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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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2023. 1. 28. 13:45

요한복음1강-접점

핵심구절

■요한복음 10장 20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여기서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들’ 이들이 누구냐 하는 거예요. 그들의 생각이 일치되었다는 거죠. 그들은 굉장히 양식이 있고 상식적이고 서로가 납득이 되는 사람들이에요.

■요한복음 19장 15절, “없이 하소서” 예수님을 재판할 때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었어요. 이 사람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할 때 여기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없애버리세요. 저 존재를 없애버리라고 한 거예요. 누가요? 많은 사람들이. 대다수의 양식 있는 사람들, 배운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없애버리란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거는 거의 오늘날 사람들이 믿는 예수님은 가짜라는 결론에 도달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 여기게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대처했느냐? “나를 만지지 말라” 너희들이 만질 대상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세 가지를 연결시키면 많은 사람들 그들의 평가에 의하면 예수란 분은 꼭 없애야 될 대상이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만지지 마! 너희들이 어딜 감히 나를 만져.” 이걸 누구에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제자들 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의도적으로 오셔서 의도적으로 인간을 기피하시는 분. 절대로 아무도 나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인간 쪽에선 예수님을 떠밀고 천대하고, 예수님은 이런 결과를 낳는 것을 기대하면서 내가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요한복음 전체가 하나의 해프닝 happening이 되는 거예요. 해프닝이란 말은 뭐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아니네, 이런 뜻이에요. 내 그럴 줄 알았어, 별 일 아니었어,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해프닝을 벌였다면 인간은 그걸 포착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많은’ 이란 숫자에서 많다는 것에서 단독으로 벗어날 수 있는 위인들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가 옳다면 그리고 다수가 옳다면 나도 옳다고 인정해줄 게, 같이 묻어가는 게 인간입니다. 이게 실제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이러한 구절들을 군데군데 집어넣어서 요한복음 자체가 하나의 반복을 해버리면 해프닝의 반복이 되거든요. 쉽게 말해서 교회 와서 기도하면 응답받을 줄 알았다, 라고 해서 교회에 끈질기게 한 오 년 다녔는데 세상살이 바쁘다보니 교회 다녀서 은혜 받았다는 것은 그때 순진무구한 철딱서니 없이 하나님께 뭔가 얻어 챙길 게 있는가 싶어서 가본 거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로 끝났다. 이렇게 하나의 해프닝으로 간주해서 물러서도록 요한복음이 유도하고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말씀 자체가 해프닝으로 계속 반복되게 하시니까요.

하늘과 땅은 끊어졌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단절되어있다 육에서 시도하는 모든 것을 실패로 돌린다. 그런데 육에서 실패한 모든 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소스가 돼요. 재료가 돼요. 실패가 없으면 성령께서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사람들의 많다는 것은 어디서 나왔는가? 아담이 이름을 짓는데 이름의 대상이 뭐냐 하면 있음이에요. 피조물이죠. 개구리, 코끼리, 노루, 사슴, 코스모스 전부 다 돼요. 이들이 있다는 거예요. 아담이 있는 것과 독수리 있는 것과 차이점은 아담이 있을 때 무엇과 함께 있느냐 하면 아담이 이름을 지은 주인이다. 이름을 지었다는 것과 아담이 함께 있고, 독수리나 개구리 이쪽에선 이름을 지음 받은 것과 함께 있는 거예요. 아담이 피조물의 이름을 지음으로서 그 피조물은 아담에게 복속되는 거예요. 이름 지었기 때문에. 이름을 지음 받은 그 개구리는 자기 이름을 준 인간에게 예속되고 지배당하고 명령받는 입장에서 이름을 지음 받은 거예요. 이름을 지음으로서 예속되고 복속된다면 아담의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하나님이 지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에게 자기가 이름 지은 똑같은 방식으로 예속되고 복속되는 거예요. 그 이름이 주어진 운명 밖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지금 태초부터 나온 말씀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의 과실은 따먹지 말라고 이야기했어요. 부정성입니다. 모든 명령 가운데 뭐가 들어 있어요? 이럴 경우엔 허락이 되지만 이럴 경우는 안 됩니다, 라고 한계를 지어주는 거죠. 한계를 지어줘야 지시가 지시 값을 해요. 명령이 명령 값을 한다고요. 그런데 마귀 심정은 뭐냐 하면 ‘감히(dare)’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을 해? 이게 마귀 심정이에요. 내가 하겠다는 데 내 돈을 내가 쓰겠다는 데 네가 감히 어디 여기서 부정성을 가지고 지적 질이야, 이렇게 나오지요. 이게 마귀의 심정입니다. 로봇 안에다 아예 마귀 엔진을 장착시켜버려요. 두뇌와 심장에다 장착하면 껍데기는 인간인데 속에는 마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악마는 하나님의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저 선악과 따먹으라 했다면 악마는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따먹지 마, 이랬을 거예요. 왜냐? 하나님의 지시 안에 들어가 버리면 악마의 독자적인 자기 것이 없어요.

인간은 무로 돌아갈 수 없다. 이게 인간에게 가장 골칫거리에요. 인간은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돌아가게 해주셔야 돼요. 언제? 인간이 범죄 했을 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할 경우에만 원래 자리로 돌아가요. 악마가 인간을 유혹을 할 때는 하나님 제치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하나님의 지시가 따먹지 말라에요. 따먹지 말라가 여기서는 따먹어도 된다고 새로 구분 짓는 겁니다.

말로 하니까 어려워서 제가 답답해서 그림으로 그리겠어요. 원이 있는데 원에 어떤 선이 오니까 이걸 수학에선 접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중간에 통과하는 것을 할선이라 하는데 할선이란 말은 안 쓰기 때문에 지우겠습니다. 그냥 접선이에요. 이거는 접점이 두 개 있고, 이거는 한 개 있지요. 이건 두 개 있고 이건 한 개 있고, 그런 겁니다. 지금 요한복음에서는 분명히 인간이 자기가 존재한다, 있다는 거예요. 아까 있다는 건 알지요. 태초에 말씀이 있으니까 있는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있으니까 피조세계가 있는 거예요. 있는 것을 요한복음은 뭐냐 하면 접점이 안 된다 했지요. 접점이 안 되는 식으로 와버렸다는 것은 끊어버리는 거예요. 끊어버리게 되면 조각조각 나겠지요. 조각조각 나면 인간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원래 뭐로 돌아갔다? 아예 있음이 뭐로 돌아가는 거예요? 아예 없음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요한복음이에요. 쉽게 말해서 진짜 쉽게 말하는 겁니다. 인간은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있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 있지 인간은 없는 거예요.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걸 있다고 하지 말자는 거예요.

우리 있는데 왜 없다 하느냐? 우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들끼리 많은 다수가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없다, 에요. 인간은 있다는 겁니다. 누구 말이 맞아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밟아나가는 겁니다.

밟힐 수 밖엔 없어요.없어지는 방법이 없거든요.내가 스스로 자살해도 안 돼요. 있음을 없애는 방법이 없어요. 괴롭다고 자살한다고 있다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얼마나 요한복음이 지독한지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죽었어? 네가 지금 죽었다고 피했다고 생각해? 내가 죽은 너희들 살려낼 거야.”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무덤에 있는 자들로 다 나오라 해요. 그러니까 무덤에 간 사람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갔다가 러시아 미사일 맞고 산산조각 났어요. 그냥 흙이 됐어요. 흙이 됐는데 주님께서 “어이, 흙 된 상병 나오라.” 흙이 된 상병이 주 앞에 심판 받기 위해서 다시 나와야 돼요. 어쩔수 없어 인간은 나름대로 있는 것을 계속 있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고 스트레스 받고 온갖 노력 다하고 비굴한 짓, 더러운 짓, 아부하는 짓 다하는 거예요. "없는데 너희들 왜 있지?" 인간들은 "주께서 만들지 않았습니까?" "나는 너 같은 인간들 만들지 않았다." 대화가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 네가 있다고 하는 것은 육으로 있는 거야. 내가 만든 것은 영으로 있는 걸 만들었지 육으로 있는 걸 만들지 않았어, "라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밟아나가는 겁니다.

 

온 우주를 제가 원으로 표현했고요. 이 원 안에 작은 원들이 있어요.인간들이 자기만의 고유영역을 갖고 있어요. 갖가지의 연쇄 고리. chain이라 하는데 이렇게 꼬물, 꼬물, 꼬물 있단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이 전체를 잘라버리면 이 작은 원들도 안 자를까요? 자르죠. 칼날처럼 쫙쫙, 그냥 조각조각 나면서 마주침이 있지요. 이 마주침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내가 아무리 해도 우리는 나를 없앨 수 없어요. 원래의 無의 자리에 갈 수 없어요, 이거는 저주입니다.

무와 만나야 돼요. 무와 만나서 태초의 무에서 시작하여 다시 유가 되는 그게 복음이에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의 죽음은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갑자기 태초에 있는 말씀과 연결시켜버립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말씀으로 오셔서 말씀으로 죽으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분만이 창조전의 상태,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서 죄 없던 상태로 다시 유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이라는 거예요.

모든 인간들 생각이 자기 위주에요. 자기 위주란 뭔 뜻입니까? 이건 악마의 심성이에요. 독자적으로 나를 위해서 이 우주가 진화되었다는 거예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합니까? 인간 지가 뭔데? 인간들은 말은 안 하지요. 우리가 신이거든요, 차마 이 악마의 심보는 말을 못해요. 그게 뭐냐? ‘많은’이에요. 모든 인간이 다 거기에 복속돼 있어요. 다 예속돼 있어요. 못 빠져나가요. 뭐 예수를 믿어요. 예수든 하나님이든 자기를 위해서 믿고 있는데.

요한복음 19장 15절에서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할 때 아까 했지요. 없애버리세요. 없애버린다는 그것에 다수가 동의했던 거예요. 반대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어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현장에 있다면 반대하시겠습니까? 반대를 할 수 없어요. 왜 반대할 수 없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의견이란 게 없고 많은 사람들, 다수에 같이 속해 있기 때문에 남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방하면서 마치 내 생각인양 끄집어내는 것이 사회 생활하는 인간의 처세술입니다.

인간은 악마와 결탁해서 범죄 했기 때문에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어요. 처음의 창조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원래 나를 잃어버렸어요. 좋으나 싫으나 누구와 짝짜꿍 될 수밖에 없는가 하면 바로 마귀와 함께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마귀가 만든 예수, 마귀가 만든 삼위일체를 계속 교회에서 그걸 신학이란 이름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전부 다 마귀가 만들어낸 그런 개념들이고 단어들이에요.

 

없는 데다 이름을 지어서 있다고 이야기하는 아이디어를 인간이 갖고 있는 거예요. 있지요. 그럼 여기서 그걸 어떻게 하느냐? 행렬로 만들어요. 행렬로 만들면 아까 원 안에서 이런 게 생겨요. chain이 생겨요. 미생물 실험실에 꼬물꼬물한 그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이렇게 돼 있지요. 이거 김 집사, 최 집사. 어디서 뭘 하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전부 다 꼬물꼬물 자기의 내러티브, 자기의 인생사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행렬을 지으면서 1에서 2에서 3에서 모든 걸 하나의 체인 화시켜요. 연결 시킵니다. 연결시키는 걸 뭐냐? 기억이라 하고 기억을 자아라 하는 거예요. 자아란 없는 거예요. 자아는 없고요 두뇌라는 소프트웨어에요. 늙어가는 죽어가는 몸은 있는데 자아는 없어요. 없는데 나라고 했던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이거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 교재 제목이 뭡니까? [타인의 마을]. 남들이 다가왔을 때 나는 비로소 뭐가 생기느냐? 자아가 아니고 주체가 발생됩니다. subject라 하는데 주체라는 것이 있어요. 주체는 나 혼자 만들어내는 게 아닙니다. 주체를 만드는 방법은 <백설 공주> 동화책에 잘 나와요. 마음씨 나쁜 고약한 후처로 온 왕비가 거울을 보고 한 이야기 있지요. 거울아, 거울아. 자, 거울 안에 누가 있습니까? 본인이 있어요. 본인이 만든 조형물이에요. 내가 나를 아는 방법은 없어요. 없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이, 저 모습이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개인적인 그걸 이미지라 하는데 어려운 말로 하면 상상이라 하는데, 그 개인적인 이미지를 마치 나처럼 그렇게 일단은 간주하고 가보는 거예요. 누구와 대화하느냐? 그 이미지는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그 이미지가 타인으로 바뀌어요. 내가 이렇다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수정해줍니다. 그 수정해주는 대표 격이 누구냐 하면 집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죠. 그냥 얼굴 비친 것은 영상만 비추지요. 내가 마음씨 나쁜지 좋은지 내가 착한지 안 착한지는 누가 결정하느냐? 주위에 있는 사람들 지시와 명령에 의해서 우리는 다듬어지고 있는 거예요. 나는 타인의 사람이 돼요. 영원히 나는 내가 누구냐는 것은 묻히고 마는 겁니다. 인간은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갈 수 없어요. 그럼 아버지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 아버지가 만든 나기 때문에 아버지기 끝까지 책임지라고 해서 아버지 앞에 제사 드리죠. 왜? 나는 아버지 집에 막내아들이기 때문에. 물론 상속도 한 푼 못 받지만. 나는 영원히 아버지 품을 못 벗어나는 거예요.

요한복음2강-최소값

■타인이 다가올 때 어떻게 다가오느냐 하면 ‘요구’로 다가와요. 말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뭔가를 요구한다는 뜻이에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도 따먹지 않는 요구를 하시는 거예요. 악마가 인간과 손잡고 탈피하자, 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악마는 나이고 싶어 했어요. 악마는 모든 시작을 나가 시작점이 되고 싶어 한 거예요. 모든 의미의 시작을 나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그래서 세상이 무에서 유가 없는 데서 있게 되었다는 말을 내가 하고 싶어 한 거예요. 그렇게 이름 짓고 내가 하고 싶고 그걸 숫자로 매기고 하는 그 가운데서 이 세상은 없는 데서 있었다. 심지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어려운데 무에서 유로 됐는데 그 가운데 나도 포함된다고 이야기를 해버려요. 이걸 가지고 자기 언급이라 해요. 자기가 자기한테 언급하는 거예요. 나도 없는 데서 생겼다, 라는 말은 내가 출발점이 되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그러면 내가 출발점 하는 게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냐? 타인의 요구를 차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반박하고 돼 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당신이 어떤 요구를 하던 판정은 내가 들을 만하면 듣고, 안 그러면 안 듣겠다고 내가 내칠 수 있는 최종적인 근거를 나에게 두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그래요.

 

예수님이 무슨 말을 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싫어했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오늘날은 교회에서 무슨 소리를 하기에 사람들이 예수를 안 싫어하고 있습니까? 그걸 알아야 돼요. 요한복음 15장 24절 이렇게 돼 있어요.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다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쉽게 말해서 “내가 너희 앞에 타자로 등장하지 않았으면 너희들은 죄가 없다.” 죄가 없지요. 왜? 자기들끼리 무슨 죄가 됩니까. 자기들끼리 여호와를 섬기고 자기들끼리 이 땅은 봐라. 창세기에 아무것도 없는 데서 창조했다. 자기들끼리 말하는 데 그게 뭐가 죄가 돼요. 오히려 정답이지요.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다. 이게 땡이에요, 이게 정답 아닌 진리 아닌 거예요? 저희들끼린 진리가 되는 거예요. 왜? 그 당시는 유대인이니까. 어릴 때부터 성경공부를 달달 시키는 데니까.

지금 예수님이 어디한테 왔습니까? 그 당시에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열심이었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 하는 자들 속에 들어간 겁니다. 예수님께서 열세 번째 사도로서 사도 바울을 찾아갈 때 사도가 예수님 만나기 위해서 간절히 골방기도하고 있었어요? 아니지요. 하나님께 충성된 예라 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활동했던 그때 예수님이 찾아갔던 겁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사울은 의인 중의 의인이고 그야말로 율법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에요. 유대인들에게 주님이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자체적으로 의의 체제가 완벽하게 갖춰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딱 오는 순간 바로 요한복음 15장 이런 말씀 했다는 것은 주님이 오심으로써 숨겨져 있는 독생자가 옴으로써 비로소 그들이 독생자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탄로난 거죠.접점이 없었다!.. 하나님 나라도 모르고 갈 수도 없으면서 간다고 우겼던 겁니다.그 사실을 그들에게 버림받음으로서 확정시킨 거예요. 예수님께서 증명해내신 겁니다. 너희들은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그 인간 종류가 아니라는, 다시 말해서 너희는 인간 아니다. 하나님이 생각한 그 인간 아니에요. 인간들은 타인을 통해서 자기를 구성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만든 타인이란 것은 또래거든요. 그렇고 그런 자들의 집단입니다. 어린아이가 크면서 점점 육체는 작고 머리는 커지면서 주위의 요구사항이 많아요. 부모님 또는 랍비들, 스승, 교회 목사, 신부 전부 다 요구사항들이 많아요. 그걸 부응함으로써 남들이 너는 이러이러하다 그들이 요구하는 내가 되는 것, 이걸 주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주체는 남들이 나에게 나를 인정해주는 그 사람이 떠나버리면 주체도 같이 죽어버려요. 인간의 고통은 주체 때문에 아파요. 남들이 나를 무시할까봐, 남들이 나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을까봐, 남들이 내 집안과 나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모독할까봐 그래서 그들은 무서워하는 겁니다.

■그 무서운 일을 누가 하느냐? 우리 주님이 하신 거예요. 그 뿌리조차 부정해버립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버지를 거론해요. 너희 아비는 악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이 말은 악마의 확장이 너희들이란 뜻이죠. 여기 요한복음 8장 43절,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요한복음 7장 20절에 보면,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주님의 답변은 이겁니다. 너희들은 그렇게 극구 부정해도 너희들은 나를 죽이게 된다는 거예요. 왜? 내가 그렇게 만들고야 마니까. 이래도 안 죽여? 이러면, 이래도 안 죽여? 그럼 이래도 안 죽일 거야? 인간은 몰라요. 없이 하소서, 없애버리세요, 라는 그 씨앗이 자기 안에 깊숙이 감췄다는 사실을 본인이 몰라요.

악마가 노골적으로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따먹으라고 한 그 씨앗이 인간 속에 들어있단 말이죠. 주께선 접근해서 그걸 캐내는 거예요.인간의 주체성은 커가면서 어떤 현상을 나타내느냐? 이게 닮아요. 닮아간다는 말은 자기가 익히 닮아갔던 그것들이 축적이 되게 되면 같이 닮아갔던 외에 그걸 기준으로 해서 닮았다, 안 닮았다 차이가 나게 마련이에요. 차이가 나면서 여기서 노선이 발생됩니다.

나는 내가 원한 것은 평소에 나한테 집약시켰던 정보들의 축적에 의해서 나는 나 닮은 것을 찾아가는 데 너는 나와 닮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비켜지나가자. 이게 인류역사입니다. 인류역사 진리란 것, 선이란 없어요. 자기 챙기는 것밖에 없어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자기가 행동한다 하지요. 아닙니다. 너 누구한테 배웠어, 누구한테 배워서 그런 행동이 나와? 그 안에 다 축적된 게 있어요.

■자, 그러면 연쇄, 꼬불꼬불한 회충, 십이지장충 이것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이런 그래프 3차 방정식에 있어서 이런 걸 최소값이라 해요. 최소값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인간이 어떤 시작을 하게 되면 행렬을 이뤄요. 아까 이야기한 체인이죠. 그러면 최솟값은 시작점이 되겠지요. 인간들이 악마의 심정으로 뭔가 시작할 때는 맨 처음부터 연결시켜서 지금 자기의 있음을 정당화합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는 쭉 이어왔다. 이걸 충실성이라 해요. 충실성을 영어로 하면 faith믿음이에요. 무엇의 믿음, 누구에 대한 믿음이요? 나의 지나간 과거에 대한 나의 충성심이에요. 이게 뭐라고요, 두 자로? 믿음. 믿씁니까, 하는 그 믿음이에요. 그 어떤 경우라도 나는 나한테 충성할 만한 대상이란 뜻이에요. 내가 나한테 지금도 껌뻑 넘어갈 수 있는 대상이라는 거예요. 이걸 누가 건드려. 이게 사도행전에 나옵니까, 예레미야에 나옵니까, 어디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그래서 거짓이죠. 그건 사기죠. 사기란 그런 일이 없다는 게 아니라, 꼬물꼬물 여기서 발전해서 이것 정당하니까 이것 정당하고, 이것 정당하니까 이것 정당하고, 이것 정당하니까 이것 정당하고 이게 뭐냐? 자기 의 아닙니까. 이게 유대인 아닙니까. 바리새인들이거든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이 꼬물꼬물 중간을 작살 내버리는 거예요. 그걸 접붙임이라 합니다. 내가 중간에 부셔지고 거기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라는 거기에다 접붙임이 될 때에 나는 나의 열매가 아니라 주님의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 이걸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겁니다. 나의 역사, 내 가정의 역사 살아온 모든 것 다 무산되지요.

어쨌든 간에 제가 이야기하는 건 지금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최소값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수학으로 이야기하면 최소값이 1, 2, 3, 4, 5, 6 이걸 행렬 또는 정렬한다. 1, 2, 3, 4, 5, 6, 7, 8 정렬하는 거예요. 많죠. 많은 이걸 다수의 복합물이라 해요. 이것은 집합론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이 세상은 다수의 복합물로 돼 있다. 그중에서 하나 뽑아서 체인시키면 주체가 된다는 거예요. 그게 맞는 말이에요? 다시 체인을 만들 때 이걸 연결시키는 거예요. 연결시키면 처음 자리 있겠지요. 1, 2, 3, 4, 5, 6, 7 이게 양의 자연수라 합니다. 그런데 음의 자연수에서는 최소 점이 없어요. 그냥 -1, -2 이렇게 돼요. 뭔가 시작을 음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고 양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어디서 연결 된지 모르고 -1, -2, -3 이렇게 된다 말이죠. 최소값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뭐로 오시느냐 하면 최소값으로 오신 거예요. 최소값으로 오셔서 뭘 하느냐? 여기서 체인을 만들어버립니다. 예수님께 달라붙은 새로운 체인, 연쇄連鎖, 한자로 鎖(쇠사슬 쇄)라고 하는 거예요. 최소값을 만들어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5장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뭐예요? 가지. 체인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인간세상 다수가 벌써 그 작업을 그들이 가짜든 뭐든 이미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닮은 사람들은 쩍쩍 지남철처럼 달라붙고, 이건 내 스타일 아닌데, 이러면 어떻게 됩니까? 다른 쪽은 아주 배타시해버리죠. 내치는 거예요. 내치는 이유가 뭡니까? 나와 닮지 않았다는 거예요. 닮았다는 말은 똑같다는 말 아닙니다. 테트리스 게임이 이런 게 있어요. 닮았다는 말은 이것과 똑같은 크기로 닮은 게 아니고 이건 동치고, 이렇게 딱 맞아서 나의 미흡함을 채워줄 수 있는 이걸 닮았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연결 방법의 단점이 뭐냐 하면 절대로 내 것은 건드리지 말고, 일단 맞춰보는 거예요. 맞춰보다 안 맞으면 던지면 되거든요. 더 붙들다가는 내 것 까이기 때문에. 나의 충실성이라니까요. 믿씁니다, 에요. 인간은 자기종교의 신봉자에요. 틈이 없어요, 여기는. 그러면 왜 교회에서 예수님이 엉터리 예수냐? 이것 보충해주는 예수님으로 믿는 거예요. 지가 조작해 가는 거예요. 주여, 주와 함께 임마누엘, 온갖 것 동원, 아는 단어 다 동원해요. 임마누엘, 평화가 있을지어다, 온갖 것 하지만 결국은 내 것은 안 건드리기, 건드리지 말기에요. 나를 없애지 말기. 50년 교회 다니면서 이것 하는 거예요.

■최소값, 상당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최소값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등장하지요. 내가 생각한 최소값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뭇매 맞고 채찍 맞아서 그리고 하나님이 전혀 도와주지 않는 상태에서 허망하게 죽는 것을 나의 시작점으로 나는 절대로 용납 못한다. 나는 당신처럼 되기 싫어. 이게 왜 그러냐? 나는 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나 뒤에 아무것도 없어. 출발점이 나에요. 그러니까 복음 전한다는 많은 목사들 들어보면 지 출발점은 안 건드리고 계속 거기다가 언약사, 뭐 온갖 것 멋있어 보이는 것 있잖아요. 개혁신학, 구속사 등 온갖 것 다 집어넣어서 계속 축대 쌓듯이 쌓아 올라가는 거예요. 자기 연쇄 고리를 만들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해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 이유가 바로 이런 겁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유대인들도 그래 왔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도 아까 했지만 태초에 말씀이 계속 있어오면서 어딜 경유하느냐? 이스라엘을 경유하면서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찾아오게 됩니다. 태초의 있음이 유대인에게 계속 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있음과 유대민족의 있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이걸 뭐 했느냐 하면 파괴시켜 왔습니다. 끊임없이 그걸 부수고 계속해서 이걸 파괴시켜 왔고 했지요.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전체가 말씀의 작용이거든요. 이사야 60장 19절에서 20절에 보면,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

이 말이 뭐냐 하면 지금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네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다 가상이다, 허상이다, 다 헛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으로선 용납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직접 자기가 경험하고 있으니까 자기 역사가 지금까지 꾸준하게 분명히 다 느껴온 거예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사람은 없다, 이 말 믿을 수 있습니까? 못 믿지요. 사람이 여기 있는데 왜 사람이 없다고 하느냐. 그 사람이 어떤 개념인지 관계없이 나는 있잖아,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있느냐, 아니면 네가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대비시켜서. 체인이 있는데 인간이 악마가 만든 체인과 주님이 출발점이 최소값이 되어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주님의 노선과 이걸 이스라엘은 대조해 왔던 거예요. 그래서 이쪽이 빛이라면 인간은 뭐가 되겠습니까? 반대로 이게 어두움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 세계에선 그게 아니고 어둡다는 것은 해가 구름에 가릴 때 어둡고, 밤 되면 어둡다는 거예요. 이걸 인간들은 계속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밤이 어둡다, 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내가 제거됩니까? 아니죠. “엄마, 밤에는 해가 없어요. 별이 있지만 별로 밝지 않아. 그래서 어두움 맞지요, 내 말 틀리지 않고 맞지요?” 엄마가 말하기를, “그래 밤이니까 어두운 거야. 하지만 그런 말한다고 해서 네가 어둡다는 것은 밝혀내지 못해.” 그동안 유대인들은 뭐하고 온 거예요? 도대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긴 겁니까?

여기서 또 진짜 중요하고 어려운 것 할 시점이 왔습니다. 여기 꼬불꼬불한 연쇄체인을 유대인들은 하나로 통합시키려했어요. 통합시키는 방법은 뭐냐? 그들의 시작점이 있을 거란 말이죠. 시작점은 사람들마다 다 다르니까 출발점이 다 다르니까 숫자로 달리 해보겠어요. 이건 1, 2, 3, 4, 5, 6, 7, 8, 9라고 합시다.

1로 시작했는데 1에는 set, 세트는 우리말로 하면 집합이란 뜻입니다. 요소는 elements 이걸 요소 또는 원소라 해요. 세트 안에 원소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1 세트 안에 {1, 3, 7, 8, 9} 있고, 2 안에는 2부터 시작했으니까 {2, 7, 14, 28} 아무거나 하는 거예요. 이렇게 됐다 이 말이죠. 7 안에 7부터 {7, 8, 12} 있다 하고, 시간관계상 다 못하고 이렇게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기서 인간들에게 뭘 뽑아내느냐 하면 최솟값을 뽑아내는 거예요. 최솟값을 따로 뽑아내면 {1, 2, 7, } 되겠지요. 최솟값으로 뽑아낸 이 세트가 뭐냐 하면 인간세계 전부를 한꺼번에 표현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선택입니다. 유대인들이 선택받았지요. 인간들이 생각한 선택은 이미 있다는 것 중에서 각각 처음부터 그들의 근원, 그들의 시발점부터 있는 것만 뽑아서 일단 샘플로 뽑아내면 샘플이 모아놓았던 정보가 눈에 보이는 나머지 결과물의 전부를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게 선택이에요. 한 번 선택받았으니까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들의 마지막 목표는 천국이다. 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그게 유대인의 선택논리입니다. 지금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선택논리입니다.

자, 방금 제가 이야기한 선택논리에서 뭐가 문제입니까? 이 선택논리에 주님께서 어떻게 왔느냐 하면 자신을 뭐로 봤습니까? 자신의 최소값이 인간세계에서 추방했기에 없어요. 최솟값이 없어지는 거예요. 최소값이 없으니까 인간세계는 꼬물꼬물 올챙이처럼 왜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계속해서 다수가 다수로 인간 숫자가 많아지니까 최소값만 챙기면,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미쳤다 했지요. 예수님께선 이걸 의식하고 새로이 최소값을 해버렸습니다. 최소값을 정해버렸어요. 그러면 이 최소값이 어떻게 됩니까? 전부 다 계시로 절단해버리죠. 절단하면 무엇과 무엇의 싸움입니까? 우리 족보, 나의 원천과 주님의 십자가의 싸움이 돼버리죠. 너의 최소값은 무의미하다. 너는 시작도 모르면서 시작이라고 우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이렇게 합니다. 어떤 소경이 지나가니까 제자들이 최소값을 이야기해요. 저 사람이 소경인데 자기가 최소값입니까, 자기 부모입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때 주님께서 하는 말이 자기의 죄도 아니고 자기 부모의 죄도 아니고 너희들이 바로 소경인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최소값이 너희들 앞에 지금 들어오고 있다는 거예요.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못 보는 쟤가 보는 자를 소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유일한 최소값 되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소경이란 걸 깨우치는 시작점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믿음이죠. 이 다수를 이렇게 드디어 하나가 선택됐지요. 선택된 민족이 믿는 신이 구약에서 무슨 신이라 합니까?

요한복음은 지금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온 거예요. 이스라엘을 젖히고 설명하면 안 돼요. 여호와를 섬기죠. 그러니까 그들은 여호와를 안다가 돼요. 여호와를 알기 때문에 여호와로부터 뭐가 왔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선택했다. 선택한 결과가 우리의 숫자가 무수하게 선택된 민족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게 유대인들의 신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일거에 다 날아가요. 그러면 주님의 선택은 뭐냐? 우리가 생각한 주님의 선택은 주께서 시작한 많은 주의 택한 백성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바로 주께서 택한 진짜 예수님의 십자가로 제시한 주의 백성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지요. 그렇게 되면 이 사고방식과 똑같은 사고방식 돼요. 그게 선택이 아니라 선택된 족족 이 무한한 선택을 작살내는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최소값이 있어요.

아까 꼬물꼬물 나오는 걸 끊으면서 새롭게 등장, 톡 튀어나오는 낯선 존재. 그래서 이걸 끊어냄으로써 계속 새롭게 나오는 거예요. y=x 좌표에서 접선이 왔을 때 두 접점이 나올 때 이쪽 요소, 원래 있던 인간들의 연쇄에 속하면서도 주님의 계시로 인하여 원초적인 처음으로 돌아간 이게 나왔을 때 이게 바로 선택입니다. 선택의 특징은 뭐냐? 이렇게 하면 됩니다. 두 번째 시간에 중요한 대목에 왔습니다. 나는 나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내가 나의 최소값이 되지 않겠습니다. 무슨 이런 현상이 다 있어요.

나는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나를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않다, 부정이죠. 부정 들어오지요. 부정 들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처음의 인간 자리가 맞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부정이죠. 이 부정이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부정을 나의 요소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너 이것 하지 말라 했는데 했잖아.” 그걸 받아들인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주님이 지적하는 부정성이 이젠 나의 주체를 이룬 타자의 요구가 되었습니다. “주여, 마음껏 나에게 주님의 부정성을 쏘세요.”

그래서 나의 선택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지요. 주님의 최소값이 들어온 거예요. 그럼 나는 날마다 주님의 최소값만 남기기 위해서 내가 있는 인생사의 포물선이 날마다 새로운 충돌의 점들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 뜻이라면 오늘 말고 내일도 여러분 살아 계셔서 식당에서 밥 먹어야 돼요. 내가 몰라요. 주께서 나의 연쇄에 어떻게 나를 잘라낼지 그거는 주님 소관이지 내 소관 아니거든요.

그러나 아는 것은 뭐냐? 부정성이에요. 나에 대한 부정성. 그럼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느냐? 유대인들은 정신병자들이죠.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부정성으로 오잖아요. ~하지 마라가 많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부정성이니까 이걸 하나님의 시선, 눈동자로 그려보겠습니다. 눈동자로 부정성으로 유대인에게 쏜다고요. 너 이것 하지 마.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지시는 뭐라고요? 모든 지시는 요구사항이에요. 하지 마, 하지 마 이렇게 하니까 이게 너무너무 무섭다는 걸 알고 유대인들이 여기서 마중을 나가요. 이게 스크린인데 스크린까지만 신의 지시를 받고 여기서 마중을 나간다고요. 마중을 나가서 내 쪽에서 이 스크린으로 다가가요. 다가가게 되면 “주님, 이것 하라 해서 했고요, 이것 하지 마라 해서 안 했어요.” 이 스크린에 자신의 신과 하나될 만한 어떤 상황을 조작해버리는 겁니다.

이걸 히스테리라 해요. 너무 무서워서 내가 감당이 안 되니까 감당할 수준 내에서 내 쪽에서 처리하는 데 나의 의와 나의 정당성 있잖아요. 내 최소값 그게 유효하게 정당하게 남을 범위 내에서 적당하게 버무려버리죠. 내가 이건 못 지켰지만 이건 지켰잖아. 그걸로 그만 퉁 칩시다,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주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중간에 이런 망상을 만들어놓고 망상이 주의 뜻이라고 일방적으로 해줘야 자기가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숨 쉬어서 뭐 할 건데? 가짜지요.

이렇게 하는 것, 이렇게 할 수 있고 나머지는 다음에 하고 이건 열심히 하고, 이건 안 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의 조작된 신을 하는 이 신학이 바로 개혁주의신학이에요. 어디서 들어나 봤습니까? 한국교회의 모든 장로, 침례, 감리, 성결 다 포함돼 있는 신학, 개혁주의신학이 이겁니다. 전부 히스테리 환자들이에요.

깨놓고 죄인이라 하면 간단한 문제를 죄인이긴 하지만 교회 봉사는 많이 했잖아요. 어렵게 굶어가면서 선교는 했잖아요. 지난 번 선교회비 못 낸 것 두 달치 다 냈잖아요. 지금 하나님도 나한테 닦달내지 마세요. 아이 셋 키우는 게 장난이 아닙니다. 이런 것. 이만한 시간 내서 교회 가주는 것도 남들 못하는 겁니다, 주여. 사람의 사정을 감안해야지 자꾸 몰아세우면 자빠져요. 자빠지면 주님 좋겠습니까?

지금 누굴 상대로 딜을 하고 있어요? 지금 무슨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이게 유대인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많이 지켜서 너도 나도 천국 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세칙들을 마련해준 그 친절한 아저씨들이 누구냐? 바리새인들이에요. 그들이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보우하사 이스라엘을 이어가는 것. 기원전 168년 10월 24일인가 그때 그들은 마카비 전쟁에서 이겨냈거든요. 헬라에서 이겨냈으니까 하누카, 수전절이라 해서 그게 요한복음 7장에 나옵니다.

그 기념하는 날. 우리는 봐라. 믿으면 되잖아. 믿으니까 승리를 줬잖아. 천주교에서 보는 책, 마카비 상하가 그거에요. 이기면 뭐합니까? 십자가 귀신 들렸다 하는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찬란한 민족적인 중흥과 역사를 이루면 뭐합니까? 메시아 왔을 때 어떻게 했어요? 미쳤다, 귀신 들렸다, 그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없이 하소서. 거기에 대한 주님의 대처는 만지지 말라. 네가 만질 위인이 아니야.

꿈속이라도 율법 위에 목 내밀면 목 날아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여러분 자아가 주체가 생기거든 율법 쪽으로 목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목 날아가게. 원래 내가 아닌 그것으로 데려가시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없이 하는 것, 우리를 없애고 그리고 없는 그 자리에 주님만 턱하니 차지하시는 것, 그게 바로 원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요한복음3강-부정성

어제 했던 강의를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에 대한 긍정 외곽에 부정성이 감싸져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자체가 부정성이에요. 부정성 안에서 인간이 태어났던 겁니다. 물론 이 부정성의 핵심은 나중에 하나님 자신이 품게 될 부정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름을 묻는다 부른다는 것은 카운트하는 헤아리는 겁니다. 자기언급, 스스로 자기를 유일적 존재로 만드는 거예요. 내가 나를 더 단단하게 확고하게 고정시키는 거예요.헤아리면 내 영역 안에 내가 담을 수가 있어요.내 것을 만드는 겁니다.외부에서 이름을 불러서 나의 긍정을 더욱더 긍정답게 하기 위해서 소스들을 계속 자료들을 끌어 모으는 겁니다. 그 영역, 바구니를 set라 하고 담겨 있는 요소를 element, 바구니(set) 표시는 수학에서 { } 이렇게 표시한다 했지요. 바구니에 담으면 내가 너를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이름 부른 자에 와서 나에게 하나의 뭐가 되느냐 하면 의미가 되는 겁니다. 내가 이름을 부를 때 의미가 된다는 말은 이름을 불러준 나는 멀쩡하고, 이름 부름의 대상이 된 너는 멀쩡한 나를 더욱더 멀쩡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로서 내 안에 들어오라는 이야기에요.

피조물은 먼저 말하는 게 아니에요. 피조물은 먼저 질문을 던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질문은 창조자가 해야 돼요. 왜냐하면 모세라는 이름조차도 하나님이 지었기 때문에 주객이 바뀌면 안 되거든요. 주인이, 종의 위상이, 바뀌면 안 됩니다. 주님이 아담아 어디 있느냐, 불러줘야 돼요. 요한복음에서 내가 주님을 찾아가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한 자로 우리말로 해서 ‘육’이라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절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라고 돼 있어요. 인간을 부정 속에 가둬버리는 겁니다. 네가 구원 받기를 원하지만 나는 너의 의도를 들어줄 의향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너의 뜻을 알아. 네가 필요한 존재를 소스로 삼아서 나라는 긍정을 더욱더 긍정으로 확보하는 것이 네 뜻인 줄 아는데 그 뜻을 알기 때문에 나는 네 뜻을 들어줄 용의가 없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뭐예요? 인간이 긍정 되면 하나님은 부정이 되고, 하나님이 부정이 될 경우에만 인간은 비로소 긍정이 되는데 인간이 생각하는 긍정(긍정1) 말고, 거기서 헤어져야 이별해야 돼요. 나의 긍정에서 내가 다른 긍정(긍정2)으로 떨어져 나와야 돼요.

■구원 받기를 원한다는 말은 자기언급이거든요. 자기언급이라 하는 것은 나에게 내가 지시하고 명령하고 여기서 압력을 행사하는 것, 압력, 힘이죠. 힘(power)을 행사하는 것이 자기언급이에요. 그럴 때 나오는게 뭐냐? 자기 유일성,자기긍정입니다. 아무리 교회 가도 자기긍정에서 빠져나올 재주가 없어요. 아무리 복음 듣고 수련회 참석해도 자기긍정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자기언급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아요. 보통 자기한테 힘준다고 이야기하지요.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질문을 누가 누구한테 던지지요? 내가 나한테 던지지요. 내가 나한테 물어본 거예요. 앞에 있는 '나’는 지금 개체의 몸의 나라면 두번째 '나'는 확산된 더 커져버린 나에요. 나가 우리고 우리가 나에요(나=우리=나). 인간세계에서는. 이게 우리라는 것이 집단적 개체라고 해요. 그게 민족일 수 있고, 국가일 수 있고. 집단적 개체를 어디서 양성하느냐 하면 가정에서 양성해요. 가족 연대감이에요. ‘혈통’이죠. 인간은 혈통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누가 알아요? 하나님이 뻔히 아시는 겁니다.

최소점은 어디부터 시작합니까? 나의 긍정이죠. 나의 긍정으로부터 해서 인생살이를 형성하는 데 뭘 끄집어냅니까? 내가 원했던 나를 더욱더 단단하게 긍정에다 긍정을 추가할 수 있는 요소들을 사건들을 모아서 인생살이 형성하는 데 이 끝에는 뭐가 되겠어요? 점점점이 되겠지요. 무한이 되게 돼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수학의 집합론에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없는 데서 있는 것이 만들어졌다(무→유). 그럼 이걸 누가 이야기하느냐? 없는 데서 있는 것이 만들어졌다는 답변을 제시한 제3의 자리가 있어요. 제3의 자리가 질문자입니다. 누구겠어요? 바로 나지요. 내가 무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는 것은 무가 하나의 의미 요소로서 들어왔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이 무라는 것은 수학에서 공백으로 표시하는 데∅ 공백을 내가 바구니에 담았다{∅}. 이름 지었으니까. 내 바구니에 담아버리면 이걸 {∅}=1이라 해요. 1의 시작이 무에요. 그러면 유는 뭐냐? 이 바구니에 담은 것을{∅} 한 번 더 무라는 것에 의미를 줘서 유를 끄집어냈다 할 때 이게 set에요. 우리말로 바구니고. 세트를 하나 더 치면{{∅}} 이게 2가 되는 거예요. 3은 하나 더 들어가는 거죠. 이름을 지음으로서 자기 존재감을 더욱더 확보하는 것이 카운트거든요. 그럼 개수가 몇 개냐 하면 이게 두 개지요. 인간에서는 개수를 통해서 크기를 비교합니다. 처음에는 개수부터 출발하지요. 그다음에 개수를 정렬해요. 개수를 cardinal기수라 하고, 정렬을 ordinal서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우주 속에 기수로 서수로 돼 있을 때 여기에 뭐냐? chain이 형성되지요. "꼬물꼬물 뒷다리 나왔다". 개구리들이 나와요. 개구리들이 나왔는데 이쪽 개구리를 a라 하고 이쪽을 b라고 한다면 개구리로 있다가 서로 보충할 마음이 있으면 이 개구리들이 합체가 돼버려요. 사건 되겠지요. 요소들을 가지고 집합이 {1} {2} {3} 그다음에 {1, 2} {1, 3} {2, 3} {1, 2, 3} 공집합∅ 하나 이렇게 되지요. 나한테는 이런 사건으로 분산될 수 있어요. 문제는 이 자체 전체 집합으로 나눠버리면 1, 2, 3보다 더 크지요. 부분집합이 큰 집보다 크다는 이걸 power set라 해서 멱집합이라 합니다. 부분집합을 집합 화시킨 게 멱집합. 내가 현재 나라고 하는 것보다 더 큰 게 나를 촉구하고 독촉하고 있다는, 나는 무한에 대해서 미쳐버리는 거예요. 내가 여기서 만족한다? 이건 어림도 없는 이야기에요. 내 안에 있는 내 촉수 감당이 안 돼요. 갈 데까지 가볼까~ 이거에요. <강남스타일>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예요. 어디까지 가는지. 긍정, 나는 아직 배고프다. 갈 데까지 가보는 거예요. 왜? 세상은 무한하니까.그러니까 체인이 있는데 이 체인이 뭘 친다? 가지를 이 우주에서는 이게 무한이거든요. 무한한 뭐가 기다린다? 사건들이 기다리는 거예요. 무한한 사건을 이걸 다수라 하는데 제가 어제 요한복음 할 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뭐라 했습니까? 미친 자라 했지요. 그 다수에요.

교회 다니나 절에 가나 교회 안 가고 절도 안 가고 세상에 사나 인간은 이런 점에서 똑같습니다. 누구나 똑같아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요. 이방민족도 똑같아요. 자기 안에 무한이란 게 들어와서 자기에게 욕망을 자극시키는 거예요. 자극시키면 이 정도로 만족한다는 게 성립이 안 돼요.

■이 긍정을 뭐로 둘러싼다 했습니까? 부정성으로 둘러버리죠. 그러면 아까 구원이란 뭐라 했습니까? 긍정에서 어떤 긍정이다? 지금 이 긍정₁ 말고 이별하고 새로운 긍정₂로 빠져나와야 되는데 인간은 자기 내부적인 부정성밖엔 추구할 수 없어요. <그리스도를 본받아> <내려놓음>, <더 내려놓음> 희생, 봉사, 선교, 낮춤, 낮아짐 이런 것들 계속 이런 것을 통해서 자기긍정을 스스로 통제하려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나는 부족하다." 이걸 누가복음 18장에서 누가 하고 있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하고 있어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구제하고 십일조 하고 이렇게 하는 것, 그 바리새인들의 부정성은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 부정성입니까? 이렇게 나는 마음을 낮췄다. 마음을 낮추는 목적이 뭐냐? 결국 나를 긍정하기 위한 하나의 스킬, 재능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나를 긍정하기 위해서. 그러면 주님의 부정성이 왔을 때 자기 백성을 찾으러 왔을 때 앞에 뭐가 가로막고 있겠습니까? 욕망을 자제해서 끊어버리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자기 낮춤프로젝트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것과 주님의 부정성이 정면으로 충돌하겠지요. 그게 요한복음이에요. 육에서 영이 되고자 얼마나 시도하는지 몰라요. 나름대로 육과 영의 개념을 따로 마련한 겁니다. 그게 육이 되던 영이 되던 그게 바로 사람의 뜻에서 나온 거예요.

■요한복음 1장과 2장과 3장에서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먼저 보내셨는데 그 세례요한이 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내가 하는 어떤 일도 그분 앞에서는 뭘 했다, 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너 세례를 왜 주느냐, 라고 할 때 내가 세례 주는 이유는 내 세례는 이렇다 이렇게 설명하는 게 아니고 세례? 나 세례 아닌데? 부정으로 이야기해야 돼요.

1장 25절에 보면, “네가 뭔데 세례 줘. 네가 엘리야야? 네가 선지자야? 네가 제사장이야 뭐야?” 그렇게 하니까 세례요한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나 ~아니요, 나 ~아니요, 나 ~아니요”로 답변해요. 부정성의 아이템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부정성은 나의 부정성과는 족히 비교 안 된다. 더 큰 부정성이 온다. 주의 방법은 그들을 어떻게 하느냐? 자기 무한 요소에 의해서 스스로 폭발하게 만들어버려요. 폭발하도록 유도하죠. 하나님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나는 나"에요. "나는 나"라는 말은 이 세상에 스스로 나를 지칭할 수 있는 유일자는 누구밖에 없다? 하나님밖에 없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만 존재란 말을 붙일 수 있다. 하나님만 제대로 있음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만 있으면 다른 존재는 어떻게 됩니까? 마땅히 이 있음이란 개념에 부합되지 못하기 때문에 없음이 돼야 돼요. 하나님 긍정되면 우리는 마땅히 부정돼야 되고, 이 부정된 것을 동의하고 찬동하고 감사하게 되면 존재에서 온 힘에 의해서 그렇게 되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가 긍정₂가 되는 겁니다.

그게 세례요한이 보여주는 “나 아니요, 나 아닙니다.” “너 뭐 했잖아.” “내가 뭐 했는데?” “니 세례 줬잖아.” “이건 세례가 아니지.” 나는 물로써 세례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31절에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 주기 때문에 난 물로 주는 거다. 따라서 물과 성령이 이게 비교 게임이 되냐. 비유할 건더기가 되냐? 이건 비교 안 되지요. 물에 들어가세요, 나오세요. 이것과 성령으로 세례 주는 것과그게 어떻게 비교가 되냐. 족히 비교되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너희들이 만만해 보이는 세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것, 물속에 들어갔다 물세례 받는 것, 그런 인간의 한계를 내가 보여준다. 그게 세례요한의 역할입니다. "그분은 흥해야 되고 나는 망해야 된다, " 그 앞에 하나 넣으면 "나는 마땅히 쇠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 "이렇게 되겠지요. “내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이, 내 존재가 있다고 하는 것이 없음으로 넘어가는 그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무대장치 세트 바꿀 때 막간에 조용필 콘서트를 하는데 조용팔을 먼저 올려 보내요. 나훈아 콘서트 하는데 너훈아를 먼저 올려 보내요. 그것 무슨 효과 있습니까? 쟤 아니잖아, 라는 것을 먼저 전제로 맛보기로 보임으로서 역시 진짜는 다르구나. 임영웅이 나오기 전에 김영웅이 보내는 거예요. 야아, 진짜 다르네. 그 다름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부정을 하나님께서 긍정적 사용을 함으로써 새로운 긍정을 맞이하게 하신다 이 말이에요.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보면 분명히 이렇게 돼 있어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죠. 그러면 성도는 뭘 해야 됩니까? 돈을 사랑하고 무엇이 일만 악의 뿌린지, 난 이만까지 삼만까지 나가. 무엇이 뿌리가 되는지를 스스로 주님의 부정성, 이 세상에서 바깥에 있는 부정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여기다 심어놓은 거예요, 미리. 돈을 사랑하면 안 된다. 그럼 난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지, 이렇게 하면 주께서 불러서, “니 돈에 대해서 알아?” 개코도 돈에 대해서 모르면서 사랑하니 마니 왜 네 선에서 결정해?경험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너를 찔렀는지.“ 그래서 실제로 주님 시키는 대로 돈을 사랑해보니까 전혀 안 찔리지요. 그건 잘린 자에요. 비로소 내가 말씀과 무관하다는 것이 들통 나는 순간입니다. 들통 나기 싫어서 미리 또 돈을 사랑 안 한다고 해봤자 나의 돈 좋아하는 촉수는 나를 가만두질 않아요.

■사람에서 출발하고 사람에서 미리 예단하고 예상하고 기대하는 모든 것, 그중에서 제일 큰 문제가 사람은 자기를 선택한다는 거예요. 어떻게 선택하느냐? “꼭 저를 천국에 넣어주세요.” 이거는 횡포입니다. 그런데 이런 횡포를 안 부릴 인간이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부려봐. 부려보고 실제로 네 촉수와 네 체인, 이 땅에서 무한 쪽으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다 접촉해보는 거예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칠십 년 동안 산 사람은 그만큼 많이 받았고, 팔십 년 산 사람은 그만큼 세상의 무한을 보다 많이 경험한 사람이에요. 많이 깨진 사람이에요. 경험해봐라. 요한복음 1장 13절이 옳다는 것을 네가 알게 될 것이다. 천국 넣어 달라고 넣어주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 그게 진짜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요한복음 자체가 철저하게 부정성이라는 콘택트렌즈를 넣어버려요. 우리 눈에다가.세상을 부정성으로 보되 너 자체를 부정성으로 보게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소경이 아닌 자에요. 소경이 아닌 자라야 예수님의 활동성만 존재하는 그 세계가 유일한 리얼리티, 유일한 현실세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최소값이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것이 어제 1강, 2강 정리한 거예요. 정리해도 여러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면 여기서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게 중요한 데 요한복음 4장 48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아멘. 하나 더요. 요한복음 12장 37절,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보세요. 예수님의 전략이 이런 거예요. 그들이 원하는 걸 다 줘요. 해주고 그들의 한계를 바닥내게 만드는 거예요. 왜 바닥을 내야 되느냐? 마지막 표적이 남았기 때문에. 그 마지막 표적이 뭐죠? 십자가. 누가 믿어요. 아무도 못 믿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요한복음 12장 38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40절에 보면,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부정성이죠. 아무도 제발 믿지 말라는 거예요. 주의 하소연입니다. “주여, 믿습니다.” “믿지 마.” “주님 따르겠습니다.” “따르지 마.” 그래서 유튜브에 유명한 말 있지요. “찍지 마라.” 몰라요? 아이들 자매가 싸우니까 아빠가 찍으니까 찍지 마라, 하는 게 있어요. 참고로 들으세요. “너 믿지 마. 너희는 그냥 부정성이야.” “그러면 시키는 대로 안 믿겠습니다.” “네가 안 믿을 위인이야?” 우리가 내 안에 돌아오는 무한을 하나의 집합으로 세트로 가둬놓는 작업 있잖아요. 내가 하나의 일자가 된다니까. 나는 나다. 이것을 인간이 포기할 수 없어요. 나는 나다. 하나님만이 신이 되지 말고 우리고 같이 신이 되자 하는 게 마귀의 제안이었고 거기에 합세한 거예요. 최소점을 하나님은 자기로부터 출발했는데 우리의 최소점도 우리로부터 시작하는 게 어떠냐? 그럴 경우에 우리는 더 이상 피조물이란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게 진정한 해방이고 자유다. 이게 마귀의 심정이잖아요.

요한복음4강-육이 되신 영

■인간은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다’입니다. 그냥 해요. 바르게 사는 게 아니고 ‘합니다.’ 이걸 활력이라 하든지 생동력이라 하든지, 이게 자아에요.인간은 그냥 움직이고 생동하고 있어요. 움직이는 것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살아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럼 뭐냐? 죽음이 움직인다고 하는 거예요. 죽음이 움직인다.마귀의 배후성.

인간을 움직이게 하려면 미끼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 미끼가 뭐냐 하면, 입니다. 육의 특징을 언급했는데 육은 내 쪽에서 절대적인 힘 쪽으로 접근해 나가는 거예요. 이게 육의 성향이에요. 육의 경향성, 성향.

■율법을 주신 것은 너 죽었다고 알려주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모세부터 전부 다 "이거 하면 살겠다"는 식으로 그걸 건네받은 거예요.율법 자체가 ‘부정성’에서 유발되었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이거 지키면 복 받는다, 에 신경 써서 이걸 못 지키면 뭐 받는다? 저주받고, 뿐만 아니고 네가 이 말씀대로 못살면 나는 너의 택함을 취소시키겠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생명책의 이름조차도 지워버리겠다는 하나님의 그 엄중한 취지, 네가 이걸 못 지키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다는 말은, 생명책에 있다가 지워져 버리는 샘플로써 너를 사용하겠다는 뜻이에요. 완전한 부정성이 오기 전까지는 그 부정성은 임시적인 부정성, 가짜 부정성, 어설픈 부정성, 대충 부정성, ‘아, 이래서 망하는구나.’ 하는 것을 시범조로 보여주는 그러한 기능으로 이 이스라엘이 작용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모든 개념정리, 개념정리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름 붙이기’에서 나왔지요, 이름 붙이기. 이름 붙이기에서 다수의 사건을 끌어모으면 이게 하나의 개념으로 정리돼요. 개념으로 정리되는데 주님의 ‘최소값’은 뭐냐 하면,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에요. 인간의 이름 붙이기가 실패로 끝나는 그 지점부터 ‘최소값’이 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인간들이 모르니까 주님께서는 개념에다 공격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부정성으로 공격해버리는 거예요. “네가 빛에 대해서 알아? 어둠에 대해서 알아? 구원에 대해서 알아? 세상이 뭔지를 알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할 때 그 세상이라는 개념을 네가 아나?” 그 말이에요. 그러면 인간들은 주섬주섬 “세상이란 우리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이게 세상입니다.” 그건 세상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주님 보기에 그게 세상이 아니지요.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할 때 여기 멸망 나오지요. 심판개념이 나오지요.이 심판개념이 18절 19절에 나오면 완전히 뒤집혀 버립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18절에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벌써 심판을 받았지요.그러면 심판은 뭐냐? 새삼스럽게 심판받는 게 아니고 애초부터 너는 심판받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과거 완료 식으로 확인해주는 관점에서 독생자를 보낸 거예요.세상개념은 주님의 부정성으로 동반해서 새롭게 주어지는 거예요. 부정성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과 인간들이, 이 세상은 메시아를 고대하는 이 현실판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과 세상 개념이 달라요. 요한복음 3장 16절 보세요. 내가 이 땅과, 이 세상을 그다음에 뭡니까? 이처럼 뭐하사? “사랑하사” 이것은 세상 전체, 세상 전체를 사랑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 17장 9절에 보면“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세상 전체는 아니라는 거예요.‘육이란 전체성에 실패한 상태’가 육입니다. 전체성에 실패한 것. 세상을 전체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는 게 육이에요 그러니까 어디로, 하나님께로 간다, 할 때 ‘네가 전체를 알고 네가 지금 방향을 제대로 잡았느냐, 안 잡았느냐?’가 인간은 모호한 거예요.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갈 때까지 가보는 겁니다. ‘살다 보면 뭐 되겠지.’ 내일도 살지 안 살지 어떻게 장담해요?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지금껏 살아왔던 그 체인, 체인의 순간까지 뒤돌아보면서 아는 그 전부가 인간이 아는 거예요.이 우주는 진화되었다고 주장하지요. 진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 거기까지 알기 때문에 진화되었다는 말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인간은 뭔가 바르게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바르다’ 하는 개념은 전체성에 실패하기 때문에 뭐가 바른지 아닌지는 최종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인간은 꾸역꾸역 그냥 해요. 왜 하는데? 몰라. 그냥 몰라요. 그걸 좀 더 분석해 보면 왜 하느냐? 남들이 뭐라 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남들이. 남들이 뭐라 한다고 왜 하느냐? 남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죽은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남들을 의식하는 그것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에요. 존재의 이유. 참 대단한 존재의 이유입니다. 체인이 짧아서 그래요, 체인이 짧아서. 좀 더 길게 가면 아무것도 아닌데 이게 짧아서 아직 그런 사건, 무한한 다수 속에 아직 그런 일을 안 맞닥뜨려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육. 육은 뭐라고 했어요? 전체성에 실패한 상태, 전체성에 실패한 상태에요. 자, 실패했으면……, 아까 했지요, 인간은 움직이는 것이다. 뭐가 움직인다 했습니까? 인간은 죽음을 움직여요. 요한복음의 말씀이 그렇게 만들어요.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 18:9, 32) 너는 절대로 네가 알아서 고침받고 나한테 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네 최소값이 악마기 때문에 그래요. 너 따라오면 어디까지 따라와요? 너 따라오면 누가 딸려 들어옵니까? 악마가, 주께서는 생명 나무를 지키는 게 목적이에요. 인간 지키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은 가차 없이 차버려요. 생명 나무만 지키겠다, 주님만 지키겠다는 게 취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기 언급’이기 때문에. “너는 내 아들이다.”(막 1:11) 요한복음 1장에 그게 나옵니다. 이게 살짝 어려워요. 1장 34절, 주께서 성령을 누구한테 주는가? 성령을 누구한테 줘요? 예수님께 주지요. 줄 때 뭐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은 숨어있겠다는 거예요. 숨어있겠다. 들키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숨어 있겠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신을, 너무나 많은 신을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자기가 최선을, 어떤 선택을 하면서 바르게 산다고 우기잖아요. 전체성을 추구하는 거예요. 전체성을 추구하는데 그 전체성이 어디까지 닿느냐 하면, 신의 지혜까지, 그 전체성을 추구하면서 신의 지혜에까지 approach, 닿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예요. 인간이 그렇게 전체성을 추구하잖아요. 추구하는데 그 가는 방향에 대해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것이 항상 진리+진리+진리+……, 숫자를 카운트하잖아요. 오늘도 바르게 했으니까 내일도 바르게 살기. 이렇게 합치면 뭐가 된다? ‘바르게 살기’가 된다. 이게 인간의 산수에요. 항상 ‘최선의 길 + 최선의 길 = 최선의 길’ 다지고 또 다지고, 다지고 다져서, 이걸 해서 오류 없는 데서 계속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이게 뭐냐? mathematics, 수학입니다. 수학에서 나온 게 뭐냐? 과학이에요. 물리, 과학이에요. 수학에서 나왔어요. 수학 자체가 최소값, 이거 자체가 잘못되게 시작하니까 방향이 신(神)쪽으로 간다, 방향이 신인데 그 신이 어떤 분이냐? 수학에서 말하는 그 신은 뭐냐 하면, 무한한 분이라 하는 거예요, 무한한 분. 거기에 철학자들이 협조를 했어요. 선의 무한, 진리의 무한, 진선미. 아름다움의 무한, 아름다움의 무한이라는 것은 누가 여기에 끼어들었습니까? 예술가들이 여기에 끼어들었어요. 예술가와 윤리와 그리고 진리를 찾는 과학자들, 합쳐서 우리는 다 같이 힘을 합해서 무한한 세계로 달려가자. 그래서 로켓 만들어서 화성에 가자, 이런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면 어떻게 하는가? 여기에 초를 치는 거예요. 지금 인간들의 이 방향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이미 실패한 전체성으로 나아가는 방향입니다. 그러면 실패한 전체성, 전체성을 추구하면서도 이미 실패한 것으로 확정된 존재가 누구지요? 악마지요. 그래서 거꾸로 너의 아비는 악마로부터 너의 최소값이 시작된 거예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악마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악마로부터.

그러면 옳은 방향은 뭐냐? 옳은 방향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분이 옳은 방향을 유일하게 제시하신 분이겠지요. 성령을 주신 분. 그러면 성령을 주셨다는 게 신기한 게 성령은 영이잖아요. 성령으로 왔다면, 영으로 왔다면 인간의 개념에 의하면 영은 보이지 않아야 돼요. 그런데 이것은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에요. 영으로 왔는데 눈에 보여. 사지를 갖고 있고 코와 눈이 있어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보이는 것은 육이고 보이는 것 말고 따로 움직이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을 영이라고 보는 겁니다. 요새 양자물리학이 종교입니다. 육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걸 실험에서 뽑아내서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는 이론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능력까지 접수에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세계, 새로운 종교로 등극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그 종교 알려면 공부 많이 해야 돼요. 수학도 해야 되고, 물리학 공부도 많이 해야 돼요. 그 종교의 교주는 아인슈타인입니다. 실제로 원자폭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걸로 배고프지요. 그래서 만든 게 수소폭탄이에요. 그다음에 그것 가지고도 배고프다고요. 그러면 이제 인공태양 만들지요. 어디까지 가는지는 그것은 인간은 몰라요. 다만 이 방향이 옳다는 것은 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게 되면, 그러면 그들이 예수 믿습니까? 예수 받아들입니까? 예수님은 어떠한 공간을 마련했느냐 하면 너희들이 아무리 접근해도 육이기 때문에 나에게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영으로 오신 분이 뭐가 되었어요? 육이 되고 만 거에요. 육을 떠나서 영으로 간다. 그러니까 인간은 뭐로 되어 있다? ‘육신+영혼’으로 되어 있어서 육신은 죽고 영혼은 어디로 간다? 천국 간다는 이것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개혁주의 신학’이잖아요. 이 개혁주의 신학이 바리새인 신학에서 나온 거잖아요. 구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해석해서 어쨌든 간에 아는 정보 다 끌어모아, 다 끌어모아서 하나님 계신 곳에 같이 합세하겠다는 그 시도.그런데 그 전체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종성에 도달하지 않으면 전체를 보는 눈이 빈약하고 이것은 그 방향이 옳은지도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지요. 확인할 길이 없어요. 잘못되게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럴 필요 없다. 내가 일거에, 한꺼번에 너희들의 실상을 보여주마. 내가 눈에 보이지?” “보입니다.” “내가 바로 영이야.” 이렇게 된 겁니다.

이걸 누가 알아챘겠습니까? 알아챈 사람이 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1장 48절에 보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갑니다. 항상 원칙이 있어요. 예수님은 육이지요. 육인데 영의 요소가 있습니다. 육은 인간 쪽에서 다가가는 것, 그런데 영의 특징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쪽에서 다가오는 게 영이에요. 그래서 성령 받았다는 말은,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몇 초, 몇 분,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누가 다가온다? 아버지 쪽에서, 하나님 쪽에서 계속 다가오는 쪽이 바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다시 자아를 구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 자아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인간은 정신병자인 것을 증명한 사람이 있어요. 닫히지 않는 의식, 닫히지 않는 이 의식을 가지고 세자로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무의식, 닫히지 않는 것, 인간의 의식이 닫혀버리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나’가 돼요. 그런데 인간의 의식이 닫히지 않으면 나는 뭘 요청하는가? 타자를, 남을, 타인을 요청해요. “불렀습니까?” 이런 식으로, “저 찾았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라 하는 것은 항상 뭐가 되느냐 하면, 그 타인 앞에서 다 충족되지 못한 부정성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주체인데요.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라는 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이 길을 갈 때 경찰이 “어이, 당신!” 하고 부를 때 자기 이름이 ‘어이’ 입니까? 아니지요. 그냥 “어이!” 할 때 ‘어이? 나는 어씨가 아닌데’ 하고 그냥 갈 사람이 누가 있어요? 없지요. 경찰 제복 입은 사람이 “당신 잠깐 봅시다.” 할 때 그냥 갈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누가 호명해주는 순간 내가 보이지 않는 권력체제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걸 가지고 주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주체. 예를 들어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점심시간에 놀아요. 도시락 먹고, 책상을 밀기도 하면서 놀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교무실에 있어야 될 담임선생님이 문 스스륵, 열어요. 그냥 여는 것도 아니고 스르륵, 열어요. 스르륵 열고 나타났을 때 애들이 하던 행동 계속 합니까, 갑자기 정숙 됩니까? 정숙 되지요. 본인도 모르게 담임선생님과 종속된 권력 관계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순간입니다. 그게 바로 타인이 먼저 있고 그 타인의 권력 관계에 매여 있는 것을 주체라고 이야기해요, 주체. 주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언제 벗어나느냐? 죽으면 돼요. 이 말은 인간은 죽기 전 까지는 타인을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왜? 나의 의식은 나로 종결되지 않기 때문에. 다 닫히지 않고 끊임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누가 갖고 있는가, 하는데 남이 갖고 있어요, 남이. 남이 갖고 있으니까 이게 닫히면, 닫아 놓으면 안 되지요. 열어제쳐서 ‘나 당신같이 되고 싶습니다.’ 하는 것을 계속해서 염원하는 거예요.

하여튼 인간은 끊임없이 ‘뭐 한다’ 했어요. 하는데 무한히 떠도는 모든 사건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고 계속 쑤셔 넣어요. 방송으로, 유-튜브로 계속 쑤셔 넣는다고요. 그러면 ‘나는 저것 갖고 싶어. 저건 내거, 내거 하고 싶어. 삶의 추진력을 제공합니다. 이 닫히지 않는 것, 닫히지 않는 이것이 우리를 지시합니다.

(무의식, agent) 요구자.

닫히지 않는 것, 그걸 명령자 또는 요구자, 이게 무의식장소, 이 무의식장소에서 뭔가 자꾸 나한테 요구를 해요. 이걸 agent라 합니다. 요구를 하게 되면 여기서 고분고분 따라 해야 되겠지요, 예, 예! 하고. 이걸 수행자라 합니다. (무의식, agent) 요구자(S1) → 수행자(S2)

수행자

이 자리가 우리의 자리입니다, 수행자. 뭔가 타인이 나에게 요구를 하게 되면 수행을 해요. 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결과를 내야되지 않습니까? 결과를 내야 남에게 인정을 받으니까요. “그것도 못하냐?” 아주 듣기 싫지요. “그것도 못하냐? 너 그것 밖에 못 해?” 그러면 갑자기 긍정적인 나의 최소값에 뭐가 스며듭니까? 부정이 스며들기 때문에 내 속의 악마가 가만두지 않아요. 내가 이만큼 값어치 올리려고 애를 썼는데 지금 졸지에 너를 만나서 나는 인간도 아니고, 이것은 내가 용납을 못 하지요. 강렬하게 뭔가 성과, 결과를 내야지요. (무의식, agent) 요구자(S1) → 수행자(S2) → 결과(A)

결과

이 결과를 내는데 이 결과가 요구자에 부응이 될 겁니까, 안됩니까? 결과를 내자마자 이게 미흡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실패지요. (무의식, agent) 요구자(S1) → 수행자(S2) → 결과(A)→실패자($)→ 요구자(S1)→

실패자인데 가만있습니까? 실패자 되었으니까 다시 뭘 찾아요? 요구자에게 찾아가는 것, 완전히 돌고 도는,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이 의식화되고 다시 무의식으로 돌아가고, 돌고 도는 이 회전목마 같은 세계, 이것이 세상입니다.

종교, 기독교, 불교, 다 의미 없어요. 이겁니다. 이게 현실 그대로예요. 이 결과를 내기 위해서 교회에서 기도하고 여러 가지 다 해도 다 코디에 불과하거든요. 피자 위에 있는 코팅에 불과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결국은 이겁니다. 요구하는 거예요. 내 자식만큼은 어떻게 해 달라, 내 아들만큼은, 우리 딸만큼은 40되기 전에 시집가게 해달라 이런 것, 시집가면 애 낳게 해달라, 애 낳으면 내가 안 키우고 시가에서 키우게 하옵소서 이런 것, 이 나이에 나도 좀 쉬렵니다, 이런 것.

이게 뭐냐 하면, 이걸 라캉이라는 사람은 요구자를 S1이라고 하고, 수행자를 S2라고 하고, 결과 이걸 A라 하고, 이 실패한 것은 주체 S에 빗금을 쳐서 $,이렇게 했는데 이게 라캉의 잘못이에요. 빗금을 치지 말고 이렇게 해야 돼요. 완전히 ×를 쳐버려야 돼요.

주님께서 이 육의 세계에서 뺑뺑이 돌도록 만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네가 죽음의 대행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은 영과 합체될 수 없어요. 그래서 아무리 깨닫게 되어도 깨닫지 못해야 돼요. 그걸 받아들여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 아버지께 저주받은 그 저주받음을 이제는 내 의식세계 속에 그걸 받아들여야 돼요. 그게 ‘네가 깨닫지 못하게 함이라’는 그 말씀 자체가 우리의 핵심말씀으로 우리한테 꽂혀야 돼요. 그게 꽂혀야 된다고요. 오뎅꽂이처럼 나의 일생을 꽤뚫어야 돼요.

그러면 세례는 뭐냐? 세례는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통합된 것이 세례에요. 왜? 예수님 자체가 영이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이 바로 영의 세계의 구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게 방해했잖아요. 그러면 주의 방법은 뭐냐? 진짜 나를 알게 하기 위해서는 방해물인 나를 주께서는 성령세례로 제거해버리고, 진짜 피조물이 피조물다운, 창조주를 증거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진짜 피조물의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주께서는 성령세례를 먼저 받으신 겁니다. 성령세례 받고 난 뒤에는 육과는 어떻게 돼요? 완전히 육과는 대화가 통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 나오는데 여기서 그의 반응을 보세요. 48절 “나다나엘이 가로되” 그다음에 나오는 부사 나오지요. 한국말로 뭐라고 되어 있어요? “어떻게?” 예상했다, 안 했다? 예상 못 했어요.

다시 동그라미 안에서 체인을 그려 봅시다. 체인을 그리는데 최소값에서 시작해서 예상하고, 기대하고, 목표하고, 1년 새 계획 세우고, 가계부 쓰고, 이런저런 준비 다 하겠지요. 그런데 ‘어떻게’라는 말은 어떤 경우예요? 자기가 예상했던 여기에 무한에서 이것과 닮을 수 있는, 합치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예상했는데 어떻게 됩니까? ‘WHAT!!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갑자기 어떤 다른 유력한 집과 사돈 맺은 게 아니고 누구하고 사돈 맺은 거예요? 예수님이 여기에 다가온 거예요. 육은 찾아가지만 영은 어떻게 된다? 다가오시는 겁니다. 다가와서 이 전체를 뭐로 만든다? ‘어떻게’ 라는 말을 한 것은 ‘지금까지 내가 예상한 것을 어떻게 일거에 무산시켜주십니까? 어떻게 나로 하여금 내가 생각한 내 인생이 가짜라는 것을 들통 내게 해주십니까?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이때 주인, 주체가 바뀝니다. 나의 주체는 주님이에요. 주님이 주인공이고 나는 주님의 호명자가 돼요.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이게 바뀌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뭐냐 하면, 우발적입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사건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건.

사건의 특징은 뭐냐? 있다가도 사라지는 게 특징이에요. 따라서 사건 받았으니까 이 사건을 받아서 자아로 만들 생각하지 마세요. 이것은 가짜에요. 어제 했잖아요. 여기 이런 연쇄(chain) 있는데 여기에 6. 25때 폭탄 맞았다고 부흥회에 써먹는 사람, 이것은 지금 계속 우려 먹는 거예요. 곰탕 우리듯이 우려먹는 것 이것 하면 안 돼요. 그때는 그때고,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틀리고’ 이런 거예요. 그래서 늘 상 ‘어떻게?’ 또 계속해서 ‘어떻게?’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지만 인간 세상은 계속 부정성이 유발되어야 주님의 긍정이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 이렇게 은혜받아서 감사합니다.’ 이러면 이 감사가 계속 어느 정도 가면서 뭐로, 질적으로 바뀌어요. 이게 주님에게 열리지 않고 닫혀버립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다.’ 해서 갑자기 내가 구원받은 자가 되어버려요. 내가 선택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안 돼요. 선택이라 하는 것은 모든 무한이 끝났을 때 최종적으로 알아가는게 선택이거든요. 무한한 사건, 이 다수의 사건. 그래서 선택이라 하는 것은 그 모든 선택이 다 끊임없이 끝나 봐야 되는데 미리 말씀드리는 결론이 뭐냐? 선택은 주님 자신이 아버지께 선택받는 게 선택의 끝이에요. 그러니까 나를 위한 선택은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주님의 선택을 알리기 위해서 임시방편적으로 우리에게 선택이 제공된 거예요. 마치 세례요한의 기능처럼, 세례요한의 기능처럼!

자, 나다나엘,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하는 거예요. 이 순간, 어제 했던 멘트, 그 문장을 다시 쓰겠습니다. 어제 잘 쓰려고 했는데 잉크가 다 떨어져서 흐리게 써지고 말았는데요. 나는 나를……,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나는 나를 선택하지 않겠다.나는 나에게 자기언급,재귀,언급하지 않겠다,나는 나를 내 요소로 집어넣지 않겠다." 나가 있으면 나를 집합으로 할 때는 내가 등장하거든요. 나에서 나를 언급해서 나를 집합할 때(나 → {나}) 이것을 가지고 뭐냐? 유일자, 독보적인 나가 되는 거예요, 독보적인 나. 그래서 여기 나가 있으니까 숫자로 ‘나1’이 되고, 또 ‘나2’가 되겠지요. 결과적으로 이 ‘나2’는 동일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은 이걸 가지고 쌍둥이라 해요, 쌍둥이. 그래서 인간들의 최종적인 의식은 뭐냐? 내가 나한테 질문해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내가 나한테 질문하고 답변하고. 나 홀로 살기에요. 지리산에 들어가 가지고. 꼭 지리산 들어가야 지리산입니까? 자기 집 방구석에 앉았어도 지리산 아닙니까? 내가 나한테 질문하고 스스로 위로하고, 스스로 격려하고 ‘잘~ 될거야’ 스스로 칭찬하고, 치하하고, 위로하고. 내가 나한테 이야기해요. ‘나 너만 한 친구 없고, 진짜 사랑하는 나는 나야.’라고 하는 것, 이게 바로 내가 나한테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내 충실성, ‘믿습니다’ 하는 것, 이게 인간들의 최종성입니다. 갇혀 있는 구조, 나로 갇혀 있는 구조.

그런데 나다나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갇혀 있는 구조가 완전히 빵꾸난 거지요.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내가 나만 챙긴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것은 외부에서 와서 나의 내부에 들어가는 것, 외부에서, 외재성이라는 어려운 말도 있는데 외부성이 내 내부성에 자리 잡을 때 나는 껍데기가 됩니다. 나는 껍데기가 되는데 무거운 껍데기가 아니라 아주 가벼운 껍데기, 이걸 저는 설교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는 표면,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surface에요. 표면에 지나지 않아요. 표면의 두께는 몇 센티? 몇 밀리? 0밀리. 하나의 표면이니까. 표면이라는 말을 알기 쉽게 하면 하나의 두께 없는 이미지나 형상을 그림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주님의 그림자,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두께를 줄여서 육을 하나의 그림자로 전환 시켜 버려요. 그림자로 전환 시키면……, 예수님께서 육(surface)을 가지고 오셨지만 세례요한한테 물 세례받을 때 성령세례 받으시고 누가 주도적으로 예수님을 행하게 하셨습니까? 성령이지요. 예수님 모델과 똑같은 모델로 주께서는 천국 백성을 만든 것을 가지고 요한복음 1장 12절에 ‘권세’라 했어요, 권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권세는 주님이 갖고 성령세례를 통해서 이 땅에 가져온 거예요. 이 권세 어떻게 얻었느냐? 부정적으로 이야기해요. 이것은 혈통으로 난 것도 아니고, 육으로, 육적으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의 뜻으로 난 것도 아니고, 그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를 숨기는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를 숨기는 자. 본인이 숨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숨겨요. 왜? 육으로 찾아오는 것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창세기 3장 24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쫓았잖아요. “마귀와 함께 살림 잘 살아라. 마귀와 함께 잘 먹고 잘살아라.” 쫓아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마귀를 벗어버리고, 마귀를 떼 놓고 ‘제가 홀로 왔습니다.’가 될 수가 없어요. 인간이 가는 모든 행함 뒤에는 마귀가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마귀가 최소값이니까 따라오게 되어있다고요. 그러니까 인간을 차단한다는 것은, 마귀가 천국에 못 오도록 막는 그런 하나님의 대의, 큰 뜻이 있었던 거예요, 큰 뜻. 하나님 생각은 전체성이에요. “마귀야 오지 말라.” 요한복음 3장 한 번 보겠습니다. 이러다 보면 다 외우는 거예요. 3장 31절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땅에 속한 것을 말하기 때문에 언어로 통하는 개념 형성은 안 됩니다. 말한다는 것은 언어잖아요. 인간의 언어는 땅으로 국한돼요. 하늘까지 확장할 수 있는 의미를 인간이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있지요. 그다음에 요한복음 6장 63절이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한복음 8장 2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어디서 났다? “위에서 났으며”

위에서 났다. 막혀 있다. 닫혀 있다. 믿지 마라. “날 믿을 생각하지 마.” 나를 믿고자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 요한복음 12장에서 읽은 말씀이지요, 38-40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은, ‘너희가 스스로 고쳐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는다.’ 너희는 그냥 어디로 끝나야 된다? 부정성은 부정성으로 마감하는 것이 너희 할 도리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 죄의 수준, 죄의 바닥, 주께서 성령께서 고이 모실 것입니다. 보람상조처럼 가시는 길 잘 모실 거예요. 여러분들의 죄의 세계까지.

그래서 이번에 새 책 나오는데 머리말이 그거예요. 친절, 친절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 그 친절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는 그 친절하신 하나님, 우리를, 나를 없애고 하나의 껍질로만 사용해주시는 것, 내가 너에게 필요한 것은 그림자만 필요하고 그 표피만 필요합니다. “그 안은 내가 채울 게.” 역시 만두는 속 맛이야. 속이 꽉 찬 남자, 하는 것 있지요. 속이 꽉 찬 남자. 자, 나다나엘은 속을 뭘 로 채웁니까? 주의 일로 꽉 채워요. 나다나엘은 껍데기고 ‘야, 나는 구원 받았다.’ 그런 인간 사용 안 합니다. 껍질만 사용해요. 나다나엘은 껍데기 층위로, 바깥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에요. 성령, 영인데 뭐로 보여준다? 남들 보기에 육으로, 철저하게 육으로만 보여야 돼요. 따라서 철저하게 육의 모습으로만 다뤄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비 같은 것 뭐 그런 것 없어요. 예수님은 밥 안 잡숴도 배부르고 이런 것 없습니다. 철저하게 육이어야 돼요. 예수님은 잠도 안 주무시고……, 아니에요. 꼭 주무셔야 돼요. 예수님 감기걸렸다. 판콜A 들어가야 됩니다. 왜냐? 엄마가 마리아니까, 육이니까요. 철저하게 육이어야 돼요. 그러니까 어딜 봐서 영이냐? 티나지 않아야 돼요. 어딜 봐서?

 

그러니까 영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계속 영의 것을 가지고 도입한다는 특징이 있어요. 갑자기 뭐 벌벌 떨고 진동이 오면서 진도 3.5 지진이 일어난 듯이 벌벌 떨면서 쭈여, 쭈여, 하고요. 갑자기 이상한 소리 내면서 믿씁니다, 믿씁니다, 하면서 변신을 시도하는 것,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요, 그렇게 스스로 자기에게 미쳐버릴까요? 그게 스크린에 대한 자기 공여, 자기 연출이에요. 자기발악입니다. 그 자기발악을 보면서 ‘바로 저 체인이, 저게 우리의 진짜 내 모습이었다.’라고 과거시제로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5강-사건과 설명

■끊어버리고 잇는 것. 끊어버려야 이어짐이 있거든요. 끊어버릴 때 사건으로 끊어버립니다. 사건으로 끊어버리는데 인간의 체인을 다 끊어버려요. 다 끊어버리고 잇는 거지요. 바로 인간의 긍정을 하나의 부정이 포위해서 여기서 공격을 해버립니다. 이게 뭐냐? ‘로고스의 공격’, 로고스라는 것은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오는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는데 함께 계신 하나님은 부정성을 안고 담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을 분이기 때문에. 태초부터, 창세 전부터 감추어진 비밀이에요. 십자가 사건이 나중에 일어난 불상사가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된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십자가 사건을 창세 전부터 감춰진 비밀이라고 해요, 비밀. 선악과나무 심어두고, 마귀 등장하고, 인간을 꾀고, 하는 그 모든 사건들이 태초에 숨겨진 그 사건을 들춰내기 위해서 일어났던 하나의 보조적인 환경이지요. 끊어내는 것은, 사건들이 요한복음 11장까지 죽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왜 12장부터 20장까지는 사건이 포함되지 않느냐? 이것은 더 이상 끊어낼 것은 다 끊어내고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주님이 주님을 끊어내는 것, 주님의 십자가 죽음, 자기 죽음이지요, 주님의 자기 죽음, 자기 죽음이 12장부터 20장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거기에 참여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의 단독죽음이기 때문에 어설프게 거기에 동참하는 이것은 안 돼요. 밀어냅니다. 베드로가 죽겠다, 할 때 “내가 죽는데도 가겠습니다.” 할 때 “오지 마! 이것은 나만 죽는 거야.” 네가 죽는 게 아니에요. 주님 자신만 죽어서 창세 전 비밀을 보여주는 거예요. 긍정 속에서 주님의 자신의 죽음을 여기에 심어버립니다. 그러면 인간이 무(無)에서 유(有)가 되었다, 하는 이것이 거꾸로 유에서, 있음에서 무로 가버리지요. 그러면 ‘유’도 날아가고 ‘무’도 날아가고, 이 세상 인간들이 생각했던 ‘무’, 없음도 없음이 아니고, 인간이 ‘있다’ 존재하는 그것도 존재가 아니라,모든 것이 주님의 있음과 없음과 그리고 있음(있음→없음→있음), 그것만 남아 있는 그 세계가 유일한 현실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세계일 뿐이지요. 나머지는 주님의 보조적인 것이고.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뭐냐? 끊어버리고, 끊어버려서 인간으로서의 주의 일을 차단시키고 인간의 모든 것을 부정시키는 그것, 그다음에 우리가 궁금한 것은 뭐냐? 잇는 거예요. 자, 이 모든 것이 무산되었는데 어떻게 이어서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이것이 뭐냐 하면, 이게 설명이에요. 설명인데 여러분이 익히 아는 개념은 뭐냐 하면, 해석, 주님의 사건에 대한 자기 해석.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는 주님의 설명사건의 일부로서 개입되는 것이 성도에요. 성도는 일부로서 가담이 되면서 이 끊어버리는 사건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한 설명사건도 계속 같이 동반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이런 일을 한 이것은 복음이 전파하는 곳에서 항상 있을 것이다(마 26:13). 마리아가 자기의 향수병을 던질 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일도 항상 같이 증거된다는 겁니다. 그 설명, 해석의 내용은 뭐냐? 이것은 시작과 끝을 체인으로 거기다가 담아버리는 거예요. 시작과 끝을 체인으로 담아버리는 것. 사건은 하나 터졌는데 이걸 인간이 설명할 길이 없네요. 그럴 때 설명, 이 사건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 추가가 되어버리면 이 안에는 시작과 끝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진리가 주님의 설명에 의해서 다 드러나는 겁니다. 내가 시작한 것은 내가 끝낸다는 것, 주님 자신의 체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시작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시작점이지요. 그리고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의 말씀 “다 이루었다.” 최종점, 시작점과 최종점은 주님만 독점하고 있어요. 주님만 독점한 그 내용,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설명을 하고 이 설명을 현실화시킴으로써 이 설명 안에 들어온 사람은 비로소 주님이 체인 안에 참여한 자가 되어서 영생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세계로 이끌 때에 그러면 이것은 무엇과 대비가 되느냐 하면, 인간들이 벌이는 사건과 인간의 자기설명과 비교가 되는 거예요.

어느 날 딸아이와 함께 옛날 할머니가 살던 집에 가보니까 거기 오래된 시계가 있었어요. 딸이 어머니에게 묻지요. “이 시계가 무슨 시계입니까?” 자, 시계가 있다. 존재하는 사건이지요. 인간은 그 사건에 대해서 뭘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거기에 대해서 “왜 여기 있습니까?” 그 설명을 궁금해 하는 거예요. 그 설명이 궁금해야 미흡한 현실이 보충이 되니까요. 그래서 “여기 웬 낡은 시계가 있습니까?” 하니까 부모가 이야기했겠지요. 그래서 만든 노래가 뭐냐 하면, <할아버지 낡은 시계>에요

사건에 대해서 설명을 붙일 때 납득이 되는 겁니다. ‘아, 할아버지와 나는 같은 시대적, 시간적 공간을 이어 오는구나.’ 인간들이 그렇게 아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물으면 거기에 설명을 하는 겁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트로트 경연에 어떤 사람이 노래 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저를 가장 사랑해주셨던 아버지를 위하여 이 노래를 바칩니다.” 하고 노래를 불러요.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이 사건이 되느냐 하면, 나의 존재가 사건이 되지요. 나의 존재가 사건이 되고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자기 체인에 최소점이 누굽니까? 사랑하는 아버지가 최소점이 되는 거예요. 지금 인간들은 전부 이런 식으로 꼬불꼬불, 체인(chain) 또 나오지요, 인간은 각자 이런 식으로 꼬불꼬불,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요 체인 앞에 뭔가 무한한 가능성, 희망, 이런 것을 보지만 뭘 모르느냐 하면, 시작과 끝, 감추어진 시작과 감추어진 끝, 전체를 한꺼번에 볼 줄을 몰라요, 한꺼번에. 한꺼번에 볼 줄을 모르니까 이런 할아버지 시계, 아버지의 강, 이런 사건과 설명을 하는 사람들이 요한복음을 보게 된다면 요한복음을 어떻게 해석하겠어요?

가나안 혼인 잔치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야~, 예수님이 자기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물을 포도주로 바꿔줬구나. 주여, 제가 예수를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처럼 희망적이고 남한테 참 결혼식 잘했다고 인정받는 그런 환경이 지속되게 하옵소서.’ 자, 이렇게 넘어가고, 이게 설명이 된 거예요. 자기가 부정성으로 끊어진 것은 모르고 끊어짐이 있고 난 뒤에 이어짐이 있는데 자기는 안 끊어진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이어지려고 시도한 겁니다. 그런 식으로 요한복음 해석이 되어 왔었습니다. 요한복음 해석이.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사마리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찾아오셔서 목마르지 않는 샘이 되게 하셨구나. 주께서 저에게도 주시면 저도 목마르지 않는 성령의 삶이 되어서 죽도록 메시아만 증거하겠습니다.’ 땡, 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꼬불꼬불, 이 자체가 이게 바로 ‘부정성’ 완전히 이게 지렁이 아닙니까, 지렁이, 완전히 생물실험실의 곰팡이나 이런 것을 시료로 해서 병균 채취하는 작은 시료 판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 전체가 부정이에요. 이렇게 하지 말라고 준 책이 요한복음이에요. 그렇게 해석하지 말라는 거예요.

■끊어짐이 있어야 돼요, 끊어짐. 끊어짐이 있는데 그 끊어짐에 대해서 제가 제일 첫 시간에 이야기한 것을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 원에 뭐가 온다 했어요? 원에 어떤 선이 주어지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접선이지요. 접선, 원, 원이니까 이것은 갇혀 있으니 유한(有限)이지요. 유한은 무엇과 접선해야 된다? 제대도 된 무한과 접점, 접선을 이뤄야 돼요. 접선을 이뤄야 되는데 그 접선이 미리 들어와 버리면 이것은 이 통과 지점이 두 지점이 되겠지요. 그런데 소나기처럼 계속 오게 되면 모조리 쪼개지겠지요. 이 접선의 정체가 뭐냐?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메시아가 죽음을 품고 오신 거예요. 예수님은 인간입장에서 부정성이니까 죽음을 품고, 껴안고 들어왔다 이 말이에요. 들어오니까 이 안의 세계는 뭡니까? 자기 체인을 가지고 전부 다 살려고 하는 거예요. 살려고 하니까 요한복음 4장을 주든, 5장을 주든, 율법을 주든 전부 다 어디에 활용하려고 합니까? 내가 여기서 내 인생의 의미를 찾고 앞으로 더 살아보겠다고 하는 그쪽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그런 식으로 자기가 껴안게 되는 거예요. 늙어 죽어가는 내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껴안으면 나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 안 하는 주석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다 그렇지요. 그래서 이게 엉터리인 거예요.

■주님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죽음이 살아 있지요.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죽음의 동질성이에요. 예수님의 죽음과 동일한 죽음, 이것이 시작이고 끝이다, 그 말이에요. 이 땅에서 보여주는 시작과 끝이에요. ‘사망에서 생명’이라 할 때 생명이라는 개념은, 창세기 3장 24절에서 인간에게는 바깥의 개념이에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바깥의 개념이에요. 낯선 개념이고 이건 동질성이 아니고 이 생명은 이질성이에요. 동질성은 죽음밖에 없어요. 이 땅에서. 이 땅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있기 때문에 들어오신 분도 죽음, 거기에 살고 있는 우리도 죽음, 죽음이라는 동질성, 그것도 율법으로 저주받는 동질성 외에는 이 세상에 어떤 동질성이 없어요. 그러나 여기서 주께서 죽으시면서 설명을 해나가면서 시작과 끝, 끝 지점에 ‘다 이루었다’는 그 끝 지점에 의해서 비로소 이 접점, 지점에서 뭐가 발생 되는가? 여기서 생명이 이어지는 겁니다. 용접할 때처럼 완전히 뭐가 튀어요? 불꽃이 막 튀지요. 생명이 튀는 거예요. 생명이 튀면서 이것은 ‘내 생명은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고 사건에 해당’되는 겁니다. 여러분, 아주 고급스런 단어를 배웠어요. 존재의 반대가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사건. 존재는 쥘 수 있고, 품고 있고, 끌어갈 수 있지만 사건은 어떤 누구도 소유화시킬 수 없는 게 사건입니다. 우발적이니까,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거니까 사건은 내가 이것을 집합화 시킬 수가 없어요. 내 것으로, 나의 부분집합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사건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니까. 내 존재의 주인공은 나지만 사건의 주인공은 ‘나’가 아니에요. 사건을 유발하신 분이 주인공이에요.

그래서 사건이 주어지는데 이게 뭐냐하면, 사건 뒤에 주어진 설명 로고스, 설명의 말씀, 로고스는 말씀입니다, 설명의 말씀이 요한복음 2장부터 11장까지 사건 플러스, 그다음 뭡니까? 설명이 덧붙여서(사건+설명) 한 장 한 장이 넘어간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2장부터 해서 저녁 먹을 때까지 11장까지 끝내야지요. 자, 2장부터 봅시다. 인간은 어떻게 제거해야 돼요. 주님의 사건은, 인간은 살고자 하기 때문에 주님의 사건은 살고자 하는 인간을 제거해 버리는 겁니다.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가나 혼인 잔치에 엄마가 예수님 보고 예수여,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이야기 했지요. 여기서 예수님이 어머니보고 뭐라고 호칭합니까? (냉정한 어투로)“여자여!” 다시 말해서 지금 어머니께서 나에게 기대하는 호칭, 어머니 체인에서 나를 보는 것과 내 체인에서 보는 것, 이게 다른 거예요. 여자여, 라는 것은 마리아를 현재에 위치하게끔 마리아가 포함되어 있는 마리아와 그 관계자들, 이 사람들은 뭐냐 하면, 혼인 잔치를 주최하는 주최측이지요. 마리아의 요구가 아니라 이 사람들의 요구를 예수님에게 요청했을 때에는 예수님께서는 ‘보자~! 어머니, 잠깐 그 뒤 좀 봅시다. 어머니 말고 그 관계자들이 들이밀고 있구나.’ 물론 예수님하고 마리아 사이는 부모자식간이 맞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몰고 온 그 배치구조, 배치환경은 예수님하고 관계가 없어야 돼요. 관계가 없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도와줘 버리면……, 이 조직, 아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했지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되는 이것은 혈통으로 안 되지요. 혈통으로 안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혈통으로 들이밀고 있는 겁니다. 누가? 마리아가. 혈통으로나 육으로 안되지요. 마리아가 그 육으로 밀어붙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요구조건이 있어요. 그게 사람의 뜻이지요. 안 돼요. 사람의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그것은 주님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하나의 부분집합으로, 포함이 되어야 돼요. 하나의 요소로서 포함이 되어야 돼요. 주님의 요소로서 체인을 담기 위해서 그런 사건들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 그 주도권이 마리아 및 그 배후세력, 그 세력이 요청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거절하는 방법은 어머니여, 가 아니라 여자여, 일반적인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면 이쪽의 요구조건이 뭐냐? 자기들끼리의 육적인 뭐가 되겠어요? 육적인 동질성. 예수님은 호칭을 통해서 뭡니까, 예수님은 뭘 보여줍니까? 이질성. 그 동질성과 이질성을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는 뭐로 규정을 하느냐 하면, 시간으로 규정을 합니다.

지금 이 인간들, 마리아 및 인간들 구조에서는 뭘 모르냐 하면, 최종성을 몰라요. 미래를 모르는 거예요, 미래를.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예수님과 연결되어있는 ‘다 이루었다’의 최종성에 대해서 이들은 무지한 거예요. 이들은 미지의 세계를 점선으로 남겨둔 거예요. 점선으로 남겨두고 지금 이 체인에 당장 뭐가 떨어졌어요? 포도주가 떨어져서 혼인 잔치가 끝장, 막장으로 끝나게 될 판이라 이 말이지요. ‘왜 준비를 제대로 안 했어? 이래가지고 손님 대접 제대로 하겠어?’라는 비난이 막 쏟아질 것 같은 이러한 그들만의, 인간들의 시선과 그들에게 인정받아야 될 것을 요구받고 있는 인간들의 혈육적 세상입니다. 그들은 뭐냐? 최종성이 아니고 현재성만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현재에서 포도주만 넉넉하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본 거예요. 문제가 없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그게 바로 자기 정당성이지요. 그러니 마리아의 모습과 그 뒤에 마리아보고 예수님한테 뭘 부탁해보라고 하는 이 촉구는 오늘날 우리 일상의 생활상을 그대로 그대로 보여줘요. 예수고 복음이고 간에 그때그때 넘어가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때그때 넘어가면, 다급할 때 기도해서 응답받고 그때 그때 넘어가게 되면. 그런데 그때그때 넘어가게 되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자기의 근원적인 시작점이 부정적이고, 최소값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발각당할 기회를, 찬스를 자꾸 놓쳐버린다 그 말이지요. ‘지난번에 긍정했기 때문에 앞으로 잘~ 될 거야’ 이런 식이에요.

■근원적으로 뭔가 자기의 좌표가 바뀌어야 돼요, 좌표가! 좌표라는 말이 나왔으니 현재 오늘날 인간 세상을 이렇게 보면 돼요. 언젠가 한 것 같은데요. 데카르트의 좌표지요. 좌표계에서 인간은 뭐냐? 어떤 지점이 있어요. 시간과 공간, 뭐하나 여기에 더 긋는다면 시공간인데 복잡하니까 그냥 공간만 생각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지점을 딱 점유하고 있어요, 점유. 점유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걸 빨아당기는, 소용돌이치는 원으로 해서 블랙홀로 이걸 삼켜버려요. 이 세상은 주님이 다 이루었다는 그 죽음의 세계로 빨아당겨서 산자나 죽은 자나 다 마지막에 심판받기 위해서 다 빨아당기는 거예요. 수챗구멍에 물 빠질 때 어떻게 됩니까? ssg, 슥, 빠지지요. 갑자기 훅 빠지지요. 모든 인간들의 운명이 원 안에 빠져버린 거예요, 원 안에, 수챗구멍 안에 빠져요. 그 수챗구멍 역할이 뭐냐 하면, 유일하게 이 세상과 로고스로 오신 예수님 사이의 연결구조가 죽음의 하수구로 예수님 오신 거예요. 왜? 긍정 주위에 뭐가 포위되었기 때문에? 부정성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 세상은 평면사고구조인데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고, 나태하면 패배하고 낙오자가 된다. 낙오자가 되는 그 우세스러움을 면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나중에 성공한다. 이런 평면구조지 블랙홀 구조가 아니에요. ‘우리 이러다 같이 우물에 빠진다.’ 이런 구조는 아니다 그 말이지요. 이 수챗구멍이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요. 왜? 이걸 돌출이라 하는데 돌출은 사건일 경우지요. 어디서 돌출해서 나를 쓱, 하고 죽음의 세계로 빠뜨릴지 모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주되 이 포도주가 예수님의 최종성, ‘다 이루었다’ 와 관련되어 있는 포도주를 줘버립니다. 이걸 가지고 ‘기적’이라 하지 않고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표적’이라 해요, 표적.

기적과 표적의 차이는, 기적은 현재 아쉬운 것, 표적은 미래에 다 완료된 것. 포도주로부터 시작한 주님의 첫 번째 표적, 그것은 예수님 죽음의 개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음의 개시, 이게 바로 가나안 혼인 잔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포도주를 주지 않아요. 뭘 주느냐? 물을 주는 겁니다. 확인해 보니 포도주가 아니고 물이에요. ‘아이고, 뭐 이게 어떻게 포도주가 돼? 그냥 떠서 주라 했으니까 떠서 주자.’ 한 그 순간, 다시 말해서 자신의 동질성을 포기한 순간 그 물은 뭐로 바뀌는가? 포도주로 바뀌는 거예요. 자기 체인에서 이동이 되는 것, 그게 믿음이지요. 그 표적이 바로 가나 혼인 잔치입니다.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한 어떠한 기적은 주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기적은 뭐냐? 나의 죽음에 동참하라는 기적 외에는 여태껏 인류역사상 주신 적이 없습니다. 나를 살리는 기적을 주신 적이 없어요. 암에 걸렸다. 기도했다. 살았다. 그건 산 게 아니에요. 여전히 죽은 거예요. 어떤 경우도, 어떤 경우도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 맞다, 믿음이 맞다, 그럴 경우는 그런 기적을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구원 받아서는 안 되고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내 죽음이 살아 있는 식으로 살아 있다는 그 인식이 나를 포도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처음부터 물이었고 나는 물이어야 마땅한데 주님의 최종성의 체인, 그 체인이 사건으로 찾아오니까 나는 뭐가 된다? 아무리 봐도 물인데 주께서는 뭘로 간주해요? 포도주로 간주하는 거예요. 왜냐? 포도주는 예수님 자기의 최종성이거든요. “내 피를 마셔라.” 최종성이잖아요. 십자가, 이게 마지막 표적인데 그 최종성에 동참하니까 포도주로서 동참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바로 주님의 사건이 갖고 있는 해설입니다. 복잡했는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모든 기적은 살고자 하는 나의 의지를 꺾어주시고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그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결과물이고 하나의 증상……, 감기들면 콧물 나지요. 증상이라는 것은 내 관리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냥 나의 모든 이성을 이기고 자연발생적으로 발생된 것이 증상이거든요. 내 생각이 아닌데 주님의 생각이 떠오르게 되고 그게 발산될 때 그게 증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증상의 내용은 뭐냐? 나는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거예요. 굳이 내가 살 이유는 없다. 그런데 그 생각이 평소에 내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 이질적이다. 그때는 노선 바뀌신 줄 아시기 바랍니다. 노선이 바뀐 거예요. 체인이 바뀐 거예요. 주의 사람입니다.

■그다음에 2장 21절에 보면 46년 동안 지은 건물이 등장하지요. 성전건물입니다. 성전건물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또 미래성, 미래의 최종성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뭐냐 하면 “이 성전을 헐어버려라.” 자, ‘성전을 헐어버려라’ 할 때 이 명령을 제자들이 따랐습니까, 안 따랐습니까? 갑자기 제자들이 곡괭이 들고 성전에 달려들었습니까? 어떻습니까? 엄두가 안 나지요. 주의 요구는, 주의 명령은 불가능성이에요. 주의 명령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어떤 명령도 못 지켜요. 왜? 못 지켜야 끊어냄이 돼요. “내 말 독하게도 안 듣는구나.” 성전을 헐라고 했잖아요. 마리아에게 기존의 친척들이 있는 것처럼 기존 성전의 권세자, 권력자들이 쥐고 있는데 곡괭이 들고 망치 들고 갔다가는 혼쭐나지요. 아예 엄두가 안 나지요. 같은 권력의 체인에 있기 때문에 안되지요. 마지막에 결국 이 성전은 헐리리라, 하는 뜻이에요. 명령은 네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주지시키고, 네가 못하게 된 지경과 내가 그걸 못하는 것을 하는 것, 그걸 통해서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부정성으로 인간의 긍정을 공격하시는 거예요. 인간을 공격하시지요. 2장 19절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그리고 21절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그다음에 뭡니까? “살아나신 후에야” 시간 공격이에요, 시간 공격. 주의 최종성으로 현재를 공격하는 겁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이 이미 그것만 고수하는, 현재만 고수하는 자에게 공격하는 식으로 주께서는 설명을 하시는 거예요. 따라서 이 설명사건의 로고스, 말씀의 설명사건에 휩쓸린 사람은 그야말로 세상 사람들한테 또라이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지요. 왜? 남들은 그걸 모르니까요.

 

■그다음에 3장 니고데모. 사무엘상 6장 6절을 보겠습니다.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이야기가 이게 왜 강퍅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조연급, 연기 잘하는, 눈빛 잘 쏘아대는 연기자가 필요해요. 그가 누구냐 하면, 조연으로 연기해줄 사람, 그게 바로 왕입니다. 바로 왕이 맡은 역할은 강퍅입니다. 강퍅은 뭐냐 하면, 모세가 전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오게 되면 강퍅에 강퍅, 곱하기 강퍅, 곱에 세제곱 강퍅해야 돼요. 그래야 요한복음 3장이 해석이 돼요. 전도하는 사람이 ‘이 복음을 왜 안 믿지?’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말씀, 주께서 사건을 일으키는 그 사건의 핵심은 이 세상으로 하여금 강퍅의 도를 더하게 하는 효과를 동반해서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요한복음의 니고데모 해석에서 니고데모가 뭘 몰랐는가? 니고데모가 뭐가 그렇게 궁금하고 어떤 점에서 하자가 있었는가? 세상은 예수님의 오심과 동반해서 어떤 조짐과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가 뭐냐? 모세가 바로 앞에 등장했을 때 바로는 평소와 달리 강퍅해야 될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주님의 사건 현장에 출현한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요한복음 보면서 ‘야~, 내가 그 당시에 거기 있었다면 니고데모에게 설명을 잘 해줬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점점 더 복음에 대해서 잠자고 있는 괴물의 눈을 뜨는 것처럼 복음은 우리 속에 없다고 여겼던 괴물이 드디어 활동을 개시하는 거예요. 죽음의 움직임, 그리고 생명의 움직임으로 세상이 재편되는 겁니다.

2장은 상당히 고정되었다고 보면 3장부터는 운동성을 갖고 있어요. 주님의 활동, 생명이 움직일 때, 예수님이 가실 때 그들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움직일 때 그들은 도발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같이 핍박하는 것으로 움직여 줘요. 예수님의 자기 죽음에 성공할 수가 있어요. 뭔가 조력자가 있어야 돼요. 예수님 죽는데 가룟유다처럼 조력자. 예수님이 꼭 죽으셔야 되는 분위기를 유발시키면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는 겁니다. 그래야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또는 같은 말로 죄 와 의, 또 같은 말로 지옥과 천국, 이것이 같이 감으로써 여기서 변화율을 만들어내지요. 곡선이 이렇게 만들어지면서 아버지 나라의 접선을 형성하기 위해서 올라갈 수 있도록, 십자가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여기에 세상이 어두운 세상이 조력해야 돼요.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 당시에 점잖은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예수님 당시에 인간적으로 인성을 봐서 훌륭한 사람이 한둘 아니었잖아요. 많이 있었잖아요. 인성적으로. 가정교육 잘 받은 사람은 인성이 좋잖아요. 예의도 바르고. 그런데 그들이 어디로 다 집중해서 휩쓸리고 끌려가느냐? 어두움이지요. 어두움이 되어야 돼요, 어두움. 어두움이 되어야 예수님만이 뭐가 된다? 빛이 될 수 있도록 어두움이라는 것으로 굳어져야 돼요. 어두움 안에 총 집결해야 돼요. 예수님은 빛에 집결해야 돼요. 예수님은 방주고, 저쪽은 물에 빠져도 할 말 없는.그러니까 방주 역할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언약이 뜨면, 언약이 뜨면 점잖은 사람들도 다른 것은 화를 안 내는데 십자가라든지 방주라든지 여기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의 평소 인간성과 전혀 관계없이 분개하는 발작, 이게 증상인데요, 발작을 일으키는 트라우마가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본인이 모르는 트라우마 그것, 평소에 있을 때는 좋아요. ‘우리 친구 아이가!’ 그런 사이라도 복음 전하면 트라우마, 갑자기 발작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속으로 여러분은 ‘짝짝짝!’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노래를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으로 바치고 싶습니다.”라고 누가 하게 되면 초치기는 쉬워요. “느그 아부지 어데 갔는데? 느그 아부지 지옥 갔는데!” 이 한마디만 하면 완전히 무대는 완전히 초치는 거예요. “느그 아부지 무슨 하늘에 있어? 지옥 갔어. 절에 갔는데 그럼 지옥 갔지 어딜 갔겠어?” 왜 그런 진실, 진실은 말하면 안 돼요. 진실은 말하면 안 되고 유발되어야 돼요. 진실은 터져 나와야 되지 내가 진실을 말하면 ‘너는 진실을 모르지? 나는 진실을 안다.’ 이게 자기의 어떤 승리감을 노리면서 ‘너는 이런 것도 모르지?’ 자랑질하려고 하시면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3장 13절에 니고데모가 주님한테 욕 되게 얻어먹는데요. 뭘 몰랐느냐? 이걸 몰랐어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지평적으로 생각했어요. 좌표로 생각한 거예요.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이미 이 땅은 진리가 말씀의 완성이 예수님에게 독점되어 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가는 곳에 땅이 따라가면 되는데 땅이 못 따라가고 예수님 홀로 보내버리면 땅은 그냥 자동적으로 뭐가 돼요? 지옥이 되어버리지요. 어둠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 땅에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 선한 사람, 남에게 희생한 사람, 굉장히 많아요.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붙이지 못한 그 이유 때문에 다 같이 어두운 자가 되는 겁니다. 빛이 없으면 다 같이 한통속으로 어두움으로 묶어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의 집합화 시킬 수가 있어요. 하나의 바구니에 담을 수 있어요. 어두운 자식들의 집합, 그것은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도발한 거지요. 살짝 담갔다가 살짝 올라가게 되면 졸지에 훌륭했던 이 세상은 어둠의 세계로 졸지에 변합니다. 그러면 세상 자체는 이미 심판받은 거예요. 이 세상 자체가 이미 심판받은 거예요. 어느 관점에서? 최종점의 관점에서 이미 심판받은 겁니다.

그러면 빛의 자녀인 여러분은……, 아~, 이 말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빛의 자녀인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면 됩니까? 신나게 살면 되지요, 신나게. ‘보자~, 오늘도 어떤 어두움의 종류가 있는가 보자.’ 이게 주님의 설명사건 안에 일부로 포함이 되어 있으면 어두움에 대해서 ‘참 가지가지 한다.’ 이렇게 살면 돼요.

■그러면 뭐만 주의하면 돼요? 개선의 여지를 주지 마세요. 개, 돼지한테는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김 돼지, 박 돼지, 최 돼지, 그냥 어두움이에요. 복음 전하면 발작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타이밍, 그것은 주님의 소관이기 때문에 제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복음 전하지 마세요. 복음 전하지 마세요. 그 이야기가 4장에 나옵니다. 4장 38절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자, 추수의 상황은 어떤 상황이냐? 어떤 요소가 필수요소입니까? 내가 전혀 노력하지 아니했다, 를 증거 하는 것이 바로 추수입니다. ‘나는 노력한 게 없다’ 가 반드시 살아있어야 돼요. 디테일하게 살아 있어야 돼요. ‘나는 노력한 적 없습니다. 어두움이 어두움이지 주께서 일부러 어둡게 한 것에 대해서 내가 거기에 대해서 미련 두거나 아쉬운 것이 없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 사람이에요. 아쉬운 것 없는 사람, 제일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전혀 아쉬운 것이 없어요. 사마리아 여인.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 뭐 남자 다섯 명 사귀었다면서?” “나? 지금 목표가 열두 명이다.” 전혀……, 미모가 되어야 열두 명이지, 전혀 아쉬운 것이 없어요. 노력? 전혀 노력한 적 없어요. 왜? 빛과 어둠의 세계기 때문에. “추수할 때이니 추수합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교회가! 추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예배당 수백억 들여서 지어놓고 “자리가 비었으니 채웁시다. 추수합시다. 요한복음 4장에서 주께서 지시한 겁니다.” 주께서 지시한 것은 절대로 이루지 못하는 거예요. 주께서 지시했잖아요. 하지 마세요. 하지 마, 하지 마, 찍자 마, 하지 마!

요한복음6강-기적과 표적

■지금 표적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여러분이 핵심 포인트로 꼭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의 일하심 안에 이미 시작점, 창세 전 시작점, 태초부터 계신 그 ‘시작점 + 최종점’이 예수님 안에서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작점과 최종성을 시간이 흐르고 있는 이 인간세계, 수평적인 인간세계에 와서 담갔다가 빠지면서 뭐가 발생 되느냐? 담갔다 빠지면서 여기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내가 그것을 소유할 수 없어요. 왜?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이기 때문에. 주님한테는 이게 소유가 되는데 주님 외 다른 사람한테는 이 구원이나 사망이 소유대상이 안 됩니다.

 

인간이 자기가 갖고 있는 것, 내가 갖고 있는 것, 예를 들어 사과, 바나나, 딸기 있다면 이것은 우리 집이 갖고 있는 부분집합이거든요. 이렇게 갖고 있을 때 뭐도 여기에 집어넣느냐 하면, 부분집합으로 파워 셑(power set), 멱집합도 여기에 자기 부분으로 차지하게 해요. 뭐냐 하면, ‘사과, 바나나, 딸기를 갖고 있는 나를 내가 갖고 있다.’가 되는 겁니다. 이게 골칫거리에요, 이게. “나는 예수 믿는다.” 진짜 예수 믿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그 안에 뭡니까? 그 안에 ‘나’가 계속 있기 때문에 ‘나는 예수 믿는 나를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구원에 안전빵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이게 지금 제거 대상인데. 구원을 안고 있으려면 내 자리에 누가 와야 돼요? 예수님이 차지할 자리를 본인이 갖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뭐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분집합이 되어야 되지 내 안에 예수님을 집합으로, 하나의 요소로서 갖고 있으면 안 돼요.

 

■이 요한복음 4장 끝에 두 번째 표적이 나옵니다. 맨 가나 지방에서 일어난 표적인데,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들었어요. 4장 46절이지요. 주님께서 표적을 줄 때 주님 안에 시작점과 최종점이 함께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시작점과 최종점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시작이 ‘병 들렸다.’ 이러면 최종점은 미래의 거예요, 미래. 지금은 뭐냐? 병 걸렸어요. 병 나은 상태가 아니고 병 들린 상태에요. 인간은 생각하기를 ‘지금 병들었다. 병 낫는다면 나중일 것이다. 미래일 것이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인간의 모든 언어와 파악은 시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냥 한번 시도해 보는 거예요. 왕의 신하가 49절에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님께서 친히 왕림하셔서 고쳐 달라고 한 거예요. 뭐라고 합니까? 계속 시간을 집어넣어요.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런데 50, 51절에 보면 인간의 현재성을 주님의 최종성으로 삽입을 해버려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자기 집에 가는 중에 종들을 중간에 마주쳤어요. 52절에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절,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바로 ‘그때’ 병이 이미 나아버린 거예요. 주님이 말씀한 그 말씀 안에 뭐가, 주님 말씀 그 자체가 시작점이고 동시에 최종점이 함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나에게 영생 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영생이고 생명이라는 것 이걸 유대인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오늘날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했더니 결과로 주께서 이걸 주셨다. 계속해서 시간 요소를 집어넣어서 원인과 결과 관계를 지속하려고 애쓰잖아요. 이게, 이게 아닌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영생이기 때문에 영생이라는 말은 나 자체가 뭐다? 죽음이라는 뜻이에요.죽음을 소스로 재료로 해서 내 안에서 영생이 자기 증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의 자기 생명의 증상은 어떤 증상이 있다? 내가 살아도 죽었고, 죽어도 죽었다는 이 희열과 고마움이 하나의 증상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자신이 뭐가 되느냐 하면 표적이 돼요.내가 얻어 챙긴 것이 표적이 아니고 죽어가는 내 존재자체가 표적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죽음으로 나를 증거할 것이다.’ 하잖아요. 요한복음 21장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끝까지 베드로는 아직 정신 못 차렸어요. 딴소리는 안 들리고 “네가 원치 않는 죽음으로 죽는다.” 그 소리만 들리니까 이미 자기가 최종성 안에 들어 있으면서도 그 소리 때문에 몹시 비위가 상했던지 “그러면 쟤는요?” 옆에서 가만있는 요한보고 “그러면 쟤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아주 초를 쳐버려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살아 있게 한다고 해도 너는 입 다물어! 내가 재림할 때까지 살아 있다 해도 너는 입 다물어! 그것은 내가 맘 대로다.” 네가 죽는 것은 아쉬워할 필요 없는 이유가, 이미 너는 내 것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죽는다 하면 나의 명령의 사건 속에 들어온 그것으로 족해야지 갑자기 ‘아, 내 청춘은 어디서 보상받나?’ 이런 생각을 하고 ‘쟤는 되게 좋겠네. 오래 사니까.’ 이 말은 뭐냐?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노릇 하는 거예요. 허접한 인간의 어두움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해주면서. 요한복음 4장 54절에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표적은 계속해서 이 부정적인 어두움의 세계에서는 알지 못합니다. 언제까지? 성령이 올 때까지 유보돼요. 성령이 올 때까지 요한복음 해석은 전혀 되지를 않습니다.그러면, 성령이 오면 요한복음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해서 이미 최종적으로 그 골치 아픈 나를 주님께서 죽은 자로 다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 요한복음을 기쁘게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어찌 기쁘지 아니하뇨.

■요한복음 5장 봅시다. 베데스다 못가, 자비의 연못이지요. 자비의 연못에서 주께서 여기서 이 시작점과 최종성, 또는 이 세상에 생명을 제공하게 되면 이 세상은 어떤 발작을 일으킨다 했습니까? 예수님이 벌인 일에는 주위에 날 파리 꼬이듯이 뭐가 꼬인다 했습니까? 강퍅과 완악이 여기에 꼬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야 예수님이 죽으시니까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분노를 유발하는 거예요. 분노유발자,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없이 하소서”(요 19:15)의 수위에 도달해야 돼요. 그래야 예수님이 죽는데 성공하시는 겁니다. 계속 깔짝깔짝 약을 올리는 거예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칩니다. 38년 된 병자의 특징은 뭐냐? 무능성이지요, 독하게 무능해요. 아주 지독하게 무능한 거예요, 38년 동안 병자, 38년 되었다 하는 이것은 뭡니까? 이것은 ‘시간성’이지요. 시간성이 38년 동안 병자 되었다는 말은 처음부터 병자 되었다는 샘플로 주께서는 아주 적당하게 골라잡은 거예요.인간은 처음부터 병들었다. 병든 그 증상이 고치는데 무능하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인간은 자신의 병을 고칠 수가 없다. “인간은 자기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잖아요, 원래 자리로. 그래서 인간은 덫에 빠진 겁니다. 죽어도 부활해서 심판받아버리니까 죽어도 독립적이 아니고, 자율적이 아니고, 살아서도 자율적이 아니고, 인간은 그냥 인간 되었다는 자체가 비극입니다. 덫에 빠졌으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이거 누가 이야기했어요? 욥이지요, 욥. “이러려고 태어났습니까, 이러려고? 이러려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습니다.”(욥 3:11)라고 욥이 그런 이야기할 때 뭘 날려버린 거예요? 창조주의 의도에 따라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욥이 자기 본성으로 잘라버린 거예요. ‘나는 나 좋으라고 태어났습니다.’라는 것으로 무심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지?’ “나는 내 인생 행복하려고 태어났습니다.”라는 말, 말도 안 되는 말이 튀어나와 버린 거예요. 그래놓고 욥은 자기가 의롭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욥이 의롭다, 믿음 있다,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욥의 끊어질 수 없는 관계성이 의롭지 욥이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게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게 한 것은 그 죄인에게 꽂아준, 링거 주사처럼 꽂아준, 수액처럼 꽂아준 하나님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의 요소 때문에 그 관계가 의로운 관계되는 거예요. 어느 정도로 깨끗하고 의로우냐? 무시무시할 정도로 깨끗해요. 너무 깨끗해서 미칠 정도로 우리 성도가 깨끗해요. 믿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하는 짓거리 보면 추접고 더럽기 짝이 없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너무 깨끗해서 눈부실 정도로 깨끗해요. 미처 우리가 상상한 그 이상으로 깨끗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하얗게 되었다 하지요.

인간은 덫에 빠진 거예요. 무능합니다. 무능한데 그 무능함을 어떻게 구원하는가? 주님은 아무 관심 없어요. 어떻게 병을 고치는가? 관심 없습니다. 이 무능함이 샘플이니까 주위의 무능함에 이유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이유를 전체로 같이 뿌리째 뽑아내고 옆에 가만히 있던 흙까지 같이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기로서 38년 된 계기로 사용한 겁니다.

■38년 된 병자가 갑자기 병이 낫고 난 뒤에는 사람들이 뭘 시비 겁니까? 주님보고 “네가 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느냐?” 그게 나온 거예요. 5장 10절에.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도시에 보면 가로수 있지요. 가로수 보호하는 쇠 덮개가 있지요. 가로수를 누가 차로 박았다. 그러면 그 충격에 의해서 쇠로 만든 그 덮개도 같이 튕겨 나가겠지요. 나가면서 뿌리째 뽑히려고 하다 보니까 덮개 안에 있던, 쇠 덮개에 보이지 않게 잠복되어 있던 뿌리까지 그 실체가 드러나지요. 인간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 이게 요한복음 5장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데 그중 하나가 뭐냐? 안식일의 저주 아래 있다. 안식일의 저주.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에서 하는 것은 “효력 없는 안식일을 반복적으로 지켰다.” 효력 없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무 능력 없는 그 안에 그들은 계속 갇혀 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대로 안식일을 지키려면 어떻게 하느냐? 이것은 요한복음도 좋지만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이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뭘 원하지 않으시고, 뭘 원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나와 있어요. 마태복음 12장 7절에 보면, 나는 뭘 원하고?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죠. 뭐는 원합니까? 자비지요. 뭐는 원하지 않습니까? 제사지요. 그러면, 제사 드리면 뭐가 방해받는다? 자비가 방해받는 거예요. 안식일에 제사 드리라고 되어 있는데 그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비에 대해서 너희가 아는 게 없음을 안식일에 알려줍니다. 어떻게 모르고 있는 자비를 알려줍니까? 제사 지내는 것이 완전히 효과 없는 짓거리라는 것을 발각당할 때 비로소 그들은 자비를 아는 거예요. 그래서 예배시간에 찬양하고, 기도하고, 설교 듣고, 예배에 여러분이 참석해야 될 이유는, 그것이 얼마나 쓰잘데기없는 짓이라는 것을 혹독하게 체험을 해야 돼요. ‘이게 뭐야? 오~, 자비구나.’ 이렇게 되지요. 그런데 만약에 성가대 소프라노, 테너, 제대로 한다고 하면서 찬송할 때 뭐가 방해받습니까? 하나님의 무능함에만 주어진다는 자비가 유능한 자에게는 필요 없는 게 돼요. 그 자비가. 그러면 예배드리고 아무 효과가 없어요. 예배드렸으면 예배드리는 기도순서, 헌금이라든지 하는 이것이 아무 쓰잘데기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알기 위해서는 헌금을 많이 해야 돼요. 갑자기 돈 이야기가……. 십일조에 추가적으로 더 해봐야 이게 아무 효과가 없다는, 그저 나를 무능력하게 만들 때 주의 자비는 이런 나의 행위를 무능력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자비는 덮칠 때 나의 무능력도 비례해서 더 강화되어야 되지요. ‘이 정도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기 때문에 자비가 일방적으로 주어졌구나.’ 이렇게 되어야 돼요. 그러면 여러분은 이 이야기 듣고 ‘이왕 효과 없는 것 점심값이나 5천 원 낼래.’ 이런 식으로 하면 그것도 효과 없어요. 그것도 효과 없습니다. 자, 다시 요한복음 5장 봅시다. 어쨌든 자비라는 것은 돈 받고 준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38년 동안 무슨 수완과 노력을 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말이지요. 그게 사건이었습니다. 자, 사건 있고 난 뒤에 그다음에 뭐가 붙는다 했습니까? ‘사건, 그리고 드디어 플러스(+) 주님의 해석, 주님의 설명이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그 말씀은 로고스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 그 말씀이, 설명 말씀이 그게 그대로 현실이 돼요. 주님께서는 그냥 공연히 날려 보내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이 말씀대로 세상은 되어갑니다. 요한복음 5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유대인들이 드디어 예수님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핍박하면서 예수님께서 조금 더 십자가에 가까이 가는 움직임이 조금씩 조금씩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17, 18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같은 동네에 사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것은 겸손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들에게 성립이 되지 않지요.

■여기 5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내용 하나가 드디어 19절부터 죽 나옵니다. 특히 21절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뭘 정리해야 되느냐 하면, ‘선택’이라는 것을 정리해야 돼요. 선택이라는 것은 이 체인이 다 끝나 봐야 알아요. 만약에 ‘50년 믿었다. 51년째 나는 복음과 바이바이, 다.’ 이렇게 하면 그것 선택된 거예요, 안된 거예요? 안 되었지요. 51년째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가 50년 산 사람이 미리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그러면 선택은 뭡니까? 선택은 무용지물이지요. 소용없지요. 앞으로 점선에 뭘 로 채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면 이 나의 인생사, 나의 체인 안에 하나님의 선택이 들어설 수가 없겠지요. 왜? 미지의 것이 남아 있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주님이 들어와 버리면 주님 안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시작점이 있고 최종점이 있지요. 주님의 선택이 있지요. 주님의 선택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무한한 사건들이 나와요, 무한한 사건. 어떤 사건들이 나오더라도, 어떤 소나기가 쏟아지더라도 그 물방울 하나하나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최종적으로 선택되었음"이라는 내용이 표함된 소나기 물방을이 떨어지는 거에요.그러면 주님 안에서의 선택이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느냐? 주님 안에서의 선택이 무엇을 공격한다? ‘나의 선택을 끊임없이 공격한다.’가 되겠지요. 내가 나를 선택하고 싶은 거예요. 이걸 어렵게 말해서 내 안에 내가 뭐가 되었다는 것을 나의 부분집합으로 품고 있고 싶은, 그래서 그 전체를 나라고 여기고 싶은……, 이제 집합 좀 배웠다고 응용문제 막 나오지요. 내 안에 ‘내가 선택되었다’가 내가 챙긴 내용물로 들어가 있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이 십자가 마을 온다고 챙길 것 많잖아요. 양말도 챙기고, 수건 챙기고, 칫솔 챙겼잖아요. 가방 안에 뭐 들어 있잖아요. 가방을 하나의 바구니로 생각하고 하나의 집합으로 생각한다면 그 안에 뭐도 챙깁니까? ‘나는 어떤 경우에도 영원히 선택되었어.’ 이것이 포함된 거예요. 그 가방을 2층 창문 열고 밖으로 집어 던져버려야 돼요. ‘이게 왜 또 여기서 나와? 선택이 왜 네가 간직해야 될 내용이야? 네가 왜 선택을 언급해, 선택을?’ 주님의 선택이 나의 선택을 짓밟을 때 비로소 이것이 바로 선택된 사람이에요. “내 선택 작살났다. 내 선택 작살났어.” “그러면 누가 선택되었는데?” “내 안의 주님이 선택되었지.” 이게 정답이에요.

그걸 가지고 에베소서 1장 4절, 아~, 이거 누가 읽어봐야 돼요. 에베소서 1장 4절, 창세 전에……, 이건 챙기면 안 되고 이 말씀에 복종해야 돼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됐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우리는 존재할 이유가 없어요. 내가 이 땅에 살 이유가 없다니까요! 살 이유는 예수라는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후차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 탄생 한 겁니다. 우리가 없었어요. 우리의 선택은 뭐냐? 내가 존재하고, 내가 태어난 것, 선택되어야 구원받는데 내가 생각한 선택은 일단 태어났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해서 ‘주님이여, 어떻게 하면 선택됩니까? 예수 믿을까요?’ 이러고 있다고요. 그 예수 믿는 나는 내가 챙길 나의 부분집합으로, 바구니에 담을 칫솔 정도로 해서 담는데 그것조차 주께서 인정하지 않아요.바로 유대인들이 그렇게 선택한 겁니다. 그래서 망했잖아요. 그 망하는 짓을 똑같이 하고 있다고요. 어디서? 칼빈주의, 칼빈주의 선택론이 거기서 나와요. 예수님의 선택, 그걸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영생이고 우리는 거기에 없던 존재로서 예수님이 창세 전부터 선택을 예수 안에서, 그래서 무한한 선택이 예수 안에 있어요. 그 무한한 선택 중 하나가 자기 백성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록된,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백성, 이 소유권은 예수님한테 있어요. 이름 적혔다고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생명책에 있을 때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자신의 선택이 박살났다는 체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주님의 선택이 나의 선택을 밀어내 버린 거예요. 쉽게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너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선택했다.’라는 사실을 너로 알게 함으로써 네가 예수님이 갖고 있는 그 무한의 축복을 공유하게 되어 있어요. 같이 누리게 되어 있는 겁니다. 5장 27-29절,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할 때 이게 염려스럽습니까, 아니면 신바람 나는 이야기에요? 자기 안에 있는 게 아니고, ‘이걸 믿어야지’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다면, 그러니까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내가 없을 때부터 계획한 바다,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없을 때 하나님께서 프로젝트, 기획한 일이에요. 나와 의논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와 의논할 필요가 없고 주께서 내 말을 들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말을 해도 주님이 사건으로 잘라내고 그 사건의 설명 가운데서 설명의 일부로서 우리가 거기에 포함되는 겁니다. 주께서 한 신나는 일이 나의 신나는 일이 되면 그걸로 족하잖아요. 5장 38절, 다 같이 합시다. 이것은 목청 좋은 사람만 하면 안 돼요. 다 같이 합시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아멘! 예수님이 우리가 믿을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만만한 분이 아니에요. 내가 믿자, 해서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믿어서 알게 된 분이 아니고 그분이 눈을 뜨게 해줬기 때문에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요한복음 6장에 사건이 일어납니다. 오병이어, 이 오병이어에 대해서 알려면 역대상 16장 3절을 봐야 돼요. 1절부터 보면 제일 먼저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궤’가 나오지요, 하나님의 궤. “하나님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두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또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매 명에 떡 한 덩이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병 하나씩” 그 다음에 뭡니까? “나누어 주었더라.”

나누어 주었다. 주님 안에서는 뭐가 있다? 시작점이 있고 그다음에 뭡니까, 최종점이 있지요. 하나님께서 준비한 마지막 언약이 뭐냐 하면, 매개자 예수님을 보내서 나누어 주는 거예요, 나누어 주는 것. ‘나누어줌’이라는 것은 회수, 하나로 모인다는 거예요, 회수.성도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았다 했어요. 우리 교회를 위해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성도 아니지요. 십자가 마을을 위해서 산다면 그것도 성도 아니지요. 두세 사람도 내 이름으로, 이름이 하나로, 이름이 여러 사람의 이름이 있더라도 그 이름은 전부 다 묵살되고 하나의 이름으로 움직이고, 하나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하나의 이름으로 존재해야 돼요. 그 이름 안에 시작점과 최종성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뭘 해도 주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이 그 말이고,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고요.나눔은 결코 나눔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눠준 거예요. 사람마다 전부 다 은사가 다른 것은 이게 하나로 최종적으로 모아졌음을 알리기 위해서 중간단계로 나눠지게 된 거예요. 죽죽 하나로 와서 나뉘고 나눠진 것이 하나로 모여지는 겁니다. 야곱의 아들이 몇 명입니까? 열두 명. 열두 명이 하나가 될 수 없어요. 내 맘도 모르는데 그 맘 어떻게 알아요? 그런데 주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열둘이 하나가 돼요. 뭐냐? 마지막 언약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게 되면 열두 명의 제자, 물론 가룟유다 빼면 열 한 명의 제자지만, 열두 명의 제자가 예수님의 몸으로 하나로 합체돼요. 이게 독수리 12형제에요. 독수리 5형제가 아니고 독수리 12형제. 적이 왔을 때 “크로스!” 해가지고 이게 합쳐야 에너지, 기가 모이거든요. 그래서 “이 지구를 괴롭히는 외계인들아, 덤벼라! 정의의 이름으로 너희를 벌하노라.” 어벤져스, 이 크로스, 독수리 5형제, 독수리 12형제, 12형제에서 12가 나오지요.

그래서 곱하기 1000, 하면 ‘12×12×1000’ 하면 얼마입니까? 14만 4천이지요. 구천지, 신천지가 잘 떠드는 그것, 언약으로 시작해서 언약으로 마감된다는 숫자가 14만 4천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나눠줘봤자 나눠줬을 때 떡을 받은 사람은 떡 받았다고 하면 안 되고, 도로 그걸 어떻게 해야 됩니까? 떡 받았다는 그 이유가 하나에서 나온 떡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떡 받았다’는 그것을 제거해야 되지요.그래서 남은 광주리가 몇 광주리 남았습니까? 열두 광주리. 12라 하는 것은 이런 뜻이에요. 1로 오기 위한 중간단계입니다. “너희들 눈에 12로 보이냐? 그게 1이다. 1이 궁금해? 12를 봐라.” 이런 뜻이에요. 열둘로 갈라졌다. 언약대로 갈라졌다. 갈라져서 오는 겁니다. 하나로 모여야 되지요. 그러면 역대상 16장에서 다윗이 떡 나눠줄 때 어디서부터 시작했습니까? 어디 앞에서 시작했습니까? 언약궤죠. 언약궤가 몇 개지요? 하나지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 중심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떡을 떼주면서 그걸 확인시켜주는 겁니다. 떡을 떼주면서. 그래서 은사가 다양하지만 은사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에요. 각자의 믿음, 소망, 사랑, 다 다르지만 최후에 남은 것, 그중 제일은 뭐다? 사랑이다.

사랑이란, 사랑의 근거는 오직 예수님 살과 피뿐이에요. 내가 주님 사랑한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 사랑한 그것은 주님의 피 앞에서 제거 되어야 되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 진 적이 없다.” 주님이 나와 함께 십자가 졌지만 너희를 위한 십자가는 내 몫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고전 1:13) 나는 내 몫도 챙기기 바쁜데 무슨 남을 위한 게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누구도 타인을 대신할 수 없는 존재, 어느 누구도 타인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를 위해서 대신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알아야 돼요. 여기서 기쁜 소식 나갑니다. 우리의 한계는 간단하지요. 나밖에 모른다. 이거 다 같이, everybody 합창하고 싶어요. 나는 자식이고 부모고 형제고 필요 없어요. 점점 커가면서 친구고 뭐고 필요 없어요. 나는 나밖에 모른다. 이 말은 뭐냐? “나는 십자가 진 적이 없습니다.남을 위해서. 나는 내 주먹 내가 흔들 거예요. 그래서 나는 지옥 가야 마땅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오병이어 떡을 떼준 것은 네 주제 파악하라고 준 거예요. 주제 파악하라고! 그래서 사건을 일으켰지요.

이제 남은 것은 뭡니까? 설명, 주의 설명계시, 설명의 말씀이 나옵니다. 나올 때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왕으로 삼으려고 했지요, 왕으로.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주님께서 휙 돌아보면서 “너희가 왜 나를 따라왔지?” “주님께 잘 해드리겠습니다.” 할 때 6장 2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기적을 봤기 때문에 그래요.

 

※표적은 최종성까지 봐야 표적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권세가 되는 것은 내 뜻이 아니어야 한다.’는 최종성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슨 뜻이 강력하게 가미되어 있습니까? ‘저분 같으면 임금으로 괜찮다.’ 해서 자기 뜻이 가미된 거예요. 그걸 가지고 27절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하니까 28절에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여기에 자기 노동 개념이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2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여기서 또 강조하지만 “일하지 마, 일하지 마, 일하지 마!” 일을 하게 되면 일을 하는 주체가 내가 되기 때문에 계속 노동하는 주체인 내가 나의 부분집합이돼요. 나를 구성하는 요소가 돼요. 부분집합, 어려우니까 차라리 내가 나답다는 것을 견지할 만한 이유가 되는 근거로서 괜찮은 내가 내 안에 심겨 있다, 그 말입니다. 그걸 제거해야 돼요. 그걸 제거해야 믿음이 되는데

주의 보내신 자의 일, 그게 뭐냐? 최종성이 있어요. 그 최종성이 53절에 나오지요.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잘 보세요.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를……”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인자의 피를 마시지” 그다음에 ‘부정성’ 나오지요, “마시지 아니하면, 마시지 아니하면” 그러니까 ‘내 살과 내 피를 흘리는 이유가, 너희가 죽었다 깨나도, 죽었다 깨나도 너희들의 뜻으로서는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 살과 내 피가 너희에게 보란 듯이 너희를 향하여 날아간다. 내 살과 내 피, 너희들이 내 살과 내 피를 흘리게 만든 동기유발로 작동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에요. 그런 뜻이 있으니까 최종성을 인간은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그들은 무슨 뜻인지 모르지요. 대화가 안 되지요. 언어가 공동체를 만듭니다. 언어가 공동체를 만들거든요. 의미 순환구조가 공동체에요, 의미순환구조가. 그런데 뜻이 통하지 않으니까 따르던 그 수많은 제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떠나는 정도가 아니고 “다시는” 66절에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다시는” 점점 더 표적이 십자가에 가까이 갈수록 주님 홀로 남게 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기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외부에서 발작증세를, 그 강도를 높여가고 있습니다.

■표적과 표적 사이에 스토리가 형성되어 있어요. 더욱더 그들로 하여금 분개될 만한 사건들을 주께서는 일으키지요. 7장, 7장에 보면 초막절이 나옵니다. 초막절은 1년 절기 가운데 최종적인 절기가 초막절이에요. 초막절에 예수님께서 있으니까 “예수님, 당신이 하는 일을 세상에 알리소서.” 이렇게 합니다. 3절에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7장 6절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아직 나의 때가 되지 않았다. 내 때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그때는 뭡니까? ‘아직까지 너희들이 발작할 때가 덜 되었다. 정말 너희들과 예수님 사이에 완전히 괴리되어 있고 연결점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밝힐 때가 되지 않았다.’ 7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그러니까 ‘나를 미워할 때가 되지 않았다.’ 자꾸 예수님은 세상으로 하여금 자기를 미워하도록 유도합니다.

미워하게 된 이유가 나오지요. 7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그 이유가 뭡니까?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뭐라고 증거하기 때문에? “악하다 증거함이라.” 그러니까 그 시대, 그 당시에 오셨던 예수님은 이런 분인데 오늘날 교회에 예수님 오셨다면, 예수님이 할 일은 연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 오신다면 우리 교회가 악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하실 분으로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참 좋겠어요. 참 좋겠어요!

그래서 이야기하는데 그중 하나가 초막절과 관련해서 요한복음 7장 22절에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이 말씀 나오지요. 이것 좀 설명이 필요한데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시작을 모세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모세 이전에는 없었어요. 애굽나라의 히브리인으로 있었지 이스라엘은 나라 정체성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린양의 피로 제사법과 더불어 나옴으로 말미암아, 유월절과 나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를 모세로부터 온 것으로 생각했어요, 모세로부터. 그런데 예수님은 뭐로 봅니까? 시작점과 최종점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 할례 해석을 모세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더 나가지요. 더 나가는 거예요. 모세로부터 시작한다면 이미 이스라엘이 있는 상태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으려면 뭘 하면 됩니까? 할례를 행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이 할례가 모세 이전이 된다면 모세 이전부터 모세 때까지 일어난 그 상황을 겪어야 비로소 할례 언약의 핵심에 도달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모세 이전, 곧 이스라엘 이전이니까 이스라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을 때지요. 이스라엘 없을 때 할례 취지부터 예수님이 그 바통을 이어받아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축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세 때는 뭐가 있어요? 제사가 있었지요. 번제가 있었지요. 그 제사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이 이스라엘이 되는 방법을 주께서는 홀로 알고 계셨다 이 말입니다. 율법 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말이에요.

혹시 살아 있다면 올여름에는 ‘갈라디아서’ 할 생각입니다. 거기에 보면 율법 이전으로 돌아가요. 아브라함 때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이 의롭다’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인자(仁慈),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비, 그 사랑을 훼방, 훼손하기 위해서 법이 주어진 겁니다.

그게 바로 요한복음 7장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계속 시비 거는 거예요. ‘제발 너희가 좀 분노를 일으켜서 나를 죽여줘. 그러나 아직 때는 안 되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초막절이라는 것은 어디에 속합니까? 초막절은 모세 이전에는 없었어요. 그러면 모세때 뭐가 생겼습니까? 초막절이 생겼지요. 초막절이 마지막 절기지요. 최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최후의 영광스런 모습을 초막절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노선이, 체인이 바뀌었잖아요. 그 영광스런 모습은 이제는 그 노선이 율법을 따르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초막절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체인을 따릅니까? 예수님 체인을 따라서 초막절이 완성되지요. 그게 뭐냐 37절에 나옵니다. “명절 끝날 ” 명절에 가지도 않아요. 끝날에 가요. 끝날에 ‘너희들식으로 다 했냐? 다 했어? 너희들 식은 다 끝났지? 그러면 이제 나의 시작이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누구한테 옵니까? “목마르거든” 누구한테 오라? “내게로 와서 마시라” 초막절 마지막에는 성전에다 실로암에서 물을 떠서 물을 부어요. 그러면 물이 졸졸 흐르겠지요. 이것은 에스겔 42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물이 흐른다는 그것, 성경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의 교재로 사용하는 겁니다. 교재, 옛날 에스겔에 이런 약속이 있으니까 우리는 그 약속을 믿으면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본 요한복음 5장 38절에 보면, 아까 다 같이 읽었습니까, 38절에 보면 너희 속에 무엇이 거하지 못한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그 결과가 뭐였다?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예수님이 최종자라는 것,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자비로 완성한다는 사실을 너희들이 지금 못 받아들이고 있다는 거예요.

그 점을 지금 계속해서 하나의 표적으로서 사건으로 6장, 7장, 8장, 계속 이어져 나갑니다. “거봐. 너희들 속에 말씀 없잖아.” 또 “말씀 없잖아, 봐. 내가 사건 일으켜도 또 말씀 없잖아. 그들은 성전에서 물 붓는 의식을 행하는데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 최종자가 되는 예수님이 이렇게 옆에 있는데 내 말을 믿어야지 성전 물 붓는 그러한 연출, 그걸 왜 믿느냐?” 하는 거예요. 딱 대비를 시키는 거예요.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게 뭐냐?” 성전에다 물 붓는 것, 실로암에서 물길어서 부어서 “이런 분이 오신단다.” 주님께서는 “이런 분이 왔단다! 내가 최종성이야. 내가 왔어.” 기다릴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미래가 다 앞당겨서 왔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미래, 현재, 과거의 구분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예수 믿으면 그 자체가 영생 되는 거예요. 영생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게 된 거예요. 영생을 위해서.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그 물동이 있잖아요, 물동이, 물 길러 갔으면 뭘 해야 돼요? 물 길러 갔으면 물을 길어 와야지 가만 있는 그 애꿎은 물동이는 왜 버려둡니까?예? 물 길러 갔다. 중간에 누굴 만나든지 ‘아, 참, 내가 물 길러 왔지.’ 물동이는 챙겨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뭐라 합니까? “메시아 만났다! 심 봤다!” 해가지고 물동이를 갖다 버려 버립니다, 물동이를! 얼마나 혼났을 거예요? 그게 추수된 자의 공통점입니다. 뭔가 엄청난 게 오니까 물 뜨고 생존하는 이것은 다 시답지 않은 시시한 일이 되고 말았어요. 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니까.산다는 자체가, 내 생존 자체가 이게 힘든 죽음의 반복인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생존보다 생명이다.”

요한복음7강-빠진 흔적

■요한복음 6장 57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그다음에 중요한 것,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그다음에 또 중요한 것 나오죠, ‘살리라’ 이렇게 되어있죠. 산다는 것, 생명에 대해서 생존과 다른 생명은 어떤 관계성과 엮여져야 되느냐 하면 지금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로 인하여만 유일하게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예수님이 제시했어요. 아버지와 내가 관계있는 그 관계가 생명이다. 이것이 생명이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 했죠. 지금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살았어요, 죽었어요? 분명히 죽었잖아요.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지금 이 세상에서 예수님은 죽은 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남들 보기에 죽었는데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이 관계를 그대로 예수님 안에 집어넣으면 “나를 먹는 자는” 즉 “아버지의 관계 속에 들어온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라고 되어있죠. 비록 네가 죽더라도 ‘살리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관계 이 세계로 빠져나가면 되겠죠. 그래서 이렇게 정리될 수 있어요. 요한복음은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잃어버린 자에게 천국 자리가 마련된다는 원리, 이게 복음의 원리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자에게 천국자리가 마련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나오죠. 간음한 여인을 주님께서 뽑아냄으로써 남아있는 이 세상은 간음한 세계가 되어버려요. 4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음란한 세상으로 봅니다. 혈통이 순종이 아니고 잡종적인 겁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간음한 여인 자리를 쏙 뽑아버려서 빈자리로 만들었어요. 마개 하나 뽑아버리면 나머지는 마개 없이 전에 같은 동질이었다는 것을 티내면서 코르크 마개가 뽑히죠. 코르크 마개를 뽑아버리면 그 빈자리를 남긴 현장이 뽑아낼 때 규정된 그 규정이 자기에게 그대로 다 뒤집어씌워지는 거예요. 너희들이 그 여인을 간음했다 했잖아. 바로 간음한 여인을 샘플로 뽑아냄으로써 너희들이 간음한 자라는 것을, 그 뽑혀 나가는 규정을 남아있는 자들이 그대로 물려받는 겁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된 자를 뽑아서 주께서 거기에 변화를 주어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자로 만들어버리면, 소경된 자를 소경되었다고 규정한 그 모든 남아있는 세상은 무슨 세상이 되죠? 소경의 세상이죠.

■요한복음 10장에서 바리새인들은 목자가 되고 백성을 양으로 생각해서 목자가 양을 제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운다는 그들에게 주께서 자기 양들을 뽑아버리면 그들 자리가 뽑혔으니까 거기에 빈 공백이 남겠죠. 떠나버린 그 빈자리, 지금 빈자리 있잖아요, 떠나버렸으니까. 그 빈자리에 의해서, 떠나버린 자에 의해서 그들은 가짜 목자들이고 가짜 양이라는 것을 들통내는 표적이 바로 주님의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표적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은 더 가관입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살아있을 때 치료가 가능한데 주께서 계속 마르다, 마리아 오빠를 죽을 때까지 기다려요. 죽을 때 됐는데 야, 이거 질기네. 죽을 때 됐는데……. 그런데 전갈이 왔어요. 드디어 기다리다가. 주께서 남의 병은 오지랖 넓게 고쳐주면서, 잡채 얻어먹었지, 탕수육 얻어먹었지,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그 마르다, 마리아 집의 기둥 같은 오빠가 죽지도 않고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빨리 왔어야 되는데 주께서는 계속 시계 보면서 “아직 안 죽었네.” 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자. 가자, 이제.” 하는 거예요. 죽은 자를 발생시킴으로써 마르다, 마리아 오빠에게 일어난 사건에 해당되지 않는 모든 마르다, 마리아 가족 오빠 빼놓고 다 죽은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는 빌미를 주님께서는 오빠를 살림으로써 제공한 거예요. 빈자리가 그들을 규정하는 겁니다. 왜 떠나보냈느냐.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뭐냐 하면 마지막 12장에서 국가 자체에서 떠난 자가 등장해요. 누구게요? 국가 자체에서 뽑혀버린 자. 간음한 세대에서 간음한 여자를 뽑아내서 남은 세계를 음란한 세대라고 규정했다면, 소경된 자를 뽑아냄으로써 나머지가 실제로는 그게 완전히 눈 먼 봉사라는 것을 규정한 것처럼, 마지막에는 국가 자체가 거짓됐다는 것으로 국가 자체를 통째로 다른 국가, 거짓된 국가로 드러내기 위해서 뽑힌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겠습니까? 예수님. 예수님이죠. 예수님 자체가 뽑힘으로써 요한복음 18장에서 내 나라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요 18:36).

※뽑아낸다는 것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잃어버린 자에게 천국에서 새로운 자리가 마련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자리가 없어요. 내(예수님) 나라는 따로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빠져나오죠.

베드로전서 2장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만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새로운 집의 모퉁이돌이 되었나니 (벧전 2:7). 버림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인지요. 버림 안 받은 것은 정말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버림 안 받은 것. 좀 버려줘. 날 좀 버려줘. 성도 같으면 버려줍니다. 마귀가 덤프트럭에 실어서 갖다 버려버리죠.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친절한 마귀 씨가 우리 조직에 필요 없다고 갖다버리죠. 입만 떼면 복음 얘기하는 넌 필요 없다. 목사 파면당하고 교회에서 욕 얻어먹고 ‘넌 왜 그리 사회성이 없나’ 이런 비난을 받는데 그 사회성, 자기들끼리 결속된 사회성이 주님 앞에 버림받은 백성이에요, 거꾸로.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1장 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했죠. 그래서 백성이 아닌 거예요. 백성이 없는 거예요. 백성이 없으니까 백성을 모집해야겠죠.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요한복음 11절과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다시 보겠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리라’ 되어 있죠. 그다음 우리가 생각해야 될 문제는 뭐냐? 그럼 세상은 뭐로 살죠? 이 세상 사람들은 뭐로 삽니까? 성도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가 되면 성도 아닌 그들은 뭐로 말미암아 삽니까? 그들이 살고자 하는 그 환경이 뭐냐 이 말이죠. 그것이 바로 국가의 권력, 국가의 권세입니다. 이게 최종적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요한복음 마지막 18장, 19장에는 두 대장이 등장해요. 이쪽 예수님 나라에는 예수님이 등장하고, 저쪽 세상 사람들이 살고자 하는 것은 국가에 종속되어 국가의 권세로 말미암아 그들은 살아보려고 애를 쓰죠. 그들의 대표자가 바로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OK목장에서의 마지막 결투처럼 둘의 최후의 결투가 벌어지죠.

양쪽 다 기 싸움이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아주 시건방지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희들 종교보다 한 수 위에, 위상적으로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허세와 거만을 부리면서, “너희들의 종교적 수준에 의해서 너희들이 사형시켜달라고 저 예수라는 사람을 나한테 보냈는데 그것마저 뛰어넘어서 내가 그를 풀어줄 권세가 나한테 있다.”라고 이야기해요.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소위 종교인들아, 바리새인, 서기관들아, 너희들이 여호와를 섬긴다 섬긴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여호와가 최고라고 보지만 지금 내가 너한테 제안을 했다는 말은 너희 여호와의 권세보다 실질적으로 더 센 게 뭐냐? 이 나라를 실제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이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국가 권력이 네가 믿는 여호와보다 더 세잖아. 그래서 너희들은 이 예수님의 책임에 대해 나한테 일임했잖아. 만약에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사형을 시켜주면 본디오 빌라도는 여호와보다 위상적으로 더 높다는 것이 증명이 안돼요.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우리가 시키는 대로 사형시켜주세요.” “예. 시키는 대로 사형시켜드릴게요.” 이렇게 되면 안돼요. 그러면 종교가 더 높으니까. 이참에 본디오 빌라도는 그딴 종교보다도 국가가 더 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희들 수준에서 결재 올린 것, 반드시 사형시켜달라 했지? 난 너희들이 발현할 수 있는 권세에 더 붙일게. 너희들 풍습에 의하면 한 사람 놓아주게 되어있는데 어떠냐? 후보감으로 나는 예수를 첨가하는데 너희들 어떻게 생각해?” 너희들이 생각 못한 사면권, 1년에 한 번씩 대통령이 사면하잖아요, 사면권을 발휘함으로써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믿는 여호와라는 신이 국가 아래 있음을 계속 확인시켜 주는 것, 그것에 대해서 그들이 아무 소리 못하고 수용했다는 것은 그들의 종교의 자리는 국가 권세가 할당하고 지정한, 배치된 장소가 돼요.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국가 권세의 보호 아래 사는 겁니다. 국가를 벗어나면 죽죠. 국가를 벗어나면 사형당하고 죽습니다.

 

■이제야 보게 되는 게 교재에요. 교재를 이제 보는데 다 읽진 않고 중요한 것만 보는데 p.5입니다. p.5에 【5. 신체】가 나오고요. 세 번째 단락 보겠습니다. 최초의 인간은 인간이 처음 탄생할 때 모든 인간이 출산될 때 모습입니다. 【최초의 인간은 깨진 달걀에서 흘러나온 액체의 흐름처럼 매임이 없었다. 소위 ‘액체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이 액체 인간이 피부 표면의 구멍들, 즉 눈, 코, 입, 귀 등에 얽매인 인간으로 변한다. 이 구멍들은 신체의 감각 기관들이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무슨 뜻인가? 계란을 만약에 실수해서 식탁 밑으로 탁 깨뜨렸다면 무엇과 무엇으로 분리되느냐 하면 노른자와 흰자가 같이 분리되어서 액체 점액 같은 흰자가 무질서하게 퍼져서 있죠. 계란 껍질은 저쪽으로 날라가버리고 그 안의 내용물이 쏟아지잖아요. 이것이 인간 몸의 자율성입니다.

경찰이 와서 계란보고 “계란! 어이, 흰자. 똑바로 해. 자세 잡아.” 이러면 흰자가 “예” 하고 자세 잡습니까? 경찰은 국가가 지정한 권력 기관이에요. 법에 실린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국가는 철저하게 기계 장치가 되어야 돼요. 그래서 사람들이 쏟아내고 있는 에너지를 적절하게 분배하고 지정하고 소비시키고 또는 생산시켜서 국가 자체를 유지하는 에너지를 지속시키고 보장해야 돼요. 아까 했잖아요. 나는 우리이고 우리는 곧 나이다. 국가가 나를 대신하는 내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나는 주체죠. 내가 갖고 있는 주체는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양도해야 되고, 그래서 군에 가는 거예요, 양도해야 되고 국가가 너는 뭐 하라고 지정할 때 그 자리를 할당받고 배정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국가 안에서 우리 자리가 확보되면서 우리는 나의 주체성을 할당받게 되는 겁니다. 이 권세에서 어느 인간도 빠져나가지 못해요. 종교요? 그건 이미 했잖아요. 바리새인들도 본디오 빌라도의, 로마의 칼 힘, 권력 힘, 무기 힘에 꼼짝 못한다고요. 본디오 빌라도 앞에 바리새인들이 꼼짝 못한다는 것은 예외가 아닙니다.

자, 다시 묻습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삽니까?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국가의 권력으로 산다. 국가의 권력에 대든다든지 거기에 반발하면, ‘산다’의 반대말, ‘죽는다’가 돼요. 죽는다. 이것은 목숨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이것을 찬스라 보는 거예요. 이 땅에서 자기 자리, 국가에서 할당해준 자리를 잃어버린 자는 국가를 돌파한 자가 된다는 거예요. 시시하게 이웃집하고 층간 소음으로 싸우지 말고 최종적인 것, 국가라는 권력체를 주적(主敵)으로 보고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국가를. 왜냐하면 국가가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내 목숨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국가와 싸운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하고 싸우는 거예요. 나는 국가가 할당한 자리에 있을 때만 안전빵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축약하면 뭡니까? 목사는 뭐로 산다? 국가로 산다. 간단한 문제에요. 그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고 사두개인들이잖아요. 그럼 그 큰 교회가 모시는 신은 우상이죠. 여호와라는 이름의, 삼위일체라는 이름의 우상이 되는 거예요. 우상이라는 것은 가짜 신을 말합니다. 가짜 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신, 바리새인 너희들이 여호와가 아닌 우상으로 여겼던 우상에 대해서 우상으로 쳐버리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10장에 나옵니다. 10장 34-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했죠. 이 말씀은 시편 82편 6절에 나오는데 벌써 유대인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이방 민족과 달리 우리는 신 같은 존재라고 우기면서 자신들을 우상시했던 겁니다.

그런데 시편 82편 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부정성 들어갑니다,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같이 죽으며 일반 이방 민족의 하나같이 엎더러지리로다” 말씀의 진행 과정에서, 현재 있는 나를 겨냥한 겁니까, 아니면 말씀의 진행 과정에서 여기서 노선이 달라진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사람은 하나님의 신이 맞아요. 맞는데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니까 신이라고 여겼던 사람은 이게 가짜로 들통나는 거예요, 가짜로.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신이라는 시편 82편 6절의 말씀은 틀렸습니까, 맞습니까? 맞죠. 시편 말씀대로 지키는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이라 하지 말고 ‘이들, 가짜 우상을 섬기는, 자기를 우상화시키는 자들에 의해서 버림받은 자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버림받은 자이다. 말씀의 진척 과정에서 반드시 노선이 두 개로 갈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말씀만 지키면 말씀에서 언급하는 그 결과가 자기와 일치된다고 여겼던 겁니다. 말씀대로 지키면 내가 그대로 된다고 여긴 거예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면 생명을 얻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천주교 또는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 했으니까 이 노선에 본인을 집어넣는 거예요, 본인을. 본인을 집어넣으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수단을 찾느냐 하면 포도주스를 피라 하고 비스켓을 떡이라고 여겨서 그걸 우리 교회가 보증해 줄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들은 말씀 자체가 나를 우상화시키고 이런 나를 비켜나간다는 것, 나는 이미 우상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 곧 예수님에 대해서 거역하는 본성으로 작동하고 있으므로, 말씀이 내게 왔다는 말은 진짜 예수님을 핍박하는 경우가 내 쪽에서 발휘되고 있는 그런 본질이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몰라요.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에요. 그걸 구체화시킨 것이 예수님의 육신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육신 안에 말씀은 완료 상태입니다. 이 완료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아요. 그런데 어쭙잖게 부정성도 모르고 자기가 메시아도 아니고 약속한 독생자도 아닌 주제에 자기가 말씀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나서니까 결국 나오는 것은 핍박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방법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따라서 영생도 없습니다. 영생이 없으면 방법은 뭐냐? 주님에 의해서 우리 자신이 잃어버린 자가 되어야 되죠. 나라는 이 집합 안에 내 자체가 잃어버린 자가 되는 겁니다. 그건 바로 성령이 오시면서 드디어 본격적으로 실시가 돼요.

말씀이 본래 주인을 찾아가야 돼요. 그게 요한복음 5장 39절에 있는데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이걸 패러디해볼까요? ‘너희가 교회에서 성만찬을 통해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와 똑같은 거예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를 비켜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편 82편 6절에 나오는 것처럼 네가 성경 말씀 지키면 신이 된다고 기대하면서 막상 말씀을 대해봤자 말씀이 너로 하여금 신이 아니라 먼지 같은 일반인으로 그냥 전환시킬 것이다, 그 내용이에요.

신이라고 여기고 싶지? 네 마음대로 안 될걸? 이게 성경 말씀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지킬 말씀을 주께서 따로 보내시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이 납득 안 되신다면 히브리서 10장에서 확실히 정리될 수가 있어요. 5-7절에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주께서 율법을 줘놓고 정작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그 뒤에 추가적으로, ‘한 몸’을 따로 준비했어요. 그래서 직접 모든 율법을 홀로 다 지키실 분을, 율법 전문가를 따로 보냈다는 거예요. 그럼 그 전문가가 왔다는 말은 나머지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아니다’가 되는 거예요. 독일어로 Nein!, 영어로 No! 너 아니야! 네가 지킬 게 아니야. 율법은 우리를 저주케 하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게 만드는 거예요. 이 말은 ‘네가 죄인이다’라는 규정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따로’ 있다는 거예요, 따로. 그 분이 따로 있는 거예요. 이제 전체적으로 뭔가 정리가 되시고 감이 잡히죠. 주의 일에서 누구를 배제한다? 나를 배제하는 거예요, 나를.

요한복음 8장 봅시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등장해요. 간음한 여인이 등장할 때 그때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간음한 자를 돌로 치라 했단 말이죠. 간음한 자를 돌로 치라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간음한 자를 돌로 침의 대상에서 빼내주는 거예요. 간음했다고 돌로 치는 그들이 간음한 자에요.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는 간음한 자라는 사실을 돋보이는 방법은 자기가 간음한 세계, 음란한 세계라 합니다, 음란한 세계에서 태어나서 잡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간음에 해당되는 자로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들 중에 있는 어떤 여인을 간음한다고 했으니까 주께서 찾아와서 그 여인보고, “일단 너 잠깐 비켜봐라.” 코르크 마개 빼듯이, “일단 너의 자리는 빈자리 만들어줄게. 나가 있어.” 딱 빼고 주께서는 땅에다 글을 씁니다. 이래도 네가 남을 칠 주제가 되냐고 글을 써요.

그 글을 본 사람들이 나이 많은 사람부터, 이 더러운 세상을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부터 딱 보니까 여자 때린 돌을 쥐고 도로 내가 맞을 입장이 되었어요. 너 여자 때렸지?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그럼 네가 한번 맞아봐라. 오늘 좀 맞자.

그들이 왜 간음한 자이냐 하면 주님께서 죄를 지적할 때 그 죄를 지적한 예수님을 떠났다는 사실이 간음입니다. 얼마나 간음하면 주님을 떠났겠어요. 간음한 여인은 벌벌 떨면서 저기 가도 맞아 죽고 이쪽에서도 맞아 죽게 생겼죠. 주께서 여인에게 묻는 것은 딱 하나였어요. “너를 고소하는 자, 어디 있느냐?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네가 지금 자리 잡고 있는 너에게 할당된 자리는, 너보고 간음했다고 고소한 그 자리에서 뽑혀 나온 자리인 줄 알아라. 이것은 너를 구원함이 아니라 저쪽이 우상의 세계이고 간음한 세계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네가 샘플로 뽑혔느니라. 이게 바로 요한복음 8장의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이번에는 소경 이야기 나옵니다. 9장 5절,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아, 참 어려운 말이죠. 어려운 말인데 제가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새로운 시공간이 자리 잡는다. 이 시공간을 데카르트의 좌표계로 설명하지 않고 블랙홀로 설명해드렸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예수 안에 있을 때 거기에 수채 구멍처럼 빨려 들어온 사람들이 있어요, 여기에는. 다시 이야기합니다. 기존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뭐로 삽니까? 국가의 권력 안에서 살죠. 거기서 뽑아내졌다는 것은 드디어 국가 권력 안에 있지 않게 되고 우리는 빈자리만 남긴 거예요. 국가에서 보면 우리 자리가 없어요. 뽑혀 나왔으니까. 그걸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되어 있지만 골로새서 3장과 보충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 땅에는 내 자리가 없다”가 돼요. 나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죠.그걸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나는 예수 안에서 존재한다. 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그리스도 안 십자가 안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너희들은 십자가로 인하여 내 바깥에 있고 나는 너희들 바깥에 있는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세상에 포함되었지만 예수님은 하늘에 속했고 예수님 외에는 땅에 속한 것처럼 그와 똑같은 현상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성령은 반복이니까요. 예수님을 모델로 해서 그걸 그대로 되풀이해서 적용시켜버려요. 예수님께 일어났던 시공간을 그대로 적용시켜버리면 이게 성령 안이 되는 겁니다.

놀이동산이나 큰 관광지에 가면 커다랗고 투명한 공이 있고 그 공 안에 사람이 들어가 앉아있어서 공이 굴러갈 때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공 바깥에는 물을 좀 뿌려요. 옷도 물에 견딜 수 있는 옷차림을 해서 저 언덕 위에서 굴려버리죠. 이 공이 투명하거든요. 공이 막 굴러가요. 그런데 멀리서 보게 되면 저 사람은 새로운 안, 새로운 세계 안에 속하고 우리는 그 바깥에서 구경하고 있는 겁니다. 공 안에 있는 존재,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공 안이 어떤 세계입니까? 말씀이 다 이룬 거예요.

신명기 28장에 보면 네가 율법을 지키면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죠 (신 28:6).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자들은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되어 있어요 (시 1:2). 주야로 묵상해서 그 결과를 그때그때마다 생산하는 그분과 더불어서 함께 사는 자가 이게 바로 성도이고 그게 완성되었다는 증거가 뭐냐? 성령 받은 거예요.

성령 받았다는 것은 날마다 늘 쉴새 없이 예수님의 완성된 소식을 메일로 받고 있는 상태라는 거예요. 계속 소식을 듣고 있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이 사람이 공 안에 있는 순간, 이 사람은 바깥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이 공이 우리의 시공간과 함께 있으니까 이 공 안도 우리의 시공간과 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같은 물리법칙이 여기에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그러니까 이 공 안에서 만약 6시간 반 동안 놀아보세요. 배고프죠. 물리적인 현상을 적용받잖아요. 배가 고프잖아요, 이 안에서도. 6시간 반 동안 놀았으니 배고프죠. 공 바깥에서도 배고프죠. 이걸 육신이라 하는 거예요. 성도도 육신이에요. 6시간 반 동안 있었기 때문에 6시간 반 동안 늙었습니까, 안 늙었습니까? 늙었겠죠, 조금. a little, 조금. 하지만 늙긴 늙었잖아요. 이게 바로 육신이에요. 몸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6시간 반 동안 그만큼 주님과 더 가까이 있었던 거예요. 이 예가 제가 생각해도 억지 같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요한복음 8장 2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라는 분이 이 세상에 오셨어요. 자기 공 들고 오신 거예요.

그런데 그분을 사람들이 본디오 빌라도를 이용해가지고 자기 국가 세계에서 추방시켰죠. 그게 주님이 원했던 작전이었습니다. 그래야 나라가 둘로 쪼개질 수 있기 때문에. 이 나라 말고 다른 나라는 일단 이 나라를 거쳐서 빠져나가야 이 세상에 속한 자기 백성들도 자기 경로를 그대로 밟아서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빠져나오면서 경로를 만들어요, 경로. path, 길이죠. 길을 만든 거예요. 이 길로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성령이 주어지거든요, 성령이.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소식을 계속 전하는 거예요. 완료했다는 소식을 계속 전하는 거예요. 네가 이미 의인이 되었다, 의롭게 되었다는 소식. 네가 이미 완벽하니 손대지 마라. 거룩하니까. 손댈 필요 없이 완벽하게 거룩한 소식이 계속 들려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그게 경로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처럼 너희들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7). 여기서 바로 산다는 새로운 생명 개념이 등장하면서 기존에 내가 이 땅에서 세상 권세로 산다는 것과 대비를 이루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명 알고 ‘아, 이 땅에 사는 생존은 우리가 신경 쓰지 말아야 되는구나.’ 라는 것을 가장 못 믿는 사람, 가장 믿기 힘든 사람은 누구입니까? 힌트 주겠습니다. 석 자에요. 주님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가장 못 믿는 사람, 잘 모르겠어요? 앞 글자 힌트 줄게요. ‘사’자. 뒷 글자는 ‘님’자. ‘사모님’.

개뿔 신앙도 없으면서 신앙 있는 척, 복음도 모르면서 복음 아는 척하려 하니까 얼마나 이게 위선을 떨어야 되고 조마조마한지……. 교인한테 복음 아는 것처럼 행세해야 되고 실제로는 애 피아노 가르쳐줘야 되지, 학원 보내야 되지. 기가 찰 일이에요. 목사는 하시딤이지, 완전 성경만 들여다보고 있고. 자기가 돈벌이 나서려 해도 경력 단절되어서 취직도 잘 안돼요. 그것도 사모 주제에 직업도 골라 가야 돼요. 이것은 되니 안 되니, 저건 되니 안 되니.

바로 그런 자에게 성령 임하면 무슨 마음이 생기냐? ‘아, 이러다 죽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보다도 천국에 가까운 사람이에요. 너무 지긋지긋해서 죽고 싶은 거예요. 위선자로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못 살겠어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절로 갖게 되죠. 그게 바로 사모들의 인센티브에요. 이렇게 살다 죽을래. 나 위선자 노릇 그만 할래. 이게 사모님에게 주신 인센티브죠. 목사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날 빨리 죽도록 만들었으니.

교재를 좀 보겠습니다. 몸의 자율성이죠. 간단합니다. 몸의 자율성과 반대되는 것은 국가의 타율성. 몸의 자율성이라 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경찰이 와서 대통령이 와서, “어이, 노른자, 흰자. 정신 없으니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 명령 못하죠. 우리의 자아는 국가의 말을 듣지만 우리의 몸은 내 말을 안 들어요. 내 말도 안 듣고, 내 자아나 주체의 말, 국가의 말을 안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아로 보지 않고, 자아를 제키고 몸으로 봐요. 네 몸이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래서 세리와 창기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대로. 강도도 구원받는 거예요. 전에 했잖아요, 막달라 마리아가 귀신 일곱 들렸다고.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이에요. 그 여인을 왜 거기서 빈자리 만들고 타일 뜯어내듯이 빈자리로 뽑아내시느냐 하면 그 여인들은 더는 자기를 의롭게 포장할 수 있는 여력이 다 날라가버린 거예요. 위선 떨 위선거리가 없어요. 날 것 그대로, natural하죠. 생생한 날 것 그대로. 통제받지 않는 내 몸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뭐 이성적 합리적으로 도덕적 윤리적으로 꾸밀 수도 없어요. 남들 보기에 내가 어떻게 되느냐, 그런 것도 생각 안 해요. 모든 타인은 나를 욕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타자는 없어요. 나를 지켜줄 타인도 없어요. 성경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냐 하면 이혼한 여자 말고 과부, 남편이 전쟁통에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과부는 이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런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적절하게 보는 겁니다. 이 땅에서의 국가 힘으로 살 수 없게 되는 자, 국가로부터 배척받고 버려진 자, 국가의 힘으로부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벌 옷 하지 말고 직업 가지지 말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 하죠. 요새 말로 하면 휴대폰도 갖지 말고 그냥 네 운명에 맡기라는 식으로. 복음에 맡겨서 복음이 너로 먹고 살게 하라, 이렇게 그냥 내던져버리죠.

요한복음8강-성령의 역할

■정부를 만들고 국가를 조직하는 것도 그것의 출발선은 가정이다. 가정에서 무슨 훈련이 되는가? 가정에서는 타인을 만나는 훈련, 남을 남으로 인정해주고 그 남이 없으면 내가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그걸 진리로 받아들이는 체험이 일어나는 곳이죠. 아빠 엄마 없으면 내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거예요.

물론 아기가 아빠 엄마 없으면 젖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자기가 죽는다는 걸 알고 울어요. 하지만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관계, ‘아빠 엄마 없으면 너 죽어’라는 명령을 줌으로써 법제화시키는 거예요. 가정에서 법제화시켜요.

가정은 타인과 만나고 타인과의 관계를 법으로 연결시켜 법제화시키고, 법제화시킨 이것이 윤리와 도덕이 됩니다.

이 뭐냐 하면 연대감, 자아 영역의 확장. 나만 나가 아니라 당신까지 합쳐서 나라고 규정하고 싶다는 거예요. 따라서 나의 사촌하고 연대성 있으면 사촌이 뭔가 아프거나 위험할 때 내가 나서서 지켜줄게, 하는 연대감 이게 가정에서 다져지는 결속이에요. 이게 가정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여기서 탈피합니다. 탈피할 때 새로운 타인을 만나요. 새로운 타인을 만나는데 이게 친구에요. 친구를 만나면서 갑자기 이탈하지 않고 점차 점차 가정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벗어나면서 친구하고 사귈 때 그냥 사귀는 것이 아니고 가족에서 형성된 그 사회성, 연대감을 가지고 거기에 레벨이 맞는 친구를 여기서 사귀게 되는 겁니다 친구에서 드디어 사회에 나갑니다. 사회에 나가면 여기서 회사라든지 공기업을 다니겠죠. 회사를 다니면 시간이 없죠. 가족 연대감과 점점 더 멀어지죠. 이 회사 이전에는 혈육 관계에요. 그런데 회사부터는 이익 단체에요. 무지막지한 경쟁을 강요받게 됩니다, 회사에서. 그래서 만약에 친구가 삼성 들어갔다. 그런데 본인은 엘지 들어갔다. 그럼 졸지에 원수 돼서 너 회사 정보 빼내라고 시키는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단 말이죠.

그래서 국가에서는 가정의 토대가 된 이 윤리 도덕성을 국가 전체의 결속력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어서 국가의 힘이 개입해서 회사의 경쟁을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약간 어렵게 하면 국가가 개인에게 있어서 타자가 돼요. 국가가 타인이 되는 겁니다. 국가가 타인이라는 말은, 내 욕망이 원했던 대상(object)이 바로 국가가 되는 겁니다. 국가가 잘 되면 나도 덩달아 기분 좋고 잘 된다. 손흥민 본 적 있어요? 손흥민을 언제 봤다고 응원합니까? 손흥민이 내가 속해있는 국가를 대표한 팀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손흥민이 1주일 뛰고 2억 받는다면 그게 자기 돈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나를 대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인간은 어릴 때 생긴 타인과의 결속을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못 벗어납니다. 내가 좋아요. 자발적으로 내가 원해요. 국가에 소속되었다는 그 정서적 안도감을 내가 원하고 그것을 우리는 행복이라고 불러요, 행복. 선진국에 들어서서 후진국은 못 사는 나라라는 것을 아래쪽으로 바라보는 그 즐거움. 다른 나라의 가난이 주는 그걸 매개로 해서 자기가 우월감을 갖는 그것이 자기 욕망을 충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기분 좋은 걸 가지고 행복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드디어 요한복음 13장에 들어왔어요. 13장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의 확장이에요. 유월절의 특징은 국가의 결속력을 지워버린다는 거예요. delete. 국가의 결속력을 지워버려요. 국가라는 것은 너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가 환상인 것처럼, 그 부모가 아버지의 이름이거든요, 그런데 커서는 국가가 나의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국가가 나의 아버지, 이상형이 되는 거예요. 아버지의 품 안에서 나는 보다 안정감을 느끼는 겁니다. 내가 아버지를 신뢰하는 것처럼 커서는 국가를 신뢰하는 거예요. 그래서 국가의 특징은 보수적입니다. 안정감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수적이에요.

그런데 이 국가를 구약에서는 짐승이라 해요. 국가를 악마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괴물이 조명을 받아서 크게 등장한 것이 국가라는 겁니다. 건물 옥상에 조명 시설이 있을 때 이 앞에 박쥐 그림을 가져다 하늘에 비추면 하늘에 뭐가 생깁니까? 배트맨이 보이죠. 나의 마음을 세상에 투영한 것이, 우리나라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고 그게 내 속에 있는 괴물의 바깥 투영체입니다. 그리고 그걸 실재로 느낍니다. 이걸 환상으로 못 느끼는 것은 실제 권력에 의해서 지시받고 법제화되고 법률로 명령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왜 배신했습니까? 누구 앞에서 배신했죠> 바로 국가 권력과 함께 있는 자 앞에서 국가가 예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도 덩달아서 나도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싫어한다고 이야기했어요. 베드로는 한 발자국도 국가라는 실체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구원되지 못했지요.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는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한다 했으니까 끝까지 사랑해서 건져낼 수 있는 근거를 예수님 본인이 단독적으로 만들어야 되겠죠. 거기에 맞게 드디어 주께서는 유월절 양의 운명으로 가시는 겁니다.

유월절 양이 되는데 유월절 양의 능력은 모든 것을 지우개로 지워버리는 거예요. 환상이기 때문에 지워버리는 겁니다. 국가를 지워버린다면 뭐가 환상이 아니냐 하면, 국가를 지워버릴 수 있는 이 지워버린다는 행위만은 진짜에요. 이게 진짜배기죠. 국가에 대들만한 자신감이 진짜겠죠.

국가보다 더 센 게 없는데 그 센 것을 지워버리는 거예요. 지워버리면 빈자리 생기겠죠. 그 빈자리가 제자들로 하여금 떠난 자리로 만드는 겁니다. 빈자리를 떠난 자리로 만들어요. 그래서 유월절 어린 양이 이 빈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새로운 타인으로의 관계형성

그럼 여기서 요한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여기부터 이제 약간의 어려운 게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자, 여기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게 되면 우리가 구원받느냐? 안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분이 우리의 새로운 타인으로 관계가 형성되어야 되기 때문이에요.

세상 죄를 지고 갔다. 그래서 뭐? 뭔데? 혼자 구원받겠네. 끝나는 거예요. 예수님 혼자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러니까 유월절의 율법을 완성함으로써 그 완성하신 당사자만 구원받죠. 다른 사람은 구원이 되지를 못합니다. 왜? 본인이 안 했기 때문에. 내가 하는 행동이 나를 구원하는 거예요. 이게 원칙이거든요. 그럼 예수님한테는 뭐가 더 필요합니까? 내가 하는 행동이,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자의 행동으로 이전되어야 될 필요가 있어요. 이게 전달되어야 될 필요가 있어요. 그것이 유월절에 확정되어야 돼요. 전달되어야 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 혼자 훌륭하면 예수님 혼자 구원받죠. 관계없죠.

그래서 요한복음 1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추가적으로 이야기를 하시는데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죠.

그런데 여기에 플러스 들어가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에게 위에서 뭔가 내려와요. 비둘기 같이 성령이 내려오십니다. 비둘기 같이 온다면 비둘기는 우편 배달부거든요. 전달 기능을 해요. 노아 방주 때 비둘기를 보냄으로써 새 땅과 노아 사이를 연결시키죠. 브릿지처럼 연결해주는 거예요. 저쪽의 소식과 이쪽의 상태를 연결시키는 게 비둘기였습니다.

연결됨으로써 이 세계를 더욱더 계속 이어가고 적용시키고 확정하는 기능자, 그게 비둘기라는 모습으로 온 거예요. 비둘기 같이 성령이 오셨어요. 그러면 여기서 중요하니까 여러분께 물어보겠습니다. 성령이 왔을 때 성령께 주도권이 있습니까, 예수님께 주도권이 있습니까? 성령이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성령이. 예수님의 주도권을 성령이 갖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성령이 주도권이 있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고 있고.

여기서 뭐라고 하나님께서 이야기했느냐 하면, 성령이 임했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또 추가적으로 하나 더 들어갑니다. 첫째,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간다, 두 번째,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해서 아버지의 사명을 예수님 홀로 감당하고 있다.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성령을 받은 그분이 남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지시를 받게 돼요. 바로 그것이 33절에 나옵니다.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에요.

지금 이 세 가지, 아버지께서 성령 보내시고 예수님께 왔다. 그럼 아버지, 성령, 예수님이죠. 여기에 인간이 낍니까, 인간은 끼지 않습니까? 인간은 완전히 배제되는 거예요. 그래서 혈통으로나 육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만 나는데 그 뜻이 뭐냐? 이 세 가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성령 보내시고 성령께서 예수님께 임하시고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시는 거예요.

예를 들면 폭포가 있는데 폭포가 이중 폭포입니다. 한번 떨어지고 또 떨어지는 거예요. 한번 예수님께 떨어지고 예수님께 떨어진 그것이 또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또 떨어질 때에, 성령이 예수님께 오잖아요. 어린 양이 다 이루게 되면 예수님께서 어느 자리에 가느냐 하면 주도권을 가진 성령의 자리로 옮겨가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손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지점, 장소가 왼쪽이 아니고 오른쪽이에요- 하나님의 오른쪽에 하나님의 언약을 달성하신 분께 성령 세례를 주는 것을 맡기고 일임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미 이것은 완성된 상태에요. 세상 죄를 지었다는 것이 완성된 상태에요. 그럼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는 사람은 우리가 추가한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추가할 게 없죠.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일단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냥 완성된 자체를 택배로 받는 거예요,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아침에 현관문 여니까 ‘새벽탁송’이라 해서 뭐가 와있는 거예요. 열어보니까 겉모습은 성령, 안에 들여다보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지우개, 우리의 권력을 다 지우고 나까지 다 지워버리는 그러한 힘을 선물로 받는 겁니다.

주님이 떠난 자리가 찾아오게 되면 나 있는 자리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존재감이 사라지면서 있던 사람이 없는 존재로 전환되죠. 그럼 나는 어디 있느냐? 내가 떠남으로써 새로운 내가 되는 거예요. 새로운 나, 주님 안에서의 나로 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이 뚫을 수 없는 인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 본래 자리를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해요. 인간은 흙으로 만들었죠. 흙이 인간일까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일까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입니다. 가장 모델적이고 최초의 인간다운 인간은 형상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 두 번째 아담이 돼서 새로운 인간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에 의해 마지막 아담의 노선에서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인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형상 그대로 있어줘야 인간이고 형상 빠지면 그냥 흙덩어리에 불과합니다. 흙의 조형물에 불과하고 우상에 불과하죠. 그래서 이렇게 보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우상이고 환상이고 가상들이에요. 진시황이 죽었을 때 십만 명의 군대가 진시황 무덤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게 사람일까요, 흙일까요? 흙입니다. 안 가봤지만 사진으로 봤어요. 사람을 진흙으로 만들어 마차까지 똑같이 해서 쭉 세워놨어요. 그걸 창으로 밀면 다 부서지잖아요.

그 조형물이나 오늘날 인간이나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새로운 인간이 등장했다는 말은 ‘기존 인간들아, 좀 깨어져라.’ 그런 뜻이거든요. ‘좀 없어져줄래? 꺼져줄래?’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인간 세계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기존 국가는 짐승의 국가가 되어서 국가도 안 되고요. 그 속에 인간은 인간도 아니에요.

진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를 머금어야 그게 하나님의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인간 되는데 있어서 성령께서 역할을 하죠. 그 정도는 여러분 이제 아시겠죠? 그 다음 순서 들어갑니다.

자, 그럼 이제 예수님께 집중해봅시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떠한 길을 가야 되느냐?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게 되면 죄가 무거울까요, 예수님이 무거울까요? 죄가 예수님을 압도하죠. 죄가 있는 곳에는 율법에 의하면 저주가 있죠. 저주가 셀까요, 예수님이 셀까요? 어느 것이 강력합니까? 저주가 강력하죠. 그래서 예수님은 저주받습니다.

저주만 나오도록 저주의 제물이 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끊어진 것이 저주거든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이 저주받을 때 제자들은 뭐했죠? 그냥 아무것도 안했죠. 도망치기 바빴죠. 그게 우리의 원래 모습입니다. 예수님, 예수님 해도 세상 권력 속에 있기 때문에 세상 권력에 의해서 뽑아져 나오는 데 있어서 예수님만 빠져나오지, 다른 사람들은 못 빠져나옵니다.

안 빠져나와도 괜찮아요. 예비군 훈련하시고 군에 가세요. 안 빠져나와도 성령 받으면 됩니다. 성령 받으면 돼요. 성령 받게 되면 우리 자신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이제는 김흙, 최흙, 박흙, 이젠 흙이 돼요. 흙이 다 된 사람도 있고, 흙 되기까지 좀 많이 남은 사람들도 있고 반쯤 흙이 된 사람들도 있고……. 그렇게 웃고 즐기다가 언젠가 ‘흙 되었습니다’ 하고 부고장 날아오고, 가시는 길 잘 보내드리겠습니다, 하고 보람상조 차 왔다갔다 하고 그렇게 되죠.

저주 아래 있는 이 코스, 이 경로를 주께서 그렇게 만든 거예요. 주께서 만든 sequence, 순서대로 이제 가는 겁니다. 그대로 하는 거예요. 주께 일어난 그 상태, 저주 아래 들어가서 영광의 몸으로 다시 부활되는 그 코스

다른 길은 없어요.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은 없다, 얼마나 부정성입니까.

벌써 또 잊어버렸어요? 긍정적인 세계, ‘앞으로 잘 될 거야’하는 세계가 뭐로 포위되어 있다고요? 부정성으로 포위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긍정에서 빠져나와야 되는데 우리가 손 놓고 있어요. 아무것도 못해요. 할 수가 없습니다.

할 수가 없는데 요한복음이라는 것이 말씀이잖아요. 말씀이 주어졌다는 것은 앞으로 말씀대로 그대로 우리에게 코스 잡아서 적용되는 거예요, 말씀대로. 그 말씀이 요한복음 1장에 보게 되면 ①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간다, ②성령이 임한다, ③성령으로 완성하신 분이 자기에게 주어진 성령을 우리에게 그대로 세례 주는 거예요.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너희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성령 오지 않으면 죽는다. 제대로 죽는다, 가 되는 거예요. 죽음과 삶을,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이 기준점으로 정해놨다는 이것이 요지부동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요한복음을 끝내면서 다른 것도 알아야 되지만, ‘확정되었네, 진리가.’ 이것만 알고 있으면 돼요. 모든 것이 확정되었다는 거예요. 난 이제 예수 버리겠어. 버리든 말든 마음대로 해요. 네가 버려도 마지막 때 다 불러낼 거요. 진리는 뭐냐? 이미 다 이루었어요. 확정되었어요.

그게 통보 들어오면 구원받고 그게 통보가 안 오면 가시던 지옥 길로 그냥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통보가 오게 되면 점차 내 몸이 안개가 되고 흙이 되고 자꾸 내게 의미 있던 것, 내가 중요시했던 가치, 이게 점점 더 희미하게 delete, 지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국가라는 타자, 이 타자 안에서 국가로 형성된 그 질서로부터 내 자리를 배정받아야 비로소 나는 산다고 여기는 것,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현재 눈에 보이는 국가로 인하여 나의 어떤 특정 자리를 확보해야 비로소 나는 제대로 산다, 행복하다, 내 미래가 열렸다, 라는 식의 이러한 인간성, 이게 바로 본래 우리 모습이에요.

종교도 국가 밑에 있으니까요. 교회 다닌다고 하다가 예비군 훈련 나오라 하면 나가야 되죠. 누가 힘이 센데요? 국가가 힘세지, 교회가 힘셉니까? 교회 까불다가는 푸틴이 와서 밀어버리는데요. 크리스마스 때 푸틴이 미사일 쏘고 이러는데요. 국가가 더 세지, 종교는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국가가 나를 영원히 보호하는 타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은 “다 이루었다. 내가 이제 너의 자리를 지워줄게.” 너의 자리를 지워주게 되면 나도 희미해지지만 이 타자의 자리도 희미해져요. 복음 없는 친구, 복음 없는 일가친척, 이거 별 의미 없습니다. 저건 뭐 어둠에 속하는데… 이런 식으로 의미 없어요. 국가가 지시하면 “예, 예.”하고 따라가기는 하지만, 가만히 있는 성령께서 자신을 주께서 이끄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저주의 무게에 대해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저주의 무게는 국가의 무게다. 저주의 무게는 짐승, 국가의 무게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국가를 이용해서 우리하고 예수님하고 떨어지게 만든다는 거예요. 떨어지게 만들어서 따라가지 마. 따라가지 마. 애들이 어릴 때 무턱대고 엄마 따라가잖아요. 그때 엄마한테 중요한 일, 만약에 선보러 간다면, 이상한 사례를 들었지만, 친척들이 아이보고 “넌 따라가면 안 돼. 상대방 새 남자한테 아이 있다고 하면 안 되니까 따라가지 마.” 설정이 좀 이상한 설정입니다만. 국가로 하여금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고 싶어도 우리는 따라가지 못하도록 성령께서 이렇게 떼내어 줍니다. 그게 요한복음 13장에 나와요. 전에는 이걸 보고 ‘베드로 참 안타깝다’ 했는데, 이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안타까운 것이 아니고 ‘감사합니다’가 나와야 돼요. ‘주님과 떼줘서 감사합니다. 어쭙잖게 자기 주제파악도 안됐으면서 주의 일을 한다고 나섰는데 그게 얼마나 잘못된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는 그런 자유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37절,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간 성령 오지도 않은 주제에 그 목숨이 어디 쓰잘데기 있다고 그 더러운 목숨을…, 가만있어도 죽는 목숨 그게 뭔데. 그냥 죽어. 네가 따라올 수 없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닭이 여기 투입되죠. 여기 닭이 왜 등장합니까? 닭이 너보다 낫다는 뜻이에요. 닭은 시키는 대로 하잖아요. 베드로야, 너 왜 자꾸 고집을 부려. 고집이 왜 그리 심해. 닭은 시키는 대로 파이브, 포, 쓰리, 투, 원, 꼬끼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닭 울 때 베드로 한번 주님 배신하고 저주하고, 닭 한번 울 때 또 저주하고. 죽이 맞아. 추임새가 멋져요.

베드로 자리에 닭을 집어넣어서, ‘베드로야, 네가 나한테 나올 생각하지 말고. 내가 예언한 대상인 닭이 하는 그 행위가 그러하듯이 바로 네가 나를 떠나서 결별하는 것도 이미 예상한 나의 뜻이다.’ 라는 것을 베드로에게 각인시켰죠.

배신해야 되는 역할을 맡은 겁니다. 베드로도 따지고 보면 연기자죠, 역할자. 베드로도 배우에요. 여러분들도 배우이고. 닭도 주께서 설정해놓은 배우죠. 그러니까 닭으로 하여금 베드로 자리를 교체시킨 것은, 이 모든 일은 지금도 홀로 하시고 앞으로 구원받는 모든 여정에서도 오직 주님 홀로만이 작용해서 나중에 천국 갔을 때 내가 아무 한 것도 없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화들짝 감격하고 놀라게 만들어요. “아무것도 한 것 없는데 제가 여기 왔습니다.” 이런 고백이 절로 나오도록.

■이제 14장에 들어갑니다. “왜 저를 이렇게 떼놓으시렵니까?” 하니까 여기서 “내가 너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거 참 어려워요. 처소, 누구 처소냐 하면 베드로 처소죠. 현재 베드로는 이 지상에 자기 자리가 있다고 자부하죠. 현재 자기가 있으니까 처소가 있는데 그 처소는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은 처소가 아니에요. 이것은 인정받지 못한 처소입니다.

그럼 처소를 마련한다는 말은 네 처소를 이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죠. 그러면 주께서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그다음 작용은 뭡니까? 처소는 이미 마련되었기 때문에, 있는 자기 처소를 헐어야 되겠죠. 처소를 헐어버려야 되겠죠. 그 작업이 바로 성령의 작업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내 존재를 자꾸 흐릿하게 만들어요. “제가 이번에 뭐 어떻게 해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럼 성령께서 “의미 없다.” “이번에 투표했는데 제가 90% 찬성으로 장로가 되었습니다.” “의미 없다. 아무 의미 없다.” “제가 교회 목회하다가 이제 퇴직했습니다.” “그냥 기원에서 바둑이나 둬. 아무것도 하지 마.”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지워버릴 수 있는 쪽입니까? 내 가치가 망할 수 있는 쪽이 어느 쪽입니까?’를 계속해서 촉구하는 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네 자, 추임새, 할렐루야! 어느 쪽으로 가야 내가 망합니까? 뭐 물을 필요도 없어요. 지금 망하고 있으니까. 알아서 잘 망하고 있으니까. 돌아가는 일이 여러분 뜻대로 되는 것 봤어요? 안되죠. 잘 망하고 계신 거예요.

처소 이야기하고 난 뒤에 또 철딱서니 없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4장 5절에,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이 도마 보세요. 참, 자기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주께서 길을 알려주지 않은 것은 간단하게, 유치원 애들도 아는 이야기에요, 오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어디로 가면 됩니까?” 오지 말라는데……. 오지 말라는데 “왼쪽, 오른쪽 어느 쪽으로 갈까요?” “오지 마!” “어느 쪽으로…?” “오지 말라니까!”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여기서 하나 더 집어넣으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내가 막힌 길이고 내가 막힌 진리이고 내가 막힌 생명이다. 오지 마!” 이거 집에 걸어놓은 어떤 교인들도 있어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 사람들이 액자 걸어놓고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막혔다는 그것을 집어넣을까요, 안 넣을까요? 안 넣죠. 그러니까 그걸 보고 있는 제 마음이 또 아프죠. 저게 막힌 길인데. 우리가 갈 수 없는 길이거든요. 주님 쪽에서 오는 것이지, 내가 길을 알고 진리 안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걸 불연속성이라 하는데 그 불연속성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라는 말은, 막혔었다는 것을 보게 하는 거예요. 이 길이 막혔다. 다 통과하고 난 뒤에 뒤돌아보니까 그 길이 막힌 길이었어요, 막힌 길.

그 뒤는 쭉 생략하고 14장 12절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뭐 예배당 짓습니까? 그게 아니고 내가 모든 타자로부터 버림받는 그 큰일을 하듯이 너희들도 세상으로부터 깔끔하게 버림받을 수 있느니라. 여기서 하나 더 보탠다면, 믿씁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망한 것처럼 너도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로 이 땅에서 실패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믿씁니까? ‘믿씁니까’는 이럴 때 사용해야 되죠.

주께서 하신 주님의 일, 그 큰일을 우리는 감히 못합니다. 내가 너무 아까워서. 그런데 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겁니다. 내가 나와 이별할 수 있고 내가 나를 버릴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아주 우습게 볼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있기를 여러분들께 바랍니다. 괜히 여러분께 가치 있다고 한다면 일곱 귀신이 뭐에요, 열두 귀신 다 달려듭니다. 너는 잘 할 수 있어. 미래 희망이 있어. 아니에요. 우리는 어느 쪽이 망하는 길인지, 그게 생명의 길이고 그게 좁은 길이고 영생의 길입니다. 그래야 세상 가는 길과 정반대의 길을 갈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일기 쓰거나 가계부 쓸 때, 오늘은 얼마나 망했는가 한번 보자. 아, 오늘 이렇게 망했구나. 이번 달 수입은 이천 육백 만원, 아이고 망했네. 돈을 사랑하는 쪽으로 가버렸네. 오늘 주식 던져놨는데 21%, 망했어. 주여, 왜 자꾸 망하는 길로 가게 하십니까. 오늘 애 성적을 한번 볼까? 또 성적이 올랐네. 야, 이거 어쩌려고 성적 오르는지 모르겠다. 주여, 왜 자꾸 애를 망하는 변호사 쪽으로 망하는 의사 쪽으로 왜 자꾸 몰아넣습니까. 맨날 옆에 책 쌓아놓고 공부만 하고 엄마의 심정은 애타기 짝이 없어요. 연기입니다, 연기. 그냥 연기죠.

그다음 봅시다. 14장 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전에 설명했는데 또 설명해드리겠어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죠. 버려두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게 문제인 거예요. 성경에서는 “내가 너희를 다시 찾아올게. 일단 우리 갈라서자. 일단 너는 네 자리로, 나는 내 자리로 갈라서자.” 우리는 졸지에 고아 되었잖아요. “내가 고아를 만들었는데 내가 다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내가 찾아서 너희를 데리러 올게.”

안 오면 어떻게 할까요? 지금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믿음이 없죠.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 없음을 점점 더 노출시키는 거예요, 믿음 없음을. ‘내가 다시 올게’ 할 때 그들이 기다렸습니까? 안 기다렸습니다. 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헤어져야 했고 그 헤어진 불연속성을 메우는 것은, 그들의 믿음으로 메꾸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성령으로 그들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해요. 중요한 결론인데요. ‘주님을 기다렸더니만 주님과 재회했다.’ 이런 인간은 주께서 죽여 버립니다. ‘내 식대로 사는데 주님이 자기에게 한 약속대로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고 찾아왔다.’ 이들이 바로 천국 백성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요한복음에서 말하기를, 예수님 죽고 부활하고 난 뒤에 주의 모든 말씀을 주께서 친히 이루었다는 사실을 성령 오고 난 뒤에 알아요. 그러면 성령 오기 전까지는 끝까지 그들 쪽에서 주님께로 다가오는 모든 다리를 다 지워버리게 되는 겁니다. 다 지워버리게 돼요.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을 기다리는 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그들에게 사랑이 끝났을 때 비로소 사랑이 시작되거든요. 심지어 인간들도 그래요. 사랑할 때는 사랑이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자기가 투자해놓고 투자의 결실을 상대방에게 뽑아내려고 하는 것이 흔히 사랑이라는 말로 통용돼요. 결혼 안 한 사람들은 잘 알아들으세요. 투자해놓고 투자에 걸맞는 내가 예상한 결과를 뽑아내려할 때 사랑이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도 아닌 것이 사랑이라 우기면서 그 수명이 다 됐을 때, 끝났을 때,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랑이 비로소 보이죠. 그러나 인간은 주님이 아니고 둘 다 인간이기 때문에 한쪽의 사랑이 끊어지게 되면 한쪽이 삐치고 삐칠 때 사랑하게 되면 또 삐친 채로 ‘한번 또 용서해줄까?’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똑같이 사랑하는 경우는 인간에게 단 한 경우도 생기지 않습니다. 한쪽이 쉬면 한쪽은 열나고 한쪽에서 열심이 끊어지면 또 다른 한쪽에서 시작되고 그런 겁니다. 심지어 인간과 인간 사이 뿐 아니라 인간과 개 사이도 마찬가지에요. 개는 귀여워해주면 자기가 돛대인 줄 알고 침대 막 기어오르죠. 그래서 쫓아내면 그때는 끼잉, 낑. 밖에 나가서 사랑해달라고 하잖아요. 개나 인간이나 전부다 똑같죠.

주께서는 철저하게 기다린 보람으로 구원받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하십니다. 그러니까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기다려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기다리면 오지 않고 안 기다리면 오시는 분.

철저하게 예수님이 이루는 그 모든 sequence, 순서에 인간의 요소가 조금도 섞이면 안돼요. 왜냐하면 홀로 다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추방된 자이고 쫓겨난 자이기 때문에 죄수에게 어떤 것도 기대 안 해요. 우리는 자꾸 성의를 표시하려고 하는데 그러지 마세요. 죄수는 죄수다워야 돼요. 그래야 예수님의 유월절 어린 양이 빛이 납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부심과 용기가 없어서 그래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찾아오시는데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26절에 보혜사가 등장하죠.

제가 14장을 이렇게 집중적으로 하는 이유는 그다음 15장, 16장, 17장, 18장은 14장 안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다 들어있어요. 이거에요. “너희가 내게로 오는 방법은 내가 던진 밧줄 -이 밧줄이 뭐겠습니까? 보혜사- 내가 던진, ‘다 이루었다’가 매겨져 있는 성령 없이는 너희가 절대로 내게로 올 수가 없다. 그리고 내게로 왔을 때 내가 너희에게 준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오너라.”

주의 말씀대로만 진행되어서 가는 곳이 천국이구나, 라는 것을 말씀대로 밟아서 오는 거예요. 사뿐히 즈려 밟고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가는 곳마다 골짜기마다 ‘주께서 이런 말씀을 남겼구나. 왼쪽으로 트니까 주께서 이런 말씀 남겼구나. 이건 요한복음 13장이네. 요한복음 14장이네.’

하여튼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어진다는 것을 늘 느끼면서 살아가야 돼요, 성도가. 성령께서 당기면 그렇게 족족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말씀 속을 통과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도 주님이 이루었고 저 말씀도 주님이 이루었고. 그럼 내가 한 것은? 없죠. 나는 지워져야 되니까.

그것이 요한복음 17장 24절,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그 사랑을 주께서 찾으십니다. 드디어 창세 전으로 되돌립니다.

다시 묻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나라는 것은 없었어요. 그러면 주께서는 없는 나를 예수님이 새롭게 만드신 겁니다, 없는 나를. 그런데 지금은 같이 중첩되었어요. 내가 알고 있는 나와 주께서 만드는 나는 같이 있거든요. 그러면 주께서 성령께서는 내가 아는 육의 나와 영의 나를 우리 안에서 헤어지고 점점 이별되게 하는 거예요.

이걸 주일 낮 설교에서 설명했는데 이것만 하고 오늘 강의 마치겠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나의 내부에서 현재 자아(주체)와 간격이 벌어져요. 간격이 벌어지면서 불연속성이 생기는데 주께서 준비한 나가 따로 있죠. 이것은 말씀대로 다 이루었다,의 나에요. 여기서 성령이 계속 일하시면 나는 불연속적이니까, 육의 나는 영의 나를 믿을 수 없으니까, 계속해서 후패하고 썩고 육적이고 세속적이고 감정적인 쪽으로 가겠죠. 가게 되면 영의 나와 점점 더 간격이 벌어지겠죠. 벌어지니까 벌어진 만큼 이걸 건너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공로만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주께서 이렇게 하게 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나오는 고백이 뭐냐? 나다나엘이 고백한 것과 똑같은 고백이에요. ‘어떻게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날이 갈수록 70이 되고 80이 되도, 어떻게 허물어져야 될 나를 이렇게 구원하셨습니까? 왜 그런 고백이 나오느냐 하면 자기 내부에 큰 간격이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주께서 준비한 게 보이기 때문에 너무 좋아서 그런 고백을 하는 거예요.

어떻게 돈만 알고 이렇게 내 자존심밖에 모르는 나를 이렇게 구원하셨습니까. 날마다 그것이 증거 되기를, 더해지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9강-부활의 여분

■요한복음 20장, 막달라 마리아가 최초로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갑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무덤에 가고 그다음에 두 제자가 가고 그다음 다시 막달라 마리아가 가죠. 처음 막달라 마리아가 갔을 때는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고 두 제자가 갈 때도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두 번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을 때 두 천사와 더불어서 예수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첫 번째 갔을 때 뭐가 문제였느냐 하면 이 무덤이 빈 무덤이었다는 거예요. 이번 강의 중에서도 마지막 강의가 역시 상당히 중요한데요. 빈 무덤에 대해서 두 가지의 견해를 대조하는 것이 굉장히 요긴한 겁니다.

하나는, 시신 도난사건이에요. 무덤에 시신을 넣어놨는데 시신이 없어졌다. 그럼 이것은 시신 도난사건이죠. 시신을 누가 갖고 가버린 거예요.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시신을 누가 가져갔습니다.”라고 이야기 했어요 (요 20:2). 막달라 마리아의 고백, ①시신은 도난당했다- 막달라 마리아.

두 번째는, 시신은 도난당한 것이 아니고 죽었던 분이 부활되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의 현장 방문을 통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느냐 하면 ①시신이 도난당했다,에서 ②죽었던 분이 부활되었다,로 바뀌도록 주님께서 유도하신 거예요.

그럼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둘 다 무덤은 비어 있어요. 비어 있는데 이것이 시신 도난사건이 되어버리면 최종적인 나의 진지함, 가장 심각한 것은 내 존재가 제일 중요하고 심각하다는 이 사실을 변경 안 해도 돼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 도난사건이 많으니까. 도둑이 들어서 귀중품을 가져갔다. 가져간 그 사건을 듣더라도 역시 한결같이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한 거예요. 시신 도난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내 가치에 어떤 변동사항이 없는데, 그런데 죽었던 분이 부활되어버리면 최종 진지함이 나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어버려요. 나는 어느 세계에 속하느냐 하면, 태어나서 죽으면 난 없어지니까 출생~죽음의 중간이 중요하다고 여겼던 건데, 죽었던 예수님이 부활되어버리면 내가 진지하고 내가 제일 심각하고 중요하다 여겼던 이 영토가 확장되거든요, 죽음 이후로.

죽음 이후로 확장되어버리면 나는 중요하다, 나는 중요하다, 나는 중요하다, 하다가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나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분을 부활시켜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되었다는 말은 평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실제가 되는 거예요. 실제가 돼버려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러니까 예수를 믿지 아니한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이 말이 엄포가 아니고 농담이 아니고 그냥 해보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로 지옥 불이 있어요. 그 말씀을 하시고 죽었던 분이 지금 안 죽고 있으니까요. 살아나셨으니까요. 인간이 죽고 난 뒤에 대해서는 우리는 일단 모르는 걸로 쳐서 지옥이 있든 천국이 있든 누가 가봤냐? 이런 식으로 제켜버릴 때 남는 것은 역시 내가 제일 중요해요. 역시 나의 행복이 제일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시신 도난사건은 나의 이 마음가짐이 별로 달라질 필요가 없어요. 누가 가져갔겠지.

 

■막달라 마리아가 어디서 어디로 이동한다 했습니까? 처음에는 ①번으로 생각했어요. ‘우리 예수님 시신을 누가 가져갔지?’ 제자들 붙들고 “제자님들이여, 누가 우리 예수님 시신 가져갔어요.” 이렇게 했어요. 제자들이 보니까 시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제자들은 없고 막달라 마리아가 다시 갔을 때 거기 예수님께서 턱하니 앉아 계셨어요. 두 천사는 예수님 누웠던 양쪽에 있었고요.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내가 다시 살아난다고 전에 말씀했잖아. 내가 그렇게 너한테 이야기를 했잖아,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그럼 죽었다가 살아난 것만 믿을만한 겁니까, 그 외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다 믿을만한 겁니까? 전부다 믿을만한 거죠. 그럼 그 믿음에 대해서, 막달라 마리아가 시신 도난사건으로 처리했다는 말은 시신 도난사건으로 이해했다는 이 순간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를 믿었다는 겁니까? 자기 자신을 믿었던 거죠. 최종 의미가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로 하여금 ‘어? 무덤이 비어있네. 우리 랍비, 우리 선생님의 시체를 누가 훔쳐갔지?’ 이럴 때는 자기 신념의 변화가 하등 없어요. 그런데 부활을 함으로써 자기 속에 주의 말씀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부활한 것뿐 아니라 나머지 모든 것도 진실이었던 거예요, 진실.

그러면 내가 나를 믿는 것은 더 이상 버티기가 곤란하죠. 이제부터는 나를 믿어서는 안 되죠. 내가 주의 말씀의 훼방자로 드디어 규정되는 순간입니다. 내가 바로 주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입니다.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네가 나를 핍박했다.” 너는 너를 믿었으니까. 너의 생각과 너의 결정과 너의 판단이 가장 진지하고 가장 심각하고 가장 중요했으니까. 그걸 네 인생 의미의 마감으로 생각했으니까. ‘죽고 난 뒤를 누가 알아? 그건 몰라도 돼.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행복이 중요하니까. 나를 믿는 그 자체가 행복이니까.’ 이렇게 살다가 그것이 바로 주님에 대한 핍박이었던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함께 계심(실존성의 침범현상)과 의식변화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어느 누구를 의식하고 일어난 사건이거든요. 모든 인간은 불신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의식해서 죽음 뒤의 가장 최종성까지 내다보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오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의식에도 변화가 있어야 되겠죠. 어떤 변화인가? 변화된 의식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세 번 등장했어요.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세 번 등장했습니다.그럴 때 사람들이 지금 막달라 마리아의 의식대로 놀라운 변화,‘아 나를 믿는 것이 주님에 대한 핍박이었구나. 주님에 대한 모독이었구나. 내가 나를 믿는 자체가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게 만들었구나. 주님만이 진실한데…….’

당시에 제자들이 일곱 명 있었거든요. 고기 잡으러 간 일곱 명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찾아갔을 때, 사람들은 일곱 명에게 세 번째로 예수님이 찾아갔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잘못이에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온 게 아니고, 지금 이 인식 변화가 되어버리면 이렇게 보면 됩니다.

1인용 침대 있잖아요. 매트도 1인용 매트 있죠. 만약에 두 사람이 춥다고 1인용 매트 깔아놓고 그 위에 누워 자게 되면 서로 처음에는 점잖게 양보하다가 나중에는 엉덩이로 막 밀고 등짝 내밀죠. 면적에 비해서 사람 수가 많으면 이 면적의 수용한도를 넘어서 포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자다 보면 상대방의 등짝이 나한테 밀리겠죠.

그러니까 아직 아버지께로 승천하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같은 공간에 계신 예수님의 등짝이 제자들을 민 거예요. 실존성의 침범현상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온 게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경계선과 제자들의 경계선에서 예수님의 경계선이 포화상태가 되어서 제자들이 밀려버린 겁니다. 헐크가 XL 셔츠를 입었는데 안에 근육이 자꾸 증가하니까 이 셔츠가 찢어져버리죠. 틈이 생기죠. 살점이 그 틈 사이로 삐져나온 거죠. 예수님의 실존이 제자들의 실존영역에 삐져 들어온 거예요, 세 번씩이나.그럼 이건 함께 있는 거예요, 함께 있는 것. 찾아오는 게 아니고 함께 있는 거예요. 찾아왔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함께 있어요. 함께 있다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

요한복음 20장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예수님이 숨을 내쉬니까 여기서 뭐가 나왔어요? 성령이 나왔죠. 실존성의 침범현상이 벌어졌죠. 예수님이 숨을 쉬었는데 거기서 성령이 나와버렸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성령을 받아서 숨을 내쉬니까 성령이 나왔다는 것은 예수님이 성령 받을 때 성령이 예수님께 1차로 왔잖아요. 그리고 19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요 19:30), 성령께서 예수님께 오신 취지는 이미 작업이 완료가 돼요.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약속에 의해서 주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게 하나님의 오른편이라고 제가 아까 강의시간에 언급했죠. 하나님의 오른편에 오르시면 그 오른편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아버지가 예수님이 처음 요단강에 있을 때 성령세례를 주셨던 성령이 나왔던 그 자리가 오른편의 자리였어요.

그 오른편의 자리에 예수님이 올라서버리면 그때부터는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몸, 로마서 8장 3절의 말씀,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지닌 채 주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주의 자리에 오른 상태에서 성령을 보내버리면 그 성령이 죄의 몸을 가진 자에게 갈 수 있는 권한이 발생되는 거예요. 그게 되어야 사도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속죄, 대속, 그리고 구속이 돼요. 속죄(贖罪)라 하는 것은 죄를 강조한 거고요. 구속(救贖)이라 하는 것은 끄집어낸 자에게 종속되었다는 것을 강조한 거고요. 대속(代贖)이라 하는 것은 너의 죄를 대신 처리했다는 ‘대신’이 강해요. 그걸 합쳐서 구원이라 하는데 구원의 3대 기능이 거기에 다 있습니다.

그 3대 기능을 위해서 구약에서는 모세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제물을 바쳐서 장차 신약에서 일어날 일을 구약에서 제사판을 통해서 모형으로 미리 그걸 보여준 거예요. 지금 제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 이유가 그런 말을 하셨던 예수님이 부활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부활이 안 되고 시신 도난사건이 되어버리면 내가 제일 중요하고 하나님이 하신 그것을 내가 그냥 ‘믿습니다. 예, 그거 받아들일게요. 손들고 나가서 그걸 받아들이겠습니다.’ 모든 일을 내가 해서 그걸 받아내야 돼요. 예수님은 십자가 지는 것까지만 하고 그다음 예수님이 십자가 진 효과를 내가 나서서 ‘십자가 믿습니다’ 하는 자기의 결단과 결심을 동원해서 그걸 끄집어내야 돼요. 그게 바로 이단 아닙니까. 그게 침례교 이단이거든요. 완전히 구약적이죠. 구약은 실패한 역사잖아요. 그럼 본인이 그걸 결심하는데 본인은 죄 된 상태거든요. 죄 된 상태에서 뭐가 나옵니까? 의가 나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없는데 내가 윤리적으로는 죄 지었지만 믿는다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내게서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은 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 침례교 사상과 똑같은 사상이 천주교 사상입니다. 인간이 범죄해서 타락한 것은 맞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는 남겨뒀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 그 믿음만큼은 타락하지 않도록 남겨뒀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유의지도 남겨뒀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에서 쫓아낼 때 어느 정도로 쫓아냈느냐 하면 두 번 다시 들어오지 말라고 천사를 통해서 그 주변을 화염검으로 돌려버렸어요. ‘이거 남겨뒀잖아요. 양심은 있잖아요.’ 이걸 보는 게 아니에요. 자유의지, ‘주님 주신 이것 간직한다고 내가 애먹었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이거 없습니다. 이미 마귀의 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다 오염되었어요. 썩었어요. 그런 믿음, 소망, 사랑,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어떤 믿는다는 결심만큼은 그렇게 남겨뒀다면 무엇이 훼손되느냐? 생명나무가 훼손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나 이제 반성했습니다. 다시는 선악과는 안 따먹겠습니다.’ 아직까지 순수하게 남아있다고 여기는 것은 자유의지죠. 그럼 그 자유의지가지고 뭘 따먹겠습니까? 생명나무 건드리겠죠. 그걸 방지하는 취지로 생명나무에서 쫓아낸 거예요. 그러니까 천주교, 침례교, 침례교도 한 종류니까 한꺼번에 제가 말씀을 못 드리지만, 구원파 이런 종류가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알아야 돼요. 악마적이라는 말을 요한복음 8장에서 주님께서는 그걸 잡종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순종(純種)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했거든요 (요 8:33).

그렇게 말할 때 주님께서는 “너는 잡종이야. 아버지가 아브라함이 아니라, 똑바로 알아, 너희 아버지는 악마야.” 악마와 피가 섞이면 아브라함의 순종 혈통이 아니고 잡종이 돼요. 그걸 음란이라고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그걸 알아듣고 우리는 음란하지 않았다 하거든요 (요 8:41).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 집합의 요소가 뭐냐 하면 죄 된 몸을 갖고 왔어요. 그냥 몸이 아니고 죄 된 몸이에요. 육신의 연약한 몸이에요. 로마서 8장 3절에 있으니까 읽어드리겠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 죄 있는 육신+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지리 또는 자리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렇게 오신 거예요.

죄 있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여기에 결합해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뭘 보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언약의 자리, 오른편에서 성령을 보냈죠. 아버지와 아들 간에 창세 전에 계약한 게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말씀드렸죠.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모든 걸 이루었다 하는 거요.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은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된 거예요. 하나님 자체적인 부정성.

예수님께 성령이 오셔서 성령은 추진을 시켜요.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다 죽기까지.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다 이룬 거예요. 완전히 이루었어요.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어요. 이루었기 때문에 성령이 왔던 그 주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면 죄 있는 자, 자신의 업무의 경로에 부분집합으로 참여된 그 자에게 성령을 보낼 수 있는 권한자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주요하게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했어요. 부활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에 베드로가 설교하시는 대목, 2장 32-33절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그러면 예수님에 의해서 성령 받은 자가 어떤 자이어야 됩니까? 죄 있는 육신이죠. 그 죄 있는 육신이라는 입장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차이가 없겠습니까? 차이가 없는 거예요.

 

이게 성신과 성령의 차이에요. 성신은 결코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성신은 구약, 옛날 언약에 해당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하나님의 언약이 적용되고 이방인에게는 반대되게 절대로 언약이 가지 못하게 한 겁니다. 여호수아 11장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여호와께서 그들로 저주 받는 자 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들에게 은혜가 가지 않도록 하신 거예요.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마주쳐야 돼요. 그래야 아브라함의 언약,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이방민족의 존재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때 그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만나서 이제 이스라엘이 은혜 입지 못하고 진멸당하는, 그들로 하여금 강퍅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상으로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거예요.

예수님 앞에서 모든 자가 죄 있는 육신이라는 사실이 최종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어느 인간치고 ‘구원해주세요. 은혜 주세요.’ 할 수 있는 자격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주는 대로 받아. 이거에요. 그냥 내가 주는 대로 받아버려. 그 주시는 은혜 안에 내가 나에 대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나는 죄 된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는 거예요.

시편 51편에 나온 말씀처럼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인간. 죄의 작품인 것을, 내 모습을 최초로 발견한 순간이 바로 성령 받은 순간이에요. 내가 바로 주님을 핍박한 죄인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저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우치게 하신 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선물 주셔서 이 세상의 실상을 낱낱이 밝혀주셨습니다.

그냥 죽었다 살아난 것은 소생이고요. 부활이라는 것은 자기가 한 공로를 남들에게 이전할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는 자격자가 부활된 자에요. 그래서 죽은 자의 세계가 부활의 세계가 아니고 성령 세례를 줄 수 있는 그분의 세계를 부활의 세계라 하는 겁니다.

예수님 이전에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더러 있어요. 나사로도 죽었다 살아났죠. 엘리야도 안 죽었죠. 에녹도 안 죽었죠. 그런데 그 사람들은 자신의 행함을 타인의 행함으로 전이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구원받은 거예요, 물론 은혜를 입었지만.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본인이 스스로 살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그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도 아닙니다. 그냥 곱게 죽으세요. 안심 푹 놓고 죽으세요. 안심 푹 놓고 돌아가시는 분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죽어가면서 ‘주께서 재림 안하면 어떻게 하나. 주께서 나를 데리러 안 오면 어떻게 하나.’ 이거는 자기 의지의 결정이 최종적인 판단 기준으로서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죽을 때만 그런 게 아니고 평소에 교회 다니면서 얼마나 열심인지…… 왜 거기에 집착합니까? 강박증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응시에 대해 마중을 나가서 자기 나름대로 얼추 흉내 내는 거예요. ‘주님이여, 저를 더 몰아세우지 마세요. 너무 몰아세우면 저 자빠집니다. 이정도 밖에 못 하니 이 정도라도 눈 질끈 감고 좀 이해해 주세요. 우리 집 사정 아시잖아요. 이 정도만 해도 엄청 많이 한 겁니다.' 계속해서 자기 판단, 자기 결정이 자기에게 최종적인 판단이기 때문에 여전히 그 판단을 갖고 있는 내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최종적으로 제일 심각하고 진지하고 중요한 사람 되어버린 거예요.

그러니 이건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이죠. 그냥 내 배 째라, 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죄인으로 태어난 거, 그냥 노골적으로 ‘나 죄인이다’ 이렇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다윗이 간음하기 전에 살인하기 전에 그걸 몰랐어요. 그때는 성신이 왔는데 성신이 오기 전에는 성신이 타인이거든요, 타자.

■바뀐 타인.(죄 →십자가 지신 분)

우리 강의 제목이 뭡니까? <타인의 마을>, 이 타자가 바뀌는 거예요. 남이 바뀌는 거예요. 십자가 없는 인간을 의식하다가 십자가 지신 분과 바뀌어지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요. 십자가 지지도 않은 그 타인들이 남을 주시하니까 그들의 입맛에 그들의 시선에 맞추어 살면 얼추 나는 그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훈련받았으니까, 가정에서.

“너는 우리 집안의 훌륭한 딸이 되고 아들이 되어야 너를 키운 아빠, 엄마가 너 키운 보람을 얻겠다. 너 엄마를 슬프게 할래, 기쁘게 할래?” “기쁘게 할래요.” “그러면 공부 해, 지금. 게임 그만하고 빨리 방에 들어가서 공부해. 나는 네가 얼마나 잘 되는지 지켜보겠어. 그게 너를 키워준 보람이야. 아들, 이 엄마심정 알지?” 이게 엄마인지, 귀신인지…… “아들, 이 엄마심정 알지? 너한테 온 기대를 다 거는 거 알지? 네 아버지 뭐 이렇게 해도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전하는 그 계시, 편지에 적었던 계시가 확정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한 구속, 대속 또는 속죄, 이것이 구약을 한꺼번에 십자가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거예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갈라디아서 2장 20절,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자기가 죽었다고 이야기했거든요. 그 말은 새삼스럽게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죽은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을, 십자가가 와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십자가의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죽은 존재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누가 관여할 수 없느냐 하면 악마가 내 몸에 대해서 더 이상 간섭하거나 지시할 수 있는 어떤 게 남아있지 않아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사망을 다른 말로 바꾸면 뭡니까? 죠. 죄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고.

사도 바울이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게 타자, 타자는 남입니다, 남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강의하면서 중간에 어려운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한번 복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할게요. 타인이 있음으로서 내가 생겨요. 이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 나라는 것이 규정되기 전에는 내 주변에 나를 키워준 타인들이 있어요. 그 타인들의 사고방식과 의식과 기본 양식 같은 것이 내 몸에는 안 오지만 내 자아에는 이게 쏟아지거든요. 몸에는 안 오지만 자아한테 쏟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나에게 자아를 일깨워준, 자아를 양육시킨 타인과 헤어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타인, 나를 나 되게 하는 그 타인이 죽어버리면 자아도 같이 살 의욕이 사라집니다. 네가 없는데 내가 왜 살아. 네가 없는데. 강의 중간에 했잖아요. 존재의 이유. 네가 있으매 비로소 나는 산다.

사도 바울에게 타인이 바뀌었는데 그럼 타인이 바뀌기 전 사울 시절 때 사울을 사울 되게 격려했던 타인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게 바로 였다는 거예요, 죄. 그래서 로마서 6장에 보면 우리가 다시는 죄한테 지시와 명령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나와요 (롬 6:6-14). 이 죄, 악마가 우리에게 나를 양육하는 하나의 스승으로서 작용할 때는 이렇게 했어요. 히브리서 2장에 나오지만, ‘네가 율법을 앞장세워서 율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너는 죽어. 너는 지옥 가. 그러니까 열심히 하란 말이야. 율법대로 살란 말이야.’ 라고 한 거예요. 율법 품에 죄가 담겨있었던 거예요. 율법이 오면서 그 안에 죄가 같이 담겨 있었던 거예요. 율법은 선한데 그 율법이 오니까 내가 마중 나가는 게 아니고 내 속의 죄가 먼저 마중을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탐내지 마라’ 하니까 내 속에 ‘탐내지 말아야 우리는 살 수 있고 탐내지 말아야 천국 갈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거짓말이에요.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고요. 율법을 지킬 수 없는데 지켰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결국 이 거짓말을 악마가 먼저 알고 있는 거예요. 이미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나무에서 잘렸다는 사실을 악마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노린 점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자체가 악마의 전매 특허에요. 악마가 특허 냈어요. 그렇게 해서 네가 지옥 가는 이유는 말씀을 위반했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거예요. 그거 어디서 가르치겠습니까? 총신, 장로, 감리측에서 가르쳐요. 하마르티아라는 말, 죄는 과녁에서 벗어난 게 죄라는 거예요. 과녁에 맞춰 쏴야 되는데 엉뚱한 데를 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양궁선수처럼 맨날 쏘는 연습하고 있어요, 교회 와서. 표적을 향하여.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하는 말이 표적 찢었다. 끝났어요. 게임 끝났어요. 승부는 이미 끝났습니다. 내가 의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이미 내가 죄인으로 규정된 상태인데 죄인이 갈 곳은 죽음이죠. 처음부터 죽은 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악마는 그동안 우리에게 안 가르쳐준 거예요.

거짓말하는 타인이 되어서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가르쳐준 적이 없어요.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런 거 이야기했지, “너는 살아봤자 죽어.” 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없다니까요. 교회 와도 마찬가지에요. “희망을 가져라. 말씀 지키면 복 받는다.” 이게 교회인지 대순 진리교인지 이게 신천지인지 이게 개혁주의인지, 감리교, 장로교인지……. 전부다 똑같아요. 한결같이 똑같아요. 여러분, 천국 가고 싶죠? 구원받고 싶죠?

구원대상이 아니에요, 우리는. 천국 대상이 안 된다고요. 그곳은 예수님만 가는 곳이지, 우리가 가는 곳이 못돼요. 왜?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예수님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에요(골 1:13). 그 차이도 사람들이 알아야 돼요.

사람들은 악마한테 법적으로 훈련받았어요. 네가 하는 일이 꼬이는 것은 네가 법을 위반해서 말씀을 위반해서 벌 받아서 하는 일이 안 되는 거다. 그러면 처방책은 뭐냐? 간단하다. 네가 목사님 말씀대로 따르면 너는 복 받아서 네 하는 소원대로 잘 풀리리라. 그걸 상품화시키는 곳이 교회 아닙니까. 그래, 할 수 있다. I can do it.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된다. 주여, 도와주소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게 조폭인지 다단계 사원들 훈련소인지 교회인지 분간도 안돼요.

그래서 어렸을 때 엄마 따라 아빠 따라 약간 교회 맛을 봤던 젊은 애들이 사회에 나가니까 자기 뜻대로 됩니까? 빌라 왕들이 돌아다니는데 전부 사기 안당하고 돼요? 그러니까 걔들이 믿을 것은 뭐냐? 희망을 주는 교회를 찾는 거예요.

젊은이들이여, 오라. 드럼치고 둥둥둥둥 베이스 기타치고 ‘어두운 밤에 깜깜한 밤에~’ 논산 훈련소에서 배워서. 열정 페이로 달라고 하는 교회도 있어요 심지어. 기타 배우는데 돈 다 들였거든요. 돈도 안 주고 헐값에 애들 부흥회 끌어 모으려고. 교회에 충성한다고 학점 다 날려. 점수C 막 나와. 그러니까 그 성적으로 취직이 안돼. 취직 안 되니까 갈 데 없는 사람이 갈 곳은 복음학교밖에 없어요. 복음학교에서 아프가니스탄 같은 데 가가지고 15만 불로 나라에서 빼내가고. 구역 정해놓고 오늘은 수단 담당구역, 너는 유럽 선교. 세상을 기도로서 복음화 시키자. 참내. 마귀입니다. 그 단체가 마귀라고 하는 그 교단도 마귀에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면 됩니다.

더 이상 이길 게 남아있지 않은 것을 주께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이길 게 없어요. 경쟁 대상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의미의 수준을 내 죽음 이후까지 확장시켰기 때문에. 원래 태어날 때부터 죽었기 때문에 율법 지키지 못하면 저주 받는다는 것에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태어남 그 자체가 저주의 덫에 갇혀 있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보다 더 심한 저주는 없습니다. 내가 이야기한 게 아니라 욥이 이야기했어요. 욥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들어가 있다고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나와 있어요.

“그럼 목사님, 우리가 할 건 아무것도 없네요.” 왜 굳이 하려고 하십니까? 일단은 굳이 하려고 한 게 문제이고 두 번째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놀게 했습니까? “아버지여, 이 잔을 할 수만 있거든 좀 치우면 안 됩니까?” 세 번 기도하고 난 뒤에 그래, 몸이 원수다. 이 죄된 몸이. 죄는 지은 적 없는데 죄 된 몸이 원수다. 몸이 이끄는 대로 가야지. 몸은 자체적인 자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못 하거든요. 죄가 거기서 처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하는 말이, 표적이 찢어져서 더 이상 쏠 게 없어요. 목표라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면 됩니다. 가라 하면 가고 책 이만큼 쌓아놓고 공부하라 하면 공부하면 되는 거예요. 칠판 닦으라 하면 닦으면 되는 거예요. 한시도 성령께서 놀리지 않습니다. 가게 문 열고 뭐 팔라 하면 파는데 진상 고객 있잖아요. 그것도 주께서 보내신 거예요. “이게 가게냐?” “너 죽을래?” 이 말도 또 주께서 하게 하십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아무 문제될 게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막을 사이에 두고 함께 있는 주께서 성령을 세례로 막 헐크 셔츠 다 찢어지도록 틈 사이로 계속 주시거든요. 베드로한테 네가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베드로가 원치 않는 길을 본인이 결정했습니까? 아닙니다. 성령 받고 난 뒤에 계속 나오는 거예요.

요한복음 20장 다시 봅시다. 22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할 때 천주교 신부들이 결정적으로 잘못한 것은 본인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아니고 본인은 그냥 찢어진 셔츠, 찢어진 막 역할만 했을 뿐이고 주께서 죄를 사해주는 죄 된 몸으로서 눈에 보이는 죄인 역할을 사도가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자기 마음대로 결정 못하기 때문이에요. 사도행전 10장 이야기, 이번 주일에 설교했잖아요. 하필 못 먹는 것만 골라놓고 주께서 베드로에게 먹으라 했잖아요. 베드로가 “율법에 의해서 못 먹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더러워서 못 먹는다 할 때 베드로가 아직도 모르는 것은 본인이 율법에 의해서 이미 더러워졌다는 사실을 본인이 몰랐어요.

그것도 나쁜 짓해서 더러운 게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율법에 의하면 더럽게 되어 있고

악마는 더러운 것을 어떻게든 율법 지켜서 선한 것으로 바꾸어야 네가 천국 간다, 라는 구원론을 제시하는 것이 악마이고 성령은 이미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네가 나설 문제가 아니라고 완전히 주님과 함께 못을 박아버린 거예요. 성령이 와서 죄의 몸인 나의 최종성은 이미 십자가로서 모든 심판을 완료했어요. 누가? 예수님이 대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한 거예요. 그래서 지워버린 거예요.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 유월절은 애굽의 장자, 그리고 이스라엘 장자를 다 지워버린 겁니다. 더 이상 대를 이을 필요가 없다. 그럼 대를 잇는 노선은 무슨 노선인가? 내 혈육의 노선이 아니고 어린 양의 노선이라 해서, 문설주에 뭘 바릅니까? 양의 피를, 내 아들 죽은 피를 대신해서 바르죠.

■새 계명-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유월절 전에 유월절을 내다보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사랑은 내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일 경우에만 사랑의 가치가 고스란히 100% 살아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귀한 가치를 주님의 사랑 앞에서, ‘내가 전에 이런 것들을 사랑했었습니다.’하고 아낌없이 내놨어요. 또 기도원에 가서 재산 바치고 하지 마세요. 걱정돼요. 바치려면 여러분 자신한테 바쳐요. 이미 죽었던 여러분들이 죽었다는 사실, ‘너 돈 좋아하잖아. 그 돈을 죽은 너한테 바쳐라. 돈이나 실컷 벌고 죽어라, 이 인간아.’ ‘알았어. 돈이나 벌고 죽을게.’ 내가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의 삶이죠. 어떻게 하면 내가 죄인임을 더 드러낼 수 있나? 어떤 쪽이어야 내가 망하는 쪽으로 갈 수 있느냐? 히히히. 왜? ㅋㅋㅋ. 왜? 이미 난 그걸 아니까. 뭘 해도 내가 건질 나는 없고 주께서 따로 마련한, 죄의 몸에서 영광의 몸으로 바뀌었죠. 1강에서 했잖아요. 만지지 마라. 아직 만지지 마라. 그 몸이 바로 우리의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을 누가 만지려 하면 만지지 말라고 하세요. 성령 안 받은 주제에 만지지 말라. 죄의 몸에서 새로운 영광의 몸으로 달라진 그 몸을 샘플로 미리 우리 앞에 주님이 마네킹이 되어서 그 몸을 우리에게 보여준 거예요. 만지지 말라는 그 몸이 장차 너희의 몸이 될 것이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우리가 끼어들 수 없이 주께서 다 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마귀가 이 복음을 감추기 위해서 얼마나 극단적으로 저돌적으로 사력을 다하여 막아왔는지를 이제는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