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내가 구원받게 되면 나는 왜 도대체 그리스도에게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여기에 개입이 되어 있느냐. 우리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리스도는 나로 인하여 해악을 당하시는 분이냐
대인관계에서 우리는 뭐를 뺍니까. 주님의 일을 내용으로 넣지를 않아요.
나의 평가에서 주의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안 되어있습니까? 포함되어 있지 않죠. 이걸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거짓말’.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8절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진실을 이야기해서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든지 아니면 거짓을 이야기해서 남들로부터 나 정상인 맞지? 라는 그런 좋은 평가를 받는 쪽으로 살아가든지 그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하는데 둘 다 놓치기 싫어요. 그래서 안 미쳤는데 마음에 평화가 없어요. 자기 마음이 둘로 쪼개졌으니까.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해를 받는 그것으로 하나님한테 주로 인정받았다면 인간은 육의 생각에서 떨어져 나옴으로서 한쪽을 포기해야 돼요. 그렇다면 이 세상일과는 상관없이 어디 안에 들어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 이미 그 안에 들어온 사람이죠. 그래서 제가 방금 이야기한 이 점을 실감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육의 생각이 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육의 생각이라는 것은 남들 보기에 제 정신으로 사네. 정상적으로 사네. 이게 육의 생각인데
세상 모두가 인간 대 인간 관계로 의미가 마감이 되었어요. 끝났습니다. ‘의미 마감’. 더는 의미 찾지 마세요. 모든 의미는 어디서 나온다고요? 인간 대 인간 관계에서 마감이 되었어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로 모든 의미가 마감이 되어버렸다고요.
설교한다는 자체가 제정신 아니지요.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이 안나오는 거예요.
예수님 또는 하나님은 인간이 언어에 정신이 팔려있다는 것을 알아도 제대로 아시고 너무 잘 알아요.
하나님께서 받아준 사람들끼리의 하늘 안에 특정한 공간에 소복히 한 곳에 모여 있는 그러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지요. 이지. 자선 사업할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을 본다는 게 도대체 인간 세계에 사는 우리가 평소에 제정신으로 사는 우리에게는 전혀 나올 수 없는 생각들이 이 말씀 하나 하나에 다 포함 되어있어요. 사람 이야기에서 바로 예수님 이야기로 전환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 강의에서 함축되어 나오는 문장은 이겁니다. 소유보다 예수님과의 연줄이 더 중요하다. 더 우선적이다. 그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발견하면서 죽음의 연줄과 생명의 연줄이 서로 다르다는 것, 다르면서 이 세상에 같이 섞여져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내가 호강한다는 자체가 주님이 죽으신 이 세상에서 이거는 내가 지금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돼요.
인간에게 나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에요. 다 거짓말. 왜? 세상을 모르고 일방적 자기 정당화만 골라서 접시에 담는 거예요.
성령 받은 성도는 관심사가 뭐냐? 여기에 소유보다도 예수님과의 연줄, 딸랑딸랑. 연줄 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겁니다. 역시 하나님의 뜻의 연장선이에요. 함축된 뜻은 뭐냐 하면은 네가 예수님의 고통을 아는가? 10분 쉽시다.
성령이 온다는 말은 이미 앞에 무슨 사건이 터졌습니까? 십자가의 고통 사건 있고 난 뒤에 그 고통에 그게 진앙지가 되어서 그 지진 여파에 의해서 딸랑딸랑 연줄이 십자가의 연줄이 우리한테 도달된 거, 고통이 도달된 거예요. 그게 성령이다. 이거예요.
너는 나를 버린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예수를 버린다는 말은 너희들이 희망했던 너희 자신의 미래가 나와 더불어 완전히 다 날라갔다는 겁니다. 바로 누가 자기 백성을 외통수에 몰아넣는가? 성령님이 그렇게 했어요. 그 스데반 집사도 그랬지만 사도 바울에게도 외통수를 치는 거죠. 심지어 사도 바울은 뭐 가는 순간순간에 외통수예요. 그걸 사건의 위치라 하는데 그 모든 위치가 세상과 작별해야 돼요. 세상과 작별해야 될 매 순간이 작별하는 순간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딸랑딸랑 주님과 연줄에 걸렸던 자들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당했던 그 죽음 체험을 죽음의 고통을 이미 본인 안에 본질로 같이 스며들고 한통속이 되는 거예요. 뭐 주님이니까 뭐 당당했겠지.. 주님이라고 당당하지 않았습니다. 늘 절망과 절망의 연속이었어요. 그때마다. "아버지여 그 다음 스케줄은.." "아버지여 그 다음 스케줄은.." 하나님께서 "스케줄 알잖아? 너 십자가 죽어야 돼"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야. 때가 되면" 때라는 그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밟아가면서 기어이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기까지 주께서는 몰아 붙였습니다.
누구 소관이냐? 일단 죽자. 죽어라. 미션 impossible. 불가능한 사명을 한 거예요. 빰빰빰빰 이제 끝났지만 불가능한 사명을 주님이 했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이죠.
중첩 돼 있죠. 아버지와 아들이 중첩 돼 있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아버지의 고통이 그대로 예수님의 고통으로 현실화 된 거예요. 그 십자가의 고통과 연계되어 있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구원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나를 죽이고, 죽이고 난 뒤에 죽은 나를 살리는 말씀으로 나올 때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나를 통해서 말씀이 살았다 로 나오게 되는 겁니다. 2는 2+0과 같지 않아요. 수학에서는 2=2+0이 되잖아요. 그러나 이 0이라는 것이 추가가 돼 있는 거예요. 2가 2로 살다가 2+0이라는 거 다시 말해서 나의 죽음과 더불어 사는 거예요. 나의 죽음과 더불어서 살게 되면 더 이상 간극점이 2라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망 속에 같이 계시는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을 돋보이고 주님의 능력을 앞장세우는 주의 증인으로서의 삶이 2+0입니다. 이걸 "나에게는 나를 초과하시는 분이 계시다" 이렇게 돼요.
예수님의 우리가 아는 삶은 어린 나이였다. 12살. 이게 끝이에요. 그다음부터는 뭡니까? 추락하는 거죠. 십자가 죽기까지. 추락, 떨어지는 거예요. 아버지의 뜻은 내가 죽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버지의 뜻은 내가 죽는 것이다. 왜? '내가 죽음으로써 이 세상이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라 하는 것은 그냥 믿기만 되는 게 아니고 내 존재를 통해서 계시가 새롭게 생산된다. 누가 희생물 되었어요? 선지자가 희생물 됐죠? 선지자는 자기에 의해 사는 사람이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사는 사람이에요.
선지자 이야기
'0' '영의 기능'
영의 기능은 네 민족 내 민족이 아니고 말씀 위주로 0에 계신 분이 일하십니다. 너 피, 내 피 없어요. 오직 발람 선지자에게 예언을 하신 것은 발람 선지자에게 예언을 한 것이 아니고 발람 선지자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 말씀 주신 분이 그 사람 속에 있는 말씀을 겨냥해서 말씀대로 실시할 뿐이에요. 말씀을 실시하면서 2가 문제가 아니고 2라는 이스라엘이 문제가 아니고 주도권이 2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속한 내 민족 내 가정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있고 내 가정 중심 내 중심 내 나라 중심이 아닌 그것에 아무 데에도 소속되지 않은 0이 2를 내 것이라고 내 축복받을 거라 생각하는 이것을 주의 말씀대로 다루게 되는 거예요. 다룬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이방 선지자까지 다룰 정도로. 이방 선지자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이라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지는데 이스라엘은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언 안에 있는 이스라엘은 이 지상의 이스라엘의 어떤 나라가 없습니다. 더 감춰서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말씀에 의하면 사람을 구원해요. 그런데 구원받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구원받는 사람 없어요. 없는데 그 양자 터널처럼 없는데 천국 가니까 집결소 소복이 모여 있어요. 어디서 왔게요 그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선지자, 모세, 엘리야 많은 성도들, 그 많은 숱한 성도들이 어떻게 해서 천국에 갔을까요? 히브리서 12장 22-23절에 보면 제가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 이렇게 되어 있죠? 집결소 아닙니까? 구원받은 천국의 집결소죠. 스데반 집사도 포함될 거예요. 많은 성도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 그 다 있다 이 말이죠. 달려갈 길 달려갔던 그들. 그들이 어디서 나왔느냐 이 말이에요.
죽은 예수님에게서 나온 사람들이에요. 그 단절성이 이들 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단절성. 나는 구원받지 못하고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소유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뚫고 지나가는 거다. 죽을 때까지. 부르심이 관통하게 되면 우리는 나의 구원이 아닌 걸 알게 되고 그야말로 솔개를 쫓아내고 제물을 쪼개 놓고 밤중에 하나님의 횃불이 아브라함이 쪼개놓은 그 창세기 15장 이야기에요. 그걸 통과하는 그 사건이 오늘날 우리 몸을 가지고 반복시키는 사건이죠. 내가 구원받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렇게 구원하셨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6장 3절에 "너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라" 이게 통과 아닙니까? 내 몸인데 오른손도 내 거죠. 왼손도 내 거잖아요. 둘 다 몰라. 육은 모르는 일을 주께서 미션 임파서블 해내신 거예요. 주께서 2+0으로 일하기 때문에 2는 0이 없이는 자기 존재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라 하는 거는 외부에서 오는 거예요. 내가 성실하면서 내 의미가 차곡차곡 누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걸 전부 다 박살내는 의미는 외부에서 오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을 때 죽어야 돼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우리 안에 실현 돼야 돼요.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불가능한 미션 임파서블 가능치 않는 사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이 아닌 줄로 압니다. 주께서 함께 하셔서 주의 뜻을 못난 저희를 통해서 다 성취되었음을 알릴 수 있고 나타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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