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어떻게 살면 되는가 간단해요. 의미 있는 것을 무의미로 전환되는 것을, 이게 중요해요. 내가 의미 없다는 것을 만끽하면 되는 거에요.
십자가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반복이 되어버려요. 반복이 되어버리면 모든 의미 있는 것이 뭐로 바뀝니까? 무의미로 바뀌겠지요. 무의미한 것을 스데반 집사는 그걸 줄로 쫙 꿰어버리는 거에요. 쫙 이렇게 하나의 목걸이로 만든다 이 말이죠.
스데반 집사를 반대하는 인간들은 살려고 성경 말씀을 의미 있게 해석해 왔다는 그러한 반칙을 끄집어낼 수 있었던 거에요. 성경을 보면서 내가 왜 죽어야 되는가를 봐야 될 텐데 '어떻게 하면 내가 살지'라는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성경 해석 전체가 나한테 도착할때 의미 있게 도착하는 거에요.
산 사람을 죽은 사람되게하는데 이게 성령이 관여하고 죽은 사람을 하나님 만나는데 누가 관여한다? 성령이 관여한다. 이게 지금 스데반 집사의 신학이에요. 하나의 믿음이에요. 복음입니다.
인간이 없는데서 인간을 만들었다고요. 인간은 일시적으로 있었죠. 어디까지? 선악과 따먹기 전까지 인간이었어요. 그다음에 인간이 없어요. 말씀이 계시니 모든 생명은 말씀이 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어진게 이 세상입니다. 그중 인간도 포함돼 있고요.
출발은 뭐냐? 원판은 뭐냐? 없음이에요. 없다. 이건 이해되죠. 없음인데 없으면서 인간이 있었잖아요. 잠시 인간이 있었다. '있음의 공간'에서 있음이 뭐로 바뀝니까? 있음이 없음으로 바뀌는게 아니고 '죽음'으로 바뀌죠. 죽음으로. 아담이 그 선악과를 따먹고 정녕 뭡니까? 죽으리라. 죽음의 공간되잖아요. 죽음의 공간되고 죽음의 공간화에서 뭐가나오느냐? 생명의 공간화. 이것이 바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꿰는 줄이에요.
없음에서 있음을 경유하지않은사람은 뭐가없느냐 하면 죽음 자체가 없어요. 죽음 자체가 있어줘야 그 안에서 생명이 생겨요. 생명은 죽음속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어요.
너희가 마음에 할례를 안받았다고 스데반집사가 하는 순간 "너 뭐야" 하고 "너 뭐야? 집에가자." 이렇면 될텐데 너 뭐야 하면서 돌들고 스데반집사를 죽였습니다
순교란 의미없이 죽는다고 순교가 아니고 자기자신을 무의미로 볼 때 그 자체가 순교안게 들어온거에요. 자기자신이 의미없는거에요. 의미없고 아까 말한것처럼 만끽하고 그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그런겁니다. 자 의미있는 10분 쉽시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마태복음 7장 22절을 통과 해야 되거든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가 속해있는 세계는 무슨 세계냐 하면 환상의 세계에요. 가짜라 이 말이죠.
기대하는 것이 죄다. 뭐든 기대하는 것이 죄에요.
치매 아버지를 모시니까 아버지가 형제간에 싸움을 붙여버렸다고... "얘가 막 나 때려." 이래가지고 있지도 않은 얘기를 해서 형제들이 "형님 고생합니다."하고 돈 주러 왔다가 돈봉투 다 들고가요.
"니가 나를 버렸잖아. 왜 입에서 다른소리하고있어. 니가 나를 버렸잖아 니가. 니가 버린 것은 생각안하고 하나님이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이렇게하는데? 니가 매일같이 나를 버렸잖아"
양을 버려서 양을 구원하는 방식이에요. 그 버린양 숫자가 얼마에요? 99마리에요. 그냥 주님께서 한 마리 어깨에 이고 좋다고 그냥 집에가시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어디로 찾느냐 하면 99마리 양한테 이야기해요. "너희들에게는 회개할 것도 없고 너희들에게는 잃어버렸다 찾은 것이 없잖아."라고 언질 때리고 양 하나 데리고 가요. 99마리를 버리고 한 마리 양을 채택한다는 말은 애초부터 99마리 양을 데려간 이유에 대해서 99마리 양이 몰랐다는거에요. 그 취지를. 목자의 취지를 99마리에서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드디어 목자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구나 이렇게 하면서 신바람 났죠. 버리기 위해서 데려온다는 생각을 상상도 못한거죠. 버리기 위해서. 주님 앞에서는 숫자라는게 의미가 없기 때문에. 99이냐 1이냐. 의미없어요.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적이 있느냐 없느냐. 잃어버린지를 니가 아느냐 없느냐 그게 중요하지. 지었어 그럼 난 사흘만에 짓겠다는 말을 굳이 그 자리에서 하신 이유가 뭐냐?
주님 쪽에서 막히는 곳을 설정했어요. 성전 지을 자를 없는데 내가 성전 지을 자는 아들이어야 되고 그 아들은 처녀에서 나온 아들이 성전을 짓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무너질 성전을 짓게 만든거에요. 그 이야기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그 구약의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보지 않고 특정 고난 받는자를 광야교회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광야교회.
성령 받은 상태가 이미 죽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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