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찢으라
2021년 11월 10일 본문 말씀: 요엘 2:12-14
(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2:14)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하나님께서 생각해 두신 현실은 인간의 마음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이란 바깥 외부 세계에서 구성하려고 합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바깥 자연 세계의 무수한 변화를 좁혀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기본적인 원리를 따내고 그것도 하나의 통합 원리를 정하려고 했습니다.
만물의 창조원리만 안다면 인간들의 자신의 삶의 형편을 인간들의 뜻대로 조정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겁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과학’입니다. 하지만 이 과학작업에는 ‘금식’이나 ‘마음찢기’가 들어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로 통합한 만물의 원칙을 얻고 싶은 것은 그만큼 자신의 마음을 멀쩡하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진정한 비밀은 인간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금식과 ‘마음찢기’는 그 인간이 얼마나 많은 재산이나 권력을 얻었는가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복받기에 적합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인간 마음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지시는 특정 개인을 지목하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를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모든 인간의 마음이 모두 동일한 형편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 같은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금식과 마음 찢기에 예외로 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런 없다는 말입니다.
요엘선지자의 말씀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못 본척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지시에 따라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이스라엘 멸망이었습니다. 그들의 금식과 그들의 마음찢기에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그것은 자신에게 아무런 탈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궁극적으로 자기 마음의 정체를 알 생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에게 저주스러운 일이 안 일어나기만 원했던 겁니다. 과연 인간은 저주 안 받을 권한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날은 인간들이 요청해서 주어지는 최후의 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간들의 최후의 날은 결정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금식과 마음찢음은 막연하게 좋게 개선되려는 시도로서 하면 아니되고 우선 왜 자신들의 마음이 복 대신 저주받아 마땅한가부터 먼저 알아야 하는 겁니다. 어차피 ‘여호와의 날’이라는 날은 구원의 날이 아니라 파멸이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애초부터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한 자로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람이 이 땅에 출생했다는 것은 인간 입장에서 오지게 재수없는 일이 되는 겁니다. 아담의 마음을 그대로 물러받아야 될 처지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담, 즉 ‘흙’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름을 지어주셨기에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힘과 노력과 지혜로 바뀌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뀌게 해보자’라는 아이디어’가 악마적 태도에 입각해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금식과 마음찢기를 시도해보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금식과 마음찢기의 달인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다고 나무라기까지 합니다.(마 9:14)
또한 누가복음 18:12에서는 바리새인이 자신의 금식을 자랑하기까지 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이는 그들이 여전히 자기 마음에 희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든 시도는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약 완성에 있었서 방향은 인간의 시도와 정반대 방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반대방향으로 말씀을 완성하십니다. 예를 들면, 호세아 12:3-4에서, 야곱은 하나님에게 다음과 같은 행동을 보였습니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기에서 야곱은 하나님에게 이기기를 시도했지만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지기를 시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죄악의 자리, 곧 ‘아담의 자리’에 하나님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야곱이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야곱의 입장에서 ‘야곱→이스라엘’이 되었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야곱’된 겁니다.
이스라엘은 요한복음 1:51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완성하실 자신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따라서 멸망의 날인 ‘여호와의 날’을 기준으로 봤을 때, 제대로 된 금식과 마음찢음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복의 근거가 마련되고 제사를 통한 관계 정상화의 토대가 마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6장에서, 자신의 최후의 만찬을 금식 의미의 성취차원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자신이 선택한 제자들이 ‘아담의 아름 계열’이 아니라 ‘주의 이름 계열’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아담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뉘어주십니다. 바로 이 희생의 마음이 곧 ‘마음이 찢어짐’이었습니다. 식사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기도하시는데 여기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갑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마음 찢기’ 기도는 예수님 홀로 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기도시간에 대조적으로 잠자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대조를 통해서 나중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게 되면, 새로운 주님의 마음이 그들 제자들 속에 들어온 바가 되는 겁니다. 마음의 단절, 이는 더는 인간이 자신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가질 필요가 없음을 말합니다.
이제 주님의 마음으로만 살면됩니다.(고전 2: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당부하시는데, 그것은 그 당사자를 산 채를 낚는다는 것이 아니라 죽어버리고 해 놓고서는 낚는다는 의미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눅 5:8) 그래야 그들이 자기 잘 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 곧 불신자의 길임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가 탈없이 인생 살겠다는 음흉한 생각이 주님의 마음찢음 앞에서 다 들통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요엘 2장 12-14절(마음을 찢으라)2111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2장 12-14절입니다.
요엘 2:12-14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방금 이야기한 요엘이 부탁한 대상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결과적으로 망했다는 것, 그냥 망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을 죽이는 그 짓을 일치된 마음으로 하면서 망했다는 것, 그 말은 요엘서의 오늘 본문의 이 지시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율법적인 성격을 가지고 제시된 겁니다.
하라, 라고 하셨거든요. 오늘 본문에 금식하고 애통하고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지시와 명령을 내린 겁니다. 그러면 그 지시와 명령을 받은 대상자가 우리가 알다시피 신약에 와서 실패로 끝나는 거예요. 망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과 그리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멸망은 양쪽 다 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가 이 요엘의 말씀을 한번 도전해 볼만한 그러한 가능성이 있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돼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을 필두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일에 실패를 했다는 것은, 우리는 보나 마나 땡 탈락이에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민족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접해서 가까이에서 먼저 받은 사람 입장에서 일종의 선배격이에요. 신앙의 선배격, 종교생활의 선배격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따라서 14절의 말씀처럼 마음과 뜻을 돌이킬 경우에는 복이 오는데 그들이 마음과 뜻을 돌이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당연히 복이 안 와야 되겠이요.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복이 오지 않는다는 말은 오늘날 성경을 보는 우리에게도 당연히 복이 안 오는 것이 마땅합니다. 오지 말아야 돼요. 그리고 소제와 전제 이 제사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야기하는데 이 바른 관계라 하는 것은 제사의 제일 마지막 제사 화목제를 통해서 구현이 돼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제사, 전제나 소제 뿐만 아니고 화목제 제사를 드릴 자격조차 우리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 보면서 이제라도 우리는 우리 위치파악 해야 돼요. 우리 자리가 어디냐,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보다도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그걸 제대로 봐야 됩니다.
여기에 혹시 복이 올 줄 아느냐, 하는 말은 이미 하나님께서는 복을 조건 없이 주는 것이 아니고 조건에 맞아야, 받을만한 조건이 주어져야 복이 온다는 것은 분명히 명시되어 있거든요.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복이 오지 않는 상태가 뭐냐? 그게 바로 저주고 그런 상태가 뭐냐? 그게 바로 지옥이지요. 이야기 굉장히 간단합니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복이 오는 것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복이 오지 않는 세계에,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재수 더럽게 없는 일이에요. 가장 재수 없는 것은 이 땅에 우리가 태어났다는 그 자체에 있어요. 태어난 그 자체가 재수가 없어요.
그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잘 몰랐어요. 잘 몰라서 11절에 보면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여호와의 날을 감당할 위인은 이 땅에 없다. 그렇게 분명히 되어 있어요.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이냐? 그건 뭐 물으면 답변은 간단해요. 우리들 최후의 날이지요. 과연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재수 진짜 더럽게 없다는 것의 마지막 현장은 여호와께서 들이닥치면 그때 ‘아, 재수 없는 것 맞구나. 오지게 재수 없다.’ 재수 없어도 오지게 재수 없어요. 참으로 재수 없어요.
이게 지금 인간의 형편입니다. 복 받을 조건도 안되고,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고, 태어나기는 태어나서 오지게 재수 없도록 태어났고, 태어났는데 보니까 복 못 받는 저주의 대상, 이런 입장인 것을 우리 선배격인 이스라엘이 대표해서 먼저 보여준다는 것이 고맙지요.
CRPS(complex regional pain syndrome)라는 병이 있어요.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이라는 병인데 교통사고가 났다든지 다치고 난 뒤에 이상스럽게 신경계가 깨져서 어떤 특정 부위, 팔이나 다리나 이런 부위가 굉장히 아픈데 아픈 정도가 최고의 통증, 인간이 겪는 병중에서 최고레벨에 속한 것이 CRPS라는 이 병의 통증이에요.
최고의 통증이 50이라면 이 CRPS가 50 찍었어요. 참고로 치통은 얼마냐? 치통은 20 정도입니다. 여성이 아기를 낳는다. 그것은 한 40 정도. 이것은 50이에요. 악, 소리도 안 날 정도로 아파요. 약은 있느냐? 약은 있는데 마약이에요. 마약으로 하는 거예요. 일도 못 하고 아무것도 못 해요. 아파도 너무 아파요. 혼미할 정도로 아프니까요. 정신이 나갈 정도로 아파요.
이럴 때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재수 오지게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은 그야말로 지옥의 무게인데요. 어떤 위로할 말이 없습니다. 이 통증이란 게. 이러한 통증, 이러한 극한의 병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에게 당했던 그것, 로마 군인이 사정없이 다 죽였을 때 그들이 하나의 목숨을 끊는 게 아픈 게 아니에요. 로마가 이스라엘 멸망할 때.
그들은 뭘 끊었느냐 하면, 그동안 아빠와 엄마, 남편과 아내, 형제와 형제 사이의 끈끈한, 평생토록 같이 지냈던 그 인간적인 정, 사랑, 애정, 애틋함, 서로 보듬어줬던 그 우애, 그런 것을 칼로서 다 끊어버린 거예요. 그냥 육신의 근육을 핏줄을 끊는 그 정도는 안 아프지요. 차라리 그게 아플 것 같으면 자살을 하지요.
자살보다 더 아픈 게 뭐냐 하면, 그동안 공들였던 정들었던 그러한 자식이나 가족이 무참하게 적들에 의해서, 정말 화가 날 정도로 밉고 미운 증오하는 적들에 의해서 우리가 죽어버리는 그 박탈감과 패배감, 차라리 거기에 비해서 자살이라 하는 것은 호강이지요. 그것은 여유만만한 겁니다. 자살할 여유도 없이 쳐들어와서 다 죽여버렸어요.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차라리 그때 임신 안 한 여자가 더 행복하다. 왜? 임신한 채 죽여버리면 자기는 죽는 것 괜찮은데 이 배 안의 애는 무슨 죄가 있습니까? 어미 잘못 만나서 태어나지 못한 채 그 차가운 칼날에 그냥 배 안에 있어서 같이 살해당하는 그러한 처참함, 그 처참한 운명을 당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한테 뭐라고 원망했을까요, 하소연했을까요?
“도대체 우리가 아무리 죄짓는다 해도 도대체 이럴 정도로 죄를 지은 것 맞습니까? 이렇게 짓밟아야 하나님이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할 정도로 “이렇게 짓밟혀야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그 연유, 이유에 대해서 모르겠습니다.” 하고 아마 하소연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요엘의 말씀을 주시고 이 요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 멸망시킬 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겁니다. 너희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은 얼추 안다고 하는데 정작 지옥과 연결되어 있는 네 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고 언급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찢으라고 하는 겁니다. 금식하라는 거예요.
금식과 마음 찢으라, 하는 것은 네가 그동안 하나님께 했던 모든 종교적 의미, 그 의미가 형식에 불과하고 전혀 마음으로까지, 마음을 오히려 감춘다 할까요, 그것을 따로 따돌리는 방식으로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제사했고 형식적으로 금식했던 겁니다.
왜? 인간은 뭐든지 주의 말씀을 형식에 국한해서 형식적으로 하는 그것이 한계가 된 이유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은 자기에게 자기 자신이 탈 없이 지내고 싶은 그런 의도가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생각 안 하고 어쨌든, 어쨌든 내 인생에 탈이 없었으면, 무탈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에요.
그것은 바로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과 성경이 말씀하는 현실이 불일치하기에 그렇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 그 현실의 문제점은 인간의 마음 그 자체에 있다고 보시고 성경이 말하는 현실은 뭐냐 하면, 외부에 있는 풍경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이 세상 운영하는 원리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의 마음과 연결된 채 원리가 작동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는 복 받아야 돼, 내 마음은 건드리지 마세요, 제 마음은 아무 이상 없어요, 돈이 없어서 문제지 내 마음은 문제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그게 바로 네가 현실을 잘못 보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서양에서 13세기부터, 1200년대부터 연금술이라는 것이 발달했어요. 12세기, 13세기, 14세기, 15세기까지 죽 연금술이 발달했는데 연금술이라는 것이 뭐냐? 금속을 어떻게 조작을 하게 되면 다른 금속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당시에 금이 귀하니까 다른 금속 색깔 비슷한 것으로 해서 금을 한번 만들어볼까, 그래서 연금(鍊金), 금속을 연단시키는 그러한 기술을 신비한 기술을 연구를 많이 했어요.
만물이라 하는 것은 물과 불과 공기 흙, 이 네 가지 원소로 되어 있는데 그 네 가지 원소에 대해서 아무리 연구해도 금이 안 나오니까 이것은 제5의 원소가 필요하다. 그 제5의 원소가 뭐냐 하면, ‘현자의 돌’ 아주 지혜로운 자의 어떤 돌이 있어서 그것만 알면 금속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 라는 생각이 서양도 그렇고 동양에서는 4천 년 전부터 그것 연구했어요. 동양철학에 보면 그게 나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만물을 한꺼번에 아는 원리, 만물의 창조원리, 또는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의 정신, 이걸 인간들은 구체화시키고 형상화시켜서 지식으로 빼내기를 원했던 거예요. 오늘날 이게 뭐냐? 두 자로 간단히 해서 이게 과학입니다. science, 과학이에요. 과학의 특징은 금식이 없고요, 과학의 특징은 마음 찢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쨌든저쨌든간에 나는 무탈해야 되니까, 내 인생은 아무 탈이 없어야 되니까, 그것 하나 목적으로 지식에 지식 추가적인 지식을 계속 추구하는 거예요. 오늘날의 과학이 있겠지만 옛날에도 나름대로 과학이 있었어요. 아까 말한 연금술 같은 것이 있었어요. 제5원소가 발견되기를 원한다 그 말이에요.
그런 원리를 어디서 발견하느냐? 구체적으로 형상화 시켜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그 눈에 보이는 것들을 어떤 지식을 가미하면 그것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을까, 그것 생각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자기 몸이 아프다. 그러면 신에게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면 이 물에 뭔가 성령의 능력이 임해서 생수의 물이 되어서 팔아먹으면 되잖아요. 이 초석같이. 요단강 물이라든지, 안수한 물로 병이 낫는다든지. 그게 뭐냐? 자기 마음 찢기, 자기 마음과 전혀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이라 하는 것은 지옥의 하수구에요. 마음의 세계가 인간들이 눈으로 보는 세계보다 더 깊고 더 넓고 심지어 이게 지옥까지 연결되어 있어요. 지옥은 보이지 않지만 그 하수구가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 풍, 하고 나온다 그 말이지요.
야고보서에서 인간의 마음을 지옥의 불이라 했어요. 혀, 이게 지옥에서 나오는 불이라는 거예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약 3:6) 원래 옛날 신화의 키메라가 혀에서 불이 나와요. 혀의 불로서 사람을 태우는데 지옥 불로 태운다 해서 야고보서에서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말로서 그 사람을 지옥에 보낸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과학, science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자연의 질서도 아니고 생물학, 물리학, 화학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진짜 진짜 현실은요, 인간의 마음과 관련되어 있어요. 지옥은 어디 있느냐? 자기 마음과 관련되어 있어요. 인간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것은 인간이 기계기 때문에 그래요. 기계.
인간이 무기물이거든요. 죽으면 흙이 되잖아요. 흙이 뭐가 조합이 잘못돼서 아파요. 하지만 마음은 아프지도 않고 쌩쌩해요. 그러니까 이 불일치 때문에 더 미치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 마음의 문제가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꾸 외부, 바깥 형편이 좋아지게 되면 살만하다, 나 복 받았다, 이러고 싶어하는데 이 가을철에 부르는 노래 중에서 이런 것이 있어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이런 노래 있어요.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 “시월의 마지막 밤은~” 이렇게 나오는데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이건 특히 직업이 없는 백수들은 미치는 거예요. 자기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웬 가을은 왜 자꾸 돌아오는 거예요? 낙엽은 자꾸 떨어지고. 지난가을에도 이 모양, 올가을에도 이 모양,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꿈은 줬지만 내년 가을 되면 또 돌아와요. 또 단풍 든다고요. 계절은 반복하니까.
인간들의 딜레마가 뭐냐? 뭘 모르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너희는 갇혀 있다는 것을 몰라요. 지옥에 갇혀 있었던 겁니다. 지옥에! 저주에 갇혀 있었던 겁니다. 어느 상태, 상황에 갇혀 있는 거예요. 우리 조상 때문에. 우리 아담 조상 때문에 태어난 족족 갇혀 있는 상태로 그 안에, 계절 안에서 맴돌고 있어요. 가을, 겨울, 그 계절 안에서. 인간은 아무리 탈출해도 계절 밖으로 못 나갑니다.
몰라, 공전 안 하는 목성이나 태양에 가면 나을까, 지구에서는 인간에게 돌아오는 계절을 피할 수가 없어요. 이 계절, 시간에 갇혀 있다는 이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갇혀 있으니까 인간들이 그 갇혀 있다는 답답함을 알고 이 세상에서 이 일 하다 저 일 하다, 직업도 바꿔보고 사업체도 바꿔보고 하잖아요. 백날 바꿔봐야 그것은 지옥의 형태 바뀐 것뿐이에요. 어딜 가도 지옥이에요.
계절은 자꾸 오는데 아무 할 일도 없으면 힘들지요.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자꾸 일을 해요. 자꾸 모든 것을 잊고 그냥 무작정 일을 해요. 일하면 돈이나 주니까. 그러나 일이라는 것은 내 마음의 진실을 가리는 연막술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일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냐? 일을 한다는 것은 뭐냐? 비참하고 비굴하게 꾸역꾸역 살아야 하는 것, 그 외 이 갇힌 지옥에서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일 안 하면 계절이 찾아오고, 가을 찾아오고요, 일하면 비굴하고 비참하게 아침에 피곤한데 또 꾸역꾸역 기어나가야 돼요. 날마다 돌아오는 버스 타고 날마다 막히는 사거리 도로를 또 통과해야 돼요. 한마디로 아무 대안이 없어요.
이 대안이 없을 때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또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은 어떤 대안을 줬느냐 하면, 바로 이 요엘 2장 12절의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꿈을 줬지요. 돌아오는 계절이지만 꿈을 줬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찢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겁니다. 누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불신자라고 합니다. 불신자. 신자가 아니에요. 신자 아닙니다. 금식하고 울며 애통해서 이 말씀대로 그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왜 불신자가 되느냐 하면, 근본적으로 자기 마음 자체가 지옥과 연결되어 있는데, 저주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 저주스런 마음 가지고 마음은 저주인데 아무 탈이 없기를 원하는 거예요.
교회 나와서 열심히 금식하고 기도하는 이유가 목적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냥 탈 없이 지나가게 하옵소서, 복 받게 하옵소서, 그거에요. 그냥 탈 없이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게 되면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였던 그들이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뭐라고 세뇌했고, 뭐라고 양육했고, 뭐라고 교육을 시켰는지 너무나 잘 나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6장 16절에 보게 되면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들이 금식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금식을 했어요. 심지어 마태복음 9장 11절에도 바리새인들은 국가적으로, 전면적으로 금식 기간을 정해놨어요. 오늘날 교회처럼.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9장 10,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금식 기간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요엘의 이 본문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면서 마음 찢으면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로마의 압제가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다시 다윗 시대처럼 번창하게 해주시고 강력한 국가로 만들어서 부름의 대상이 되도록 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누가복음 18장 11절에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이레라는 것은 7일, 7일에 두 번 금식했어요. 물론 금식 한 다음 끼니는 곱빼기로 먹겠지만.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왜 했습니까? 이들이 왜 합니까? 자기의 마음은 근원적으로 해결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받아들이지를 않는 거예요. 내 마음에 어떤 손질을 해도 내 저주받은 마음은 내 손으로 변경이 안 된다는 사실을, 자기 마음을 몰랐던 겁니다. 그냥 말씀대로 하면 자기 마음이 무탈하게 탈 없이 그냥 복 받고 천국까지 가는 줄로 알고 있어요.
아주 극심한 종교성, 저는 거기에 대해서 불신자! 이게 바로 불신자입니다. 전형적인. 그들은 성경 지식으로 도배를 해요. 여호와의 증인같아요. 성경 지식은 다 끌어모아요. 매일 성경 지식으로 꽉꽉 차 있어요. 누가 성경 모른다고 하면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불신자! 그게 불신자에요. 신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신자는 없어요. 신자는 따로 이 하늘에서 땅에서 꽂아줘야 돼요. 예수님만이 신자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의 최후는 마지막 음식을 금식의 취지로, 금식의 계통으로 바꾸신 분이에요.
예수님의 의미 있는 마지막 만찬은, 최후의 만찬은 그거였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는 거예요. 음식이 아니고 이제부터는 내 마음을 너희들이 먹을 차례다. 금식은 굶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을 먹는 그 식사가 금식이에요. 호텔에 가서 2만 5천 원짜리 브런치 한껏 먹어도 이게 금식이 되는 이유가 감사함으로 먹으면 돼요. 이게 고린도전서에 나와요. 감사함으로 먹으면 주께 영광이 됩니다. 감사함으로.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0, 31)
다시 말해서 내가 꾸역꾸역 이 땅에 더 살 이유 없고, 더 일할 이유 없고, 돈 벌 이유 전혀 없음을 또 깨우쳐 주신 그것이 금식이에요. 내 마음 자체를 더 이상, 내 마음이 갖고 있는 그 목적 자체, 내 삶의 목적 그 자체를 없애버려야 돼요.
그러려면 내 마음에서 주의 마음으로 마음의 계열이 이동해야 되거든요. 이동되려면 주님의 마음이 와서 꽂히는 순간 내 마음을 지탱하겠다는 그 시도에서 끊어지게 돼요. 끊어진다고 이게. 통으로 가다가 중간에 뭐 꽂히게 되면 옆으로 새는 것처럼, 다른 파이프로 물길이 새는 것처럼, 기차레일에 다른 레일이 박혀 버리면 그쪽 레일로 기차가 이동하는 것처럼 내 마음이라고 여겼던 내 마음이 이제는 삭제되고 제거되는 일이 벌어져야 됩니다.
그게 사실은 창세기 32장에 야곱과 이스라엘에서 벌써 주님께서 언약을 제시하면서, 언약을 실시하면서 벌써 그 일이 일어났었어요. 얍복강에서 야곱이 기도하는 그 의미에 대해서 호세아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12장 2-4절에 보면 “야곱의 소행대로 벌 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읽어보면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그분이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힘을 겨루어서 야곱이 졌는가? 아닙니다. 야곱이 이겨요.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이겼다고 되어 있어요. 야곱의 마음은 무조건 어떤 방향이냐 하면, 내가 지지 않고 이겨야 내게 탈이 없다는 식으로 인간의 마음은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 야곱이 육입니다. 우리 모든 육을 대표하고 있어요.
인간의 마음은 뭐냐? 거침없는 하이킥이에요. 앞에 걸리적거리면 날려버려요. 이겨야 된다는 거예요. 이겨야 살아남는 거거든요. 누가? 누가 살아남아요? 내가 살아남아요. 이겨야! 이 목적은 뭐냐 하면, 내가 살아남는 게 목적이에요.
그게 어디서 나왔는가? 지옥과 통하는, 지옥 하수구로 통하는 내 마음, 지옥의 마음이 그 마음이에요. 난 누구한테 지기 싫다. 그게 지옥 갈 수밖에 없는 마음, 그 마음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이기려고 했는데 그 순간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지려고 애를 썼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향과 야곱의 마음의 방향이 서로 반대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얻어터져서 야곱은 죽고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거든요.
이것은 야곱 입장에서는 야곱이 이스라엘로 된 거지만 그 사건을 놓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야곱이 되려고 져버린 사건이에요. 이스라엘 이름은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 이름이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인간 속에, 더러운 인간 속에다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는 겁니다.
사람의 자리, 인간의 자리, 죄 안에다 하나님의 자기의 언약완성의 자리를 마련하는 거예요. 저주받을 마음속에, 죄만 있는 그 마음에다 천국을 거기다가 만들어내는 작업을 이 땅에 오신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무조건 이겨야 되고 나는 무조건 탈이 없어야 한다는 내 마음은 주님과 만나는 순간 그것은 끊어져야 됩니다. 내 마음은 아예 없는 것으로 여겨야 돼요. 내 마음이 없는 것으로.
내 마음이 없어지면 뭐냐? 내 삶의 의미도 없어지고, 내 가치도 없어지고, 내 목적도 없어지는 거지요. 바로 주님께서 오셔서 마음을 찢으라, 하는 말이 그 말에요. 마음을 찢으라는 게. 이것은 장차 주님이 오셔서 성령을 주셔야 이게 가능해요.
고린도전서 2장 10, 11절에 보면 성령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이라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마음이 더러운 인간 마음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걸 약간 정형화시키면 이런 뜻이에요. 아담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그 운명이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아담의 운명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아담의 운명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들이 자기 이름을 가져도 그것은 뭐냐 하면, 아담의 이름이 변형된 거예요. 아담의 이름이에요. 사람의 이름의 여러 가지 변형된 것에 불과합니다. 아담이에요.
이름은 뭐냐? 운명을 가지고 이름이라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가지각색 개성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은 아담의 운명 바깥으로 못 나가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인간이나 저 인간이나 똑같은 인간이에요. 왜? 다 같이 아담의 운명에 예속되어 있으니까요. 아담의 운명에 갇혀 있으니까 벗어나지를 못해요. 그걸 대변해주는 것이 뭐냐 하면, 아담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그 이름의 운명은 하나님이 이름을 바꿔주지 않는 한 그 운명은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네가 이름이 뭐라고 하든 세 글자가 되든 네 글자가 되든 어떻게 되든 하나님은 무조건 아담이라는 이름 안에서 우리를 다루시고 그렇게 보시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마음속은 마귀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반항하는 겁니다. ‘내 인생, 나 살고 싶은 대로 좀 삽시다.’ 이런 식으로 반항하는 거예요.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목적을 가지고 자기만의 소박한 자기 인생을 꾸려나가는 겁니다. 거기다 뭘 붙이나? 자기 이름을 붙이지요.
그런데 인간이 붙이는 이름은 무효입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통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운명은 집단적이에요. 한 둘 개인이 잘못해서 이스라엘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이스라엘은 다 망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 금식하라는 것은 나쁜 짓 한 사람만 금식하라는 뜻이 아니고 이스라엘단체를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금식하고 마음을 찢으라.
왜? 패망도 한꺼번에 오기 때문에. 여호와의 날, 최후의 날도 한꺼번에 와요. 그래서 우리가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점은 다 같이 망한다, 다 같이 지옥 간다는 의미에서 위로가 되지요. 너만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특혜를 베풉니다. 그걸 가지고 (볼때기 잡아당기는) 특급사랑이라 하는데요. 특별한 사랑을 꽂아줘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이 금식, 마음 찢음의 계통 속, 새로운 계통 속, 주의 이름으로, 라는 계통 속, 즉 자기 제자들의 마음속에 자기 이름을 심어버립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하면서 최후의 만찬을 실시합니다. 마태복음 26장 26-28절 죽 나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고 난 뒤에 그다음의 계통은 뭐냐? 그들로 마지막 식사를 하시고 그다음 나오는 36절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러 제자 세 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 셋과 함께 갔는데 사실은 세 명과 같이 갔으면서도 기도는 오직 주님 홀로 하는 기도에요. 나머지 인간이 하는 기도는 전혀 먹히지 않는, 아무 의미 없는, 제자들은 잠만 잤으니까, 아무 의미 없는 기도지요.
그런데도 왜 세 명의 제자들의 대표를 데리고 갔느냐? 예수님의 아픔, 아픈 마음, 찢어진 마음, 요엘서에 나오는 이 찢어진 마음을 그들에게 결국은 주님께서 심어주고 나중에 성령을 통해서 전달한다는 것을 미리 그 계통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너는 기존 인간들하고 다른 계통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을 예수님 기도하는데 데려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합니다. 37절에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주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바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고통스러웠어요. CRPS정도, 최고단계의 고통이지요.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었으니까요. 그냥 육체를 짰다, 한약 짜듯이 짰다. 그렇게 보면 돼요.
짜고 또 짠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없는 기도에요. 사람이 할 수 없는 기도를 하신 겁니다. 제자들은 멍~ 하니 자고 있는 거예요. 자고 있어도 주님 옆에 있다는 그 자체가 이게 특급혜택을 입은 대상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지요. 제자들이니까, 그들에게 나중에 성령이 오시니까요.
성령은 뭐냐? 예수님이 겪었던 그 마음이, 그들 속에 주의 마음이 그 절차가 그대로 들어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찢어진 마음과 예수님이 마지막 식사하면서 금식으로 끝나는 그 마지막 식사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금식과 온전한 기도와 마음 찢음이, 그게 기도니까, 마음 찢는 게 기도니까, 그들 속에 들어올 때 동일한 계통에 합세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기도하시면서 뭐라고 하느냐?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39절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렇게 한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제자들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니까, 그 가까운 사람들을 옆에 둔 이유가 예수님 본인 개인에게 일어난 일이 예수님 개인으로 끝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된 새로운 사람들에게 전달됨으로써 그들이 요엘 말씀을 완성 시키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준비되기 위해서 열두 제자를 뽑은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5장 8절에서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베드로에게 찾아갔는데 결국 무슨 말을 했느냐?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 그 말씀 하시거든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 할 때 여기서 먼저 베드로에게 사람 낚을 때 어떤 과정으로 낚느냐 하는 것을 미리 보여줘요.
그것은 뭐냐 하면, 그 인간의 마음과 그 인간을 살려서 낚지 않고 죽여서 낚습니다. 죽여 버려요. 그 마음 자체를.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고기 잡으라 할 때 이쪽저쪽 그물질 하다가, 고기 못 잡은 채 버티다가 결국 고기 잡고 난 뒤에 베드로가 한 고백이 나와요.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게 바로 누가복음 5장 8절입니다. 자기 마음이 주님 앞에서는 이것은 찢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방식으로 똑같은 방식으로 네가 나중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방식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는 것은 교회의 선교나 전도가 할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여놓고 건지지요. 본인에게 더 이상 일체 희망과 소망을, 모든 것을,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완전히 설사하게 만들지요. 빠지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건집니다. “너나 나나 둘 다 희망 없다. 그지? 됐지? 둘 다 더 이상 우리 인간도 아니다. 됐지?” 그 과정이 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선교도 아니고 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불신자가 불신자를 또 지옥 보내게 하는 수작에 불과한 거예요.
진짜 성령이 오시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아무런 사는 이유가 없음을, 애초에 없음을, 애초에 재수 더럽게, 오지게 재수 없다는 이것이 우리의 본바탕인 것을 깨우칠 때 비로소 주의 마음으로 우리가 천국 백성 된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방향과 주님이 오신 방향이 완전히 정반대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도와주고 후원해줄 줄 알았습니다. 주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가 바로 주의 마음이 우리 마음 되게 하시는 주님의 작업인 것을 알았사오니 이제는 항상 아무 쓸모 없는 자를 주의 쓸모 때문에, 주의 이름 때문에 살아났음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요 설교(마음을 찢으라) 요약
강의 전에 어제 했던 수요설교를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어제 금식하고 마음 찢는 거하고 하나님이 그걸 같이 묶어놨어요. 우리가 묶은 게 아니고 하나님이 같이 묶어놨어요. 인간들의 금식이라 하는 것은 밥을 굶으면 돼요. 밥을 굶으면 되는데 그리 되면 금식은 된 것 같은데, 같이 묶어 있는 마음 찢음이 안돼요.
마음 찢음과 금식이 일치되려면 밥은 굶었는데 굶은 내가 마음 찢음으로 같이 연결이 되어야 됩니다. 밥을 굶은 내가 굶었다는 그 생각조차도 날아가 버려야 되거든요. 그래서 마태복음6장에 제가 언급을 했는지 기억이 안나요. 6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금식할 때에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기름 발라라. 금식을 한 게 아예 안 들키도록 해라. 기름 발라가지고. 창백한 모습이 안 보이도록 해라. 그게 마음 찢음이에요.
오만상 다 그려가지고 금식을 티내는 것은 그건 금식함으로서 마음을 찢는 게 아니고 금식함으로서 마음이 더 돈독하게 된 겁니다. 찢기가 더 힘들게 되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금식의 의미는 밥을 그냥 굶는 것. 그건 가는 길이 방향이 잘못됐다는 거죠. 금식과 마음 찢음이 같이 되려면 밥을 굶는 거 해가지고 금식을 이루겠다는 것은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수요일날 방향 문제를 언급했지요. 사람은 자기의 힘을 키우려고 합니다. 힘을 키우게 되면 마음 찢기가 곤란해요. 힘을 더 모아놓으면 찢는데 두툼한 종이가 많이 모아지면 찢기가 더 힘들잖아요.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자기의 처음부터 자기가 아무 탈이 없기 위해서 그걸 제가 무탈 이라고 했는데 아무 탈이 없기 위해서 계속해서 힘을 기르는 쪽으로 나갑니다.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요.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힘을 기르는 쪽으로 나가지요.
그렇게 했던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하나가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평소의 자기의 속성을 사람에게 사용했던 그 속성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야곱을 밤중에 찾아갔어요. 그러니까 평소에 그 인간이 세상에서 살던 행세 있잖아요. 습관, 태도, 그 태도가 고스란히 하나님 앞에서도 살아있었어요. 겨루어서 상대를 꺾어보려고 이겨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12장3~4절을 언급하면서 거기에 이상한 구절이 나와요.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겨놓고 울었다고 되어있어요. 이기면 좋아해야 되는데 울었다고 되어있어요. 자기 본성대로 다했는데 결과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울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파악이 된 겁니다.
그래서 울었다는 말은 평소에 사람들에게 했던 행세를 하나님한테 그대로 하니까 하나님한테는 이게 제거대상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니는 복 없어. 니는 나와 원수야.” 이러한 관계로 완전히 티가 난 겁니다. 들통이 난 거죠. 그래서 울었다는 말은 복이 날아갔으니까 전에 야곱이 받았던 복은 무효가 됐어요. 날아가 버렸어요. 하나님을 상대로 격투기 벌였는데 복이 있을 수 있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울면서 매달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복을 줄 대상자를 하나님 쪽에서 만들지요. 그게 뭐냐 야곱을 죽이고 그 다음에 죽은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만듭니다. 그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만든다는 그 과정은 설교 마지막에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갈 때 베드로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는 베드로부터 먼저 본인이 어떻게 주님한테 어떻게 낚였는가, 낚이는 절차가 뭔가를 그것을 체험했어야 하는 겁니다.
의과대학 학생이 수면 내시경 말고 그냥 내시경을 할 때 아픔을 의과대학에서 체험하듯이 남한테 치료하는 사람이 본인이 그걸 체험하듯이 그게 이제 주님이 베드로를 낚을 때 어떤 결과를 낳느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께서 은근히 이용하는 생각이 싹 가시게 나 같은 인간이 주님한테 도움 얻는다는 자체가 이건 막말이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 같은 욕심쟁이가 무슨 주의 일을 할 수 있느냐, 그 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거예요.
그게 바로 주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누구를 사용할 누구를 낚을 때 그 절차가 필수적인 거예요. 구원을 소유하겠다는 그 자체가 그게 죄가 된다는 그게 바로 내가 잘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한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그 절차가 필수적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힘을 줘서 구원한다면 우리는 추가적인 하나의 힘이 필요하겠지만, 예수님의 그 존재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 예수님의 자기를 부인하는 능력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태가 되느냐 하면 구원 가치가 없는 상태로 그게 준비되어있어야 되는 겁니다. 구원될 가치도 없다는 것.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 떠나소서. 주님은 바로 그거야. 니가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그게 바로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께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는 고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걸 야곱에게 적용하면 야곱은 계속해서 내 힘을 키우는 쪽으로 나가요. 왜냐하면 내가 안 다치게 하는 겁니다. 내가 안 다치게.
내가 지금 야곱인데 괜찮은 야곱으로 미래의 괜찮은 야곱이 되고자 하는 야심과 야망을 나는 포기하지 않고 유지하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도와줄 거라 그 생각이 바로 구원의 대상이 안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어떤 특정 인간을 건지는 게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기에게 지시를 내려서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건지는 게 그게 원형입니다.
모든 인간은 배제가 되고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건져놓고 그 건진 하나님이 그 다음에 사람이 되셔야 돼요. 그래서 야곱이 되고 난 뒤에 이름이 이스라엘 됐잖아요. 그건 야곱 입장이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 되시는 하나님이 야곱 되기 위해서 이기려는 게 아니고 져야 우리 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는 쪽으로 열심 내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래서 죄인의 자리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겨나도록 생명이 있도록 그 방식을 사용한 겁니다. 그 방식 말고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인간은 자꾸 힘을 모으는 거예요. 그 힘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성경지식 신학이라는 것, 그리고 기도, 전도, 예배참석, 이런 것. 그게 자기한테 힘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뭔들 못하리. 뭐든지 하는 거예요. 열심내고 충성, 봉사하고 뭐든지 다해서 내게 유리하다면 뭐든지 하는 거예요. 그걸 저는 아주 강조했어요. 세자로 “불신자”라. 그게 바로 불신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불신자를 양성해요. 신자가 아니에요. 완전히 야곱이에요. 이스라엘이 아니고.
야곱에서 이스라엘 되려면 그야말로 죽어야 되는데, 죄인 되어야 되는데, 이게 야곱을 유지하면서 이 열심 내는 나를 건져주세요. 라는 식으로 나오니까 이건 뭐 그 안에 본인이 구원받겠다는 열의는 있는데 십자가 자리가 없는 거예요. 십자가 들어갈 자리가 없지요. 그냥 힘 달라 하는데 무슨 십자가를 주겠어요.
십자가는 우리가 죄인이 되어야 발생되는데요. 그래서 야곱은 뭔가 이기려 할 때는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라서 그래요. 그래서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아담의 이름으로 해왔고 아담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이름은 이름 붙여준 자의 운명 속에서 인간이 갇혀 있다고 이야기했고요. 못 벗어납니다.
아담의 이름은 뭐냐, 흙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왜 인간은 흙이 되어야 되는가, 인간이 흙이 아니고 사람인데 할 때, 흙인데 사람이라고 우겼던 그 배후 세력이 있어요. 악마가 있어요. 그건 지옥가야 돼요. 그래서 이 세상은 지옥의 하수구입니다. 지옥에서 나온 온갖 더러운 것은 하수구에 다 빠지듯이 빠진 이 동네가 이 세상이에요.
그래서 어제 설교할 때 저는 마음을 찢으라, 했는데 아내가 다른 제목을 건의했어요. 지옥의 하수구. 그것도 시궁창 이러는데. 힘으로만 버티려고. 힘이 있으면 산다고 여기는 힘이 기쁨이라고 여기는 그 동네. 너무 생뚱맞아서 채택이 안됐습니다만.
야곱이 바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이유가 뭐냐 하면 아담 자체가 이미 악마와 한 통속이 되어서 그렇거든요.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 표현하면서 안 쓰는 단어를 하나 썼습니다. 오지게.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난 자체가 오지게 재수 없는 거예요. 정말 너무 너무 재수 없는 거예요. 태어난 바닥이 지옥의 하수구의 시궁창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자체가 저주에요. 사는 자체가 저주입니다. 그 저주에서 벗어날 길도 없고.
그런데 무슨 특급사랑인지 주님께서 그 금식과 마음 찢음을 한꺼번에 예수님만 그렇게 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식사를 주님은 금식의 완성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식사하는데 그 식사가 무엇과 연결되느냐 마음 찢음과 관련된 식사가 금식의 성취입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어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마지막 식사였거든요. 식사인데, 이 식사가 마음 찢음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 식사 마치고 난 뒤에 겟세마네 가가지고 중요한 것은 겟세마네에 갈 때에 제자들 3명 데려가잖아요. 기도하려 데려가는 거 같은데,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자고 있었습니다. 마음 찢음에 기도를 예수님은 하실 수 있지만, 제자들은 하지를 못해요. 자기 바빠서.
그렇게 해가지고 나중에 주님께서 겟세마네 기도로 연장되어서 그게 십자가로 실현됐지요. 그걸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그 마음 찢음에 그 마음이 성령의 마음이 되어서 제자들에게 도달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마음을 찢은 상태기 때문에 이미 금식이 완성 상태에 들어왔기 때문에 살과 피를 먹었으니까 맛있게 뭐든지 잘 먹더라도 감사함으로 먹는 그것이 주께 영광이 돼요. 고린도전서6장에.
뭐든지 맛있게 먹는 것. 그게 마음 찢음 상태에서 음식이 들어오니까 금식의 완성의 반복이 되는 거예요. 식사시간마다. 동시에 완성이에요. 그렇게 되게 되면 그 마지막 날이 여호와의 날이거든요. 최후의 날이 왔을 때 여호와께서 친히 만들어낸 사람 빼놓고는 나머지는 다 오지게 재수 없는 티를 내시면서 완전히 전부 다 저주해 버리지요.
이미 주님께서는 여호와의 날, 최후의 날이 온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저주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이미 아시기 때문에 미리 성령을 통해서 자기 사람들을 생산해 내는 겁니다. 금식과 마음 찢음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어요. 바리새인처럼 금식해봐야 지 자랑, 금식한 자기 자신을 자랑하기 때문에 마음 찢음이 안돼요.
밥은 굶었는데 마음은 전혀 안 찢었고, 오히려 금식으로 인하여 마음이 더 돋아졌어요. 교만해졌어요. 주님만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셔서 그들만 특급사랑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겁니다. 그게 어제 수요일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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