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환상의 왕

아빠와 함께 2022. 10. 13. 10:06

설교노트

 

환상의 왕


2022년 10월 12일               본문 말씀: 나훔 3:18-19

(3:18)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3:19) 너의 다친 것은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인하여 손뼉을 치나니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 아니냐


과연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환상인가?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이것이 실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을 차갑고, 불은 뜨겁습니다. 그리니 이 물과 불은 가짜 일 리가 없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실은 물과 불과 하늘의 별이나 달이나 산이나 자신의 실체는 인간의 환상을 실재라고 믿게 하는 소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대하면서 그냥 보지 않고 본인들의 욕망이나 희망이나 기대나 바램을 담아서 보게 됩니다. 개와 돼지의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마태복음 7:6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귀한 보석을 돼지에게 주면 돼지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보석을 팔면 맛있는 사료를 더 먹을 수 있어 신난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져주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인간도 하나님 보시기에 마찬가지입니다. 개나 돼지처럼 인간도 자기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왕을 찾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환상에 해당됩니다. 왕이란 인간 세계의 염원입니다. 훌륭한 왕을 원합니다. 실은 그 왕은 대단한 ‘정복자’일 뿐입니다. ‘정복광(狂)’입니다. 이러한 왕의 등장에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는 이유는 본인들의 사적인 염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성취하고 싶은 바를 그 왕이 자기 대신해 준 것에 대해서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반깁니다.

마치 돼지가 진주를 버리고 사료를 반기는 것과 같습니다. 왕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사람이 개인으로 뜯어보면 다들 착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돈이 인간을 버려놓았습니다. 자꾸만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동정과 연민을 갖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이 불쌍해 죽겠다”는 겁니다.

인간은 왜 하염없이 자신에 대해서 동정할까요? 그것은 자신의 욕망은 왕의 자리를 넘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신과 같이 왕이 되지 못해서 인간은 자신을 불쌍히 여깁니다. 자기가 생각한 절대적인 이상적인 왕 모습을 누군가 보여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 세계에는 대단한 왕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왕이란 어디까지나 궁극적 환상일 뿐이요 인간성의 한계입니다. 이 한계는 인간 세계 스스로는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너도 나도 모두 멋진 왕이 출현하기를 학수고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나라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이방나라와 충돌케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2:1-2에 보면,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두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이 헤롯 왕이요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동방박사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인간 세계와 충돌케 합니다. 둘 중의 누가 환상의 왕이요 누가 실재의 왕인가를 말해주시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남쪽과 북쪽으로 둘로 갈라지고 난 뒤에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 나라에 함락당합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이 북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바로 앗수르 왕을 이상적인 왕으로 부러워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는 남쪽 유다왕에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앗수르 왕은 오늘 본문에 보면, 주위에서 모든 자들이 떠나버리고 외롭게 죽어갑니다. 무가치함이 드러납니다. 왕으로의 영화로움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북 이스라엘도 망하지만 앗수르도 망합니다. 니느웨지역의 백성들이 욕망이 집대성된 것이 앗수르 왕인데 이 왕이 망한 이유에 대해서 나훔 선지자는 “우상을 섬겼잖아”입니다.(나 1:14). 그렇습니다. 자기 환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우상숭배를 낳은 겁니다. 인간의 행위가 범죄가 되는 것은 피해자가 발생될 때입니다.

세상을 환상적으로 보면서 대단한 왕과 지도자를 원하는 것도 범죄가 되는 것은 이 의식에 의해서 피해보는 분이 등장하면 성립합니다. 즉 욕망의 끝이 ‘환상적인 신’만 눈으로 목격하고 싶은 거라면 이 욕망에 의해서 피해입은 분은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입니다. 이로서 인간의 모든 환상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은 이 세상에 유혹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환상에 유혹받고 살아왔음이 들통난 겁니다. 실재하는 것에 유혹받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자신의 욕망이 첨가되어 만들어지는 환상에 본인이 유혹받는 있는 겁니다. 이는 곧 육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시는가는 아브라함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창세기 17:5에,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지적하십니다. ‘높임을 받는 아버지’라는 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이름 대신 다른 이름에 합당하도록 아브람에게 일을 벌리시는 그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의 취지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4:18-19에서 아브라함은 누구를 만나게 됩니다. 그 분은 왕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지상적 업무는 제사장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이 복받은 결과로 ‘아브람’이라는 이름은 ‘아브라함’ 곧 ‘열국의 아비’가 됩니다. 즉 인간들의 환상적 욕망의 한계를 넘어서 계시는 진짜 왕과 만나는 일이 성사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육에서 육으로 나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육에서 하늘의 요소를 지닌 존재로 전환됩니다. 더 이상 사람의 환상의 한계를 넘어서 실재의 세계에 접하게 되는 겁니다.

이 작업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실시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징계하므로서 제대로 왕을 아는 백성으로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방식은 그들로 세상의 왕을 부러워하면서도 그 왕으로부터 혹독한 통치를 받아서 원하는 모든 것을 잃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이 되는 겁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삼하 7:1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세상에 복수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이스라엘 속에서 참된 자신을 실재로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망했던 이스라엘이 살아난다’가 아니라 ‘망했던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나라의 왕과 제사장됨으로 등장한다’입니다. 자기 백성을 징계작업을 통해서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출세와 성공을 꿈꾸는 우리의 자리가 예수님의 왕됨이 등장되는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12강-나훔 3장 18-19절(환상의 왕)2210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나훔 3장 18-19절까지입니다.

나훔 3:18-19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너의 다친 것은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인하여 손뼉을 치나니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 아니냐.”

나훔 선지서의 시작은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니느웨라는 것은 지역 이름이고 앗수르 나라의 수도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나훔 선지서의 끝, 오늘은 그 끝 장면입니다, 그 끝은 “앗수르 왕”으로 되어 있어요. 이것은 땅에 모여 사는 인간들의 그 정신, 사고방식을 마지막, 궁극적으로 뽑혀 나오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은 왕으로 구현이 된다는 겁니다. “니느웨 사람들아” 하고 땅에 사는 주민들 보고 이야기 하지만 그 주민들의 의식들을 다 집대성하게 되면 거기서 왕 하나로 압축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니느웨 사람들 속에서 왕이 등장했다는 말은, 실은 모든 사람이 왕이 되고 싶은 그런 욕망이 있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왕이 생기는 이유가, 모두가 왕이 되고 싶기때문에 생겨나는 거예요. 인간의 심보를 대변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들이 왕을 만들어내는 그런 심성으로 움직이고 있다, 왕이 있는 것을 봐서 왕이 인간의 심보를 대변해주고 있다, 그렇게 볼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왕은 나훔 선지서에 의하면 결국은 허망하게 죽습니다. 앗수르 왕이 주위에 아무도 없이 쓸쓸하고 외로운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다 모든 사람이 그 사람 곁에서 흩어지게 돼요.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그 사람이 망하고 난 뒤에는 주위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반가워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왕이라는 그러한 존재 하나 등장하게 되면 그만큼 왕에게 피해 입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그런 뜻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세계는 왕이 옹립되고 왕이 등장하기를 간곡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인데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에게 요구를 해요. 사사 시대가 끝나고 난 뒤에 요구를 하는데 그게 뭐냐? “우리에게도 왕이 있으면 나라가 안정될 것입니다.”라고 했어요.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4, 5)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분노하시면서 “내가 원하는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치 않는 나라를 원한다.” 인간적인 본성은 왕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왕이 필요치 않은 나라를 하나님께서는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삼상 8:7, 8)

이 말은, 하나님 자신이 왕이 되는 그런 나라를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인간적인 왕을 찾았다는 것은 자신의 본성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없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왕을 찾는 이유가, 본인의 욕망 자체가 귀하게 여김을 받고 싶어서 왕을 찾는 거예요. 왕 모습이 내가 되고 싶은 이상형을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에 왕이 등장하고 왕에게 잘해줌으로써 곧 본인이 본인의 욕망을 만족케 하고, 본인이 본인에게 잘함을 대체하는 모습으로 왕을 원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 없다” 이렇게 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큰 차이가 나지요. 인간들은 이스라엘이 있기 전에는, 이스라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왕이 있는 게 아주 자연스럽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인간의 왕은 결국 파멸하거든요. 멸망한다, 그 말이지요. 이것은 뭐냐? 모든 인간이 다 파멸하게 되어 있고 멸망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러면 그 왕이 망한다는 이야기를 왜 이스라엘 선지자가 이야기 하는가?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왕 말고 왕이 있는 자리에 다른 분이 그걸 차지해야 돼요. 그 예가, 바로 이스라엘에 등장하는 그 첫 번째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장 4, 5절에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전환 시킨다고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그 이름, 그 이름을 상당히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일이 거기에 담기게 되는데 ‘아브람’은 그냥 인간의 이름이라 볼 수 있어요. 인간의 이름에다 하나님께서 손길을 가하게 되면, 작업을 하게 되면 그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될 때에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뭔가 특별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보통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 있으면 보여달라,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벌써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아브람’, 전에 있던 이름 ‘아브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야말로 ‘높은 사람, 높은 아버지’라는 뜻이에요. 아버지 자체를 강조하는 거예요. 아버지 자체를 강조해서 높은 아버지라, 이런 뜻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높은 아버지, 혈육의 아버지, 어떤 집안의 아버지를 뭘 로 바꾸느냐 하면, ‘열국의 아비’로 바꿔버려요.


창세기 17장 5절에,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열국의 아비라, 많은 사람의 아버지라, 라고 이렇게 같은 아비인데……, 아비에서 육에 속한 모든 가정에 아버지가 있잖아요. 혈육적으로 먼저 태어난 사람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 먼저 태어난 사람, 그 사람을 기존의 육의 아버지 자리에서 열국의 아비로 전환 시키는 이름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정하시고 전환 시키는 그 내막이 창세기 14장에 벌써 일이 시작되었어요. 창세기 14장 18, 19절에 보면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때는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람’이지요. 살렘 왕이 여기에 왕이 등장합니다. “하늘의 왕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하나님의 왕과 제사장이 되시는 분이 축복을 할 때 그 축복했다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 되고 그것이 이 땅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의 원리원칙입니다.

이것은 지상의 인간들의 종족과 혈족에 의해서 만들어낸 그러한 왕은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고 결국은 망하도록 이렇게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인간들은 왜 그렇게 왕을 원했는가? 제가 아까 언급했듯이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이것을 현실로 봅니다. 이게 실재하는 현실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점이 굉장히 어려운데, 어렵더라도 여러분은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말씀드립니다만, 눈에 보이는 것이 실재가 아니고 이게 환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이게 원래 납득하기가 참 힘들 거예요. 이스라엘이, 일반민족 속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민족이 만들어진 이유는, 환상을 실재라고 우기는 그 이방 민족과 싸움을 붙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든 거예요.

그러면 현재 우리 몸이 있고, 나무가 있고, 산이 있고, 들이 있는데 이게 왜 환상이냐? 이게 실제로 있지, 바닷물에 가서 발 담그면 차갑고 뜨거운 불 가까이 가면 몸에 열이 나고 살갗이 타고 이게 어떻게 환상이냐는 말이지요. 이게 실재지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 말이 맞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딱 등장하면서 인간들이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인간들이 세상을 볼 때 저게 실재다, 라고 규정을 할 때는 반드시 자신의 환상을 동원해서 그것을 본다는 거예요. 환상을 동원해서 세상을 보면서도 자기가 환상 속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잘라버리고 “내가 보니까 실재다” 그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제가 어렵다 했지요. 어려우면서도 이게 중요한 것이라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줄 때 개는 거룩을 뽑아낼 수가 없어요. 개의 안목 때문에. 그리고 돼지 앞에 귀한 보물 진주를 던지면 돼지가 그걸 진주라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일이 없어요. 돼지가 진주 보고 ‘야~, 이거 팔면 내 사료가 많이 나오겠다.’ 이런 계산을 돼지가 못해요. 왜냐하면 돼지는 돼지의 한계가 있어요. 돼지의 한계가 있고 개는 개의 한계가 있듯이 인간은 인간의 한계가 있는 겁니다.

인간의 그 한계의 끝이 뭐냐? 왕을 구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이 앗수르 왕입니다. 인간에게 왕이 필요하다, 대통령이 필요하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개나 돼지하고 똑같이 자체의 한계를 그런 식으로 표현해주는 거예요. 인간은 한계 자체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인간은 자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 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일곱 번 죄를 지었을 때 일곱 번까지만 용서하면 됩니까? 그러면 ‘나는 형제를 용서했다’에 해당 되는 겁니까?”라고 물었어요. 베드로가 지금 이 말을 할 때 뭘 모르냐 하면, 사랑을 몰라요. 예수님께서는 2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도 만약에 어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또는 여자가 남자를 사랑한다면 너무 그 남자가 잘생기고, 자기 눈에 한계지요, 잘생기고 멋있고 한다면 진짜 내 이상형에 딱 맞는 남자가 나한테 일곱 번을 잘못했을 때 어떤 사람이 “아가씨, 저 남자, 당신에게 맞는 저 남자가 일곱 번 당신에게 잘못했다면 몇 번 용서하겠습니까?” 물어 보살, 그 서장훈이 묻는다면 그 아가씨가 뭐라고 대답할까요? “아이고, 보살님! 일곱 번이 아니고 일흔 번의 일곱 번이라도 저는 용서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왜? 너무 마음에 드니까. 그 남자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잘못해도 자기는 용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아니 그보다 더 나갑니다. 아예 자기한테 잘못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왜? 그래야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아낌없이 용서하고 있다는 내 모습에 자기가 스스로 대견하고 싶어서 그런 기회를 남자한테 막 주는 거예요. ‘나한테 잘못해. 내가 마구 용서해줄 게.’

이건 각자의 한계 아닙니까? 이게 다른 사람은 납득이 될까요? 납득이 안 되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다른 사람 보기에 ‘저게 환상이구나. 어떻게 남자가 저런 짓 까지 하는데도 여자는 그것도 좋다고 하나?’ 그러니까 “용서해줄 게, 용서해줄 게, 돈? 돈 빌려줄 게, 데이트 값 내가 다 낼 게, 네가 우리 집안 욕을 해? 욕 더해. 더 해. 나도 하고 싶어. 네가 어떤 소리 깩, 소리만 해도 나한테 용서, 용서, 막 튀어나오게.” 사랑하는 사람 같으면 그래요. 사랑을 안 해봐서…….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 저게 미쳤다, 환상이라 하잖아요. 현실성이 뚝 떨어지는 거지요. 모든 인간이 환상 속에 있습니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보기에, 스스로 보기에 그렇게 아무리 봐도 자기가 착해요. 인간은 한사람 한 사람 보면 전부 다 착합니다. 착한데 돈이 인간을 버려놓지요.

그래서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이렇게 생각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이 불쌍해 죽겠어요. 자기연민이라 해요, 자기연민. 세상에 나같이 불쌍한 사람 어디 있느냐. 그러면 묻지요. 왜 본인은 본인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그 사람은 답변하기를 ‘나는 내가 절대적인 왕이 되는 것이 나한테 딱 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왕타입인데 지금 왕이 못되니까 나같이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게 욕망의 근원이고 환상의 근원이에요. 내가 왕이 못되니까 왕을 부러워하면서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는 왕이 꼭 필요한 겁니다. 그걸 스타성이라 해요. 스타성, 연예인들, 스타, 왜 있어야 되는가? 내가 되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이 뭔가 있어서 내가 그 사람 스타에게 모든 것을 바치면서 자기만족, 불쌍하기 짝이 없는 내가 그래도 위로받을 데는 내 맘에 딱 드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면서 자기의 불만을 해소시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이처럼 자기 맘에 드는 왕이 자기가 사는 나라의 왕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는 그런 꿈과 희망들을 다 갖고 있어요. 그게 니느웨 사람들, 그 백성들 소원이기 때문에 거기서 앗수르 왕이 등장하고 오늘 본문에서 앗스르 왕이 망해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 자체가 결국 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환상은 어디서 실재와 만날 때 어떻게 환상인 것이 그 정체가 드러나는가? 그것은 이렇습니다. 어떤 범죄, 죄가 성립되려면요, 그 죄로 말미암아 피해 입은 타인이 등장해줘야 그게 범죄가 돼요. 사람은 자기 맘대로 사는데 자기 맘대로 살면서 그게 죄라는 것을 몰라요. 내가 맘대로 연못에 그냥 돌 던지면 그게 잘못인 줄 모르는데 그러나 돌 하나 던질 때마다 개구리 하나 죽어서 나오는 거예요. 무심코 하는 행동 때문에 남에게 피해입은 피해자가 등장할 때 비로소 범죄가 성립이 돼요. 피해입은 사람이 없으면 범죄는 성립이 안 돼요.

그런데 인간들은 궁극적인 환상이 뭐냐? 내가 왕이 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왕이 되고 싶다는 말은 내가 절대자가 되고 싶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내가 신이 되고 싶다는 그러한 포부 같은 게 누구나 있는 겁니다. 내가 못하면 내 자식이 왕이 되든지 안 그러면 손자가 왕이 되든지. 그래서 아들이나 손자 보면 ‘이게 왕이 될 상인가?’ 이렇게 기대를 하지요.

인간의 환상의 한계를 끝을 내는 궁극적인 피해자가 등장합니다. 인간은 본인이 절대적인 왕이 되고 신이 되고 싶은데 그것이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궁극적인 피해자가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들이 믿는 신은 이것은 자기 환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짜 신인 것을 고발하지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자기 욕망을 만족하는 그 자체가 자기만의 세계기 때문에 이게 환상인데 진짜 인간의 환상에 의해서 추방되어 버리고 비난받고 배척받은 그 세계, 그 세계는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인간세계에서는 그걸 몰라요. 갇혀 있으니까, 환상 속에 갇혀 있으니까 모르지요.

인간이 유혹받는 것은 그 유혹받는 것이 있기 때문에 유혹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 손이 참 곱다 합시다. ‘야~, 손이 참 곱네. 그 손 참 탐난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 이야기를 들은 당사자가 “자, 내 손 보세요.” 그 손 보게 되면 그 손이 탐이 안 나요.

뭐가 환상이냐 하면, 어떤 사람의 손을 보면서 자기 손과 차이 나는 이상적인 것을 타인의 손을 통해서 일방적으로 만들어내요. 만들어낸 것을 인간은 거기에 유혹받고 현혹되는 거예요, 인간은. 실제적인 것에 대해서 유혹받는 것이 아니고 그 눈에 보이는 것에 더해서 자기 욕망으로 만들어낸, 본인이 만든 환상에 본인이 유혹받는 겁니다.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 라고 했을 때 그래서 결혼하잖아요. 30대가 되면 결혼하기 힘든 이유가 이미 자아가 형성되어 있어요. ‘나는 내 위주로 살겠다’가 형성되기 때문에 결혼이 잘 안 되고, 되게 되면 상대보다도 애가 더 귀하게 되지요. 그러나 20대는 환상이 있어 가지고 어떤 멋진 여자 멋진 남자 있으면 나는 행복하겠다, 하는 거예요.

그러나 20대 멋진 여자하고 멋진 남자하고 둘이 결혼식 했다 칩시다. 매일같이 얼굴 봅니다. 그러면 내가 처음 그 남자 그 여자 봤을 때는 굉장히 아름다고 그리고 멋있는데 살아보니까 그 20대 멋있던 것이 실제 그 얼굴 맞대고 보니 없어요. 그것은 당연하지요. 원래 없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가 만든 환상에 자기가 매료되었지 실제 그 재료가 되는 것은 어떤 환상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본인의 욕망이 본인에게 환상을 제공해요.

여러분 이거 알아야 돼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1년에 직업을 20번 바꾼 사람도 있어요. 스물댓 번 바꾸는 사람도 있어요. 계속 환상을 쫓는 거예요. 본인이 허망한 것을 모르고. 그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는 진짜 이 땅에 없는 숨겨진 왕을 아브라함과 연결시켜 줍니다. 그게 뭐냐? 멜기세덱이에요.

멜기세덱은 지상에서는 마치 왕처럼 보이지만 그의 일은 제사장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에요. 자, 이 제사장이 하는 일은 육을, 인간의 허망한 환상만 만들어내는 그 육을 실재 세계로 연결시켜주는 기능이 제사장이에요. 그것도 땅의 제사장이 아니고 하늘의 제사장.

그러니까 인간의 한계를 능가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늘나라 어떤 왕이 계시는데 그 왕과 자기 백성을 연결시켜주는 그 역할이 바로 하늘나라 제사장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어야 될 이유는 ‘아브라함’ 안에 하나님 왕이, 멜기세덱이라는 왕이 아브라함 혈족을 통해서 본인이 스스로 하나님 스스로, 왕 스스로 거기서 출생해요.

생산되어서 출생하는 그 자리를 ‘아브라함’이 제공해야 되는 겁니다. 모든 열국의 혈육을 초월한 ‘열국의 아비’가 되는 그분은 하늘의 임금님입니다. 하늘의 왕이에요. 그 왕이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서서히 언약을 따라서 구체화되는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그 일이 진행되는 겁니다.

이렇게 말을 어렵게 했는데 따지고 보면 더 쉽게 할 수 있어요. 그게 마태복음 2장 2절입니다. 마태복음 2장 1-2절에 보면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지금 이 동방박사들은 누구와 충돌되어야 되는가? 바로 인간들이 생각했던, 인간들의 환상에 의해서 등장한 헤롯왕과 마주쳐야 되는 겁니다. 동방박사들이 그렇게 마주쳐야, 그 충돌이 일어나야 인간의 환상이라는 한계 넘어서 하나님은 진짜 왕을 이 땅에 어떤 식으로 나타내셨는가가 나오는 거예요.

그걸 왜 알아야 되느냐? 그걸 알아야 육에서 육으로 인생이 끝나지 않고 육에서 영으로 연결되는 거예요. 여러분, 육에서 육으로 인생이 이렇게 끝날 겁니까? 육에서 성령 받은 영의 사람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자기 환상과 주님의 실제 일이 충돌되어야 돼요. 우리 안에서 충돌되어야 되는 겁니다. 마주해야 돼요. 나의 한계 자체를 능가해야 되는 겁니다.

이걸 집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뭐냐? 이스라엘과 앗수르라는 제국의 충돌이에요. 앗수르 왕은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삼켰습니다. 접수하고 점령했습니다. 물론 북쪽 이스라엘이에요. 남쪽 유다는 다 빼앗겼지만 예루살렘은 빼앗기지 않았어요. 아직까지 유다 나라는 유지되었고 유다 나라는 나중에 바벨론왕에게 다 점령당합니다.

앗수르왕은 북쪽 이스라엘을 완전히 접수하고 지배했어요. 지배할 때 그들이 다른 나라를 건드리는 것은 아직도 앗수르 왕이 그 한계를 몰라요. 내가 어느 정도 환상이고, 이게 진짜 실재가 아니고, ‘그냥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죽죽 가는데 이 사람들이 이 앗수르가 건들지 말아야 될 나라를 건드린 거예요. 이스라엘 나라를 건드린 거예요.

이스라엘을 건드릴 때 비로소, 앗수르 왕이 쉽게 말해서 인간 왕이지요, 인간 왕이 왜 망해야 되는가, 그 이유를 이스라엘을 건드림으로써 비로소 밝혀집니다. 그게 뭐냐? 그들은 우상을 섬겼다는 거예요. 신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신이 진짜 신과는 다르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 세상 모든 민족들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같은 인간들끼리 백날 전쟁을 해도,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하고요, 전에 청일전쟁, 러일전쟁 백날 전쟁해봐야 그들은 누가 누가 이기나, 우리나라가 이긴다, 그걸로 끝났지 우리 이 짓이 환상을 쫓아 벌이는 전쟁일 수가 있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를 못해요.

그런데 이스라엘을 건드려 버리면 너희들 자체가 자기 자신을, 환상 속에서 본인을 잘못되게 보고 있다는 그것이 밝혀집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의 선지자 나훔이 등장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왕이 망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쉽게 말해서 내가 망하는 존재다, 그 말이에요.

‘아브라함’이 등장한 것은 ‘아브람’이 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등장한 것은 야곱이 망해야 되고요. 동방박사가 등장한 것은 헤롯왕이 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는 헤롯왕 만나고 난 뒤에 뭐 이야기 주고받다가 나중에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났느뇨?” 물어보니까 베들레헴, 그 베들레헴 쪽으로 방향 틀 때 비로소 다시 멈췄던 별이 등장하지요.

마태복음 2:1-2, 9절에 보면,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그 별이 진짜 상세하게 알려줘요. 진짜 그런 내비게이션이 없어요. 딱 집어서 이 집이라고 알려줍니다. 가보니까 아기 예수 마리아 요셉과 아기 예수가 있었어요. 그분이 만왕의 왕이었습니다. 왕을 만나는 것만이 실재고 나머지는 다 가짜였습니다. 허구였고, 허망한 것이었고, 인간의 욕망이었고 망상이었어요.

인간세계에서는 그 당시 앗수르도 이게 왕이지만 앗수르 이후에 인간 역사 가운데 등장한 유명한 왕이 있어요.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 BC336-BC323)이에요. 이 사람을 왜 대왕이라고 하느냐 하면, 마케도니아 왕이고, 이집트 파라오도 되고, 페르시아의 왕도 되니까 합쳐서 대왕이 된 거예요.

알렉산더 이 사람을 대왕으로 만들고 난 뒤에 후대의 학자들은 그를 제우스의 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리스 나라에서. 아버지는 헤라클레스 계통인데요, 헤라클레스가 누구 아들이냐? 제우스 아들이에요. 인간하고 신하고 막 섞이고 난리지요. 환상이니까. 그다음에 엄마는 어떻게 되느냐? 엄마는 아킬레우스 쪽인데 역시 그리스의 위대한 왕이에요.

그 두 영웅들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겁니다. 트로이 전쟁할 때 영웅이 아킬레우스 장군이에요. 그러니까 알렉산더가 대왕이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위대한 정복자라는 뜻이에요, 위대한 정복자. 왕은 뭐다? 정복자다. 왜 정복자를 왕이라고 하느냐? 내가 나의 환상을, 왕 아니라도 일반 모든 인간들은 마음속에 남의 것을 정복하고 싶은 충동이 있고 그 충동을 왕이라는 존재가 나 대신 실제로 구현해주니까 나는 그 왕 밑의 백성이라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인류의 역사는 왕권 자체가 역사를 만들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이야기 했지요. “역사는 승자가 만든다.” 승리한 자가 역사를 다시 재구성한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역사 속에 있으면서 역사를 모르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은? 지금은 왕이 있어도 왕 같지도 않은데? 아닙니다. 지금도 왕이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미국에 세 명의 왕이 등장했어요. 하나는 뭐냐? 석유왕 존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 또 하나는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Andrew Carnegie, 1835-1919) 또 한사람은 금융왕 JP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 이 사람들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준거에요.

자,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왕을 원합니다. 왜 왕을 원하는가? 본인이 각자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본인들이 불쌍해 죽겠어요, 내가! ‘인생 이렇게 끝날 건가? 아니지. 나는 왕이 적합해. 나는 왕타입이야. 딱 왕이 내 스타일이야.’ 그런데 그걸 자기가 이루지 못하잖아요. 이루지 못하니까 내가 못한 그 한을 누군가 대신해주면 그 사람을 흠모하고 존경하고 사모함으로써 내가 왕 됨의 대리만족을 느끼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의 앗수르에요. 이 석유왕 록펠러, 철강왕 카네기, 금융 왕 JP 모건, 지금도 있어요, 그 금융회사가, 미국의 3대 왕으로서 미국의 건국이념에 맞습니다. “정치는 경제에 간섭하지 않는다.” 철저한 자유주의 정책이지요. 정치는 경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자, 이 사람들이 석유왕이 되고, 철강왕이 되고, 금융 왕이 된 그 이유가 뭐냐? 어떤 식으로 해서 왕이 되었느냐?

첫째는, 남북전쟁 때문에 돈벌이가 되었어요. 역시 피해자가 있어야 승자가 있기 마련이에요. 남은 죽어 나가도 그 죽어 나간 틈에 장사하는 사람은 돈 벌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까 했잖아요. 인간이 불쌍한 이유가, 인간이 하나하나 착한데도 불구하고 불쌍하기 보는 이유가 돈이 인간을 버려놔서 그렇다고요. 그게 바로 세상을 나 중심으로, 환상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실재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인수합병을 했어요. 이 사람들이. 다른 기업과 경쟁하기 싫어서 자기만 독점적으로 왕이 되고 싶어서 시장독점을 위해서 인수합병을 한 겁니다. 인수합병을 하는 방법은 리베이트를 하는 거예요. 리베이트 뭔가? 거래할 때 내 물건 사주는 대신 이익에서 몇 퍼센트 떼 줄게, 이렇게 하면서 우리끼리 비밀이야, 그러면 다른 회사 물건 안 사지요. 그쪽 회사의 물건을 사게 되어 있습니다.

사무실에 우리 회사 집기 들여놓으시면 제가 실무자에게 이익의 10퍼센트 떼어줄게요, 하면 다른 데 갈 이유 없지요. 잘 들어놓으세요. 다른 데 갈 이유 없습니다. 리베이트지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정경유착이에요. 카네기 같은 철강왕 같은 경우에는 국회의원들 법 만드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호관세법 만들게 해서 자기회사 유리하도록 로비를 한 거예요.

네 번째가 노동착취를 했습니다. 노동착취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1차대전 후에 수많은 이주민이 유럽에서 왔어요. 그들이 왔는데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힘으로 때우는 것밖에 없지요. 노동자는 많은데 노동력을 쓸 사람은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된 거지요. 저임금에다 노동시간은 늘여서 거기서 착취 그리고 그 당시에는 노동자 시위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어요. 노동자를 탄압하고 착취해서 그들은 철강왕, 금융 왕, 석유왕이 된 겁니다.

정치가 경제에 관여는 안 하지만 경제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용납이 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한쪽을 밀어줌으로써, 1등을 만듦으로써 나라가 그 왕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지금도 왕이 없는 게 아니에요. 지금 이 세상에, 우리 맘속에 왕이 있듯이 이 현실 세계에는 왕이 있어요. 인간의 환상 속에서.

그렇게 해가지고 미국에서 이 사람들이 부자가 되니까 미국 사람들의 희망과 꿈이뭐냐? ‘나도 부자 될래’가 전부 등장했습니다. 나도 부자 될래. 그 부자 되는 방법이 뭐냐? 그게 JP 모건 에서부터 금융계에서 나왔습니다. 주식을 사면 돼요. 주식을 대출받아 주식 사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자기 재산의 10배라도 대출해 줄테니 주식만 사라는 거예요. 전부다 주식 사서 부자되려고 한 거예요.

그런데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한꺼번에 주식이 폭락하고 그 뒤에 무려 90퍼센트의 주식이 증발했습니다. 온 국민이 왕이 되고 싶어서 주식에 열광했던 그 사람들의 경제가 무너진 거예요. 환상이었던 겁니다. 꿈이었습니다. 이 록펠러, 앤드류 카네기, JP 모건, 이 사람들이 또 무엇의 왕이냐 하면 기부의 왕이에요.

록펠러 이 사람은 시카고 대학을 세우고 100조 원의 돈을 사회에 기부했고요. 카네기는 죽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평소에 부자 되어 죽는 것이 나의 수치다.” 이래서 전국에 2500개의 도서관을 짓고 재산의 90퍼센트를 기부했습니다. JP 모건은 엄청난 돈을 박물관에 기증했고, 중앙은행이 없을 시대에 중앙은행을 대신해서 자기가 대출금을 줘서 미국을 살린 사람이에요. 이걸 볼 때 이 세상 자체가 아, 인간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왕이 되는 그 목표, 그들은 지금도 이 시대 왕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왕은 뭐냐 이게 중요하지요. 오늘 이거 없으면 소용없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왕은, 동방박사의 예수님은 지금 어떤 식으로 왕을 하느냐? 징계를 합니다. 그게 사무엘하 7장 13, 14절에 나와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언약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징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앗수르 나라에게 먹히게 만들었어요. 이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서 스스로 왕이 되는 작업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을 깎아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 왕이었음을 뽑아내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떠냐?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주님이 우리 안에 있으면, 주님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는 앗수르 왕을 원하고 있습니다. 망해도 좋으니 돈맛 좀 보고 망했으면……,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 좋아하다가 좋아하는 나라에게 잡아 먹혔듯이 우리는 내가 출세하고 성공하고 싶어서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그 목표에 의해서 우리가 노예가 되고 뜯어먹히고, 사기당하고, 망하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게 한계에요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언젠가는 나도 부자 될거야, 언젠가는 나도 주식 사서 부자 될 거야, 나는 못했지만 내 아들과 내 손자들은 언젠가는 성공할 거야, 그게 계속 가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세상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세상을 통해서 나를 징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해 버립니다. 나를 징계해버려요. 때려버립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이게 바로 나훔 선지자예요. 나훔 선지자가 이스라엘이 앗수르한테 잡아먹힌 상태에서 지금 이 예언을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잡아먹힌 상황에서 ‘앗수르 망한다. 앗수르 망하니까 너는 위로하라.’ 그런 뜻이 아니에요. 앗수르 망하면서 ‘너는 잘될 것이다’가 아니라 ‘네가 망하는 그 세상과 함께 네가 망하도록 하는 그것이 진짜 왕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백성 가운데 함께 고난받는 모습의 왕으로 등장한다.’는 뜻이에요.

‘너는 부처 믿고 출세하나 나는 예수 믿고 출세한다.’ 이것은 아니지요. ‘너는 부처 믿고 출세하나 나는 예수 믿고 출세 포기했다.’ 그겁니다. 왜냐하면 환상과 현실을, 하나님과, 왕 되신 예수님과 마주치면서, 십자가 지신 주님과 마주치면서 진짜 진짜 진짜 왕의 모습을 비로소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왕이 되었습니까?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알았어요. 내가 왕이 아니고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왕인 것을 알았어요. 이게 멜기세덱이지요. 그걸 안 거예요. 나의 출세, 나의 성공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왕되기 위해서 철저하게 우리를 이용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부산강의에서 한 것처럼 우리를 늘 깎아냅니다. 우리의 희망, 출세, 성공, 나도 왕처럼 살고 싶어, 아이고 나 불쌍해라, 나 언제 희망 얻냐, 이것을 매일같이 주님께서는 채찍을 때리듯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대로 다 하게 해요. 주식도 사고, 펀드 넣고, 온갖 것 다 하고, 대출 내서 아파트 사고, 다 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그것들로 인하여 내가 징계를 받고 매를 맞는 경험을 해서 나 자신의 환상을 깎아내니까 그 안에서 오직 예수님만 우뚝 남아 있고 등장하는 그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이 환상 따라 간다고 같이 환상 따라 가는 우리들, 성경 말씀 보면서도 부자 되기 좋아하는, 부자를 원하는 저희들, 주께서 저희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우리를 때리는 징계로 사용하심을 이제는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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