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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

아빠와 함께 2025. 2. 14. 10:34

새 언약

2012년 5월 27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2:14-20

(눅 22:14, 개역)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눅 22:15, 개역)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눅 22:1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눅 22:17, 개역)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눅 22:18,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눅 22:19, 개역)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눅 22:20, 개역)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 천국과 연결된다는 것은 달리 말해서 천국 쪽에서 지상에 다가올 때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으로 표현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다 때가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난 것이 천국과 연결되는데 성사되면 더 이상의 ‘때’는 있을 이유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파악하고 느끼라고 있는 것이 시간이 아니라 때가 아닙니다.

천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먼저 주입된 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포도나무 언급은 인간들의 시간관 바깥에서 벌어지는 바로 그 내용이 실은 인류의 역사를 주도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들은 시간과 ‘포도나무에서 난 것’과 연관시킬 수 있는 인식의 틀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이해하는 ‘포도나무의 난 것’이라는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작물재배하는 몸의 행위만 관련지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통해서 천국이 닿게 된다는 말씀을 먼저 언급하셨습니다. 그점에 대해서는 그 당시 사람들도 동의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열심히 나름대로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겁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언급하시면서 그것을 하나님 나라와 연결시켜버립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난감합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연결된다는 말입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 못하는 것은 실은 다른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까지’라는 시간 형식의 단어에 대한 해석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까지’라는 것은 그 이후에는 역시 자신이 의도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딸보고 “밤 10까지 집에 들어오너라”는 말은 곧 “밤 11시나 12시에 네가 할 일에 대해서는 내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단지 10시까지만 집에 들어오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까지’라는 말씀은 그 ‘〜까지’의 사건으로 인하여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 인간들의 모든 주도권은 상실되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곧 인간들의 생각하는 시간적인 스케줄 따라 오는 천국은 천국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사전에 시간적인 계획을 가지고 준비하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 된다는 말입니다.

천국이냐 아니냐에 대해서 주도권을 가지고 개입하는 것은 ‘〜까지’를 정해주는 그 사건에 의해서는 결정 나는 겁니다. 그 주도권 사건이 지상으로 드러나는 모양새는 바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는 모양새입니다. 왜 난데없이 포도나무와 천국이 무슨 상관을 짓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죄없음’, 곧 ‘흠없음’과 관련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한 가정의 생명을 결정짓는 것은 그들 가정 속에 같이 기거하는 ‘1년 된 흠없는 수양’입니다. 이 말은 곧 모든 기족들은 다 ‘흠이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흠없음이 흠있음을 대신하지 못하면 죽음의 천사가 감행하는 저주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흠없는 제물의 제사가 이스라엘을 주도적으로 끌고 오면서 바로 이 사실에 입각해서 하늘에서 율법이 쏟아지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민수기 6장에 나오는 ‘나실인 헌신에 관한 규정’입니다. 민수기 6:2-5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포도와 관련된 것들을 일체 접촉하지 않는 것’으로서 ‘흠없는 인간’이 하나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그동안 하나님의 규정을 잘지켜왔는지를 증명해줄 증거물이 그동안 자라난 머리카락이 됩니다. 이 머리카락만은 흠없는 제사에 합류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에게서 나온 신체입니다.

이것은 곧 제물이 어떻게 인격화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주는 절차가 됩니다. 

삼손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실인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되었지만 그는 그의 머리카락을 자기 여인을 차지하는데 있어 소모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삼손으로 하여금 나실인답게 마지막으로 써먹게 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그 목숨을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어 희생당하게 하는 겁니다. 곧 죽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난 것’을 구원자로 선택받은 자의 ‘목숨잃음’을 내용으로 하여 주도적으로 인간 역사 속에 개입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이 포도주가 천국을 이루는 새로운 언약이다”고 말입니다.

포도에서 난 것은 붉습니다. 피는 곧 붉습니다. 따라서 메사야가 죽어야 구원이 죄인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그분의 죽음에 인간들은 부정적으로 가담하게 됩니다. 인간들은 지독하게 자기를 짝사랑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인간들이 대외적으로 사귀는 것은 사실 사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짝사랑의 범위를 확장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기 짝사랑을 버리지 않는 한 인간들이 무슨 절기를 지키고 아무리 종교적인 모습을 보여주어도 어디까지나 자기 몸에서 출발한 행위이기에 다 부질없는 짓이요 소용없는 짓입니다. 따라서 이런 주도권에 도전하는게 있으면 인간들은 마음 속으로 도끼들고 설치게 됩니다.

자기를 힘들게 하고 자기 인생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대상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일부로 메시아는 말려듭니다. 그레서 피를 내어버립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피와 내 살을 마시고 먹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느니라”(요 6:51) 바로 성도의 일생이란 이 ‘포도나무의 난 것’을 표현하는 특이한 일생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제를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 외에는 모두 미워하는지를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9강-눅22장 14-20(유월절의 완성)1205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2장 14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4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2:14-20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또 떡을 가져 사례 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도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본문가운데서 사람들이 얼른 주목하고 마음이 당기는 대목이 나옵니다. 16절에 나오는데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는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마음이 당기지 않습니까? 하늘나라가 있기는 있는데 우리가 궁금한 것은 하늘나라가 언제 이루어지느냐, 거기에 기대를 잔뜩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늘나라가 이루어지는데 하늘나라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인간과 하늘나라 사이의 다리 혹은 연관성은 뭐냐, 바로 유월절이라는 겁니다. 유월절이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 준다는 거지요.

 

그 이야기는 유대인들도 다 알고 있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월절을 잘 지켰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같은 이야기를 하시거든요. 유월절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하나님나라가 거기에 도달된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이 할 일은 유월절을 제대로 잘 지키면 될 것이다, 그렇게들 생각하는데 그 뒤에 나오는 말씀들을 보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예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이 하늘나라로 데려간다, 그 논조에 의하면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에 한해서만 천국에 들어간다, 이렇게 문제가 굉장히 간단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그 다음에 말하기를 18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방금 이야기하기를 유월절과 하늘나라, 천국과 관련이 있다고 이렇게 다들 알고 있고 예수님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늘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해서 얼토당토않게 포도나무가 쑥 끼어든 거예요. 그러면 유월절 하고 포도농사 지으라는 말입니까? 여기에 포도나무에선 난 것, 이 이야기를 주님께서 집어넣어 버릴 때 사람들은 ‘천국 가는데 포도나무가 왜 관련되는지’가 이해가 되지를 않는 거예요. 지금 한국의 교인들보고 천국 가는 방법 이야기하라고 하면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세례 받고 그 뒤에 성찬식에 참여하다가 죽으면 천당 갑니다. 교회 공동묘지에 묻히고 구원받습니다. 죽기 전에 목사가 예수 믿으라고 하면 믿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다가 죽어서 천국 갑니다.’ ‘그러면 포도나무는요?’ ‘저는 농사도 안짓는데 포도나무 이야기를 왜 합니까?’ 그렇게 되지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 왜 천국과 관련이 있다고 예수님은 생각하시는가, 그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는 무슨 문제와 관련이 있어요. 16절 끝에 보면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여기서 ‘~까지’라는 말이 나오고 18절에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까지’라는 말이 나와요. 여기서 ‘~까지’라는 말은 여기서부터 이것까지 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하늘나라가 시작된다, 그러니 ‘~까지’라는 말은 뭐냐 하면, ‘여기서 여기까지는 좀 기다려 봐. 성질 급하게 하지 말고 좀 기다려 봐. 이렇게 이루어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천국이 되니까 천국이 임할 때까지 좀 기다려봐.’라고 하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여기까지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이런 뜻으로 받아들이거든요.

 

그런데 이 말, ‘~까지’, 예를 들어 ‘목사님, 염색 언제 하십니까?’ ‘머리가 희게 될 때 까지는 못하고 머리가 희게 되면 그 때는 염색할게요.’라고 하지요. 이 ‘~까지’라는 말은 ‘~까지는 참고 있다가 그 다음에 하고 싶었던 것이나 계획했던 바대로 하면 됩니다.’ 하는 식으로 우리가 보통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이거든요. 예수님께서 ‘~까지’라는 말을 쓰시면서 포도나무에서 난 것, 이 이야기를 집어넣는 이유가 뭐냐,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천국이 언제 오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 다음에 천국인가, 하면서 기다리는 마음자세가 이미 천국에는 부합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까지’라는 말은 인간이 여전히 시간이라는 것을 계산해서 어디서 어디까지는 세상 나라고 그 다음 언제부터가 하늘나라입니까, 라고 시간을 줄자처럼 펴놓고 시간의 스케줄을 보는 거예요. 그런 시간의 잣대, 시간의 흐름, 시간의 길이, 그것을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한 천국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살아가면서 가지는 어떤 계획이나 목적이라는 것은 시간의 인식의 틀, 그런 구조 안에서 나는 오늘 뭐하고 내일은 뭐한다는 계획이 짜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계획에는 천국이 포착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천국이 포착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뭐라고 하느냐하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18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이 말을 우리의 시간대로 계산하게 되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늘나라 오기 전에는 안 먹고 그 다음에 하늘나라 되고 난 뒤에는 본격적으로 먹어라, 해서 포도나무를 막 따먹을 수 있다.’는 식, 여기까지는 참고 있다가 그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무엇도 할 수 있으리라, 라고 하는 것, ‘~까지’ 그 뒤의 이야기를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고 관찰할 수 있고 미리 당겨서 계획도 잡을 수 있는 시간적인 구조는 하늘나라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부터 철퇴를 가하는가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세계 끝나면 오는 천국을 기다리겠다고 이렇게 시간스케줄로 잡는 그 마음잣대에 대해서 주께서는 철퇴를 내리고 그런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주고 어떤 교리를 가져다주어도 인간은 자기시간 틀 속에서 천국을 염두에 두는 부질없는 짓들을 하고 있음을 미리 감안하는 가운데 주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에게는 시간을 다룰 수 있는 의식이 있다. 따라서 이 의식자체는 무슨 문제가 없을 거야.’라고 지레짐작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거 문제 있거든.’ 네가 시간을 생각할 있다는 것, 그래서 미래를 생각하는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말은 너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너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미래의 천국을 기다린다. 이것만큼은 문제가 없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그 자체를 주께서는 시비 걸고 나오시는 거예요. 이것은 더 나아가서 뭐냐, ‘네가 정말 천국을 알고자 한다면 천국을 시간으로 따질 생각을 말고 포도나무에서 난 것과 엮여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포도나무에서 난 것과 엮이는 사람은요, 농사짓는 사람밖에 없어요. 청도나 경산이나 금호의 포도대단지, 영천, 이런데서 농사짓는 분들 말고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과 엮일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포도 농사지으면 구원받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이라면 그 천국과 관련된 사항이 미리 이 세상에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이라는 것은 바르게 살아야 되고 십계명 지켜야 되고 교회 다녀야 되고 세례 받아야 되는 그런 것들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포도나무가 안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생뚱맞게 주님께서 포도나무 이야기를 해버리니까 우리가 기존에 준비한 것들, 착해야 된다, 거룩해야 된다, 헌금해야 된다, 전도해야 된다, 봉사해야 된다,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거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뭐냐, 네가 착해야 된다, 경건해야 된다, 거룩해야 된다, 말씀 지켜야 된다, 성경공부 해야 된다, 교회 나와야 된다, 이런 것들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이것 잘하면 나중에 천국 오겠지.’ 하는 우리의 시간 틀 속에서의 천국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것을 거부하는 거예요.

 

네가 이런 것들을 준비한다는 것은 이런 것들을 준비해서 나중에 천국이 오면 거기에 쑥 들어가겠다는 심보인데 그 심보 자체를 주께서 거부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시비를 걸지요. 우리가 착하겠다는데 뭐가 문제고 우리가 경건하겠다는데 그것이 왜 죄가 되고 우리가 교회 나와서 봉사하겠다는데 그게 왜 나쁜 짓이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9절에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그리고 20절에 “저녁 먹은 후에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 천국에 넣어줄까 말까 하는 약속은 네 몸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네 몸과 엮여서 가는 것이 아니고 이 내 몸, 예수의 몸에서 나온 그 피와 예수님 몸의 살점으로서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준비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뭐냐, 우리가 준비하고 계산하고 생각하는 것은 전부다 어느 몸에서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이 아니고 내 몸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오늘 교회 나왔습니다, 내가 봉사했습니다, 내가 힘들여 일한 것으로 헌금했습니다, 전부 다 내 몸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지요.

 

요새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교회 지을 때 교인들이……, 돈 아낀다는 취지도 있지만 목사가 은근히 이것을 미화시키지요, ‘여러분이 손수 벽돌 찍고……’ 벽돌 나르는 정도야 할 수 있다지만 옛날에는 손수 교회에서 벽돌 찍었어요, 처음에는 천막에서 예배하다가 예배당 지을 때 ‘벽돌이야 돈 주면 오는데 우리가 꼭 벽돌까지 찍어야 됩니까?’라고 하다가 ‘그래, 믿음이란 어린애 같은 믿음이라야 한다. 따지지 말고 신의 대리자(주의 사자, 주의 메신저라고 하면서)인 주의 종의 말씀을 그냥 들어서 막상 해 보면 목사님께서 우리보다 더 깊이 길게 생각하는구나. 막상 벽돌 찍어 보니 교회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벽돌처럼 우리 몸도 이렇게 세워져가겠구나.’ 하고 그렇게 힘들게 하면서 받은 은혜가 더 많더라는 겁니다.

 

그거 아니거든요! 옛날 사람들은 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해 왔었어요. 목사가 시키면 사리에 안 맞더라도 억지로 하면서 은혜를 만들어내요. 안 그러면 자기만 쪼다가 되니까. 자신이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변명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일을 하게 된 이유를 억지로 찾아내는 거예요. 자기가 은혜를 만들어서.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벽돌 찍어내는 일은 네 몸 가지고 했잖아. 네 몸 가지고.’ 사람은 자기가 고생한 만큼 자기를 잊지를 못해요. 사람은 자기를 짝사랑합니다. 죽을 때까지 짝사랑해요. 하나될 수 없는 그 짝사랑의 지독한 병, 이 죽일 놈의 사랑이라는데 그 죽일 놈의 짝 사랑을 어느 누가 바꿀 수가 있습니까?

 

내가 나를 지독하게 짝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교회 와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나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나를 짝사랑하는 만큼이나 당신들도 예수님도 같이 합세를 해 달라는 거예요. 사람 사는 관계 별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니까 내 사랑하는 만큼이나 나를 사랑해주면 나는 당신과 친구관계 해 주겠다는 용의를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입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할 때마다 가슴 아픈 것이 그거예요. 뻔히 알거든요. 동상이몽이라고 해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이지요.

 

둘이 예쁘게 옷 입고 나란히 서 있어도 동상이몽이라니까요. 평소에 자기만 사랑한 인간이 결혼식 했다고 해서 갑자기 남 사랑하고 하는 법이 없거든요. 6개월만 지나면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떨어지면서 아,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동업이고 협업이었구나, 하는 것을 뒤늦게 파악하지요. 인간은 이렇게 자기짝사랑이기 때문에 헌금을 하면서 ‘그동안 내가 이 돈 번다고 얼마나 수고했는가.’ 하는 그것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한 헌금을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헌금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닙니다. 내 정성을 주께서 봐달라는 거예요. 교회 수십 년 다니면서 아벨의 제사가 아니고 가인의 제사만 계속 드리는 겁니다. 날 좀 알아달라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수십 년 하면 장차 주님이 구름타고 와서 날 천국에 넣어주겠지.’

 

그런데 그 시간 자체가 네 몸에서 나온 시간관이기 때문에 그것은 엉터리라는 거예요.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 시간에서 빠져나와야 되지요. 기다림에서 빠져나와야 되지요. 그러니까 신앙이라 하는 것은 기적이고 불가능한 거예요. 제가 종교라는 것은 엄살이라고 했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장차 올 불행을 대신 당겨서 불행한 거예요. 다른 사람은 연휴라고 놀러가지만 자기는 자진해서 고생하는 것이 뭐냐, 교회 와주기, 이렇게 스스로 자기가 미리 불행하게 되면 나중에 진짜 불행이 왔을 때 미리 당겨서 불행에 대해 보험을 들어놨기에 주께서 그 보험 든 것을 가지고 그 불행을 쉽게 무마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엄살이죠. 맴매 한다고 하니까 때리기 전에 미리 엄살을 떠는 거예요. 애들이 제 엄마한테 하는 것 하고 똑같아요.

 

그 엄살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불행이거든요. 그런데 주님이 진짜 주시는 불행은 우리가 그동안 쌓아놓았던 마일리지가지고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왜, 그것은 새 계약에 안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새 계약은 자신의 몸과 피지 우리의 엄살은 주님의 천국 가는 계약에 포함이 안 되어 있다 그 말이지요. 안되어 있는데 왜 우리가 억지를 부리면서 자꾸 집어넣느냐 그 말이지요. 그거 빼면 또 삐져서 교회 안 나오고, 아주 웃겨요, 웃겨! ‘그 교회 나와서 엄살하는 거 다 소용없습니다.’ 하면 삐져서 한다는 소리가 ‘그러면 너만 구원받고 한국교회가 다 엉터리인가?’ 하는 거예요.

 

자기가 하는 엄살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불행이고 비극이잖아요. 주께서 주시는 비극과 불행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도 감당이 안 되게 만들어요. 감당이 안 될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주제파악을 합니다. ‘내가 나 혼자 연기를 했구나.’ 내 몸에서 내가 조작해서 또는 날조해서 만든 어떤 종교적인 경건의 모양이 할 필요도 없는 짓들을 가지고 수십 년 동안 목사 장로 되면서 해 온 거예요. 늦게 온 사람은 몇 년밖에 안했지만.

 

36세 된 어떤 남자가 있어요. 그 남자가 34살 된 여자하고 결혼했는데 4살짜리 애가 있습니다. 계산해 보면 32살에 애를 낳은 거지요. 그런데 그 남자가 별로 할 일이 없고 고철 주워서 생활하는데 그 사람이 실수를 해서 허름한 집이나마 불을 내서 그 집이 다 타버렸어요. 하루아침에 길에 나 앉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러고 나서 자기 아내가 아파서 병원에 가보니까 4기 암이에요. 아내는 말기 암으로 병원에 누워있지, 자기 집은 불타서 없어져버렸지, 하루하루 생활이 어려웠으니 보험 들어놓은 것도 없었죠. 그러던 차에 네 살 먹은 애가 병원에 있는 엄마침대에서 놀면서 까불다가 떨어져서 뇌진탕으로 평생 불구가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그 남자가 술을 먹고 경찰 순찰차 본 네트를 도끼로 찍으면서 ‘날 교도소에 보내 달라.’고 한 거예요. 무슨 뜻이겠어요? 더 이상 내 힘으로, 내 자력으로는 못사니까 교도소, 국가의 힘으로 밥이나 먹고 살련다, 하고 울면서 차를 도끼로 찍어버렸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신이 과연 있다면 어떻게 이런 불행한 일이 연이어 일어나겠느냐?’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이 답변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왜 그 사람에게 허름한 집마저 불타 없어지게 만들고 아내는 말기 암이 되어서 이미 병원조차 손 들어버리고 하나밖에 없는 애가 유일한 희망인데 이것은 평생 죽지도 않는 불구가 되어서 바보가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그런 불행이 왔는가,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해 보세요.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몇 년을 했든, 5년을 했든 10년을 했든 거기에 대한 종합적인 우리의 실력테스가 되는 거예요. 그동안 내가 믿었던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가정 이런 집안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답변할 수 있느냐 그 말이지요. 우리가 평생 동안 복음을 알고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그 아는 것 다 주워 모아서 해답을 내릴 때 어떤 해답을 내릴 수 있습니까? 답변하기 참 곤란하지요.

 

답변은 이렇게 됩니다. 나에게 그런 불행이 안온 것이 나의 행복인줄 아는 오만함을 지적하기 위해서 저쪽에 불행이 온 거예요. 나에게는 그런 불행이 오지 않고 나는 행복하다는 그 사실이 사실은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오만함이거든요. 그 오만함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인간의 자기주제파악이 자기 살아온 인간의 합당한 현실이 누구에겐 가는 주어져야 돼요. 그 사람이 ‘어찌 나에게’라고 할 것이 없이 원래 인간은 불행에서 태어난 거예요. 인간자체가 불행에서 태어났고 불행에서 시작이 된 겁니다. 그 사람은 자기시작점에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이고 그런 일이 안 벌어진 사람은 멀찍이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누구냐의 그 원래 정답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요. 멀리 떨어진 만큼 우리는 환상과 착각 속에 빠지는 거예요. 뭐라고, 내가 이만큼 잘사는 것은 내가 힘들여 제대로 살면서 저주받을 짓을 하지 않고 착하게 살아서 복을 받았기에 아직 이런 저주가 오지 않았다, ‘인간아, 착하게 좀 살지. 착하게 살았더라면 촛불이 넘어져서 불이 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애가 뇌진탕으로 평생 불구되는 일도 안생기지.’라는 오만함이지요. 제가 길게 이야기했지만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욥을 봐라.’ 구약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하루아침에 자식 열 명 다 죽고 재산 다 날린 사람이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우리는 남의 이야기로 듣잖아요. 또 지식으로만 듣잖아요. 그런데 인생을 산다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가 물살을 마주할 때 ‘가만 있자, 이게 시속 얼마지? 이 강물의 깊이가 어느 정도나 되지?’ 이렇게 계산 안하잖아요. 연어한테는 마주쳐오는 그 물살의 신선함과 차가움 물결이 와 닿는 이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낌으로 오잖아요. 그러면 우리 인간은 지식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시는 느낌과 느낌으로 연어처럼 마주치면서 그냥 자신의 오만함을 드러낼 뿐이라는 말이지요.

 

주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은혜를 줬건만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서 나오는 은혜를 생각 안하고 내 몸의 수고와 열정과 내 몸의 열심과 희생과 봉사와 차분함과 침착함과 양보 때문에 얻은 재물이라고 지적으로 회수하는 식으로 울타리를 친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 제가 아까 예를 든 그 36세 남자의 불행을 보고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휴, 다행이다. 인간아 좀 제대로 살지.’ 하는 식으로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 그것은 아직도 남아 있는 우리의 오만함의 발로입니다. 그 사람의 나이가 36세니까 그렇지 만약의 그 사람 나이가 92세 같으면 우리는 간단하게 이야기할 겁니다. ‘죽어라, 잘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서른여섯 살이라. 죽을날이 아직 멀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의 계획은 뭐냐, 교도소에 가서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 인생을 관리하거나 스스로 이끌 수 있는 모든 희망과 힘을 다 상실한 겁니다. 그래서 교도소 가서 나라가 주는 따뜻한 밥과 물로서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우리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내 힘과 노력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주신 힘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힘에 의해서 산다고 하는 것은 모든 한국교회,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다 주장하는 거예요. 그것은 천국 못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천국가느냐,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내가 산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우리는 포도나무에 엮이고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곧 포도나무와 관련되어 있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우리가 인생 살면서 포도나무와 엮여져야 됩니다. 포도나무에서 난 것과 엮여질 때 우리는 새 언약에 소속된 하나님의 진짜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제가 개입하과 제가 제안한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그 진액, 다시 말해서 포도주를 예수님은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피로 본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네가 피를 아느냐? 이 피를 마셔야 돼.’라는 말씀을 우리가 익히 아는 포도주를 마시라고 대체해서 말씀하신 겁니다.

 

그리고 이 포도주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너희들이 그토록 고대하고 기대하는 천국은 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의 붉은 피, 그 피로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내 몸을 내가 짝사랑해서 내가 어떻게 살든지, 못살게 되어서 교도소에 들어가서 살든지 내 몸에 관심 두고 내 몸을 짝 사랑해 나온 모든 것, 거기서 나오는 모든 시간관, 그 시간관에서 나오는 모든 천국 관, 이 모든 것은 다 쓸데없고 부질없고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너무나 자기 자신을 짝사랑하기 때문에 오직 그것밖에 몰라요. 어떤 변화도 예수님의 몸과 관련된 것을 상상도 못하고 내 가정, 내 새끼, 나 밖에 모르는 거예요. 서른여섯 먹은 그 사람이 남의 집이 불탔다면 아마도 기분 좋아하면서 남의 불행 고소해 하는 그런 삶일 거예요. 그런데 그 연어의 물살이 자기에게 덮치고 보니 본색이 드러나지요. 순찰차는 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순찰차를 도끼로 찍은 이유가 교도소에 가기 위함이었는데 사실은 그 도끼로 예수의 머리를 친 것과 똑같은 겁니다. 신의 머리를, 그래서 신은 나타나면 도끼로 찍히게 되어 있어요.

 

소매 걷어 올리고 도끼 들고 아예 벼르고 있어요. 내 마누라 말기 암에 내 자식은 죽는 것만 못한 평생 불구로 만들어놓고, 예수님 오기만 하면 도끼로 찍어버릴 거예요. 주님께서는 도끼로 찍으라고 합니다. 찍어야 피가 나오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악한 자로서, 하나님의 원수 된 자로서, 죄인 된 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수님의 거대한 언약작업에 참여되고 있습니다. 종교라는 것, 교회 예배당,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 짝사랑에 불과한데.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 천국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미 구약에서도 나옵니다. 구약 민수기 6장에 보면 거기에 나실 인이 나와요. 민수기 6장 3절에 보면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 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찌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찌며.” 민수기 6장의 이 조항은 율법에서 나온 겁니다. 율법 안에 나실 인 조항이 있어요. 나실인이란 특별히 떼어놓는다는 거예요.

 

따로 떼어놓는 이유가 뭐냐 하면, 원래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그 제물에는 사람의 몸의 일부는 첨가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처음 나올 때에 집안 식구의 솜씨 같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을 잡으라고 했거든요. 그냥 어린양이 아니고 흠 없는 어린양, 그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는 말은 그 양 빼놓고는 몽땅 모든 인간은 죄가 있다는 말이에요. 양 빼놓고 인간이 자기 피 발라봐야 하나님의 천사는 흠 없는 어린양을 모독한다고 더 죽여 버립니다. 흠 없는 어린양을 대체물로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대비한다는 것은, 그 어린양 없이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고 죄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어린양 제사를 아침저녁으로 드림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대상이 되는데 문제는 그 제사 제물에는 흠 없는 양이나 염소, 흠 없는 것이 들어가지 인간은 들어갈 수 없는 거예요. 왜, 흠 없는 것이 흠 있는 것을 대체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나실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실인에게 어떤 조항을 줘서 나실인이 그 규칙을 지키게 되면 지켰다는 그것을 측정하기 위해서 머리카락이 자라요. 머리카락은 안 깎았으니까 자랄 것이 아닙니까?

 

6년이면 6년, 7년이면 7년, 지킨 만큼 수염이나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면 그 분량만큼 자란 머리카락이 생기잖아요. 그 분량의 머리카락은 하나님의 법을 완수했습니다, 하는 증거물로서의 머리카락이 있는 거예요. 그 머리카락을 싹둑 밀어서 흠이 없는 것만 들어가는 그 제물에 인간 몸의 일부인 머리카락이 거기에 합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짐승으로 표현되는 이 제물이 나중에 어떻게 인격적인 몸으로 전이되는가, 전이과정, 그 절차를 보여주는 거예요.

 

나실인, 이것을 제대로 하는 사람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못하거든요. 나실인은 포도와 관련된 모든 것은 다 끊어버리고 술 먹지 말고 장례(죽음)과 멀리해야 되는 조건들을 다 지켜야 되는 겁니다. 나실인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야 되는데 선택받아서 나실인이 되어서 실패한 사람이 나옵니다. 이름은 삼손, 유명한 사람이죠. 그 사람의 머리카락이 자랐는데 그 이유는 모르고 그저 여자 밝히는데 사용하는 머리카락이었어요. 힘 꽤나 쓴다고 자기 머리카락 가지고 좋아하는 여자를 얻기 위해서 힘을 쏟았거든요.

 

결국에는 그 삼손을 죽이면서 머리카락의 힘이 아니라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 내가 제물 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그 인식, 그 인식이 힘을 갖는 머리카락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죽잖아요. 죽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는 겁니다, 삼손 때문에. 포도나무에서 난 것, 그러면 포도주잖아요. 색깔을 봐라, 빨갛다. 그러면 인간 몸에서 빨간 것은 어느 부분? 피. 그러니까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 잡기를, 하나님이 말씀을 주고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들이 기대하는 인간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부정적으로 가담될 뿐이죠.

 

‘내 몸에서 난 것을 무시하다니.’라고 도끼 들고 메시아의 몸을 쳐버리는, 도끼 들고 친 것은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렇게 쳐버리는 하나님의 악한 원수의 모습으로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종교라는 것을 주었고 엄살을 피우는 교회를 주었고 신앙생활이라는 개념과 용어들을 남발했고 삼위일체부터 해서 성화론, 기독론, 창조론, 온갖 조직신학을 다 준 거예요. 그것 알아서 도끼 가지고 내려치라고. 신앙생활 40년 했는데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뭐냐고 분개하면서 예수님 내려치라고. 그 예수님의 피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흘린 피 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5천명 배불리 먹였을 때에 그들은 배불리 먹은 것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왜, 배불리 먹어서 자기 몸이 배불렀으니까, 이것이 평소에 원했던 것이니까. ‘그래, 배부르기를 원했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사는 이것이 나의 목적이었어.’라고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여겼고 메시아를 안다고 여겼고 그들은 모든 율법과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있었고 제사 지내고 번제 드리고 성전예배 드리고, 다 했습니다. 다 한들 전부다 내 몸에서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얻고자 하는 목적과 노림수를 가지고 그들은 하나님을 찾아왔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하는 말이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 했으니까 평생 동안 자기가 애쓰고 노력했던 것이 자기 생명을 잃는데 주력했던 노력이었습니다.

 

저는 스님들이 머리 깎은 것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를 않아요. ‘왜 머리 깎았을까?’ 왜 머리를 깎느냐 그 말이지요. 수도하기 위해서, 수행하기 위해서, 도를 닦기 위해서죠. 그 닦아둔 도는 누구 겁니까? 그게 바로 짝사랑이라니까요. 자기 몸에 대한 짝사랑이 무소유로, 머리 깎는 것으로 되는 거예요. 여러분, 무소유 하지 마세요. 광주강의에서 반창고 이야기 했습니다. 반창고를 뜯어내면 모든 인간은 공평해져요. 얼굴이 이 정도 생겼으면 반창고 붙여도 용납이 되잖아요. 그런데 판사니 의사니 변호사니 해도 반창고를 뜯어내면 이것은 사람의 직업이 뭔지를 분간 못합니다. 반창고를 뜯어내면 다 똑같아요. 백혈구가 병원균과 싸웠던 흔적이 그대로 있어요.

 

주께서 교회 오게 하는 것은 반창고를 뜯어내게 하는 겁니다. 뜯어내면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포도나무와 엮여지지 않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라는 그 이야기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목사가 되었든 장로가 되었든 집사가 되었든 상관없어요. 포도나무와 엮이지 않는 이상. ‘때라는 것은 너희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 몸에서 정하는 것이다. 내 몸에서 살과 피를 흘리면 이미 그것이 천국이다.’ 그 말입니다. ~까지, 그 이후를 관찰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난 거예요. 이제 우리의 시간관에서 벗어나야 돼요.

 

이제 우리에게 오는 것은 반창고 떼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 특이한 현상, 다시 말해서 내가 저 사람과 아무것도 아니며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가 똑같이 공평하며 결국 우리는 과거도 죄인이고 지금도 죄인이고 앞으로도 죄인이 된다는 사실을 몇 초 동안에 직감하고 연어가 거슬러 올라가는 물결을 생생하게 감지하는 것처럼 포도나무에서 난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면 그 사람은 성도입니다. 주의 언약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 이것이구나,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찾아오시는 거예요.

 

덮치는 겁니다. 포도나무에서 난 것, 빨간 그 포도주, 그 포도주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다른 방식으로는 안돼요, 그 피로만 우리를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그 사실이 이상하게 믿어지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지독하게 이 죽일 놈의 사랑이라고 나에 대한 사랑을 포기 못하는 그 현장에서 수시로 그것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의 피, 그 빨간 피가 아니면 구원 못 받는 이유가 그 피가 문설주에 발려서 이스라엘은 살았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언약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참된 모습입니다.

 

상상하지 맙시다. 백날 신을 상상해 봐야 나의 확장에 불과하고 나의 투사에 불과합니다. 내 모습을 그냥 그려낸 것뿐이에요. 그런 것은 다 내 몸에서 나온 거예요. 그것 다 걷어치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보셔야 돼요. 20절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몸을, 우리의 옷을 하얗게 씻어서 어린양으로서 지금도 하늘나라의 보좌에 앉아 계시다고 요한계시록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미리보고 그렇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본 것을 증거 하라고.

 

이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연어가 받는 생생한 물살처럼 매일같이 우리 가슴에 와 닿고 우리는 이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내 사랑에 빠졌습니다. 자기정당화, 자기합리화만 추구하면서 계속 시간만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시간을 째고 찢어서 그 속에서 예수의 피만 올라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