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하나님 우편과 원수

아빠와 함께 2025. 2. 24. 09:19

하나님 우편과 원수

2025년 2월 2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11-14

(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자기가 따로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벌려놓은 일의 최종 의미는 ‘자기 의미’로 돌아옵니다. 심지어 성경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자신이 받아들이므로서 구원이 된다고 여기는 것도 실은 ‘자기 의미’의 확충일 뿐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를 구원하는 핵심 요소만 취득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 피를 받아들이면 구원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 우편’이라는 개념이 별반 필요없어 보입니다. ‘하나님 우편’이라는 개념이 들어와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자체적인 일련의 순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이 땅에서 오셨고, 스스로 출생하셨고, 스스로 죽으셨고, 스스로 부활하셨고, 스스로 승천하셨고, 스스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스스로 재림하십니다. 그래서 해서 수립된 것이 ‘최종적 의미’입니다. 일련의 순서가 없으면 최종적 의미가 완료되지 못합니다. 이런 순서 중의 하나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입니다.

이 ‘앉으심’으로 인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원수를 포착하고 색출하고 심판하실 수가 있는 겁니다. 원수를 발판으로 꾹 누르는 위치가 ‘하나님 우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알려면 ‘하나님의 원수’가 어떤 자에 해당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26에서 최종 하나님의 원수는 ‘사망’이라고 나옵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어떤 아이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선악과 과실을 따먹으면 왜 죽습니까?” 답변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것이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까?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면 최종적 의미의 안목으로 우리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최종적 의미로부터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사망 안에 갇혀 있음에도 불과하고 자신들이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고 살아나심은 인간들이 여전히 최후의 원수인 사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눅 24:22-24)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타난 뒤에 두 번째 나타난 경우를 말해줍니다. 이들 제자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저녁 무렵에 떡을 뗄 대 비로소 그들은 눈에 밝아져 예수님의 살아 계심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예수님은 그들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눅 24:30-31)

요한복음 20장 나오는 막달라 마리와의 대화에서는 더욱 심오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요 20:17)

즉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인간 세계와 예수님과 단절이 발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종 원수인 사망을 이기고 벗어나 ‘살아 있는 자’이지만 그 외에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원수인 사망에 매여서 죽은 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으로 인한 최종적 의미로부터 모든 인간들은 끊어져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최종적 의미를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미로서 중간로 가로 막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짓들입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으면서 살아있다고 우김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여전히 자기 살 궁리를 하고 희망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욕심이요 욕망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겠다는 것도 최종 의미가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는 욕망이요 죄입니다. 요나의 경우, 요나는 분명 하나님 말씀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니느웨 성에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니느웨 성 사람들이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해서 자아의 의미를 포기하므로서 심판이 그들에게 이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요나 선지자 자신이 삐져서 죽을려고 했습니다. 즉 요나는 여전히 자신의 의미를 포기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니느웨 사람들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한다할지라도 인간은 그것으로 자신을 끝까지 놔주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모든 의미를 자기에게 부여하는 ‘하나님의 원수’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베드로는 그 천국의 열쇠를 소지하므로서 구원이 될까요? 요한계시록 3:7에 보면, 천국의 열쇠는 주님 자신입니다. “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즉 천국은 천국열쇠마저 빼앗길 때에 비로소 성립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열쇠에 소지했다는 자아성마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비유’나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나 다 같은 취지입니다. 그들은 더는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챙기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무덤에 가 있는 다윗 이야기가 나옵니다. “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행 2:34) 그리고 더 이어 말하기를, ‘하나님 우편’에 관한 언급이 나옵니다. 이는 마지막 때, 즉 모든 의미가 마감되었을 때에 성령이 이 사망을 뚫고 들어아서 ‘최종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이것이 발호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세례란 ‘하나님 우편’에서만 줄 수 있는 선물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최종적 의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부활 아래에서 모든 법칙과 원칙은 무효가 됨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5강-히브리서 10장 11-14절(하나님의 우편과 원수)250223-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11-14절입니다.

히브리서 10:11-14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 본문에 보면 사람이 두 종류로 나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사람이 따로 있게 되고, 그거 말고 예수님의 제사의 효력에 해당 안 되는 사람, 그 해당 되지 않는 사람을 여기서는 자기 원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이 먹히지 않는 사람, 또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을 ‘원수’라고 이렇게 표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를 단번에 사했다.’에 대해서 ‘나는 그거 관심이 없다.’ 관심 없는 걸로 그냥 살면 된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예수님의 영원한 제사의 속죄를 거부하는 자가 그냥 방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자기 발등상이라는 것은 밟는 것을 의미하죠, 꽉 이렇게 밟는 것.

발밑에 하나님의 원수가 있고, 예수님께서 그걸 밟게 됩니다. 자기 원수를 밟게 되는 그 조건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치가 여기 나옵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사”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설정이 굳이 필요할까?’라는 생각을 우리가 해 봐야 해요.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 그러면 다 끝난 건데 그러면 간단한데 왜 굳이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말을 하나님께서 왜 제시하는가?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요소를 빼버리면 도대체 구원에 있어서 뭐가 문제가 되고 뭐가 불가능해지느냐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를 믿고 내가 구원받으면, 천국 가면 그러면 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것을 몰라도 구원 되잖아요? 그러면 되잖아요, 우리한테는? 그런데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말을 이렇게 거론하는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원수를 발등상으로 꾹 밟고 있는 자리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는 예수님의 원수를 포착하고 그걸 색출하고, 그걸 심판하는 자리가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원수 또는 하나님의 원수도 모르면서 ‘나는 내가 구원받아 천국 가면 되잖아.’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하나님의 원수 같은 거 나는 모르겠고 나만 구원받으면 됩니다.’라는 이러한 발상, 이러한 생각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에 해당하는 생각이다, 이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원수들의 특징이에요. 예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에요. 그들이 왜 예수님이 하는 일에 관심이 없느냐 하면 모든 의미가 자기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자기 의미에 충실하기에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슨 일을 했느냐에 대해 관심이 없는 거예요. ‘주님은 주님 일하고 나는 내 일하고, 그렇게 쿨하게 서로 각자 자기 일합시다. 남 간섭하지 말고.’ 이런 식이죠.

그런데 여기 1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사” 그다음에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면요, 모든 의미라는 게, 모든 가치 의미라는 것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거예요.

자기한테서 의미가 나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뭘 뜻하느냐? 주님이 무슨 일을 하느냐에 대해서 관심이 자연적으로 없어요. ‘하나님의 우편’도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누구인지도 관심이 없고, 그 밟는다고 하는 것도 ‘밟으나 마나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식으로 그것에도 관심이 없어요.

‘오직 나한테 관심 두면 그게 인생 그냥 사는 거 아니냐.’ 하는 식으로 버티는 사람, 그 버티는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이 이 땅에 내려왔던 예수님이시거든요. 이 땅에 예수님이 내려왔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왔는데 그 내려오신 분이 일련의 순서를 갖고 있어요, 스스로 오셨고, 스스로 태어났고, 스스로 죽으시고, 스스로 부활하시고, 스스로 승천하시고, 스스로 재림하시고. 예수님께서 일련의 자기 순서를 지키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 순서를 지키는 이유가, 그 순서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원수가 결정되고, 규정이 돼요. 그 순서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 돼요. 빠뜨리면 하나님의 원수가 주님의 발 앞에 굴복을 안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의 원수에 집착하시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에 갖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갇혀있다는 의식이 없어요. 왜? 하나님의 원수에 갇혀있기 때문에요. 주님만이 하나님의 원수를 짓밟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일련의 자기 일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태어나시고,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나중에 ‘하나님 우편’에서 이 땅에 다시 공중에서 나타나시는 그 일련의 일, 그 일은 하나님의 원수를 원수로 포착하고 심판하겠다는 그 의미가 예수님이 하는 일에 입각해서만 비로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원수가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는 그 모든 일이 최종적인 의미가 모든 것의 마감이 되거든요? 하나님의 원수는 뭐냐? 예수님의 최종성,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 예수님이 이루었던 모든 최종적인 의미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 예수님이 이루었던 최종적인 의미에 대해서 막혀 있는 사람, 그게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원수를 로마서 5장 10절에서는 누구한테 적용하는가? 바로 인간에게 적용합니다. 5장 10절에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다고 할 때에 그 원수 된 이유는, 우리가 최종적인 의미를 모르고 내가 태어나서 열심히 인생 살았던 그 의미, 그 의미만 붙들고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내 의미를 갖게 되면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느냐? 하나님의 원수가 우리와 한통속이 되어서 준 게 있어요. 그게 욕망입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우리 인간에게, 마귀가 우리에게 욕망을 준 거예요.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선악과 따먹었는데 왜 죽어야 합니까?”

올해 4학년 들어가는 아이가 물어본 거예요. 아, 지금까지 그런 질문을 제가 받아본 적이 없어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 이야기는 수천 번 들었는데 거기에 ‘왜?’라는 말을 던져보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으면 왜 죽습니까?” 초등학교 4학년 올라가는, 아직 3학년 말이에요, 4학년은 되지도 않았어요.

그 말 하는 게 ‘아, 정말 참 중요한 질문이다.’ 그래서 제가 기쁨으로 답변 안 할 수가 없죠. 답변은 이겁니다. “선악과 하나님, 내 거거든?” 선악과는 하나님의 의미거든요. 이게 하나님 거거든요, 이게. 그런데 인간은 ‘좀 따먹으면 어때?’라는 생각을 악마로부터 부여받게 되는데 이것이 뭐냐? 내가 나에게 최종적인 의미라는 거예요, 내가.

그게 욕망이에요. 인간이 욕망을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욕망이 인간을 갖고 있어요. 최종적인 의미에 의해서 인간은 뭐냐? 인간은 곧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최종적인 의미에 의해서 하나님과 대적 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고,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을 고린도전서 15장 25절에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26절에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했어요.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 했습니다. 이게 예수님이 말한 최종적 의미에요. ‘사망이 원수다.’ 같은 말로 ‘인간이 원수다.’ 같은 말로 ‘마귀가 원수다.’ 같은 말로 ‘욕망이 원수다.’ 이게 전부 다 동일한 말이에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인 사망에 의해서 갇혀있고 따라서 산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다 죽었어요.

예수님은 이것을 누가복음 24장에서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고 최초로 부활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최초로. 최초로 부활한 사람이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난 게 아니고 글로바라는 사람과 그리고 그 일행 중에 또 한 제자에게 나타났어요. 그 사람들은 십자가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이제는 별 볼 일 없다.’ 일본말로 하면 ‘시마이’라고 해요. “끝났다. 우리 볼일 보러 가자.”

뭐라도 될 줄 알았죠, 예수님 오셔서 구름도 타고 오고 진짜 뭐가 될 줄 알았는데 맥없이 십자가로 종결됐어요. 시마이 된 겁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엠마오로 내려가는데 그때 어떤 사람이 “같이 갑시다.” 하고 동행하면서 이야기해요. 예수님 십자가에 관해서 이야기를 쭉 했어요.

그런데 누가복음 24장 25절에 보면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설명해도 설명한 그분이 살아있는, 다시 사신 예수님인 것을 글로바와 한 제자는 몰랐어요. 왜냐? 본인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본인들이 자기가 살아있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지금 이 글로바와 그 일행은 자기 의미를 포기한 적 없어요. 나는 살아있다고 분명히 느끼고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살아있으면 누가 죽은 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24장 30절에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눈이 밝아지니까 예수님만 살아있는 세계에 계시고 자기는 죽어 있는 세계에 그대로 있음을 그때 알게 된 거예요.

예수님의 최종적 의미, 죽으시고 부활했다는 그 최종적 의미에 이 두 제자는 접근이 안 됐던 거예요. 그쪽 세계로 넘어가지를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왜? 이유가 뭐냐?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살아있다는 인식을 지금까지 버린 적이 없어요. 포기한 적이 없어요.

내가 지금 죽은 채로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죽은 채로 있으면서 이 십자가 피 믿고, 성경 알고, 복음 알면 구원되는 줄 알았던 거예요. 죽은 자는 죽어야 하지, 구원되면 안 돼요. 죽은 자는 죽은 자여야 해요. 그러니까 그동안 교회 와서 성경 보고 이게 전부 다 구라가 된 거예요. 거짓말이 된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내가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모든 의미가 나에게 귀속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의미가.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겠지.’ 이것도 자기 의미잖아요. 그러고 난 뒤에 더 놀라운 사실은 누가복음 24장 31절에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이게 놀라운 사실이에요.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 아는 순간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던 거예요. 왜 보이지 않아야 하는가? 예수님을 봐버리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가 나의 의미가 되어버리면 나는 죽은 자가 아니고 산자가 되어버려요. 모든 의미가 나한테 아직도 유효하게 되어버려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내가 의미 있게 되어버려요.

의미는 예수님한테 있어야지 나한테 있으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나는 봤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의미가 나한테 계속 유효하게 살아있는 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의 우상이 돼요. 이게 성경 전체에서 굉장히 중요한데요. 최종적 의미가 이거에요. ‘주님만 살아있다.’ 이게 최종적 의미에요.

왜냐하면 ‘예수님 빼놓고는 하나님의 원수인 사망에 매여 있다.’ 이게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부활했어요. 남들은 아무도 부활 된 적 없어요. 뭐 에녹, 엘리야도 있지만 그들은 안 죽었어도 ‘하나님의 우편’까지 가지는 못 해요. ‘하나님의 우편’에 가야, 거기 가야 하나님의 원수가 포착이 돼요.

‘하나님의 우편’에 가지 아니하면 최종적 의미를 몰라요. 여전히 자기한테 의미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고요. ‘의미 있게 살아있다.’를 계속 우기고 있는 거예요. ‘의미 있게 살아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미는요, 예수님도 못 알아보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모르는 주제에 십자가를 모르는 주제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한국의 전래 동화 중에 이런 동화였어요. 『당나귀를 팔러 가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그 동화에 보면 농사짓는 아버지와 아들이 “장날인데 우리 당나귀 이제 팔자.” “아버지, 나귀 팔러 갑시다.” 그래서 당나귀를 팔러 가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장사꾼이 보고 “아이고, 이왕 당나귀 팔러 가는 거 끌고 가면 뭐합니까? 타고 가야죠.” 이렇게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 말이 맞아. 당나귀는 타고 가야 돼.” 하고 당나귀를 타고 갔습니다, 노인들이 정자에서 놀다가 “아이고, 이 더운 날 자기 아버지만 타고 아들은 땀 뻘뻘 흘리면서 끌고 가나?” 아, 참. 순서가 바뀌었네요. 먼저 아들을 태웠어요. 아들을 태우고 아버지가 나귀를 끌고 가는데 노인이 하는 말이 “아들은 나귀 타고 나이 많은 아버지는 땀 뻘뻘 흘리면서 가나?”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아들이 “아버지가 타세요. 내가 욕 얻어먹을 짓은 안 합니다.” 아버지가 나귀 타고 아들이 끌고 가는데 이번에는 빨래터에서 일하던 아줌마들이 “아이고, 저 아버지 봐라. 자기는 타고 아들은 걷게 하고!” 또 이렇게 하니까 아들하고 아버지하고 둘 다 당나귀를 타고 갔어요.

좀 가다가 농부를 만났는데 “아이고, 저 인정머리 하고는! 세상에 저 불쌍한 당나귀, 이 더위에 팔기 전에 쓰러지겠다. 어떻게 어른 둘을 태우고 가나.” 그 말을 듣고는 “그 말이 맞네.” 그래서 당나귀를 앞발 묶고 뒷발 묶어서 메고 갔거든요. 시냇가를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그 당나귀를 메고 가는 게 우습다고 깔깔 웃는 바람에 놀라서 떨어진 당나귀가 시냇가로 떠내려가서 당나귀 팔러 장에 가다가 잃어버렸다는 이야기에요.

이게 우리 인생 이야기입니다. 내가 나한테 주인 같죠? 우리 인생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육신이 내 주인이고 나는 내 육신의 종입니다. 이건 뭐 업어도 안 되고, 끌고 가도 안 되고, 메고 가도 안 되고 감당이 안 돼요, 감당이 안 돼.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망이 네 주인이다, 사망이. 네가 갖고 있는 육신이, 이 살아있는 육신이 너한테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너에게 무거운 짐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사망 전까지는 이 무거운 짐을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어요. 마치 장터에 당나귀 팔려고 메고 가는 것처럼. 이 사람 말 듣고 저 사람 말 듣고, 욕 안 얻어먹으려고요. 이게 내가 내 육신의 종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내 육신의 주인이라고 우기면서 이 사람 의미 저 사람 의미, 자꾸 그 의미를 가지고 이 힘든 인생을 감당하려고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부질없는 짓을.

주님께서는 화끈하게 이야기해요. “네 주인은 사망이다. 동시에 사망은 하나님의 원수다. 따라서 네가 하나님의 원수다. 네가 욕망을 컨트롤한다고? 무슨 수로 네가 욕망을 컨트롤해? 욕망이 널 컨트롤할 거야, 욕망이. 욕망은 네가 다룰 수 없을 거야.”

이게 선인 줄 알면서도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욕망이 그렇게 만들어요, 욕망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욕망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거든요,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했듯이. 우리에게 있는 이 욕망을 누가 감당합니까? 마귀의 이 요구를 누가 감당해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데(약 1:15) 이걸 누가 감당합니까? 그 악마가 하나님의 원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고 해요. 예수 믿으면 그것은 욕망 아닙니까? 예수 잘 믿겠다는 거 욕망 아닙니까? 그 예수 잘 믿겠다는 최종의미가, 그 결실이 결국 누구한테 돌아옵니까? 나한테 돌아온다고요. 최종의미가 나한테 돌아오잖아요. 어떤 요령 부리고 있어요. 통박을 굴리고 있다고요.

요한복음 20장 17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는데 대화하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는데 ‘나를 만지지 말라’고 했어요.

글로바는 눈이 밝아지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봤는데 그 순간 눈앞에서 주님이 보이지 않게 되었어요. 지금 마리아한테는 ‘나를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네가 속한 의미 세계와 내가 속한 의미 세계가 지금 완전히 절단되어 있다, 끊어져 있다는 겁니다. 끊어진 것을 무슨 수로, 네가 멀쩡한 상태로 네 의미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내 부활의 세계에 건너올 생각을 다 하느냔 말이죠. 네 의미가 작살나야지, 우리 의미가 없어져야 하죠.

구약의 요나에 보면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죠. 니느웨 성이 심판받는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니느웨성에는 심판이 복음이죠. 요나는, 그들이 심판 받는다고 했으면 약속대로 그들이 심판받는 줄 알았어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그런데 요나가 니느웨 성이 심판받는다는 소식을 전하고 난 뒤에 니느웨 사람들이 뭘 했느냐?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금식을 하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자체적으로 모든 의미를 없애버린 거예요. ‘내가 살아 있지만 사실을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심판 앞에서 나는 죽은 자다.’ 그걸 몸으로, 금식으로 표현한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누가 삐지느냐 하면 요나가 삐졌어요. 자 한번 보세요.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죠? 하나님의 기적과 표적을 전합니다. 그런데 표적을 전하는 당사자가 표적에서 빠져버려요. 그 구원의 자리에서 요나가 빠져버립니다. 요나는 자살하려고 했어요. 이게 말씀이 주는 단절이에요. 말씀 전한다고 구원되는 사람 아닙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예요. 마태복음 16장 4절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할 때 제자들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리고 마태복음 16장 15절에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유난히도 ‘주’라고 이야기를 해요. 다른 제자들은 랍비라고 합니다. 물론 베드로가 랍비라고 한 적도 있어요. 마가복음 보면 랍비(막 11:21)라고 한 적이 있는데 주로 요한복음 보면 베드로만 주여, 주여, 라고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요 13:36) ‘주’라고 했다고요.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할 때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칭호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했어요. 랍비가 아니고 ‘주’ 주님이에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시몬 베드로죠,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너한테 천국 열쇠를 주겠다(마 16:19)고 했어요.

자, 이 대목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제가 여러분한테 문제를 내고 싶어요. 천국에 가려면 천국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 들어간다, 1번. 2번, 천국 열쇠가 없어야 천국 들어간다. 몇 번입니까? 천국 열쇠가 있어도 못 들어가고요, 천국 열쇠가 없어도 못 들어가요.

그게 요한계시록 3장 7절에 나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라고 되어 있어요.

열쇠를 시몬에게 준 게 아니고 베드로에게 줬거든요? 시몬과 베드로가 동일 인물인데 지금 베드로가 랍비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라고 했다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의미를 인정해 주는 게 아니고 베드로에게 없는 최종적인 의미를 베드로에게 계속해서 제공할 의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천국 열쇠 주세요.”라고 한 적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천국 열쇠를 주는데 그 천국 열쇠가 주님 자신이에요. 천국 열쇠의 특징이 뭐냐?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닫았다고 하는데 베드로가 나서서 열 수 없고요, 주님이 열어놨는데 베드로가 닫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열쇠와 천국은 어떻게 되느냐? 줬다 뺏기면 돼요. 천국 열쇠를 주고, 그걸 도로 뺏어버리면 비로소 베드로는 뺏긴 자가 돼요. 뺏기면서 뭘 뺏기느냐 하면, 자신의 의미가 뺏기고, 자기 목숨이 뺏기고, 자기의 모든 가치를 다 빼앗기면 구원받는 겁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목욕탕에 갔는데 열쇠를 잃어버렸어요. 목욕탕 가면 열쇠 주잖아요. 그 열쇠를 잃어버렸단 말이죠. 천국 열쇠는 아니에요. 그냥 목욕탕 열쇠에요. ‘야, 이거 큰일 났다.’ 옷 입고 나가야 하는데 옷이 안에 갇혀있으니까요. 그래서 관리인한테 이야기하니까 2만 원 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2만 원 안 내려고 열쇠를 찾아봤는데 열쇠를 어떻게 찾았어요. 그런데 그게 남의 열쇠였어요. 나처럼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이 또 있었던 모양이죠. 그거 가지고는 봐주지도 않고요. 그런데 관리자가 와서 내 옷장에 와보고는 “어, 열리네!” 그랬거든요? ‘열쇠가 없는데도 열렸다? 이게 천국이 아닌가!’

열쇠를 가지면 나한테 최종의미가 있어요. “나 열쇠 가졌다.”가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 줬다 뺏는 거에 네가 참여하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셨다, 제자들이 다 구원자 온 걸로 알았어요. 그 제자들? 구원자 뺏겼습니다. 왜? 그들은 사망한테 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한테 졌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기 의미화시켰던 거예요. ‘예수님이 있으면 우리는 천국 간다. 천국에서 누가 높으냐?’ 야고보와 요한이 대판 싸우고 뭐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줬다 뺏기면 결국 열쇠도 없는데 어딜 가느냐? 천국 문은 열려있어요. 누가 열었어요?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분이, 줬다 뺏은 사람에게 그걸 개방한 거예요.

‘열쇠는 나고 너는 열쇠 없이 그냥 들어간다, 값없이 구원받는다’고요. 조건은 뭐냐? 너의 의미가 뺏기는 거예요. 네가 죽은 자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을 때 같이 죽은 자가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우리 의미가 계속 살아있는 걸로 우기게 돼요.

그러니까 그게 예수님의 부활이거든요? 아까 마리아한테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예수님께서 부활해서 다시 찾아오는 이유는 인간 세계에서 인간들의 아이디어로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원리와 법칙과 법률은 전부다 무효입니다. 마라톤 대회고 뭐고 전부다 무효예요. 1등 해도 소용없어요. 마라톤 대회 무효라서 오늘 교회 오는 것도 무효가 돼요.

이 땅에 태어나서 우리가 겪었던 모든 질서 있잖아요. 그게 부활이 됩니까? 그게 하나님의 원수 안에 갇혀있는 몰골 아닙니까, 모습 아닙니까? 진짜 감당도 안 되는 당나귀를 지고 가는 모습 아닙니까? 그러니까 주께서는 그걸 무효화시킨다는 거예요.

내 인생 내가 감당해서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그거 다 무효예요. 어딜 열쇠 가지려고. 열쇠 없이 가는 거예요, 열쇠 없이. 빼앗겨서 가는 거예요. 비로소 여러분들은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의 비유를 이해하게 될 거예요, 탕자 이야기. 탕자는 돌아올 때 자기를 안 지킵니다. 잃어버린 양도 자기를 지키지를 않아요. 안 지킵니다.

누가복음 16장 처음에 나오는 비유는요, 우리 모든 인간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게 무슨 비유냐?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요. “불의한 청지기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를 대봐라.” 있습니까? 누가 불의한 청지기가 구원받지 못한다고 비난할 수 있습니까? 불의한 청지기 아시지요?

자기 돈도 아니고 사장 돈을 횡령해서 퇴직 후에 부정한 돈을 축적해서, 회계 조작해서 그 돈 가지고 여생을 꾸려보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그게 불의한 청지기 아닙니까? 그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가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물어보면 우리가 무슨 말 하겠습니까?

누가복음 16장 8절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 하십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주인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주인이에요. 그 당시에 주인이 따로 있죠, 비유에서 원래 사장님이 있죠. 그런데 사장님이, ‘자기 돈을 횡령한, 도둑질한 그 퇴직하는 직원이 일을 지혜롭게 했다’는 거예요. 그냥 지혜롭게 했다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고 뭘 했다? 칭찬을 한 거예요. “네가 참 지혜가 있구나.”

이 지혜가 무슨 지혜냐는 말이지요. 이게 최종적 의미 아닙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원수에서 빼낸 자와 원수에 그대로 있는 자를 구분하는 그 최종적 의미를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를 통해서 알려준 거예요. 왜 자기 포기가 안 돼? 왜 자기 포기가 안 되느냐고 그걸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따지고 있는 거예요.

옳지 않은 청지기. 옳지 않기에 죽어 마땅하잖아요. 우리가 옳지 않기에 죽어 마땅해요. 그러면 나에게 어떤 의미라는 것이 성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 말입니다. 옳지 않으면 끝까지 옳지 않은 거예요. 옳지 않은 게 어딜 구원을 넘봅니까? 그것은 말도 안 되지요.

제가 계속 말씀드리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최종적 의미에요, 최종적 의미. 모든 의미의 최종의미에요. 그 최종 의미자가 제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요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32절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잘 들으셔야 해요. 모든 사람들이 가버리고 예수님을 혼자 뒀어요. 혼자 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32절에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자, 인간들은 다 떨어졌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홀로 되었습니다. 세 번째, 그런데 예수님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면 최종적 의미가 뭡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는 것처럼 있을 경우에만 구원이 돼요. 그게 최종적 의미에요. 그러면 양들이 떨어져 나갈 때 누구로부터 떨어져 나가는가? 나 자신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줘야 해요. 나 자신이 나로부터. 내가 나로부터 헤어져야 한다 그 말입니다, 미련 없이. 미련 두지 말고, 당나귀 묶어서 무겁게 이고 가지 말고, 나를 데리고 가지 말고요, 나를 떠나세요.

안 그러면 모가지를 날리든지요. 모가지를 날린다는 그 말은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머리 부분이 바뀌는 거예요. 내 머리가 날아가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가 된다는 그 말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유일하게 이기신 분이에요. 왜? 인간들은 다 떠났으니까, 예수님 혼자 남았으니까요. 혼자 남았는데 그 혼자 남은 분이 아버지와 함께 있음으로써 뭘 이겼다? 세상을 이겼다는 거예요. 세상을 이겼다는 말은 세상과 전쟁 중이라는 말이고, 전쟁 중이라는 그 말은 이 세상은 하나님과 원수다 그 말입니다. 이 세상 전체가!

이 세상은 우리가 이길 수가 없어요. 우리가 못 이긴다고요. 이걸 이겨서 구원받고 그런 것이 없어요. 그냥 내 모가지 치세요, 라고 십자가에 갈 수밖에 없어요. 내가 어떻게 십자가 믿고 승리하고 그런 것 없습니다. 요나도 주님의 최종적 의미에서 단절되어 있어요. 시몬도 단절되어 있어요. 열쇠를 받고도.

글로바도 마찬가지였어요. 주님 보는 순간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절되어 있는 겁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건너갈 수 없는 것. 더 알기 쉽게 말씀드릴까요? 나는 구원받지 못한다. 이겁니다. 나는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는가? ‘우리’가 구원받는다, 우리가. 여기서 ‘우리’라는 것이 뭐냐?

각자의 자아가 삭제당한 자들의 그룹이지요. 삭제당한 자들의 그룹입니다. 자신의 의미가 최종적 의미에 의해서 날아가 버린 자들의 그룹이 ‘우리’에요.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러고 난 뒤에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할 때 여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할 때 그 ‘우리’가 누구냐 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우리는 나를 여기에 집어넣어서 나를 포함한 같은 성도들이, 같은 교인들을 우리라고 이해했는데 그런 뜻은 아니니다.

여기서 ‘우리’가 누구냐? 최종적 의미에 의해서 내가 갖고 있는 의미가 날아간 사람들, 잘린 사람들을 의미하지요. 최종적 의미가 나의 의미가 있던 자리에 들어와서 내 의미를 밀어내고, 죽여버리고 주님의 의미로 갈아치운 그 모임이 ‘우리’라는 거예요.

그러면 최종적 의미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최종적 의미는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51절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라고 하고 52절에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유대인들이 흥분해서 서로 공격하겠다고 나섭니다. “내가 공격할게.” “아니 내가 공격할게.” 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했어요. 또 단절되어 있어요. 54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했고요, 56절을 보세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게 최종적 의미에요. 그러니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셔서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최종적 의미이고 그 의미가 기존의 내가 살고자 하는 의미를 밀어내 줘야 해요. 인간은 부활 쪽으로 못 갑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고 했으니까.

만질수가 없어요. 부활쪽에 가신 분이 이쪽으로 뚫고 내 의미, 내가 살고자 하는 욕망밖에 없는 나에게 와서 내 의미를 잘라내고 그 자리에 최종적 의미, 나 죽이고 ‘우리’를 그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런데 그 ‘우리’ 안에 예수님과 아버지가 함께 있는 그 ‘우리’ 그 ‘우리’의 관계를 내 의미가 있던 자리에 주님께서 강제로 밀어 넣어 버리면 그것은 임마누엘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천국에 같이 살게 되는 겁니다. 그 밀어 넣는 작업으로써.

그 밀어 넣는 작업을 우리가 못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잘렸습니까? 원래 잘려야 해요. 완전히 잘리게 됩니까, 하는데 과연 잘렸는가? 당연히 잘렸지요. 잘렸는데 그 최종성은 사도행전 2장 17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이 부어주는 장소가 하나님이 우편이에요. 사도행전 2장 34절에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습니다. 잘렸어요. 그러면 다윗은 천국에 가지 못했는가? 구원받지 못하였는가? 아니요. 다윗은 구원받았습니다. 다윗은 올라가지도 못했는데 왜 구원받느냐?

34-35절에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그리고 33절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그 장소가 하나님 우편이고 모든 의미가 최종적으로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습니다. 최종이니까요. 구원에 더 추가할 것이 없어요. 그 최종적 자리에서 성령을 세례로 주시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본 것은 비둘기처럼 성령을 받은 자(요 1:32)가 장차 남들에게도 성령을 주시는 분(요 1:33)인데 그 성령을 주시는 위치가 최종적인 위치,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야 비로소 가능한 거기에서 하나님의 원수 된 자와 원수 되지 않은 자를 구분해서 원수 되지 않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우리’가 되는 거예요.

그 성령을 받은 사람은 열쇠 없이 천국 문이 열립니다, 열쇠 없이. 내가 열쇠를 소유하지 않고 주님이 열어줘서 가는 거예요. 이거 믿는 게 어렵습니까? 꼭 5백 원을 내야 합니까? 내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진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열면 닫을 자 없다’는 주님께서 천국을 열어줘서 가는데 내가 갖고 있던 규칙과 원칙, 양심, 윤리나 도덕이 그딴 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게 왜 소용 있어야 합니까? 도대체 우리가 일상을 사는 게 힘든 이유가 뭐냐?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기에 힘든 거예요. 나라는 육신의 당나귀를 어떻게 폼나게 해보려고. 내 가정, 내 가족, 남에게 꿀리지 않게 뭔가 으스댈 만한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부활되지도 못한 주제에, 사망 안에 갇혀서 죽어 있는 존재가 기껏 내세우는 힘든 의미가 그런 의미잖아요. 우리는 죽게 되고 또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당연히 부활하신 주님을 못 보지요. 그것도 늘 못 보지요. 봤다 하면 곧 떠나서 더 이상 안 보이는데요. 단번에 죄사함, 하나님의 우편에서 죄사함을 주는 이유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안에 굴복되고 그 육신도 원수의 노리개로 있어서 주께서 꾹 밟고 있는 거예요. ‘나대지 마라. 이 원수야. 까불지 마라.’

이 사실, 주께서 내가 원수에 속하고 사망에서 못 벗어난다는 이 사실을 알게 하실 때 비로소 모세와 선지자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를 그때야 알아먹는 거예요. 왜? 주님의 영이 오니까, 주님의 마음이 오니까. 육신은 비록 힘들지만…, 힘 안들 수가 없지요. 지금 암 걸려 있는데 아프고 고통스럽고 그렇지요. 피곤하고요. 육신은 폐기 처분하기까지 힘들지요.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주의 마음으로, 최종적인 의미로 가득 차 있어서 이미 우리는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살고 죽는 것은 우리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천국 가고 지옥 가고…, 그런 것도 하지 마세요. 앞으로 음식 시킬 때 청(천)국장만 시키세요. 천국 가고 지옥 가고를 왜 우리가 고민해야 합니까? 본인이 고민한다는 그것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매순간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의미는 주의 일입니다. 주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좀 내가 나에게 부담 주지 마세요. 내가 나한테 압박감 주지 마시고요. 끝으로 말씀드립니다. 불신자의 특징은 마음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받은 자의 특징은 비록 몸은 매여 있으나 마음은 자유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이미 승리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대체 우리가 뭣 때문에 안절부절하면서 살아왔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뭣 때문에 말씀에 관심도 없이 세상에 관심을 두고 살았습니까. 우리가 불신자처럼 안절부절하고 자유 없는 게 아닌지 다시 한번 주의 성령이 왔을 때 ‘다 이루었다’ 함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를 이제는 기쁘게 받아들이고 주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