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바로의 두 신하(창40;5-8) 1809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9. 6. 15:51
2018-09-05 20:51:42조회 : 27         
   바로의 두 신하 180905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바로의 두 신하(창세기 40:5-8)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m2R5fuYKzwI, Hit:3
 이근호18-09-05 21:57 
바로의 두 신하 

2018년 9월 5 일                  본문 말씀: 창세기 40:5-8 


(40: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몽조가 다르더라 

(40: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 

(40: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관원장에게 묻되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40: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사람은 소멸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멸된 인간을 하나님께서 사용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요구와 희망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실현해야 될 업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업적인 다름 아닌 ‘새로움’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겁니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 만의 일하심’을 드러내려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힌 요셉은 거기서 바로의 두 신하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에 결코 감옥에 올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왕에게 죄를 지어 왕의 분노를 산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겁니다.(창 40:1) 어쨌든 이들은 애굽 나라 중의 감옥에서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함께 하는 것이 장소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꿈도 꾸게 됩니다. 요셉도 하나님에 의한 꿈에 의해서 지금 애굽 나라의 감옥까지 오게 된 겁니다. 이 자체가 꿈이 해석되는 식으로 풀리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요셉 앞에, 하나님에 의해서 꿈을 얻게 된 두 사람을 대면하고 있다는 것은, 요셉의 꿈의 내막에 진전이 있다는 말입니다. 

과연 요셉의 꿈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요셉의 억울함에 실려서 알려지게 됩니다. 즉 이 세상은 무죄한 자를 죄인이라고 억울케 하는 요소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나라에 팔려가게 해서, 애굽 나라 자체를 이 현실세계를 총칭하는 개념으로 활용하십니다. 

즉 애굽이 지니고 있는 본 성격은 애굽 나라가 아무리 스스로 연구해도 알 길이 없습니다. 이 애굽 나라에 누군가 표준되는 인물이 방문해주어야 합니다. 그 인물이 요셉이며, 요셉은  ‘억울함’을 짊어지고 애굽에 나타납니다. 이는 애굽이 자체적으로 내리는 죄와 의의 평가에 문제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물론 요셉 본인의 노력으로 해서 애굽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본인이 의도해서 만들어낸 것들이 아닙니다. 요셉의 운명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언약이 ‘요셉’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요셉을 요셉답게 만들어내는 것만이 아닙니다. ‘애굽’이라는 나라도 만들어냅니다. 

이는 요셉과 관련짓지 아니하면 애굽의 진정한 의의가 밝혀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애굽이 요셉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지 않고 애굽의 운명이 요셉을 통해서 재정립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애굽 나라에서 요셉이 ‘억울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애굽 나라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애굽나라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애굽 나라는 ‘꿈’이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집어넣어주신 꿈이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는 세계입니다. 즉 애굽나라는 하나님의 꿈을 구심점으로 삼지 않고 그저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면서 그것을 현실의 전부로 알고  있는 것이 문제점입니다. 

그런데 이 ‘애굽’이라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지목하는 이유는, 바로 ‘구원’이라는 의미는 애굽이라는 나라가 전제가 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애굽이라는 나라 속에서 나온 나라입니다. 이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일이 곧 ‘구원’입니다. 즉 하나님의 개입없이는 결코 ‘구원’은 성립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에게 있어 애굽의 위상은 절대적인 겁니다. 

스스로 애굽의 권세나 굴레를 벗고 나올 위인은 없습니다. 마치 오늘날에 있어, ‘죄’, ‘지옥’, ‘저주’, ‘율법’, ‘죽음’이라는 위상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못빠져 나오니까 그들이 알아서 정리하기를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다”라고 단정내리고 맙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현실’이라고 부릅니다. 

바로의 두 신하도 그동안 꾸준히 이 ‘현실관’을 갖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예사롭지 않는 꿈을 꾸게 된 겁니다. 그 꿈에 대해서 감옥에서 신임받는 사환으로 일하고 있는 젊은 요셉에게 묻게 된 겁니다. 이렇게 되면 외부에서 온 요셉은 하나님의 뜻의 대변하는 사람이고, 바로의 두 신하은 현 현실세계를 대변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사롭지 않는 꿈을 꾸었지만 막상 해석은 본인의 지혜를 능가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말합니다. “그 꿈의 해석은 하나님만이 해낼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내게 말하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꿈 해석과 자신의 존재와 관련있음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렇다면 애굽나라가 무엇이 문제일까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현실의 총화가 되면 그 현실은 곧 삶의 모델이 됩니다. 이는 옳고 그 그름을 그 범위 안에서 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정해진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은 하나님마저 움직이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바로 ‘우상’이 만들어집니다. 

여기에 비해 참된 하나님께서는 ‘꿈을 짊어진 요셉’을 애굽에 보냅니다. 그리고 요셉이 그 애굽나라에게 ‘죄인’ 취급을 당하게 하십니다. 무죄한 자를 죄인으로 단정지울 수밖에 없는 세계가 곧 우상의 세계요 비 현실적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꿈으로 나타난 참된 현실’을 소개합니다. 

이는 꿈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 예가 사사기 7:12-15에 보면,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고 이스라엘 진중에 돌아와서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현실 세계에 대해서 꿈의 세계가 처벌하는 전쟁을 감행합니다. 이는 미디안 민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꿈의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현실 세계는 참된 하나님을 공격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 그 세계라는 것인 눈에 보이는 현실의 본질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만든 망상을 현실의 전부라고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09-06 14:59 
154강-창 40장 5-8절(바로의 두 신하)1808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0장 5-8절입니다. 구약성경 61페이지입니다. 

창 40:5-8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몽조가 다르더라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관원장에게 묻되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요셉이 죄수들이 갇혀 있는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감옥은 애굽나라에 있는 감옥이지요. 요셉이 애굽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냥 애굽나라의 감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거기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요셉이 어떤 점에서 억울했는가? 

요셉은 참으로 억울했다는 점과 그리고 그 억울하다는 것이 애굽나라가 갖고 있는 그 성질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아울러서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요셉이 없던 감옥은 그 감옥이나 애굽이나 똑같은 성격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 감옥에 들어서자마자 그 감옥에서 누굴 만나게 되느냐 하면, 애굽식으로 구성된 요셉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억울한 신하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억울하게 누명쓰고 잡혀 있는 신하를 만난다는 것은 두 종류의 요셉을 만나는 셈이 되어버려요. 

하나는 애굽 내부에서 일어난 요셉이고 또 하나는 외부에서, 바깥에서 투입된 요셉이 되는 겁니다. 요셉이 갖고 있던 그 억울함을 누가 인수받는가 하면, 요셉이 복역하고 있던 그 감옥에 애굽의 속성을 대변해주는 신하 둘이 사로잡혀 와서 그 둘이 이제는 만나게 되는 겁니다. 

만나는데 그 만남을 주선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꿈이라는 겁니다. 요셉도 꿈을 꾸고 어떻게 되었든지 애굽의 감옥까지 오게 되었고, 바로왕의 신하들도 감옥에 와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양쪽 다 꿈을 꾸었는데 둘 다 개꿈일 수도 있고 한쪽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꾼 꿈일 수도 있고 둘 다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꾸게 된 꿈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요셉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하나님만이 해석할 수 있는 꿈을 꾸셨습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든지, 혹은 하나님께 잘 부탁해보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라고 되어있어요. 

하나님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 있는데 왜 거기에 요셉이 개입하느냐 그 말이지요. 그들의 꿈 속에 개입한다는 것은 그들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당했던 그 억울함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요셉의 억울함은 하나님에 의해서 어떻게 풀리느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꿈을 꾼 바로왕의 신하 둘을 만남으로서 억울함을 유발하게 된 그 원인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 원인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애굽나라를 결정짓는 그 성격, 본질과 관련되어 있어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시편 81편 5절에 보면, “하나님이 애굽 땅을 치러 나가시던 때에 요셉의 족속 중에 이를 증거로 세우셨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애굽나라를 징벌할 때에, 재앙을 내릴 때에 그 근거가 뭐냐? 너희들은 벌 받아야만 해, 라고 할 수 있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요셉에 대해서 애굽이 어떤 모습으로 요셉과 관련성을 두었느냐, 그게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애굽 자체의 성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미리 보내줬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나중에 요셉이 빠지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애굽나라를 치는데요. 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데 있어서,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애굽이라는 나라가 왜 꼭 필요하냐를 다시 한 번 거시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애굽나라가 없이는 왜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할 수가 없느냐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하나님께 구원받은 나라라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어디서 구원받았느냐 하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애굽에서 구원받았어요. 그 원리가 언약의 원리, 하나님의 약속의 원리입니다. 

그러면 그 약속의 원리, 언약의 원리가 신약에 오게 되면 그 애굽이라는 용어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죄로부터 구원, 마귀로부터 구원, 율법으로부터 구원, 죽음으로부터 구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리적인 애굽이라는 의미가 사라지고. 

이것은 위와 아래, 아래세계와 위의 세계, 하늘나라를 대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위와 아래로 대비하는 것이 아니고, 애굽이라는 것을 세상의 총칭으로 보고 그 애굽밖에 없는 세상, 그게 전부지요. 그런데 애굽밖에 없는 세계에서 없는 나라가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새롭게 나옵니다. 새로운 나라지요. 신약에서 마치 새로운 피조물이 나오는 것처럼. 그 애굽나라는 어떤 특징을 갖느냐? 어느 누구도 애굽나라의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걸 신약으로 처리하면 어느 인간도 자기 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어느 인간도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고,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심판,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고,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같은 원리로 작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애굽나라의 원리가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 하는 거예요. 애굽나라의 속성을 아는 방법은 애굽나라에 외부에서 어떤 사람이 들어왔는데, 그 외부인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짊어지고 들어왔다, 그렇게 보시면 되지요. 요셉입니다. 

요셉이 들어왔을 때 그 요셉이 애굽나라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거예요.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죄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죄인으로 몰아세웠다는 겁니다. 죄인이 아닌 자를 죄인으로 뒤집어 씌워서 몰아넣는 그 모든 성질과 그 성격은 어디서부터 주어지는가? 원래 애굽나라에 상주하고 있었다고 보는 겁니다. 

애굽나라가 원래 그런 본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억울한 요셉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애굽나라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어떤 대우를 받아야 되는가, 그것을 알 순서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애굽나라는 요셉을 잘못 대우한 거예요. 

그러면 애굽나라가 뭐가 문제가 있기에 요셉으로 하여금 꿈을 꾼 요셉의 정당성을 알아주지 않고 죄를 뒤집어 씌워서 죄인으로 만들어서 감옥까지 집어넣었느냐? 애굽나라 자체는 자기 나라를 아무리 살펴봐도 문제점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요셉의 등장으로 문제점이 드러나는 겁니다. 애굽에 어떤 문제점이 있느냐? 애굽에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꿈이 없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꿈이라는 외재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일체 외부적인 요소를 인정하지 않고 애굽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그들의 일상의 삶으로 굳어진 나라가 애굽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 자기가 눈에 본 것, 경험한 것, 체험한 것, 그것이 현실의 전부고 그것으로 살면 그것이 인간이 사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그 중 대표자가 오늘 본문에 두 명이 등장했습니다. 바로왕 밑에서 신하질을 했던 두 사람인데 그 두 사람도 애굽사람이니까 그들의 사고방식이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전부가 되겠지요. 더 추가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 두 사람이 옥에 갇혀있게 되었는데 그럴 때 요셉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바로왕의 두 신하에게 꿈을 줘버려요. 꿈을 꾸게 하는 겁니다. 꿈을 꾼다는 것, 꿈이라는 것은 뭐냐?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도 그 꿈을 해석을 하지 못하는 인간애굽의 한계를 보여주는 계기가 꿈입니다. 

너희들은 꿈을 빼고 인생을 논했잖아, 라고 지금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애굽나라 사람을 추궁하고 있습니다. 이걸 오늘 식으로 하면, “이 세상 사람들아! 너희들, 십자가 복음 빼놓고 세상을 읽고, 세상을 살고, 세상을 해석하잖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철저하게 애굽사람, 철저하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대처하느냐 하면, 자기가 가진 것이 있고 그 가진 것에다 보태기 뭐하느냐 하면, 십자가 복음을 거기에 보태버립니다. 그래서 세상도 가지고 하늘나라 복음도 가지고, 그렇게 가지게 되면 나중에 천국 간다고 우기는 겁니다. 

복음 들었던 사람, 교회 온 사람, 복음에 대해서 안다고 우기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런 경향들이 있어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이고, 거기서 플러스를 한다니까요. 보탠다니까요. 전에는 몰랐던 십자가복음까지 곁들여서 이제는 알게 되면 이것도 내 것이고, 십자가 복음도 내 것이고, 그러니까 천국도 내 것이고. 그러면 보다 완벽을 기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두 신하를 감옥으로 보냈어요. 감옥에 보낸다는 것, 억울한 요셉 앞에 두 신하가 나타났다는 것은 둘 다, 감옥에 들어올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둘 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기존에 애굽이라는 인생을 두 신하가 살면서 자기들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왜 자기가 이렇게 감옥까지, 높은 자리에 있었다가 갑자기 제일 처진 자리인 감옥에 갇혀야 될 이유가 납득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감옥에 갇힐 만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들은 뭘 빠트리고 있느냐 하면, 바로의 두 신하는 본인생각들만 하고 있어요. ‘아, 억울하다. 술 빚어서 임금님께 대접한 것이 뭐가 나빠서?’ 또는 ‘떡 만들어서 임금님께 대접한 것이 뭐가 나빠서 우리가 감옥까지 왔느냐?’라고 본인의 문제점을 본인 쪽에서 시작해서 찾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은 그들 앞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 의도가 뭔지를 그들은 몰라요. 그들은 요셉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감옥에서 요셉과 만나야 될 두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의 꿈은 그들에게 해결책이 아니고 그들에게 장벽이에요. 

애굽사람이냐? 그렇다면 너희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설득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애굽생활을 하면서는 도저히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 애굽나라를 통치하고 있고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요셉을 만났던 두 신하의 직업이 뭐냐? 그 직업이 ‘신하’라는 거예요. 신하라 하는 것은 왕에게 종속된 거예요. 왕에게 종속된 사람은 종속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항상 왕을 쳐다보면서 살아요. 자기보다 왕이 더 중요해요. 왕의 은총을 받으면, 신임을 다시 받으면 자기 자리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왕에게 철저하게 매인 것처럼 그 두 사람이 만났던 요셉은 누구에게 매였느냐?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께 매인 요셉을 그들은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바로왕의 두 신하에게 있어서 감옥은 뭐냐? 감옥은 애굽나라 안에 있는 외부성, 요셉의 꿈의 세계, 곧 천국입니다. 

천국이 이 세상에서 감옥이라는 것, 옥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등장하는 겁니다. 거기에 들어간 사람들의 특징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거예요. 억울하다는 것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내게 주어진 처사가 내가 잘못한 그것보다 더 월등하게 가혹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뭐냐? 내가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일이 정당하냐, 정당하지 않느냐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그 기준을 알고 그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에 비해서 너무 과하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처사가. 그렇다면 그 기준 말고 또 다른 기준을 자기들은 모르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기준에 의해서 왕에게 충성 봉사했던 나를 저 감옥까지, 밑바닥까지 내치는지, 도대체 무슨 기준에 의해서 그렇게 내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바로왕의 신하 두 사람의 고백과 의식은 뭘 대변해주느냐 하면, 지금 소년 요셉, 나이 어린 요셉이 하나님의 꿈을 꿨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남의 나라 감옥에 갇혀야 될 그 기준과 이유에 대해서 요셉도 모르는 거예요. 

요셉이 모르고 있는 바를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아는 바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요셉에게 두 신하를 만나게 했고 두 신하와 대면하게 하신 거예요. 요셉과 그 두 사람의 만남은 둘 다 하나님의 꿈의 개입이라는 요건을 따라서 둘은 만난 겁니다. 

요셉도 억울하고 그 둘도 억울한 거예요. 자, 그러면 억울하다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지 않은 다른 기준에 의해서 감옥까지 난데없이 오게 되었다면, 감옥에 꼭 와야만 될 진짜 이유와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그 원인은 꿈속에 있는 거예요. 꿈속에. 

지금 요셉은 꿈을 꾼 사람이지 꿈에 대해서 해석을 한 사람은 아니에요. 꿈이 그 해석에 의해서 열려가는 그 과정중 하나가,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 받았고, 그리고 보디발에게 노예로 팔렸고, 거기서 더 내려가서 이제는 억울하게 무고한 죄까지 뒤집어써서 억울한 모습으로 감옥까지 온 거예요. 

그 순서 하나하나가 요셉이 받았던 꿈의 해석의 절차입니다. 꿈이 해석되려면 반드시 요셉은 그런 절차를 따라가야 돼요. 아직도 그 절차는 마감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국무총리가 됨으로서 비로소 그 내막은 알려집니다. 

그러나 지금 감옥에서 국무총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요. 그리고 국무총리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요셉에게 주어진 그 꿈의 내용, 언약의 내용이 애굽나라의 존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애굽나라는 지금 등장하고 있는 이 인물들의 현실의 총체와 모든 현실을 애굽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필수적으로 알아야 될 것은, 도대체 애굽이 뭐가 문제냐 하는 거지요. 애굽의 어떤 것이 문제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게 되면 거기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현실이 그 말씀에 의해서 발생되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알던 상식가지고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말씀이 나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지 내가 아는 것 가지고 그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곧 요셉의 존재지요, 요셉이 꿈, 말씀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 요셉이 존재한다는 것은, 애굽이라는 나라는 아예 없고, 애굽은 요셉에 의해서 늘 새롭게 생성되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나 바로의 두 신하는, 애굽은 있다고 보고 왕은 있다고 보는 거예요. 현재 있다고 보는 것은 애굽나라 신하고, 그래서 애굽나라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있다고 생각한 거기서 차출해 낸 원리로서는 자기들이 감옥에 갇힐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는 거예요.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이 현실세계 가지고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해명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뭐냐 하면, 존재하는 세계라는 것은 이 땅에 없고 요셉을 이끄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 때 그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새로운 요셉의 꿈의 세계가 병행해서 펼쳐지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믿기 위해서 성령을 받는다 하잖아요. 성령은 현재 예수 믿는 나를 성도라고 규정하는 그 정도가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성도다, 라는 이 문장 자체를, 현재 오늘 내가 알고 있는 이 문장 내용을 내일이 되면 내일에 주어지는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늘 아는 성도하고 내일 아는 성도하고 또 달라요. 이것은 뭐냐? 성령에 의해서 날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생성되는 겁니다. 우리는 성도를 내 쪽에서 만들어서 내가 꼭 쥐려고 해요. 그러나 뭔가 쥐려고 하는 것은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냐, 언어적관습이냐 하면, 애굽나라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현실을 다듬고 그것은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을 눈에 보이는 그 세계 속에서 그들은 모델을 찾은 겁니다. 그 모델을 두 자로 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상은 현실의 질서를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조립해서 모델을 만들어요. 모델을 만들고 그것을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하늘나라, 하나님나라, 영원한 신의 나라와 연결을 시도하는 겁니다. 

아주 대표적으로 잘 나와 있는 대목이 열왕기상 18장, 엘리야와 바알선지자와 대결하는 장면입니다. 그 대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 18장 27절에서 29절까지 보면,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하매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찌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그들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850명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그것을 조립하고 조작해서 신의 응답을 받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가 이런 곳이 아니겠어요? 오늘날 교회가 바알 숭배하는 제단이잖아요. 

눈에 보이는 것, 세례식, 성찬식, 예배참석, 성가대, 이런 것에 의미를 줘가지고 신의 응답을 받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철야기도 그런 것. 내가 스스로 육을 학대하게 되면 그것을 주님께서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이고, 기특하다’ 해서 복 준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엘리야는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겁니다. 지난 강남강의에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은 인간 쪽에서 설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차라리 인간이 침묵하게 되면 모든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게 눈에 보여요. 

인간이 침묵해야 될 이유는, 인간 본인이 우상숭배자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원리는 ‘네가 가진 것이 많으냐, 내가 가진 것이 많으냐? 네가 가진 것이 좋으냐, 내가 가진 것이 좋으냐?’ 가진 것, 확보한 것, 서로 그것 가지고 자기의 가치를 논하는 시대에 거기에 충실했고, 자기가 정당한가 아닌가를 그것으로 측정한 거예요. 

그런 것에 따라서 유죄, 무죄를 결정하는 것은, 억울함과 억울하지 않음을 결정하는 것은 잘못된 우상숭배적 기준이에요. 요셉의 무죄함은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꿈 때문에 억울하게 애굽까지 노예로 팔려온 겁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 끄집어낸 어떤 기준을 동원해도 요셉의 억울함을 해명할 수가 없어요.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쉽게 말씀드릴까요? 요셉이 이런 수모를 겪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자기가 자기자신을 피고로 세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죄가 없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나를 뭐라고 하지? 죄 있다고 취급하지.” 그렇다면 이 세상의 성격은 오롯이 드러난 거예요. 

죄 없는 자를 죄 있다고 해야 될 그런 역할과 기능이 바로 우상숭배화시키는 악마가 지배하는 이 애굽같은 세상의 역할이에요. 하나님은 성도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짓을 해도 나는 그걸 문제 삼지 않겠다. 이게 바로 속죄의 세계에요. 

죄 씻음받은 영역입니다. 네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짓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일체 문제 삼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네가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 현실과 대비되는 세계가 오늘 본문 요셉에게는 무슨 세계냐? 꿈의 세계에요. 

그 꿈의 세계를 사람들은 꿈이라고 봤고, 자기들의 현실이 따로 있으니까, 그러나 꿈의 세계에서 볼 때 이 현실세계는 꿈에게 점령당하는, 꿈에게 놀아나는 세계입니다. 이 현실세계란 꿈에게 놀아나는 세계라는 그 증거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사사기 7장 13절에서 14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13만 5천명의 미디안민족과 그리고 기드온이라는 별 볼일 없는 방앗간 주인과의 싸움이 나와요. 방앗간 주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네가 나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에서 구원하라.” 하니까 당연히 “저 싸움할 줄 모릅니다.” 이렇게 했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하나님이 함께 하면 하겠습니다.” “좋다. 내가 함께 하겠다.” 하나님과 함께 해서 미디안과 전쟁한다는 소식이 이스라엘에 전해지니까 무려 3만 2천명이 모였습니다. 기드온에게 약간의 위로가 되었겠지요. ‘숫자는 적들에 비해서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기드온의 생각, 모인 3만 2천명의 생각과 그리고 그들을 점령하고 있고 통치하고 있는 미디안의 생각, 둘 다 우상숭배적 사고방식을 지닌, 눈에 보이는 현실에 충실한 애굽같은 사고방식의 연장으로 본 겁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꿈과 현실의 전쟁이지 눈에 보이는 숫자의 전쟁이 아니거든요. 3만 2천명을 보면서 뭐라고 하느냐? 숫자가 너무 많다고 했습니다. 2만 2천명 보내고 만명이 남아도 그것도 많다는 거예요. 그리고 제일 적은 숫자를 골랐습니다. 달랑 3백 명. 

그 3백 명에게는 일체 무기가 주어지지 않고, 현재 이 전쟁에 우리가 개입되지 않았다는 증거물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게 항아리, 횃불, 나팔입니다. 이것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전쟁이 마감되었음을 통보하기 위한 도구들을 3백 명이 쥐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쟁은 어떻게 하느냐? 사사기 7장 13절, 14절에 보면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의 칼날이라는 것은 적들이 먼저 이야기했어요. 기드온의 칼날이 이미 우리를 무너뜨렸다는 결과를 그들은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공포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들은 지금 꿈과 현실을 구분 못하고 있어요. 현실에 꿈이 들어왔는데 그 꿈이 현실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통치하고 있어요. 현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꿈이 현실을 이겨요. 드디어 밤에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높이면서 나팔을 불 때에 그들은 스스로 혼돈에 빠져서 하나님의 꿈의 세계 앞에서의 현실세계의 부실함, 아무것도 아닌 허무함, 헛됨, 그리고 심판받을 그런 이유들을 쏟아내면서 무려 13만 5천의 대군이 몰살되지요. 

그러면 그동안 이 이스라엘은 어디에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닌 그 미디안이 침범했다는 거기에 벌벌 떨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뭘 로 현실을 보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이 함께 있음이 더 현실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어요. 

미디안 군대는 현실이라는 것을 빙자해서 진짜 현실, 진짜 영원한 현실인 하나님에 대해서 그들은 공격했고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방어해서 그들을 처단한 겁니다. 소속이 어디냐를 묻는 거예요, 지금. 그 사사기전쟁에서. 

전쟁이라는 것은 이스라엘과 미디안 적들과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 한 분과 모든 인간들, 심지어 미디안과의 전쟁도 아니고 이스라엘을 상대로 지금 하나님이 전쟁하시는 거예요. ‘인간들아, 인간들이 정당하냐, 하나님이 정당하냐? 인간들아, 너희들이 무죄하냐, 아니면 내가 무죄하냐? 내가 죄 있느냐, 너희들이 죄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심판받는다는 것은 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세계에서의 죄는 딴 게 아니에요. 눈에 보이는 대로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죄입니다. 그것이 현실의 전부라고 여기는 그것이 죄에요. 그리고 그 현실의 일부에 본인이 소속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소속되어 있던 그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꿈을 요셉처럼 줘버리면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는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에 속했다면 우리는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탓을 하지 않고,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방식으로 지금 이 세상과 우리는 전쟁 중입니다. 

의의 전쟁이지요. 누가 의인이며 누가 죄인이냐를 놓고 벌이는 전쟁. 죄인에게는 저주뿐이요, 지옥불이요, 의인에게는 천국뿐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어린 요셉이 본인의 억울함을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해석하는지를 본인이 예측 못해요. 그런데 희한하게 감옥에 있을 때 남에게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연히 잡혀온 그 왕의 신하 두 명에게 동일한 꿈을 제공함으로서 그 신하 둘은 지금 요셉의 처지와 형편을, 애굽방식을 대신해주는 사람으로, 그렇게 두 종류의 요셉이 한 감옥에서 만났어요. 

전에 요셉이 없을 때는 그냥 애굽 안에 있는 감옥이었는데 요셉이 감옥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근무함으로 말미암아 애굽 안에 있는 하나님의 꿈의 전당이지요, 하나님의 계시가 살아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활동의 구심점이 되는 겁니다. 

애굽이 어떤 나라냐? 그 해답은 애굽의 감옥에 있는 자들로 인하여 밝혀집니다. 이제는 요셉이 애굽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꿈이 지배하는 것처럼 요셉이 애굽전체를 지배하는 그 세계가 올 때 비로소 요셉의 꿈의 해석은 다 마감되는 겁니다. 

이 땅에 와서 초라하게 사셨던, 사람에게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그 분이 사실은 이 현실세계의 해답인 것을, 현실세계의 지배자고, 만드신 분이고, 그리고 심판주고, 앞으로 모든 세상을 소멸시킬 분이라는 사실, 그 주님께서는 초라한 모습으로, 마치 요셉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거예요. 

누가 그 예수님을 알겠습니까? 요셉이 꿈을 꾼 것처럼 하나님께 동일하게 예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 현실이 전부라고 여겼던 그 세계 속에서 요셉의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요셉을 통해서 그 억울함,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미움 받는 그 억울함이 같은 동질의 억울함으로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참,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복음을 안다는 것, 제가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복음을 안다는 것은 내가 기존에 갖고 있는 이 가치 있는 것에다가, 쉽게 말해서 내 재산, 부동산, 돈, 가족, 여기에다 플러스, 더 보태서 복음까지 아는, 곁들이는 것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이 복음이라는 것은, 주님의 가신 그 억울함에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에 참여하는 그것이 세상이 주는 어떤 복보다 더 좋은 복이에요. 세상이 주는 것, 그게 우리로 하여금 우상숭배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어요. 

이게 하나의 유혹거리지만 주님은 그 유혹을 뿌리치고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를 주심으로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는 그 신분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제공된, 이제 더 이상 죄가 없는, 어떤 짓을 해도 죄가 없는, 신경 쓸 필요 없는 자유인인 것을, 죄에서 해방되고, 지옥에서 해방되고, 심판에서 벗어난 사람인 것을 날마다 알려주는 것, 이 길이 요셉의 길이고 오늘날 성도의 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죄용서 하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를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정당하다는 증인하라고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고난을 받았는지를 증거하라고 이 땅에 살게 하셨사오니 이 땅에서 어떤 수모를 당해도 오히려 감사하고 주님의 소속인 것을 아는 것으로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