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의 말로
선지자의 말로
2025년 7월 1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3:6-7
43:6 곧 남자와 여자와 유아와 왕의 딸들과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겨 둔 모든 사람과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영솔하고
43:7 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이러하였더라
바벨론의 침략을 피해서 가나안 땅 바깥으로 사람들 중에서, 가나안 땅에서 다시 돌아온 유력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멸망되기 전의 유다민족을 다시금 일으켜 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구색 맞추듯이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사이라고 예레미야를 평하면서도 예레미야를 통해 정작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니 그들은 단번에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전하여 주신 말씀은 그들의 마음 깊숙이 숨겨놓은 비밀을 미리 선지자의 입을 통해 폭로 당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으로 가면 내가 너희들을 지독히 저주할거야”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예언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그 대신, 그 말씀을 받았던 예레미아를 자신들도 동행하게 했습니다. 일종의 참 선지자를 볼모 잡듯이 하는 겁니다. 즉 “우리 망하면 선지자와 그의 비서 바룩도 같이 망하니 그런 일이 생기겠는가”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장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일생을 우려먹을 때까지 끝까지 우려먹는다는 겁니다. 말씀대로 그들이 망합니다. 그 망함에 예레미야 자신도 포함시킨다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선지자의 말로가 예수님과 더불어 해같이 빛난 영광으로 마감됨을 알아야 합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마 17:1-3)
하지만 이러한 최종 모습에 이를 때까지 선지자들은 지상 생활을 철저하게 자신이 전하는 말씀대로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이점은 예수님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먼저 말씀 주어진 말씀에 따라 인생을 전개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 살면서 그들이 한결같이 추구하는 게 무엇일까요? 왜 사람들은 타인을 찾습니까? 그것은 다양성 가운데 자기 안정화를 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인간 뿐만 아니라 동식물 전체가 근본적인 근성에 해당됩니다. 타인을 위한 삶은 없고 자기 안정화를 최종 목표로 본능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파견된 총독이 유대인에 의해서 암살당한 상태에서 바벨론 당국자들이 한층 혹독한 보복이 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되는 가운데 그들은 더는 가나안 땅에 남아 있을 수 없어 보다 안정적인 국가인 애굽으로 가기를 이미 마음 속에 결정했습니다. 바벨론 대제국도 아직은 애굽 나라까지 함부로 할 수 없는 정국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안 듣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 안정성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이 땅에서 살거냐’가 아니라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가 관권입니다. 당연히 그 시대 선지자가 보여줄 모습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빠져나간다’가 됩니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비참합니다. 기록된 말씀대로 살아가신다는 예수님의 말로는 당연히 처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즉 숱한 사람들은 선지자의 말로에 오해하게 마련이다는 겁니다.
지독하게도 말 안 듣는 사람들과 더불어 예레미야는 애굽에 망하려 갑니다. 그 전에 바벨론 당국에서 예레미야에게 좋은 조건으로 바벨론 살 것을 권유했지만 선지자는 거절했습니다. 신약의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위상에 대해서 태어나지 전부터 대단했습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5-17)
하지만 세례 요한의 말로는 이러합니다.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침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 가니라”(마 14:5-11) 인간들은 선지자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네들끼리 권력 개임을 합니다.
거창한 것을 판돈으로 내거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에서 온 권세를 받았다’고 민중들이 알고 있는 세례 요한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들 존재성의 안정화를 우선으로 하는 자들의 당연한 삶의 태도입니다. 말씀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자기네들 숨돌리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이들은 자신이 이미 말씀의 권역으로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저 말씀 믿는다는 자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별로라는 사실에 안심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고린도전서 15:51-53에 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미 ‘썩을 것’에 해당됨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죽을 것’에 속해져 있음을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정화에 기대걸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안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말씀이 말씀되는 말씀의 안정화가 우리에게 구원합니다. 인간들은 시력검사표처럼 갈수록 희미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변명하지 말고, 싸고 돌지 말고 그저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62강-예레미야 43장 6~7절(선지자의 말로)25071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3장 6~7절입니다. 구약성경 1121페이지입니다.
“곧 남자와 여자와 유아와 왕의 딸들과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겨 둔 모든 사람과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영솔하고, 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이러하였더라”
오늘 본문을 보면 몇몇 사람의 명단이 나와 있지요. 대표자들입니다. 또 한 분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입니다. 사람은 여호와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아니면 같은 인간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안 만드신 적이 없어요.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설교자, 주의 종인 사도나, 오늘날의 성도에게 매 순간 죽을 때까지 주어지는 양단 길의 결정 사항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할래, 하나님을 기쁘게 할래?’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너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래,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래?’라는 것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해요. 아주 근본적인 문제이지만,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는 문제.
왜 사람은 뭉쳐서 돌아다니는가. 왜 사람은 뭉쳐서 살아가는가. 왜 그런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들은 다양함 속에서 안정성을 추구하게 되어있어요. 다양함에서. 너와 내가 다르고, 나와 저 사람과 다른 것을 아는데, 문제는 다름 속에서 내가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방도를 찾겠다는 겁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붙잡아서, 그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고, 그건 말도 안 되고요, 내가 안정스럽게, 여유롭게, 마지막 여생을 끝낼 수 있는 방안을 타인으로부터 취득하겠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잖아요. ‘너 어디 취직했는데?’ 중소기업, ‘너는?’ 대기업, ‘와, 좋겠네’라는 이게 무슨 말이에요? 그 대기업이 내 것입니까? 아니잖아요.
타인을 통해서 내 안정성에 대해서 내가 추구하는 거, 이것이 바로 인간이 쉬지도 않고 해내는 삶의 방식입니다. 또 장례식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장례식에 가니까, 한쪽 테이블에는 삼성이라는 대기업에서 복지 차원에서 제공된 직원들에게 주는 갖가지 혜택, 삼성 로고가 딱 새겨져 있어요. ‘삼성’
다른 쪽 테이블에 가니까, 이런 로고가 있어요. ‘코레일’ 한국철도공사에서 제공하는 복지 혜택이죠. 그러면 중소기업 다니다가 장례 치르면 그런 것이 있습니까? 없어요. 기껏해야 보람상조? 회사에서는 아무것도 없어요. 대기업의 복지가 그 정도로 빵빵하게 잘 제공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낫다는 거예요.
‘왜 나은데?’라고 물어보면 내가 안정적으로 내 인생을 사는 데 보탬이 되는 것이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이 낫다는 거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일단의 사람들이 하나님은 빼고, 인간들끼리 뭉쳐서 본심을 드러내는데, 이게 뭐냐 하면, 애굽으로 가서 살자는 겁니다. 이들이 누구냐. 이들은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바벨론으로 갔다가, 또는 다른 나라로 갔다가, 누가 오라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알아서 옛날 살던 가나안 땅으로 알아서 귀환한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귀환하니까 바벨론 통치하에 있잖아요. 그래서 총독을 죽이고 제2의 이스라엘을 이어가려고 애를 쓴 독립투사들인데, 이제 총독 죽고 나서 바벨론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더 참혹한 살육전을 벌일 것이 뻔할 것이기 때문에, ‘야, 우리가 총독을 죽였는데, 저쪽 당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 빨리 피하자’라고 피하면서 어디로 가느냐면, 애굽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과 인간들의 만남에서 대화하고 생각하고 의논을 모으는 것은 다양함 속에서 각자의 단일성, 내가 내 몸뚱아리 하나 어떻게 보존하는가에 모든 행동과 의지의 방향성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냥 가면 되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서 누가 눈에 띄죠? 6절에 보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겨 둔 모든 사람과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영솔하고”라고 나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그리고 예레미야의 제자 바룩, 선지자에 속한 두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다시피 해서 ‘야, 우리 애굽 가는데 가자’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그전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애굽에 가면 죽는다고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우선이 아니에요. 말씀이 왜 우선이 되겠어요. 우리의 촉, 또는 감각.
우리는 평소에 어떤 촉이 있느냐. 모든 생물, 동물과 식물에도 있고 미생물에게도 있는데, 어떻게 행동하면 그다음 어떻게 내가 생존해서 남을 것인가 하는 촉이 발달한 겁니다.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생존하면 이건 선이고, 생존 못 하면 악이 되는 거죠. 선악체제에 의해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이 사람들이 하나같이 반박하는 사람이 없어요.
여기서, ‘나 애굽 안 갈래’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왜냐 하면, 애굽은 안정되어 있거든요. 현재 자기 나라 고향은 바벨론이 와서, 엉뚱하게 외부에서 들어와서, ‘여기가 내 나라다’라고 하면서 다 죽이려고 작심하고 있는 판에, 이건 짐승이라도 알겠어요. ‘빨리 피신하자’ 피신하는데, 그냥 가지 말고, 담보로 포로 잡듯이 가기 싫어하는 예레미야를 강제로 납치해서 데려갑니다.
볼모로 잡은 거죠. ‘하나님, 당신 선지자를 우리가 볼모로 잡았습니다. 우리 치면 당신의 충실한 종 예레미야가 날아갑니다’라고 말로는 든든한 뒷배 잡았다고 잡는데, 설마, 선지자의 말도 합격하는데, 아무리 선지자 말이 ‘애굽 가면 죽는다’라고 하지만, 설마 자기 선지자까지 죽일 리가 있겠냐고 생각하면서 담보로 데리고 가는 거예요.
예레미야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전에, 처음에 바벨론이 가나안 땅에 쳐들어왔을 때, 예레미야에게 이야기했다고요. ‘너 바벨론에 가서 살래, 아니면 가나안 땅에 그냥 살래?’ 이렇게 딱 두 개밖에 없어요.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소리 없어요. 이건 바벨론 왕이 제시했어요. ‘예레미야, 당신이 바벨론이 이긴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우호적 존재다. 우리가 호강시켜 줄게. 바벨론 가자’
현재 귀족들, 유명한 사람들, 심지어 다니엘도 갔잖아요. 유명한 사람들 갔으니까, 당신도 가자는 거죠.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의 지시가 허락하지 않았어요. 어떤 할 일이 있습니다. 그 할 일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뭐냐? 선지자의 말로는 망한다는 겁니다. 망한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끝까지 우려먹을 때까지 다 우려먹어요. 꼭 곰탕 같아요. 다 나올 때까지 탈탈 우려요.
뼈 속에 영양분 다 나올 때까지 탈탈 끝까지 다 써먹어요. 그리고 껍데기만 남는 선지자 예레미야는 비극적으로 애굽에서 망해버려요. 애굽에 가면 망한다는 그 말씀에, 자기가 같이 합류해서 망함을 온몸으로, 마지막 인생 끝까지, 말씀 안 들으면 다 망한다는 것을 다 보여 주는 이 인생이 선지자의 인생이었습니다.
터널을 팔 때, 요새는 터널을 쉴드(TBM장비)라는 기계가 파요. 기계가 자동으로 땅굴을 다 팝니다. 땅굴을 파면서 제가 궁금한 점이 있어요. 저 땅굴을 파는 쉴드라는 저 기계는 나중에 땅굴이 다 뚫리고 난 뒤에는 어떻게 처리할까? 얼마나 덩치가 큰지, 그 기계 직경이 터널의 직경이에요. 꽉 막혀있는 땅을 쉴드 기계를 조립해서 그냥 밀어 붙여버리면, 쉴드가 면도날처럼 돌아가서 땅이 파이면서, 파인 흙들은 퍼내요.
그렇게 쉴드가 앞장서서 밀어붙이면, 그 밀어붙이는 끝 지점이 터널 공사 끝이에요. 그 기계는 어떻게 처리할까? 그 기계는 안 가져갑니다. 터널 끝나고 난 뒤에 땅속에 그 쉴드 기계를 묻습니다. 해체해서 데려가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요. 그리고 그 쉴드하면서 다이아몬드 날이 전부 나갔어요. 다 날라갔어요. 딱딱한 암석을 다 판다고 이빨 나가듯이 다 나갔어요.
그래서 주요 부품은 다음에 쓰기 위해서 따로 보관하지만, 정작 땅과 정면으로 마주했던 그 날카로운 쉴드 기계는 고인이 되어서 그 땅에 묻습니다. 쉴드는 일은 일대로 다 해놓고 그 일한 로봇은 인간이 죽여서 땅에 묻는 슬픈 말로죠. 선지자의 가는 길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건강 진단할 때, 뭘 하느냐 하면, 시력 검사표 앞에 서서 시력 검사하죠.
쭉 하게 되면, 처음에는 굵직한 글자들이 잘 보여서, 7, 8, 6,..., 안경 쓴 채로 잘 보여도 자기 포부감이 막 일어나요. 원이 어느 쪽으로 뚫려있는지 방향도 잘 보이고요. 그런데 검사하는 간호사가 자꾸 밑으로 내려가요. 그때는 자존감이 확 떨어지죠. 5? 인가..., 4?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이 뚫렸는지 흐릿하고, 더 밑으로 내려가면 나중에는 안 보입니다. 그게 선지자의 자아입니다. 성도의 말로예요.
‘뭐 젊을 때는 내가 대기업 회사 임원이고, 내가 잘 나갔고, 부동산 이만큼 일궈냈고, 자식 3명 다 키웠고, 나 하나 고생해서 너희들 유학 다 보냈고...’라고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힘이 없어요. 자기 몸 하나 간수 못 하고, 옆에서 돌보지 않으면 바보 등신 다 되었어요. 남들은 누구라고 하지만, 이제는 친구도 안 찾아옵니다. 자아가 너무 쪼그라들었어요. 작아져서 이제는 사라지기 직전입니다.
바로 이것이 왜 그러냐 하면, 말씀에 의해서 쪼그라들어서 그래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냐. 예수님도 마찬가지예요. 마태복음 26장에서 가롯유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예수님 자신도 같이 겸하여 이야기하는데, 26장 24절에 보면,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예수님이 쪼그라들고 죽어가면서 반대쪽에 무슨 그림자를 남겼느냐 하면, 지옥 갈 사람들, 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지옥 가기로 확정된 사람임을 항상 내가 가는 말씀의 경로를 통해서 그때그때 마다 나타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가면, 주님 가신 길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 가신 그 길로 인하여, 주님이 계시지 않는 영원한 지옥에 갈 사람도 같이 동반해서 그 결과물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7장 6절에 “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해석할 때, 주의할 것은 ‘저 사람은 이단이니까 전하지 않아야겠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선지자는 누가 개인지, 누가 돼지인지 몰라요. 그런데 전하다 보면 개나 돼지가 나타납니다. 이건 구약도 마찬가지예요. 시편 49편 20절에 보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너는 이거 모르지. 이 짐승아. 짐승에게 전한 거예요. 이렇게 보면 전하는 사람, 예레미야 입장에서는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 애굽에 가면 죽는다는, 저주받는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그 사람은 안 들어요.
자신의 존재감, 안정감이 우선이지, 예레미야의 말씀은 필요치 않아요. 예레미야 선지자 있으면 우리는 안전빵이라는 이런 인간적인 계산을 하는 거예요. 나는 교회 가기도 싫고 예수도 안 믿지만, 만약 당신이 천국 간다면, 나는 당신 바짓가랑이 붙들고 가면 된다는 것이 자기 안정성이에요.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반바지 입으라고 했지요.
저 사람은 안 믿을 사람이라고 밀쳐놓지 말고, 일단 전해보자는 말이죠. 전해보면 개, 돼지, 짐승인지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선지자는 멀쩡할까요? 아닙니다. 선지자는 비참한 말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세례요한에 대해서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또 시간이 시간인지라 잊어버렸을 거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라고 이게 세례요한을 말한 거예요. 이 대목에서 보면 세례요한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엘리야의 심령” 그것도 “성령의 능력”으로. 뭐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지요.
말할 것이 없는데, 우리는 뭘 봐야 하느냐 하면, 그렇게 대단한 인사, 예수님 앞장서서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의 일을 했고 자신만만하게 주님을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외쳤던 그 사람, 본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연금을 한 300만 원 타고 그렇게 살았습니까? 마태복음 14장 11절에 보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이렇게 세례요한의 죽음을 극도로 비참하게 만드는 이유는, 인간들은 세례요한의 외치는 말씀에도 관심이 없고, 전하는 주님도 관심 없고, 세례요한의 존재도 관심 없고, 자기들의 게임판에 하나의 내기 삼아, 장난삼아, 내기도 시시한 내기를 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대단한 내기, 다시 말해서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전한다는 그 세례요한의 목숨을 하나님이 과연 지켜주느냐,
아니면 하나님보다 더 센 권세가 우리에게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 게임에서 우리가 더 세다는 것을, 세례요한을 죽임으로써 우리 권세가 이 정도로 대단하다는, 하나님보다 대단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게임에 세례요한을 끌어당기느냐 하는 게임의 희생물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세례요한은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라고 이렇게 쉽게 남의 일로 생각하는데, 만일 세례요한이 여러분의 아버지라면, 세례요한이 여러분의 자식이라면, 남편이고 여러분 일가친척이라면, 그리고 친한 친구라면, 하나님을 원망 안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도대체, 세례요한이 나쁘다, 어쨌다, 이런 생각보다도,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가를 다시 봐야 합니다.
자꾸 어떻게 사느냐를 생각하지 마세요. 어떻게 빠져나가느냐를 생각해야 해요. 어떻게 빠져나가느냐는 말은 다양성에서 안정성을 취할 것이 아니고, 다양성에서 다른 안정성, 이쪽 안정성 말고 다른 안정성. 그 다른 안정성이 어디냐. 말씀이 완성되는 세계의 안정성으로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도와주시는가. 말씀대로 지키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발생 된 일이 말씀을 어떻게 실현시키고 있는가를 파악했다면, 그 사람 속에 말씀이 작동하고, 작용하는 사람이에요. 말씀을 지키지 마세요. 말씀을 어떻게 지킵니까. 끝으로, 오전에 제가 발인예배 설교했지요. 지난 금요일 날 하관 예배까지 드렸어요.
거기 설교는 진짜 더 못 듣겠어요. 에어컨 소리가 너무 커서. 하관 예배 설교 이제 시작합니다. 앞에 불이 붙었어요. 관은 우리 앞에 있고. 이제 관이 불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사이에 짬을 내서 해봤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53절까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여러분이 지금, 이 말씀을 들을 때, 장갑 끼고 관을 옮겼던 유족 입장에 섞이지 말고, 그 관 속에 있는 고인 자리에 들어가서 누워있는 상태로 고린도전서 15장 51에 나팔 소리를 들으시길 바랍니다. 52절 계속 보면,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지금 불 앞에 있는 관속에 들어갔다 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잠시 관을 열어주셔서 다시 여러분들이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칩시다.
그럴 때,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도, 트럼프의 관세 몇 프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그리고 53절에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죽어도 괜찮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죽어도 괜찮은 거예요.
자꾸 안 죽으려고 하니까, 자꾸 불행과 비극이 오는 거예요. 죽는데, 말씀 때문에 안 죽이고 살려주는 거예요. 우리가 잘나서 살려주는 게 아니고 말씀 때문에. 예레미야의 말로가 비참하다고요? 아니요. 비참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에서 엘리야, 모세,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은 해같이 빛날 겁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약속에 의하면, 우리는 해같이 빛날 일만 남아있으니, 그때 천국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 걸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나올 겁니다. ‘어데 가는데?’라고 경상도 말로 하지요. “안 넣어줘!” ‘데려가 주세요~’라는 이런 대화가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너희들은 어디 좋은 데 가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라는 이런 대화.
우리가 말씀을 전하면서, ‘네가 우리가 전하는 이런 좋은데 모르면 개, 돼지야. 짐승이야’라고 자신있게 생각할 수 있는 정말 평화롭고, 마음껏 여유롭고,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장례식 할 것이 아니고, 매일이 장례식인 것을 왜 우리가 진작 몰랐습니까. 악착같이 살려고 노력하니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하라고 살려줬는데, 이 사명을 우리가 원 없이 여유만만하게, 꿀리지 않고 마음껏 외치면서, 주께서 이끄시는 그날까지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