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이 빠진 현실 이해는, 인간의 존재 이유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언은 예언대로 살리면서 성취되는 현실은 이스라엘 왕의 몫입니다. 이 역할을 완수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즉 희생의 잔을 마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 저주의 잔의 효과를 제공합니다. 그 잔이 제공된 자들이 바로 예수님을 유일한 목자로 알아먹는 양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과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데서 비로소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발생된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하나님의 말씀의 밑밥이 깔리고 그 위에 현실이 예언대로 진척되는 거예요. 이게 엘리사의 견해예요.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해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매일 같이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함께하는 생명의 유일한 민족이라는 거예요.
‘네가 떡을 먹고 살았다는 그 생각 자체를 제거하고 말씀이 말씀 되기 위해서,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너를 그동안 살려왔다’라는 그것을 겨냥하면서 주께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나중에 너희들이 가게 될 영원한 지옥에 비하면 너희들이 자식 잡아먹는 이런 것,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참극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게 무슨 대수냐? 더 엄청난 게 기다리고 있다.
우상을 섬길 때 나타나는 현상을 미리 앞당겨서 이스라엘 나라 역사에 남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를 남긴 이 성경책이 오늘날 꾸준히 현실로 계속 형성되게 했습니다.
첫 번째, 현실 속에 살려고 하지 마라.
두 번째, 현실을 삼켜라. 현실을 아예 먹어버려라. 현실 전체가 네 안에 들어오도록 해라. 어떻게? 말씀을 먹으면 되잖아요. 왜? 이스라엘에서의 현실은 말씀에 입각해서 현실이 예언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선지자가 갖고 있던 의미고, 그 선지자의 의미가 확산되는 것이 진짜 이스라엘의 참모습이에요.
세 번째, 삼켜서 그것을 또 실천에 옮긴다든지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 말씀이 스스로 완성된 그 효과와 효능을 마셔라,
언약도 없고, 말씀도 없고, 예언도 없고, ‘내 몸뚱아리 하나 챙기면 오케이다’라는 그것, 주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리고 이방 민족을 통해서 ‘그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죄라는 것은 ‘죄를 이길 수 있다’가 아니라, ‘이길 수 없다’를 전제로 해서 그걸 죄인이라고 이야기해 줘요. 말씀 공부한다고 그게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요. 말씀을 공부한다는 것은, 전에는 현실 속에 있었는데 이제는 말씀 자체가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에, 앞으로 될 어떤 현실도 그것을 말씀으로 그냥 받아들이는 거예요.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위해서 죽으신 거예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분이 먼저 희생하셨고 그 희생이 종결된 희생이에요. 그래서 나의 어떤 가치와 의미를 다 제끼고, 오직 그 희생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사는 이유를 그 희생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 그게 바로 속죄의 효과를 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다음에 성령을 보내서 ‘주께서 이미 다 이루었다’ 하는, 속죄가 이루어진 그 ‘희생’에 참여케 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성령의 효과가 이제는 예수님뿐만 아니고 양이 될 사람, 양이 되어서 목자와 함께 영원한 천국에 갈 사람에게도 성령이 동일하게 효과가 오는데 그 효과의 원천이 뭐냐?
예수님께서 혼자서, 그 모든 속죄함의 희생 그 모든 것을 혼자서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기르시는 백성이고. 이 말씀에서 인간이 사는 이유에 대해서 본인이 결정하고 선택한다는 이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희생에 참여한 주님으로부터 의미와 내 생존의 이유가 나와야 하는데, 내가 ‘여기 있음’이 내 생존의 이유가 되고 의미가 돼버렸던 거예요. 그래서 맨날 뭐가 나오냐? 맨날 죄만 나오는 거예요.
그 죄를 죄라고 아는 것은 이미 예수의 피와 예수님의 살을 먹어서 영생을 주와 함께, 영역을 주와 함께 공유했기 때문에 ‘아, 주께서 희생한 그 죄, 지금도 나에게서,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런 죄가 나온다’라는 것을 알 때, 여러분 얼마나 기쁘게요? 얼마나 기쁩니까! 비로소 우리는 존재 이유와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되었죠. 죄만 지을 수밖에 없으니까 ‘룰루랄라’고, 신바람 기쁘죠.
로마서 8장, 장소를 잘 생각해요, 장소, 어느 ‘장소’인지?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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