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아빠와 함께 2021. 12. 16. 21:11

선( line) 

2021년 12월 15일                본문 말씀: 요엘 3:1-8

(3:1)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3:2)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서 그들을 국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흩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3:3) 또 제비 뽑아 내 백성을 취하고 동남으로 기생을 바꾸며 마셨음이니라

(3:4)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의 보복하는 것을 내가 속속히 너희 머리에 돌리리니

(3:5) 곧 너희가 내 은과 금을 취하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궁으로 가져갔으며

(3:6) 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본 지경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니라

(3:7) 보라 내가 그들을 너희가 팔아 이르게 한 곳에서 일으켜 나오게 하고 너희의 행한 것을 너희 머리에 돌려서

(3:8) 너희 자녀를 유다 자손의 손에 팔리니 그들은 다시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구분을 분명히 하시는 취지를 처음 창조 때부터 설정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선악과 나무 과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선악과 나무 과실은 아담과 하와가 먹고 살기 위해 재배한 나무가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나무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가지고 선을 그으셨습니다. “따 먹지 말라”고 말입니다.

인간을 부추긴 악마는 바로 이 선을 넘어버리라고 유혹했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못 넘을 선은 없음”을 보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신으로 행사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지를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취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이 죽어도 넘을 수 없는 선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신약에 와서 일어난 사건,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죽는다고 해서 다 영생의 부활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에게 첫 번째 일어난 사항이고 그 어떤 인간도 해내지 못한 일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곧 못 넘을 선이 되셨던 겁니다. 인간 세계와 하나님이 세계를 가름하는 경계선이 되셨던 겁니다.

예수님 계신 곳은, 생명이요 부활이요 진리이지만, 그 외 인간의 세계는 죽음이요 저주요 거짓입니다. 즉 인간들이 상상하고 고안해낸 지옥이나 천국 개념은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이러한 선 너머의 특수성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서 역사 속으로 미리 가동시켰습니다.

이 이스라엘의 취지는 아브라함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언약 취지를 바탕으로 하게 됩니다. 로마서 4:17에 보면,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죽은자를 살리는 것’과 ‘없는 것에서 있게 하는 것’은 인간이 해내지 못합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해내지 못하는 일로 인해 생겨난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선으로 기능케 하셨습니다. 출애굽 때에,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일로 이 아브라함의 취지가 담깁니다.

그 당시에 없었던 나라, 이스라엘이 없던 데서 있게 되었으며, 모든 장자는 다 죽어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죽은 데서 살리신 뜻을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담아내셨습니다. 이로서 ‘없음의 나라’가 모든 ‘있음의 나라’를 제거하게 하십니다. 사무엘상 4:1-4에 보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이라는 이방나라에게 전쟁해서 패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내부에 아브라함 언약의 취지를 살리지 못해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의 기능을 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전쟁에 지고 난 뒤, 여전히 ‘있음’으로 ‘있음’을 이어가려고 했습니다. 즉 자신들에게 언약궤라는 신기한 상자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연이은 전쟁에서 그 언약궤를 빼앗기게 되어 이스라엘에게는 언약궤 ‘없음’이 됩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5장에 보면, 언약궤 홀로 블레셋 전역에서 승리자로서 활약하게 됩니다. 이처럼 없음의 자리에 와 있어야 오로지 하나님만이 해내심만 보이는 겁니다. 사사시 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란 평범한 농부에게, 바알 제단을 부수라는 지시를 하십니다. 이 지시에 천사가 등장합니다.

천사란 인간 세계에서 인간들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차라리 인간들에게는 ‘없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우상이란 천사처럼 ‘없는 존재’가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천사가 기드온보다 이 지시를 내래신 것은 아브라함의 취지로 언약이 내포되어있지 않는 존재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우상이다는 겁니다.

곧 인간 자체가 우상적이라는 말입니다. ‘없음의 가치’, ‘죽음의 가치’를 인간들은 기피한 겁니다. 인간들의 인생살이가 힘든 것은 자신의 ‘있음’을 스스로 철회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있는 세상살이는 ‘이유도 모르는데 벌 받고 있는 형국’입니다. 자신은 죄지었다고 여기지 않지만 실제의 삶은 심한 벌을 받는 처지입니다.

여기서 자연 신에게 반발합니다. 즉 “나는 정당한데 왜 나는 자꾸만 망해가느냐?”라는 항변을 쉬지 않고 방출합니다. 인간의 대책은 그저 ‘죽을 힘을 다 해’ 버티고 참는 것입니다. 평생 이굴어놓은 삶이 위태로워질까봐 너무 두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학이니 과학이니 신학 및 학문 탐구에 매진합니다.

안 망하기 위해 온갖 것을 미리 알아 대배하고 방비하겠다는 의도입니다. 하지만 평생의 고질병이란 인간이 자기에게서 자기가 못 나가고 있다는 겁니다. 아니, 안 나가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잃어버림’을 모르는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내보내십니다.

곧 잃어버림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있는 것도 없게 하시고,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것을 죽음으로 몰아세우십니다. 이는 누가복음 15장에서 나오는 세 가지 비유의 내용을 실시하시는 겁니다. 목자가 99마리 양을 놔두는 이유는 그들 양 사이에는 ‘잃어버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동전을 찾은 처녀가 이웃을 불러 함께 즐기는 것은 ‘잃어버렸다가 찾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탕자 비유 같은 것은, 아버지 곁을 떠나 본 적이 없는 맏이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탕자에게 모든 아버지의 사랑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죽은데서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일관된 하나님의 일입니다. 오늘 본문 후반부에서 이방민족, 특히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은, 이스라엘의 특수성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권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함부로 만질 수 없는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감히 일반적인 이방민족이 일반성을 가지고 그들을 학대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찬양으로 모압과 암몬과 에돔의 연합군대를 물리친 여호사밧의 골짜기를 언급하면서, 선을 너머 있는 하나님만의 능력으로만 참된 이스라엘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 밖에 머무는 자들은, 그들 입장에서 자기 것 지키고 키우는데 혼신을 노력을 다할 뿐이고, 그것이 세상살인 인줄로 압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일체 하나님의 언약이나 계약이나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가진 것, 지키는 것이 24시간의 관심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죽은 자를 계속 살려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만 표출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강-요엘 3장 1-8절(선, line)2112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3장 1-8 입니다.

요엘 3:1-8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서 그들을 국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흩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또 제비 뽑아 내 백성을 취하고 동남으로 기생을 바꾸며 동녀로 술을 바꾸어 마셨음이니라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의 보복하는 것을 내가 속속히 너희 머리에 돌리리니 곧 너희가 내 은과 금을 취하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궁으로 가져갔으며 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본 지경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너희가 팔아 이르게 한 곳에서 일으켜 나오게 하고 너희의 행한 것을 너희 머리에 돌려서 너희 자녀를 유다 자손의 손에 팔리니 그들은 다시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요엘이 말하면서도 요엘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요엘이라는 선지자 본인의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하겠는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스케줄과 자기계획을 미리 선포한 거예요.

나 이대로 진행할 거야, 이 세상을 이렇게 이끌어갈 거라고 제시한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성경을 보면서 기분이 좋고 신나고 고맙고 감사 할 일은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아챘다는 바로 그 자체에서부터 우리는 즐겁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관심을 둬야 되는데 사람이 자기한테 자기의 가진 것에 거기에 관심을 둬버려요.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창세기 3장에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주의를 줬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너에게 관심 두지 말고 내가 너에게 명한 것에 관심 두라고 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은 따먹지 말라, 그렇게 이야기하신 거예요.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따먹지 말라, 하는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의논해서 자기들 평화로운 부부생활을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냥 제시한 거예요.

선악과 과실은요, 아담과 하와가 자기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농사지어서 자기들이 재배한 나무가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심어놓은 나무입니다. 그러면 심어놓은 나무를 인간에게 제시하고, 그 나무에 주목하고, 이 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말라는 뜻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제시한 그것이 근본이고 기본이지 네가 네 인생에 대해서 관여할 필요는 없다는 취지로 주신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뭔가 허전하고 벌거벗었음으로 부끄럽습니다, 하고 자기한테 관심을 가져온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직장이나 사회에 나가서 둘러보세요. 말씀에 관심이 있는가? 말씀을 이용하기 위해서 관심 있는 것 말고 말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거기에 관심 두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여러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관심이 없다면 이것은 백 퍼센트 그 사람은 자기한테 관심 있는 사람이에요. 자기의 미래, 자기의 계획, 자기의 가진 것, 그런데 관심 두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방금 말을 좀 잘못한 것 같은데요. 직장이나 사회에 나가서 말씀에 관심 있는 사람 있는가 보세요, 라고 제가 말을 좀 경솔하게 했는데 이 이야기를 바깥에 나가서 하지 말고 사실은 교회에서 찾아보세요. 이게 원래 취지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에 관심이 있는 사람 있나 보세요. 뭐 더 노골적으로 해서 목사치고 말씀에 관심 있는 사람 한번 찾아보세요. 목사치고 말씀에 관심 가진 사람 별로 없어요. 자기 교인 수나 자기 월급에나 관심 두고 그렇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그 말씀은 하나님의 계신 곳과 인간이 있는 곳과 그 사이에 선(line)을 만들기 위해서, 경계선을 만들기 위해서 그 말씀을 주신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을 때 악마가 인간에게 부추긴 말이 있습니다. 제가 쉽게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아 네가 넘을 선(線)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선을 그었는데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그 선을 인간이 따먹었다는 말은 더 이상 우리 인간의 이름으로 넘지 못할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신이라는 느낌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들의 그러한 건방짐, 자만성, 교만하도록 방치하지 않지요.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넘는가 보라 해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 사이에 선을 그어버려요. 그렇다면 인간은 죽을 수는 있는데 죽고 난 뒤에 죽은 존재가 스스로 “야! 야! 일어나.” 그렇게 일어나 깨어서 부활할 수 있는 재주와 skill과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그것은 선(line)이 되는 거예요. 선, line이 되는 거예요. 라인. 이게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고 생명이고 길이에요. 이 말은, 인간에게는 아무리 과학을 연구하고 철학과 신을 연구해도 길은 없고 생명도 없고 진리도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자,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인간에게는 생명이 없고 진리도 없고 길도 찾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도록 주께서 조치한 이유가, 주님은 어디를 강조하기 위함이냐 하면, 선을 강조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와 인간세계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선을 만든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어떤 금지도 어떤 선도 통하지를 않는다. 인간은 다 타 넘는다’고 인간이 그렇게 행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어도 넘을 수 없는, 인간이 죽어도 넘을 수 없는 선이 뭐냐? 그게 바로 말씀의 선입니다. 죽어도 넘을 수 없어요. 죽어도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의 모든 초점은 뭐냐 하면, 인간이 건널 수 없는 그 선을 만들고 그것으로 인간세계에 다가서는 거예요. 그렇게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이라는 선을 만들기 전에 구약성경이 있었고 우리는 지금 구약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끝날 무렵의 요엘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서를 보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만든 선(line)은 뭐냐? 이스라엘 그 자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왜 그렇게 하나님이 친히 만든 선(line)이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조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 누구냐? 아브라함이에요.

로마서 4장 17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데리시고 어떤 선(line)을 만드느냐? 이렇게 선(line)을 만듭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기를, 나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면 없는 자를 있게 하신다.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line) 이 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세계에 없는 거예요.

그 인간세계에서는 죽은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인간세계에서는 아무리 뭐든지 모든 선(line)을 넘는다 할지라도 해내지 못하는 거예요. 그것은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 그리고 죽은 것을 살게 하는 것 인간세계에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성도가 되면 내가 하지 못하는데 주목을 하고 거기다가 하루하루 관심을 두고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교회 바깥이나 교회 안이나 뭐 성직자라는 인간들이나 보게 되면 전부 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것, 있는 데서 있는 것, 그리고 산 데서 살아 있기에 해내는 것, 그것만 굉장히 거기에 몰입하고 그것 가지고 평생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나온 거예요. 아브라함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그 언약이 집단화된 것, 언약이 덩치가 된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처음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모든 장자를 다 죽여버렸습니다. 장자가 죽은 거예요. 장자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나라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나라는 없었어요.


그런데 그 장자를 죽임으로써 없는 데서 생긴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이 생기면서 거기다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발라라, 해서 죽어 마땅한데 내가 너를 살게 한다, 그렇게 해서 유월절의 취지로서 인간이 못하는, 하나님 나라만 할 수 있는 그런 선(line)으로서,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를 가름하는 선(line)으로서 이스라엘을 이 땅에 출현시킨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한다는 것은 바로 유월절 취지가 계속 살아 있다는 조건 하에, 그런 요건이 갖춰질 때 계속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 요엘 3장을 보게 되면 1절에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여기 돌아오게 한다는 거예요.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은 뭔가 하나님의 취지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약속의 땅에서 추방할 때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있음을 도로 없음으로 바꾸는 거예요. 있음을 도로 없음으로 바꾸고, 살았다는 자를 도로 죽은 자로 바꾸는 겁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이라는 그 하나님이 설정한 그 선(line)의 취지가 부각이 되거든요. 아까 이야기 했지만 신약의 선(line)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 선(line)이 되는 겁니다. 선(line)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이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굉장히 오해했지요. 천국 간다고. 선(line)을 넘어설 수 없는데 무슨 천국을 갑니까?

선(line)을 안 넘고 저희들끼리 갇힌 세계 안에서 자기 맘대로 천국 만들고, 지옥 만들고, 교회 만들고 그러고 있는 거예요. 종교 만들고. 주님은 불러 주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부름 받았다. 참 가관이지요. 그러면서도 관심은 뭐냐 하면, 자기 가진 것에 관심 있고요. 말씀에 관심도 없어요. 말씀에 관심도 없으면서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우기는 그것은 뭐 배짱도 아니고 그것은 객기도 아니고, 뭐 술 드셨어요? 뭐 그런 게 다 있어요? 말씀에 관심도 없으면서 자기는 신자래요.

믿는다는 거예요. 뭘 믿어요? 선(line)을 보여줘야지 선(line)을. 나는 내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었다는 그 선(line)을 보여주고 그다음에 나는 이제 그 선(line)의 세계만 주목하고 살아간다 그 모습을 보여줘야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선(line)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신을 다시 없음으로 돌리고 죽은 자로 보내버립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취지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은 구약 때도 그런 취지가 계속 살아 있었지요. 사무엘상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인데요. 사무엘상 4장 2절입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왔거든요.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명 가량이라” 4천 명이나 죽었어요. 이스라엘이 패배한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 하나님의 선(line)의 작용을 제대로 해야 될 나라가 하나님의 선(line)이 아닌 이방 민족, 하나님의 구원이 없는 이방 민족한테 져서 4천 명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자기에게 아브라함의 요소, 언약요소가 빠졌음을 알아야 될 텐데 또 있음을 가지고 거론하는 것이 뭐냐? 우리에게는 언약궤가 있다, ‘있음’이거든요. 우리에게는 언약궤가 있다, 하고 언약궤를 앞장세운 겁니다.

없음의 세계가 있음의 세계를 이기는데 이게 아브라함인데 그게 아니고 우리한테는 언약궤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 언약궤가 있다, 하는 그 언약궤 빼앗겨 버렸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5장에 보면 블레셋 나라가 언약궤를 포로 잡아갔습니다. ‘야, 이건 전리품이다’ 해서 가져갔는데 그들이 가져갔던 그 전리품 언약궤가 혼자서 블레셋의 우상마저 작살 내고요, 블레셋의 기고만장한 그 자부심을 완전히 돌아다니면서 다 부숴버렸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언약궤가 없음, 그 상태가 가장 이스라엘다워요. 언약궤 있을 때가 이스라엘이 아니고. 언약궤가 없는 상태,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는데 이스라엘의 적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친히 그 적을 다 박살 내줬습니다.

이 모습을 같이 연계해서 보게 되면 여기서 이스라엘이 뭔가가 탁 등장하지요. 사무엘상 뿐만 아니고 사사기에도 나와요. 사사기 6장 25, 26절에 보면 거기에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이런 지시를 합니다.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년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찌니라”

우상을 무슨 재료로 쓰느냐? 아세라 나무, 나무를 가지고 그들이 섬기는 아세라 우상을 만들었거든요. 그 우상 만든 아세라 나무를 쏘시개로 해서 번제로 바치라고 기드온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여기 천사가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면 천사는 인간사는 세계에 천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음이에요. 없음인데 없음이 뭐라고 지시하느냐 하면, 현재 사람에게 신이 있다고 표징 되는 그 바알 신을 없애버려라. 이렇게 지시한 거예요.

그러면 바알 신은 이스라엘에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이기는 것은 있음이 아니고 없음에서 있음이라는 그 모든 것들의 아무것도 아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실상은 아무것도 아닌 체 있음, 그것을 바로 없는 존재 천사가 등장하면서 기드온에게 지시한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원래 이스라엘의 취지가 그러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있는 것들의 힘을 모으는 것이 아니고 없는 쪽에서 이스라엘을 통제하고 지시하고 명령하는 식으로 이스라엘은 존재해 왔던 겁니다. 그런데 현재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아닌 우상을 좋아해서 그걸 섬기다 보니까 이스라엘 한복판에 뭐가 있느냐? 바알 신상이 세워져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을 인간이 건널 수 없는 선(line)으로 삼아야 되는데, 삼고자 해서 이스라엘을 만들어놨는데 이스라엘 한복판에 우상이 있으니까 천사를 보내서 그걸 없애버려라, 없애는 방법은 뭐냐? 없음을 부각하면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한 내용을 보여주면서 없애버려라.

기드온은 벌벌 떨면서 공포에 휩싸여서 그것도 낮에 해야 되는데 밤에 몰래 아무도 안 볼 때, CCTV 안 찍힐 때 그때 가서 아세라 상 찍고 완전히 파괴 시켜 버렸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게 한 그것,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만이 우상이 아닌 참된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처음 말한 것은 유월절 사건이고, 그다음은 언약궤 사건, 방금 말한 기드온 사건을 결합을 해보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느냐 하면, 구원이란 것은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벗어나서 내가 없는 곳에 내가 존재하게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살고 있거든요.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은 자기가 있음이 되었어요. 노예든 어떻든 간에 나는 애굽나라의 노예로 살았어도 히브리인들이 있음이잖아요.

그런데 유월절을 통과하면서 히브리인들은 어린양 앞에서 그들은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없는 존재가 되면서 그들이 가야 될 곳은 현재 살고 있는 애굽땅이 아니고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없는 나라, 약속의 땅으로 그들은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벗어나서 내가 없는 곳에 내가 존재하는 것.

이게 뭐냐? 이게 바로 선(line)을 넘는, 선(line)을 넘게 하시는 주님의 친히 주시는 창조의 능력입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그 능력만이 인간의 힘으로 넘어갈 수 없는 그 천국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방금 제가 이스라엘의 그 본질이 이렇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면 그다음에 나오는 결론은 간단해요. 이스라엘에 있어서의 겸손이 뭐냐? 겸손은 내가 없다고, 항상 내가 죽었고 없다고 여기는 것이 겸손이에요. 왜냐? 없어야 되는데 있고, 죽어야 되는데 살았으니까. 이게 겸손이거든요. 겸손은 뭐냐? 바닥이에요 바닥. 늘 바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바닥에서 벗어나는 것은 뭐냐? 이게 바로 교만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있게 되면 무슨 시절을 잊어버리냐 하면, 내가 없던 시절을 잊어버려요. 내가 죽었던 시절을 잊어버립니다. ‘나는 당연히 있어야 되고 당연히 나니까 나는 살아야 마땅하지. 나는 구원 받아야 마땅하지’ 이렇게 건방을 떤게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요엘 3장 2절에 보면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만국을 재판하고 심판하는 장소를 주님께서 지정을 해주셨는데요. 그 지정된 장소가 바로 여호사밧 골짜기입니다. 역대하 20장 26절에 보게 되면 “제 사일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거기 골짜기가 ‘브라가 골짜기’로 되어 있는데요. 찬송의 골짜기로 되어 있는데 그 골짜기에서 하나님께 찬송한 이유가, 모압 그리고 암몬, 에돔, 이 세 나라가 연합해서 여호사밧 시대 때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공격해 왔을 때에 여호사밧 왕이, 그래서 여호사밧 골짜기에요, 여호사밧 왕이 이 전쟁에 대해서 이길 수 있는 재료 거리가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이스라엘에 어떤 적들이 와도 이길 수 있는 무기가 많다든지 숫자가 많다든지 병거가 많다든지 그런 타이밍에 하나님께서 모압과 암몬과 에돔 연합군을 보낸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취지에 맞도록 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없는데 적들이 오게 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여호사밧 왕은 너무나 두렵고 무서웠어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자기 몸뚱이밖에 없는데 이래 가지고 전쟁 하나 마나 질 거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만 보고 기도를 한 거예요. 하나님, 도와달라고. 도와달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레위사람 야하시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합니다.

14절에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서 (사사지요)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17절에 보면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이것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와 똑같은 말씀이에요. 사무엘상 17장 47절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이 전쟁은 내게 속한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전쟁이다. 자, 하나님이 친히 전쟁하시는 전쟁은 뭐였던가요?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하나님은 선악과를 심어서 선(line)을 정했어요. 이것까지는 인간이 넘어오면 안 되는 선(line)을 선악과를 통해서 정했습니다. 그다음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선(line)을 만들었지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세계에서는 못해내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line)으로서 뭘 보여주느냐?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그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그 취지, 그 취지를 다시 한번 반복하기 위해서 그들이 아무 대비도 없는데 큰 전쟁을 일으켜서 난감하게 만들어 버렸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이 전쟁은 너희들이 싸울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이게 십자가거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남자만 60만 대군을 홍해에 다 집어넣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발했어요. 우리는 이제 다 죽었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는 것은 뭐냐? 일단 극한의 두려움에 몰아세웁니다. 극한의 두려움에 몰아 세워놓고 두려워 말라는 거예요.

두렵다는 말은, 내가 평소에 나 있음에 근거해서 나는 평생을 살아간다. 그런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취지로 보기에 그것이 교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거지요. 그래놓고, 하나님께서는 싸울 것이 없다고 해놓고 그다음에 그들이 뭘 했는가? 노래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역대하 20장 21절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성가대원들을 예복을 입혀서 전쟁터에 보낸 거예요. 성가대원들 아시지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베이스. 몇 부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성가 대원을 보내서 찬송을 한 겁니다. 찬송을한 이유는, 우리가 할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전쟁은 끝났어요.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부를 찬송을 미리 부른 겁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의 특징이 이거예요. 성령이 임한 사람의 특징은요, 게임 끝났어요. 게임 끝났습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은 모든 여호와의 전쟁이 끝났을 때, 악마와의 전쟁이 끝났을 때, 승리했을 때 주어지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미 너는 승자 쪽에 속한다. 그러니까 주님이 설정한 그 선(line)을 천국과 지옥의 선(line)을 넘어섰다는 뜻이에요.

성가대가 찬송을 불렀더니만 역대상 20장 24절에 “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다 엎드러졌어요. 왜 엎드러졌는가? 시체 되었으니가 엎드러졌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선(line)을 넘지 못한 사람은 살아서 어떤 활동을 하고 살아서 재벌, 부자가 되든 뭐 화천인지 뭔지 50억을 받아먹었든 전부 다 이미 시체들이에요.

지금 시체 둘이 대선에서 경쟁하고 있잖아요. 거기에 킹 메이커가 붙어서 시체선거대책위원장하고 있고요. 지금 보건소나 병원마다 시체들이 백신 맞고 있다고요. 오미크론 백신 맞고 있어요. 죽은 것도 모르고. 죽은 자가 지금 살려고 하는 거예요. 왜 살아 있으니까.

인간들의 특징은, 태어나면서 이미 죄인이지요. 죄가 있는 곳에 벌이 있거든요. 인생은 뭐냐? 이유도 모르는 채 벌 받고 있는 기간이 인생이에요. 이유도 모르는 채. 좀 연세 되신 분 속으로 답변해 보시지요. 산다는 것이 편하던가요? 안 그러면 벌이던가요 (두 손 위로 쳐들고는) 벌이지요. ‘내가 뭐 잘못되었는데?’ 뭐가 잘못되어서 내가 이런 고생을 하느냐는 말이지요.

죽어가면서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인간들은. 선(line)을 못 넘었기 때문에 악착같이 그들은 살아야 돼요. 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고생할 이유도 없고 나는 불행할 필요도 없는 그런 인간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선(line)을 넘지 못한 우상이에요 그게 본인이 우상이에요.

그래서 어떤 하나의 벌이 주어지고 어떤 어려운 일이 오게 되면 죽을 힘을 다하여 참아보려고 합니다. 죽을 힘을 다하여. 참아야 하느니라. 은장도 가지고 쿡쿡 찌르면서 참아야 하느니라, 성질 죽여야 하느니라. ‘아, 너무 힘들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일구어낸 내 삶이 위태롭다고 뭔가 불안하고, 공포스럽고, 아침에 눈 떠서 잠들 때까지, 아니 꿈속까지 24시간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힘들다. 그래도 내가 참아야지 어떻게 하느냐. 내가 참아야지나는 정당한데 내가 망하는 것이 두렵다.’

24시간 중에 이 마음 빼놓고 다른 마음 있으면 나와 보라 해요. 없어요. 이 마음밖에 없어요. 인간은 본인이 알 수 없는 일에 시달립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line)으로 했기 때문에 다른 이방 민족과 차이 나는 점을 뚜렷하게 부각하는 일에 하나님의 일은 다 몰아세우십니다. 이스라엘은 이래서 너희 이방 민족과 다르다는 겁니다.

논리학에 보면 ‘S(Subject)=P(Predicate)’라는 것이 있어요. 주부(主部)=술부(述部), 또는 주어+술부, 이렇게 문장이 형성되거든요. 저것은 컵이다. ‘저것’ 주어, ‘컵이다’ 술어. ‘뭐는 무엇이다’ 이렇게 되어야 이것이 뜻이 통하는 문장이 된다고, 인간의 철학이라든지 인간의 학문이라든지 과학이나 신학에서는 그렇게 이야기들 해요. 신학도 인간 학문이니까요.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뭘 많이 알아야 더 원활하게 대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꾸 공부를 하고 갈 때까지 자꾸 공부를 하는 이유가, 두렵기 때문에 그래요. 알 수 없는 공격에 두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알다시피 신약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잃어버린 양을 하나 찾는 거예요. 백 마리 양이 갔는데 세어보니까 한 마리가 없어요. 그중에 99마리 양은 별 의미 없어요. 목자한테 중요한 것은 잃어버렸다는 사실,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거예요. 99마리 양이 있으니 즐겁다. 이것은 목자의 심정이 아니라는 겁니다. 잃어버린 양이 있다는 거예요.

잃어버린 양을 되찾아오는 그 기쁨이 목자가 양 찾아오는 기쁨이라는 겁니다. 99마리는 왜 기쁨을 안 주느냐? 잃어버린 적이 없기 때문에. 이건 뭘 뜻하느냐?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자꾸 안 잃어버리려고 해요. 잃어버렸다가 얻어보세요. 얼마나 기쁘다고요. 보이스피싱 전화 잘못 눌러서 당해보세요. 최종 동의한다는 그것은 안 눌러서 돈은 안 나가갔습니다, 할 때 갑자기 얼마나 기쁜지요.

지갑을 잃어보세요. 잃었다가 버스 차고에 가서 다시 찾아보세요. 얼마나 기쁜지. 기쁨, 찬송, 감사, 이걸 이스라엘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한다는 것은 이방 민족에는 그러한 요소가 없다는 거예요. 유월절 요소가 없으니까 이방 민족은 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 요소가 있어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그 요소가 살아 있을 때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여인이 동전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그걸 찾지를 못하고 하루 종일 찾다가 동전 하나 되찾고 난 뒤에 너무 기뻐서 친구들 불러서 잔치 벌여서 되찾은 동전 비용보다 15만 배 더 나갔어요. 10원짜리 되찾았는데 잔치비용은 150만 원 들어가는 잔치를 해도 아깝지 않아요. 왜? 잃어버렸다가 얻었다는 기쁨은 돈으로 형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또 나오는 마지막 세 번째 경우는 뭐냐 하면, 아들을 잃어버렸어요. 탕자, 탕자가 유산을 미리 가져가서 다 탕진하고 난 뒤에 아버지가 가출하지 않은 자기 큰아들은 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요. 그저 매일같이 동구 밖에 나가서 쳐다보면서 내 아들 언제 돌아오나, 내 아들 돌아오기만 바라다가 아들 돌아온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 좋아서 큰 아들한테 한 번도 해주지 않았던 순수한 한우고기, 같이 있어도 한 번도 해줘 본 적 없는 금가락지 그리고 새로운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베풀었어요.

이게 바로 아브라함언약입니다. 죽었다가 살리고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이 뜻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을 포로 잡혀가게 한 거예요. 포로 잡혀 갔다는 그 말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관리를 누가 하느냐? 하나님 본인이 해야 돼요. 그래서 세상 민족에서는 ‘S=P’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다’ 이것은 아니에요. 이것은 세상적이에요.

‘이스라엘은 이방인 속을 거쳐서 나온 이스라엘이다’ 이게 옳은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예수님’ 이것은 땡, 틀린 거예요. ‘예수님은 죄인 속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신 예수님이 예수님’이에요.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죄인 속에 함께 계시다가 빠져나가신 그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야 잃어버렸다 얻었고 죽은 데서 살리는 그런 요소가 예수님에게만 있는 게 아니고 성도한테 있을 때 그게 진짜 교회입니다. 교회의 기쁨은 주께서 나를 다룰 때 아브라함언약의 원칙대로 다룬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이게 성도고 교회입니다.

나한테 돈 주신다. 그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이 돈 주시고 건강 주시고……, 그게 아니고 잃어버렸다 다시 주시는 방식으로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고 그 기쁨을 보고 같이 기뻐하는 자가 성도고 교회입니다.

이스라엘 다루는데 이처럼 이방 민족을 일반성이라 한다면 이스라엘은 특수성이에요. 이방 민족은 일반성이라고요. 있는 것을 그냥 있게 하고 살았던 것을 계속 살게 만드는 것. 그런데 여기에 보게 되면 그 주변에 있는 이방 민족에서 하나님만이 다루고 건드려야 될 이스라엘을 누가 건드리느냐?

오늘 본문 요엘서 3장 3절에 보면 “또 제비 뽑아 내 백성을 취하고 동남으로 기생을 바꾸며 동녀로 술을 바꾸어 마셨음이니라” 어린 남자로 기생을 삼고 어린 딸로서 술을 바꾸어 마시고. 누가 이렇게 했느냐?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이 건들지 말아야 될 이스라엘을, 하나님만 건드려야 될 이스라엘을 그래야 살아나는 것이 이스라엘 특수성인데 그들이 건방지게 건드린 거예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건드렸다는 말은 내 백성 되기 위해서 건드렸거든요. 하나님 백성 되지도 못할 자들이 건드려버리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백성 만들기 작업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해서 하나님께서는 저주해버리는 겁니다. 지옥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것을 너희들이 건드렸다. 건들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렸다. 이게 바로 저주입니다.

이것은 바로 창세기 2장 3장에서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따먹었다. 그래서 그게 저주가 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태어난 대로 살아간다면, 인간이 태어나면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관리 안 하면 누가 관리하겠어요? 인간의 고질병이 뭐냐 하면 어쨌든간에 내 것을 내가 챙기기 때문에 내가 잃어버린다는 것을 망한 것으로 여기고 내가 죽는다는 것을 실패로 여기는 거예요. 인간으로서는.

그러니까 평생의 고질병, 악마가 집어넣은 고질병이 뭐냐? 내 안에서 내가 안 나가려고 하는 겁니다. 안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못 나가지요. 못 나가니까 자꾸 내 것만 챙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얼마나 가졌느냐, 지금 얼마나 갖고 있느냐, 그것만 계속해서 카운트 해서 관리하고 그것 챙기는데 스물네 시간을 그걸로 소비해버리지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우상이다 그 말이지요.

이스라엘을 건드렸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건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이스라엘 되게 하기 위해서 건드렸는데 이스라엘 될 수 없는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을 건드렸다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내보낼 때 적용했던 그 율법의 저주의 원칙대로 가혹하게 그들을 쳐버립니다. 너희들이 교만했다는 것, 너희들이 건방졌다는 이유로 쳐버립니다. 그들을 멸망시켜 버리지요.

그 이야기가 바로 보복이라는 이름으로 4, 5절에 나옵니다. 특히 5절에 “곧 너희가 내 은과 금을 취하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궁으로 가져갔으며” 이것은 역대하 21장 16, 1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 그 무리가 올라와서 유다를 침노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으므로 말째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요엘 3장 3절에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라고 나오거든요. 이 블레셋 민족에 대해서 저주하잖아요. 그때 블레셋 사람들이 이런 짓을 했어요. 예루살렘에 찾아와서 제사에 쓰이는 것들과 은과 금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 다른 이방 민족, 바벨론과 그리고 알렉산더 왕, 헬라민족을 통해서 그들을 먼 데까지 다 포로로 잡아갔어요.

요엘 3장 8절에 보면 “너희 자녀를 유다 자손의 손에 팔리니 그들은 다시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리라” 했는데 스바는 요새 예멘이라는 곳입니다. 그들이 거기에 팔려가도록 조치를 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이방 민족의 운명, 이스라엘 말고 이방 민족의 운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거두어드리면서 나오는 어떤 부산물 같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면서 나머지는 어떻게 한다? 쓰레기 취급해서 버린다. 그 버려지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것 지키는 데만 관심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바로 선지자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이방 민족인데 우리도 벌 받습니까, 이렇게 하는데 이것은 구약이고요.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에 의해서 선(line)을 넘은 사람은 그 사람만이 새로운 이스라엘이고 심지어 현재 이스라엘 민족도 이방 민족이에요. 하나님의 복음의 성령이 없는 사람은 무조건 전부 다 이방 민족이에요.

그들의 특징은 뭐냐? 말씀에 관심 없습니다. 나는 이 정도다. 그것만 지키면 뭐 땡이지요. 그게 끝인 거예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죽은 데서 살리고 없는 데서 있게 하는 이 하나님의 일이 지금도 현재 진행중입니다. 그 증거를 어디서 찾느냐? 그냥 뭐 바깥에서 일상생활 하는데서 찾아보세요. 360도 휙 한 바퀴 돌면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다 그런 사람들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것 없어지면 망했다고 여기고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발악발악 하나님께 대드는 그 본성들, 우리 속에도 그 본성이 있음을 자백하고 고백합니다. 내 것밖에 모르는 저희로 하여금 선(line) 넘어 있는 천국에 주님의 것으로 된 것에 이제부터 관심 두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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