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강-창 12장 5-9절(제단)161019-이 근호 목사
2016-10-19 20:35:54 | 조회 : 46 |
제단 쌓는 아브람 161019 |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
|
|
|
이근호 | 16-10-19 21:20 |
제단 쌓는 아브라함
2016년 10월 19일 본문 말씀: 창세기 12:5-9
(12: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12: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12: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12: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믿는 자가 조상의 경우를 살피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경우로서 ‘믿는 자’ 되도록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공통되는 조건을 갖고 있지 않다면 믿는 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브람’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이는 ‘아브람’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자연적인 영속성이 갖추어질 수가 없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즉 인위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자기가 구원해 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오늘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본받고자 하여도 그것은 실제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행함의 연속성’을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다보면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행함이 좌절되어야 마땅합니다. 행함이 소용없음으로 드러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브람이 자신을 조작해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시편 23편에 나오는 말씀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가 있습니다.
양의 안목으로 봐서 자기 앞에서 나타난 목자가 양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 같아서 목자로 받아주는 것은 결코 양 자신의 변화를 가져다 주는 원인이 되지를 못합니다. 목자가 나타나는 순간, 양 자신이 원했던 모든 것이 무산되어야 합니다. 즉 신앙인은 새로운 현실관을 갖추므로서 하나님마저 달라집니다.
전에 알던 하나님이 아닌 전혀 다른 하나님을 알게 되므로서 기존의 자신이 속해 있던 현실이 아닌 다른 현실로 교체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현실관이 달라지면 하나님도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극히 위험한 곳으로 몰아세우십니다.
이 위험한 곳에서 아브람은 자신의 원색을 유감없이 드러내게 됩니다. 살고자하는 본능을 생존에 위태로운 환경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곳에서 아브람이 제단을 쌓게 되는데 이는 아브람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공을 나타내는 증거가 됩니다. 즉 ‘저주밖에 없는 곳에서도 천국 만들기에 성공했다’는 겁니다.
위태하고 위험한 곳이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스스로 힘으로 구원이 될 수가 없음을 분명히 말해주는 환경이 됩니다. 즉 비록 인간에게 구원의 의욕이 있다가 할지라도 실패로 끝난다는 말입니다. 그런 아브람이 그 위험한 가나안 땅에서 제단을 쌓습니다. 이는 제단이 품고 있는 취지가 그대로 아브람에게 전달되고 이로 인해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도약되는 겁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 되는 그 과정에는 제단이 품고 있는 요소들로 펼쳐지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아브람이 알 리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으로 하여금 빈 공간에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상성이 편만한 그 한 가운데 던져 놓으시는지 부채살이 펼쳐지면서 그는 새로운 현실관을 유발하면서 알게 됩니다.
제단 안의 내용은 아브라함 개인적 구원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왕기상 18:31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제단을 쌓는데 12개의 돌을 가지고 쌓게 됩니다. 이 돌을 묶어서 하나의 제단되게 하는 접착제는 그 제단에서 태워지는 희생적인 제물의 죽음입니다. 아브람은 이 제단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부름을 받은 겁니다.
제단의 공유의 것입니다.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제단을 아브람이 쌓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계속 몰아세우시면서 기어이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계획입니다. 그래야 아브람에서 복을 내리는 자가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가 저주받는 기준점이 되는 겁니다. 이 기준점을 달리 말해서 육과 영이 만나는 접점입니다.
인간 세계와 하늘의 세계의 만남은 특정 지역이 아니라 ‘움직이는 아브람의 몸’입니다. 아브람의 일생을 통해서 보여지는 그 내용들은 곧 제단의 내용이 완성이 되는 상태가 되는 날에 다 보여집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 여정입니다. 아브람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 일방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호출된 몸입니다.
제단을 쌓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드러나야 하는 사실은, 이 저주받은 세상 속에서 이미 천국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은 결코 인간들의 개인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이러한 사실이 다윗이 벌이는 전쟁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선대왕인 사울왕에 무한정 쫓겨다니는 다윗은 피할 곳이 없어 이스라엘의 적인 블레셋 민족에게 자기 몸을 맡기게 됩니다.
상당히 위험한 결정입니다. 과연 블레셋과 이스라엘 직접 전쟁을 벌리게 되자 다윗의 입장에 난처해졌습니다. 블레셋 편에 서서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을 맞이해서 처부셔야지만 자신의 귀순이 진실임을 블레셋 왕에게 증명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치 블레셋 장수들이 전쟁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해서 다윗은 직접 자기 민족을 상대로 전쟁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시글락에 있던 다윗의 가족과 사람들이 아말렉 민족의 침공으로 몽땅 잡혀하고 다윗의 거주지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던 자들이 다윗에 위상에 의심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전쟁의 결과를 묻고 400명을 데리고 가서 아말렉 민족의 진영에서 대승리하고 자기 아내와 많은 재산을 획득해서 오게 됩니다.
획득물에 대해서 같이 전쟁에 참전한 자들이 다윗의 견해에 반대합니다. 전쟁에 참여한 자기네들에게만 전리품을 나누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의 생각은 다릅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모든 자들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전쟁에 직접 참여한 자의 승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윗과 있는 자 전체가 벌써 하나님 전쟁의 전리품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브람은 제단 앞에서 마치 과거의 인물로 서 있는 겁니다. 그리고 제단 안에는 제단의 완성이 담겨 있습니다. 곧 미래입니다. 미래가 거꾸로 아브람으로 하여금 벌써 과거 완료적인 인물로 변모시킵니다. 이는 저주 뿐인 세상에 벌써 천국이 생겨남을 알리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믿는 자’의 특징입니다.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이 하신 그것을 그 시대에 증거하는 자가 곧 그 시대의 선교사인 성도의 일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완료된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사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2장 5-9절입니다. 구약성경 13페이지입니다.
창 12:5-9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성경에서 아브라함 등장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모델케이스죠. 믿음의 구세주는 아닙니다. 구원자는 아니고 신앙인의 모델로서 우리에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일어나는 이 상황은 오늘날 성도에게 똑같이 일어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똑같다고 했을 때, 우리도 양을 쳐야 하는가, 우리도 목축업에 종사해야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시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는 그것과 똑같이 일어나야 됩니다. 아브람의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단지 개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명은 요즘은 법원에서 쉽게 됩니다.
단순한 개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람은 아브람에 맞는 인생을 살아가야 했고, 그 다음에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에 맞는 인생을 살아가야 됩니다. 그 둘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유지되는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단절, 끊어짐이 있습니다. 그 끊어짐을 신약적으로 이야기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라고 이야기하고 달리 이야기하면, 아브람이 죽고 난 그 자리에 아브라함이 창조되었다고 해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이 죽고 아브라함이 새로 살아났다는 말을 이렇게 생각해도 됩니다. 아브람은 저주 속에서 죽었고 아브라함은 약속 속에서 생명 얻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개인적구원의 조치로서 “아브라함아, 너는 내 백성이다.” 그걸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고 아브라함 인생에 변화를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저주 속에서도 구원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저주 속에서도 구원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실컷 저주받아라. 마음 푹 놓고.” 그런 뜻입니다. “이 땅에서 고생고생, 할 수 있는 고생은 실컷 해버려라. 그 고생과 저주 속에서도 걱정 말아라.” 이런 비슷한 노래가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대, 아무 걱정 말아요.”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은 두 개의 세계를 경유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인간세계가 저주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그 저주스런 세계의 출신자여야 합니다. 저주스러움의 그 이유를 아브라함의 아비,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지만 아브라함의 그 아비가 우상을 섬겼다는 것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우상을 섬겼는데 나중에는 아브라함이 진짜 하나님을 만난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현실판이 달라지면 하나님도 달라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현실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현실이 구성되면 거기에 관여하는 하나님도 달라집니다. 같은 뜻이지만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가짜여야 하는데 그 가짜 하나님을 우리가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이 “야, 너 가짜 하나님이야.”라고 지목될 때 ‘아하, 가짜하나님이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우상이고, 삼위일체라는 우상이고, 예수라는 이름의 우상이고, 성령의 이름이라는 우상이고, 복음이라는 이름의 복음이 아닌 거지요. 천국이라는 이름인데 그게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었고. 그것은 우리가 이론적으로 미리 당겨서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달라지는 감응, 변화에 의해서 우리가 아는 하나님도 새롭게, 새롭게,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아, 전에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였구나. 그리고 진짜 하나님은 직접 우리 인생을 새롭게 펼치도록 하시는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언젠가 제가 그런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요. 성도의 인생은 무엇과 비유할 수 있는가? 부채를 접었을 때는 남들이 얼른 보기에 무슨 막대기 하나를 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거예요.
그런데 부채를 펼치면 어떤 그림이 드러나는 것처럼, 성도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마치 접힌 존재라서 남들 보기에는 일반사람과 다를 것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부챗살을 펼치면 거기에 뭐가 들어 있는가? 성도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자기 인생이 거기에 하나의 정보로서, 요소로서 굽이굽이마다 전부 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양새가 다 스며있습니다.
시편 23편에 유명한 말씀이 나오지요. “여호와는 나이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것을 액자로 집에 걸어놨는데 떨어지지 않게 잘 걸어놔야겠지요. 목자로부터 시작해서 양이 새롭게 달라질 내용물로 채워지고 그 양이 목자에게 다시 회수가 되는 식인 겁니다. 양이 한 마리 있다 칩시다. “너 부족함이 없지?”라고 하면 “뭐가 부족함이 없어요? 지금 배고파서 풀도 먹어야겠고 목도 말라서 시냇물도 찾아야 되는데 참 난감합니다.” 이렇게 나오죠. 오늘날 보통 개개인처럼 이요.
그런데 목자가 여기 계시다, 짠! 하면 “목자가 계시네? 부족함이 없다.” 갑자기 이렇게 돼버려요. 이 차이를 알아야 돼요. 양이 스스로 살려고 하니 이 세상이 너무 고달픕니다. 미래가 어두워요. 내일 되면 내일 걱정, 모레 되면 또 모레걱정, 자꾸 닥쳐옵니다. 그런데 “목자가 여기 계십니다. 목자가 도와주십니다.” 이렇게 되면 양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도와줘야 도와주는 거지. ‘믿습니다.’ 한다고 다 도와주는가? 먼저 하나님이 날 도와주면 그때 내가 목자로 인정해주겠습니다.”
이렇게 거래하는 식으로, 흥정하는 식으로 나온다면 그 양은 전혀 달라질 것이 없는 지옥 가는 양입니다. 그런데 기이한 현상이 있지요. 양이 다들 걱정하고 있는데 “짠! 목자다!” 하고 보는 순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네.” 별로 얻어 챙긴 것도 없어요. 그냥 딱 목자가 등장하는 순간 양의 입장에서 목자를 향해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나는 당신의 양이니 목자님이 목자 됨을 위해서 책임지도록 양을 먼저 앞서 보내셨군요.”라고 감이 오는 순간 그 양은 천국 갈 양입니다.
똑같은 양으로 보이지만 하나는 지옥 갈 양이고 다른 하나는 천국 갈 양이고, 이렇게 달라요. ‘교회 다녀서 구원을 받아볼까?’ 그것은 지옥 갈 양이에요. 그게 아니고 말씀을 듣는 순간 “아, 그동안 내가 도움을 받아 왔으면서도 자꾸 남들 사는 그 꼴을 보면서 ‘나도 내 힘으로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그동안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의 오해였구나.” 하고 말씀을 통해서 단박에 알아버리는 경우는,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이런 현상은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은 풀이요, 잠간 일어나는 좋은 것들도 풀의 꽃 같아서 곧 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은 영원히 설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로마서 9장에서 창세전에 야곱은 사랑받기로 되어 있고 에서는 저주받게 되어 있다고 나와요. 너희들이 개인구원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씀은 말씀대로 다 성취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성경에서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도 아브라함처럼 되어야지, 이러면 벌써 탈락입니다. 이런 것은 없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바로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 그래서 내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은 내가 먼저 의도했던 대로 짜 맞춘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예상도 안했는데,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순간 아브라함과 같은 운명으로 살아야 될 자로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주님으로부터 주선되고, 주님으로부터 인도받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 그것은 누가 가르쳐줘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직접 접촉을 해야 그게 가능한 이야기에요.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한 수 배워야지, 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차피 나는 이 길로 가야 되는구나, 라고 하면 됩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이냐 하면, 다시 이야기해 드리지만, 그 길이 어떤 길이냐 하면, 저주받은 아브람에게 축복받은 아브라함으로 점핑되어야 돼요.
단절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 스스로 연속성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단절, 끊어져 있어요. 끊어져 있는 것을 주께서는 개입해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구원을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아브람을 구원시키지 왜 아브라함으로 하는가? 아브람과 아브라함은 개인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이 세상 전체가 저주의 세상인데 너희들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고, 저주에서 영생 얻는 일에 성공할 자가 없는데 뭔가 성공하는 일이 생겼다는 이것은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증거로 보지요.
하나님이 개입하게 되면, 저주에서는, 지옥에서는 결코 천국갈 수 없다고 단정 지어도 좋아요. 하지만 지옥에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지옥에서 천국을 만들어내는 솜씨를 한 번 보라는 말이지요.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그것을. 그러한 경우가 우리 인생에서 반복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믿음의 계열에 섰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충실하게 이 지옥의 합당한 인생을 그냥 사세요. 어차피 손대는 주체자는 우리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피동적이고 수종적인 문제기 때문에 우리가 능동적으로 내가 나에게 손질해서 만들어낼 어떤 신앙인, 새로운 피조물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걸 액자로 붙였으면 좋겠어요.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닌데 자꾸 하나님처럼 행세하고 싶어 하는 것은 후유증 때문에 그래요. 저는 이것을 ‘선악과의 여독’이라고 합니다. 술이 덜 깼어요. 선악과의 독기가 덜 깨서 아직 그 독이 남아 있어요. 죽을 때까지 계속 그럴 거예요.
하나님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가는 노선을 채택함으로서 아브람을 충실하게 우리와 일치시킵니다. 그래서 아브람시절의 실수가 많고 문제성도 많은데 그러나 아브라함 입장을 미래의 우리가 보기에는 실수지만 아브라함 당사자는 실수가 아니고 인간의 본성이에요. 살고자 하는 본성이에요. 이것은 어떤 하나님이 와도 고쳐지지 않아요.
살아 있기에 살겠다는데 그걸 어떻게 탓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 지금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그렇게 나쁜 짓 할래?” 그걸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한테 기대하는 것은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 오늘도 죄 지었습니다.” 또는 “하나님, 오늘도 제가 착한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참 기가 차지요. 네가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원래 나쁜 놈인데 뭘 새삼스럽게 나쁜 짓을 거론해요. 나쁜 짓을 했습니다, 착한 짓을 했습니다, 착한 일을 해서 나쁜 일을 커버하겠습니다, 하지 말고 “나쁜 짓을 하나 심지어 착한 짓을 하나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꾸 나쁜 짓을 했다는 그 뉘앙스가 어떤 뉘앙스냐 하면, ‘아, 잘만했으면 내가 착한 사람이 되는데……’ 하는 자기에 대한 미련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과도한 허세입니다. 허영이에요, 일종의. 자기에 대해서 좋게 보는 허영심. 가식이고 위선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에요. 위선과 가식으로 둘둘 말렸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자꾸 위험한 지역으로 보내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정착하는 그 지점은, 오늘 본문에 나오지만, 가나안 민족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이 말은, “위험하다, 위험하다.” 그런 뜻이에요. 5절 끝에 보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6절에 보면,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이런 위험이 조장된 것은 아브라함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뜻이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살기 좋은 곳으로 가게 했다고요? 천만의 말씀. 살기 좋은 곳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위태위태한 곳으로 갔어요.
그리고 위태위태한 곳으로 가야 아브라함은 자기의 본성,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존이 우선이라는 그 타고난 아담의 혈통이 낳은 죄악 된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은 자기가 자기에게 손대서 인간 될 수는 없습니다. 천국 갈 인간으로 처신 할 수가 없어요. 이 분이 누구냐? 우리 믿음의 조상입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만 못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믿음의 조상도 역시 못해요. 나중에 아브라함만나서 이야기하세요. “당신도 못했고 우리도 못했다. 우리는 못한 것이 동기생이다.” 둘 다 못해요. 왜 못하는가? 할 수 있도록 주께서 배려를 안 했습니다. 할 수 없도록 만들었어요. 나중에 나오지만 애굽에 내려가게 돼요. 10절에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애굽에 가라고 했는데 기근이 있어서 가나안 땅에서 얼른 애굽으로 가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찜질방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는데 너무 뜨겁다 보니 후다닥 밖으로 나가서 시원한 탕 속에 들어가 있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에요. “휴, 약속은 그렇게 했다만 너무 뜨거워서 못 견디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지옥에 가 있어줘야 지옥까지 찾아오는 주님의 공로가 드러나잖아요.
자꾸 착한 자리 찾아가지 마세요. 착한 자리는 우리한테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위험한 곳이고 그 위험한 곳에서 우리의 본색이 드러나게 하는 작전에 말려든 것이지, 독자적으로 산에 들어가서 기도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혼자서 산 속에 들어가서 기도하지 마세요. 스스로 착각합니다.
정 기도하고 싶으면 동화사 대웅전 안에 들어가서 불자들 폼 내가면서 기도하세요. 이것도 재미있는 일이라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손 이렇게 벌리면서 기도할 때 똑같이 하는 거예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고 일어서면 되지요. 내려오면서 비빔밥 하나 얻어먹고. 기도하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대웅전 앞에서 모여가지고 “주여! 주여!” 순복음 교인들처럼 랄랄라, 방언까지 하게 된다면 집회법 위반으로 걸리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런 경우가 생길 수도 있을 거예요.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영과 육의 만나는 지점을 어떤 특정장소로 규정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이동하는 몸체, 아브라함의 육신에다 영과 육의 만남의 장소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아브라함은 부채처럼 접혀 있지만 그 아브라함 몸 자체가 영과 육, 숨겨진 하나님의 나라와 나타난 인간들의 세계, 저주받은 세계의 접촉점을 아브라함으로 택해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도록 되어 있지요.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 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이 한 꺼풀, 두 꺼풀 접힌 주름이 펼쳐지게 되면 거기서 아브라함 본인도 예상 못한 낯선 것들이 막 쏟아져 나와요.
어린애 동화책에 그런 것이 있잖아요. 동물원에 관한 책인데 자다 보니 책이 갑자기 살았어요. 글자로만 박혀 있던 동물들의 표기가 실제로 살아 있는 동물이 되어서 깨보니 서랍이고 뭐고 집안 온 천지에 동물들이 설친다는 내용의 영화가 있었어요. 신기하지요. 그 신기함이 동화가 아니고 아브라함에게는 실제상황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드린 것도 아니고 그냥 건드릴 뻔 했는데도 불구하고 추장 집안 여자들의 태를 다 닫아버리잖아요. 소돔과 고모라에 불이 떨어졌을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만 건져내는 일들이 일어나지요. 아브라함 본인도 예상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번에 그 설교 했지요. 사도바울이 갖고 있던 그 앞치마나 손수건이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쫒아낸다고 해서 사도바울이 자기가 갖고 있던 손수건이나 앞치마에 그런 효능이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았을까요?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뭔가 꿈적거리는 모든 것이 주께서 펼치는, 목자가 양을 구원하는 구원에 대한 보고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 아무것도 아닌데 나를 통해서 사용하네.’ 하는 그 순간 멈춰버려요. 하나님의 일은 멈춰버리고 마귀 일로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이 와서 “복음적 설교 같은데 들어보세요.”라고 할 때 제가 그 설교를 듣는 기준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설교 내용 중에 “이 설교도 죄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목사 같으면 진짜 성령 받은 목사고 그 외에는 전부 다 사기꾼입니다. 강의하고 설교하는 것도 죄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지 못하는 목사나 신부는 뭣도 아니고 사탄의 종이에요. 자기가 가치 있다는 거예요. 중요하기 때문에 쓰이고 있다는 거예요. 결국 돈 문제니까 “착각은 자유지만 돈은 못 냅니다.” 이러면 제일 겁을 내지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이 영과 육의 중보자 역할을 하는 거지요. 하나의 접점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이 뭘 하느냐 하면, 제단을 쌓게 돼요. 하나님이 제단을 쌓게 되는데 이 제단은 아브라함이 것이 아닙니다. 본인도 몰라요. 아브라함 자체에 어떤 내용이 주름으로 포함이 되어 있는지를 몰라요.
이게 펼쳐지게 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아브라함은 그들의 자손의 조상이 되는데 제단을 쌓았다는 말이 뭐냐? 이 제단안에 무슨 내용이 있느냐 하면, 제단은 공공의 것이에요. 개인의 것이 아니고 공유되어야 될 내용입니다. 상당히 어렵지요. 제단을 쌓는다고 할 때 시력을 갖고 있는 인간이 볼 때 그냥 하나의 단에 불과하지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엘리야가 단을 쌓을 때 왜 돌 열두 개를 쌓았을까요? 제단 자체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집단적인 요소가 얽혀 있어요. 이스라엘 전체의 공공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돌멩이 열두 개를 접착해야 될 접착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단 쌓아서 아브라함 개인이 복 받기 위한, 개인 구원을 위한 제단이 아니에요.
아브라함 속에는 장차 하늘의 별 같이 많을 아브라함 자손들의 내용물이 아브라함 안에 응축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강정 같은 거지요. 제단 자체가 집단적이라는 말은 논리로 하게 되면 너무 복잡하기에 한 예를 들겠습니다. 사무엘상 30장에 보게 되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서 도망치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도망치다가 블레셋 지경에까지 도망을 치게 됩니다.
블레셋에 가서 위장귀순을 해버려요. “사울에 의해서 쫓기는 몸이오니 받아주세요.”라고 해서 아기스왕이 다윗을 받아줬습니다. 그 때 난처한 일이 벌어졌어요.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하는 경우가 생겨버렸습니다. 다윗은 계속 위장을 해야 되니 “블레셋이 당연히 이겨야 됩니다. 나에게 호의를 베푼 이 블레셋을 위해서 전쟁에 나가겠습니다.” 하면서도 내심 걱정은 많이 했겠지요. 이스라엘백성을 죽여야 되는 난처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블레셋 신하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임금이여! 배신할지 모르는 귀순자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전쟁하지 않겠습니다.” 속으로 다윗은 좋아했겠지요. ‘휴, 큰일 날 뻔 했다.’ 했겠는데 왕은 “다윗아, 미안하다. 너의 충성심을 보일 기회를 주려고 했지만 신하들이 이렇게 반대하니 숙소로 돌아가거라.” 했지요. 그래서 시글락이라는 곳으로 돌아왔는데 일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을 때 뒤따라와서 비겁하게 공격했던 아말렉족속, 이스라엘과는 철천지원수고 저주받을 그 아말렉족속이 다윗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아내와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어요. 그걸 보고 다윗이 그 아말렉군대를 쫓아서 전쟁을 벌입니다. 블레셋은 사울과 붙어서 전쟁을 하고 있고, 이쪽에서 다윗은 아말렉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고, 하나님은 어딜 가도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계속 사용하시는 거예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했어요. 두 아내도 구해 왔고 많은 재산도 다 가져왔는데 여기서 중요해요. 다윗의 휘하 600명이 가다가 도저히 힘들어서 못가겠다는 200명을 남겨두고 400명만 전쟁에 참여해서 승리했어요. 그러면 누가 이겼는가? 다윗과 400명이 이긴 거예요. 그러면 200명과 아직 고향에 남아서 전쟁터에 나가지도 않은 사람들이 있거든요.
다윗은, 전쟁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도 공평하게 전리품을 분배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해버려요. 그럴 때 전쟁에 나갔던 400명 중에서, 성경에는 ‘비류들, 악한 자’(삼상 30:22)라고 되어 있는데, “전쟁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왜 공짜로 줍니까? 이것은 우리 전쟁에 수고하고 희생한 사람들끼리만 분배하고 그 외에는 하지 맙시다.”라고 나오니까, 다윗이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기게 하셨다.”
이게 제단 안에 함유하고 있는 뜻입니다. 제단은 제단을 쌓는 사람의 개인적인 몫이 아닙니다. 제단은 오히려 제단 앞에서 아브라함이 어떤 입장에 있어야 하느냐 하면, 시간이 동결되어야 해요. 응결되어야 됩니다. 시간이 응결된다는 말은, 제단 앞에서 다윗은 과거의 인물이 되어야 돼요. 제단 안에는 미래의 내용이 담겨 있고.
그것을 두고 제가 아까 함축되어 있다, 부챗살처럼 주름 잡혀 있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참 믿음이 좋구나.’ 이런 해석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위험한 가나안 땅에 제단을 쌓게 한 것은, 이제는 제단이 아브라함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제단 안에는 그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태, 언약이 완성상태로 들어 있고 그것은 다윗이나 아브라함 인생을 통해서 조금씩 펼쳐내야 될 대목이에요. 제단 앞에 선 아브라함은 그 제단의 내용 앞에 서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며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서 더 나아가서 그냥 자기 성질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냥 딱 집어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너는 무조건 나에게 사용되어야 할 하나의 종이야.”라고 부림을 당하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성도의 입지고, 성도의 위상이고, 성도의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 제단이 뭐냐? 오늘날 십자가 앞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다른 구원의 능력이 없다고 했어요. 영과 육의 세계의 접촉점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가 제단이고 그 제단의 완성이 성도 안에 들어 있으니까 성도를 가지고 살아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거예요.
성도가 가는 곳이 선교지에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스탄, 스탄, 스탄, 가지 마세요. 그런데 가지 말고 그냥 자기가 거주하는 이 지묘동, 안 그러면 봉무동, 범어동이랄지, 이렇게 자기가 기거하는 그곳이 선교지에요. 거기 그대로 사시면서 ‘역시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설교해도 죄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항상 그것이 선교고 그것이 전도에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일 안 살려줘도 괜찮아요. 내일 죽는다할지라도 어쩔 수 없어요. 한 달 뒤 아들 장가가는데 하나님께서 오늘 심장마비, 심근경색으로 죽이신다. 할 수 없어요. 그게 내가 보여줄 제단 앞에 선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의 모습,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지요.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것은, 믿음은 제단 안에 그 원형이 들어 있어요.
아브라함에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제단 안에 있는 믿음의 원형, 예수님이 들어 있어서 제단의 취지를 아브라함인생에 뒤집어씌우니까 아브라함이 가는 인생 굽이굽이마다 무엇이 폴폴 나오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이 폴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가는 곳이 축복의 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저주밖에 없는 세상에서도 천국 만들기에 성공이 되는 겁니다.
저주밖에 없는 곳에서도 믿음의 조상이 생겨나는데 주님께서 성공하신 거예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되려면 뭘 알아야 되는가? 내가 내 힘으로 구원될 수 없는데 누가 희생해야 된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그게 이삭의 죽음이지요. 자기 독생자 이삭의 죽음이 아브라함 인생의 핵심부분으로 장착이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 전체 인생을 놓고 딱 한 개를 끄집어내라면 “아브라함은 이삭의 죽음 가운데서도 도로 살줄로 믿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로마서 4장 25절 마지막에 보면, “예수는 우리 죄를 범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다시 말해서 죄와 의를 다 같이 알아야 될 존재는 오직 믿는 자, 성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소유권은 성도에게 있지 않고 목자에게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과 똑같아요. 먹고 사는 것 보면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겹쳐져 있는 그 복음의 위력이 이미 나의 미래를 확정지어놓고, 우리 구원은 이미 확정지었어요. 과거완료라 하는 것은 이미 지난 간일이라는 거예요. 구원은 이미 끝난 이야기에요.
이미 다 된 이야기고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안에 접혀 있는 우리를 구원한 십자가의 능력이 세상에 나올 때 어떻게 펼쳐져서 제 2, 제 3의 그리스도의 인생을 보여주는가? 그것은 성령께선 우리를 가지고 하실 몫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과 똑같은 인생인줄 알았는데 주께서 가만 두지 아니하시고 이 어둡고 저주받은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미리 구원을 챙겨주시고 그 챙긴 구원 속에서 주님의 희생을 우리를 통해서 마음껏 발산되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의 사명과 입지가 얼마나 귀한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