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매기는 세상
2024년 2월 14일 본문 말씀: 스가랴 11: 11-14
(11:11)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11: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11:14)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선지자의 바른 예언은 그 당시 가련한 양들로부터 모욕을 받는 식으로 가격을 책정 받습니다. 은 삼십량입니다. 이것은 남종이나 여종의 목숨 값입니다.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지니라”(출 21:32) 하나님께서는 가련한 양으로 받은 그 돈을 토기장에게 던지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의하면 토기장이의 밭은 우상이 가득한 불결한 장소입니다.(렘 19:1-4) 이는 양들이 참된 목자인 스가랴 선지자에게 준 그 값어치가 실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에게 되돌려줄 가격입니다. 우상을 열심히 섬기는 주제에 감히 참된 목자에게 가격을 매길 자격조차 없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직 깨어지지 않는 막대기, ‘연락의 막대기’를 두 동갱 내어버립니다. 이는 이스라엘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서 결코 다시 하나로 합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예언이 스가랴 시대에만 적용되는 예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 19에 보면,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7-10에 보면,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고 나옵니다.
곧 이 세상이 저주받을 만한 세상인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경우를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서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 가룟유다로 인해 발생된 십자가 사건은 이 세상의 실체는 ‘온 천지가 저주 받은 밭’임을 말해주기 위해 일어나야만 하는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 것을 모릅니다.
그저 자기 한 몸 사는데 급급했지 그 어느 장소에서도 저주를 뿜어내는 현상을 접할 수 있는 세계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살기만 하면 자기 인생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시로 이 세상이 저주로 가득찬 세상인 것을 알려 주십니다.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 2:23-24)
이 뿐만 아닙니다. 모세의 인도하에 광야를 통과하는 그 공간이 참으로 거룩하고 무서운 곳입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부정하는 고라 자손들은 모세의 겉모습만 보고서 맞 먹을 수 있는 상대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과 고라 자손 250명에게 각자 향로를 들로 여호와 앞에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결과를 주십니다.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인을 소멸하였더라”(민 16:35) 이스라엘은 결코 고만고만한 인간들 끼리의 집합체가 아니었던 겁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이 부부에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
이 세상 자체가 사단이 통치하는 저주받은 세상인 것을 알려주고 그들의 나의 결말은 와해되는 쪽으로 이끌기 위해 예수님은 사단을 자신의 제자 중 하나로 뽑아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요 6:70)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려고 할 때에 나머지 11제자는 결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로 들통나 버렸습니다. 즉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악마의 세력에서 벗어날 위인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은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 몸값을 은 30량으로 처줍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타인에게 가격을 매길 수 있는 권한이 자기에게 있다고 자부합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경우와 같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0-11)
그러나 사단의 나라에 속한 가룟 유다가 이미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로 편입되어 있는 처지에게는 사단의 나라는 온전히 버텨내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는, 가룟 유다가 죽어서 형상한 그 공간이 저주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1)과 나머지 11명의 제자(11)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려고 하십니다.
하지만 나머지 제자들이 ‘우리들은 가룟 유다와는 달리 끝까지 주님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이 세상이 악마의 권세 아래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먼저 예수님과 전체 12제자와 분리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에게 주어진 가격, 즉 은 30량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응수하십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여기에 ’값없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가치는 감히 인간 세계에서 매길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러하다면 예수님의 제자나 성도들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7)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시고 곧장 변화산에 제자 3명을 데려가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자태를 보여주십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값으로도 치를 수 없는 거룩한 영광입니다.
오늘날 성도는 성령을 받아 ’저주받은 나‘와 ’구원 받은 나‘를 중첩적으로 지니고 있는 양상입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이렇게 되면 성도의 모든 것은 이미 예수님의 몸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성도 사적인 일을 따로 없습니다. 다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일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값 매길 수 없는 예수님의 피값‘으로 나타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우리는 죽어 있음을 매일같이 감지하는 놀라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1강-스가랴 11장 11-14절(가격 매기는 세상) 24021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1장 11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줄 안지라,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아멘.
오늘 본문이 짧지만 여기에 등장되는 인물의 관계가 많이 복잡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계시고 스가랴 선지자 계시고 백성들 있고, 백성들은 가련한 양입니다. 백성들이 있고, 13절에 토기장이가 또 여기에 나와요. 하나님, 선지자, 백성, 토기장이. 이 요소들의 조합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그렇게 구성하려는 그 의도가 무엇인가? 얼른 간파하기가 참 힘들게 되어있어요.
이런 겁니다. “내가 너희들의 은총을 끊어버린다”라고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의 양은 이제 신세가 처량하게 되었다.”라는 말을 선지자를 통해서 하게해요. 그리고 선지자는 “바로 이 이야기가 선한 목자인, 진짜 목자인 내가 너희에게 일러주는 것이다. 너희가 선한 목자가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흔쾌히 동의하거든 나한테 거기에 해당 되는 값을 나에게 치르고, 우리 괜히 들었다. 우린 저 이야기 들을 필요 없다 하거든 그냥 나한테 돈안줘도 된다.” 하고 선택권을 백성들에게 넘겼어요.
넘기니까 백성들이 은 30을 달아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주는 거에요. “당신의 존재의 가치는 은 30냥입니다.” 하고 주는 겁니다. 주니깐 하나님께서 “선지자야 받았냐?” “예, 받았습니다.” “그 받은 돈을 토기장이 밭에다가 토기장이에게 던져라.”라고 이렇게 언급을 합니다. 토기장이한테 던져라는 말은 예레미야 19장에 보면 토기장이에, 그 토기를 만드는 자리가 어떤 자리냐? 예레미야 19장 2절에 보면, “하시드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이 골짜기가 토기장이의 골짜기에요. 토기장이의 장소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지시한거에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지시한 이것을 보다 구체화시켜서 은 30냥 하는 구체적인 액수를 집어넣은 것이 오늘 본문 스가랴 선지자에게 계시가 계속 이어지고있습니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하는 것은 예레미야 19장 4절에 보면,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케 하며”
더럽고 추잡한 우상을 섬기던 곳이고, 5절에 보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그곳이 바로 토기장이의 땅이에요. 그 토기장이의 땅은 이사야 같은데 보면 토기를 만드는 것도 되지만 토기장이가 자기의 만든 작품을 마음에 안 들때는 가차 없이 부셔버려서 진흙에 섞어 넣는 자리도 이게 토기장이의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토기장이의 그 존재의 의의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만들어 낼 수 있고 만들어 낸 것이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쉽게 없앨 수 있는 그러한 토기를 가지고 그걸 표현하는 자리가 토기장이의 자리에요. 그리고 불결한 자리고. 그것을 오늘 스가랴 본문에서, “그 더러운 장소에다가 돈 30냥을 니가 받은 30냥을 거기다가 그냥 허비하듯이 던져버려라” 이 말입니다.
그러면 30냥이라는 돈은 뭐가되느냐 하면 불결한 그 땅에 통합되면서 이게 재료가돼요. 받았지만 이거는 값어치가 없는걸로 그렇게 간주 되는겁니다. 그 30냥 돈은 어디서 받느냐? 그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 받은 거에요. 여기서 이제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의 가격을 매길 때 자기는 그 사람의 가격을 매겼다 하지만 받는 쪽은 그 가격을 그 사람에게 돌려주는 가격으로 인식한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나를 기껏 30냥 밖에 안 쳐줘? 그렇다면 너희들이 30냥 밖에 안 되는 존재들이야 하는거에요.”
이 30냥은 출애굽기 21장 3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찌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종의 값이에요. 남종이든 여종이든, 노예에 해당 되는 가치가 은 30냥이었습니다. 돈 가치를 별로 쳐주지 않는 거에요. 노예, 물건처럼 취급되는 어떤 가구처럼 사용되는, 공작기계 뭐 그처럼 사용되는 사람에게 쳐줄 가격이 아니에요. 30냥이.
그러니까 스가랴의 오늘 이 말씀은 “너희들이 바른 소리하는 선지자의 가치가 기껏 남종이나 여종의 가치 밖에 안 된다. 뭐 그런 뜻이지? 알았어 너희의 속셈을. 알았어.” 하나님께서 “스가랴야.” “예.” “그거 버려라.” “어디에요?” “더러운 불길한, 우상 섬기는 불길한 토기장이 밭에다가 버려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스가랴 이 본문만 보게 되면 백성들이 스가랴의 존재 가치를 굉장히 우습게 보는구나,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거는 제대로된 값을 쳐주질 못하고 갖다 버리는거에요. 여기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게 30냥 밖에 스가랴 당시에는 “30냥 밖에 안 돼”라는 이 말은 “스가랴를 보고 가격을 매긴 너희들이 기껏 남종이나 여종밖에 안 돼. 너희들은 그냥 남의 나라의 종으로 팔릴 거야.” 너희들이 내민 그 돈이 선지자를 통해서 어디로 최종 귀착되었는가, 도착했는가를 보라 이 말이죠. 더러운 곳에. 토기장이의 더러운 곳에다가, 불결한 곳에 도착한겁니다.
이 구약 성경 스가랴의 내용이 그냥 구약으로 머물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마태복음 27장 6절에서 8절에 보면, 3절부터 보면,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 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이게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에요. 뒤에 반전이 있습니다. 자기는 이제 나 안 받은걸로 쳐 나 당신한테 안 받았어 하고 주고 자기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는데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피밭이라 일컬었다고 되어있어요.
선지자 스가랴에게 준 말씀이 그 스가랴 시대에서 스톱이 되고 멈추지 아니하고 그것이 어디서 완성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주님의 마지막 언약을 완성시키는데 이 스가랴의 예언이 거기에 통합되고 거기에 집중되고 거기에 끌려들어가는거에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도대체 십자가 사건이 뭐냐?
자,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은 사탄이 관여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으로 규정하는 겁니다. 악마가 관여해야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요. 가룟 유다는 사탄이니까요. 요한복음 6장 70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은 일종의 회전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회전문을 해가지고 문이 돌면서 자기가 의도했던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의도하지 않는 곳으로 그 십자가를 통해서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그 내용이, 시스템이 십자가 사건 안에 들어있게 만듭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마가복음 14장 3절에서 9절을 제가 한번 읽어 드릴게요.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되어있어요.
300 데나리온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3천만원 되는겁니다. 그 당시의 3천만원은 엄청나죠. 지금도 큰돈이지만 그 당시에는 엄청나죠. 자신의 목숨값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기의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자기의 전 재산을 자기값으로 여기지 않고 “이거는 내가 가질 돈이 아니고 주님이 가질 가치가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하고 주님의 가격을 300데나리온 쳐서 그것을 그 발 앞에 부은 거에요.
누구의 가격을 매길때에 그 가격을 받는 쪽이 가격을 내린 쪽에 가격으로 되돌려주는겁니다. “니가 나를 그 정도로 중차대하게 생각하는구나. 네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나를 생각하는구나.” 여기에 300데나리온에 그 뜻이 함유되어있고 포함되어있는 거에요. 이 300데나리온과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을 하나님께선 제자 중의 한 사람을 뽑아 놨어요.
그게 뭐냐?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소개비로 받은 것이 은 30냥이었어요. 노예 시장에 노예 값이죠. 소개비 정도로. 그럼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 이전에 십자가를 대표해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 쪽과 세상 쪽, 사탄 쪽, 그 한가운데 회전문으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속에 포함되어있어요. 포함이 되어 있으면서 가룟 유다를 통해서 이 세상이 남에게 가격을 매기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통해서 보여주는거에요. 요한복음 12장에서 마리아가 향유 부으니까 가룟 유다도 “그것 돈 팔아가지고 가난한 사람 줬으면 좋겠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장례 치르기 위해서 장례 값으로 내놓은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가격을 매기는 사회. 가격을 매긴다는 것은 가격은 가치를 대표해주는거에요.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게 가격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각자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라는 것으로 각자 구성되어있는 세상이에요. 네 가치, 내 가치, 네 가치, 내 가치. 그런데 예수님의 가치는 얼마냐 하는겁니다. 세상 쪽에서 봐서는 30냥 바리새인 쪽에서는 30냥 밖에 안 돼요.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30냥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을 가룟 유다를 통해서 되돌려줘버려요. 그거는 뭐냐 하면 예수님은 어느 세계 속에 속하느냐 하면 이 세상의 가격으로 매길 수 없는 엄청난 분으로서 계시는거에요. 감히 주님에게 가치를 매긴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겁니다. 사탄의 세계는 가격을 매기는 세계고 주께서 새로 마련한 세계는 가치가 어마어마한 무한한 그러한 세계가 바로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되어있어요. 온 천하라는 엄청난 가치, 그러나 그 엄청난 가치도 17장에 나오는“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변화산에 올라갈 때 나타나는 것, 하나님의 나라. 그 하나님의 가치는 이 세상 모든 가치를 다 동원해도 따라올 수 없어요. 족히 비교가 안되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의 생명, 목숨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거에요. 그 가치는 누가 그런 가치를 갖고 있는가? 예수님이 그런 가치를 갖고 있는거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그런 가치를 갖고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가치를 예수님과 공히 같이 누릴 수 있는 그러한 자격이 주님으로부터 부여받게 되는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여받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제자들 속에 사탄을 거기다 일부러 집어넣은 거에요. 사탄을 집어넣은 겁니다. 왜 집어넣었을까요?
오늘 본문 11장. 14절에 보면.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이랬어요. 은총의 막대기를 끊는 것은 예수님의 자신이 언약을 폐해버리는 것이고 그 여파로 그 결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사이에 분리, 분열을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거에요. 분열을. 그럼 우리 생각에는 ‘가룟 유다 갈사람은 가고 우리는 뭐 예수님 따르면 되지’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베드로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 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 본인들이 사탄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채 지금 예수님을 쫄랑쫄랑 따라 댕긴다고 애쓰고 있는거에요. 악마의 세계로부터 분리되어야 되는데 가룟 유다 하나 내쳤다고 자동적으로 남아있는 열한 제자가 예수님과 한패가 되는게 아니에요.
뭐냐하면 제자들은 내가 자기 자신과 자기가 분리 되어야 돼요. 자기가 자기 자신과 분리되는 그런 방법이 있는가? 없지요. 없어요.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버립니까?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 있을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해내시는 겁니다. 어떻게 하시는가? 사탄의 나라 자체에 분쟁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지금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5절 26절에,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이렇게 했어요. 주님이 노리는 것은 사탄의 나라에 내분을 유발시켜서 사탄의 나라가 이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사탄의 나라 자체가 더이상 존립할 수 없는 계기를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 계기 만드는 방법이 뭐냐? 사탄에게 속한 가룟 유다를 자기 제자로 삼아버리는거에요. 제자를 삼아서 그 제자로 하여금 가룟 유다로 하여금 어떤 결과를 낳느냐 하면 가룟 유다가 죽을 때 피밭, 저주의 자리가 되게하는 결말을 사탄에 속한 가룟 유다의 결말로 주께서는 유도해버리는겁니다.
가룟 유다는 이 바리새인, 그리고 이 세상, 가격 매기는 세상과 결코 분리되지 않은 채 그 나라를, 사탄의 나라를 대표해서 제자군에서, 예수님의 제자군에서 추방되었다는 그 일련의 줄거리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버리는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주시면서 하는 말이. 발은 다 씻어줘요. 1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이“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다는 아니다 라는거에요.
가룟 유다를 말하거든요. 그러면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가룟 유다는 자기 갈 길 가고 우리끼리 예수님 만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는데, 실제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아먹으니까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친 것은 나머지 열한 제자가 다 도망쳤어요. 목자를 치니 양 떼들은 다 흩어졌어요. 예수님을 목자라고 여겼는데 실상은 목자가 아니었어요.
사탄의 나라에서 길들여진 그것을 열한 제자가 11+1 그 열두 제자가 공히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요한복음 13장 27에,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그러니까 가룟 유다가 제자들의 선두 주자에요. 가룟 유다가 일을 벌리면 제자들은 선택할 여지도 없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따르는 그러한 본모습이, 본색을 확 다 드러내게 되어있습니다.
그걸 누가 그 자극을 줬는가? 그게 바로 사탄의 나라에 일원인 가룟 유다가 이 세상 전부가 사탄에 속했다는 것, 그래서 사탄의 나라는 너무나 굳건하고 단단하다는 것. 어떤 인간도 사탄의 나라에서 자의로 빠져나올 생각도 못하고 아예 그런 마음도 먹지 않는다는 것을 가룟 유다가 대표해서 샘플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룟 유다의 마지막 가는 길은 사도행전 1장 18절 19절에 보면 나옵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이게 뭐냐 하면 가룟 유다는 자기가 죽음으로써 자기가 자살하고 자기는 자살할 뿐인데 가룟 유다가 죽던 그 시신이 있던 그 토기장이 밭 자체가 저주를 표상하는 그런 밭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루게 하시는거에요.
쉽게 말해서 이 땅은 저주밖에 없다 이 말이에요. 이 땅에 저주밖에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은 악마의 세계뿐이다. 다른 세계는 생각하지 마라. 이 땅은 악마가 통치하고 지배하는 다른 세계는 생각도 하지마,” 그 세계에 모든 인간은 몰입되어 있다는거에요.
이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가격을 매기는 세계에요. 근데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여기에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되어있어요. 값없이. 이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느냐 하면 이 세상은 값을 치루고 뭔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세계인데, 값을 치루고 내가 원하는 것을 그 세계자체가 악마가 운영하는 세계에요.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의 특징이 그거에요. 내 값은 얼마지? 나는 얼마짜리 인생이지?
이거는 뭐 다른 제자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혼자 십자가 달리고 나머지 도망갔다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열한 명과 한 명을 구분하기 이전에 먼저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분열과 분리를 주님께서는 시도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탄에 속한 인간들은 예수님한테 예수님이 중요하다 소중하다 귀한 분이다 라고 하면서 자꾸 예수님에게 가격을 매길 생각을 해요. 여기서 핀트가 어긋나죠. 주님께서는 생명수를 거저주겠다고 하는데, 인간들은 거저 받을려니까 미안해가지고 가격을 매길려고하는거에요.
그 말은 ‘아직도 인간들은 악마의 통제 아래에 있다.’ 그걸 아주 티를 제대로 확 내는겁니다. “은혜받았으면 십일조는 내야지” 뭐 이런거 있잖아요. 인간에게 가격을 매기는 예가 누가복음 18장 9절과 11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요.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하나는 세리입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에 보면,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게 뭐냐? 서로가 서로에게 가격을 매기는 세계에요. 이 가격 매기는 세계에 주님께서 오셔서 주님의 가격을 그들로부터 스스로 가격 당하는 체험을 주께선 의도적으로 하시는거에요. 그리고 원래 주님은, 바리새인들도 그런 뜻을 갖고 있겠지만 예수님에게 가격을 매길 때, 그게 예수님의 값이냐 아니면 소개비냐 하는 그런 문제가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저 예수는 이미 죽을 사람이에요.
죽을 사람인데 가격을 매길 필요가 없어요. 가격은 스스로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길때나 가격이 되는거에요. 사형수에게 얼마 투자해서 이익 볼게 뭐가있습니까? 죽을 사람인데. 죽을 사람한테는 가격이 제로에요.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사탄의 세계에서 자기한테 매기는 가격을 받고 그 가격을 자기 제자인 가룟 유다에게 가룟 유다를 통해서 세상적으로 돌려주는데 돌려줄 때 그게 저주, 가격은 곧 저주다 이 세상 전체가 저주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가룟 유다를 자기 제자로 삼았고 충분히 이용한거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가격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든 제자들의 가격이에요. 그 제자 중의 한사람이 가룟 유다고 가룟 유다는 곧 뭐냐? 저주 값이에요. 그들이 가격을 매긴것에 대해서 가룟 유다의 최후는 저주 값을 받은거에요. 그러니까 가룟 유다에게 30냥을 줬다는 말은 그렇게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의 몫이다 해서 30냥을 준 그것을 가격을 매긴자가 곧 그 사람의 가격이 된다는 말은 이 세상이 가룟 유다를 통해서 너희들은 몽땅 다 가룟 유다와 같이 저주 받는 것이 너희에게 합당한 가격이라고 주께서는 그것을 들추어 내기 위해서 십자가 사건에 그냥 돌아가신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현재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현실에 어두운지 도대체 이 현실이 어떤 현실인가? 가격을 매겨서는 안되는 현실이라 했거든요. 성경에서 선지자를 통해서 그걸 약간 약간 부분 부분씩 보여줬어요. 열왕기하 2장 23절에서 24절에 보면,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했어요.
애들이잖아요. 애들은 보는대로 그냥 지껄이잖아요. 보는대로. 올라가라하니까, 엘리사가 저희를 보고, 철없는 애들이 한 이야기를 가지고,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 아, 무서운 할아버지다 정말. 무시무시한 분이죠.
자기를 돌로 친것도 아니고 대머리, 대머리보고 대머리라고하죠 그러면 숱이 많내 할까요? 대머리보고 대머리 했다고 엘리사가 저주하니까 수풀에서 암콤이 나와서 애들 42명을 죽였어요. 42명의 부모가 84명이 됩니다. 무슨 뜻일까요? 너희들은 선지자가 온 이 세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세상인 것을 너희는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다.
민수기 16장 32절에 보면, 고라 자손이 모세에게 대듭니다. 출애굽 올 때 우리가 같은 하나님 다 믿고 왔는데 니가 뭐 대장질 하느냐 이렇게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250명에게 전부다 향로를 하나씩 들고오라했어요. 향로. 그래서 처음에 모세도 왜 향로를 들고 오는지 잘 모르고 거기에 고라 자손에 속한 그 사람들 250명도 각자 자기 향로를 하나씩 들고왔어요.
이게 어디서온 물건인지 몰라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모세는 하나님의 어마어마 무서운분 무섭다는 것을 홀로 체험한 사람이고 직접 하나님과 만나서 거룩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는걸 아는 사람인데 그로 인하여 모세는 마음이 굉장히 낮아진 사람이다. 모세같이 너희들 가운데 겸손한 사람이 없다. 그런데 너희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 만나보지도 않고 모세하고 지하고 같은 급인줄 알고 그렇게 하니까 너희들은 아직도 이 자리가 얼마나 무서운 자리인줄 모르지?” 하고 향로를 들고 있으니까 향로에서 불이 쏟아져가지고 250명 다 죽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동남쪽 뱃길따라 300리 이 대한민국 위도 경도에 있는 이 땅이 얼마나 무서운곳이에요 이게. 우리가 살아 있는게 이상해요. 지금이라도 향로 불이 와서 우리를 불태워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죠. “우리의 몸은 죄로 이미 죽은 몸이요.” 로마서 8장 10절. “네 몸? 죄로 인하여 이미 죽었어. 그거 인정 못해? 율법 갖다들이대? 들이대봐 너는 저주야.”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저주받아요.
저주받으니까 우리는 이미 죽은 몸이에요.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하는데 그 사도 앞에 막대한 헌금을 줬어요. 그런데 헌금받고난 뒤에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러면 되는데 “니가 사람을 속인게 아니고 성령을 속였다”해서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이좋게, 안락사 했는가 그건 모르겠는데...
사이좋게 한날에 둘 다 다 죽었어요. 그러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지금 뭘 모르느냐 하면 자기가 지금 진작에 저주받은 땅에, 이 세상에, 자기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의외로 값없이 살아있음을 그걸 몰랐던 거에요. 사는게 공짜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놓친 거에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 돈 내꺼라고 우기는겁니다. 나답과 아비후도 마찬가지고요. 사도바울의 복음은 이걸 극단적으로 밀어붙입니다. 이렇게 하는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저주 받은 나와 구원받은 나가 중첩상태에 있다고 보는 거에요. 중첩상태. 중첩상태라 하는 것은 양자물리학에서 양자얽힘으로 보통 설명이 가능해요. 시간의 편차가 존재하지 않으면 동시성이에요. 열 두시하고 열 두시 십 분하고 차이가 나면 이건 시간이 흐르는 거에요. 그러나 열두 시, 열두 시, 열두 시 이거는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겁니다. 양자 세계는 시간이 동일한 시간에 서로 다른 정보, 0과 1이 동시에 벌어질 수 있다는게 양자 중첩이라는 겁니다.
겹쳐져 있는거에요. 0과 1이 겹쳐져 있는데 인간들이 이게 0이야 1이야 관찰하는 순간 인간이 개입하는 순간 1아니면 0, 0아니면 1로 하나를 감추고 드러내게 되어있어요. 참이게 희한한 일이죠. 시간이 흐르지 않을 경우에는 공간이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똑같은 값이에요.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세계에서.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세계는 시간의 편차로 말미암아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속도라는게 있습니다.
속도라 하는 것은 분모의 시간 분자를 공간, 공간을 시간으로 나눈 것을 속도라고 해요. 그 속도가 제로가 되어버리면 이거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겁니다. 분모가 시간이 되어버리면 그 세계에서는 모든게 중첩되어있어요. 그러나 그 중첩된 세계를 기본으로 해서 시간이 흐르는 세계로 와버리면 인간의 존재는 뭐냐? 확률적으로만 따지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나는 살았다” 이러면 틀리고요, “나는 확률상 살았다.” 이렇게 해야 돼요. 확률적으로. ‘인간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우연적 존재며 확률상 있을 가능성 때문에 아직도 살아 있다.’ 이렇게 되는겁니다.
성경에서는 사도바울의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4절까지는 이 사실을 이거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했어요. 동일한 나입니다. 동일한 나인데, 이렇게 신기한 데가 있어요? 이 땅에 살아있는 육신은 죽은 육신이고 진짜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진짜 나는 하늘에서 살아있다는 거에요. 예수 안에 살아 있다는 거에요. 중첩 돼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 십자가의 성령이 안 온 사람은 어떻게 신앙 생활하느냐하면 이땅에 살아있는, 아직 까지 안 죽었다는거에요. 아직 까지 안 죽은 나를 어떻게 천국에 오게 되면 나를 천국에서 살 수 있을까를 그 간격을 애써 메꾸고 그 간격을 좁히는 결사적인 노력을 다하는 거에요. 성경 공부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총동원해서 하나 밖에 없는 몸뚱아리를 천국에 기어이 합격을 시켜야 된다는거에요. 뭐 대성학원 다니든, 보습학원 다니든 기어이 좋은 학원에가서 배워서 거기에 넣어야 된다는 거에요.
이거는 예수님 안이 시간이 없는 곳이에요 예수님 안은. 그게 묵시 세계거든요. 예수 안은 이미 시간이 끝난 상태를 예수 안이라고 하는겁니다. “두 세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으면 기도하면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부르면 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묵시 세계에요. 주님은 안 보여요. 안보이지만 성도와 함께 있다 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볼찌어다. 안보여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안보여요. 보이는 것은 거울앞에 비친 내 모습밖에 없어요. “저 인간을 어떻게 천국에 보내야 될텐데. 잘 돼야 될텐데.”
잘 될 턱이 있나요. 성령을 안 받으니까, 성령 받은걸 대신해서 온갖 성경 공부부터 해서 성경에 맞춰갈려고 자신의 몸을 쳐서 굴복시키고 난리도 아닙니다. 아주 안쓰러워요. 제자들 전체가 예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근데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주께서 약속하기를 나는 나머지 사람은 끝까지 사랑한다고 하고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14장 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이게 성령의 임하심입니다.
성령이 임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아느냐? 성령이 임하면 로마서 8장 말씀처럼, 나는 이미 죄로 죽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살아났느니라. 중첩에 대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중첩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내가 삼층천에 있는 어떤 아저씨를 봤는데, 그 아저씨가 아무리 봐도 나인 것 같은데 여기 있는 나와 거기 있는 나, ‘나’가 두 개되어버렸어요.
고린도후서 그 대목을 12장에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시간 속에 인간들이 통용되는 언어로서는 시간이 없는 세계의 언어를 그냥 모형으로만 이야기할 수 밖에 없어요.
진실되는 것은 성령 받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비로소 본인들이 알고 있는 거에요. 주님 안에 본인이 살아있는 거에요. 그렇게 살아있는 사람의 공통점은 뭐냐? 자기에게 가격을 매기지 않고 자기의 가치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무한한 가치가 바로 곧 우리들의 우리 성도들의 무한한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는거에요. 너무나 귀한거에요. 왜? 피가 묻어있으니까. 값없는 피가 묻어있으니까 세상 가치로선 도무지 측정이 불가할 정도로 고귀한 모습이에요.
끝으로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로마서 7장에는 이렇게 합니다. 사람이 남편과 아내가 같이 매여 있을때는 생전에 다른 남자한테 가면 음부가 되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된다고 나와요. 이 말은 너희도 그리스도 몸으로 말미암아, 라고 해서 이미 그리스도 몸 자체가 율법에서 분리되었어요. 율법에서 분리된 거에요.
이 세상의 연합이라는 그 막대기가 잘라졌어요. 이제는 이 세상은 자기네들끼리 싸워요.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벗어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이미 그 끊어진 은총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끊어진 연합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연합된 채 주님이 연합된 채 우리에게 값없이 피안에서 그걸 우리에게 다 선물로 주신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가도 그리스도 몸으로 살고 우리의 모든 일어나는 일은 그리스도 몸에게 일어나는 연장, 확산, 일부, 몸이 되는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헤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을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알게 돼요. 아, 값없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서 내식대로 아무리 몸부림치고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차라리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인 것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얼마나 무서운 저주받은 세계에 있었습니까? 십자가가 옴으로써 값없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생명을 얻었음을 주 앞에 감사드리고 영광 돌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