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사명과 비전
2010년 1월 2일 이근호 목사
본문 말씀 : 욥 1: 8- 9
(욥 1:8, 개정)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욥 1:9, 개정)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 차이나는 사명
마치 어두움 속에서 유령을 쫓듯이, 정신없이 본인의 자리에서 점점 멀어지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그는 욥입니다. 그는 지난날의 그의 자리를 거의 다 잃어버렸습니다. 자식이나 아내나 재산도 다 떨어져나갔습니다. 그동안 “이것이 곧 나의 전부다”라고 이웃에게 알릴만한 것들은 다 철거되었습니다.
욥에게 자꾸만 쌓여가는 것은 의문점뿐입니다. 그리고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육체의 고난입니다. 그는 사람이 능히 알 수 없는 영적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의 사명이나 비전 만들기란 그 출발점이 일단 자신이 확보해 놓은 자리에서부터 시작이 되기 마련입니다. 즉 ‘나의 자리’의 가치를 잃기는커녕 도리어 사명을 감당했을 때 주어지는 반대급부를 기대하면서 자신의 위치가 크게 빛내고 자신의 미래의 자리가 지금보다 훨씬 큰 자리가 되리라는 기대를 가질 때만 비전다운 비전, 꿈다운 꿈이라고 여기고 행동에 나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사명과 꿈은 보통 인간들이 짐작하고 있는 그런 사명과 꿈과 다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을 욥 곁에 포진 시키므로서 일반적인 인간들의 사명과 꿈에 큰 문제점이 있음을 고발하십니다. 즉 욥에게 들이닥친 사명과 꿈은 그만큼 예상 밖이라는 말입니다. 욥은 그저 당하기만 합니다. 심지어 그전까지 누가 봐도 ‘축복이라고 간주되는 그 자리’마저 허물어뜨리는 무서운 힘으로 달려드는 그런 사명이요 꿈입니다. 심지어 악마마저 개입된 채 진행되는 사명입니다.
욥은 결코 본인이 본인을 흔들어댄 것이 아닙니다. 이참에 고결한 순교자로 거듭 태어나야 나중에 축복을 듬뿍 받을 수 있다는 노림도 없습니다. 자발적인 헌신과 희생으로 타인의 모범자로 굳히는 기회로 삼겠다는 의도도 없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주시는 분이요 일방적으로 거두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등 비난 받을 필요가 없고 도리어 찬송을 받으실 분이라는 겁니다.(욥 1:21)
하지만 지금 욥은 자신이 지닌 신앙의 깊이조차 자신이 다 알지 못합니다. 그에게 들이닥친 운명은 그의 수준에서 도저히 설명이 되지를 못합니다. 욥의 세 친구가 욥에게 찾아왔을 때, 욥은 자신에게 닥친 이 낯선 경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난처해합니다. 뿐만 아니라 욥이 당한 고난을 코앞에서 보면서도 그 원인을 재대로 말해주지 못하는 욥의 세 친구 입장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내려주시는 상황들은 그 전에 인간이 익히 안다고 장담하는 그런 원리와 원칙으로 기계적으로 맞아떨어지는 상황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에 입각해서 지금의 상황에 정답을 매기려는 버릇은 무지한 욥의 세 친구의 무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만능 열쇠 같은 것을 소지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마저 자신이 확보해놓은 범위 내에서만 일하셔서 무슨 하나님의 일이든 속까지 휑하니 꿰뚫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 자리를 늘 노리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주인이 몽둥이를 드는 법이지, 결코 몽둥이가 주인을 드는 법이 아닙니다.(이사야 10:15)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가 다 포착할 수 없는 상황을 일으켜서 변동을 이끌어내십니다. 그래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은 더 이상 자신에게 유리한 식으로 사명이나 꿈을 끌어당길 수가 없게 됩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이기주의를 위하여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나 비전’을 운운할 수 없게 됩니다.
즉 ‘나를 위한 하나님’에서 ‘하나님의 본심을 나타내는 현장인’으로서의 ‘나’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 하나님께서 꿈과 사명주시는 이유입니다. 그 과정과 절차를 통해, 우리 자신이 예전에 미처 몰랐던 숨어있었던 이기심과 내부에서 끊임없이 생산되어온 자존심과 탐욕을 외부로 털어놓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조금도 차질 없이 진행됩니다. 따라서 ‘나의 사명이나 나의 꿈’ 아니라 실은 ‘하나님의 사명과 꿈’에 성도가 꼼짝달싹 못할 지경으로 끌려들어가 있는 셈이 됩니다.
2. 하늘나라 내기
그렇다면 그토록 욥을 당황스럽고 난처하게 만든 ‘욥 자리 흔들기’는 외부의 어떤 계획 때문에 들이닥친 것일까요? 그것은 놀랍게도 ‘하늘나라의 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욥을 놓고서 사단과 내기를 하신 것입니다. 마치 인간은 장기판의 알처럼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세상만사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게임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게임의 률도 하나님 스스로 정하신 률입니다. 사단이 먼저 하나님께서 내기를 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단에게 내기를 거신 것입니다. 사단은 단지 하나님의 게임에 말려든 것뿐입니다. 사단도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게임에 참여당한 겁니다. 이 와중에서 사단이 갖고 있는 의식이 지상에서 욥을 비난하는 욥의 친구들과 얼마나 동일한지 우리도 욥의 고난을 보면서 더불어 알아야 할 점입니다.
사단은 내기에 자신만만합니다. 그는 인간을 압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취지로 하나님에게 반대 의견을 내놓게 됩니다. “욥이 아무런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다 자신의 욕구에 준해서 건질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지금 있는 것보다 더 얻기 위해서도 하나님을 찾고, 잃었던 것을 원상복귀하고 싶어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기대를 걸면서 하나님을 섬깁니다”는 주장을 늘어놓습니다.
3. 하나님의 의도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단의 생각을 거절하십니다. 욥에게 무슨 기대할 것이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도 자신만만해 하십니다. 즉 “욥만은 그런 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로지 ‘욥’에게만 주목하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즉 욥과 다른 주변 사람들을 차별화 시킵니다. 이러한 차별화는 곧 욥으로 하여금 그 욥의 시대의 유일한 계시전달자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꿈을 주시면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이 되고 너를 저주하는 자가 저주를 받는다”는 기준점을 사용하시는 것과 같습니다.(창세기 12:3)
복과 저주의 기준점이 되는 지명과 선택은 지명자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명하시는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 조치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자진해서 그 역할을 맡겠다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자신이 먼저 사명이나 꿈을 제안했고 차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결정을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의 운명은 아브라함 손수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사단이 내기할 동안에 욥은 영문도 모르는 채 그저 그의 일상의 생활에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로서 욥의 일생은 하늘의 구조를 땅에 떨어진 바가 됩니다. 즉 땅은 이제 욥을 통해서 그들의 중심점이 수정받게 됩니다. 개인에서 욥으로 말입니다. 욥을 통해 중심점이 새로이 발생하면 자연적으로 그 주변의 자리는 중심점과는 어떤 식으로도 연계되게 되어 있습니다. 좋든 싫든 “너는 욥에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을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받게 되고 그 반응과 태도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의 대상으로 규정되고 맙니다.
이는 마치 신약 때에,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를 십자가 죽게 하시고 부활해내심으로서 더 이상 예외 없이 온 세상과 오고 오는 세상 전부가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나는 하나님과 상관없다”는 식으로 방치되지 않게 하시는 조치와 같습니다.(사도행전 17:30-31) 불교신자든, 종교가 없는 자든, 갓난아이든, 복음 이전에 사람들이든, 누구든지 이제는 예수님이 행하실 마지막 심판과 엮이게 되었습니다. 이 구조를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핑계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운명 안에 온 우주가 다 끌려들어가 있는 것처럼, 욥을 아는 모든 자들은 욥의 운명에 본의 아니게 끌려들어 가 있습니다.
욥에게 있어 욥이 주체가 되고 사명과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사명과 꿈이, 곧 그에게 덮쳐진 하늘의 구조가 욥을 끌고 다니면서 하나님 자신의 포부와 꿈을 이루어나가시게 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바는, 바로 인간들이 평소에 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이 꿈이 실현되는 과정을 통해서 몽땅 다 토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의 대상인 동시에 또한 인간의 본래 모습을 폭로해야 될 속성도 함께 지닌 자가 됩니다. 그는 무척 억울해합니다. 기존에 그가 알던 신앙인의 원칙으로서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식으로 고난이 들이닥친 것입니다. 자기에게 찾아든 친구들에게 욥은 무어라 자신의 처지에 대해 납득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욥을 보고, 친구들은 자신들의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감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욥의 교만을 탓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서 인간들이 기껏 끄집어 내어놓을 수 있는 신학을 다 튀어납니다.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면 고난은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아이디어가 대중을 이룹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러한 화려한 신학의 토론장에서도 여전히 사단이 장담한 ‘인간평’은 유효합니다. 즉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은 없다!”는 원칙 말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고상하고 싶은 신학을 나열해도 그 깊숙한 근성은 “뭔가 노리는 바가 있기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고난이 직접 찾아온 욥에게만은 예외입니다. 욥은 그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과 흥정할 처지나 입장도 못됩니다. 그는 그저 당하는 대로 당할 뿐입니다. 그야말로 이유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난의 강도는 더욱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욥은 예전에 자신도 미처 몰랐던 인간의 보편적 원천세계가 외부로 튀어나오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욥의 친구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라도 충분히 비난할 만큼 배도적인 모습까지 보이게 됩니다.
4. 욥이 고난 받아야 될 이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찾아내지 못한 원인 때문에 욥은 고난을 받고 있는 겁니다. 욥이 하나님에게 불평하는 것은, 왜 그 진실을 아는데 “하필이면 나입니까?”하는 점입니다. 이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욥에게 내왕하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사람들이 경작하지도 않는 땅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욥 38:26-27)
정답은 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욥에게 고난이 내리도록 지정한 것도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그리고 욥으로 고난 받게 한 것도 하나님 마음대로 하면 나중에 욥이 전보다 두 배나 축복을 받은 것도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사명 완수를 빌미로 해서 축복을 받아낼 꼼수를 미리 쓸 처지가 못 된다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정답은 이미 초반에 욥이 언급한 바 된 그 정답입니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고난 후에 욥은 아닙니다. 진정한 진리는 자신이 소유하기에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진리가 자신을 소유하여 움직이게 되어있고 자신의 본 모습은 그저 그 진리를 실제로 실행에 나서시는 하나님 앞에서 재나 뒤집어쓰고 입을 막을 뿐인 무지한 자라는 것을 말입니다.(욥 42:1-6)
장래의 축복이 탐이 나서 지금 고난을 자처하는 것은 이것조차 사단이 말한 ‘이유 있는 하나님 섬김’에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단지 우리가 욥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욥이 선택된 자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아는 그 누구나 건널 수 없는 고난의 시련을 겪어서 타인에게 축복에 주는 분으로서 오신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욥의 일생을 따라 재현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욥이 장차 오실 메시아의 운명을 미리 재현해내었다는 것도 합당한 말이 될 것입니다. 이로서 ‘욥의 인내’도 맞는 말이요(야고보서 5;11) ‘욥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인내’도 맞는 말이 됩니다.(베드로전서 1:10-11) 이처럼 성도는 오늘날도,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양면을 다 보여주므로 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중심인물로 움직이게 됩니다. 마치 구약의 성도들이 오실 예수님의 면면을 보여준 것이 그들의 사명이요 꿈이라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가야 할 인생길은 이미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과정을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재현하게 하시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잡지 'PREACHING'(프리칭)이라는 잡지에 실린 설교(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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