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심쩍은 자들은 다 나와! 난데없이 소환당하는 날입니다. 애초에 이름이 잘못되었습니다. 구자근, 얼마나 안 이쁘고 멋대가리 없는 이름인지. 아홉 번에 아흔 번씩이라도 자근자근 씹혀야 한다는 ‘자근’이란걸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그래서 저도 지금은 불만 없지요.
마치 지금 바로 옆에서 강도 높게, 조근조근 말씀하시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광주강의행 소올승용차 안은 그렇게 미심쩍은 얘기들의 힘에 실려서 움직였구나’ 하며 웃음이 나옵니다. 그렇잖아요... 사랑같은 것은 내 영역이 아니니 애초에 모르겠고, 당신들은 어쩌면 그렇게 나와 다른 관점이냐! 그 자체로 짜증과 화냄이 분출되곤 했던 그 에너지. 그건 바로 왜 나를 몰라보냐고? 감히!! 하는 분노의 원천이 아니었을까 하는 거죠. 우리가...
몇 번인가는 서로 언성이 높아지면서 순간 기사의 자율성이 엉뚱한 길로 우리를 몰아세우기도 했어요. 정신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죠. 목포, 우리들 집 쪽이 아니라 무안 국제공항 쪽 대로로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며 가고 있는 거죠. 필사적으로 ‘내 복음’을 주장하는 정신없는 중에도 크고 괜찮은 쪽이 선택되는 거지요. 집 같은 거 필요 없다. 죽더라도 폼새나는 큰길에서 죽을 거다. 본능적인 바램. 아,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믿지 않겠습니다!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겨울강의 내용에 선취당하면서.
그렇게 우당탕탕거리면서 돌아돌아나오면서 드디어 장로님 댁에 도착합니다. 휴~~! 오늘 숙제 드디어 끝이다! 하는 오기사님의 한숨소리를 훔쳐 들으면서 서로가 굿나잇 인사를 나누지요. 매번 신기한 것은 그렇게 싸우면서 왔는데도 어쩌면 헤어지는 인사는 한결같이 침착하고 온유하고 배려가 넘치며 안면가득 자비로운 웃음인지. 변종마귀들의 습성일까요ᆢ
-장로님, 오늘도 김밥 잘 먹었습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피곤하시겠네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웠어요^^
즐거움. 장로님, 저도 참 즐겁고 어김없이 재미있었습니다. 싸워도 재밌고, 그 자리에서 우집사님이 싸오신 군고구마, 오메기떡? 등의 먹거리, 주인 허락없이 냉장고 마구 뒤져서 김치 꺼내먹으며 어쩌면 이렇게 맛있게 담지? 똑같은 재료인데 이렇게 다르냐 주인이 다르면 열매가 다르다... 하는 수다도 재밌고 잠시의 화해 분위기가 좀 지루하다 싶으면 다시 또한번 싸움 현장이 발생하게 되어 또 재밌고... 이 어찌 즐거운 지옥생활이 아닌지요.
-당신들은 우리가 싸우는 것이 농담인 줄 아나? 그렇게 재밌어? 복음은 장난이 아닌 건데, 성도는 경계선에 있는 자들인데 복음 아닌 것은 복음 아니라고 솔직하게 선을 그어줘야지. 무엇이 그렇게도 감출 것이 많아? 착하고 교양떠는 거 그거 복음 아니지. 적당히 이해한다면서 맞춰주고 어울려 놀고 뒤에서 험담이나 하고. 성도는 그거 아니잖아. 성도인 척 할라니까 그렇게 피곤하고 복잡한 거여.
(착한 모습으로 사는 것처럼 쉬운 것이 어디있다고? 선악과 열매 먹고 태어나고 자라서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선악과 체계 안에서 태어난 거 자체가 저주고 죽음이고 복음 아닌 자고 영생과는 영영히 만날 수 없는 위치로 판명난 것인데, 뭘 또다른 기준이 필요할까요. 성도인 척 안 해도 되는 당신은 참 좋겠습니다)
-그렇게 남 이해한다면서 하는 소리들은 복음으로 들리지 않아요. 복음에 이해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역할도 좋고 기능적인 쓰임도 맞고 감사하지만, 상대방 얘기를 듣다보면 분명히 복음 아닌 것이 있고, 속에서 올라오는 자기 생각들이 있을 텐데 왜 그 생각들을 솔직히 말하지 않냐고요! 마치 지당하시다는 태도로 더하기나 하고. 가스라이팅 당한 것처럼. 왜 여기서 하는 이야기 틀리고 저기서 하는 이야기가 틀리냐고요! 복음은 현장을 피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정에서 다 죄인으로 드러나야지...
(맞다 치더라도 강제하시면 안 되지요. 우리는 동사인데... 우리는 고정적이지 않고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다니면서 쓰잘데기 없는 모습으로 살기도 바쁘다고요. 남 쳐다볼 시간도 없다고요. 우리 생각이라는 것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한들 그것이 하나님의 의는 아니잖아요... 라는 생각들이 순간 들어가지만 그 생각도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복음을 끌어다가 변명하는 것도 지루해질 때가 있잖아요)
어느 분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사람 복음 아나요? 그런 물음에 떠듬떠듬 말했습니다. 저는... 사실 그런 용어에 관심이 없더라고요. (그건 좀 심각한데...하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죠) 그저 제 하루하루 일에 푹 매달려서 정신없이 살 뿐인데 어느 때 보면 말씀이라는걸 듣고 있더라, 또 듣고 있더라, 중간에 잠이 깨면 딱히 할 일 없이 뒤척이는 것이 더 힘들어서 또 말씀을 듣고 있더라, 그러다가 참, 딱 맞다. 인간들...! 하고는 격한 동의가 올라오곤 합니다.
힘을 원하고 더 큰 힘 속으로 종속되고 싶어서 스스로 찾아다니고 내가 얼마나 괜찮은 인간인지 전송하기 위해 눈이 빠져라 컴퓨터 앞에 며칠씩 몇 시간씩 앉아서 보고서 쓰고 계획서 작성하고. 모두가 권력을 탐하는 남성뿐인 세계, 그 힘에 종속되어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과정 자체가 모두 남성화된 세계에서 여성은 없다. 그 세계는 구원없는 세계, 진짜가 아니라고 작대기로 탁 그으며 유일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이, 예수 그리스도란다, 그냥 살아도 지옥생활이라는 너무나 맞는 말씀들. 순진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어도 출생 판대기 자체가 선악과 먹은 죄판대기니 그냥 죄의 움직임대로 이끌려서 살아가야 하는 갇혀진 세상인 것. 아, 율법이 없었더라면 어쩔뻔 했지?! 말씀 앞에서 너도 알게 되고 나도 알게 되는, 이 죄의 판에 물려서 서로 속이는 걸 알면서도 또 모르는 척 속아가면서 후패해가는 우리 자신들의 실체에 기가 막혀도 너무 막혀서 누가 성도인지 복음 아는지 모르는지 관심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라는 저의 답변 아닌 답을 띄엄띄엄 말할 뿐이었답니다.
다만 어쩌다가 누군가를 만나게 되어서 얘기 나누다보면 아, 복음이 이런 거로군.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으로 진짜 믿음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을 죽인 십자가 사건 앞에서 너도 까이고 나도 까이는 이야기, 너도 주님 죽이고 싶은 권력에 격한 동의로 살아온 세월이고 나도 그러느라고 무참하게 충돌하며 깨져나간 시간들을 들켜나가는 중이고. 모두 죽은 자, 이미 시체라는 것을 알리시며 그 쓰레기들을 주님이 만드신 새로운 공간에 복속시키는 작업의 재료로 사용하신다니, 악!! 이거는 잠시 기쁨이라고 할까요? 감당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 새벽에 금방 죽어도 괜찮겠다는 시원함으로요. 장로님이 동의하신 구절,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방법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라는 그 말씀에 너무 기뻐서 가슴이 시리다]는 그 표현이 참 시리게 다가옵니다.
복음의 논리는 나를 죽이면서 진행된다... 맞나요?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여러 인간관계에서 (말씀 듣고 있는 내가) 어떻게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자기 ‘의’라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들키고 부서지고 있는지... 저는 그 얘기들이 재밌다는 겁니다. 말씀의 트랙터가 웽웽 지나가면 신사분이신 임 돌멩이가 튀어오를 수도 있고, 오래도록 말씀에 짓이겨진 오 흙덩어리는 너무나 단단해져서 구석에 쪼그려있는 모양새로 나타날 수 있고, 그때그때 색깔 다른 소환장으로 각자 다르게 적용되지 않나요? 물론 1+1+1+1...= 1의 세계에서. 그래서 저는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 속에서 올라오는 장로님의 생각이 그랬기 때문에, 아까도 여전히 그렇게 말씀하신 거잖아요. 주님의 지시로 말씀하신 거 맞지요? 그러면 이제 감사만 하시면 되겠네요.
이런 식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지금 나는 평소처럼 내 생각을 따로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는데 당신들은 왜 가만히 있냐! 복음은 그거 아니다” 그 말은 곧 “당신들은 왜 나처럼 안 하냐, 복음 앞에서 가식적이고 위선적이다!” 이런 식으로 들린다는 거지요. 내 편 안 든다고 불평하시는 것처럼 들릴 때도 있어요. 다른 사람이 안 하고 못하는 것을 당신들이 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것이 개인적인 판단에서 떠난 거라면 어떠한 사건이든 고맙고 감사한 인사로 끝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왜 그 순간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냐는 거지요. 더 솔직히 말하면 그야말로 말씀 앞에서 비겁한 자로, 파렴치한 자로, 더할나위없는 거짓말쟁이로 5분이 멀다하고 발각당하는 자는 '모두 다 나 보다 낫구나'하는 생각이 들겁니다. 10년에 한 번씩 이렇게 발각당하는 자는 가끔씩 이렇게 잘난척을 하게 되지만 말입니다.
물론, 인간이냐? 그렇다면 그 의식은 누구나 죽을 때까지 할 것이지만, 누구나 자기의식이 맞다고 남에게 강제하는 모습을 띠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공동체를 위한 봉사가 아니라 개인의 시선이 작용한 결과가 아니겠는지요. 곧바로 비교, 경쟁구도로 될 수밖에 없고 기분 나쁜 현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곧 선악체계와 맞닿은 것이고 그 뿌리는 마귀라는 것을 곧바로 또 생각하게 됩니다. 입장을 바꿔서 장로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셔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어떤 분에게도 말한 적이 있어요. “누가 지옥을 가든지 보태주신 것도 없잖아요. 냅 두세요! 본인이 너무 착하셔서 문제네ᆢ” 다 서툰 사랑, 어긋난 사랑 노선 자체가 문제이지 우리들의 문제가 아닌 것이 맞지요.
저는 복음을 들을 때 그 장면이 제일 편안하게 다가와요. 인생은 한 편의 연극무대. 연기. 그것도 이미 다 지나간 체험장 돌아보기. 여기저기 감독자만의 지시로 사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재미도 없는 아바타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또 들었지요. 이름 없는 작은 것들이 괜히 저희끼리 몰려다니다가 죽기도 하고 춤도 추고. 물속에서 쫓겨다니는 고래 한 마리가 필사적으로 자기를 죽이려 달려드는 인간 적들이 탄 커다란 배 위로 갑자기 펄쩍 공중으로 치달아오르며 적들을 죽음으로 휘감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때 저는 갑자기 마음속으로 ‘심판이다!’를 외치며 두 손으로 박수를 쳤지요. 미쳤어요. 영화관에서. 60살 아줌마가. 상대방을 죽이고자 자신들이 겹겹이 쳐놓은 동아줄에 의해, 순식간에 한 판 뒤집기 당하며 거꾸로 심판의 고래에 의해서 자신들이 꽁꽁 묶이는 상태가 되었지요. 어찌나 까-끔하게 떨어지는 예상못한 심판인지! 어찌나 시원한지!! 참을 수가 없었죠. 5초요.
그 땅의 생명수의 원천을 몰라보고 인간 자신들의 더 많은 이기를 위하여 빼앗고 파괴하고 죽이려 달려드는 그것들을 폭로시키면서 하늘 보좌에서 떨어지는 천사들의 움직임, 한 판 뒤집기로 나타나는 완성된 심판의 근거까지 가득 담긴 무대. 그곳에서 펼쳐지는 개인적인 기쁨과 절망 착함 정의로움... 그 모든 것들이 다 의미없음을 누가 못 알아들을까요. 그 말씀도 참 좋아합니다. 우리가 처한 형국이 이렇다는 거. 무얼 어떻게 해야되고 책임져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너를 쉬지도 않고 긁어대는 의식들은 선악과의 그림자로 얼룩진 환상의 세계, 평생 가짜들의 행진에 끼어서 허덕거리는 가짜 권세자들의 허울 좋은 파편이니 그렇게 알고 살라는 것’을 알리는, 주님의 피뿌림의 실체를 말씀으로 들이대며 알려주신다는 거. 그것만이 긍휼, 용서이며 사랑이라는 것.
이러나저러나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말을 해도 그 말을 하는 ‘나’라는 인식체계, 내 온 몸에 새겨진 ‘나’의 중요성, ‘나의 선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만 선명하게 부각되니 아예 할 말이 없어지긴 합니다. 다시 충동이 올라오면 그 소임을 다 해내고 있지만요. 몇 년 만에 1:1로 만나게 된 엊그제 어떤 분의 말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저렇게 쑤셔보고 나도 수없이 들통나고, 할 수 없이 내려가보고 다시또 내려가고 내려가봐도 그 밑바닥에는 또다른 ‘나’가 기다리고 있어서... 아예 이제는 말도 하기 싫네요. 그냥...... 그냥 사는 것밖에는 진짜, 할 일이 없더라구요.
-음... 말씀 듣고 복음 들으면서 들어가는 분명한 생각은 하나 있더라고. 죄인의 역할은 그거더라. 어떤 사건을 만났냐? 그럼 꼭 어김없이 수치심을 동반하더라. 내가 나를 방어하고 지키려는 질리도록 듣는 그 말씀이 어쩌면 꼭 맞는지. 몇백 번이라도 새롭게 다가오는지. 돈 사랑하는 것도, 힘든 몸도, 아무리 보아도 정신병자같은 자식 있음도, 있지도 않은 자의식에 시달리는 것도, 이 모든 것의 관찰이 맞는 것처럼 여기는 것까지도 포함하여, 역시 나는 맞는 것이 하나도 없더라. 다 틀리더라. 내가 틀린 모습으로 마침이 되었냐? 딩동댕이더라. 내가 또 실패자의 모습이라고? 그래서 딩동댕이더라.
하여튼 내가 부끄러운 실패자로 마침표가 되었으면 그 의식 자체는 의심의 끝이라는 거. 왜냐면 그거는 내가 원한 것이 절대로 아니어서... 그런데 그 생각에 사로잡힐 때만큼 가벼운 때가 없습니다. 말씀만이 이 흙의 실체를 밝히면서 돌아갈 자리를 바라보게 하니까요.잠시 또 기쁨, 감사라는 눈사태를 맞고 있는 것이죠. 실패자들의 노래. 마지막을 사는 자들의 노래.
복음 안에서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신기한 점이 발견됩니다. 분명히 힘들어 죽겠다고 터져나오는 소리인데 전혀 힘들게 들리지가 않아요. 오히려 재미있고 기쁘다는 소리로 들리니 말입니다. 농담스럽고 시끄러운 분위기 같지만 침묵의 멧세지가 전달될 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픈 것이 맞는데 아파도 진짜 괜찮은 것처럼 평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또 어떤 사람은 부정적이고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감사의 의미가 저런 성격에 실려서 저렇게 표현되고 있구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오늘 수요일 밤 설교를 떠올린다면, 말씀의 완성체에서 오는 응축된 힘의 다양한 적용면이라고 할까요? 통통통 튀는 사슴의 진행 노선이라 할까요? 말씀이 지나가는 자리, 그 공간에서는 반드시 말씀 작용의 효과가 어떤 식으로든 발생한다는 것도 신기하지요. 각자의 맡은 바 역할과 그 기능속에서 말씀이 스스로 자기자리를 깔면서 지나갑니다. 그냥 죽죽 함께 가는 길입니다.
우리들의 인생, 복음에 처한 환경이라는 것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줄창 내 맘에 안드는 요소들에 말려서 엎치락뒤치락 하는 동안에도 내 일은 감히 내 일이 아니라는 증거를 5분이 멀다하고 매일 쑤셔댄다는 말씀의 효과를 톡톡히 맛보는 그 재미요. 내가 준비하지 않은 깜깜한 밤이 매일 우리들 위로 내려앉는 것. 입 쳐닫고 조용히 잠자는 것. 그 사이사이로 밀치고 밀치며 자기 의를 지켜내고자 부단히도 애쓰는 모든 향연들에 취해서 살아도 우리랑은 아무 상관도 없이 진행해나가시는 주님의 일이, 그 완성된 공간 안에서 언뜻언뜻 비춰주시는 서광이 유일한 현실이라는 통보. 저 높은 안목, 사슴의 통통거리는 공간은 이미 다 이루신 십자가로 완성된 세계.
그 소식 받아볼 때 일순간 모든 싸움들이 무의미하게 다가오는 재미. 그 재미를 맛볼수록 우리들의 어떤 싸움도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아, 이래서 우리는 아니구나, 인간은 아니구나. 죄인의 괴수라는 의미가 너무나 친숙해지도록, 주님의 죽으심 앞에서 모두가 헛짓으로 드러나고 바로 그 짝꿍을 찾으러 갑자기 쳐들어오시는 딱 맞는 사건들만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 기분 좋은 확신으로 오랜만에 열리는 지역강의, 금요일 밤 울산강의를 기다립니다. 말씀조차도 지나간 것은 말고 새로운 것을 달라는 꼴입니다. 이미 내린 눈은 왠지 자극적이지 않아요. 눈사태마저도 새로움을 원하는 죄인의 수평선에서 갑작스레 공중으로 치달아오르는 고래 심판이라도 실컷 받으며 사각형으로 넓혀진 은혜의 단비, 이미 완성되어 다 끝난 말씀의 완성체 집단에 묶여서 함께 행렬하는 그 재미에 실려서 갑니다. 부시럭부시럭 매일이 수련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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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님, 다음 수련회를 이렇게도 빨리, 특이하게 singularity
간절하게 광고하는 글은 처음입니다~*
댓글
이근호
‘나는∼이다’가 성립되지 않도록 복음은 모든 것을 무화(無化) 시킵니다. 피부 껍질은 그대로인데 자신의 내부는 죽처럼 물컹해져 풀어지게 됩니다. 바깥에는 고체이지만 내부는 액체입니다. 이는 다시는 ‘나는 ∼이다’가 성립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차갑고 날카로운 외부 시선이라는 칼날에는 액체가 딱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살아남는 방식입니다.
임청일
감사하고 고맙습니다.꼭 차속같은 느낌입니다. 싸우면서 꺠달으면서 기뻐하면서 또 멋적음을 감추면서 나눴던 대화들. 그리고 신기하게도 집에 닿기전에 주님 주시는 해석사건(?)까지도 누리는 짧지않은 왕복여행! 같이 목포에서 살아가는게 이목사님 말씀하시는 "함께"속의 누림같아 행복합니다.
■글을 쓴건 교묘한 내 자랑이었는데 어떻게 강제소환 당하는 일이 벌어진건가? 말씀 홀로,말씀대로 이루어가시는 현실속에서 "나는 ~이다"가 성립되지 않도록 무화시키시는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2/2 1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