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예수님이나 양 공히 무기가 있어요. 무기는 이겁니다. 없음이에요. 공백. 아무 것도 없다는 의식이 무기가 되는 겁니다. 이걸 영어로 하면 nothing 난 아무 것도 아니다가 유일한 무기에요. 이걸 사도 바울 편지에 보면 나는 죄인이다. 이게 무기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알아야 돼요. 우리 자신은 어떻게 구성돼있냐 하면 이걸로 구성돼있습니다. 날 무시하지 말라가 토대가 되어서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승부욕이에요. 오직 승부욕 하나 외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순해빠진 인간도 건드리면 와락 달려들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양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어떤 특징이냐 하면 순종이란 게 있어요. 이걸 토속적으로 하면 배알도 없어요. 자존심도 없고 빙신인가, 바보야.
독자적으로 나는 이것 하나 유지하면서 이 맛에 살아간다는 게 없어요. 누가? 양은. 그래서 양은 없어요. 이 세상에 양이 없다니까요. 양이 없으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뭐로 하냐 하면 계속해서 우리가 돌아서면 인간존재, 날 무시하지 말라, 승부욕 이것을 성령이 개입해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사건이 개입하면 일시적으로 뭐가 되느냐 하면 양이 돼버려요. 순한 양이 된다고요.
사랑이란 자세히 보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가에 나오지요. 아가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조목조목 다 따져서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름답고 흐흠 냄새도 맡아요. 무슨 이런 향기가 나느냐, 도대체 화장품 뭘 발랐어요? 조목조목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그렇게 살펴보는 거예요. 자기 거니까.그런데 거기에 술람미 여인도 솔로몬과 똑같이 하는 거예요. 개도 아닌데 맡아가면서 이렇게 향기로울 수가. 그러니까 아가서에 나와서 서로가 탐색의 대상이 되면서 그러한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의 원천을 뭐로 보느냐 하면 사랑이라 보고요. 그 사랑은 뭐보다 크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진노, 죽음보다 세다고 나와 있어요. 아가서에요.그러니까 이거는 둘이 서로 사랑하는 순간 죽음의 공포가 날아가 버린 겁니다. 죽음의 공포가 날아가 버렸다는 말은 그 원천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은 뭐보다 세다 했습니까? 죽음보다 세지요. 마치 질투와 같다 했는데 죽음보다 세다 이 말이죠. 죽음보다 세다면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은 무엇과 맞닥뜨리고 무엇과 만나야 돼요? 늘 죽음과 만나야 돼요.죽음의 세계가 바로 오늘날 인간들이 말하는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다녀가셨습니다. 그러면 양도 이 땅은 그냥 다녀가는 처지에 있어요. 왔다가 다녀가는 거예요. 오뎅 뜨거운 물에 빼서 먹는 거예요. 주님께서 자기 양식이니까 집어넣었다가.
안 집어넣으면 맛이 없어요. 푹 익어야 돼요. 주님이 흘리신 그 피 속에 우리가 푹 익어줘야 돼요. 피가 스펀지처럼 우리의 속속들이 스며들어 배겨야 돼요. 이게 무기에요. 전신갑주라니까.
마귀로부터의 다툼과 충돌은 늘 주님 앞에서 양 되는 우리 안에서 주님과 세상과의 충돌현상이 매일같이 우리 안에서 벌어져야 돼요. 매일같이. 그래서 어느 강의에서 그랬지요. 매일우유라고요. 아침 되면 늘 현관 앞에 배달되는 우유 있잖아요.매일같이 주님께서 현관 앞에 내 마음 앞에다 예수님의 유월절로 인한 피를 배달시키는 겁니다. 오늘도 세상에 나갈 때 이 마음 가지고 가라고.
성경에 이런 아주 결정적 단어가 나오는데 우리는 그 단어를 잘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무슨 단어냐 하면 “친히” ‘친히’란 말로 인하여 양은 철저하게 수동적 존재입니다. 능동이 없어요. 친히는 누구 담당이냐 하면 주님은 주님 담당이에요. 여호수아에 나오는데 한 번 볼까요. 여호수아 24장 17절 누가 읽어보세요.
주 우리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을 이집트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큰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우리가 이리로 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고, 우리가 여러 민족들 사이를 뚫고 지나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표준새번역)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개역개정)
It was the LORD our God himself who brought us and our fathers up out of Egypt, from that land of slavery, and performed those great signs before our eyes. He protected us on our entire journey and among all the nations through which we traveled.(NIV)
창세기 49장 17절 보게 되면,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는 거죠. 무는데 의도가 있어요. 물어서 땅과 멀어진 존재를 땅과 밀접한 존재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쉬운 예를 진화론 과학이죠. 영적인 것을 영적 같은 소리하고 있네. 모든 것을 과학으로 다 풀어버리는 거예요.땅에 딱 밀착된 스티커 또는 바퀴벌레. 이걸 어느 강의에서 인간은 표면적 존재다. 만날 하는 게 기어다는 것밖에 안 해요.
양의 배후, 뱀의 배후는 이게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이것이 바로 영토적으로 해석해야 되는 거예요.
개인의 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고 네 자리, 원래 있던 자리와 자리의 지형적 충돌이에요. 그래서 지진이 일어나는 거예요. 대륙판과 해양판이 지구 내부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맨틀 위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땅이 갈라지잖아요. 그래서 양은 충돌에서 나오는 거예요. 목자도 충돌에서 나오는 거예요. 충돌이 없으면 그거는 너무 목가적이에요.
성경에서 최종적인 것은 죽음입니다. 나머지 곁가지 소용없어요. 날 위해서 죽을 수 있는지 묻는 게 아니고요. 이미 너는 나를 위해서 죽은 존재로 보는 거예요.우리 쪽에서 새로 결심할 게 남아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 것도 결심하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 사건이 계속 주어질 겁니다.
그 사건이 나를 자극시켜서 분명히 나는 양이고 주님은 목자라고 알았는데 그 사건 오는 순간 그 다음에 뭐가 되느냐? 크게 쓰겠습니다.“내가 나에게 상처를 주네.” 이게 인간으로 태어난 해답입니다. 내가 나에게 상처를 줘요. “이 쪼다야 한 평생 동안 뭐했냐. 남들은 인간처럼 사는데 네가 인간이야 짐승이야.” 내가 나를 핍박을 해요. 꼴 보기 싫어해요. 내 인생이 원망스러워요. 자기 인생 원망해놓고 혹시 주님께서 나무랄까 싶어서 주님한테 이야기는 아니고요, 내 인생.
이러면서 나오는 왜곡되고 조작된 고백이 뭐냐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
제발 이런 소리하지 말라고 저는 제발 이런 소리하지 마세요. 이것 한다고 점수 더 받는 것 아니거든요. 이상하게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게 꼭 주님에게 압력 넣는 것 같아. 나 죄인인 줄 아니까 뒤에는 모기소리만큼, “제발 이것만은 이뤄주옵소서.” 내가 알아서 길 테니까 이것만 이뤄달라는 뭐 있어, 뭐 있다고. 이것 눈치 채야 돼요.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것 같아.내가 나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육신의 몸을 우리는 범죄 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죽을 때까지 동거해야 됩니다. 나밖에 모르는 이 이기심과 동거해야 돼요. 그래서 남 탓할 수도 없어요. “인간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다.” 인생이 이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