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회에서 있었던 논문 발표 실황 | 이름 :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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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5 09:02:29 | 조회 : 1 |
개혁신학회논문발제100227다니엘70이레비역사적해석
[2010 개혁신학회] - 다니엘서 ‘70이레’의 비역사적 해석
이근호
(IP:119.♡.87.190) |
20-07-05 09:05 |
[영문초록] 과 번역과 서론 대목만
Non-historical Interpretation on 'Daniel's Seventy Weeks'
A Conventional interpretation method on theology is to interpret the Bible on the premise that the mankind have abilities to interpret the God's Word without fallacy. This arises from an attitude of taking it for granted that God never gives the mankind a way of inducing any fallacy in interpreting the His Word.
But what if the Bible itself contradicts the people's preconception? What if the mankind's understanding itself be a momentum of defying the Truth? What if the mankind can not escape the awareness of pretending himself pious, and of manipulating God?
For a proper interpretation of this, a related research on human subjectivity should be taken into consideration. I convince myself that God Himself opens the path of indicating this concept of limitation through His Words, for God is alive and active(Hebrews 4:12), and Holy Spirit is working where the Words and the human subjectivity confront each other. A revelation of God for the 'Daniel's Seventy Weeks' would have the same grounds, too. As His revealed activities are associated with the entire sphere of the Bible including the time of Daniel, we should interpret the Bible within the Cross with the concept of the Covenant. We therefore can observe the inside of the God's revelation and the human subjectivity at the same time because the Crucifixion, the gospel delivered by Paul, contains the concept of 'completion of the New Covenant'.
A concept of human subjectivity has been expressed as that of the 'human history'. This resulted in a strong possibility that a world view by the human made the human return to their subjective entities for existence. It formed a metaphysical environment of time and space, after all, which derives a distorted interpretation. God therefore stood the Son of Man called the Messiah in the heart of His revelation to rebuke them for their world view. In this context, I will examine His function as 'the Son of Man' in association with the 'revelation of God for the 'Daniel's Seventy Weeks'.
[한글초록]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전통적인 신학과 해석 방법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 없는 해석력이 당연히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성경에 접근을 시도한 것이었다. 설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오류를 유발하는 의도로 주실 리가 없다고 여기는 태도다. 그런데 성경 자체가 이러한 인간들의 선입견에 반박한다면? 인간 이해력 자체가 진리를 훼방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면? 본인들부터가 늘 신앙심을 가장해야 하고 하나님을 조작하고픈 의식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런 문제와 결부된 말씀 해석이 되려면 인간의 주체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주체의 만남의 장은, 하나님의 말씀 쪽에서 지금도 살아 운동하기에 (히 4;12) 성령을 일하심에 따라 인간들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도록 친히 열어주신다. 구약 다니엘이 접했던 ‘70이레’에 관한 계시도 이러한 묵시의 장으로서 오늘날 다가온다. 하나님의 이 묵시적 활동은 다니엘 시절뿐만 아니라 전 성경의 범위 전부와 연관되어 있기에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인 십자가 사건이 ‘새언약으로서 성취’라는 내용을 품고 있기에 이 십자가 안에서 인간의 주체 문제와 더불어 묵시의 내막을 비로소 살필 수 있다.
인간의 주체성은 명목상 ‘역사’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세상관 정립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경을 구성하면서 결국 자기 존재 가치를 향한 주체적 의미로 귀착되기 때문에 이것이 왜곡된 해석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인간의 역사관을 공격하고 늘 위기와 종말로 몰아세우는 묵시적 작용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인자’(人子)라고 불리는 메시아를 세워놓으셨는데 그 분의 ‘인자로서의 기능’을 다니엘에게 주어진 70이레의 계시와 관련지어 파악해본다.
Ⅰ. 서론
전통적으로 70이레에 대해서 역사적 해석을 고집하는 자들의 의도는, 어떻게든 유대공동체를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인정해주어서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과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약속보장의 영속성의 흔적을 이들의 역사적 존재성에서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남은 자’란 ‘드러나지 않는 남은 자’로서 언제든지 드러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 그들 생각에, 이것이 담보되어야지만 후기 선지서의 편집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배경과 더불어 그 선지서 내용이 윤곽이 드러나고, 비밀로서만 회자되는 묵시문학의 내막이 역사적 근거 확보에 준해서 납득이 가능한 해석지평으로 끄집어 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유대공동체의 존재를 긍정하는 식으로 대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공동체 죽음’을 요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8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즉, 천국의 본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천국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하셨다. 유대 공동체는 짐승의 세계에서 야기된 짐승의 분할 현상이다. 즉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땅과 씨에 대해 독점적 해석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아브라함의 신체와 연계된 혈통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이는 주체로서 발현될 신체를 현재의 자기 신체들 이외에 없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짐승’이라는 묵시적으로 부정(否定)적이고 악함의 의미를 싣고 있는 실체 등장의 근거가 혈통이라는 물질적 사유로서는 도저히 해명해 낼 수가 없게 된다. 단지 곡해하기를, 유대공동체에 대한 애매한 핍박을 가하는 비-여호와적인 정치적 바깥 세력 정도로 간주해서 유대공동체 내의 결속과 주체성을 다지고 함양케 하는 계기로 활용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명분이다. 진정한 짐승의 활동은 특정 신앙공동체와 연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내부 활동에서 자체적으로 주체성을 구성해나가는데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주체(자아)란 실은 하나님의 영적 다스림을 드러내는 기능점으로서만 발현하기에 그러하다. 권력이 ‘실체없는 효과’로서 작용하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주체자들이 자신의 허한 주체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타인의 절대적 욕망에서 그 대상을 찾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짐승이나 그 짐승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고 자처하는 유대공동체나 마찬가지다.
다니엘에서의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란, 국가 자체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태고적 힘들이 밀려오는 것을 의미한다. 땅의 기존 인간들이 주체가 되어서 다룰 수 없는 이질적인 힘을 말한다. 이 힘은 땅을 적시면서, 모든 위치에서 생산되고, 모든 관계를 다시 조성한다. 결코 혈통적이나 육적이 아니라 영적이다. 이미 국가라는 추상적 주체에 예속된 주체로서는 국가의 영적 성격을 파악해낼 수 없다. 국가의 정체성을 말씀대로 ‘땅 외적 요인’으로 되돌아가서 해석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국가란 단지 힘의 뭉치가 아니라 그 이질적으로 인간이 다룰 수 없는 힘의 파도가 차후적으로 조성되고 배치된 힘들의 관계구조를 실행하는 주체가 된다.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다니엘의 국가들은,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무질서적 힘이 스스로 ‘빈 칸’ 만들어내고 그 공간을 일시적으로 채우는 식으로 조성되는 가운데 돌출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 국가나 공동체는 힘으로만 조성되는 주체성에 매료되고 그 유혹에 황홀해한다. 유대공동체도 예외가 아니다. ‘인자 같은 이’의 몸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단 7:13) 도리어 땅에서 시작하는 묵시 세계를, 바다에서 시작한 영적 세력이 죽이고 미워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이방제국과 다를 바 없다. 도리어 그 힘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지층이다. 이는 곧 힘의 바깥에서 조절하는 ‘인자 같은 분’의 묵시적 조치로서만 움직인다는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 이 조치에 의해서 힘으로 ‘안으로 접치게’ 되면서 국가라는 주체가 발생된다. 이 ‘주체화’ 작업은 ‘인자 같은 분’의 인격적 발현성과 병행하게 된다. 즉 진정한 묵시세계의 주체 등장과 견줄 수 있는 주체로 적당하게 정립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이방 국가 권력 안쪽에서는 영적으로 더 심화된 ‘짐승’의 힘이 잉태되고 있었다. 유대공동체라는 종교집단체다. 짐승에서 나온 힘의 결절(結節)이라고 할 수 있다.(고후 11:13-20) “저희는 양의 탈을 쓴 악마 나라의 직원들이다… 너희들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잘도 용납하는구나” 결절, 곧 갈라짐이란, 발뒤꿈치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각질과 같은 것으로서, 짐승의 내부 속성이 자꾸만 표면화되는 올라와 층으로서 자체적인 구조를 이루는 현상을 말하는데 내부적으로 공격과 저항을 병행한다. 거룩한 가치를 사수한다는 명분 하에 정치적 권력 집중화를 통한 주체화 및, 계시 생산과 독점이 이루어지면서 인자와 성도의 세계마저 삼키려는 힘이 최고점을 향해 빨리 질주하고(단 12:4) 발휘된다. 종말의 강도가 고도조로 강화되면서 숨어있던 종말이 깨어지듯이 열리고 심판의 스케줄이 본격화된다. 권력은 영적 집중성을 역사적 벌판에 토해낸다. 땅의 백성들은 역사적 메시아를 희구한다. 그러나 그것조차 그동안 짐승이 작업해 놓은 업적이다. 땅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같이 생긴 짐승을 내심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역사적 상황 안에서 주체의 한계다. 본인들 각자가 그 힘의 융기 위에 올라온 돌출들로서 짐승에게 배속되어 있는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이 주체들을 묶어주는 것은 오직 가시적 역사를 잃지 않으려는 힘들의 관계뿐이다. 유대공동체는 자기를 압박하는 이방민족과 말씀을 사이에 두고 결코 대척점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동일한 목적(권력이란 허구가 보여주는 효과=영적 지배)을 지향하면서 같이 움직일 뿐이다.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이 상대하는 유대집권층은 그 당시 유대공동체 전체를 상징하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아비를 악마로 보았다. 그들은 뱀의 자식들이다. (요 8:44/마 23:33) 그들은 본인들도 천국을 가지 못하면서 천국가려는 자들까지 막는 자들이다.(마 23:14) 역사적 해석의 결과로 자칭 남은 자로 간주하는 이들 유대공동체의 손에 예수님이 피살되므로서 새로운 해석이 ‘인자’라는 묵시적 몸에 의한 묵시적 해석이 전 역사를 소급해서 적용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단 유대라는 이름의 공동체적 나라와 다른 짐승의 나라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수혜자라는 입장이 곧 하나님의 백성됨을 증명하는 역사적 혜택임을 자부하면서 나름대로 종교적 공동체라는 ‘주체적 형식’을 예수님에 근접하여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예언이 유발한 권력집중화 현상은 지상에 권력체를 영적으로 대변해줄 수 있는 ‘가공의 장(場)’ 역할에 충실케 하게 했다. 모든 국가의 정치적 다스림의 궁극적 지향점이 실은 영적인 이상(理想)체 실현과 관련된 채 ‘영적 전쟁’의 실무자들로 참여된다는 증거를 유대공동체는 미리 보여주었다. 쉽게 말해서 영적 공동체(교회)라는 자부하는 단체들이 ‘메시야 살해’로 이어진 영적 전쟁에 부정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말이다. 곧 인자되시는 분의 본질을 가장 근접한 위치에서 드러내도록 접촉된 상대자인 유대공동체로서 드러난 악마성은 전체 역사적 지평으로 확산된다.(요한계시록의 테마) 이는 곧 종교적 성격을 지니고 땅의 세계는 ‘색출의 현장’이 된다는 말이다. 영적전쟁의 주력들은 각기 자기 사람들을 호출해내면서(짐승의 표와 어린양의 표) 스스로 세상을 두 조각나는데 가담되고 있다. 이 때 각자의 세계에서 내민 고른 시간판이 사용되는데 고유의 역사관 끝에 종말을 매달므로 서 주체자로서 활약하는 단체의 활동 여부에 따라 종말의 시점은 자꾸만 역사 끝 지점이 각가지 변수로서 계시 내용이 풍부해지는 현상을 띠게 된다. 이런 경향마저 읽어내기 위해서는 70이레 계시가 주어진 다니엘 상황에서의 다니엘의 주체성을 먼저 언급할 수밖에 없었고, 다니엘이 ‘선지자’라는 입지를 고려해서 그 전의 관련된 선지자의 임무와 일관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선지자와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성을 검토해야 했고, 그것이 성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파악하고 나서는 왜 다윗 언약에 있어 성전의 존재가 중요한 사항인가를 제시할 필요성을 가졌다. 이 성전이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의 목표인 동시에 언약민족의 목표이기도 하기에 전쟁과 언약의 기능을 언급해야 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논문의 출발은 언약을 받은 자의 주체성부터 다루어져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사람을 불러내어 언약 사람으로 움직여가면서 뿜어내는 역사적 인식과 묵시성(비역사성) 인식의 대조성이 밝혀지면, 70이레에 대해 역사적 해석만 고집하는 단선적 해석의 문제점이 밝혀지게 된다.
‘이레’라는 시원적 시간단위는 새로운 인식론을 필요로 한다. ‘이레’는 결코 ‘7 년’이란 일상의 시간 단위로 환원되어 표현 할 수 없다. 그것은 새로운 주체적 약동이 ‘이레’라는 시간단위를 적용하시면서 지상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주체자의 약동은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의 붕괴와 관련지으면서, ‘인자’라는 구체적이고 묵시적 인물을 지향하게 된다. 반면, 역사적 이해에 밀착된 주석들은, 과거에서 미래로 쳐 올라오는 식으로 해석하므로서 지나간 사건에 대한 재생 의미를 차단시켜 버리게 된다. 이것은 인간 주체의 한계성을 노출시키는 바가 된다. 즉 7이레 시점이 확고하면 그다음 62이레의 기간과 1이레의 기간과 확실하게 점찍을 수 있다고 보는 동시에 그 7 이레는 이미 지나간 일회성 사건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이렇게 되면 구약의 예언은 십자가 복음과의 지속적인 연관성이 소멸된다. 이스라엘 회복과 메시아의 출현 사이에 계시적 연결은 시간적인 계기로 가능하지 않다. 십자가 못 박힌 그 메시아의 주체의 묵시적 위상에서 해결 지어져야 한다. 역사적으로 환원시켜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그 해석 주체자들의 살고자하는 (어떠하든 구원되고자) 육적인 본성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의 연관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해석이라고 간주되어 ‘인자의 죽음’의 시각에서 다니엘의 70이레를 해석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곧 심판의 결과며 묵시의 완성이다. 이 심판성을 품고 죽은 자로서 참여하는 것이다.(갈 2:20) 그렇게 되면 70이레의 진면목이 단지 지나간 한 역사상의 과거의 계시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생명의 힘을 전달하는 내용을 품고 영원히 적용된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회적인 것에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으로 지난 날의 계시까지 묵시적 구조 안에서 영원히 장악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바이다. 즉 70이레 해석에서도 십자가 의의는 묵시의 자격으로 역사 위에 쏟아지게 되어있다. 이러한 해석 인식은 이미 베드로가 제안한 바가 있는 인식이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느니라”(벧전 1:10-11)
10,02,27 백석대학교 신대원 목양동,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사회자 (심창섭 교수) - 아마 제 기억에는 칼 바르트도 자펜빌에서 목회를 하다가 로마서 주석을 쓰게 되고, 유명한 신학자가 된 것으로 아는데, 맞습니까? 그러니 목회현장이 신학과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데 말입니다. 특별히 이 시간에는 이근호 목사님이 발표를 해주시겠는데, 목사님이 목회현장에서 연구를 하시면서 느꼈던 것을 가지고 말입니다. 목사님도 시간을 맞추어 해주시고, 노평을 하시는 분들도 그렇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목사님을 박수로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 발표 (이근호 목사) =======================================
◈ 모든 역사적 해석의 밑바탕을 조사하면 !!
여기 글 제목에 있는 ‘비역사적 해석’ 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해석 가운데서 하나를 더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역사적 해석의 밑바탕을 조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역사적 해석의 밑바탕에는 뭐가 있는고 하니,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힘은 무엇이고 어디서 왔는고 하니, 그런데 그 힘이 모여서 주체로 돌출이 되고, 그 주체가 다시 받은 힘을 펼치게 될 때, 역사라는 형식을 가지고 펼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의 경우에, 자기의 과거(역사?)를 기억할 것인데, 즉 몇 명을 모으겠다는 그의 목표가 있고,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구상하는 역사의 형식을 보게 되면 무엇을 감추는고 하니, 즉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과연 성경말씀에 옳을까?” 라는, 그렇게 반성하는 기회를 그만 놓치게 되는데, 즉 “역사적으로 나만의 시간노선을 구축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 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주체에 대해서 물을 수 있는 것이 그만 목회를 하면서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와서는, 자기의 역사적 노선에서 작용하는 그런 밑에 깔린 타일처럼 작용하게 되면, 그것은 또 하나의 자기의 독자적인 역사로 그만 구축이 된다는 말입니다.
◈ 십자가 사건으로 검증을 !!
그래서 여기 논문 초록에도 나오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훼방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가능성을 빠트리지 말자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적용한다는 우리 자체가 오히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훼방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과연 그러한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고 하니, 자기가 먼저 충실하게 역사적 입장을 가지고 해석을 하고, 그것으로 멈추지 말고, 주님께서 역사적으로 모든 말씀을 해석해서 성취한 그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 사건에 자기에게 단회성으로 끝나게 되면, 이 십자가 사건은 자기가 걸쳐놓은 하나의 역사적 지점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즉 연대기가 되는데, 그것도 회고적으로 생각하면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성경 안에서 그 십자가 사건이 되풀이가 된다고 하면, 그 십자가 사건은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십자가 - 죽은 주체와 예수 그리스도 !!
다시 말해서, 이 ‘십자가’ 라는 것은, 날마다 자기를 죽음에 넘기우고, 그렇게 죽음에 넘기우게 되면 주체가 그만 죽은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죽은 주체 안에서 새롭게 말씀 스스로가 활동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일을 다 하신다고 하는 것을 끄집어낼 수 있게 되는 여정과 과정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개척교회 목사는 바로 그런 여정과 과정을 그대로 교인들에게 드러내고 폭로를 하게 될 때, 그렇게 고백을 할 때, 바로 그렇게 될 때, 교인들로 하여금 지금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갈라디아서나 창세기와 같이 그 어떤 특정 부분에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깔대기처럼 모든 성경 하나 하나에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 자신의 주체의 부정이 모두 들어있다고 하면, 그렇다면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 ‘70이레’에 관한 것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 그러므로 ‘70이레’를 해석함에 있어서 !!
그러니 70이레를 해석할 때도 어떻게 하는고 하니, 당연히 먼저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다 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고 주체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역사적 해석을 다 끄집어내는데, 즉 “하나님이 왜 인간에게 이런 역사적 해석을 허락하셨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 그것이 곧 ‘죄’ 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70이레에 대해서 감히 비역사적인 해석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십자가가 우리에게 다가와서 반복적으로 그것이 죄라고 지적을 하고, 사실은 죄라고 지적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를 만들어내는데, 바로 그렇게 죄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으로서의 주체와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의 그 십자가와의 만남을 통해서, 바로 그러한 만남 가운데서 말씀 자체가 스스로 생동력 있게 작동을 한다고, 그렇게 저는 본다는 말입니다.
* 사회자 - 목사님, 지금 이것이 논문이니 서론에서 본론으로 논지별로 하면서 넘어갔으면 합니다.
* 발표자 - 제가 방금 한 것이 서론인데, 그런데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20분밖에 없어서 이제 본론으로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사회자 - 그런데 우리가 준 시간이 20분이 아니고 40분인데, 40분이 맞지요? 예, 40분 동안 발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 발표자 - 저는 20분으로 알고 급하게 했는데, 그렇다고 하면, 먼저 여기 서론 부분을 보면 다니엘서에는 나오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그런데 이 짐승은 창세기에 보면, 땅과 육과(?)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구분되어 있는데(짐승은 육지가 아닌 바다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 그것이 예레미야에서 확인이 되고 말입니다.
◈ 인간은 이질적인 힘 앞에 !!
그런데 이렇게 짐승이 올라오는데, 그것을 제가 이질적인 힘이라고 했는데, 왜 그러한 표현을 했는고 하니, 이 지상에서 그동안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구축한 힘이 이 이질적인 힘을 강당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질적인 힘이 우세하게 되는데, 즉 짐승이 우세이고 인간은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시간상 넘어가겠는데, 아무튼 이렇게 하면서 그 다음에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과연 이질적인 힘과 역사적인 힘의 마찰이 최종적으로 어디에서 확인이 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즉 십자가 사건에 근접해서 죽였던 자들이 유대인들인데, 그런데 그들은 나름대로 역사적으로, 즉 연대기적으로 흘러오는 중첩된 해석을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했다는 겁니다.
◈ 보편적 단독성 !!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제가 논문 중간에 ‘보편적 단독성’ 이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누구 앞에 나올 때는 단독적으로 나오지만, 그러나 그 뒤에는 줄줄이 자기를 대변할 수 있는 수많은 무리를 끌고 단독적으로 서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바리새인들이 분명히 예수님을 죽였는데, 그러니 다른 민족들이나 종족들은 관여하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빌라도는 관여를 했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에 의하면 다른 민족들도 역시 심판하고 정죄할 수 있는 사건의 근거가 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게 가장 근접을 했던 유대인들이 보편적 단독성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유대인들을 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니엘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그것을 회고적으로, 즉 역사를 창조적으로(?) 해석을 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즉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건들이 그냥 한 차례 지나가 버리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석이 되는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 말씀을 그냥 기억의 차원으로만 해석을 해서, 즉 “아하, 과거에 그렇게 잘못을 했구나. 그러니 우리가 두 번 다시 그렇게 안 하면 되지” 라고 하게 되는데 말입니다.
◈ 유대인들의 경우에도 !!
하지만 그것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도 역시 그렇게 해석을 했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나 이사야 등을 해석할 때 말입니다. 바로 그렇게 성경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보편적 단독성에 대해서 모르게 되면, 우리도 역시 그런 유대인들의 해석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있어서 보통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좋은 편이고 유대인들은 나쁜 편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설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역시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악한 쪽에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그들을 들추어낸 것은, 우리도 역시나 근원적으로 바리새인들과 동일한 해석을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 어떤 인간이라고 해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는 기능을, 바로 그런 역할을 이 유대인들이 대표적으로 감당을 했다고 본다는 말입니다.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이 ‘70이레’ 라고 하는 해석도 역시 그냥 70이레 하나로 보지 말고,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그 모든 성경해석이 이 70이레라는 하나의 지점을 향해서 쏟아지는 것으로 보자는 겁니다. 즉 깔대기로 쏟아 붓듯이 말입니다.
제가 오늘 조금 일찍 와서 여기 실린 제 논문에 대한 평가를 보았는데, 거기에 보니까 “어떻게 해서 인자와 성전, 그리고 전쟁과 같은 개념이 70이레와 관련이 있는가?” 라고 하는데, 바로 그러한 점을 염두에 주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말입니다.
이러한 언약과 주체의 발생에 있어서, 여기서 제일 먼저 ‘이름’에 대해서 거론을 했는데, 그러면서 각주1에서 ‘로빈슨 크루소’에 나오는 ‘friday’를 언급했는데, 그 흑인소년은 주인이 자기를 호명해줄 때, 그것이 하나의 자기에게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가 된다는 것은 ‘friday’ 라는 이름을 가진 흑인에게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불러준 사람에게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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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니엘 드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서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원주민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름 없는 그 원주민에게 ‘Friday, 금요일’ 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것은 크루소가 그 원주민을 만난 요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금요일’ 이라는 의미는 원주민 주체입장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이름을 붙여준 크루소에게만은 의미가 새로이 발생되는 관계다. 이처럼 호명을 당한 자는 호명하면서 다가온 분에 의해서 비로소 주체가 발생되는 것이다. ‘베드로’나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같은 이치다(시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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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했는고 하니, 성도는 언약 안에서 주체를 갖게 되는데, 그런데 그 주체는 기존의 인간이 가지고 있던 아담의 죄의 주체와 서로 공존을 하기 때문에, 즉 두 개의 주체가 되는데, 그것은 지젝의 이론에 의하면, ‘시차적 관점’ 이라고 하는데, 제가 거기에서 용어를 따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시차적 관점’ 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 논문 각주2에 보면 나오는데, 즉 “동일한 공간 속에서 공존하는 불가능한 대극들이 하나의 공간, 같은 윤곽 속에서 공존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관점이다” 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자아가 분열이 되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 시차적 관점 !! 탄력적 주체 !!
그러니 이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시차적 관점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 뒤에 보면 ‘탄력적 주체’ 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유일한 주체인데, 즉 두 개의 이름을 가지면서도 본인들이 그 두 개의 이름을 감당하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그러한데, 야곱과 이스라엘도 그렇고, 또한 다니엘과 인자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니엘은 보고 “인자야!” 라고 부르는데, 그런데 정작 다니엘은 ‘다니엘’ 이라는 자기 이름을 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이 두 개의 이름을 다룸으로 말미암아서, 이 두 개의 이름 속에서, 하나의 이름에 자기 모든 구원을 다 걸고 있는 사람에게 구원의 효과와 정보가 거기에서 발생되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 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아담의 몸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개념과 인식을 도저히 포착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그것이 나오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변화하는 인간이 변화하는 대상을 포착하게 되면, 그렇게 포착하는 순간에 그것은 이미 ‘나’ 라고 하는 이미 고정된 주체에서 포착된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은 거짓이 된다는 말입니다.
◈ 날아가는 화살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이렇게 화살이 날아가고 있는데, 이 화살의 앞과 그 뒤의 색깔을 모른다고 하면, 그런데 자기가 그 화살을 잡는 순간 그 앞의 색깔과 뒤의 색깔이 그만 고정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무엇을 놓치는고 하니, 그 화살이 날아간다고 하는, 그 화살의 동사적 의미를 그만 놓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날아가는 화살을 잡아놓고 “아하, 화살은 이렇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개인적인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화살이 날아가는, 즉 동사적으로 변화하게 한 그 화살의 본래적인 모습은 우리의 주체로서는 포착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탄력적 주체’ 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러니 만약 “역사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주체가 날아가는 동사를 붙잡아서 명사로 만들어놓고 볼 때 역사가 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적 해석을 하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그것은 바로 그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자기 자리에 대한 긍정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열심히 하자” 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우리를 죽이는 십자가의 그 작용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십자가는 그냥 지나가 버리는 하나의 회고적인 사건에 불과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는 점점 더 십자가와는 멀어지는 사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인데, 그런데 십자가는 이제 그 기능만이 남아있고, 그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자기 자신이 그만 자기 신앙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교주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아직 하나의 역사의 노선이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 탄력적 주체에 의해서 ‘차이’가 발생 !!
그래서 이 탄력적 주체에 의해서 ‘차이’가 발생한다고 했는데, 이 ‘차이’ 라는 개념은 들뢰즈의 이론에서 빌려왔는데, 즉 이렇게 차이가 발생된다는 것은 변화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즉 같이 변화가 되는 인간이 같이 변화가 되는 대상을 잡을 때 어떻게 됩니까?
거기서 온전하게 일치가 될 수 없고, 바로 그 틈에서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는 무엇인고 하니, 조금 전의 개념과 이 주어진 새로운 개념, 즉 주어진 사태의 틈에서 발생되어서 나온, 즉 그 개념의 틈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차이’ 라는 말입니다.
◈ 성전의 경우에 !!
제가 바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언급했는데, 즉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한다는 언약궤, 그리고 그런 언약궤를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 곧 성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하나님의 언약궤로 말미암아서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은 탄력적 주체를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주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아담의 죄의 속성도 언약 속에서 발생이 되고, 또한 “그것이 아니야” 라고 부정을 하면서 새롭게 발생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즉 장차 오실 메시야를 겨냥하는 새로운 개념이 또 나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개념 사이에서 그때 그때마다 그 틈을 통해서 발생적으로 그 시대에 합한 하나님의 임재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이 그 시대에 합당하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합당하게 주어지게 되면, 그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개념을 새롭게 알게 되는데, 하지만 그 새롭게 하는 것이 그 다음 시대에 들어가게 되면, 그것이 무효화가 되고 새롭게 다시 주께서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 성전은 부수기 위해서 지어져야만 !!
그렇다면 성전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윗은 자기가 백향목으로 성전을 짓겠다고 했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서 지어진 성전은, 사실은 하나님은 그렇게 지어진 성전에 참여하면서도 발을 빼버리신다는 겁니다. 나중에는 무너지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생각은 뭡니까? 처음부터 짓지 말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왜냐하면 결국에는 무너지고 마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즉 그렇게 짓도록 허락을 했으면 긍정을 해주던지 말입니다. 그런데 왜 지어놓게 하고는 또 박살이 나게 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포로이후에 보면, 이와 똑같이 성전을 지으라고 해놓고는, 그 성전에 계시지 않는, 그야말로 똑같은 방법을 하나님은 사용하고 계시는데, 그것을 학개와 스가랴에서 동일하게 적용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학개와 스가랴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곧 ‘7이레’ 인데, 그래서 저는 이 70이레를 이야기하면서 이 성전개념 미리 그 앞에 깔아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 요나는 왜 자살을 시도했는가?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70이레가 중요하게 때문에, ‘발생적 성전관과 주체’는 그만하고, 여기 3번, ‘선지자의 속성과 다니엘의 위치’ 부분을 하겠는데, 즉 선지자의 위상이란 것이 탄력적 주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지자는 선지자 자기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야 하는고 하니,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여기서 왜 요나 선지자 이야기를 예로 들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겁니다.
요나가 왜 자살을 시도했는고 하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그 말씀에 근거해서 주체내부에서 자기가 자기에게 명령자가 되고, 그렇게 요나 자신이 명령자가 됨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선지자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에게서 내려온 육체에 의한 자기 주체성인데,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쉐마’, 즉 ‘들어라!’ 라고 하니, 자기는 ‘들었다’ 라는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로 하여금 큰 물고기 배속에서 건져내어서 다시 살리셨는데, 그동안에 요나가 기대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본국에 있을 때 주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이 그대로 될 것이라고 기대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니느웨의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무너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선지자가 내뱉는 말이 아주 인상적인데, 즉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죽여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욘 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욘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욘 4: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그러니 말이 서로 앞뒤가 맞지를 않은데, 즉 하나님은 인애롭고 자비롭기 때문에 자기를 죽여달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선지자가 몰랐던 것은, 그것은 바로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나오는, 즉 하나님께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라는 말씀인데 말입니다.
(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 이미 언약이 깨어진 상황에서 !!
바로 그 말씀에 있어서, 즉 변화가 되는 하나님을 우리의 주체가 같이 변화가 되면서 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놓을 때, 바로 그렇게 우리를 붙잡는 자기가 무엇인고 하니, 원판의 십계명이 깨어지고 난 뒤에 복제가 된 십계명을 만들 주체자로서 우리를 남겨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미 언약이 깨어진 상황에서 언약이 체결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계명이 깨어진 것을 모세 손으로 다시 만들게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스톱시키고 변화된 하나님이 그 앞을 지나감으로 말미암아서, 그야말로 은혜와 긍휼라고 하는 것이 그 어떤 경우에 의미가 있게 되는고 하니, “이미 우리는 언약을 깨트렸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게 될 때, 그때만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깨어진 돌판은 어디로 가는고 하니, 그것은 언약상자에 담기게 되는데, 그 상자에는 피가 발리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그 언약궤가 이동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이동을 하면서 그들이 점점 더 느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의 경우에 있어서 “왜 우리는 언약을 깰 수밖에 없는 본성을 지니고 있는가?” 라는 점이고, 이스라엘이 그것을 제대로 보여준다는 겁니다.
◈ 요나를 배제한 인자와 자비 !!
그래서는 저는 이 선지자 요나의 자살을 어떻게 보는고 하니, 그가 하나님을 기억으로 알았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즉 그것이 자기가 알고 있던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배제하고서 숨어있는 다른 분과 관련된 인자와 자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그분이 바로 오실 메시야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하나님과 상대하시지 인간과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다만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죄인으로만 참여할 뿐이지, 그렇지 않으면 전혀 참여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의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 다니엘이 아닌 느부갓네살에게 계시가 !!
지금부터가 중요한데, 알다시피 다니엘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는데, 그런데 계시는 누구에게 떨어졌는고 하니, 느부갓네살 왕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느부갓네살이 다니엘과는 상관없이 느부갓네살 자체가 보편적 단독성으로 하나님의 계사는 받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느부갓네살 왕이 받은 계시를 다니엘도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자가 아니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이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나서 견딜 수가 없어서 다니엘을 부르는데, 물론 처음에는 다니엘도 몰랐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니 비로소 풀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의 역사에 있어서 주체자가 다니엘을 배제하고서, 즉 하나님과 느부갓네살의 관계로서 모든 것이 자리 매김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바로 국가 이스라엘이 배제를 당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욥기에 있어서, 욥이 그 어떤 고난을 당하던 간에,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에 있어서 욥이 배제되는 것처럼, 그렇게 욥이 하나님과의 내기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오로지 내기에 따라서 일방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욥처럼 다니엘은 빠지고 만다는 겁니다.
◈ 이스라엘은 죄인으로 남아야 !!
그렇게 다니엘이 빠지면서, 다니엘은 또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즉 70년만에 포로생활에서 돌아온다고 한 것을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70년 포로생활에서 돌아온다는 것이 옛날의 이스라엘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서론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유대공동체의 존재를 긍정하는 식으로 대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공동체 죽음’을 요구하신 것이다” 라고, 그 부분을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악마와의 거래이고, 이스라엘은 그냥 받아서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받아 누리기만 하게 되려면, 이스라엘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고 하니까, 자기들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죄인 그 자체로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70이레로 끝나고 영원히 용서를 받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악마의 관계에 있어서 영속(永續), 즉 영원히 속죄함을 받는다는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지, 혜택을 입는 이스라엘하고는 상관이 없는데, 즉 그런 면에 있어서 전혀 이스라엘은 여기에 가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 이레 - 태고적 합리성 !!
바로 그렇게 가담하는 것을 빼는 것이 바로 ‘이레’ 라는 것인데, 그래서 ‘이레’ 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이레’ 라는 용어를 두고 ‘태고적 합리성’ 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시간단위에 대해서 알아야만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제가 본문에 적어놓았는데,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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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레’란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측정 단위로서 모든 것이 창조주로 귀속되는 진행을 살피는 단위다. 시간을 최소 단위로 나뉘어 사고하는 방식은 BC 4세기∼3세기 경 사람인 에피쿠로스 견해이기도 하다. 시간의 최소 단위 안에서는 그 어떤 운동도 일어나지 않고 정지된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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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피쿠로스 학파가 시간을 단위로 해서 측정을 했는데, 철학에서는 하나의 연속성으로 가는 것을 어떻게 잡는고 하니, 마치 바이올린에 현이 이렇게 있으면, 그것을 한 마디로 해서 잡으면 질서가, 즉 음(音)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레’ 라는 7일 창조를 하시고 마디를 집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안식’ 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을 함으로 말미암아서, 7일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안식’ 이라는 마디를 가지고서 남아있는 모든 역사를 측정하고 판단하고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기준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 느부갓네살 왕은 짐승이 되어야 !!
그것이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감추어진, 즉 은닉된 것인데, 그런데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말미암아서, 이처럼 태고적 은닉성이 그만 노출이 되면서 모든 역사가 영적인, 즉 역사가 태고적 은닉성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느부갓네살 왕을 짐승으로 만드는데, 그 기간에 바로 일곱 때, 즉 7년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7년이라고 하는 짐승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보편적 단독성이 바로 느부갓네살 왕이기 때문에, 그래서 느부갓네살과 주님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느부갓네살에게 있었던 그 일곱 이레(때?)의 그 질(質)을 가지고 그 뒤의 모든 역사를 다 설명하는데, 그것이 바로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신상을 만들게 해서, 그 신상이 느부갓네살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빠뜨리게 하는데, 즉 바로 그렇게 넘어지게 하는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묵시에서 날아온 돌이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신상이 넘어져서, 즉 위로 서 있던 역사가 옆으로 자빠지게 되면, 그것은 느부갓네살 시점부터 끝 날까지의 모든 시점이, 이미 느부갓네살이 짐승이었다는 바로 그 관계에서 확정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데, 즉 마지막 때 등장하는 제국을 ‘바벨론’ 이라고 하는데, 즉 느부갓네살 왕이 다스렸던 바로 그 나라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인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볼 때 바벨론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제국은 지금의 그 어떤 나라나 국가 공동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어떤 나라와도 관계가 없이 오직 인자의 나라를 대적할 수밖에 없는, 그런 바벨론 제국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런 속성을 설명하려고 하면, 인간들의 주체에서 나온 역사적인 시간관을 가지고는, 즉 해나 때, 그리고 초, 분, 시 등등,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이레’ 라는 것을 가지고 설명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이스라엘 - ‘범죄함’을 아는 유일한 민족 !!
아무튼 저는 그렇게 보았는데, 그래서 이 ‘70이레’는 어떻게 해석이 되어야 하는고 하니, 모든 역사적 해석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 ‘이레’ 라는 새로운 마디를 가지고, 즉 태고적인 그 질서를 하나님께서는 인자로서 품어서, 즉 인자의 작용으로서, 바로 그런 방식으로 지금까지 모든 인간들이 주체가 되어서 가지고 있는 시간에 대해서 공격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이스라엘의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여기 논문 23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쉽게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이 무엇인지를 유일하게 아는 민족이 바로 다니엘이 속해 있는 이스라엘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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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이 무엇인지를 유일하게 아는 민족이 바로 다니엘이 속해 있는 이스라엘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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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스라엘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그런 회복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어떻게 회복되는고 하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범죄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성전에 있어서, 즉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 이스라엘을 통해서 성전을 무너지게 함으로서, 그러니 그 범죄함은 이스라엘 자체 내의 범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덤비는 것이 곧 범죄함이고 죄가 된다는 것을, 그것을 유일하게 아는 민족으로서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고대하게 된다는 겁니다. 오직 이스라엘이란 민족만이 말입니다.
◈ 드러나지 않는 남은 자 !!
그렇다고 하면, 이 논문 처음에 있는 서론 부분에 보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즉 유대 공동체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즉 “‘남은 자’란 ‘드러나지 않는 남은 자’로서 언제든지 드러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드러나지 않은 남은 자로서 언제나 드러날 수가 있다는 것인데, 즉 우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우발성은 역사의 서열에 전혀 포착이 되지 않는데, 그냥 빠져 나와버린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동사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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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적으로 70이레에 대해서 역사적 해석을 고집하는 자들의 의도는, 어떻게든 유대공동체를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인정해주어서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과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약속보장의 영속성의 흔적을 이들의 역사적 존재성에서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남은 자’란 ‘드러나지 않는 남은 자’로서 언제든지 드러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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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은 부서지기 위해서 세워져야 !!
바로 그러한 작용을 인자가 되시는 주님께서 지금도 하고 계시는데, 그렇다고 하면 이 ‘7이레’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성전을 새로 세우는 기간인데, 하지만 그렇게 성전을 세우는 역사를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는고 하니, 과거 이스라엘이 성전을 세워서 수고했던 것은,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은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입장에서 되풀이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62이레’가 끝나고 나면, 그렇게 세운 성전이 깨어지는데, 그런데 거기에 동원되는 역사적 사실이 두 개의 나라인데, 하나는 바사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라는 겁니다. 여기서 바사 나라는 성전을 짓는데 도움이 되고, 헬라 나라는 어떠한고 하니, 바사에 의해서 지으신 성전이 톨레미와 셀루쿠스가 서로 남북으로 8차례나 왔다갔다하면서 성전을 다 때려부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전이 지어진 것은, 부서지는 기능을 보여주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 묵시문학 - 역사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
그러니 다니엘은 무엇인고 하니까, 결국에는 ‘70이레’ 대로 그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다니엘은 자체적인 주체, 즉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돌아가게 하신다” 라는 것을 붙잡기 위한, 그렇게 다니엘은 자기 입장에서 해석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묵시문학’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묵시문학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이 묵시문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주체성을 긍정하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고 그런 시도에 지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뭐라고 했는고 하니, 말라기 이후에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고 했는데, 하지만 계시는 없더라도 역사는 흐르고 있으니, 그들은 말라기와 세례요한 사이에 나름대로 뭔가 긍정적인 역사적 평가를 해서 연결을 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렇게 잇고 싶은 것이 느헤미야에 나오는, 즉 “우리는 이제 성전은 없지만 말씀대로 실천에 옮김으로 말미암아서 오실 메시야를 고대하는 남은 자 역할을 할 수 있다” 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역사적인 존재이니 말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주님과 마주쳤을 때, 그것이 곧 ‘짐승’ 이었다는 겁니다.
◈ ‘7이레’는 모든 역사를 다 커버 !!
그렇다고 하면 이 ‘7이레’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십자가 의미에서 해석을 해보면, 인간은 자기 주체를 긍정하기 위해서 손으로 뭔가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지금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데, 그러니 이 ‘7이레’는 모든 역사를 다 커버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태고적 시간의 단위인 ‘이레’ 라는 것이, 그 앞에서 모든 것을 걸치고 있으니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70이레는 ‘1이레’로 모아지는데, 이 ‘한 이레’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7이레와 62이레에 있었던 것이 한 이레에서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만남이 이루어지면, 이 이레의 주체, 즉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 ‘이레’의 주체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 !!
그러니 70이레에서 1이레로 옮기게 되는 것은, 모든 ‘이레’의 주체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인자하고 자비로우신 분이 ‘1이레’에서 그들의 죄를 영원히 속해주는 기능을 담당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이레’ 라는 것을 시간적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해서 주께서 이런 일을 하시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1이레’가 역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걸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이레’ 라는 창조단위를 결코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제 결론부분을 보겠는데, 아무튼 다니엘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그 이유만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계시를 안다고 주장할 수 없는데, 결론부분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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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무너져 내리는 역사적 베일의 현장에 서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나름대로 삶의 형식을 창조해오고 있다. 그저 ‘자기 보존’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힘을 확장하려 한다. 여기에 조형력이 발동하면서 주변을 해석한다. 살아있는 유기체의 본능이며 생명력의 분출이다. 이런 인간의 시선에 성경문자가 들어오면 주체적 해석이 발동한다.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이란 결국, 해석될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인간이 해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자기 주체화 정립과 더불어 나타나는 ‘역사/묵시’의 시차적 관점을 다니엘의 70이레 계시를 통해서 분석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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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빠져있는데, 알다시피 ‘이미-아직’ 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하지만 그것도 역시 역사에 기초해서 빈 공백을 묵시라는 것을 가지고 메우려고 하는 것과도 같은데, 그런 하나의 역사적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이미-아직’만 알면 구원이 되는 것처럼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것마저도 죄가 된다는 것을 간과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태고적 합리성인 ‘이레’의 주인공인 인자가 되시는 분을 만나게 되면, “아하, 이런 시간적 구조마저도 죄이지, 나의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구나” 라고 하는 깨닫게 되는데, 사실 이런 ‘이미-아직’ 이라는 개념은 신학이 아니라, 이미 모든 철학에 다 깔려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신학에서 뒤늦게 차용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긍정적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결론부분을 제가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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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신체는 외부와 접촉하면 자체적으로 위기의 시점과 구원의 시점을 지정하여 ‘시작-종말’이라는 내부 시간 시스템 안에 장착시키고 자기 몸에 와 닿는 사태의 와 견주어가면서 구원 시나리오를 작성해나간다. 그리고 외부 추이와 견준다. 여기에 시간성이 요청된다. 시간이 언젠가는 모든 것을 정화시키게 된다는 일념에서 미래는 항상 ‘희망의 홀컵’으로 삼는다. 시간이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자체적인 방향성을 지닌다는 것이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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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몸이 있는 이상, 자기를 긍정할 수밖에 없어 !!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우리의 살점이 있는 이 몸이 있는 이상 우리는 스스로 자기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인간이 아무리 성경말씀을 연구하고 신학을 한다고 해도, 자기 몸이 있는 이상에는, 자기 주체를 긍정할 수밖에 없는 시간적인 노선을 따르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마저도 죄가 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야만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목회자가 자기는 아무리 말씀대로 설교를 한다고 해도, 그 관심사가 자기 몸에게 있다고 하면, 자기 구원문제라든지 말입니다. 그렇게 뭔가 아직도 미완료가 남아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완료에 대한 불신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 사도나 목사는 하나의 쓰레기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고 하니, 여기 마지막에 보면 고린도전서 4장 13절의 말씀이 있는데, 즉 “사도나 목사는 하나의 쓰레기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마지막에 찌기같이 사용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고전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 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 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새로운 묵시적 주체로서 !!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날마다 자기 자신을 죽음에 넘기우고, 그리고 그 안에서 날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자기는 이미 모든 것이 없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라고 하는, 그렇게 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새로운 묵시적 주체임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이상으로 제 논문발표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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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자 - 목사님이 굉장히 어려운 주제를 발표하셨는데, 저는 솔직히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논평을 하시는 분들이 잘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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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규성 교수(한국 성서대 구약신학)와 김진수 교수(백석대, 구약신학)가 차례대로 논평을 했는데, 그냥 자기가 논평한 글을 그대로 읽었음.
* (논평을 하고 나서) ================================
* 이근호 목사 -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은 곧 십자가인데,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십자가의 복음만이 구원이 되는지, 거기에 전력을 다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사도바울에게 70이레를 해석하라고 하면 어떻게 했을까요? 천 명의 신학자가 다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고, 저도 그런 전통적인 해석을 얼마든지 내놓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그런 해석을 보고 뭐라고 할까요? 육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을 가름하는 기준이 십자가의 복음에 있다고 했을 때, 그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본다면, 여기 교재 45페이지에서 강규성 교수님이...
* 방청객1 - 그런데 목사님, 이렇게 교수님들이 나름대로 평가를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좀 해주시지요.
* 이근호 목사 - 거기에 대해서 충분히 동의하는데(??), 만약에 제가 목회자가 아니라 학자라고 하면, 교수님들이 지적한 점에 대해서 더 치중을 했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저의 관심사는 그동안 학자들이 이 70이레를 가지고 복음을 끄집어내는데 소홀히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점에 대해서 집중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평가해주신 교수님들에게 감사하다고 했고, 거기에 대해서 이의가 없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제가 45페이지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강 교수님이 “성경에 기록된 언약들은 문맥적 상황을 검토할 때 저주적 성격보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강조된다” 라고 하셨는데, 제가 이 글을 여기에 와서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가 저주를 받을 자가 아니라고 하면, 즉 저주를 받은 심정이 아니라고 하면 은혜라는 것이 나오지 않는데, 그런데 만약에 저주에 관한 것이 이미 지나간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육적 해석에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 방청객1 - 목사님, 그 정도로만 하고 이제 질문을 좀 받았으면 좋겠는데요? 제가 받은 느낌이 무엇인고 하니, 그래도 여기가 학술적 모임인데 말입니다. 목사님은 장로교 목사님이 맞지요? 그런데 저는 마치 계룡산에서 계시를 받고 내려오신 분이 설교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ㅋㅋ), 그러니 학회의 성격에 맞게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두 분의 교수님들이 잘 지적을 한 것같이, 사실 저도 들으면서 무슨 이야기인지를 잘 몰랐었는데, 마치 (새롭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분이 말씀을 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구약의 모든 것을 문법적이고 역사적 맥락에서 먼저 살펴보고, 그런데 그런 기본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상한 것들을 이야기하니, 그런 점은 지켜져야만 한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 귀한 분들이 이렇게 시간을 내어서 모였는데, 그런데 그런 시간이 아깝게 여겨진다는 겁니다. 기본적인 것들을 두 교수님들이 너무나 잘 지적을 했는데, 즉 “왜 비역사적인 해석인가?” 라는 주장을 하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일단 학자들과 디베이트를 하고 나서, 자기의 주장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 이근호 목사 - 지금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 방청객2 - 목사님, 일단 비역사적이라고 하면, 역사를 초월하는 개념이 아닙니까? 세계적인 신학자인 박윤선 목사님도 70이레에 대한 것은 너무 어려워서 간하배 박사의 것을 거의 베끼다시피 했는데 말입니다. 참, 목사님은 어느 교단 소속입니까?
* 이근호 목사 - 저는 총신을 졸업했는데, 그리고 그런 사적인 질문보다도...
* 방청객2 - 아니, 어떻게 해서 이렇게 비역사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 이근호 목사 - 지금 제가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49페이지에 보면, 김 교수님이 “발제자는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타난 신상을 역사와 동일시한다(p.17). 그리하여 그는 돌(=인자의 나라)이 신상을 무너뜨리는 것을 역사를 없애는 것으로 이해한다”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저는 역사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자기가 주체이기 때문에 역사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바로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는 묵시적으로 공격을 하신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제가 ‘비역사적’ 이라고 표현을 했다는 겁니다.
* 방청객2 - 성경인 묵시도 모두가 역사 안에 있는 것인데, 그런데 그런 것을 다 무시하고, 또한 노아언약이 어쩌고 하는데, 조금 죄송한 표현이지만, 제가 듣고 있으려니까 속에 분이 끓어 올라와서 말입니다. 누가 이 분을 여기에 소개했는지 모르겠는데, 이것은 개혁신학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청중의 약간 웃음)
* 방청객3 - 너무 그렇게 하시면 학자와 목회자간에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데, 누군가가 새로운 길을 제시하면 귀를 좀 기울이기도 해야 한다는 겁니다.
* 방청객4 - 오늘 목사님의 강의를 듣고, 조금은 철학적이기는 해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해주셔서 고맙기는 한데, 그런데 표현이 너무 과격해서 좀 그렇습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그런데 공관복음에도 보면 묵시와 역사와 컨벌젼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무 역사성이 없이 초월적인 것만 추구하게 되면 곤란하지 싶은데, 그리고 이런 철학적인 내용이 함유된 논문은 (이런 모임보다는) 조직신학 쪽에서 살펴보았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서신학(?)이라는 것은, 항상 역사와 문화의 컨텍스트 속에서 하나님께 받은 계시의 말씀을 그 시대에 합당하게 나누는 것이 맞지 싶은데, 그런데 이렇게 비역사성을 너무 강조하다가 보면, 역사성을 희석시키게 되지 않나 여겨집니다.
* 이근호 목사 - 그런데 서로 교류가 이루어지면 항상 역사성의 한계를 드러내게 되는데, 그 한계를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우리 인간들에게는 개인적으로 개입을 하시기 때문에, 학자는 학자대로, 목사는 목사대로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점을 제가 파악해서 오늘 이렇게 발표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가 역사를 무시하고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역사적으로 합당하다” 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어느 시점에 가게 되면 우리 인간은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면, 그렇게 다시 생각하도록 힘을 가하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께서 십자가 중심으로 일을 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 방청객2 - 하지만 그렇게 주님이 십자가 중심으로 일하시는 것이 시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인데, 즉 단절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 이근호 목사 - 저는 시간에 대해서 단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시간은 항상 끝까지 간다는 말입니다.
* 강규성 교수(?) - 일단은 목사님이 논문의 타이틀을 다시 했으면 좋았을 뻔했는데,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새로운 접근’ 이라든지 말입니다. 아무튼 목사님은 결론을 내리셨는데, 70이레는 창조로부터 종말까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 자체가 역사이지 않느냐는 겁니다. 비역사적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보기에 이 논문제목이 목사님의 주장과 맞지 않다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말입니다.
* 이근호 목사 - 물론 그러한데, 그런데 그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어떤 개념을 잡을 때, 그 개념에 모든 것을 다 담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개념은 항상 빠져나가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 방청객5(오용익 목사) - 여기 교재 44페이지에 보면 강 교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는데, 즉 “이 논리에 의하면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렇다면 과연 성경에 대한 인간 혹은 개혁주의 성경학자들의 해석활동은 무가치한 것이며 동시 그것은 죄악 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이 학술논문 발표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는가? 또한 정말로 인간적 시간관 혹은 역사관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려는 노력이 죄악 된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근호 목사님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 이근호 목사 - 그것은 아까 제가 답변을 했는데...
* 방청객5(오용익 목사) - 김진수 교수님은 여기 교재 마지막에 보면,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철저한 본문주해의 과정 없이 이루어진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논문의 곳곳에 주관적이고 사변적인 추론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라고 하셨는데, 두 분의 교수님들이 모두 여기에 동의를 하시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하시려고 하면, 인간의 그 어떤 주장도 주관적이지 않고 사변적이지 않고 추론적이지 않은 것이 있을 때만 그것이 가능한 표현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해석을 함에 있어서 과연 그런 설정이 가능한지, 그 기준이나 근거가 무엇인지 좀 밝혀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나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예수님을 아는 그 지식 외의 다른 모든 것은 다 배설물이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말한 그 배설물 가운데는 지금까지 나왔던 그 모든 신학들이 다 포함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그 중에서 그 어떤 것이라고 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즉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서로 맛 닿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그것을 묻고 싶다는 겁니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고 또 한가지는 무엇인고 하니, 저는 아직도 그 구절이 너무나 어려운데,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뭐라고 하셨는고 하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과연 교수님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역사적으로 해석이 가능한지,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볼 때는 완전히 비역사적인데 말입니다.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요 8: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요 8: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 이근호 목사 - 목사가 목회를 하던, 또 신학자가 연구를 하던, 이 세상에서 무가치한 것은 없는데, 인간들에게서 그렇게 토해낼 것은 다 토해내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보고 “아하, 이런 것은 아니구나” 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러니 무가치한 것은 없고, 그냥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그리고 또 내년에 가서 “아, 지난 번 논문이 잘못되었어” 라고 하면서 또 드러내고, 그렇게 해서 평생동안 죽을 때까지, 즉 주님께서 우리를 죽이실 때까지 우리는 그 길로 간다는 겁니다. 우리가 알아서 죽음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말입니다. 그러니 무가치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 사회자(?) - 여기서 일단 논의를 중단했으면 좋겠는데, 왜냐하면 어느 정도 서로의 의견이 간파가 된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발제자도 물론 자기의 주관은 있지만 뭔가 수정을 좀 해야 되겠다는 느낌도 받았을 것이고 말입니다(ㅋㅋㅋ). 이제 다음 번 주제발표를 위해서 잠시동안 휴식시간을 가지겠습니다.
2010,03,09 오후 6시 40분에 마침.
아하, 이 3월에 웬 눈이, 이 눈도 ‘1이레’에서 나오는 것이겠죠?
한국개혁신학회 제 83차 정기학술발표회
?이 근호 목사의 논문?에 대한 논평
강규성 교수(한국 성서대 구약신학)
나는 구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로서 논문을 작성하고 다른 학자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드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성경의 의미를 좀더 명료하고 명확하게 밝혀 드러내야 하는데 오히려 성경보다 더 어렵고 난해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이다. 다른 하나는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이렇게 심오한 학문을 전개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나는 이 근호 목사의 심오한 철학적 사색과 신학적 의지가 담긴 ?다니엘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이란 논문 30페이지를 읽으면서 위 두 가지 질문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이근호 목사의 긴 논문의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첫째, 인간의 주체성에서 비롯된 70이레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왜곡이다. 둘째, 다니엘의 70이레는 묵시적 견지에서 비역사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셋째, 다니엘의 70이레는 하나님의 창조의 7일의 확장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70이레는 7이레와 62이레 1이레라는 세 개의 층으로 형성되어 묵시적 의미 층에서 볼 때 인류 전체역사를 대변한다.
이근호 목사의 논문은 두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나는 구약해석을 성경의 통전적(?) 관점에서 해석하려 한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의 견지에서 보는 좋은 해석적 입장이라고 본다. 다른 하나는 기독론적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이근호 목사의 논문은 상당히 아쉬운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아쉬운 점을 몇 가지 측면에서 논평하려고 한다.
1. 논문의 형식과 구성에 관하여
이근호 목사의 논문 형식과 구성은 두 측면에서 아쉬움을 가진다. 하나는 본 논문이 보편적 논문의 성격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몬트고메리(j. a. montgomery) 가 ?70이레에 대한 주석 역사는 구약의 무서운 늪지대?라고 말한 것처럼 이 논문의 주제는 상당한 논쟁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이 논문이 ?70이레?에 대한 학술적 논문으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이런 연구사 정리를 통한 장단점 평가를 평가 후 본 논문의 정당성을 입증해 나가야 했다. 물론 180~19페이지에서 ?70이레의 의미?에 대한 학자들의 입장을 서술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서술이지 이전 연구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입장에 대해서 ?이 중에 어떤 견해가 역사적으로 맞는가 하는 것을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고 단정하는 것은 이전 연구가들에 대한 결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하나는 인용과 출처에 관한 것이다. 논문의 인용과 출처는 각주를 통해서 표기해야 하며 또한 각주를 통해서 본문에서 다룰 수 없는 부족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토론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논문은 한국개혁주의신학회 논문의 각주 형식에 전혀 맞지 않으며 동시에 본문에 삽입된 출처 또한 일반적인 내주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2. 최근 자료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학술적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본 주제와 관련된 최근 연구 논문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논문에 사용된 참고 자료는 총 21개인데 이중에 실제로 이 주제와 관련된 논문 혹은 전문 연구서는 약 4개에 불과하다. 2009년 탄너(j. p. tanner)는 두 차례에 걸쳐 ?daniel's sevent-weeks orophecy messianic? : part 1?(bibliotheca sacra 166, no 661)과 ?is daniel's seventy-weeks prophecy messianic? : part 2?(bibliotheca sacra 166, no 663)란 제목으로 기독교 이전의 해석에서부터 최근까지 이 주제에 대한 연구사를 정리한다. 스펠리오플로스(e. b. speliopoulos)는 탄너의 연구를 요약하면서 70이레 해석을 위한 고찰되어야 할 주제들을 항목별로 논의하고 있다. 이런 연구들을 참고하고 소개해 주는 것 또한 논문 발표자가 하여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3. 해석학적인 측면에서
본 논문은 성격상 기본적으로 다니엘 9:24-27 혹은 다니엘 9장에 대한 주석적 연구가 필요한 논문이다. 뿐만 아니라 주석적 연구를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문법-역사적 해석이다 그러나 본 논문은 이런 기본적 입장을 취하지 않거나 혹은 거부한다. 필자가 70이레를 비역사적으로 취급한다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본문상 토론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서 언급이 있어야 했다. 기본적으로 ?솨부임 쉬브임?( ) 을 ?sevent weeks' 번역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출발해서 다니엘 9:24에 나타나는 6개의 부정사 구문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이미 이런 주석 연구는 필자가 언급한 최만수(2008)외 헤이네스(j. l. haynes, 2004)와 nac 시리즈 18권의 저자 밀러(s. r miller, 2001) 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필자의 비역사성 주장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적어도 이들과의 토론을 필요로 했다.
또한 해석학적 입장에서 필자가 70이레의 비역사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본문 주석을 통해 본문의 비역사성을 확보한 후 이것을 입증할 만한 본문적 증거들을 구약 혹은 신약에서 찾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논문은 이런 순서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해석학에서 주의를 요하는 본인의 신학적 전제의 투영, 즉 eisgesis가 강력하게 드러남에 아쉬움을 느낀다.
4. 논리성에 대하여
본 논문은 다니엘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을 위한 나름대로의 논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측면에서 그 논리성을 약하게 만드는 요소가 나타난다. 하나는 본 논문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문에 대한 주석적 연구에서 출발하지 않고 필자의 철학적 혹은 신학적 주장(?)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논리적 증거보다는 일방적 서술 혹은 서술적 강조 같은 느낌이 든다. 따라서 언급되는 성경본문들은 일차적으로 본문의 context에서 벗어난 증거본문으로 활용되는 느낌이 된다. 다른 하나는 비역사성을 주장하기 위해 선택한 주제어들과 내용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논리적 일관성을 약화시킨다.
또한 필자가 주장하는 인간과 성경해석에 대한 주장은 논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의문과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있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육으로 말씀을 해석할 자격도 권한도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인간들이 자기 시대에 느끼는 역사적 감각을 가지고 이 묵시적 해석을 바르게 연결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더 나아가 필자는 ?개혁주의 성경신학자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오류는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인간적 시간관에 준해서 이해해 주려고 노력한 점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역사관은 최종적 묵시 성취에 있어서 인간들의 이런 애씀이 죄악 된 것으로 가담된 채 이루어짐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논리에 의하면 한 가지 의문을 제기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렇다면 과연 성경에 대한 인간 혹은 개혁주의 성경학자들의 해석활동은 무가치한 것이며 동시 그것은 죄악 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이 학술논문 발표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는가? 또한 정말로 인간적 시간관 혹은 역사관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려는 노력이 죄악 된 것인가? 이런 견지에서 생길 수 있는 생각은 필자만이 묵시적 해석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에 대한 오해를 일으킬 요지를 남긴다.
또한 본 논문의 논리성을 약화시키는 요소는 논문 분량의 전략적 배치 문제이다. 논문은 총 30페이지인데 논문의 핵심인 70이레에 관한 실제적 분량은 8페이지에 불과하다. 70이레의 비역사성에 대한 주장을 하기 위한 예비주장이 너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많은 혼돈을 일으켜 논리적 추론을 따라가기 힘들게 만든다.
5. 논문의 내용에 대하여
본 논문의 내용에 대한 질문을 필자의 논문 순서를 따라서 하려고 한다. 첫째, 필자는 서론에서 ?남은자?를 ?드러나지 않은 남은 자?로 규정하고 유대공동체를 그 남은 자에서 제외시키면서 동시에 유대 공동체를 짐승에 의해 조정되는 공동체 종교집단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남은자? 속에는 유대인들이 포함될 수 없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또한 이런 주장들은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선교적 측면에서 볼 때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둘째, 필자는 ?영적 공동체(교회)라는 자부하는 단체들이 메시야 살해로 이어지는 영적 전쟁에 부정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말이다……. 유대 공동체로서 드러난 악마성은 전체 역사적 지평으로 확산된다?고 주장한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묻고 있다.
셋째, ? ?하나님의 이름?이란 기존의 이름들을 공격하는 전략적 이름이요 전술적 군사개념이다?는 주장을 출애굽기 15:3에 기록된 ?여호와는 용사이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는 말씀을 근거로 주장한다. 과연 이것을 토대로 보편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34:6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으로도 묘사되기 때문이다.
넷째, 바다와 땅의 질서가 노아언약으로 형성되었다는 주장과 무지개를 ?심판의 지속성?과 ?피?와 연결한 것은 부적절한 것 같다. 우선 전자는 본문적 증거가 부족하고 후자는 심판보다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성을 더 강조하기 때문이다. 또한 피는 창세기 9:1-7과 9:8-17의 단락의 관계 속에서 볼 때 필자가 너무 지나치게 유추한 해석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섯째, 필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마치 인간의 저주와 심판을 위한 도구로 규정한다. 이것은 언약의 이중성, 즉 축복과 저주에서 후자만을 부각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은혜를 축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성경에 기록된 언약들은 문맥적 상황을 검토할 때 저주적 성격보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강조된다.
여섯째, 필자는 다니엘이 70년 지나도 성전 건립을 위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성전회복이라는 것이 성전 재건립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고 성전이라는 개념이나 땅이라는 개념의 수정뿐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역사 자체에 대한 개념변화가 다니엘의 내부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에스라 1:1에서 언급하는 여호와께서 고레스를 통해서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은 무엇이며 동시에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성전을 재건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인가? 또한 학개 선지자가 성전건축에 대한 말씀선포는 그가 성전건축에 대한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인가?
일곱째, 필자는 70이레를 창조의 7일에서 그 이해의 출발점을 찾으며 동시에 70이레는 7이레+62이레+1이레라는 층의 개념으로 보면서 각 층의 역사적 사실과 묵시적 의미의 층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맨 위층인 1이레의 묵시적 관점에서 볼 때 아래 두 층은 묻혀 버리고 또한 이것은 동일하게 인류 전체 역사를 대변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1이레의 묵시적 관점에서 7이레와 62이레를 통합할 수 있다면 왜 본문은 굳이 세분하여 언급하는가? 또한 70이레를 인류를 대변하는 것으로 본다면 과연 ?비역사성?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뿐 아니라 만약 70이레를 창조의 7일과 연관해서 해석하며 비역사성을 주장한다면 창조의 7일도 비역사성으로 주장할 수 있지 않는가?
여덟째, 용어의 문제이다. 필자는 비역사성을 묵시와 동일시하며 그와 동시에 키워드에서는 묵시를 revelation으로 본다. revelation은 보편적으로 묵시보다는 계시로 번역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자체를 비역사성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든다.
한편의 논문을 작성한다는 것은 산고의 진통을 겪는 것과도 같은 경우가 있다. 그와 같은 소중한 논문을 읽고 논평을 해야 하는 논평자에게는 저자의 속마음까지 읽을 수 없어서 아쉬울 따름이다. 이토록 난해하고 어려운 주제를 선택하여 마치 한 편의 묵시를 읽는 듯한 심오한 철학 혹은 신학적 논문을 발표해 주신 이근호 목사님께 감사드리며 짧은 지식을 소유한 자의 논평이 이근호 목사의 수고를 충분하게 드러내지 못한 점이 있다면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하며 논평을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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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0-03-01 20:27
사람들이 70이레의 묵시적 해석을 대하면서 제일 의아해하는 바는, 7이레 다음에 62이레 다음에 1이레 순서로 역사가 진행된다는 상식을 거스린다는 것이다. 어떻게 7이레가 전 역사를 거칠게 되면 어떻게 1이레가 전 역사를 걸치게 되는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7인, 7나팔, 7대접을 보라. 그 심판을 단행하시는 주인공이 다름 아닌 '처음이요 나중이신 분'이시다. (계 1:8) 그 '처음이요 나중이신 인자'되시는 분이 다니엘에서는 1이레를 성취시키시는 인물이시다.(영원한 속죄를 달성하시는 분이시다. 단 9:24)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지상에서 심판의 대상이 되는 인간세계를 7이레로 표현하고 지상에서 그 지상에 대해 심판을 단행하시는 분이 1이레의 사건(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통해 70이레를 완성하신 차원에 돌입하신 분이다. 바로 이것이 묵시적 안목에서 전 성경을 보는 해석의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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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득영 10-03-01 20:44
'피' 맛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예수님을 모릅니다. 문자와 영이 다름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됩니다.
?이근호 목사의 논문?에 대한 논평
김진수 교수(백석대, 구약신학)
다니엘의 70이레는 구약 주해의 역사에서 ?최악의 늪지?로 알려진 부분이다. 발제자는 이처럼 어려운 내용을 대단히 이례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이해하기를 시도한다. 내용의 난해함으로 인해 발제자의 논지를 파악하는데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논평자가 이해한 선에서 논평하고자 한다.
논문의 서론에서 발제자는 포로후기 유대공동체를 모두 짐승의 현상으로 규정하고 이를 토대로 70이레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오류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이 유대 공동체의 회복을 예언한 선지자의 글들(호 1:10; 11:8-11; 암 9:11-15)과 포로후기 시대를 다루는 역사서(에스라-느헤미야, 에스더) 및 선지서(학개, 스가랴, 등)의 내용과 부합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서론의 형식 또한 이례적이다. 서론은 대개 논문에서 다루게 될 핵심 이슈에 대한 문제제기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절차와 방법이 간결하고도 명료하게 제시되는 장이다. 그런데 이 글은 이러한 논문의 기본원칙에서 벗어나 있다.
본론에서 발제자는 먼저 노아언약을 다룬다. 그는 무지개언약의 배후에 ?심판의 지속성?이 도사리고 있다고 하면서, 무지개 언약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피?라고 하는 새로운 지상의 조건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전제하에 발제자는 ?억울한 피?는 무지개언약을 무효로 만들게 되고, 그 결과 땅은 ?바다?의 공격대상이 된다고 주장한다. 발제자의 이런 주장은 아마도 다니엘 7장에 소개된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들?의 이해를 위한 준비인듯 하다. 그러나 무지개 언약이 ?피?를 조건으로 한다는 발제자의 견해는 특이하다. 사실 창세기 본문은 무지개 언약을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약속으로 소개하고 있다(창 9:8-17). 논평자가 아는 한 발제자의 견해는 해석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본론의 둘째 부분에서 발제자는 ?발생적 성전관과 주체?라는 매우 철학적인 주제를 다룬다. 여기서 발제자는 특이한 성전관을 소개한다. 그는 아무런 설명을 곁들이지 않은 채 70이레가 ?성전의 위상에서 나온 구조?라고 말하며(p7), ?전쟁하는 신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기념공간?이라고 한다. 나아가서 발제자는 자신의 ?발생적? 성전관을 소개한다. 그는 ?인간의 죄된 모습이 드러나는 만큼 성전의 의미가 드러난다?고 하며(p.9), 하나님은 ?사람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라고 하심으로써 성전의 가치를 부정하셨는데, 이런 부정을 통하여 성전의 긍정적 의미가 드러난다고 주장한다(p.9). 나아가서 발제자는 성전과 관련된 예의 부정과 긍정이 선지자의 몸을 통해 역사에 등장한다는 매우 생소한 견해를 제시한다(p.9). 이어서 발제자는 갑자기 ?새성전?을 이야기한다(p.10). 논지의 흐름에서 추론컨대 이 ?새성전?은 선지자의 몸(또는 인간의 몸)을 지칭하는 듯하다. 발제자는 인간은 자기주체성을 바꿀 수 없기에 새 성전을 지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은 ?주의 이름?에 반발하고 ?인간이름?을 지향하는 시간관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한다(p.10).
이런 발제자의 성전관은 매우 생소하다. 전통적으로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임마누엘)을 상징하며, 인간이 타락한 이래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예표하는 장소로 이해되었다<vos, biblical theology, 154-155; kaiser, toward an old testament theology, 119-121).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발제자는 성전의 부정을 통해 긍정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다소 철학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여기서 구약 본문의 의미에 대한 오해도 엿보인다. 가령 하나님이 ?사람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cf. 왕상 8:27)는 말은 성전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말일뿐이다. ?성전과 관련된 부정과 긍정이 선지자의 몸을 통해 역사에 등장한다.?(p.9)는 발제자의 견해 또한 모호하다.
본론의 셋째 부분에서 발제자는 ?다니엘의 위치?에 대해 논한다. 여기서 발제자는 다니엘이 자신의 시간구조를 가지고 하나님의 시간구조와 맞선 요나와 같다고 하면서 그를 ?성전의 운명과 더불어 같이 할 운명자?로 평가한다(p.11). 그런데 다니엘이 왜 요나에 비견되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나아가서 이 부분에는 모호한 진술들이 많다. 가령 발제자는 메를로 뽕티, 베르그송, 들뢰즈 등 철학자들의 이름들을 나열하면서 신체에 대해 이야기 한 후 ?신체는, 새로운 언어의 힘을 구사하는 중력장으로 행세한다. 파롤에서 랑그로의 전환이다. 스스로 역사 생성의 주체자 노릇을 자처하게 된다?라고 말한다(p.12). 여기서 ?신체?, ?언어의 힘?, ?랑그?와 ?빠롤?, ?역사생성?과 같은 개념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더군다나 선지자 다니엘의 위치를 논함에 있어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지 의아스럽다.
본론의 넷째 부분은 70년 포로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발제자는 다니엘이 육적인 인간이 아니었기에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그 결과 성전재건도 역사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추측한다. 이어서 그는 다니엘이 뒤늦게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귀환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그에게 ?역사 자체에 대한 개념변화?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p.13). 이처럼 발제자는 본문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추측에 근거한 주장을 펼친다. 이런 예가 다니엘서 2장에 대한 해석에서도 보인다. 발제자는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타난 신상을 역사와 동일시한다(p.17). 그리하여 그는 돌(=인자의 나라)이 신상을 무너뜨리는 것을 역사를 없애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해서 발제자는 느부갓네살의 꿈의 계시는 ?신상?과 ?인자의 나라?에 어떤 시간적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p.17). 논평자가 보기에 발제자는 이렇게 해서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의 근거를 확보하고자 하는 듯하다. 그러나 다니엘서 2장의 신상은 역사상에 등장하게 될 나라들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지 결코 역사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의 해석이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단 2:36-45). 그러므로 신상이 돌에 의해 부서졌다는 내용만을 가지고 시간성 내지는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논리상의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본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발제자는 70이레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여기서 발제자는 ?이레?란 원래 ?창조적 단위?이므로 7일이나 7년으로 분해할 성격이 아니라고 한다. 나아가서 발제자는 70이레가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지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말해주기 위한 ?시간적 형식?이라고 하며 70이레는 70년 포로기간과 보조를 맞추어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p22). 그러나 아쉽게도 그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goldinggay와 같은 학자는 70년 포로기간이나 70이레는 다같이 레위기 26장에 언급된 ?땅의 안식?이란 개념과 연결시킨다(cf. 대하 36:21).
발제자는 또한 충분한 설명 없이 62이레는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으며, 7이레와 1이레의 간격을 위해 설정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와 동시에 7이레와 1이레는 질적으로 다른 ?사건층?일뿐 기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p.22). 그러나 보수학계든 진보 학계든 이것은 모두 어떤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다만 이 기간을 문자적으로 보느냐(세대주의)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입장이 갈린다. 발제자는 이런 학자들과 진지한 대화의 노력 없이 그저 여러 견해들만 나열할 뿐 다른 설명을 주지 않는다. 더욱이 발제자는 이 문제를 면밀한 본문주해의 과정을 거쳐 다루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7이레?와 ?1이레?에 대한 발제자의 설명을 계속 들어보자. 그는 ?7이레?를 인류처음부터 망할 때까지의 전 역사를 뜻한다고 하며, 같은 선상에서 ?1이레? 또한 전인류역사를 커버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p.24). 여기서 논리적 모순이 발견된다. 앞에서 ?이레?는 역사와 무관한 개념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인류역사를 커버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여기서 다니엘서의 70이레를 비역사적 기념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한 일인가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사실 모든 주해가들은 70이레를 다 역사적으로 본다. 다만 진보진영에서는 마지막 ?1이레?를 주로 시리아 왕 antinochus epiphaned Ⅳ(175-164 bc) 와 연결시키고, 보수진영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연결시키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발제자는 이들 학자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본문에 나타난 역사적 정보들(성전의 중건, 기름부음 받은 자의 출현 등)에 대해서도 그 어떤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결론에서 발제자는 역사의 의미는 무너짐에 있다고 하면서 역사의 모든 긍정적 의미들을 부정하고, 나아가서 역사적으로 기울어진 성경해석을 단죄함으로써 글을 맺는다.
지금까지 발제자의 견해들을 하나씩 검토하여 보았다. 이제 전체적인 평을 함으로써 논평을 마치고자 한다. 우선 본 논문은 다니엘의 70이레를 둘러싼 해석상의 난점들을 고민하면서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노력의 하나라는 점이 언급되어야할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철저한 본문주해의 과정 없이 이루어진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논문의 곳곳에 주관적이고 사변적인 추론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논문의 구성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논문의 주제가 70이레의 해석에 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논문의 대부분이 70이레와는 동떨어진 문제들에 할애되었다. 논문의 서론뿐만 아니라 본론의 중반부까지 가서도 논자가 이 논문을 통하여 개진하고자 하는 방식이 아니다. 여기에 덧붙여 논문에 오타가 너무 많이 등장하고, 그 의미가 모호한 어휘나 표현, 문장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 또한 지적되어야 할 듯하다. 무엇보다도 논자의 주장이 지금까지의 신학적 및 해석적이 전통과 아무런 접촉점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역사에서 끊임없이 해석되고 가르쳐져 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전통과의 연결은 해석자를 여러 가지 오류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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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득영 10-03-01 20:58
그런데 논평을 하는 인간들은 달랑 그 논문만 하나 읽고 하나요? 상대방의 신학적 토대를 먼저 이해하고 평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은데, 하긴 아무리 그렇게 했더라도 자기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점촉점이 없으니 소용이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이 목사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분위기도 좀 살벌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저는 대구에서 한 줄 알았는데, 인천과 가까운 곳에서 했네요. 토요일이라서 조금은 시간을 낼 수 있었는데, 참으로 아쉽고도 죄송스럽습니다.
교수는 논문을 전할지라도, 전도자는 복음을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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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10-03-01 21:48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박사 교수가 되기 위해서 수백 수천 권의(?) 책을 보아도
주님이 허락하지 아니하면 생명나무에 갈 수 없습니다.
사사로이가 아니라 영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해도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합니다
비오는 지루한 하루, 드라마 제중원 보려고 인터넷을 끄려다가 위글을 읽고
갑자기 마음에 기쁨이 가득 밀려옵니다.
저 같은 별 볼일 없는 자에게 들을 귀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벌써 주일 복음이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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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0-03-02 06:09
제 원 논문 21페이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이 땅의 역사적 조건을 계시 이해의 바탕으로 삼는 것은, 신의 개입을 일종의 ?초기 조건?으로 생각한 이신론(理神論)적 전통에서 세계는 정확히 시계태엽의 이미지를 따라가며 파악하는 것과 같다." 즉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주장하는 소위 개혁주의라는 불신자들은, 일단 창조는 하나님이 하시되 나머지는 인간들의 역사적 성과로 계시를 이어나가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구원은 은혜로 받되 구원받고 난 뒤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간의 행함으로 가능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성화론자의 미신이 또다시 발작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는 자들의 신론인 이신론(신은 만들기만 하고 보존은 인간 손에 맡겨졌다)으로서 결코 예수님께서 부활해서 인간의 행위에 관여하지 않고 그냥 하늘나라에서 지켜보거나 방치를 하고 있다는 의식을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대로 강한 의지력으로 세상을 십자가 복음 중심으로 일하고 계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2)
소위 '역사적 해석법'으로 우상 만들기
2010-03-02 14:57:00 이름 : 이근호
사람이 역사(歷史)를 만들게 되면 그 역사를 만든 본인의 관점은 그 만들어진 역사 안에 있을까 아니면 역사 밖에 있을까?
역사 밖에 있다면 본인 자체가 역사에 초월해있는 그야말로 신적 존재가 되어 요지부동, 세월이 가도, 환경이 바뀌어도 달라짐이 없는 절대자로 군림한다. 반면에 역사 안에 있다고 한다면, 그 자신이 만들었다는 역사 속에 부분으로 섞여있기 때문에 '부분이 전체를 만들었다'는 거짓말을 자행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우리 가족은 전부 거짓말장이다"고 했을 때, 본인마저 거짓말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본인만 빼고 나머지 가족이 거짓말한다는 말인가?
본인만 뺀다면 자기만의 역사 따로 있고 자기 뻰 나머지 역사가 따로 생기기 때문에 결국 자기를 포함하고 있는 그 진정한 역사는 도저히 본인이 만들어 낼 수가 없게 되고 따라서 "나는 역사에 대해서 아는 바 없다"고 말해야 맞고, 반면에 본인이 포함해서 자기 가족이 거짓말장이들이라면, 그런 말은 한 그 본인의 주장도 스스로 "나는 방금 구라쳤습니다"고 고백하는 셈이 되어 자기 주장을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소위 개혁주의 신학을 한다는 자들이 성경을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해야한다고 주장을 한다. 이들은 구약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가 바로 그런 자기만의 역사만들기에서 야기된 대상이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예를 들면, 요나 선지자의 경우, 그는 선지자로 확실한 계시를 하나님에게 받았다. 쉽게 말해서 그는 충분히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완벽하고 해석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막상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고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계시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를 죽여주세요"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은혜로시다'는 속성과 선지자 본인의 자살 요구가 선지자 내에서는 모순없이 일치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즉 선지자의 계시수용은 그대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 내부에 주체적으로 수용형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 형식에 의해서 수용된 계시내용이 실제로 하나님이 실시한 계시 적용이 다르기 때문에 그는 그 모순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지워버릴려고 한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가지고 전혀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른 본인만의 절대적인 해석을 따로 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가 없었고 자신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해야 했는데 그 해석력이 바로 오류임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역사를 초월하는 묵시의 자리에 인간이 끼어들지 못하고 오로지 하나님 자신만이 절대적 안목을 독점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요나를 왜 자기 계시 작업에 참여 시키시는가? 그것은 역사의 진정한 진행에 있어 요나가 같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어떤 인간도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서 역사를 초월적으로 볼 입장에 못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가 계시를 받는 자리는 어디인가? 그곳은 바로 역사 속에 들어오신 예수님의 죽으심의 자리이다. 즉 죄인으로서 역사 안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아담의 길고 긴 시간 죄의 체인 속에는 죄만이 있다. 그 죄가 무슨 죄인가 하는 것은 역사 속에 합류하신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어떠한 죄로 인하여 살해당했는가, 그 살해의 자리로서만 근거를 갖고 해석된다.
바로 바리새인들이나 사울(사도 이전의 사울) '다른 신'을 근거로 예수님의 신되심을 거부하고 제거하셨다. 그렇다면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울은 구약의 계시를 어떤 관점에서 해석했기에 예수님이 알고 계시는 참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관을 내비치게 되었는가?
그들은 인간의 본성 안에 담겨 있는 시간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충분히 이해하고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서 계시를 내려주셨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주장은, 말씀의 해석과 이해성만큼은 죄로 물들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죄가 바로 인간을 둘러싸지만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기본 자질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신학이라는 학문을 허락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학과 성경이해를 할 수 있게 하신 것은 그 지식으로 자신들을 구원해 내기 위함이라는 것이 바리새인이나 사울이나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 자들의 생각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모든 것이 거짓되다"는 로마서 3:4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만의 의는 자신의 말씀 이해력에 준해서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이해력에 의해서 그들은 자신을 빼고서 역사를 구상한다. 그 상된 역사는 오로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진행된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진정한 해석은 예수님이 죽으신 그 십자가 현장에서 피어난다. 즉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맞아죽으신 분으로 성경이 해석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또 죽이는 행위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성경해석을 하게 되면 자기 의로움 위주로 그 성경해석이 역사적 가치를 띠로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님이 오시게 되면 바로 그런 의식이 예수님을 죽게 하신 죄임을 통고해주신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졸지에 불평하면서 죽게해달라는 요나가 된다. 그리고 바리새인이 되고 그리고 사울이 된다. 즉 죽어 마땅한 저주받을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로서 본인들의 모든 생각들이 본인 중심의 역사를 새롭게 펼쳐내는 본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도 안다. 따라서 뭘해도 예수님을 죽게 만든 죄의 본색들이 그 역사의 길이만큼 펼쳐지는 것이다.
바로 이런 현상이, 자기와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하는 현상이다. 자기 교회 사랑, 자기 가족 사랑, 자기 종교 사랑, 자기 목숨 사랑, 자신의 과거와 남은 여생에 대한 집요한 애정과 집착, 이 모든 것이 역사적 형식으로 상상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자기를 위하여'는 서술이 붙어있는 채로 나오는 '우상숭배의 본질'이다. 곧 탐심이 우상숭배였던 것이다.(골 3:5)
복음을 듣는 척하다가 복음을 버린 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왜 그럴까? 그들은 역사 밖에서 자기만의 역사를 초월적으로 조정하려는 악마의 얼굴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본인이 본인에게 우상이 되고 경배의 대상이 되고 신이 된다. 느부갓네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이 모아져서 자신의 영광을 위한 금신상으로 존재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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