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심판과 금식

아빠와 함께 2021. 9. 2. 10:40

심판과 금식

2021년 9월 1일         본문 말씀: 요나 3:5-10

(3:5)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3:6)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3:7)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3: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3:9)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3: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가 전하는 심판의 말씀이 인간들의 눈에 마치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비록 재앙을 떨어지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심판 말씀이 무효화된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 세상 안에 정착되었습니다. 즉 인간이 있는 이상 죄가 없을 수가 없으며 그 생긴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음을 분명히 해두신 바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예상하고 있는 심판의 광경이 아니라 인간들은 실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니느웨성 사람들의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시는 ‘죄’가 무엇인지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이방인들이 스스로 자기들을 죄에서 돌이키기 위해 동기가 되는 심판 개념의 한계와 참으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심판개념의 차이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문제는 그동안 인간들이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모든 개념을 정립해 왔습니다. 즉 요나의 말에 대해서 니느웨성 사람들이 사람의 말로 듣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신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대인들의 삶으로 볼 때에 신기한 점은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니느웨성 사람들도 요즈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자들입니다. 살아온 지난 현실과 비교해서 영속성이 갖추어지지 아니하면 언제든지 농담으로 내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자기 동네에 어떤 정신병자가 와서 헛소리로 심판을 외칠 수도 있고 사회불만자가 다같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자신의 본심으로 나쁜 소식을 유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의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니느웨성 사람들 같운데 어느 하나도 요나의 말은 빈 말이나 허투로하는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현실 그 자체가 여겼습니다. 이는 곧 그들의 신앙이 대단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말씀 자체가 헛말로 날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친히 관여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쉽게 말해서, 마치 갈라진 홍해 바다 한가운데로 이스라엘이 들어서는 현상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 가운데 들어서니 물은 양쪽에 벽이 되어 도열했다고 했습니다.(출 14:22) 바다는 중앙을 이스라엘에게 내어나고 물은 주변으로 물러나 있는 겁니다. 이처럼 니느웨성 사람에게 있어 요나의 말씀은 중앙으로 들어오게 되면 니느웨성 사람들은 말씀이 말씀대로 현실이 되도록 길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즉 종말, 최후의 순간을 맞이 했을 때의 인간의 태도는 곧 금식이라는 겁니다. 떡도 먹지않고 물도 마시지 않습니다. 이는 곧 자신안에 최후의 순간이 박혀게 되어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이러니 요나의 말씀대로 종말의 말씀은 니느웨성에서 성취가 된 겁니다. 동시에 그 성취를 넘어서는 성취로서 재앙이 취소되었습니다.

인간들의 죄는 선악과일을 먹은 후, 개별적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만 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타인과 비교해서 주체할 수 없는 승부욕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다니, 이는 내가 용납 못한다”라는 욕망이 내부적으로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현실이란 자신의 욕망이 자아내는 망상을 내뿜는 현상으로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이런 욕망의 일환으로서 인간들은 양심껏 최선을 다하여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의로움이 밀리지 않기를 늘 검토하고 점검하게 되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죄라는 것도 이런 욕망에서 규정합니다. 그러나 죄란 그 현장 계시는 주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13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중앙을 차지하기 위해 들어오면 곧 그것이 영생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요 12:49-50)

우리는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된 자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의 한계는 그저 자기네들 계속 지상에서 사는가 죽는가 거기에 그칩니다. 반면에 신약에 등장하는 성도들은 죄를 안 짓는 자가 아니라 ‘죄에 죽은 자’입니다. 인간들은 흔히 죄의 유혹을 이겨 다시는 유혹에 안 빠지고 싶은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유혹에 빠지지 않겠다는 것이 마지막 유혹입니다. 신약의 성도에게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 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므로서 구원되는 겁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신약의 성도는 자체적으로 주의 말씀과 명령과 지시가 우세해서 성도는 거부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구조로 살아가게 됩니다. “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12)

따라서 성도가 사람과 상대해서 웃고 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울고 웃는 자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울음은 자기 연민에서 나오고, 자기에게 실망해서 나오는 울음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이 너무 놀라워서 감격해서 우는 울음입니다. 요한복음 8:7에 나오는 말씀, 즉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에 우리는 너무 주님께 감사해서 울컥 하면서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를 정죄할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감격의 울음을 마음껏 울 수 있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신약의 성도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압니다.

먼저 주님께 드려서 보답받는 식으로 구원되는 게 아님을 말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5) 회개하고 금식한다고 해서 저주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죄를 안 세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인된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요나 3장 5-10절(심판과 금식)2109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 3장 5-10절입니다.

요나 3:5-10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니느웨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알고 금식을 했더니만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하고자 하는 뜻을 취소하시고 아무런 멸망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재앙을 내리지 아니했다, 그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일관성이 이렇게 없다면 그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믿을 만한 분이냐?’라고 회의 또는 걱정 또는 불안감이 생길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취소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이 현실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니느웨 사람들이 물도 마시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고 ‘그냥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라고 사람들이 돌변했거든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멸망의 조치에 그들은 합당한 호응을 해준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를 인정함으로써 니느웨 성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가 그대로 정당하게 성취된 겁니다. 실현된 겁니다.

우리가 ‘그들이 실제로 망했다.’ 그것만 자꾸 쳐다볼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려는가?’로 좁은 우리 인간의 식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멸망해서 심판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 심판이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고 좁은 생각이고요.

하나님께서 심판하겠다는 그 말씀 자체가 이제 니느웨 성에 실현되었다는 말은 마치 구약 출애굽 때 홍해가 갈라진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지나가는 그 말씀의 길이 니느웨 사람들을 통해서 홍해처럼 확연하게 중간 자리를 니느웨 사람들이 내어준 거예요.

니느웨 사람들이 그 요나의 말을 듣고 요나에 의해 전달된 주의 말씀을 자신의 중심으로 내놓고 자신들은 주변자리로, 곁가지로 물러나 있는 겁니다.

출애굽기 14장 21절에 나오는 홍해 사실을 제가 한번 읽어 드리면,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여기서는 바닷물이 갈라졌는데 오늘 요나의 니느웨에서는 그들의 마음 자체가 갈라지면서 그들의 마음 안에 심판한다는 주의 말씀이 그 가운데 통과하는 현장으로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 니느웨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상당히 놀라야 되는 것은 주의 멸망한다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실제로 현실로 받아들였다는 사실, 이것이 놀라운 거예요.

40일 지나면 망한다는 이 이야기가 헛소리이고 그냥 툭 던지는 농담일 수도 있고 니느웨 사람 너희들, 공포에 한번 잠겨봐라, 하는 식으로 누가 가짜 뉴스를 유포할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아직 언론법 제정 안 되었으니까 언제든지 가짜 뉴스가 나올 수 있다 이 말이죠. 가짜뉴스일 수도 있잖아요. 그걸 곧이곧대로 듣는다는 이런 현상이 오늘날 현대를 사는 우리한테는 참으로 기이하고 기이한 일입니다.

첫 번째는 그들이 심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는 그 자체가 이상한 일이고요. 두 번째는 그 심판에 대해서 누구 하나 이의 거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예’라고 할 때 혼자 ‘아니오’ 할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남이 뭐라고 한다 해도 사회성을 발휘해서 거들 수 있고 도와주는 척은 할 수 있지만 정작 이것은 자기 문제가 아닌 거예요. 새마을운동 한다고 ‘전부다 빗자루 들고 와서 청소합시다.’ 하면 청소할 수도 있는 문제에요. 청소하면서도 요령부리고 빨리 빠질 생각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정말 기이한 일은 백성들부터 먼저 금식하기 시작해가지고 왕부터 금식해서 그다음에는 왕이 아예 조서를 꾸며 법령으로 대신들부터 모든 백성에게 심지어 아무 죄도 없는 것 같은 양떼나 소떼나 짐승까지 이거는 같이 한통속으로 금식을 하게 되었어요. 짐승까지요.

물론 여기서 쥐새끼 같은 것은 포함이 안 되죠. 인간의 생존에 도움을 주는 가까운 가축들도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될 그 죽음, 멸망에 너도 같이 동참해라. 너도 같이 동참해라. 그런 식으로 그들에게 사료를 주지 않았습니다.

뭐 짐승이 금식한다고 앉아서 부르짖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 일체 사료가 없고 주인이 금식하는 것 때문에 개나 고양이한테 일체 사료가 들어가지 않을 때 개, 고양이는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과 운명을 같이 했기 때문에 같이 금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하면 말씀이 성취될 때 요나도 오해했지만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은 그냥 누구하나 와장창 조지고 저주받고 그것을 성취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한다는 말씀이 성취될 때 동반되는 현상 중 하나가 바로 말씀이 그 인간 속에 내부적으로 실현되고 내부적으로 들어온다는 그것도 하나님 말씀의 심판의 성취성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이 그대로 현실화된 거예요, 현실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내리는 단호한 결론은 이겁니다. 그들이 금식한 것은 하나님의 지시였다. 그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던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총체적으로 성취하겠다는 하나님의 작업 속에 니느웨 사람들이 한 명도 예외 없이 다 같이 집단적인 자책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마음을 주관하셔서 그렇게 해서 니느웨 사람들은 심판한다는 그 말씀에 호응했느니라. 가 성립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심판을 보면서 그들이 ‘울었다’는 것이 없어요. 부르짖은 것은 있는데 그들이 울었다는 것은 없습니다. 이 말은 그 심판에 호응할 때는 그 심판의 현실성이 너무 강렬해서 운다든지 웃는다든지 하는 그런 감정적인 것은 있을 수가 없고 감성 또는 감정을 초월하는 현상을 보이는 겁니다.

주님 앞에 찔찔 우는 것은 지금 주님의 심판이 그 사람 속에 홍해 갈라지고 그 안에 말씀이 들어온 것처럼 말씀이 들어왔다고 볼 수 없어요. 찔찔 짜고 우는 것은요. 아직도 자기 연민이에요. 이렇게 울면 좀 봐줄까 싶어가지고, 자기가 자기한테 불편해가지고, 자기가 자기한테 실망해서 자기가 자기한테 짜증내는 것이 바로 우는 거예요.

‘왜 나는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왜 자꾸 나는 주님의 말을 안 듣는 거야?’ 하고 찔찔 짜고 울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뭔가 쪼개져야 되는데 쪼개지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자기 자신을 자기가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지금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지금 금식을 하고 있는 거예요. 물론 신약에서 이 금식을 회개라 보고 있습니다만. 금식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을 개별화라고 하는데요. 금식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을 개별적인 존재로서 간주하지 않고 말씀 앞에서 평준화시키고 전체를 동일화시켜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금식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주님의 심판의 말이 들어오지 않을 때 심판 안 받기 위해서 어떤 몸짓을 한다든지 나름대로의 대비를 하는 경우에는 양심대로 살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요. 금식하는 것이 아니고 양심대로 살고 최선을 다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그래야 내가 하는 나의 개별적인 행동이 나로 하여금 심판의 실제성에서 나를 구원하고 빼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대목이 나오거든요. 3장 9절에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이왕 망하는 거 혹시나 이렇게 금식해서 ‘우리가 죄 지었습니다’ 하면 멸망을 철회할지 안 할지는 우리가 결정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철회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 누구라도 ‘아니야, 철회 안 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왕이 그런 식으로 희망을 갖는데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오해를 해버리면 그야말로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회개 있잖아요, 반성하고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의 저주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인간들의 시도, 그 시도와 같은 것이 아닌가? 이렇게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금식이라 하는 것은......쉽게 가겠습니다. 그 당시 니느웨 사람들한테는 율법이라는 것이 없어요. 율법이 없기 때문에 주님 입장에서 죄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율법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죄가 성립이 안 돼요.

그럼 그들이 말한 악한 것은 뭐냐? 그들 나름대로 정해놓은 거예요. 8절에서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그들이 기껏 생각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선악체제에서 악한 길과 혹시 또 내가 너무 심하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너무 강하게 상대방을 잔인하게 학대하지는 않았는가. 아마 그것 때문에 우리가 멸망당하지는 않는가, 생각해서 강포(强暴)한 것은 우리가 잘못했다 치고 ‘우리는 죽어 마땅합니다.’ 하면서 재를 뒤집어쓰고 있고 재를 깔고 앉아 있으면 밥도 안 먹고 있으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킬 것이다, 라고 왕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금식하게 한 것은 그들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기정사실화시킨 거예요. 제가 하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올해 장례식 때문에 세브란스 병원에 갔었는데 절차상 시간이 한 30분 내지 4,50분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관에 있다가 안이 답답하니까, 손님도 없고 해서 잠시 밖에, 그 동네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근처를 돌아봤어요, 한 30여분 동안.

거기 이화여대도 있고 해서 돌아봤는데 돌아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냐면 내가 이미 고인이고 잠시 이 세상에 막간으로 구경하러 나온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내가 바로 관 근처에서 왔기 때문에. 관 있는 그곳이 내 고향 같아요. 고향인데 막간에 잠시 시간이 나가지고 이왕 다시 고향으로 관 속에 다시 들어갈 거 잠시 한 30분간 이쪽에 한번 둘러볼까, 해서 둘러볼 때 그 감정이 이미 나는 고인이 된 거예요.

아, 세상 사람들이 결국 죽을 존재들이 자기 죽는 걸 모르고 이런 짓하고 사는구나. 하는 것을 한 30분간 구경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Take me home country road.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관에 왔단 말이죠.

금식을 한다는 것은 자기를 부정한다, 단순히 그것이 아니고 금식을 하나님께서 심판한다는 그 말씀에 딱 합당한 실제적 현실로 간주하는 이유는 음식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않는 거예요. 그 말은 그동안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살았다는 겁니다.

금식함으로써 나는 내 죄를 인정한다는 말은 살고자 했던 그 자체가 바로 죄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그것도 사람들은 그동안 각자 자기 삶을 자기 인생이니까 자기가 책임지고 자기가 살고자 한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금식의 특징이 단 한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거예요. 예외가 없어요. 이것은 동일성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동일성이에요. 누구 하나 ‘아, 나 금식하기 싫은데’ 하고 빠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에요. 주께서 그렇게 주의 말씀의 능력이 이 니느웨 성 자체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죄라는 것은 양심의 죄, 율법의 죄가 아니라 니느웨 성이 보여주는 죄라는 것은 주님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주님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것. 윤리 도덕의 죄가 아니고. 윤리 도덕의 죄를 묻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게 죄에요.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지시를 따랐기 때문에 그들에게 심판은 이미 지나간 거예요. 그 재앙은 지나가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이 금식한 그 자체가 주님의 심판의 말씀이 실재하고 주께서 원하는 지시에 따른 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참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은 자꾸 유혹을 이기려 하잖아요. 그런데 유혹을 이겨서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끝내 유혹에 질 수밖에 없는 이유, 유혹을 못 이기는 이유는 유혹에서 이겨서 죄 안 짓겠다는 이것이 최후의 유혹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물 안 마시고 밥 안 먹으면 돼요. 그런데 기어이 밥 먹고 물 마시고 살아서 죄 안 짓겠다는 겁니다.

아까 홍해 이야기 다시 할게요. 홍해를 건너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짓은 무엇입니까? 회개였습니까? 반성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모세의 지팡이로 갈라진 그 바다 한 가운데를 걸어왔을 뿐이에요.

그럼 그 자리는 누구의 자리인가. 본인들이 착하게 살겠다고 마음 먹어서 만든 자리가 아니에요. 본인의 자리가 아니고 주님이 지나가는 자리입니다. 주의 말씀이 지나가는 자리에 그들은 그냥 얹혀 산 거예요. 얹힌 거예요. 이것만이 주님의 지시입니다. 혼자 살겠다는 그 자체는 아무리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아도 그게 죄 짓는 거예요.

지금 요나가 전한 것이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종말이에요. 니느웨 성의 종말이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종말을 종말이 스스로 끝을 내겠다고 찾아온 거예요. 그 최후의 순간이. 따라서 니느웨 사람들은 그 최후의 순간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최후의 순간, 그 종말을, 그 심판의 날을, 그 시간을. 그동안 자기가 주인공이었는데 자기가 살기 위해서 시간을 이용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 시간을 자기 안의 중심에 두어버리고 자기는 빠진 거예요. 그 중심 시간을 종말에다 맡기고 자기는 뒤로 빠진 거예요. 물러난 거예요.

그 종말의 시간, 종말화를 스스로 밥을 먹지 않고 짐승에게도 밥을 주지 않고 물을 마시지 않음으로써 그걸 실현시킨 겁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아니라 니느웨 사람들이 그런 시건이 있고 믿음이 있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니느웨 사람을 그런 식으로 하나의 말씀의 sign, 시그니쳐(signiture)죠, 말씀의 sign으로 그들을 이용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못하니까, 이스라엘이 말씀대로 안 사니까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 속에 말씀이 sign화되고 말씀이 실현화될 때는 저 모습이라고 그 먼 나라 가서 니느웨 성에 가서 그들을 통해서 ‘말씀이 그 사람에게 들어왔을 때는 인간은 이렇게 살게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시한 것이다. 이것만이 죄 아닌 것이다.’ 라고 니느웨 사람들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 겁니다. 누구한테?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요나는 이스라엘 선지자이지 니느웨 선지자가 아니에요.

몇 년 전에 나온 <피아니스트의 전설(The legend of 1900)>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 보면 영국에서 미국으로 계속 이민자를 실어 나르는 배에서 부모를 잃어버려 고아처럼 된 어떤 백인 아기를, 그 배의 가장 밑바닥에서 석탄 집어넣는 일을 하는 인부인 흑인이 불쌍히 여겨 키우다가 그 인부는 죽고 하는데요. 그 사람 이름을 아기를 처음 발견한 때인 ‘나인틴 헌드레드 (1900)’(1900년의 첫 날에 발견되어서)로 지어요. 그래서 그 사람은 무엇이 이름이냐 하면 시간이 이름이에요.

그 사람은 천재적으로 피아노를 잘 치는데 그 사람의 특징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그 배에서 육지로 내려 본 적이 없어요, 한 번도. 육지로 내려가서 세관업무를 안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마치 멜기세덱과 같아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어요. 인간 세계의 족보도 없어요. 혈통도 없어요.

그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육지에 사는 모든 인간, 뿌리를 갖고 있다는 그 모든 인간의 허접함에 비해 뿌리가 아예 뽑힌, 뿌리가 없는 그 배에 있는 인간이 오히려 참다운 인간이라는 테마를 그 영화가 보여주는 겁니다.

육지에서 재즈 피아노 잘 친다고 자랑질 하던 흑인이 지보다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저 배안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어이, 나인틴 헌드레드! 1900! 나하고 한번 붙어볼까?” 까불다가 피아노 대결에서 져버려요. 하지만 아무리 유명해도 나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겠다. 모든 인간을 부정하는 방법은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거죠.

그처럼 시간이라는 종말을 가지고야 비로소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원래 이스라엘이 보여줘야 될 그 하나님 모습을 니느웨 사람들이 보여준 거예요. 그들은 그들의 중심에 최후의 순간, 종말을 주인으로 맞이한 겁니다. 그 최후의 순간 모습, 그게 바로 하나님이거든요. 요일로 이야기하면 Monday, Tuesday, Wednesday, Thursday, Friday and Saturday. 그러니까 그 시간이 기둥이에요. 종말이 기둥입니다.

본인이 본인 천당 가겠다고 살겠다고 온 윤리 도덕 다 지키고 말씀 다 지키는 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 시편 131편 1-2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뭐냐.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엄마 같은 중심 기둥만 있으면 돼요. 애들이 유혹을 안 받는 이유는 엄마 있고 없고에 따라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인이 유혹을 이기겠다, 가 아니라 옆에 엄마가 있으면 엄마가 주는 그 어떤 것이라도, 수은에 중독된 뭐라도, 벌써 일주일 지난 피자일지라도, 벌써 녹아버려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크림일지라도, 그게 내 몸에 해롭다 안 해롭다를 본인이 판정하고 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엄마가 주게 되면 젖 뗀 아이가 흐뭇하게 엄마 쳐다보는 것처럼 그게 수은 중독이 됐든 방사능이 있든 관계없어요. 그냥 주는 대로 먹으면서 감사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종말을 먹고 그 대신 자기의 밥과 물을 안 마시는 거예요. 말씀을 먹고. 신앙생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회개하면 저주가 떠나고 니느웨 사람을 본받자. 혹시 아나? 하나님이 뜻을 돌이킬지도. 지금 니느웨 사람들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이상한 점은 단 한사람도 예외가 없었다는 거예요. 이것을 동일화, 평준화라 합니다.

모든 인간의 욕망은 평준화를 절대로 본인이 용납하지 않아요. 자기만 잘 되고 자기만 행복하면 그만이에요. 이게 인간의 욕망이에요. 욕망은 개별성입니다. 왜냐하면 욕망은 승부욕이 강렬해요, 승부욕이. 남한테 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해요.

심지어 하나님한테도 안 지려 해요. 내가 지다니, 어림도 없다. 이런 식이에요. 내가 왜 져? 내가 왜 하나님한테 져? 이런 식이에요. 그게 인간 마음 속에 들어있다고요, 악마의 마음으로. 뭐 하나님이면 다냐? 이런 식으로. 말은 차마 안하죠, 신앙인이니까. 말은 안 하지만 기분은 더럽거든요.

회개고 반성이고 금식이고 그게 우리의 구원과 상관없는 거예요. 로마서 11장 35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누가 ‘하나님, 잘 봐주세요.’ 하고 뇌물 줬다고 해서, 우리의 선함과 착함을 줬다고 해서 그걸 받으시고 저주를 철회하시고 심판을 면제해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홍해처럼 쪼개져야 돼요. 이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말씀 스스로가 말씀이 들어오는데 니느웨 사람들은 그냥 호응하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신 거예요, 호응하도록.

요나가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실이었다. 거 봐. 우리가 만끽하고 있잖아. 종말, 심판,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를 만끽하고 있잖아. 나는 죽어도 쌉니다, 를 만끽하고 있다고요, 지금 니느웨 사람들은. 그래서 만끽하고 있는 그 모습을 없앨 필요가 없어서 그들에게 재앙을 안 내린 거예요. 그대로 그 조시로 쭉- 그 상태로 쭉- 이게 하나님이 원하신 인간사회의 원형이고 모델입니다.

착하게 살려고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살아요, 시키는 대로. 그럼 뭐 안 울어야 되느냐. 우는 것은 그 다음이에요. 감격해서 울고 기뻐서 우는 것은 그 다음에 울어야 됩니다. 그 울 때 나온 멘트를 제가 요한복음을 통해서 알려드릴게요. 이 소리 듣고 엉엉, 마음껏 소리 내어 울어도 괜찮습니다. 옆에서 신고해도 할 수 없어요. 우세요.

그 우는 멘트가 어떤 멘트냐 하면 요한복음 8장 7절,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이 대목입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죽을 때까지 울어도 여러분, 울음이 메말라서는 안돼요. 기분 좋아서 우는 거예요. 감격해서 우는 거예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아무도 너희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니. 이게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뭐 보너스 탈 때 추석보너스만 감격스러운 게 아니에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돌 들고 너를 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이 소식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 말씀이 이 안에 홍해처럼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울 때 그 때는 실컷 우세요, 그 때는. 울고 또 우세요.

그게 바로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 이렇게 우는 자는 웃으리로다, 입니다. 6장 21절에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복이 네 안에 들어왔을 때는 울음이 웃음이 되고 그다음에 세상 것으로 웃는 자, 부요한 자는 너희가 이미 상을 받았도다.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누가복음 6장 25절.

자기 뜻대로 됐다고 자기 계획대로 됐다고 자기 스케줄대로 됐다고 웃는 것. 합격했어. 월급 탔어. 좋겠다. 너는 네 식대로 사니 좋겠다. 네 안에는 뭐가 있는데? 말씀 없어요. 지 최선을 다 한 것밖에 없습니다. 최선을 다 한 것이 죄예요.

주께서 시킨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해 자기가 자기에게 시킨 거예요. 이것은 금식 정신이 아닙니다. 종말 정신이 아닙니다. 뭔가 예비하고 대비하는 정신이에요. 뭔가 개별적으로 개별적 나를, 내가 나를 살리는 하나의 요령 같은 거예요. 꼼수 같은 겁니다. 종교적 꼼수 같은 것, 신앙적 꼼수 같은 거예요. 그것은 불신자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니느웨 사람은 신앙인인가. 참 이런 질문을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구원받았습니까? 막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참 답답해도 많이 답답하죠.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았습니까? 아닙니다.

니느웨 사람들, 이방인의 끝자락은 죽고 사는 거예요, 죽고 사는 것. 안 죽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하자. 이게 이방인입니다. 그냥 사는 게 문제에요. 그러나 선택받은 사람은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고 구원자가 우리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트로이 목마처럼. 구원자가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이 말은 바로 마태복음 8장 17절의 말씀을 들으면 이제 무슨 뜻인지 알 겁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지금 이방인들의 한계가 뭐냐 하면 자기 할 수 있는 대로 다 하면 주께서 봐주겠지. 니느웨 왕처럼. 그게 한계에요. 그게 한계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그게 아니에요. 아예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버려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어린 여자애가 있고 남자애가 있는데 여자애는 소경이고 남자애는 눈이 멀쩡해요. 그런데 어떻게 일이 있어가지고 여자애가 눈을 떴어요. 눈을 떠서 보니까 남자애가 갑자기 그때부터 소경되었습니다. 헤어지고 나중에 어른 돼서 가마 속에서 만났어요. <홍천기>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소경된 여자애가 눈이 멀쩡해졌다는 것은 이쪽의 눈을, 눈빛을 저쪽이 가져갔기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신약의 성도입니다, 니느웨 사람 말하는 게 아니에요, 신약의 성도는 신약의 성도 안에 심판만 들어온 게 아니고 심판 속에 있었던 주의 말씀이 곧 영생이 되어서, 심판을 유발하고 심판을 야기하고 심판을 호응하게 한 그 우리 자신을 심판하는 말씀의 sign으로 간주했던 그 말씀이 우리에게 곧 영생이 되는 거예요, 영생.

요한복음 12장의 말씀입니다. 12장 49절에 나온 말씀이에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의 명령이 영생이라. 주의 말씀이 들어오면 곧 영생이라.

그래서 이방인들은 죄를 안 짓겠다는 식으로 심판을 면제받으려 하는데 로마서 6장 1-2절에 보면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될 때 그때 그것이 바로 영생이에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상관없는 사람, 죽은 자가 된 거예요. 아까 고인이라는 이야기를 했죠?

그래서 세브란스 병원의 장례식장을 떠나서 보니까 이대 앞에 떡볶이집이 있어서 떡볶이 한번 사먹어 볼까, 또 짜장면집이 있어서 짜장면 한번 사먹어 볼까, 하다가 에이, 고인인데 뭐. 고인으로서 6천원 주고 짜장면 한 그릇 사먹을 수도 있고 떡볶이 먹을 수 있어도 떡볶이가 맛이 없니, 짜장면이 맛이 없니 티를 낼 자격은 전혀 저한테는 없는 거예요. 왜? 고인이기 때문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 점을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이게 바로 신약에 나오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구약의 이방인들은 기존의 자기 모습을 유지하려고 하는 반면에 신약은 새 사람이에요. 새 사람이니까 이런 겁니다. 환자로 간주한다면 이방인들의 모습은 기껏 병 걸리면 차도가 있다, 뭐 요 정도, 차도가 있다. 니느웨 사람들 재앙 없애고 난 뒤에 나중에 하나님께 망하잖아요. 잠시 차도가 있었던 거예요. 마치 나은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죠.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새 사람이에요. 주님께서 내 죄를 담당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나온 말씀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자신이 지고 우리의 슬픔을 본인이 담당했어요.

그래서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렇기 때문에, 그의 찔림은 어떤 근거가 있고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 이유가 뭐냐, 우리의 허물이거든요. 그러면 찔렸다는 말은 우리의 허물이 없어졌다는 뜻이고 그 분이 상했다는 말은 우리의 죄악이 사라졌다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결과물이 된 겁니다. 원인자와 결과물이 하나가 되어서 살아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이, 말씀 완성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내 인생의 주인공은 주님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 지신 분이 주인공이 되고 우리는 그 분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젖 뗀 아이가 엄마를 바라보는 것처럼 이미 우리는 중심을 바라보고 사는 거예요.

우시되 기쁨으로 우시고 또 너무 울면 기진맥진 하니까 가끔은 눈물 훔치고 또 웃으시고. 누구 때문에? 나 때문에가 아니라 나의 구원 때문에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나의 구원을 소유한 게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소유했다는 그 기쁨, 그 감격으로.

바로 그것이 말씀이, 영생이, 영생이 곧 주의 명령이니까, 주의 명령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그러한 sign이 되는 겁니다. 나인틴 헌드레드. 내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은 벌써 날아가 버리고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이미 심판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그냥 심판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주변 환경이 되는 겁니다. 그런 세상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그런 세상을 못 따라가고 흉내 내지 못했다고, 그걸 쟁취하는데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슬퍼하지 마시고, 자기로 인하여 기대하다가 자기 때문에 낙담하지 마시고 늘 주님 바라보면서 젖 뗀 아이처럼 여유롭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야 되는데 아무도 저와 여러분에게 돌 던질 사람이 없음을 감격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회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것을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세리가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죄인입니다 할 때에 그것이 곧 하나님 말씀의 성취요, 세리가 의인된 것처럼 의인되었기에 날마다 주님만 말씀만 기뻐하고 감격하고 고마워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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