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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가치(창12;1-3) 1610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15. 19:31
2016-10-12 20:34:08조회 : 69         
   아브라함의 가치 161012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아브라함의 가치(창세기 12:1-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tehK9LES27w, Hit:5
 이근호16-10-12 21:22 

아브라함의 가치 

2016년 10월 12일                             본문 말씀: 창세기 12:1-3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노아의 방주란 방주 외의 모든 영역을 저주의 장소로 확연하게 드러내는 기능을 보여주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던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나타나는 그 민족으로 인해 애초에 모든 민족이 저주받기에 합당한 민족으로 부각이 됩니다. 

이는 곧 그 어디에도 복은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복이 없다는 말은 곧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되지 않는 자들에 불과한 존재들입니다. 구원이 없다는 말은 곧 인간들이 이해하고 있는 이 세상에는 그 어디에도 하나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경우 외에는 하나님께서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인 동시에 저주의 근원도 됩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중립적인 성향을 띤 세상이라는 말이 아니라 처음부터 저주받을 자들이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모릅니다. 마치 자신들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권리나 입장에 있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복이 와서 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신들이 복과 저주를 두고 그 중의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저주받을 자들이 하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저주받을 자로 노출된다는 생각을 그들은 하지를 못합니다. 

인간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니 세상 현실을 설명할 논리도 없습니다. 성경대로 라면 이 세상은 ‘나타난 복’에 속한 자와 ‘그냥 그대로 저주받을 자’들로만 나뉘어집니다. 따라서 ‘나타난 복’의 혜택이 없는 자는 자신의 본분답게 저주받아야 합니다. 이 원리는 노아의 방주의 원리와 같습니다. 

그 때 노아 외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했습니다. 나름대로 분주한 삶을 영위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홍수라는 두꺼운 저주의 무게를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자동적으로 저주받을 만한 존재임을 늘 증명하는 그런 행위라는 것을 전혀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노아 가족에서 특별한 혜택이 주어질 때에 비로소 밝혀진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민족을 만드시는 취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 민족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민족’ 자체가 ‘복의 생산품’입니다. 곧 방주와 같은 겁니다. 방주가 물 위에 동동 떠다니면서 주변이 모든 세계가 저주의 세계임을 증명하듯이 아브라함 민족이 동동 떠다니면서 주변의 모든 민족이 저주받을 민족임을 증명하게 됩니다. 

그러한 성질을 아브라함 민족이 지니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은 곧 ‘시간이 멈쳐 버린 상태’를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찾아오심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데 이렇게 되면 기존의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간이 언약 완성을 나타내는 ‘종결’로서 기존 인간 시간을 단절시키는 현상을 보이게 됩니다. 

즉 시간이 다 마감되어야 비로소 등장하는 현상을 아브라함은 미리 당하게 됩니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바로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에 의한 멸망 사건’입니다. 그 도성 안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었습니다. 롯이 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짐받은 것은 순전히 아브라함 덕입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창 19:29) 이 세상 모든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 성같이 불로 심판받는데 이러한 세상의 실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는 현상이 개시(開始)되면서 병행해서 나타나야 하는 현상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에게만 선택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는 것은, 기존의 모든 여타의 신들이 모두 우상에 불과함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세상에 널리고 널리 모든 신은 전부 인간 자신의 기존 ‘있음’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 가치의 확장을 노리고 지어낸 가짜 신들입니다. 참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일하십니다. 

기존의 ‘자기 의(義)’를 버리고 기존의 ‘자기 혈육’을 버리고 기존의 ‘자기 땅’을 버리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에 나타나심으로 새로운 의(義)와 땅과 혈통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는 이 땅에 집착하는 인간들이 자기 행위로서 관계가 성립되는 그런 신들을 남발하고 있음을 드러내어 줍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없음’과 ‘저주받음’을 인정치 않으려고 합니다. 언약의 마지막 대목에서 참된 인간은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사실을 택한 자들이 아닌 이상 알 길이 없습니다. 아브람마저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기존의 세상적인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줄기차게 지적받아야 했습니다. 

히브리서 11:13-16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지면서 땅과 하늘의 경계선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세상의 내막도 알고 하늘의 내막도 압니다. 이 기능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가족에서 육적인 요소를 계속 들추어내시고 지적했습니다. 그 지적의 과정을 더불어 복은 그 완성을 나타냅니다. 

신약에 와서는 복의 실체가 공개됩니다. 그 복은 곧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여덟가지 복이란 곧 예수님과 같은 자리를 공유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천국이 저희의 것입니다”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의와 복음을 위하여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로 요약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자리에 함께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 복입니다. 곧 세상을 떠나 있으나 안 떠나있으나 상관없이 이미 영생얻은 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나 죽으나 상관없이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10-13 16:46 
57강-창 12장 1-3절(아브라함의 가치)1610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2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13페이지입니다. 

  

창 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내용을 보게 되면 아주 충격적인 것은, 복이 없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일체 복이라는 것이 없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어떻게, 그 생산하는 현장에서만 비로소 최초로 복이 생기는 겁니다. 이 땅에 아브라함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복은 없는 겁니다. 복이 없다는 말은 우리가 복 받을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이고, 복 받을 자격도 안 되면서 복을 노리면서 복이라고 우겼던 모든 것은 실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저주가 되는 겁니다. 

  

복이 아니고 저주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최초로 복된 민족이 등장합니다. 복된 민족이 등장한다는 것은 노아 때 방주가 등장하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노아 때 방주 등장할 때 어떻게 등장했습니까? 물로서 저주 내리겠다는 전제하에 방주 만들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새삼스럽게 복된 민족, 그것도 민족이 없는데 복된 민족을 새삼스럽게 만들겠다는 것은 모든 혈통의 민족들은 심판받고 저주받는 민족이라는 것을 아브라함민족을 태생시키면서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방주는 물 위에 떠다니지요. 물은 저주의 뜻으로 주어진 것이고 그 안에 동동 떠다니는 방주는 유일하게 거기에 구원이 있고 복이 있음을 보여줬다면, 이 세상에 유일하게 동동 떠다니는 민족이 있습니다. 그 민족외의 모든 민족은 아무리 번창하고 잘 산다 해도 그것은 저주의 번창이고 심판의 번창이고 지옥 갈 자들의 번창일 뿐입니다. 

  

동동 떠다니는 민족, 아브라함민족만이 복된 민족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새삼 복을 언급하고 나서신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이것밖에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면서 자기 밥벌이에 바빠서 세상은 어떻게 무슨 중심으로 돌아가는가, 거기에 대해서 신경도 안 쓰고 관심도 없어요. 

  

제가 강의를 하러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 거기에 참석하시는 분들 얼굴 보면서 속으로 묻는 것이 있어요. ‘신앙생활 하고는 계십니까?’ 밥 잘 먹고 사십니다, 가 아닙니다. 가정은 평안하시고, 그것이 아니고 신앙생활은 하고 계십니까?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 때문에 그렇게 기쁘고 감사가 됩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얼굴에 나타내고 있습니까?” 

  

이것을 속으로만 묻는 거예요. 겉으로는 “요새 별 일 없지요? 생활은 잘 하시지요?” 이렇게 묻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물어요. ‘신앙생활 잘 하고 계십니까? 말씀으로 늘 기뻐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말씀을 갖다 팽개쳤습니까?’ 제가 보게 되면 신앙생활 할 줄을 몰라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지를 몰라요. 모든 상담에 신앙에 관한 상담은 거의 없고요. 자기 힘들다는 거예요. 

  

말씀으로 감사했다는 것, 이런 말씀에 너무 은혜 받아서 고맙다는 것, 그런 소리가 들려오지를 않습니다. 처음에 십자가마을에는 그런 글들이 곧잘 올라왔는데. 사드가 없는 상태에서 미사일이 날라 오면 그대로 폭격을 당하지요. 너만 잘 믿나, 이래가지고 글을 올릴 수가 없지요. 그런데 정말 귀한 글들이 많이 올라옵니다. “주님이 죄인 되게 하셔서 은혜로 삽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글들이 드물어요. 거의 없어요. 늘 찾고 있지만 잘 없어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해서 포기를 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포기했다는 말은, 자기가 생존에 몰두하고 있다는 뜻이기에 이것은 신앙생활이 전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되고 있지 않다는 말은 오늘 본문과 견주어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주께서 복을 생산하는 생산현장이 아닌 것이 되는 거지요. 

  

아브라함이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복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절대로 복을 가질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겁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만들어내는 거지요. 아브라함이라는 복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일종의 방주로서 방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복을 가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신앙생활 하게 되면 복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의 뜻과는 전혀 상반되는 식으로 신앙도 아닌 종교놀이를 하지요. 다시금 정리해서 묻고 싶은 것은, “신앙생활 즐겁게 잘 하고 계십니까?”를 묻는 거예요. “어떻게 밥이나 먹고 삽니까? 집안은 그동안 평온합니까?”를 묻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제가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제2, 제3의 아브라함으로 잘 생산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복의 근원으로 잘 만들고 계십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의미하거든요. “하나님의 관계성이 너무 잘되어서 고마워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그것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 땅은 노는 장소가 아니고 저주받는 장소에요. 창세기 3장에 근거해서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평생 살도록 되어 있는데 이마에 땀을 흘려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대가가 없어요. 그 대가라는 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죽는 것이 대가였습니다. 이 땅에서 죽는 것.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새삼스럽게, 이 ‘새삼스럽게’라는 말이 중요한데, 새삼스럽게 복을 만듦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는 복이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특정인물, 특정민족 존재자체를 복 덩어리로 만들어버리면 결국 이 세상은 복이 없다는 것을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중입니다. “복은 없다. 네가 뭔데 복을 바래? 복을 바란다고? 그것은 백발백중 풍성한 저주를 지금 갖고 있다고 보면 돼. 복이 없는데 복을 바란다는 그것은 말이 안 돼.” 

  

복은 없는 거예요. 복이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어떤 분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신천지 두 사람하고 세 시간 동안 싸움을 했다는 거예요. 그 신천지가 주장하는 것이 뭐냐? 당신은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는 그 이야기에요. 구원받고 싶지 않느냐는 그 말이거든요. 이 세상에 구원은 없어요. 사람이 구원이 없는데도 구원을 기대한다는 것은 자기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무엇을 가질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셨다는 그것을 내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노아방주 때 일어난 현상이 역시 항상 반복이 되는데, 그것이 뭐냐? 죄라는 것은 자기를 쳐다보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괜찮은 내가 뭘 가지게 되면 나중에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는가?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생산이 아니고 소유입니다. 

  

노아방주 때 특징이 있었어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 모든 특징이 뭐냐? 어떻게 내 것을 가질 수 있느냐는 그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나는 나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가 있느냐를 생각하는 거예요. 흔히 인사말로, “잘 지냅니까? 밥 먹고 삽니까?” 이 말은, 여전히 당신은 당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그런 인사라는 말이지요. 

  

그 인사 말고 다른 인사를 하면 그것은 시비 거는 것이 되어서 다른 말을 못하지요. 하지만 말은 그렇게 건네지만 얼굴을 보면서, 말씀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얼굴, 가벼운 얼굴과 시선으로 늘 나오겠지요. 내가 눈이 어두워서 잘 못 봤겠지요. 말씀으로 사는 기쁨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태반의 사람을 보게 되면 “목사님, 내 것 그대로 유지한다고 애먹었습니다.” 그런 느낌이 와요. 제가 잘못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금요일에 안양과 서울에 가보면 또 알겠지요. 

  

“내 것 내가 쥔다고, 내 것 내가 가진다고 그렇게 애를 썼습니다. 그래도 인간성이 좋아서 오늘 성경공부 나왔습니다.” 하는 그런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노아방주 때 세상이 멸망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거기에 보탠다면 종교생활 잘하고. 그거 하나 더 보태는 거예요. 백날 기도하고 헌금하고 교회 나오고, 이것이 전부 누구를 위해서? 본인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거예요. 본인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객기인지 몰라요. 본인이 복이라는 거예요. 복 꼴좋다. 복이 그렇게 죽습니까? 본인이 복 자체라는 거예요. 이것은 이유도 없다는 거예요. 무조건 내가 그러고 싶다는 겁니다. “나? 복덩어리.”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없어. 그냥 내가 그렇고 싶어. 끝.” 

  

이름도 아브라함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주시는 것은 아브람이 복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없는 존재에요. 복의 근원자체가 없다니까요. 지금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도 복의 근원이 없는데 복의 근원을 만들어주겠다는 그 말씀 자체가 이제 시발점이 되는 겁니다. 복의 근원 만들기 시작! 

  

시편 1편에 보면 구약에 복이 나오는데,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게 뭐냐 하면, “복이 있다는 것은 말씀이 말씀대로 스스로 활약을 해서, 곧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활동을 하신 그 결과물로서의 접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이에요. 

  

그 전제는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결국 복이 없는 거예요. 복이 없는데 복의 덩어리를 방주처럼 만들었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주변은 복의 근원이 비로소 등장함으로써 모든 민족은 저주로 확정된다, 복이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점점 더 저주의 범위도 넓혀지는 겁니다. 이것은 새삼스럽게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 속에서 뭐가 뭔지도 몰랐는데 손전등을 비추면 뭐가 있는지가 드러나는 것처럼 복의 근원이 손전등이 된다면 복 가지고 죽 가보니까 가는 곳마다 저주의 바다를 이루었다는 겁니다. 

  

마치 방주가 가는 그 모든 곳이 물 아래 잠겨서 죽음의 세상이 된 것처럼 이제 복의 근원되는 아브라함의 민족이 가는 곳마다, 왜 이들은 저주받아 합당한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성도를 하나하나를 하나님께서 성령세례 주셔서 만들게 되면 성령세례 있는 그곳이 선교지가 되는데, 사는 주거지가 되는데, 그 주변은 전부 다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가 돈 때문에 기뻐하고, 가정화목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 받은 것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해야 되고 그것뿐이에요.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되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동동 뜨는 방주로서 살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다른 감사가 있을 수가 없어요. 

  

글쎄 그 감사의 기쁨이 얼굴에 나타나는가를 보고 싶다니까요. 구원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곳에 하나님이 없다는 뜻이에요.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도 되고 자동적으로 저주의 근원도 되거든요.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니까. 복의 근원, 다른 말로 하면 저주의 근원, 이 근원이 등장하는 그 순간에만 하나님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는 현장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이 없는 곳의 특징이 뭐냐? 하나님이 굉장히 많아요.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굉장히 많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많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들이 많게 되면 인간 자기 자신을 복덩어리로 간주하기 때문에 자기의 복을 계속 확장시켜줄 신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행함으로 복 얻고, 행함으로 구원받는 신들이 이미 저주의 이유로서 이 지상에 가득 깔려 있어요. 

  

밤중에 남산에서 서울시내 내려다보면 십자가불꽃이 많은 것처럼 저주가 가득 깔려 있어요.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아브라함에게 있어요.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데 왜 계시지 않느냐 하면, 유일하게 있다고 우기는 자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 세상에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인간과 함께 있지 않기에 계시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있다고 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만 하나님이 있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 창세기 12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은 없어요. 왜? 그 땅은 없어요. 아브라함은 몰라요. 

  

다만 뭐가 있는가? 지시할 하나님만 임재하고 아브라함과 동행할 뿐이지요. 진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방주를 끌고 다니는 거기에만 하나님이 나타나고 그 외에는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기존의 인간들은 자기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기존재를 인정해줄 하나님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는 겁니다. 다 가짜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심부름꾼으로 부립니다. 이거 해주세요, 저거해주세요, 그런 식으로.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아브라함은 갈 길을, 갈 바를 몰라요. 아브라함만이 유일하게, 그 다음에 하나님이 지시할 때까지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아는 자가 아브라함이에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누가 없느냐 하면, 아브라함 본인도 있어도 존재하지 않는 자가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있음에 비로소 나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기에 그래요. 하나님이 지시한 바가 있어서 비로소 내가 나 되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지시가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있으나 마나한 존재고 의미 없는 것이라서 이것은 신경 쓰면 안돼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비로소 죄라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겁니다. 

  

여기 있네, 그 자체가 이미 죄에요. 사람이 ‘여기 있네.’를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나는 어떻게 살지? 뭘 하지?’ 계속 자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는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지? 우리 아파트가 몇 평이지? 우리나라 어떻게 되지? 한국축구는? 이란에게 1대 0으로 졌는데 월드컵은 어떻게 될까?’ 프로야구 좋아하는 사람들 같으면, ‘내가 엘쥐 팬인데 플레이오프전 언제 하나?’ 그게 전부 다 ‘나’가 먼저 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에요. 

  

본인이 주체가 되어버렸어요. 본인이 주체니까 신을 믿든, 하나님을 믿든, 뭘 내가 선택하든지 간에 다 나 좋으라고 선택하고 나 좋으라고 믿는 겁니다. 그러다가 자기 뜻대로 안되면 불평하고 불만을 해대고 늘 벌벌 떨면서 감사가 없고 불안하고. 그런 종교는요, 아브라함이 오기 전에 이미 이 세상에 쫙 깔렸어요. 

  

인간이 있는 곳에 신이 있어요. 인간이 신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지시가 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니 계신 거예요. 철저하게하나님의 말씀에 종속, 예속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 된다면 이미 그것은 자기가 복의 근원으로 생산된 생산품이기 때문에 자기한테 하자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보면서, ‘잘못했다, 잘했다.’ 그것 자체가 무의미한 거예요. 그러나 아브라함이 모든 인간들처럼 내가 있다고 한다면, 내가 잘해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전부 다 행함 종교입니다. 내가 못하면 저주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다시금 이야기하지만 복과 저주는 인간들 본인이 선악지식 가지고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복을 만들어낼 경우에만 복이 생기고, 그러면 그 외에는 자동적으로 저주가 노출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세상을 유일하게 제대로 보는 바른 눈입니다. 이런 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 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오늘도 복의 근원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이 어떻게 저주이고 지옥인 것을 증명해낼지? 나를 사용해서.’ 그런 식으로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가 왔을 경우에 아브라함이 어떤 상태가 되는가? 그것은 시간이 멈춰집니다. 아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시할 땅으로 가게 되면, 하나님이 임재한 순간에는 자신의 과거와 단절되고 그 자체가 완성이 됩니다. 이 말은 상당히 어려운 말입니다. 

  

시간이 멈춘다는 말은, 나를 위한 내 시간은 거기서 거부당한다, 하나님의 의해서 거절당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까 앞으로 몇 년 더 살겠습니까?”라는 미래는 절단되고 떨어져 나가요. “하나님, 진작 오시지요. 12년 동안이나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요.”라는 그것도 떨어져 나가요. 하나님과 함께 있어버리면, 마치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함께 있는 것처럼 그 순간 완성이 되어버려요. 

  

아버지의 뜻만 그대로 나타나 버리면 언제까지 살든, 언제 죽든 그 자체가 영생이고 구원입니다. 그 자체가 복이 되는 거예요. 오늘 죽어도 저주받은 것이 아니고 오늘 죽은 그 자체가 복이 되고, 몸이 아파도 그것이 복이 되고, 시간이 멈추는 거예요. 왜 그렇게 시간이 멈춰진다는 단언을 하는가? 

  

아브라함이 복의 기능을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바깥을 향하여, 너희들은 왜 저주를 받아야 되는지의 이유를 보여주는 기능이 발휘됩니다. 복을 받은 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복이 없는 곳을 지적하는 특징을 갖고 있어요. 이 특징을 어디서 우리가 단정하고 확정할 수 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독생자로 오셨을 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이 세상이 어두움인 것을 지적하는 말씀을 주셨거든요. 

  

그러면 설교 처음에 했던 말을 다시 해 봅시다. “요즘 신앙생활 잘 하고 계십니까?”라는 말은 “주님한테 말씀으로 잘 지적받고 있습니까?” 이런 물음과 같은 거거든요. 아브라함은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이에요. 세상의 육적인 것과 영적세계의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이에요. 마치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아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이지만 성령을 통해서 태어났어요. 경계선에 있는 겁니다. 

  

세상도 알고 주님도 알고 다 알아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을 받을 때는 주의 뜻을 유일하게 알고, 동시에 세상이 얼마나 주의 뜻과 어긋나고 있는 것도 알지요.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의 죄를 지적하면서 그 죄가 아브라함 같은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죄로서 지적을 받게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의 근원으로 그냥 용서받아 구원되었다는 것에 또 다시 감사를 느끼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조가 롯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이 그 소돔과 고모라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그게 롯의 신앙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기도였습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소돔과 고모라를 불 질러 버렸어요. 아브라함의 위력이 이 정도라는 말이지요. 복의 위력이 이 정도라는 말이지요. 

  

아브라함과 관계된 그 조카만 건졌다. 다른 사람은 유황불에 죽었다. 시간이 멈춰버리면 이것이 바로 세상 모든 것이 끝장났을 때 지옥과 천국을 그런 식으로 앞당겨서 표현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성령이 임한다는 것을 느껴버리면 “주여, 그만 살아도 상관없네요.”라는 기쁨이 생겨날 겁니다. 

  

그런데 아까 방주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이 그 때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다는 말이지요.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된 말씀을 이야기해버리면, 좋기는 좋지만 이번 12월에 조카가 결혼식 하는데 결혼식 끝나고 나면 주께서 재림해야 되고, 이번 1월에 대전에서 겨울수련회가 있는데 그것마저 하고 주께서 재림해야 되고, 항상 시간, 자기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자기가 포기를 못하고, “다 죽어도 나는 계속 살아 있어야 마땅합니다.”를 고집하게 돼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빙자한, 자기가 자기를 쳐다보기이고, 그렇게 되면 바르게 살려는 행함이 튀어나와버리고, 그러면 그것은 자기가 꾸역꾸역 조작해낸 가짜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지고 계속 지적하지요. 지적하면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것은 단절이에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지 아니하면 갈 수가 없어요.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는데 그 지시할 땅은……, 아까 제가 이 땅은 복이 없다고 했지요? 이 땅은 구원도 없다고 했지요? 이 땅은 하나님도 없다고 했지요? 그 말이 맞아요. 

  

그 지시할 땅은 천국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 땅에 그 지시할 땅이 있는지 가 봤는데, 돌아다녀 봤는데 없더라. 어디 있는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갈 곳은 본향인데 그곳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다. 그곳을 바라본 거예요.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5, 16)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결국 나그네 생활을 한 거예요. 나그네라는 뜻은, 이 땅에 머물 곳이 없어라. 그것이 나그네입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도 없고, 구원도 없고, 영생도 없고, 복도 없더라. 이 땅의 본질은, 이 땅 자체가 이미 저주였더라, 지옥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복의 자녀로 생산한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지시하시고, 아브라함은 지시한 땅으로 가면서 뭘 겪느냐 하면, 이 땅에 밀착되어 있고, 집착되어 있는 것을 주께서 자꾸 떼어 내는 거예요. 떼어 낼 때 자기 의로부터 떼어 내고, 자기혈통으로부터 떼어 내고, 자기 땅으로부터 떼어 내고,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는 세 가지 복입니다. 

  

너의 의를 믿어서는 안 되고, 네가 가는 땅을 믿지 말고, 너의 혈통을 믿지 말라고. 주께서는 새로운 땅, 새로운 혈통, 새로운 하나님의 의를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가나안 땅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주실 땅인 줄 알았어요. 히브리서 11장과 완전히 상반됩니다. 그 땅에서 멸망했습니다. 가보니 멸망했어요. 

  

주께서 낸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스마엘 계통이 아니고 이삭같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생겨날 인간이지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태어난 자손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육신의 할례는 할례가 아닙니다. 마음의 할례라야만 이스라엘의 할례지요. 이러한 아브라함의 내막은 마지막에 신약에 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지적하면서 이 세상을 저주라고 고발하는 식으로 복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신약의 복은 무엇인가? 신약의 복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는 복이 있나니, ……는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의 내용을 모른다 치고요. 그냥 여덟 가지의 복이라고만 알려주고, ……는 복이 있나니, ……는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 이 빈칸에 채우는 것을 시골의 교회 다니는 할머니들에게 문제를 내 보자는 말입니다. 가상적으로. 시골의 할머니들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다 받거든요. 

  

“할머니 시험 칩니다. 빈칸을 채워서 쓰세요. ……는 복이 있나니, 그 괄호 안에 여덟 가지만 적으라고 한다면 뭘 쓰겠습니까? 은행에 입사한 아들이 지점장 되는 복이 있나니. 수능 250점인데 미달된 탓에 서울농대 들어가는 복이 있나니. 땅 사놨는데 땅 값 올랐으니 복이 있나니. 군대 간 아이가 군대생활을 잘해서 휴가를 또 나왔으니 복이 있나니. 이웃집 영감 마누라 죽은 지 15년 만에 재처를 얻었으니 복이 있나니. 우리교회 선교사 많이 보내니 복이 있나니. 우리교회 헌금 많이 나오니 복이 있나니. 우리교회 예배당 넓히고 주차장도 넓히니 복이 있나니. 

  

이 모든 복의 특징은 뭐냐? 나 잘되기 위한 복이지요.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십자가를 갖다 대면 그것은 복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탄이 만들어낸 풍성한 저주덩어리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강의할 때마다 얼굴 보게 되면, 심령이 가난한 얼굴 좀 봤으면 좋겠어요. 

  

삶에 찌든 그 모습 말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세상 형편을 보고 애통하는 자. 다시 말해서 이렇게 “복이 있나니.”의 중심은 예수님의 자리와 너의 자리의 차이가 있나니, 그걸 아는 자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복의 뜻은, “너희들이 내 자리에 들어와서 함께 있으면 복이 있나니. 나처럼 십자가에 죽게 되면 복이 있나니. 나처럼 이 땅에서 저주받고 죽게 되면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이다.” 그런 뜻이에요. 

  

애통하는 자는, 예수님이 애통한다는 뜻이에요. 의에 주린다는 말은 예수님이 의에 주린다는 뜻입니다. 의에 목마르고 주린 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뜻이에요.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예수님의 심정으로 너희를 불쌍히 여긴다는 그 말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예수님만이 청결하다는 그런 뜻이에요. 

  

예수님과 동석을 하고 같은 자리에 있는 자가 누구냐, 그들이 복이 있나니.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뿐이에요. 선지자는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미리 당겨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이 마음을 선물로, 택배로, 새언약이니까 허락 없이 그냥 마음속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 성도는 날마다 지적을 받지요. 저주를 복이라고 여겼던 그 착각과 오해를 지적받으면서 ‘아, 스데반집사처럼 일찍 죽는 것이 복인데 뭐하려고, 대체 무슨 낙을 보겠다고 이 땅에서, 이 땅에서 무슨 낙을 본다고, 그저 악착같이 나 잘되고 남에게 기 안 죽으려고, 나도 돈 있다, 나도 아파트 넓은 것 있다, 나도 자식 잘 키운다, 나도 우리교회 크다, 나도 명품가방 들었다.’ 이런 세상적인 것들, ‘나도 너에게 기죽지 않을 정도로 인간답게 산다.’ 그런 것들에 얽매여 있을 때 성령께서는 팔복을 가지고 “옜다! 이거나 먹어라.” 하고 지적질을 해 버리지요. 

  

얻어맞을 때 우리는 숨어 있는 감사와 기쁨이 나옵니다. “주여,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니까 제가 천국 되었습니다.” 하는 고백, 이게 바로 복 있는 자, 주를 인하여 복 있는 자가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틈만 나면 어떻게 세상 사람들처럼 잘되어 보려고 애를 쓰면서 피곤에 지쳐 있는 저희들, 이 시간도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말씀을 주셔서 저주를 끌어 모으기 위해서 애쓰고 분주하면서 평생을 다 보내겠다는 이 실상을 감추지 않고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복이 아님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