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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선점

아빠와 함께 2023. 2. 20. 10:46

사도가 복음 전한다는 것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거 아니야. 그거 아니었었어. 내가 다 해봤거든! 다 해봤는데 그거 아니야.” 그러면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그러면 뭐야? 그게 아니라면 거짓 없는 믿음은 어떤 게 거짓없는 믿음이야?” 그게 바로 ‘자리 선점’입니다, 자리. 자리가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어떤 특정 자리가 결정하는 겁니다.

이게 같은 성령 받은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 7장 35절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약간 길지만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지금 스데반 집사가 구약을 복음에 의해서 재해석하는데 죽 들어보게 되면 ‘이건 지나간 구닥다리 옛날 역사 이야기 아니냐?’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스데반 집사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떨기나무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한 모세의 방식으로 똑같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마지막에 나타난다, 라고 하나님에 의해서 모세에게 예언된 바 있어요.

민수기 17장에도 나오는데 여기 떨기나무라는 게 뭐냐 하면, 이중적이에요. 그 떨기나무 있던 그 자리에 모세가 거기에 끌려 들어간 겁니다. 빨려 들어간 거예요. 자리가 세냐, 모세의 선택이 강하냐? 모세가 있던 자리가 모세를 옴팍 잡아맨 거예요. 딱 붙잡은 겁니다. 모세는 워터볼 속에 들어간 거예요.

워터볼 알지요? 투명한 유리알이 있어서 그 안에 눈도 막 내리는 그런 것 있지요. 글루건이라고 어떤 소재를 풀로 붙이고 해서 만들 수가 있어요. 투명한 유리에 집어넣고 뒤집으면 위에서 막 쏟아지고 그런 것인데 뭔가 갇힌 모습을 밖에서 투명하게 볼 수 있는 그러한, 작아 보이는데 신기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사로잡힌 바 된 특별한 세계, 옴팍 사로잡힌 세계, 그게 모세입니다. 모세는 이중구조이지요. 중첩된 겁니다.

남들 보기에 “모세, 너 그 안에 왜 들어가 있어?” 하고 싶어도 모세는 철저하게 종속되어서 이것은 그 세계에서 하나님이 만든 절대 믿음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만약에 모세가 거기서 빠져나온다면 다시 옛날처럼 내가 나와 상관있는 존재가 돼요. 내가 날마다 선택해야 살아가는 그런 세계, 주님 안의 그 바깥세계에 놓여 있는 거예요.

지금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그 이야기하고 있어요. 성령에 의해서. 그러면서 사도행전 7장에서 아주 도발적인 표현을 씁니다. 그게 뭐냐? 광야 교회에요, 광야 교회. 구약에는 교회가 없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해서 생기느냐 하면, 교회는 집단화되어야 돼요.

개인이 자기 선택에 의해서 자기의 운명과 숙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것, 자기 선택에 의해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문제잖아요. 그러나 교회는 개인이 결정해서 모인 사람들이 아니고, 본인의 선택을 완전히 배제하고 집단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성령이라는 자리에 옴팍 사로잡힌 자들의 단체, 그걸 교회라 해요.

 

성령 안에서는 나의 모든 바른 선택과 바른 결정을 거짓 믿음이라고 규정하고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이 위치, 성령의 위치, ‘예수 안’의 위치, 위치가 결정합니다. 그 위치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있는 위치고 그게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