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저주를 계속해서 물어다 주고 가져다주는 그러한 순간순간인 것을 우리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몰라요.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관심도 없어요. 애 군대 간 것은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나는 우리는 우리 일에 관심이 있어요. 거기에 몰두하고 매진하고, 내가 내일에 매진하는 그것을 하나님 여호와의 날에 저주받을 것이라는 것을 누가 그걸 상상하겠습니까? 누가 그걸 짐작했겠어요?
일상이 우리를 망친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무심코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 전혀, 이것은 여호와의 날에 전혀 대비하지 못하는 태도가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3장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문들아 들릴찌어다.” 예루살렘에 하늘로 가는 문이 없습니다. 왕이 오면 머리를 들어야 될, 그 문이 있어야 될 예루살렘 자체가 여호와의 날에 저주받아서 문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다윗언약의 성취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예루살렘 성전 자체를 불바다 만들어버리는 그분이 바로 문이 돼요. 이게 에스겔 48장에 나옵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 그분이 문을 닫으면 닫히고 열면 열려요. 이 말은 더이상 하나님의 다윗언약에 관한 모든 내용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오신 그분에게 다 일임해 버렸어요. 왜? 지상에 있는 다윗 후손들, 왕들은 이방화 되었기때문에.
문이 없습니다. 없던 문이 처음으로 생긴 문이 뭐냐?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써 피 흘린 예수님이 빠져나간 그 문이 없던 문인데 생겨버린 다윗의 열쇠가 되는 겁니다. 천국 문이 되는 거예요. 문 자체가 열두지파에요, 이들은 “문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곧 “자기들은 문이 아니고 담장인데 담장 사이의 문은 여기 있습니다. 주님께서 희생양께서 이렇게 빠져나갔습니다.”를 이렇게 소개하는 그 소개기능자가 바로 오늘날 새예루살렘의 열두지파의 배정 배치입니다. 열두 제자의 배치, 열두 사도의 배치,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열두 문입니다. 12-14절에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저희는 문이 아니에요. 주님이 문이십니다. 주님이 피 흘려서 이렇게 갔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증거 하는 용도로
‘여호와 삼마’ 여호와는 여기 있다, 그게 ‘여호와 삼마’ 이게 바로 천국 이 땅에 온 천국 구조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일상생활하면서 우리가 이러한 위치를 배정받은 채로 하나의 천국 문을, “여기 있습니다”, 십자가 천국 문을 소개하는 일상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 수요설교 230222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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