 자신의 재산이나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코자 합니다. ‘행복한 가정 꾸미기’가 그런 겁니다. 이 소박한 자기 삶을 보장받기 위해서 모든 총괄하고 최종적인 가치적 집단의 이미지로서 국가법을 따르게 됩니다. 

이는 모든 개인이 국가에 종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같은 양식입니다. 그 구성원들이 모두 새로운 나라에 종속되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 나라에서는 개인들의 소유가 조성되지만 하나님 나라에게는 이점을 용납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들의 자신들의 존재를 포기할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왕에게 주신 꿈은 ‘존재’가 아니라 ‘과정’을 보여줍니다. 즉 ‘과정으로서 새롭게 등장하는 나라’가 바로 애굽 나라를 통해서 비쳐지는 ‘요셉 꿈의 나라’입니다. 애굽 나라는 최종적 본질로서 ‘7’이라는 숫자를 동원해서 보여줍니다. 알차고 실은 암사로서 애굽 나라가 꿈 속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실진 암소라는 애굽의 본질 곁에 바짝 말라버린 암소라는 이미지로서 애굽 나라의 본질이 꿈 속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존재로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어떤 요동치는 변화 과정이 나타납니다. 파리하고 흉측하게 말라버린 암소가 살지고 보기좋은 암소 일곱 마리를 잡아먹게 됩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파리하고 흉측한 일곱 마리 암소뿐입니다. 이게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공개되는 애굽나리의 본질’입니다. 바로 이 과정을 누가 조장하게 될까요? 여기서 요셉이 해석자로 들어서서 결국 이 과정을 떠맡게 됩니다. 즉 ‘존재로서의 애굽나라’를 요셉이 인수받아 ‘과정으로서의 애굽’으로 전환하면서 그 과정 속에서 숨겨진 하나님 나라이 진수를 출현시키게 됩니다. 

해석자가 통솔자가 되는 변화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 국가가 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종속되는 임시적 나라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09-27 14:30 
157강-창 41장 1-8절(바로의 꿈)1809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1장 1-8절입니다. 구약성경 62페이지입니다. 

창 41:1-8 

“만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하숫가에 섰는데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하숫가에 섰더니 그 흉악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세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 아침에 그 마음이 번민하여 보내어 애굽의 술객과 박사를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 꿈을 고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요셉이, 자기가 의지할 수 있고 뭔가 해 볼 수 있는 모든 여지는 다 제거되었습니다. 바닥이 났지요. 내가 나를 살려보겠다고 몸부림쳤지만 아무 소식이 들리지 않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준 그 꿈에 대해서 요셉 본인의 사적인 출세나 영광을 위해서 준 꿈이라고 오산을 했습니다. 

그 꿈이 사적인 꿈이 아니라는 생각, 꿈을 꾼 당사자가 요셉이기 때문에 감히 그런 생각을 못했지요. 이 꿈은 나 잘되라고 준 꿈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면 요셉이 좀 어리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개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과 사태를 자기중심으로 잘못되게 해석하는 주인공으로서 살아있다는 것을 우리는 감수해야 됩니다.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데 내가 거기 있음으로서 마치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나를 위해서 돌아간다는 착각을 요셉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아무리 보고 교회를 아무리 다녀도 두 가지가 정리되지 않기에 소용이 없습니다. 

뭐가 정리가 안 되느냐 하면 그 한 가지는, ①원인 없이 결과가 주어진다는 그 사실을 몰라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들은 그 원인이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서 우리 쪽으로 유입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내 행함과 관련 없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대체 누가 나 말고 이 세상바깥에서 원인이 되어서 이런 결과를 자꾸 생산해내는지, 그 관심사를 그 분 쪽으로 돌려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존재하니까,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 있다고 여기니까 항상 생각하는 것은, 내가 나부터 무엇을 어떻게 하게 되면 나에게 좋은 결과가 주어질까를 생각합니다. 그 점이 제대로 사라지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까 교회를 수십 년 다니고 성경을 아무리 봐도 자기 자랑밖에 나올 수 없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만, ②이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이 감수해야 됩니다.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에, 존재한다는 그 느낌 때문에, 의식 때문에 그 의식에서 자동적으로 나는 안 좋고 남 좋은 일 생기면 우리는 화를 내고, 성질을 내고, 분통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 일어나야 된다고 외치거나 데모까지는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남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면 시기 나는 이유가, 말은 안 해도 평소에 뭐든지 내게 좋은 것이 좋은 세상이고 좋은 하나님이라는 일방적인 생각을 계속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생각이 우리 속에 계속 남아 있으니 하나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우리 쪽에서는 다 엉터리 해석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마다 항상 이런 전제를 갖춰야 됩니다. 나는 어느 정도 신앙은 갖춰졌기 때문에 이제 성경말씀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라는 그러한 선입감은 버려야 됩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소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날마다 우리를 가지고 신앙이라는 것을 주께서 만들어내는 절차에 우리가 말려들고 있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우리는 매일같이 새로 시작해야 된다는 거예요. 매일같이, 나는 신앙이 없다. 바닥이지요. 나는 신앙이 없다. 

왜냐하면 신앙이 있으려면 나 중심이 안 되어야 되고, 신앙이 있으려면 내 행위로 말미암아 어떤 이득이 얻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부정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우리가 신앙이 없으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이것은 신앙이 없는 거지요. 

심지어 신앙을 가졌으니까 신앙 가진 그것을 근거로 해서 더 달라고 요구를 하니 이게 바로 신앙 없는 거거든요. 지난 시간에 했지만, 창세기 40장 23절에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요셉이 버림받은 거예요. 술 맡은 관원장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겁니다. 

요셉에게 주어진 그 꿈의 전개과정이라든지 그 완성에 있어서 요셉이 품고 있던 자기위주의 사고방식의 요셉, 이것은 버림받아야 됩니다. 이걸 어렵게 하면, 요셉에서 빠져나온 요셉, 요셉에서 갈라져 나온 요셉, 요셉에서 분열된 요셉, 이러한 작업이 요셉의 꿈을 통해서 꿈 속에 들어 있는 본래의 내용이 됩니다. 

우리 자신이 그대로 남아 있고 살아 있다면 우리는 우리 위주의 사고방식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서 포기합니까? 나 좋으라고 살아가는 인생에서 어떻게 나 스스로 벗어날 수 있겠어요? 못 벗어나거든요. 이것은 하나님이 원인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획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 안에 도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꿈이 중요하지 네가 중요하지 않다는 그 절차가운데 하나로 요셉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박탈당하는 경험을 갖게 하셨습니다. 참 귀한 경험이고 참 요셉은 행운아라 볼 수 있어요. 아, 세상은 나하고 별개로 돌아간다는 사실, 나 좋으라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 저 해와 달과 바다의 출렁이는 파도가 나 즐겁게 하기 위해서 있지 않다는 사실, 집안의 우리 가족, 식구, 내 자식이 날 위해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세상적으로 볼 때는 아버지가 있고 자식이 있지만 그렇게 보지 말라고 했지요. 자식이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는 겁니다. 내가 누군지는 자식을 통해서 나를 다시 보게 하는 겁니다. 자식의 모습을 통해서 내가 잊어버리고 몰랐던 내 모습을 들춰주는 거예요. 

자식이 아버지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미래가 과거를 결정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있는 이상은, 나의 옛날에 과거에 잘나갔던 것, 고생한 것 그것으로 미래에 효과보기를 원하고 있거든요. 어떤 결과물을 낳기를 원한다고요.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일, 그것을 저는 예상 못할 일이라고 보는데요. 예상 못할 일이 우리의 진짜 우리의 모습을, 양파껍질 벗기듯이 진짜 우리의 모습을 들춰주게 하는 겁니다. 우리의 미래가 그렇습니다. 과거로 정리해서 알았던 우리는 잊어버리세요.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그것은 다 거짓된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마디로 하면, 꿈이라 하는 것은 사적인 것이 아니고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꿈은 개별성을 위로하고, 달래고, 격려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별적인 것은 꿈속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속에 나타나는 유일한 개별성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개인뿐입니다. 그 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 자리에 끼어들면 안 됩니다. 

개별적이지 않는 미래고, 꿈이기 때문에 개인이 기대하고 예상했던 모든 것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고 정말 우리가 참된 성도라면 예상 못할 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준비된 예상 못할 일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우리는 늘 어떤 새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뭔가 계속해서 창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과거에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새롭게 제공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알던, 이 세상이 주던 구닥다리 같은 식상한 것,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을 추구하던 그 모든 노력이 다 무용지물이고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자기가 옛날에 한 가닥 했던 것, 놀던 것, 잘할 수 있는 그것을 찾아서 해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한테는 그런 것이 행복이고, 그런 것이 만족이고, 그런 것이 즐거움이 아닙니다. 

성도한테는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더 깊이 있는 진리, 그 진리 앞에서 ‘아, 내가 이런 인간이구나.’라는 것, 통째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아는데 그걸 개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전체, 이 세상전체를 한꺼번에 아는 가운데서 나는 거기에 휘말려 들어가 있고,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정할 때 오는 기쁨입니다.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이론상 지식으로 그것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그 복음 앞에서 다시 한 번 재정립이 될 때 그 동안 우울했고, 고민했고, 그리고 걱정했던 모든 것은 다 부질없는 걱정이었고, 근심이었고, 두려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또 기도를 하는 가운데서 이런 것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만약 우리가 고민하고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럴 때 하나님이 응답하는 입장에서 천사가 나타나서 손가락에 입을 대면서 쉿!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만 이야기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피다.”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들어보면 아는 이야기 같지만 우리가 그만큼 나 자신에 대해서 집착하고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헐떡이면서 고민거리 때문에 우울증 걸리는, 내가 어쩔 줄 모르는 환경이 조성된 가운데서 “예수님이 여러 가지 답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답만 제공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다.”라고 했을 때 새삼스럽게 그걸 아는 거예요. 

부질없고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것, 답변도 안 되고 문제될 것도 아닌 것을 붙들고 그동안 “어찌합니까~”하고 노래 부르면서 고민고민해 왔던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확실하고 분명한데 현실감이 없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걱정에 너무 빠져가지고. 

여기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포괄적이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모든 세상을 다 포괄하는 거예요. 그 포괄을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국가라고 보면 됩니다. 국가 또는 나라. 메가(mega), 아주 거대한 국가, 나라 쪽으로 꿈이 주어집니다. 

본문 창세기 41장 1절에, “만 이년 후에” 만 이년 후면 요셉의 나이가 서른 살 때입니다. “만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하숫가에 섰는데” 이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꿈이 개별적인 요셉을 빼돌려 버립니다. 요셉을 제켜버려요. 

요셉을 제켜버리고 요셉이 꿈 꾼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이 이번에는 거대국가의 통솔자, 또는 책임자인 바로에게 꿈을 꾸게 만들어요. 그러면 바로가 그냥 개별자가 아니에요. 사적인 인간이 아니고 요셉을 감옥에 보낸 메가, 거대조직체, 또는 다른 말로 하면 힘의 조직체, 죄 없는 요셉을 감옥에까지 집어넣는 거대한 힘의 조직체, 그 책임자가 바로입니다. 

국가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요.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거울 앞에 있는 내 몸보다도 더 실질적이고, 더 살아있고, 더 진정성 있고, 더 현실적이에요. 이러한 이야기는 실제로 그렇습니다만 논리로 이야기하면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가 아프다. 그러면 내가 아프지요. 내가 아픈데 우리는 내 이가 아프다, 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가 아픈데 나라는 뭐 하나? 우리 동네에 치과를 많이 만들도록 조치하지.”라고 나오거든요. 그 때 “나라가 뭘 하느냐?” 이렇게 해요. 논리상 어려운데 이걸 쉽게 하면, 국가는 그냥 백화점인데 그 백화점이 안 보인다는 점이에요. 이게 중요한 점입니다. 

보통 백화점은 백화점이 눈에 보이고 그 안에 들어가 보면 없는 것 없이 다 있지요. 그런데 국가라는 백화점은 없는 것이 없어요. 없는 것이 없는데 국가 자체는 보이지 않아요. 그러면 국가 자체가 안 보인다는 것은 뭐냐 하면, 없는 것이 없는 것끼리 이어주는 그 권력, 힘, 힘 자신의 힘에 의해서 우리는 안 보이는 개인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나보다 더 힘이 세다는 것을 내가 의식하면서 꽁꽁 묶인 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누구하고 시비 붙을 때 그 사람을 주먹으로 팰 수가 있어요. 때릴 수 있습니다. 

보이는 내가 보이는 손을 가지고 그 사람을 때릴 수 있고 또 그 사람도 보이는 주먹으로 나를 때릴 수가 있는데 왜 그렇게 못하느냐 하면, 보이는 주먹보다 더 확실하게 있는 것이 뭐냐 하면, 폭력죄라 하는 것, 국가의 법률체제, 힘의 관계, 힘의 권력망, 그물망이 보이는 내 몸보다 더 실질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 실제적이고 실질적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주눅 들어서 평생을 살아간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본 그 술 맡은 관원, 떡 맡은 관원,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이 꿈을 꿨지만 그 꿈대로 해결했던 권력자는 누구냐? 바로였습니다. 

바로가 복권시켜주며 살고, 바로에게 밉상 받은 떡 맡은 관원장은 죽었습니다. 결국 지난 시간에 살핀 그 꿈은 어디에 종속되느냐 하면, 실제적인 이 세상이라는 그것을 묘사하는데 동원된 꿈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고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두 관원의 꿈이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내 인생 나만 챙기면 돼, 라고 하지만 그것은 철없는 소리입니다. 인간은 인간보다 더 센 국가의 힘에서 절대로 개인은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공포를 느끼고, 함부로 행동 못하고, 함부로 남에게 욕 못하고, 함부로 옷 벗고 길거리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용납을 안 해요. 이 말은, 인생이라는 것은 홀로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사는 것이 아니고 날 때부터 이미 거대한 힘의 체제 안에서 출발하고 태어나는 겁니다. 따라서 요셉도 예외가 아닙니다. 요셉도 애굽에 노예로 잡혀있는 이상은 요셉도 애굽의 권력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낼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바로가 꿈을 꿨다는 것, 이 꿈은 요셉의 사적이고 개별적인 소원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개인적인 꿈이 아니라면, 아까 제가 포괄적이라고 했는데 뭘 포괄이라고 하느냐? 

바로가 꿈을 꿨는데 그 꿈에 대해서 바로가 겁을 집어먹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시작은 창대했는데 끝은 미약했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이 꿈은 바로왕국, 바로왕가, 애굽의 파멸에 대해서 예고한 겁니다. 바로는 애굽을 대표하는 사람이니까 꿈과 하나님을 통해서 바로가 연결되었다는 말은 애굽나라가 전능하신, 바로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그 절대신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고, 조종 받고 있고, 결국은 운명이 절단난다는 사실을 꿈을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바로왕은 이 꿈의 내용이 애굽의 운명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꿈의 해석을 신하들에게 요청하게 됩니다. 요청할 때 아무도 바로의 꿈의 해석을 할 자가 없어요. 왜 꿈의 해석을 할 자가 없느냐? 왜 거짓말해석도 안되느냐 하면, 개별적인 꿈에다가 자기의 목숨을 건다는 것은 어리석은 도박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나 바로 입장에서는 개별적인 꿈이 아니고 애굽나라의, 국가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바로는 어떤 사람을 찾느냐 하면, 내 꿈이 개인적이 아니라 애굽나라 운명과 관련된 꿈인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해석자가 오게 된다면 그 해석자가 이 꿈에서 예고한 파멸, 위기에서 구원할 수 있는 당사자가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신하들은 바로 이것이 두려운 거예요. 꿈을 그냥 해몽만 해주는 것이 아니고 꿈을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서 그 꿈에 대해서 피할 수 있는, 꿈이 예고한 파멸을 모면할 수 있는 대안까지 제시해야 되니까 이것은 신하들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고 그 꿈을 꾸게 한 전능하신 하나님과 관련된 문제기 때문에 감히 인간으로서는 끼어들 수 없지요. 

그런데 여기에 여러분이 알다시피 요셉이 꿈의 해석자로 들어갑니다. 해석자로 들어가는 순간 이 꿈은 바로 꿈이 되지 않고 누구의 꿈으로 이전되느냐 하면, 요셉의 꿈으로 이전되어 버려요. 이 때 요셉은 개별자 요셉이 아닙니다. 애굽의 통솔자로서, 애굽전체의 운명을 일괄적으로 처리해 낼 위치에 있는 포괄자 입장에서 요셉은 새롭게 변신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꿈을 주시는 것은 요셉에게 전에 줬던 그 꿈의 연속선상에서, 꿈에 예속되는, 요셉에게 준 큰 꿈을 이루기 위한 보조적인 꿈으로서 바로에게, 또는 바로의 신하에게 연발적으로 꿈을 꾸게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애굽나라의 통솔자로 바로에게 인수인계를 받게 되느냐, 라고 생각할 것인데 이게 그렇지 않아요. 요셉이 생각하는 애굽은 없습니다. 그런 애굽나라는 없어요. 다시 말해서 현재 바로가 통치하고 있는 애굽나라, 그 애굽나라가 애굽나라의 전부에요. 

그렇다면 이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해서 어떤 암시를 주게 되는 애굽나라는 어떤 나라냐? 그것은 더 이상 애굽나라가 아니고 요셉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셉의 나라가 애굽나라를 인수받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인수받는 것이 아니에요. 

인수받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느냐? 어떤 존재의 나라를 인수받는 것이 아니고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구성되는 나라가 등장하는데 그 나라가 바로 요셉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 과정을 묘사하게 되면, 그 과정을 표현하게 되면 그 과정으로서 나타나는 새로운 하나님의 꿈의 나라가 출현돼요. 출현, 등장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꿈을 다시 보게 되면, 2, 3절에 “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 먹고 그 뒤에 또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하숫가에 섰더니.”라고 되어 있어요. 

처음에 튼실하고 아름답고 살찐 일곱 암소가 있고, 그 다음에 흉악하고 바짝 여윈 암소가 있었다. 살찐 일곱 암소, 그게 존재인데 그 뒤에 바짝 여윈 일곱 암소가 올라와서 아름답고 살찐 소를 잡아먹는 이것은 하나의 동사지요.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요셉이 해석하는 꿈의 애굽나라는 ‘애굽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그 있는 애굽나라, 세속적인 그 인간세계의 나라가 어떤 새로운 과정을 표출해내고 그것을 드러내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나라가 되는 거예요. 쉽게 가겠습니다. 

보통 이 세상의 나라는, 아까 백화점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걸 좀 더 설명하게 되면, 백화점에 없는 물건이 없듯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라는 것, 정치, 문화, 기업, 이 모든 것도 국가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라는 것을 봅시다. 종교라는 것은 종교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 이론은 마치 국가를 초월하고 초능력적인 하나님과 마치 직통적으로 교류가 되기에 국가도 어찌할 수 없다는 식으로 이해되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라는 것, 옛날 천주교나 기독교를 예를 들어보면, 그들의 종교라는 것은 뭘 통해서 하느냐? 

눈에 보이는 교회, 예배당이 여기 있다, 성당이 있다, 를 가지고 그들은 종교가 있다고 봐요. 이것은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냥 교회 없이, 성당 없이 복음만 있다, 라고 사람들이 받아들이면 참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국가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 없이는 복음이 없는 줄로 알고 있고 성당 없이는, 원래 성당은 복음이 없지만, 성당 없이는 복음이 없는 줄로 알고 있어요. 

예수님한테 무슨 교회가 있었습니까? 예수님한테 무슨 예배당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 예수님에게 예배당이 없다는 사실을 오늘날 교인들이 잘 안 받아들이려고 해요. 왜 그러냐 하면, 예배당 세울 때 자기들이 목돈을 냈잖아요. 

자기가 목돈 내서 건물 세웠으니까 그 건물, 부동산, 그걸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없으면 자기신앙에 방해가 되고, 신앙생활이 좌절되고, 신앙이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생각하기 마련이라는 말이지요.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하게 되면, 혼자서 신앙하면 신앙 아닌 줄 알고 두 세 명이라도 모여야 은혜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기 마련이고 그 눈에 보이는 그것들의 최후의 결정판은 뭐냐? 국가라는 말이지요. 국가가 “세금 내” 국가가 “까불지 마” 국가가 십자가 부숴버리고, 국가가 집회장소 없애버리면 마치 복음이 날라 가는 것처럼 교인들이 불안불안해 하는 거예요. 

존재로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둘만한 어떤 것으로 존재를 확정지으려고 하는데 그러다보니 국가만큼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존재를 존재로 의미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국가 안에서 안심하고 국가 없으면 난민이 되어서 불안불안한 거예요. 

국가 안에서, 백화점 안에 한 점포를 가짐으로서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국가에 대해서 하나님이 꿈을 꾸게 한 거예요. 국가를 요동치게 만드는 겁니다. 국가가 살찐 일곱 암소냐, 아니면 국가가 파리한 일곱 암소냐, 어느 쪽으로 확정짓지 않아요. 

살찐 암소가 있고, 그 다음에 바짝 여윈 암소가 있고. 그것도 일곱 마리. 일곱 마리라는 이것은 최종적이라는 말이지요. 7이라는 것은 최종적이라는 뜻이라고 언급했지요. 시작도 일곱이고 끝도 일곱이라는 말이지요.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지만 망하는 것도 일곱 나팔, 일곱 대접, 7로 끝내버려요. 

일곱이라는 것은 최종적인 마감이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확정적인 본질을 국가에다 주는 겁니다. 그러면 국가는, 현재 이 튼튼한 애굽나라의 바로왕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요동치면서 변화, 변동의 여지를 보여주고 그 변화의 여지에 작동하는 원리와 원칙에 애굽나라는 놀아나는 겁니다. 움직이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 적용시킨다면 우리는 대한민국에 속합니다. 우리는 늘 대한민국을 의식하지요. 함부로 행동 못합니다. 우리가 요셉이라 봅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대한민국에 꿈을 주셨어요. 꿈을 주셨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 나라에서 꿈이라는 것은 사적이기 때문에, 개별적이기 때문에 내가 가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 의하면 꿈은 가지는 것이 아니고 가진 것을 요동치게 만들어요. 다시 말해서 가지고 있는 것을 소멸시켜 버립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만들어 버려요. 마치 지난 시간의 요셉처럼.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치 않고 잊었더라. 완전히 꿈에서 요셉을 배제시켜 버립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만들어요. 바닥을 내버립니다. 내가 기댈만한 어떤 것도 날라 가게 만듭니다. 

그동안 우리는 대한민국에 살아왔는데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나라거든요. 사유재산을 인정받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것 가지고 내가 살겠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최종적인 꿈이 되신 예수님이 나타나버렸어요. 

예수님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에, 아기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에 누가 복음 2장, 크리스마스 때 많이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그 2장에 보게 되면, 동방박사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에 동방박사가 따라왔던 그 별이 잘 나타나고 있다가 예루살렘에서 그만 안 나타나 버렸어요. 

그리고 베들레헴에 갔을 때 또 나타나고. 의도적으로 동방박사와 헤롯을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만나자 마자 헤롯이 난리도 아니에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꿈은, 우리가 건실하다, 이 나라는 든든하다, 우리의 국민소득은 3만 불이다, 여기서 한평생 사세, 안정되게 여기서 터 잡고 살아야 되겠다는 안정감, 또는 소속감, 존재감, 이 모든 것을 다 흔들어 놔버리는 겁니다. 

가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의지하기 마련인데 하나님은 성도를 요셉처럼 다루어서 우리가 어떻게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것, 내가 개인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에 대해서 완전히 들었다 놨다 해버리는 거예요. 

나라 자체를 흔들어 버리니까 그 안에 있는 요셉조차도 의미 없는 거예요. 요셉이 어떤 이득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그냥 해석자로 등장할 뿐이에요. 해석자로 등장해서 결국은 그 나라를 통솔하는 통솔자의 위치에 가버릴 때 그 애굽나라는 기존에 있던 하나밖에 없는 대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 안에서 놀아나는, 꿈을 이루는 하나의 무대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세상에 있는 바로왕이나 거기 있는 신하들이나 모든 애굽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거리는 노리개 감밖에 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을 이제 요셉이 통솔한다는 말은 요셉이 알고 있는 그 진리 안에 전부 다 예속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기존에 있는 국가의 권력에 모든 국민들이 예속되어 있는 것처럼 이제는 새로운 국가가 나타났는데 그 국가는 존재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국가, 어디서 어디로 변해야 될 국가, 그런 국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오늘 꿈을 통해서는 살찐 암소와 흉악한 암소가 나란히 나왔지만 결국은 흉악한 암소가 살찐 암소를 잡아먹었더라. 그래서 살찐 암소는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흉악한 암소만 거기 있더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과거에는 두 종류의 암소가 있었는데 결국은 한 종류의 암소만 남아서 공포스러운 국가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충실한 일곱 이삭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내용이에요. 그걸 반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꿈은 미완성이 되는 거예요. 왜 미완성이냐? 요셉보고 “들어와, 들어와!” 하면서 요청하는 꿈이 되는 겁니다. 이 꿈으로 마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 파리할 수밖에 없고, 완전히 불 지르듯이 황폐화된 애굽을 요셉이 개입해서, 요셉과 만나서 이 애굽이 어떤 때에 보탬이 되고, 무엇을 도와주는 나라가 되느냐, 새로운 나라의 입지로서 요셉의 나라의 구성요소가 되는 겁니다. 

이 나라가 황폐한 나라가 되어야 마땅한데 요셉의 개입으로 나중에 그 황폐를 모면하게 되고 그 여유 있는 식량은 어디로 속하느냐 하면, 원래 언약을 받았던 아버지 야곱의 가족, 요셉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전조치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의 나라가 무슨 나라냐? 이스라엘이에요. 결국 애굽은 이스라엘을 위한 보조나라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 사실을 지금 꿈으로 보여주고 그 꿈에 요셉이 관여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 주는 말씀은 이겁니다. 

우리는 천국이 우리의 본향입니다.
천국을 위해서 우리가 이 대한민국, 이 나라를 허락하신 겁니다.
이 나라 망합니다. 멸망합니다. 그러면 왜 진즉에 멸망하지 않았느냐?
복음을 위해서, 바로 복음을 위해서 대한민국이 있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나라지만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천국이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 이 천국의 백성으로서 대한민국에 파견근무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대한민국의 삶은 일시적인 체류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 대한민국과 거기서 우리가 소유한 재산이라든지, 명예, 우리의 인생을 가지고
울고불고, 거기에 목숨 걸고, 거기에 희망을 걸고, 이러한 헛된 짓은 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꿈은 이 땅에서 우리를 빼내주는 것이지
이 땅에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주님의 복음의 취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셉에게 이 바로왕이, 애굽나라가 바쳐지기 위해서 먼저 바로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요셉이 결부되었을 때에, 망해야 될 나라가 요셉을 통해서 융성하게 되는 그 절차를 통해서 사람들이 존재하고 소유하는 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나라가 따로 있음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