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역사의 마감

아빠와 함께 2022. 1. 6. 21:33

역사의 마감

2022년 1월 5일                본문 말씀: 요엘 3:18-21

(3:18)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3:19) 그러나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강포를 행하여 무죄한 피를 그 땅에서 흘렸음이니라

(3:20)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3:21)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주리니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

과거 역사에 나왔던 지명들, 에돔이나 애굽, 싯딤 골짜기, 예루살렘, 유다, 시온들을 역사의 일부로서 보려고 한다면 이는 ‘여호와의 날’의 취지를 빠트린 해석이 됩니다. 사람들은 주변을 해석합니다. 그 해석의 의도는 ‘나의 목숨 부지 차원’입니다. 즉 사람은 세상을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조건이 담겨 있는 공간으로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 세상은 ‘생명’을 지켜내고 드러내는 공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인간들이 손타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에 따로 보호해 놓으신 그 생명나무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 부지가 급급하기 때문에 이러한 생명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인간은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줄곧 살 궁리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경 내용도 그저 역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미래 역사에 일어날 하나의 경우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되면, 여호와와 무관한 해석이 되고 맙니다. 오로지 자신이 자신의 앞날을 대비하는 의미만 발생하는 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아무리 성경을 들이대어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꿈을 꾸게 되면 거기에서 인간은 지나간 날의 현실을 마주 대하게 됩니다. 꿈 속에서 인간은 마땅히 자신의 주인공입니다. 그렇다면 꿈에 나타난 ‘나’와 그 꿈을 꾼 지금의 ‘나’와 다른 존재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동일 인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본인들은 한결같이 달라지지 않는 상태에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인간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해하고 희망 삼으려고 할 겁니다. 즉 ‘나만의 인생, 나만의 역사’에 대해서 줄기차게 이어가려는 의지로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엘 2:30-31에 보면,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인간 역사가 마감되는 날입니다. 인간들의 ‘자기 목숨을 지키는 조건으로 보는 세상 해석’이 거짓된 해석으로 드러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키고 싶은 것은 인간들의 목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드러내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인간들을 못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가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고 있음도 모르고 그저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라고 여깁니다. 바로 이방민족들이 그러한 자들입니다.

여호사밧 골짜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합니다.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육하였더라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대하 20:23-24)

이 성경 대목을 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유다 나라와 접선되어 있는 나라들이 연합해서 유다 나라를 공격하려는 전쟁으로 볼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연합해서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전쟁이라고 간주하십니다. 이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이 점을 증명했습니다.

이방민족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역사 신봉에 열중이기 때문에 매사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자기 목숨 지키는데 부지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래 나타나게 하시려는 생명은 이 땅에 예루살렘과 유다와 시온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곳의 등장은 ‘여호와의 날’의 취지로 인함입 니다.

즉 인간의 능력과 힘으로는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나라가 유다요 예루살렘이요 시온입니다. 이런 나라와 도시에 대해서 기존의 이방적인 이해력, 즉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겠다는 역사의식으로서 도저히 해석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7:20 같은 말씀입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인간의 이해하고 할 수 있는 역량의 한계에 대해서 마태복음 16:16-17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응수에서 잘 나와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즉 베드로 및 다른 모든 제자들은 인간의 혈육에서 고백하는 것과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시는 고백의 차이를 알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을 하는 순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창창한 미래를 기대하고 따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기대와 생명이 교차되는 그 시점이 찾아와야 합니다.

바로 그런 시점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싯딤 골짜기는 바로 인간의 역사적 이해와 영적 세계와의 교차를 보여준 골짜기입니다. 이 골짜기는 세속적인 나라의 왕들이 4:5로 나뉘어서 한 편 맹렬하게 전쟁을 보여주는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지명입니다.(창 14:3,10) 각자 그들은 자신의 성공적인 미래를 위하여 전쟁을 치릅니다.

인간 세계는 누구나 그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목숨을 부지한다든지 더 확고히 하기 위해 많은 힘이 필요할 때는 주저없이 타인과 전쟁하며 살아갑니다. 이게 인간들의 역사이요 일상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생명과 싸운다는 생각은 못하고 같은 인간들을 상대로 목숨을 부지하는 전쟁을 해서 장래에 안정된 삶을 보장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전쟁에서 아브라함이 개입하게 됩니다. 조차 롯이 그들 전쟁에서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318명의 소수 인원으로서 5왕을 물리친 바 있는 4왕의 강력한 군사력을 물리치고 먼 북쪽 지방까지 쳐들어가서 기어이 조카 롯과 그 재산을 되찾아옵니다.

돌아가는 길에 아브라함은 하늘에 속한 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덱을 만나게 됩니다. 이로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치른 전쟁이 인간 역사에 속한 전쟁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적 의미를 공격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숨은 일임을 알게 됩니다. 복음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저주를 누가 오셔서 자기 것으로 삼아 대신 해결하신 일을 말합니다.

이처럼 복음을 아는 자는 ‘역사가 마감되었음’을 인정하고 더 이상 자신의 가치에 눈 돌리지 않고 자신의 저주를 벌써 몽땅 다 가져가신 주님에게 눈 돌리며 삽니다. ‘다 빼앗김에서 오는 자기 마감’을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가 성도요 예루살렘이요 유다요 시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이미지 관리하면서 복음으로 자기 도닦는데 신경 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7강-요엘 3장 18-21절(역사의 마감)2201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3장 18-21절입니다.

요엘 3:18-21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그러나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강포를 행하여 무죄한 피를 그 땅에서 흘렸음이니라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주리니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

본문에 나오는 애굽, 싯딤골짜기, 유다, 예루살렘, 그리고 시온, 이 모든 단어들, 지명이 어디에 종속되느냐 하면, 여호와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 이 여호와 하나님의 변화에 같이 그 개념이 변화됩니다.

여기 있는 유다, 그리고 싯딤골짜기, 그리고 지난 시간에 했던 여호사밧골짜기, 애굽, 에돔, 이런 명칭들을 오늘날 우리가 보면서 ’이것은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 있는 지명들이고 옛날 그 땅 역사 속에 나왔던 지명들이다.’ 이렇게만 생각하신다면 이것은 여호와에게 종속된 개념이 아니고 인간 혹은 인간의 지나온 자국, 역사지요, 역사에 종속된 개념입니다.

역사에 종속된 개념이 되어버리면 이 성경해석은 오류가 발생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옛날에 조상들이 살았던 그 지역의 지명이 나왔을 때에 옛날 우리 인간들 이야기가 되어버리면 어디까지나 어디에 예속되느냐? 인간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 속에, 역사라 하지요, 역사, 역사 속에 같이 연속적으로 엮이게 돼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 지명들은 여호와에게 종속 되어야 되는데 사람들은 이걸 이해할 때 인간 역사의 일부분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이재명, 윤석렬, 이준석, 이것은 누구냐? 이것은 대한민국 사람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요즘 많이 뉴스에 나오는 이름들, 그 존재는 같은 사람들에게 종속된 거예요. 사람의 역사 속에, 시간의 흐름에 종속된 겁니다.

그런데 윤석렬, 이재명, 이준석, 이런 사람들 이름이 여호와께 종속되었다 하면 사람들은 웃을 거예요. 그것은 현재 대선을 앞두고 우리와 똑같은 일반적인 인간들 속의 하나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에 종속된 그 등장인물들, 뉴스에 나오는 그 인물들은 여호와에 의하면 그들은 죄인입니다. 그게 종속된 개념이에요.

여호와의 자기 변신, 또는 여호와께서 자기의 하신 일, 하신 일과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과 연결시켜 줘야 됩니다. 이걸 연결 시킬줄 모른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지금 여호와 하나님과 어떠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가를 놓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내 일이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내 인생,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역사지요, 나의 역사, 인간에게 있는 인류의 역사, 그것만 덜렁 남는 거예요.

그런데 요엘선지자를 통해서, 3장 14절도 나옵니다만, 그리고 2장 31절에도 나옵니다만, 여호와의 날이거든요, 요엘 2장 31, 32절에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의 날이 오는 거예요.

여호와의 날은 역사의 마감입니다. 모든 역사의 마감이에요. 인간의 마감이에요. 인간과 결부된 모든 인간들이 이해하는 그러한 의미와 개념은 여호와의 날에 완전히 좌초되어 버리지요. 그러니 인간은 마치, 여러분이 알다시피 군위 애들하고 의성 쪽 애들하고 싸움할 때 외통수라고 있지요, 그걸 경상도 말로 다릿걸이라 합니다.

다리 건너 저쪽은 의성 땅, 이쪽은 군위 땅, 혹은 예천 땅. 좀 노는 애들이 외통수, 다른 길이 없는 외통수에 딱 서 가지고 “돈 내라. 없으면 한 대 맞고 가라” 이런 식으로 깡패질 할 때 그걸 외통수라 하거든요. 외통수, 다른 길이 없어요.

여호와의 날은 인간의 모든 길을 없애버린 겁니다. 차단 시킨 겁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개념과 의미, 그것은 나라는 인간이 오늘도 살았듯이 내일도 어떻게 살고, 우리 대한민국이 앞으로 어떻게 계속 이어질 것인가를 기대하는 그 모든 기대를 좌초시키는 겁니다. 그게 헛꿈이라는 거예요.

사람이 교회 나와서 달라졌다고 주장들을 하는데요. 사람은 안 달라집니다. 안 달라지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여러분이 낮잠이나 밤에 자든지 꿈을 꾸잖아요. 꿈에 등장하는 내 모습, 내가 어릴 때 살았던 그 꿈속의 나의 삶의 자리, 거기서 처신하고 있는 내 모습이나 지금의 나가 달라졌습니까? 안 달라졌지요? 안 달라졌어요.

그 때 꿈속에 있던 그 젊은 날에 살아보려고 애쓰던 그 나나 지금 2022년도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는 나나 주인공이 둘 다 동일한 주인공이에요. 그때도 내가 살려고 애썼고 지금도 내가 살려고 애쓰고 있고, 무슨 대목에서 달라졌습니까? 안 달라졌어요. 달라진 적이 없어요.

이 말은, 내가 안 달라졌다는 그 말은 내가 죽은 적이 없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 말은, 달라지지 마세요. 달라졌다는 자체가 거짓말이기 때문에 굳이 거짓말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에요.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신자라고 우길 수가 없습니다. 달라지지 마세요.

뭐가 달라지는가? 나의 그 역사, 그 역사가 여호와의 날에 종속되어 버리면 나는 달라지지 않는데 새로운 상황, 환경이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덮치게 됩니다. 여호와의 날에. 이 선지자…… 참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데요. 이 말이 너무 어려워서 지금 설명하려고 하니 주저가 되는데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선지자는 뭐든지 감추지 않고 그대로 발설해요. 선지자가 발설할 때 뭘 발설하느냐? 여호와의 날이 되게 되면 모든 것이, 인간에게 연결되었던 모든 의미가 완전히 여호와의 날에 좌초당하고, 외통수로 완전히 마감이 되어버리고 여호와께서 일으킨 새로운 의미에 성도들이 종속되는데 그 종속되는 새 세계,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아무것도 기여한 적이 없음을 분명히 하는 그 사실을 선지자는 주저 없이 발설해 버려요.

새로운 세계에 우리가 놓여 있을 때 그 새로운 세계에서 내가 사는데 내가 내 쪽에서 보탬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선지자가 미리 그걸 다 알려준다 그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이 모든 일, 오늘 본문의 모든 일은 누가 하셨다? 하나님이 홀로 하신 거예요. 그냥 홀로 하신 것.

오늘 본문에 애굽 나오지요, 에돔 나오지요, 그다음에 유다 나오지요, 예루살렘 나오지요, 그다음에 시온성 나옵니다. 그러면 이걸 두 패로 한번 나눠봅시다. 19절에 “그러나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니”

여기 19절에 나오는 애굽과 에돔은 이방민족이에요. 이방 민족인데 이방 민족은 어떤 민족이냐 하면, 여호와의 날로 그 모든 것은 끝나버린, 그 나라 자체가 소실되어버린, 그들 역사가 끊어져 버린 그 대상이 이방 나라에요. 그 이방 나라가 끊어지면서 등장하는 게 뭐냐? 20, 21절에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주리니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

이렇게 이게 바뀌는 그 지점을 오늘 18절에 ‘싯딤골짜기’라고 이야기되어 있습니다. 싯딤골짜기. 그래서 이 본문 설명할 때 잘못된 예를 먼저 말씀드릴게요. 잘못된 예입니다. 여기 이 본문의 싯딤골짜기라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싯딤골짜기는 사해 바다에서 이집트쪽의 남쪽으로 싯딤골짜기가 있어요.

싯딤골짜기에 옛날에 어떤 전쟁이 있었는데 그 전쟁이 있었던 장소가 싯딤골짜기다. 그리고 요엘 3장 12절에 나오는 ‘여호사밧골짜기’는 역시 예루살렘, 유다 주변에 접근되어 있는 에돔, 암몬, 세일, 이런 나라들이 연합해서 유다와 싸웠던 그 장소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인간의 역사 속에 편입된, 역사와 관련된, 여호와의 날의 취지를 빠뜨려버린 이방 나라 적인 발상이에요.

여기서 전쟁을 한다는 말은, 인간의 역사와 그리고 여호와의 날을 준비한 여호와의 싸움입니다. 인간이 싸워야 될 적은 뭐냐? 인간이 아니에요.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여기 나오는 그 이방 민족들, 싯딤골짜기에 있던 그 나라들은 누구하고 싸우냐 하면, 인간이 같은 인간하고 싸우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역사 속 인간군상들의 하루하루 일상이 아니고 뭡니까? 여러분, 누구하고 싸웁니까? 누구 때문에 성질나고, 누구 때문에 화내고, 또 누구 때문에 좋~다고 교만합니까? 다 사람하고 상대하잖아요, 사람하고. 과속했는데 카메라 잘못 찍혔는지 벌금이 안 나왔다. ‘음매, 기 살아.’ 이거 누구하고 싸우는 거예요? 사람하고 싸우는 거예요.

동구청에서 나왔는데 아무 이상 없어서 “방역 잘 하네요.” 칭찬받았다. 기분 좋다 이거 누구하고 싸우는 겁니까? 사람하고 싸우는 거예요. 여호와의 날의 취지가 빠져버린 겁니다. 사기를 당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건 누구하고 싸우는 거예요? 그것은 사람하고 싸우는 거예요. 이것은 아직도 자기 역사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는 겁니다. 자기 역사에 미련 갖는다는 말은 나에게 미련 갖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많은 것을 진행하려면 너무 어려우니 쉬운 것부터 먼저 가겠습니다. 복음이 뭐냐 하면요 제가 복음을 알려드릴게요. 복음이란 나에게 주어질 저주를 다른 분, 예수님이 오셔서 그 저주를 대신 가져가는 것. 이게 복음입니다. 나에게 주어져 있는 저주를, 나에게 올 저주가 아니고 내가 여기 있음에 나는 저주와 함께 있거든요, 이 저주를 내 힘으로 벗겨낼 수가 없어요. 나에게 올 이 저주, 여호와의 날에 심판받을 그 저주를 누가 인터셉트, 내가 감당 못할 이 저주를 주님이 와서 대신 가져가 버렸어요. 이게 복음이거든요.

그래서 복음을 아는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은 나한테 관심이 있어 가지고 ‘내가 남하고 싸워서 내가 어떻게 살아남고 이기고 저 사람보다 더 나은 인생 성공적인 삶을 사느냐?’ 하는 이것은 내 생각입니다, 내 생각. ‘내가 어떻게 나를 유지하느냐, 내가 어떻게 교회 나와서 어떻게 신앙생활 하면 구원받느냐?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라니까요.

구원받겠다는 것은 욕심이에요. 이것은 내 구원이거든요. 이것은 욕심이거든요. 그런데 복음이 왔다는 말은 내가 처리 못 하고 감당 못 할 저주를 누가 딱 떼 가지고 가져가 버린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어어어어어어~?, 오늘 제목을 ’어어어어어~?‘ 로 할까요? 어어어어어어~? 나를 보던 내 시선이 나의 저주를 뚝 떼서 가져가 버린, 혹부리 영감처럼 뚝 떼서 가져간 저쪽을 쳐다보는 거예요. 저쪽을 쳐다볼 때 나를 안 쳐다보는 그 사이, 이 관계, 이게 바로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현상입니다.

주님이 죄를 가져갔을 때 주님을 쳐다보거든요. 그럴 때 다른 사람이 나한테 시비 걸고 한다면 우리는 이야기해야 돼요. “나는 너하고 안 싸워. 나는 너하고 안 싸운다고. 나는 너하고 비교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아.” 내가 지금부터 생각할 분은 오직 내 저주를 뚝 떼서 가져간 십자가에서 대신 치른 그분만 나에게 관심사고 나는 그분과 의미 관계, 의미로 연결 되어 있는 겁니다. 그게 시온이에요. 그게 예루살렘이에요.

그래서 여호와의 날을 일으키신 그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인간 역사에, 나의 역사에 예속되어 있지 하나님에게 예속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찾는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께 예속된 사람 아니에요. 하나님 찾는 이유가 나 구원받기 위해서 찾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나를 주시하는 거예요. 나에게 관심 있는 겁니다. 이거 복음 아닙니다.

어떤 70대 중반 된 여자분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하나 왔어요. 그분이 펀드를 넣어놨는데 그 메시지 내용이 “이 펀드에 진입하시면 14퍼센트 보장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데일리증권‘ 이름으로 메시지가 왔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분은 욕심이 나는 거예요.

자, 지금까지 한 설교에 의하면 욕심이라는 것은 뭐냐? 내가 지나온 역사가 있고 남은 역사가 있는데 그 역사에 대해서 펀드 4퍼센트 인생은 되기 싫고 14퍼센트 인생, 쉽게 말해서 돈 벌고 싶다 그거지요. 돈 많이 버는, 이자 많이 받는 인생을 내 역사로 유지하고 싶고, 견지하고 싶고, 지속시키고 싶고, 단절되기 싫고, 연속하고 싶다는 거예요. 미래가 더 지금보다 성공적인 인생이 되고 싶다는 거예요.

벌써 여호와의 날 개념은 확 빠져버렸지요. 그 메시지가 딱 오는 순간 ‘야, 이런 수가 다 있구나.’ 그것도 데일리 증권, daily가 영어 아닙니까? 영어로 된 이름의 회사니까 이것은 외국계증권회사로 봤지요. 그런데 그분이 70대 중반이니까 휴대폰에 무식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방법을 몰랐어요. 진입하라고 하니까 “진입” 글자로 써서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걸로 진입이 됩니까? 못 들어가잖아요. 14퍼센트 이자는 탐이 나고 들어갈 때 어떻게 들어가는지는 젊은 사람이 아니라서 모르니까 기껏 아는 게 한글로 “진입”이라 써서 메시지를 보내니까 들어가 지지를 않네요.

이것은 뭐와 같으냐 하면, 오늘날 한국교회하고 똑같아요. 사도행전 2장 21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씀이 사도행전 2장 21절에 나오거든요. 이 말씀을 보고 한국교회 열심 있는 교인들이 자기 천당 가고 싶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휴대폰에다 대고 하듯이 여기 성경에다 들이대고 “주 예수님!” 한번 해서는 안 되겠지요. “주 예수님~!” 안돼 더 심하게 해야 돼. 그래서 주를 그냥 주가 아니고 쌍지읒으로 바꿔서 “쭈~ 예수님~! 믿습니다!” 그걸 한 열 번 하면 구원받습니까?

아까 말한 14퍼센트의 펀드 이자 준다는 그것 보이스 피싱이거든요. 나중에 알아 보니까 데일리증권이라는 그게 보이스피싱으로 그 때 확 퍼졌대요. 자, 탐은 나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앞으로의 이자 많이 받는 행복한 삶은 탐이 나고 그래서 그 방법은 내 쪽에서 뭔가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진입하세요, 하니까 진입을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건 나도 몰라요. 어떻게 하는지를. 탐은 나고 진입은 하고 싶고, 사도행전 2장 21절 성경에서 구원을 얻으리라, 하니까 구원은 탐이 나고 진입하는 방법은 모르니까 기껏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는데 그 내 쪽이라는 것이 뭐냐? 과거의 꿈속의 나, 지금까지 내 살아왔던 내가 내 삶을 보장하는 나, 그 내 목숨 유지하는 방법 중에서 괜찮은 것 골라서 주 예수 믿겠다고, 그래서 천당 가겠다고 시도하는 것, 이게 바로 이방 민족입니다. 이게 바로 우상숭배에요.

내가 기여한 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기여해서 기어이 구원받으려 하는 겁니다. 이걸 간추려서 말하면 여호와의 날의 입장에서 이 세상을 보게 되면요, 이 세상은 목숨을 지켜주는 조건이 아니고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조건에요. 그런데 목숨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이 숨 쉬는 것을 목숨이라 하고 생명은 에덴동산에 있던 그 생명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인간에서는 생명을 찾을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세상은 인간이 찾을 수 없는 생명, 그걸 감추어진 비밀이라 하는데 그 감추어진 복음, 감추어진 비밀을 위해서 인간역사가 그동안 아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전쟁이 일어났고 인간 역사는 꾸역꾸역 이어져 온 거예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사진앨범 보면 초등학교부터 해서 중간에 결혼사진도 있고 죽 있잖아요. 그 앨범에 나오는 긴 역사는 누굴 지키기 위한 조건입니까? 내 목숨, 내 생계 유지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날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그 일을 내일부터 또 시작하려고 합니까? 내 목숨 지키는 것과 관련되어있지 주님이 주시는 생명 주시는 것과 관련 있습니까? 이거 어떡할래요?

우리가 다시 한번 이 현실을 성경을 통해서, 이 현실을 여호와의 날과 연관시킬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됩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그러니까 아주 작은 믿음이 있어도 이 산 더러 옮기라 하면 옮길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의 능력으로 믿음이 발생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그런 재주 있으면 나와보라. 없잖아요. 없다는 말은 믿음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여호와와 관련성 없이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에 사력을 다하고 거기에 모든 생각을 다 몰입해 버려요.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이런 말씀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사람들은 베드로가 이런 고백했다고 ‘참 베드로 훌륭하다’ 하는데 그 뒤에 예수님의 말씀을 빠트리면 안 돼요.

그 뒤에 예수님 말씀이 뭐냐? 1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혈육이 아니다. 무슨 뜻입니까? 완전히 베드로의 고백을 그 현장에서 뭉개버려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베드로야, 네가 나를 쳐다보고 따르겠다 하는데, 네가 예수를 따르겠다 하는데 너는 나를 따르는게 아니야. 너는 진리를 따르는 게 아니야. 너는 나를 따라오면서도 진리가 빠져버린 예수, 네가 원하는 예수를 네가 따르고 있는 거야.” 그런 뜻이에요.

혈육에 의해서 태어난 인간은 혈육의 한계 밖으로 못 벗어납니다. 그러면 밖에 나가는 경우는 하나의 경우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그에게 복을 주는 방법밖에 없어요. 믿음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호와의 날에 시온은 어떻게 발생 되고 예루살렘은 어떻게 생겨나느냐?

에스겔 16장 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주님께서 여호와와 관련된 우리, 우리 자신을 여호와와 관련되게 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에스겔 16장 8절의 그 말씀을 우리에게 계속 반복해서 매일같이 적용합니다.

“너 처음으로 돌아가.” 네가 벌거벗은, 그냥 아무것도 걸칠 것이 없어 위험에 노출된, 지금 당장 죽어도 당연한, 내 힘으로 살 수 없는 그러한 처음 자리로 되돌려주는 겁니다. 우리를. 그 되돌릴 때 하나님께서……, 이 에스겔 16장 8절 이게 이스라엘 이야기거든요.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하고 달라서 덮힌 그 옷이 있는데 그 옷이 뭐냐? 언약이라는 옷으로 덮었어요.

그러니까 그 언약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언약 안에는 아무것도 내 것이라는게 전혀 없는, 벌거벗어서 누구로부터도 위험의 대상이 되는 그 모습만 덜렁 안에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모든 것을, 내 가진 것이라는 것은 다 잃어버린, 상실한, 박탈당한 그 모습, 그 모습을 유지를 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덮어주는 하나님의 복음과, 언약이 같이 유지가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성도끼리 복음을 이야기할 때 툭 물어보는 거예요.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 다 빼앗겼어요. 나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습니다. 나는 신자도 아니고 불신자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로 그것이 슬픔이 아니고요, 슬픔으로 하면 그것은 가짜지요, 슬픔이 아니고, 고민이 아니고, 그걸 감사함으로 매일같이 그걸 유지하는 것을 기쁨으로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지금 여호와의 날의 요소에 예속된 거예요. 언약과 연결된 겁니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잘남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어어어어어~? 자기의 모든 것을 가져갔을 때 남아 있는 것은 뭐냐? 나는 저주받을 인간이라는 것이 노출되었다는 그 상태, 어찌 내가 저주받은 자 맞느냐, 하는 이 사실을 알게 된 기쁨이 더 이상 나에게 관심 없고 복음에 대해서, 내 저주를 가져가신 주님께 관심을 두는 것, 그 주님의 언약이 나의 옷이 되고 나를 덮어주는 복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러한 경우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말씀, 요엘 싯딤골짜기와 관련성이 있어야 됩니다. 자, 아까 말씀드렸듯이 싯딤골짜기라는 것은 바로 세상과 연계되어 있던 모든 의미가 여호와의 의미로 종속되는 것으로 바뀌는 그 골짜기가 바로 싯딤골짜기에요. 전환되는 골짜기. 그러면 싯딤골짜기가 처음 나오는 곳이 바로 창세기 14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14장의 이야기를 제가 요약해서 말씀드립니다. 아까도 했지만 이 세상은 자기 잘난체 하는 인간들이 뺏고 뺏기고 전쟁하고 다투고, 그리고 나와 너만 쳐다보는 세상, 힘 가진 자가 더 큰 힘을 갖기 위해서 서로 전쟁하는 이 살벌한 세계, 그게 이방 세계에요. 왜 그렇게 전쟁을 하느냐? 자기만의 삶의 터전과 목숨을 지키기 위한 조건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이러한 이방자들의 생활에 대해서 우리가 별로 낯설지 않지요?

모든 머리에 떠오르는 여러분의 생각과 사고가 나의 생존과 내 목숨을 지키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의미를 갖잖아요. 애들 하나 더 가르치면 얼마 더 받는다. 이런 생각들, 모든 사고방식이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 속에서 쏙쏙 뽑아내는 거예요. 내가 내일 더 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을 지금 더 끌어모을 수 있느냐. 이게 바로 이 세상을 대하는, 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 자신의 생계 위주의 모습입니다. 이방 민족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지요.

창세기 14장 1절에 “당시에 시날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왕 아리옥과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이” 이렇게 네 명의 왕이에요. 2절에 보면 “소돔왕 베라와 고모라왕 비르사와 아드마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왕과 싸우니라” 여기는 다섯 왕입니다. 1절의 네 명의 왕이 2절의 다섯 왕과 4:5로 붙은 전쟁터가 싯딤골짜기에요.

그러니까 창세기 14장 시작하면서 약간 북쪽에 있는 네 왕이 남쪽에 있는 다섯 왕과 전쟁이 붙었는데 그 붙은 장소가 지금의 사해 바다 근처인데 그 근처에 아홉 개의 나라가 있었거든요. 요단강 근처의 나라들인데 그 나라들이 전쟁했던 이야기다. 이게 창세기 14장에 나옵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이름 외우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렇게 끝나버려요. 이방 민족들이 이렇게 싸웠습니다. “그래서 뭐?” 그런데 여기에 누가 개입되어 있느냐 하면, 바로 롯이라는 사람, 아브라함의 조카가 소돔과 고모라 땅에 거주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면 또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뭐?”

아브라함 조카가 있는 다섯 왕 쪽이 패배했어요. 패배해서 조카는 사로잡혀가고 재산도 몽땅 다 빼앗겼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 돈 안 빼앗겼으면 되었지 남의 조카까지 내가 신경 써야 되느냐?” 이렇게 되겠지요. 13절에 마므레라는 사람이 나오는데요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마므레라는 사람과 아브라함이 연합합니다. 14절에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용병이지요) 삼백 십 팔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들을 쳤다고 되어 있어요. 단이라는 곳은 예루살렘에서 몇 킬로냐 하면, 191킬로미터입니다.

저 위 북쪽, 지금의 시리아쪽이에요. 다메섹, 다마스커스 서쪽까지 갔는데 191킬로미터 떨어진 그곳까지 가서 전쟁해서 이겨 가지고 조카는 물론이고 빼앗긴 재산도 다시 회복했다. 이게 16절에 나옵니다.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그러면 16절까지 읽고 난 뒤에 또 묻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런데 창세기 14장 17절 이후에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골짜기인데요)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그래서 뭐? 그것도 옛날 지나간 이야기고, 그런데 뭐 어쩌라고?”

그런데 18절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여기서 바로 여호와의 요소가 개입하면서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육 적인 전쟁, 생계,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한 그 전쟁이 영적 전쟁으로 전환됩니다. 여호와의 전쟁으로 전환되지요. 그게 싯딤골짜기에요. 그 핵심이.

이 세상을 바라볼 때 내 목숨을 부지하는 세상이라는 조건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던 그 이해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식으로 끼어들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혈육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아버지의 세계와 복을 받아서 연결되는가, 그 사실을 바로 알리기 위해서 성경이라는 게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들이 육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시작으로 했어요. 자기 자신만을 지키고자 했다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없습니다. 이렇게 쉽게 하면 제일 좋아요. 철로를 깔고 그다음에 기차가 달려야 되잖아요. 그런데 철로 없이 기차를 한번 당겨보세요. 그게 잘 당겨질까요? 뻑뻑해서 잘 안 당겨지지요. 못가지요.

천국을 가려면 천국 가는 철로가 뚫려야 되는데 철로는 안 깔렸는데 인간들이, 아까 이야기한 그 사도행전 2장 펼쳐 가지고 주의 이름을 믿습니다, 백날 해 봐야 이것은 철로 깔리지 않았다는데 자기 몸뚱이만 억지로 끌고 천당 집어넣으려고 하는 이것은 믿음 아닙니다. 이것은 부질없는 짓이에요. 이것은 자기 자신을 살리고자 하는 거예요.

자기 안에 무게감으로 오는 저주를 누가 와서 낚아채지 않는 한 인간은 자기가 자기 스스로 자기의 저주를 극복해서 천국 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시편 110편 4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여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좆는다는 말, 육으로서 살아가는 이 세상에 육밖에 없고, 인간들밖에 없고 인간의 역사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들, 그들에게 감히 여호와의 날이, 그것이 전부 다 마감이 되는, 이 역사가 마감이 되는 그 때가 온다는 생각을 인간들은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데에 관심도 없이 그냥 꾸역꾸역 자기 목숨 유지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호와에 예속되지 않아요. 여호와의 복음과 관련 없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감춰진 거예요. 역사가 복음을 감춰놓은 거예요. 그러면 그 역사 속에 감춰진 복음이 드러나려면 역사 전체를 뜯어내야 되거든요. 역사 전체를. 네 왕과 다섯 왕이 싯딤골짜기에서 전쟁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그냥 역사이야기에요. 우리도 그냥 역사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것이 뜯겨지는 거예요. 318명이 어떻게 그 전쟁을 이깁니까? 아브라함 본인도 이것은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아무리 봐도 이것은 뭔가 누군가 개입한 것 같아요. 내가 천국을 간다.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어요. 나는 나만 생각하는 인간은 천국에 못갑니다. 천국은 주님 생각해야지 내 생각하는 자는 안 넣어줘요.

그래서 내 생각하는 이상은 천국 못갑니다. 아무리 해도 천국 못 가는데 어떤 소식이 들려오느냐 하면, 십자가 이야기가 들려오고, 십자가에서 이미 너의 저주는 내가 홀라당 다 가져갔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순간 그 사람은, 그 성도는 이미 여호와의 날의 취지에 종속되어 있고 연결되어있는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이제 내가 남들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잘 먹고 잘사느냐, 하는 이것은 내 관심 밖이에요. 그딴 것은 하나도 안 중요합니다. 돈 얼마 더 받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문제는 이 역사 속에 있는 나를 내가 꼴 보기 싫어서 그 나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려야 돼요. 내가 아주 가볍게 나를 버려야 됩니다.

그게 제대로 누가 나의 저주를 몽땅 가져갔다는 기쁨에 정신 팔린 사람의 본 모습이에요. 이제 내 역사는 마감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나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절대로 안 달라져요. 안 달라져도 상관없어요. 상관없습니다. 왜? 누가 내 저주를 가져갔기 때문에. 굳이 내가 내 인생을 달라지게 할 필요 없습니다.

어떤 사람 말하기를, 목사는 청렴해야 되고, 목사는 가난하게 살아야 되고, 목사는 이웃을 돌보면서 사는 그 청빈한 모습이 중요하다 하는데 저는 이렇게 봅니다. 목사가 청렴, 청렴인, 여기에 관심 있다면 저는 이단으로 봅니다. 얼마나 말씀에 관심이 없었으면 자기 도(道) 관리하는데 신경을 썼겠어요. 자기 도(道). 남들 보기에 이 목사가 어떻게 보이느냐 신경썼다는 말은 이것은 한마디로 이단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목사를 원하잖아요. 뭐 주기철 목사가 어떻고, 손양원 목사가 어떻고, 한경직 목사가 어떻고, 김수환 추기경이 어쩌고저쩌고……. 목사는 말씀에 관심과 정신이 팔려 있어서 내가 어떤 인간이건 그저 관심 두면 안 돼요. 목사가 골프 친다고 지옥 갑니까? 누가 “목사님, 벤츠 타세요” 하고 벤츠 주면 그 벤츠 차 타면 지옥 갑니까? 포니 타면 천당 가고 벤츠 타면 지옥 가고?

이 인간세계에서 고대하고 있는 목사 상, 이것은요 전부 다 여호와와, 복음과 아무 상관 없는 거예요. 처음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처음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벌거벗은 것이고 옷은 언약의 옷, 하나님의 약속의 옷을 입혀준 겁니다. 그때 그 모습, 우리는 변한적이 없어요. 우리의 마음이 구멍 나야 돼요. 구멍 나고 우리 힘으로 믿음이라는 것을 만들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뭐 아멘, 믿습니다, 해도 소용없어요. 그거 성경에다 코 박고 아멘, 믿습니다, 글자 베껴 쓰고 그게 아무 소용 없어요. 거기에 신경 쓴다는 말은 아직도 나 자신에 대해서 여호와의 날, 그러니까 모든 것이 마감되고 모든 것이 저주로 들통난 그 최후의 날과 본인이 관련이 없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온과 예루살렘은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날이 있을 때 나타나는 것이 예루살렘이고 그때 시온이에요. 그게 유다에요.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날을 치르고 비로소 여호와의 날과 함께 제공된 멜기세덱의 반차, 하늘에 속한 그 족보와 연결될 때 비로소 주께서 미리 예비하고, 미리 준비하고, 미리 창세전부터 선택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예루살렘이고 시온이고 하나님의 유다입니다.

이것을 선지자 요엘은 주저 없이 감추지 않고 그대로 발설합니다. 인간들은 못하는 것, 오직 여호와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요엘 마지막에 이렇게 세상적인 역사 이야기를 가지고 합니다. 너희들이 역사에 속한다면, 여호와의 날을 이해 못 한다면 이 말씀도, 너희들은 이 말씀도 풀어낼 수 없다는 거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로 우리가 구원받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내 단도리 하고, 내 정리 정돈하고 내 관리하는 것, 이것이 정상인 줄 알았습니다. 이게 복음적인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이단적이고 우상 숭배적이고 이방적인지를, 세상 사람들이 하는 자기관리 부분에 지나지 않는 거짓된 것인지를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리 연락  (0) 2022.01.20
밟히기  (0) 2022.01.13
무너짐  (0) 2021.12.30
무기  (1) 2021.12.23
  (0) 2021.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