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얽힘
안양20250612a삼하3장39절(존재 얽힘)-이 근호 목사
오늘은 사무엘하. <사무엘하와 한국 교회> 성경이 성경 위에 설립이 되어야 되지요. 위에 설립이 되어야 된다. 성경 위에. 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 위에 설립되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말씀에 서게 된다는 요 말에 핵심은 이겁니다. 대자연 속에 인간이 있잖아요. 인간이 있다. 있는데, 참 신기하게도 그 뭐 많은 각종 나무와 짐승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말을 알아듣는, 대자연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딴 거는 상대하지 않고 인간을 상대했다는 거예요. 창세기 2장에.
뱀도 있고 다른 짐승들도 덩치 큰 짐승들도 6일날 창조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 하마하고 이야기하지 않고 코끼리와 이야기하지 않고 왜 인간 보고 이야기하느냐, 그 인간과 한 인간 속에는 말, 언어, 언어의 소통의 능력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언어의 시작은 바로 선악을 아는 실과를 따먹지 말라 이게 시작이죠. 이 모든 두 개의 나무를 심어 놓으시고 모든 과실을 먹을 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 그래서 언어가 주어졌지요.
그러면 인간보다 먹지 말라가 우선되는 겁니다. 먹지 말라. 두 개 중앙에 두 개 나무가 있고 여기서 물이 흐르고 있는데 두 개의 나무 가운데서 나무가 있다. 나무가 있습니다. 두 나무가 있다.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물도 나오지만, 언어간에 지시 명령이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우선이 아니고 이 명령이 우선이라서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먹는 날에는 이 인간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죽는다고 돼 있어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인간이 죽으면 다른 피조물 다 죽습니다. 구조가 체계가 그렇게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 놨어요. 인간이 죽으면 다 죽어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누구를 의존하느냐 하면 “인간 너희들 좀 똑똑해. 당신들이 운명이 우리 운명과 직결되어 있어.” 그래서 피조물들이 탄식하면서 소원이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등장하는 것을 소망으로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아들들. 그 창세기 1장 28절은 모든 그 창조물을 인간에게 주고 인간의 어떻게 하기에 따라서 나머지 모든 피조물도 운명도 거기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그 선악과를 안 따 먹으면 되는데, 여기 피조물 뱀이 있어 가지고 뱀이 자꾸 인간을 유혹했다, 이 말이에요. 뱀이 인간을 유혹한 거예요. 그 뱀도 피조물, 인간도 피조물. 창세기는 뱀이 인간을 유혹했다. 이렇게 돼 있고 이게 전체 뱀 배후, 뱀에게 들어간 그 배후, 요 이 배후 세력은 인간의 지시와 계시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뱀의 정체가 점점점 밝혀지게 돼 있습니다.
그 중간 과정에 그러니까 이 뱀이라는 피조물은 단지 피조물이죠. 뱀이 배경에 다른 영적인 피조물 악마가 인간에게 유혹했다는 것은 이게 계시가 발전하면 점점 키워지는데 계시가 발전하면 인간도 점점 더 키워 지겠지요. 인간이 이게 인간이냐? 아니다. 흙이다. 그러면 인간은 인간이 어디냐 인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죠.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인간이면 계시가 발전해서 인간은 예수님이 되고, 뱀은 배후에 뭐가 됩니까? 악마로서의 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중간 과정에 우리가 보려는 사무엘하가 있습니다. 중간 과정에. 계시가 점점 확대되지요. 꼭 우주의 빅뱅 같아요. 빅뱅이 있고 우주를 그릴 때 빅뱅이 이렇게 퍼져나가요. 점점점 점점 더 퍼져나가요. 광속보다 더 빨리 우주가 팽창한다. 과학자는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해가지고 뭐 몇 초 내에 양성자 생기고 전자 생기고 쭉 나와가지고 지금 지구 생기고 이렇게 빅뱅 이론입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논리지만, 과학하는 사람들은 다 그리 알고 있어요. 그것처럼. 자연은 이렇게 되었다는데,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부터 따먹지 말라하는 언어부터 해서 이렇게 지금의 예수 그리스도와 악마하고 이렇게 나누어지는 그 여정을 성경 전체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만드신 곳에 예수님이 안 계시면 안 만들어졌는데, 예수님 때문에 만들어진 걸 가지고 아들의 나라. 아들의 나라. 천국이지요. 천국이 아들의 나라에요. 이 말은 아들의 나라라는 것은 인간의 나라를 어떻게 한다? 일체 어떤 인간의 나라도 하나님께서는 용납해 준 적이 없습니다. 투표를 누구한테 했던 관계없어요. 모든 인간의 나라는 용납이 안 됩니다. 가짜라는 거예요. 가짜나라.
진짜 나라가 있는데, 왜 하나님이 만든 나라가 진짜 나라지. 인간이 하나님 배제하고 만든 나라는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겠지요. 그 나라 그 인간의 나라를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의 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마의 나라로 보고 악마는 어떻게 하느냐면 지옥에 집합하게 돼 있습니다.
악마와 그 따르는 추종자들 모두가 지옥으로 이렇게 둘로 분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둘로 분류가 되니까 처음에 나무가 몇 그루입니까? 중앙의 나무가 두 그루의 나무가 되지요. 한 그루의 나무, 한 그루의 나무, 둘의 나무에서 한 나무가 훼손되었으니까 한 나무는 이제 가치가 없는 거예요.
두 개의 나무에서 하나의 나무가 되고, 하나의 나무에서 이게 두 개의 구역 공간, 두 개의 공간이 나누어지는 기준으로서 생명나무가 결정타를 날리는 거예요. 그걸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생명나무가 기준점이 되어서 생명나무에 합당치 않는 자는 생명나무와 같이 들어갈 수 없다는 선언을 해 버립니다.
그러면 생명나무가 인간이 생명나무를 못 따게 된 그 결정적 이유가 뭐냐, 그거는 인간 속에 생명나무 요소와 충돌되는 생각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생각이 뭐냐, 선악과를 아는 선악 체계의 사고방식이죠. 선악 체계 사고방식.
지금 졸기 전에 빨리 해야 돼요. 선악체계 사고방식인데 중요한 것 빨리 해야 돼요. 중간에 실수 없고. 그러면 지금 이미 인간은 뭡니까? 선악 체계에요. 선악 체계. 선악 체계인데 지금 선악체계는 지옥이지요. 악마의 생각이니까. 이거는 생명나무의 사고방식에 충돌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갈 수가 없어요. 그냥 갈 수 없으니까. 가는 방법은 뭐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선악 체제에서 갖추어놓은 막. 막을 찢어버려야 되지요.
선악 체제와 생명나무를 갖고 있는 막을 찢는데, 제가 막이라는 표현을 하는 이유가 북 칠 때 그 북 가죽 있잖아요. 북 가죽의 특징은 북가죽을 이렇게 칼로 찢어 버리면 더 이상 소리가 안 나와요. 따라서 선악 체제의 막 또는 북가죽이 찢겨지게 되면 선악체계는 할 말이 없어요.
말할 게 없어요. 욥의 마지막에 재를 뒤집어서 쓰고 할 말이 없어요. 선악 체제라는 그걸 잘라버리면. 윤리 도덕 체제 말이지요. 윤리 도덕 체제. 선악체계라는 것은 선악체계라 하는 것은 선과 악을 아는 주인공이 누구다? 나다 이 말이에요. 내가 선과 악을 안다. 이렇게 생각하면 쉽겠지요.
여기 커튼이 있는데 이 커튼은 줄줄이 선과 악에 대한 양심의 소리라고 할게요. 양심의 소리. 각종 대차대조표 이렇게 하듯이 요거는 악의 분류 요거는 선의 분류, 분류 체계가 인간 마음에 이렇게 대차대조표처럼 짜여져 있는 거예요. 선과 악의 이항으로 인간의 마음이 구성되어 있어요. 양심이란 게 그래요. 선악체계니까요. 그걸 칼 가지고 가운데를 진짜 찢어버리면 선과 악은 선악체계에서 나오는 것은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여기 촘촘히 이게 선악 체계를 적어 놓은 그 숱한 그 모든 항목. 촘촘히 찍어놓은 그게 인간이 소통하는 언어고, 개념이지요. 언어와 개념을 잘라 버리는 거 찢어버린 거예요. 찢어 버리면 내가 쓰던 언어가 다 날아가죠. 소용없어요. 소용없어요.
그러면 여기서 이제 선악체계에 북가죽을 찌른다. 한다는 말은 이거는 뭐냐 하면 찢어버린다. 이것은 선악 체계의 준해서 내가 있기 때문에 이거는 죽음인데, 여기서 보통은 죽음을 둘로 나누면 숨 끊어지는 것을 보통 죽음이라 하잖아요. 보통 선악체계도 이건 알지요. 뭐 허, 허,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거. 생명나무에서의 죽음이라는 것은 그게 아니고 무의미의 극치. 무의미의 극치. 할 말이 있다는 것은 아직 안 죽었다는 뜻이고, 안 죽은 상태인데 그동안 의미를 선악체계에서 양심에서 윤리 도덕에서 말을 할 때, 말을 이렇게 조립하고 할 때, 내가 지금 이 말이 선하냐, 악하냐, 또는 진리냐 비진리냐를 가늠하는 그 주인공은 나잖아요.
그런데 그 의미가 커튼에 섞어진 촘촘히 커튼의 무늬처럼 빡빡하게 있던 그것이 찢어졌다는 말은 이거는 하나님 앞에 생명 전체가 생명나무에서 거부한다는 뜻이에요. 하늘나라에서 거부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하시죠. 말씀을. 말씀도 하지만 또 뭡니까 행동도 하시죠. 행동도. 말씀을 줘놓고, 말씀을 줬는데, 이 말씀에 대해서 주께서는 행동으로 말씀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4장 31절에 양식 구하러 가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양식 사러 갔어요. 제자들이. 그런데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2절. 예수님이 양식인데, 양식은 어떤 양식입니까? 이런 양식이라고 설명하는 게 아니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 인간들이 생각하는 양식이라 하는 의미를 무의미로 만들어요. 예수님의 하심과 그 행함이.
그러니까 말씀 양식이라는 말씀. 양식이라는 말씀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주께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 이렇게 뭐 뜯어 먹고 썰고, 튀기고 하는 양식이 아니고. 이거는 기존의 인간들의 양식과는 완전히 예상도 못한 거. 한 영혼이 한 사람이 이 예수님을 알게 된 걸 주님은 양식을 먹은 걸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추수할 때가 많다는 말은 내가 건져야 될 사람들이 많다 이런 뜻이에요. 이 예수님의 그 의도를 기존에 선악 체제의 커튼에서 거기에 대한 개념으로 만날 새기고 그것만 달달 외우던 인간들에게는 제자들이 이 말은 예수님 그 말 들으면 그들이 뭡니까? 할 말이 없지요. 뭔가 통한다고 생각해야 의견을 제기할 수 있는데, 양식이란 단어 하나조차도
그동안 인간들이 알던 그 모든 개념이 다 다른 거예요.
그러니 그 뒤에 나오는 추수,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하지 아니하느냐” 너희들 용어에 의하면 너희들 의미에 의하면 자연의 추수. 넉달이 지나야 추수한다는데, 나는 벌써 시작했다. 매사가 이런 식이에요. 주님은. 매사가. 매사가 이런 식이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다, 라는 말도 주께서는 용납이 안 되는 믿음이에요. “니가 뭘 알고 뭘 믿는다는 말이냐?”
한번 정리해 봅시다. 모든 말씀은 어떻게 이게 성취되는가, 모든 예수의 말씀은 오직 예수님이 자신의 행동으로만 성취되고 인간의 것은 일체 거기에 끼어들 수가 없어요. 헌금, 기도, 전도, 예배 일체 안 받습니다. 주께서 받질 않아요.
“예배에 대해서 뭘 알고 네가 지금 드리고 있나?” “찬양, 뭘 알아? 그냥 입만 다물고 있어. 내가 다 할 테니까.” 왜냐하면 선악 체계는 일체 생명체에 못 들어갑니다. 주께서 추방시키기 때문에. 또 한 가지 이거는 성경에 안 나온 이야기지만 한 가지 이와 관련해서 제가 예를 드리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자기의 그 일기에 보면 이리 나왔어요. “짐에게 아직도 내가 12척에 배가 있습니다.” 이게 이순신 장군이 이야기한 거고. 이순신 장군이 이야기한 거 말 들었던 사람은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아, 다 부서졌지만 12척에 배가 있다. 일본군이 와 가지고 다 부서졌지만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합니다. 12척의 배가 있으니까 희망을 가지잖아요. 뭔가. 예수님은 나에게 적이 있다. 12척의 배가 적이 있다. 나에게 적이 있다. 예수님 모든 말씀과 그 행동 속에는 뭐냐하면 내 사람도 있지만 반대되는 내적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내 사랑과 내 적을 구분하는 일에 주님의 말씀과 행동이 실천해 간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적은 뭐냐, 적은 바로 선악 체계를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선과 악을 지식을 알았다는 그것을 포기를 안 하고 뭐 그 조치로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선과 악 그럼 선과 악을 왜 밀어붙이는 인간의 이유가 뭐냐, 이미 인간은 선과 악의 지체를 갖고 있잖아요. 인간은 이거를 뭐로 삼느냐 하면 나의 존재 의미에 바탕으로 삼는 거예요. 존재 의미 존재 가치 내가 실존하고 내가 살아야 될 이유는 내가 선과 악의 지식에 출발하기 때문에 그게 내 바탕에 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살 이유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아는 이상 나 이것마저 포기할 수 없다. ‘선과 악을 포기하면 짐승보다도 못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야, 인간아! 너는 양심도 없나?” 뭐 이리 이야기하지요. 너는 양심도 없냐? 이 말은 뭐냐, 모든 인간은 아무리 악해도 양심만큼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다 갖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어느 위에서 서로 통역이 가능하냐 하면 너도 양심 있고 나도 양심 있고, 너도 선악체제 알고 나도 선악체제 아니까 이 선에서 우리가 서로 통역이 가능해요. 마음의 교환이 가능한 거예요. 마음의 교환이 가능한 거예요.
그 마음의 교환을 가지고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걸 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기원전 3,500년 전에 3,000년 전인가 아 2,500년 전인가 고대 바벨론 함무라비에서 왕이 법을 만들었죠. 법을 만들게 되면 그것은 뭐냐 국가가 가동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국가가. 국가가 가동되면 거기에 뭐냐 권세가 법의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어 있어요. 법이 법대로 되려면 끊임없이 전쟁을 벌려야 돼요. 전쟁을 벌리고 포로를 잡고 사람들 죽이고 반대로 승자가 생기고 그게 뭐냐 하면 권세의 이동 현상입니다. 힘의 이동 현상이에요.
우리나라에 투표가 없다. 그러면 그건 누가 힘 있는지 몰라요. 투표를 해서 투표한다는 그러한 변화. alteration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시추에이션 상황이 질서를 굳히면서 누가 권세를 소유했는가가 성립되는 겁니다. 누가 권세를 소유했는가. 부부싸움도 마찬가지잖아요. 한바탕하고 난 뒤에 뒤에 권세의 힘의 균형이 어느 쪽으로 치우쳤느냐. 어느 쪽으로 이동했는가가, 대략 윤곽이 드러나는 거예요. 윤곽이. 뭐 윤곽이 드러나면 나중에 나도 고집 세다. 이렇게 하면 끝나는 거예요.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에요. 누가 고집이 세냐, 다시 말해서 누가 권세욕에 집착이 강하냐, “그래 잘났다. 잘났어. 그래 그 권세 포기할게.” 그러면 그건 권세이동이 그 사람한테서 어디로 이동했습니까? 고집 센사람 한테 옮겨진 거죠. 이건 뭐 매일 부부사이에서 매일 일상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계란말이 해 달라 했잖아.” “당신도 내 바쁜 거 알면서도 그런 소리 하나. 입 다물어라.” 이미 권세는 계란말이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이미 넘기는 거예요. “정하고 싶어? 네가 해라. 너도 할 수 있어. 네가 해 봐라. 내가 알려 줄까?” 이런 식으로.
그러면 거기서 권세 분포도가 이렇게 하게 되면 나머지는 어떻게 돼요? 권세가 어떻게 됩니까? 의존하게 되지요. 의존하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가정은 질서가 유지가 되는 겁니다. “난 너 없이는 못 살겠다.” 이건 뭡니까? 항복을 가장한 이용하기! 항복을 가장해서 이용하고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너를 떠맡아 줄 테니까 너는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제공해야 돼. 알겠어?” 이런 거요. “그래, 나, 니 시키는 대로 할게.” 진짜 시키는 대로 할까요? 조건이 있지요. 내게 필요한 여러 가지의 돈이라든지 모든 것에 대해서 제공하게 되면 니한테 고분고분 복종할 그러한 마음자세가 되어있다는 거예요. 부담을 주는 건지. 그렇게 되지요.
권세이동이 항상 그렇게 변합니다. 쉴 새가 없어요. 요동치는 바다 물결 같아요. 이 세상의 권세가. 그런데 그 요동치는 바다가 양동이에 마치 작은 커피 잔 위에 물결 같은 거라서 어떤 범주 내에 백날해도 이게 물결이 넘쳐나는 법이 없어요. 그 범주가 바로 악마가 그 범주를 정하는데 그게 선악체계입니다. 인간이 선악체계를 유지하는 한 어떤 경우라도 심지어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니고 뭐 소용이 없어요.
어떻든 간에 선악 체계에 자기의 그 칼날로 자기를 찢어내지 않는 한 인간은 악마의 종입니다. 선악체계를 찢어내지 않는 한. 그러면 이제 그 사무엘하 보기 전에 이런 거 서론적으로 알아야 되니까. 그 선악체계를 찢는 칼은 어디서 나왔느냐, 그게 여기서 나옵니다. 법과 반대되는 거잖아요.
법은 누가 만들었냐 인간이 만들었잖아요. 법에 권력이 있지요. 그 권력은 권세 다시 말해서 지배자가 따로 있고, 지배 받는 자가 따로 형성된 그래야 질서가 잡히니까. 그 법. 법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이 법 윤리 체제 선악체계를 한꺼번에 찢을 수가 없지요. 그게 이겁니다. 언약궤. 언약궤입니다. 신기하죠.
율법은 법으로 이렇게 보여지잖아요. 율법 개념이 하라, 하지 마라. 그런데 율법 가운데 핵심이 뭐냐 하면 전혀 법하고 관계없는 언약궤가 핵심이 있어 가지고 바로 언약궤에 언약궤가 이리 있다면 높이가 65cm인가 1.5인가 길이가. 언약궤가 있다면 언약궤 주변에 뭐가 있느냐 하면, 율법이 둘러 쌓여있는 거예요. 율법이.
인간들이 뭘 따먹었다? 선악과를 따먹었지요. 인간들은 이 구조가 선과 악으로 질서 잡힘으로 심리적 안정을 느끼는 거예요. 요거는 선한 것이고 대차 대조요. 요건 악한 것이다. 선하다, 악하다, 선하다, 악하다, 에 주께서 호응해가지고 법을 거기다가 인간들 마음 자체가 법으로 법의 그물로 촘촘히 짜져 있으니까 거기다가 하나님의 법을 거기다가 추가해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이 법을 덥석 받지요. 왜?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십계명에 대해서 지킬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다는 겁니다. 하라, 하지마라, 안식일 지켜라. 지키면 되죠. 거짓말 하지 마라, 안하면 되지요. 이게 뭐 어려워요. 우리가 평소에 하던 건데. 하라, 하지 말라, 는 알아듣는다는 거예요.
그 율법을 오면서 언약궤에서 율법을 지켰다, 지켰다, 이제 쭉 모일 게 아니겠습니까? 율법 지켰다. 나도 지킬 수 있는데 이 언약궤는 뭐냐 하면 죽음이에요. “지켰냐?” “예” “와서 죽어” 지켰기 때문에 죽고, 안 지켰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죽음의 힘이 작동하는 중심지가 바로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언약 율법 안에 언약궤를 만들려는 율법도 있었기 때문에 이게 서로 모순되는 대립되는 요소가 이 한 율법 안에 같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언약궤는 모든 것을 죽이는 곳이지요. 언약궤가 있는 자리가 제물을 잡는 자리예요. 사실은. 성막 한군데 있는 거예요. 죽음을 생산하는 그 자리에 중앙에 언약궤가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자리 누가 죽느냐 하면 하나님도 죽어요. 하나님이 죽어요. 분명히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 정령 죽으리라. 는 그 말씀에 하나님 본인도 그 말씀에 저촉을 받는 거예요. 해당이 되는 거예요. 다.
태초에 말씀이 있으니라 할 때 말씀 주신 분은 해당이 빠지는 게 아니고
말씀을 내리신 본인도 자기가 던진 말씀 안에 모든 것이 이게 예속되는 겁니다. 말씀에.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매 바로 그 말씀 태초에 계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예수님이 자신의 말씀을 다 이루게 되는 거예요. 다 그 안에 같이.
그 지배를 받는 말씀에 의해서 추종하는 따라가는 겁니다. 물론 그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는 거기 확장되어서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창세전에 의논한 것이다, 라고 이렇게 소개를 해요. 약속으로.
그 요한복음에서는 그냥 말씀이라고 돼 있어요. 율법을 끌어 모아서 그 하나님마저도 죽을 때 결국 여기서 나오는 것은 그러면 언약궤도 죽느냐 하는 거예요. 언약궤 자체도 자기 언약궤 기능을 발휘하는 여기에 적용을 받느냐, 적용 대상인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지요. 적용 대상입니다. 언약궤도 나중에 살았어요.
이게 언약궤에 관한 것은 아카시아 나무로 되어 있잖아요. 전부 다 피조물로 만들었잖아요. 피조물이 만드는 건 피조물은 몽땅 다 죽습니다. 피조물은. 하나님마저 죽다는 말은 피조물은 할 것 없이 다 죽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죽음을 목숨 끊어지는 그것을 확장시켜 놨어요. 목숨 끊어지는 걸로 끝나 버리면 이 땅에 아무리 죄져도 사형당하면 그만인 거예요.
따라서 사형 당해서 흐지부지 된다면 어떤 인간도 성질날 때 “네 죽고 내 죽자.” 하고 끝내 벌릴 수가 있어요. 그러나 이게 죽음의 의미가 어떻게 됐습니까? 무의미한 세계. 저주의 세계로 주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아들이 천국 만들게 한 동반 현상으로 만들어 놨기 때문에 천국이 빛나기 위해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자는 처절하게 저주받아야 돼요. 처절하게.
중간 과정에서 소멸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모든 피조 세계는 영원한 속성을 지니게 돼요. 영원합니다. 아프다고 차라리 눈 꽉 감고 죽고 싶다고 하는데 그랬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영원해야 돼요. 모든 것은 영원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육신이 되시고 그 육신은 죽었기 때문에 이 땅에 있는 모든 죽음과 모든 육신은 예수님의 속성 때문에 영원한 속성이 예수님이 다녀갔다는 거 하나님이 이 속성을 접수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어떤 피조물들도 영원할 수밖에 없어요.
이제 영원이 죽은 거예요. 그게 진짜 인생 조저난 거예요. 지옥 갈 인생은. 여러분들이 사형수 되는 마지막 전날에 거나하게 저녁상 멋진 저녁상 받은 게 그렇게 부럽습니까. 내일 아침 되면 이제 아침 9시에 교도관 출근시간 되면 이제 사형당하여 죽는다면 오늘 저녁에 한 상 차려 주는 거 나도 저거 먹고 싶은데 뭐 이렇게 부러워할 수 있어요? 안 되지요. 부러워할 수 없지요.
인간들은 자기 무의미를 미리 모르고 자기가 살아있는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의미 있다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보장받겠다는 것은 마치 이게 마귀의 아이디와 똑같아요. 선악은 선악대로 알고 그다음에 생명나무도 거기다 따먹고 내가 나의 가치 있음을 생명나무까지 속성까지 보태면 영원성이 보장받는다. 나 잘났다, 잘났다, 가 영원토록 잘났다. 이걸 인간들은 마귀에 속한 인간들은 그걸 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가 원한다면 우리는 그 마귀의 그 심성에서 벗어날 길이 있다? 없다? 없어요. 심성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그런데 고마운 것은 바로 이 언약궤가 찾아와서 선악 체계 자체를 찢어버리죠. 빡빡 찢어버리죠. 욥처럼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 두꺼운 성경 욥기에 앞부분을 보세요. 얼마나 할 말이 많습니까. 그렇게 목이 다 쉬고 뭐 말 할 게 그리 많은데. 그때 가서는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는 재를 뒤집어쓰면서 지금 제 이 모습이 제게 합당한 조치입니다.
재를 뒤집어쓴다는 것은 내가 의미 없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내가 의미 없습니다. 의미 있는 것은 주님 존재지 내 존재가 아닙니다. 여기서 존재 바뀜이 일어나요. 존재 바뀜은 존재 얽힘을 반영해 주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 주님과 지상에 있는 인간. 요한계시록에 밧모 섬에 누가 있었지요? 사도 요한. 사도 요한이 계시가 자기 생각이었습니까? 요한계시록 1장 1절, 예수님께서 천사 보내서 지시했잖아요. 보이지 않는 분과 지상에 남아 있는 늙은 사도 바울과의 존재적 얽힘이 있겠지요.
존재 얽힘은 이 땅에 뭘 반영하느냐, 이미 존재가 내 존재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내 존재가 바뀌었다. “너 뭐 할 줄 알아?” 이런 질문 자체가 잘못됐죠. “너는 누구 지시받았어?” “뭐 지시받기는 뭘 지시를 받아. 내가 알아서 하지.” “어떻게 알아서 했는데?” “이건 옳고, 이건 그르고. 나쁜 건 안 하고 옳은 것만 하면 되잖아.” 이게 선악체계잖아요.
사람이 그런 것은 나쁜 것은 나쁘고, 옳다는 것은 이거는 뭐 아직까지 무슨 인식이 단단하다는 거예요. 이런 내게 일어난 일은 어디다가 기장한다는 거예요? 적었다는 말입니까? 선악체제 장부에다가 옳은 일 나쁜 일 지금 그 장부를 아직도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게 안 찢어졌다는 거예요.
이런 속성은 어디까지 가느냐, 영원토록 가는 거예요. 이 속성이. 이 지옥 속성이 영원토록 가는 거예요. 심지어 그 지옥에 간 부자도 마찬가지에요. 나한테는 물이 없다 이건 나쁜 것이다. 거지 나사로가 와서 물 주면 나는 좋다. 이게 옳고 그르고. 그게 자기의 이거는 나의 존재나 나의 가치에 물을 찍어서 내가 물 먹이는 것은 내 존재와 가치에 부합된다. 이것은 왜 부합되느냐, 그게 선이기 때문에.
내가 편하고 내가 안정되고 행복하고 이것은 나에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게 선이기 때문에 그래요. 교도소 들어가도 몰래 담배 하나 사줬다. 왜 담배를 사려고 하느냐, 곧 죽어도 담배를 못 피우게 하느냐, 이게 나한테는 선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한테는.
그러니까 이 땅에 우리가 살면서 뭐 담배까지 피우면 안 되겠지만 뭐 이렇게 할 때 이게 누구의 지시에 따랐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누구의 지시에 따랐는가. 존재가 얽혀 있으니까 보이지 않는 분과 보이는 내가 같이 얽혀 있으니까 항상 내가 하는 행동은 선악 체제가 이미 나에게 찢어졌음을 확인하는 사태가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그때, 그때마다 느껴지는 거예요.
이제 범사에 감사하라는 거예요. 범사에 감사.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일은요, 빌립보 교회한테 네가 그 죽도록 충성하라, 하는 생명의 면류관을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환난을 당하나 환난을 당한 가운데서 네가 범사에 감사하라. 환난을 받는데, 이 환난을 누구한테 보내왔습니까? 네가 나쁜 짓해서 환난 받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존재가 서로 생명 되시는 분과 존재가 얽혀서 옛날에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 당했던 그 이 세상에서 당했던 그 아픔을 같이 지금 주님도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경험케 하는 거예요. 주님의 다녀간 코스대로 그대로 밟아가는 거예요. 지금까지 쭉 이야기한 것이 사무엘하 이 이야기와 전혀 무관한 게 아니고, 지금 그 본질을 제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무엘하의 6장에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옵니다. 예루살렘에. 예루살렘에 들어옵니다.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에, 그때 모든 백성들이 다 좋아했습니다. 딱 한 사람 싫어한 사람이 있었어요. 미달이 아니고 미갈. 그전에 미갈이라는 사람은 사울 집안사람이지요. 사울 집안인데. 다윗이 그 죽을 판 살판 쫒겨 나고 난 뒤에 다른 남자하고 혼인하고 있다가 강제로 이제 미갈이 들어오게 되었어요. 사무엘 3장에 보면. 아브넬을 귀순을 다윗이 받아줄 때. 여러분, 사무엘하 등장인물이 전부 다 권력. 아까 이야기한 권력이야기 했지요. 권력의 추이, 권력의 농도, 밀도에 따라서 흔들리는 자들의 등장인물. 흔들리는 자들의 등장인물이에요. 전부 다.
다윗 주변의 사람이 다 그래요. 다윗은 뭘 갖고 있다? 언약궤를 갖고 있고, 저 주변에 있는 자들은 법에 의해서 공증 받은 이 권력은 내가 가질 만하다. 왜? 그 정도 나는 무의미한 게 아니고 의미 있다. 하는 그 사람들. 그 아비넬이 귀순하는 조건하에 미갈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무엘 6장에 보면 이제 언약궤가 들어옵니다.
저는 그 한 번도 안 가봤지만, 불가마 들어올 때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한다면서요. 불가마, 뭐 찜질방. 언약궤가 불가마 벌거지만 언약궤 안이 그렇거든요. 언약궤가 쓱 들어올 때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언약궤가 들어오면 좋아한다. 이것도 과연 그들이 좋아해야 될지를 그들은 모르고 좋아한 거예요.
율법에 대해서 다시 제가 했던 걸 여러분 설명해요. 율법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큰 오해가 있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선악 체제가 있잖아요. 법으로 해야 선이고, 법을 위반하면 악의 일이 되잖아요. 이걸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기다가 율법을 줘 가지고, 추가적인 법을 법 체제를 줬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이 들어오니까 하나님은 악하지 않고 선하니까 선한 그 법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이제는 존재 의미가 있고 이것은 하나님이 보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적들과 전쟁을 해도 우리가 우리는 승리해야 마땅한 의미고 저쪽은 패배해야 마땅한 의미라는 것을 하나의 법이 보증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보증한다고.
조기 축구팀에 손흥민 영입하는 거하고 똑같아요. 조기 축구팀에 맨날 지던 조기 축구팀이 손흥민하고 김민재 이런 거 한 서너명 들어와 버리면 그 게임 하나마나 아니에요? 그거. 그러니까 하나님의 위대함이 우리 편이 됐는데 누가 그걸 싫다고 마다해요. 그런데 12척의 배가 있는 게 아니고 뭐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게는 적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적이 본인이 하나님의 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내가 적이라는 사실을. 칼로 언약궤가 나를 찢어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죠. 욥은 알았겠지요. 나중에 욥도 하나님 왔으니까 알았지만 하나님 위해서 친히 사는 동안 찍힌 자만이 천국에 갑니다. 천국에 가요. 마태복음 25장에 마지막 때에 예수님이 심판대 들 때 오른쪽은 양 왼쪽은 염소로 전체 모든 인간을 심판한다, 했지요. 그때 영생 얻을 자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게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너는 천국에 오른쪽으로 가라. 너는 양이다. 왜? 내가 배고플 때 먹을 주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 듣고 천국 가는 사람이 뭐라 합니까? 반문하죠.
“제가 언제 주님 배고팠을 때 주었습니까?” 반문할 때, 그 말씀은 결국 그 말씀이 나는 누구한테 뭐를 베풀었다 하는 기억을 내가 계속 꾸준히 쥐고 있었다는 거예요. 쥐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누가 없었다. 예수님은 없었다고 자기들은 기억하고 있어요. 내가 나한테 베푼 적은 있지만 예수님 배고플 때 준 기억은 없어요.
그런데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그걸 접수해서 네가 한 것이 다 나한테 한 것이라고 이렇게 얽힌 상태에서 예수님의 한 일이라고 예수님이 평가를 할 때, 일방적으로 평가를 할 때, 그 사람은 내가 누구한테 했다는 게 의미가 남아 있겠어요? 없겠어요? 이게 남아 있을 수가 없지요. 나는 누구한테 했다는 이 해석을 주님이 일방적으로 가져가 가지고 너는 나한테 한 것이라고 이렇게 바꿔치게 했다는 말은 나는 내가 하는 기억은 나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고 주님한테만 의미가 이미 넘겨진 거예요. 일방적으로 주님한테 내 모든 행동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다 가져간 거예요. 강제집행하고 모든 수고를 주님 손에 강제로 다 가져간 거예요.
그런 자가 어디 간다 했습니까? 그런 자가 영생을 얻는다 했어요. 선악을 아는 자는 영생을 못 얻어요. 이건 일관된 법칙이고 영생이 와서 선악한 것을 네가 선과 악에서 한 게 아니고 내가 한 생명 활동이라고 일방적인 해석을 바꾸어 주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 이 말입니다.
그게 사무엘하 6장에서 백성들이 뭐 춤추고 뭐 언약을 좋아하는 거 불가마 들어왔다고 좋아하는 거 이거 우리가 곧이 곧대로 들을 수 없는데, 하나의 아까의 것처럼 하나의 과정이니까 최종적인 의미가 드러날 때까지 과정이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열왕기하 제일 중앙에 일어나는 거예요. 다윗 부분에서는 언약궤 가지고 기뻐하는데 그 주변에서는 뭐냐 이 권력을 누가 많은 권력을 소유하느냐 가지고 기뻐하는 그게 언약궤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말이에요. 언약궤 주변에서 일어난 일. 그중에 한 사람이 뭐냐 미갈이다. 사울 집안사람인데, 이제는 다윗의 왕의 아내가 되었으니까 자기가 서서히 이 권력에 권력에서 자기 처신을 할 의도가 있었던 겁니다. 자기는 왕비니까. 왕비.
이거는 무의미가 아니고 이걸 뭐라 봅니까? 이걸 의미로 보는 거예요. 내가 왕비가 됐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래요. 20절에 다윗이 자기 가족께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아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당신의 몸은 나만 지키려는데 어떻게 나의 위신과 체면을 고려하지 않고 당신의 그 귀한 몸을 나보다 신분이 낮은 계집 종에 눈앞에서 왜 그걸 드러내십니까?
거기에 대해서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아, 주의할게. 내가 그만 언약궤가 너무 좋아 가지고 나도 막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이거 왕 옷이 너무 거추장스러워서 좀 벗어서 춤 쳤다. 너도 좀 이해하고 내 늘 그런 건 알잖아. 한번만 봐도.” 뭐 이랬습니까? 그게 아니에요. 다윗이 미갈한테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라.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다. 이게 존재 얽힘 아닙니까.
적어도 성령 성신 받았으면 이 정도 고백은 하셔야 되지 않겠어요. 적어도. 성령 받았으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앞에는 사람은 없다, 내 앞에는 사람이 없다. 왜? 나도 사람이 아니니까. 어떻게 사람 의미 있는 사람 행세하려 하느냐. 사람은 다 무의미한 존재다. 의미 있는 것은 언약궤 주신 언약궤 위에 계신 하나님 이름밖에 없다.
22절에 아주 결정타지요.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많은 저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음을 받을 것이다. 지금 내가 아쉬운 것은 내가 충분히 내가 더 천하게 보이는데 충분치 않다는 거예요. 당신 눈에는 내가 하나의 하나님도 안 보이고 그저 고분고분한 인간의 질서. 저 사람은 나보다 낮고, 나는 높고 우리 남편은 최고 높고. 이것만 보이느냐, 너는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여자로서 보일 것이다.
해서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뭐가 없습니까? 자식이 없다. 왕비가 자식을 못 낳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당시에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에서 탈락했다는 뜻이에요.
10분 쉽시다.
■안양20250612b삼하3장39절(존재 얽힘)-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법을 누가 관장하는가, 첫 시간에 약간 언급을 했습니다만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보면, 천둥 번개는 제우스 신이하고 낮과 밤은 아폴로 신이하고, 바다의 풍랑 이는 건 포세이든 신화가 해요. 이거는 인간들끼리의 법은 인간들이 장악하는데 인간들은 이 자연도 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이 자연의 법은 인간이 관장하지 못하고 누가 관장해야 되는가, 신이 관장해야 되는데 신이 각각 전담 관장하는 신이 따로 따로 있다는 거예요.
모두를 관장하는 그런 신은 그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하나로 정할 수 없었어요. 그거는 경험치를 봤어요. 경험치. 바다에 신은 통했는데, 땅에 가서 그 신이 땅에 가서는 안 통하다. 안 통한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 땅의 신 그 지역을 관장하는 신에게 또 잘 보여야 되겠죠.
이러한 신이 각각 관장하는 신이 있다는 것은 그건 누가 정했는가, 그거는 신탁하는 여성 선지자 그 당시에 선지자들이 있어요. 이방 나라에. 이방 민족에 선지자 있어서 자기가 물론 마약을 많이 해요. 마약해서 약간 정신이 이성을 잃을 때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 하면서 당신은 지금 누구 신을 신기를 건드렸습니다. 이런 것들이 이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걸 이제 모으면 그게 바로 이 우주를 관장하는 신이 되는 거예요.
팔만대장경 있잖아요. 팔만대장경이 뭐로 만들어지냐 하면 이걸로 만들어졌어요. 주문집입니다. 아들 낳을 때 주문, 딸 낳을 때 주문, 이사 갈 때 주문. 그게 팔만대장경이에요. 모든 팔만대장경이 되니까 인간의 행위 하나하나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주문을 하면 나한테 행운이 찾아온다고 이게 팔만대장경입니다.
그러니까 그 팔만대장경이 있다는 건 인간의 진짜 근원적인 인간이 뭐 신이고 뭐 예수고 다 좋은데 딱 깨놓고 네가 원하는 건 뭐냐? 네가 뭘 원하는데? 나는 내 신상 편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바로 그게 그렇지! 바로 그거에요. 만사 제쳐놓고 남이고 뭐고 이웃사랑이고 뭐고, 내 몸 하나 신상 편안하고 내 욕망대로 됐으면 좋겠다. 바로 그거예요. 그게.
그런데 이제 남들도 그러니까 유도리를 하는 거예요. 우리 적당하게 하자. 욕심만 채우지 말고 우리 법대로 하자. 법대로 하자는 말은 욕심도 어느 정도 제어를 합시다. 각자. 우리 인간끼리 그냥 막 나가면 안 되잖아요. 저희끼리 합시다. 할 때, 그 선악 체계를 가지고 하는 거예요.
그 사무엘하 2장 14절 한번 봅시다.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데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 그 아브넬이 나오는데 이 아브넬은요 둘 다 그 다윗의 누나의 아들들이에요 그 다윗과 조카 관계입니다. 서로 다른 조카 관계.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데 우리들을 소년들로 하여서 우리 앞에서 그다음에 단어가 뭐지요? 장난. 장난하자. 아까 그걸 제가 말하는 전쟁이 없으면 무료해요. 심심해요. 무료하고.
호수가 조용하면 무료해요. 그런데 호수의 파도가 일면 사람은 거기서 신선한 어떤 쾌감을 얻을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연애계가 조해 보세요. 심심해요. 그런데 누구 하나 이혼했다 하면 이슈가 되고. 그렇게 되죠. 이게 뭐냐 하면 전쟁도 마찬가지에요. 전쟁이 있어놔야 아무 무 변화는 사는 게 재미가 없어요. 자꾸 뭔가 일이 벌어질 때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료하지 않고 흥미 있고 재미있는 시간들로 채울 수가 있는 거예요.
연예인 소식 누구 가수 뭐 매니저하고 싸우더라. 이러면 그 나라는 아직까지 전쟁이 안 일어났다는 뜻이에요. 큰 전쟁이 없으니까 시시한 그 가심이나 그런 것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큰 것 큰 전쟁이 있어 버리면 그런 것은 다 묻히게 마련이에요. 그러면 어쨌든간에 무료한 것은 무료하다 하는 것은 시시한 뜻이니까 이거 틀을 깰 필요가 있지요.
뭐냐 하면 장난치자. 장난이란 뜻은 뭐냐 의미 없다는 거예요. 그냥 변화를 한번 구해 보자. 그러면 혹시 의미가 생길 수도 있잖아. 어떤 사람은 자꾸 자격증을 따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무료해서 자격증을 따는 사람이 있어요. 아무 쓸데도 없는데 그것가지고 취직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럼 무료한 그 장난하게 되면 여기서 전쟁 일어나지요. 전쟁 일어나게 되면 그다음에 뭐냐 권력 구조가 재편됩니다. 진자가 있고, 이긴 자가 있으니까 권력 구조가 재편되면 권력을 가진 자는 뭘 어떻게 되느냐 내가 이 정도 권력 가졌다는 것을 새삼 기쁘게 확인할 수가 있어요.
오징어 게임이라는 그 드라마가 있잖아요. 오징어 게임 드라마 있는데, 그 게임이 너무 참혹해요. 조금만 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거 움직였다고 죽여 버리고. 커다란 소녀 인형이 부릇부릇 뜨면서 하여튼 조금만 움직이면 기관총이 나와서 사람을 죽였어요. 그렇게 참혹한 게임이 끝나고 난 뒤에 그 게임 벌린 주체자가 뭐냐 하면 투표를 할 때 과반수이상이 이 게임 중단하자 하면 중단할 수 있는 규칙이 세 번째 규칙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규칙을 이제 그 게임 그 무시무시한 게임을 안 해요. 안 하면서 주체 측에서 뭘 이야기하느냐하면 “자, 그동안 모인 적립금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고 큰 돼지 저금통에 오만원 다발이 마구 쏟아져요.
“여러분들이 살아남고 지금 죽은 자들이 죽은 자 한 사람 1억이 이만큼 쌓였습니다.” 이렇게 보여주고 이제 게임 끝나지요. 게임 끝나고 난 뒤에 게임을 안 해야 되는데, 나가봤자 찌질이 인생이 변함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 돈이 탐이 나서 다시 게임 또 해요.
그렇게 게임할 때 무서워하면서 인간은 무료한 것보다 차라리 도박하는 게 낫다는 거예요. 인생은 도박하면서 자기의 비로서 짜릿함을 느끼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며 사는 사람 사는 값을 맛을 느낀다는 거예요. 사람 사는 맛을. 도박을 하면서.
그래서 이 성경에 보면 우리 장난치자.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게 전쟁이라 하는 것은 허가 받은 범죄. 허가 받은 범죄. 배고픔은 견딜 수 있지만, 무료한 것은 참을 수가 없어요. 자, 그렇다면 인간은 뭐가 되느냐, 인간은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정의가 나옵니다. 인간은 병기에 불과하다. 무기에 불과하다. 이걸 누가 이야기하느냐하면 다윗이 이야기합니다.
사무엘하 11장 25절 한번 읽어 볼까요. 11장 25절, “다윗이 사자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저를 담대케 하라 하니라” 전쟁하는데 있어서 우리아 장군 죽는다고 해서 그게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전쟁 그 자체가 유의미 의미가 있는 것이지, 거기에 동원된 모든 군사들은 장교든 군사든 하나의 그들이 들고 있는 칼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칼에 불과하다.
그런데 잠언서 27장 17절, 거기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철을 연마하는데 있어서 철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날카로움을 연마한데 있어서 같이 날카로움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거는 붙고 싸우고 뜯고 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가 연마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전쟁을 해야 자기 존재 의미가 발생되는 것이지 아무도 자기한테 시비 부치지 않으면 그거는 바보 등신 되는 거예요. 이 조직 사회에서.
그냥 일하고 월급주면 받고 그건 사회인이 아니지요. 주어진 목표가 항상 불가능한 목표를 주고 죽을동 살동 그 전쟁에서 그걸 살아남을 때 비로소 자기 가치가 재확인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 내가 전에는 저걸 못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 내가 이 정도 하면 능력이 되네. 이건 자기도 알아주고 남들이 알아줄 때 그 사람은 팀장이 되는 겁니다. 승진이 되는 거예요. 승진.
그래서 제가 옛날에 수십년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옛날 그 저 한 40년 전인가 우리 대구에 있던 교회에 부교역자로 있을 때 그게 치과 의사가 있었는데 그 치과 의사가 심방 가니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남들은 의사돼서 좋다 하는데, 의사가 제일 큰 문제점은 의사 되는 순간 원장님이 되는 순간이라고. 더 이상 진급할 데가 없답니다.
오는 손님 받아서 환자 받고 밥 먹고 살면 되는데 다른 데는 진급하는 그게 있는데 이거 뭐 40년에도 원장이고 지금도 원장이고 살아 있어요. 서울 어디 치과 나온 사람인데 90까지 됐는가 90 됐겠다. 아직도 담배 피우면서 치과하고 있어요. 계속 원장이에요. 요새는 이제 다행스럽게 원장이 그냥 치료하는 원장에서 사업을 벌려야 되는 원장이라서. 칼이 칼을, 칼이 연마 되든지 부러지든지 뭐 이렇게 연마하는 치열한 경쟁의 바닥이 되었지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조를 아셔요. 네가 제대로 인간이라 하는 것은 끊임없이 누구하고 칭챙! 칭챙!하고 불꽃 티는 싸움과 사태와 이러한 사건 속에서 너는 칼이 칼처럼 날카롭게 칼다운 칼로 연마가 될 것이다. 라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아프지요. 연마된다는 것은 내 것 떨어져 나가니까 아프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에 전쟁이 쉴 틈이 없이 전쟁과 경쟁이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여자가 되어서 집에서 살림만 하면 그냥 꽃이나 가꾸고 호미나 들고 이렇게 뭐 채소나 상추 심으면 그만이지만, 그 여자가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서 만약에 직장에 다녔다. 그러면 뭡니까 이거는 지옥 못지않는 전쟁터에 나가신 거예요. 고상했던 나의 이미지는 어디가 버리고 망가지지요. 철저한 이기주의자로서 전락되는 겁니다. 위에 권력이 춤추고 있으니까.
자, 이러한 사무엘하의 날카로운 이러한 날카로움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이겁니다. 잔인함. 이 잔인함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줬어요. 이 잔인함의 전쟁을 무슨 전쟁이라 하느냐 하면, 붙여 주시는 전쟁. 이 잔인함은 이런 뜻이에요. 너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보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보고. 너는 나처럼 잔인해야만 내 백성이다. 아! 이게 얼마나 칼이 칼을 날카롭게 연마하는 방식이 될까요. “뭐 양심상 그럴 수 있습니까?”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죽이라 할 때 다 죽여야 된다는 거예요. 여기 실패한 왕이 누구냐 하면 사울 왕이었어요. 그리고 사울 왕에 있던 그 백성들이 자기 잔인함을 잔인하게 활용을 못 했어요. 왜 잔인하지 못했는가, 양심이 있기 때문에. 양심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생명나무 쪽입니까? 선악체계에요? 선악체계에요. 칼로 자기의 북을 북가죽을 찢지를 않았어요.
나는 항상 착한 쪽이라고 생각했기에 그걸 찢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 하지 말라는 이 계명이 계명을 지키는 방법은 사람을 안 죽이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한테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나한테 살인 당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철저하게 죽일 수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최후로 자기한테는 동정이니까요. 동정이라는 말은 뭐냐, ‘아이고 이 착한 거, 이 착실한 거, 아이고, 요 귀한 거, 내가 너를 지켜 줄게.’ 이게 인간의 마지막에 할 그거예요. 마지막에 할 자기한테 멘트예요. 네가 지옥 가더라도 나는 너를 위로해 줄게. 이게 인간의 마지막 남아 있는 악마의 목소리거든요.
하나님은 너무 냉정해요. 죽으리라 했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차이가 너무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 선을 못 넘는 거예요. 그 선을. 그 선악체계라는 커텐을 쫙쫙 찢을 수가 없어요. 나라는 것을 찢을 수가 없어요. 나를 끝까지 포기를 못 하고 있어요. 나는 낮아져서 포기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말 뿐이죠. 말뿐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예요. 율법을 가르쳐야 될 최고 책임자 다윗이 율법을 남한테는 적용하는데, 본인한테는 율법을 적용을 못 했어요.
그런데 그 요압을 통해서 인간의 다윗의 한계가 드러난 대목이 나옵니다. 그게 바로 14장 1절입니다. 사무엘하 14장, 인간은 끝까지 자기한테 동정표를 던져요. 모든 것이 노라고 할 때 오직 나만이 나에게 예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살인하지 말라 십계명 전체가 우리는 지킬 수 없어요. 14장 1절에 보면 여기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연극이 나와요. 연극. 인생은 연극이다. 연극은 주인공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주인공은 당연히 되고 모든 사람은 나를 주인공으로 받들어 주기 위한 보조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은. 이거는 가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들, 아내, 남편, 전부 다 각자가 자기가 인생의 주인공들이에요.
연극을 하는데 그 연극 주제가 뭐냐? 살인 사건과 관련된 연극을 합니다. 여기서 연극을 연출하는 자는 누구냐 요압이고, 거기에 동원되는 배우가 한 명 있어요. 그 배우는 요압이 연기 잘하는 여자 하나를 거기다가 집어넣습니다. 14장 2절에, “드고아에 보내어 거기서 슬기 있는(연기 잘하는 여인)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이르되 청컨대 너는 상제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이제 누구 하나 죽은 자 처럼 죽음을 주제로 해서 연극을 벌립니다.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처럼 하고 왕께 들어가서 여차여차 말하라. 말할 그 할 말을 그 입에 넣어 주니라. 드고아 여인이 가서 말할 때 땅에 대고 가로되, 연기지요.
“왕이여, 도우소서.” 연기 큐! 연기 사인 들어갔어요. 요압이 큐! 하니까 이제 들어가는 거예요. “무슨 일이냐?” 왕은 뭣도 모르고 거기에 끌려들어갑니다. 이 주제가 창세기 9장에 나오는 거 9장 5절, “나는 내가 반드시 너의 피 있고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 사람에게 형제에게서 그에게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창세기 9장 5절에 살인한 자는 어떻게 한다? 살인한 자는 반드시 살려주지 말고 죽여야 한다.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의가 없어요. 선악을 아는 인간들의 마음은 살인하자는 어떤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을 죽였다. 그거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뺏었기 때문에 죽일 자격이 안 되는데, 권한도 없는 게 죽였으니까 이제는 네가 그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살인자는 마땅히 처벌해야 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지요. 여러분, 그런데 연극이면 그렇게 하면 간단한데, 요압이 연극 짠 연극에 의하면 그 형제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형제라면. 동생이 형을 죽였을 때, 과연 이 창세기 9장에 도달하면 그 동생마저 죽여야 되잖아요. 형은 동생한테 죽었으니까 살아 있는 동생은 법에 의해서 죽여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집안에 아들 둘밖에 없는데 둘 다 죽었을 때, 임금님 우리 집안에 어떤 현명한 판결을 원합니다. 우리 나 살아 있는 애를 죽일까요? 말까요? 라고 그 드고아 여인은 연기로서 왕에게 하소연합니다. 요압이 각본을 짜서 준 거예요.
그럴 때 왕이 사정을 딱 들어보니 아 이게 안 됐거든요. 가정사가. 그래서 뭐라 합니까? 17절에 보면,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끼쳐 주지 아니하겠나이다. 왕이 8절에,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명령을 내리리라. 10절에, 왕이 가로되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는 네게 데려오라. 사실은 건들지 못한다. 어떤 아들도 갓 집안에 씨를 이어질 아들을 어떤 경우라도 살인했다는 경우라도 명목으로도 그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만약 그 사람을 위험하거든 내게 데려와 내가 책임지고 너희 아들과 너를 지켜주마! 이리 된 거예요.
그러니까 12절에 집에 가면 되는데, 12절에 여인이 가로되 청컨대 용납하여 한 말씀만 더 하게 하옵소서. “그래, 뭐 너 할 걸 다 했잖아. 내게 또 할 말 있어?” 여기서 나온 말이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내 집안 이야기 아니고 임금님 집안 이야기하면 임금님 왜 쫓아내십니까? 이리 된 거예요. 왜 압살롬을 쫓아내십니까?
그제사 이게 연극이었구나! 알고, “누구야? 너한테 그런 연극을 만들게 한 자 누구야? 요압이야?” 이리 된 거예요. 이 요압에 대해서 사무엘하 3장 39절에 보면, 요압에 대해서 다윗이 권력자 큰 부담을 갖고 있어요. 내가 요압에 대해 그 집안 아들 있잖아요. 3장 39절에,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찌로다. 이렇게 했고요. 열왕기상2장5절에 보면,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저가 저희를 죽여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마지막 유언이 뭐냐,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이 “요압 좀 죽여도” 이게 유언이에요. 미션 임파셔블 내린 겁니다.
이 테이프는 3초 후에 자동 폭파됩니다. 이런 것들. 아마사는 뭐냐 하면 아마사는 세바의 난리에 그 옛날에 있던 사울 왕 때에 부하인데 그 사람을 해 가지고 세바 난리를 진압하고자 계약을 했는데, 그걸 누가 깨느냐 하면 요압이 그 계약을 평화 조약을 깨버려요. 왕하고 맺은 계약마저 그 요압이 깨버려요. 아브넬도 마찬가지였고.
왕이 내린 그 장군 앞에 내린 약속을 중간에 왕도 아닌 게 지가 찢어버리고 죽여 버립니다. 왜? 그래야 자기의 권력이 자기의 권력에 해가 안가고 권력이 유지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건 무소부재를 부제한 권력을 이렇게 남용했다 행세한 거예요. 이것은 다윗도 감당을 못 할 정도에요. 이 나라가 도대체 다윗의 나라인지 요압의 나라인지 분간도 안 될 정도로 열왕기하는 그 전제 내용이 그런 거예요.
문제는 이거예요. 다윗이 권력의 왕이냐, 아니면 다윗은 하나님의 택한 왕이냐, 이걸 요압부터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아는 사람이 없어요. 이게. 열왕기하가 많이 답답한 내용이에요. 참 답답해요. 그 이유는 다윗이 제대로 잔인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예요.
사무엘상17장에 보면, 다윗과 골리앗과의 싸움이야기가 나와 있지요. 49절에,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50절에,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소년 다윗이 소년인데, 칼로 그 칼집에서 빼내가지고 자기는 칼이 없으니까 그 칼로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버렸다. 소년인데. 정서적으로 항상 예민할 때인데 이거는 아주 강력하게 조치를 해 버립니다.
누가? 다윗이. 왜 다윗이 그렇게 잔인하게 하는 그것을 자기 집안이나 자기 왕의 자리에 앉을 때는 왜 그렇게 잔인하지 못했는가, 여기 사무엘상15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15장에 3절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게 명령합니다. 네가 그 하나님께 기름 부었기 때문에 왕이기 때문에 이제는 당신은 하나님의 왕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대리자 입장에서 해야 됩니다. 라고 당부하면서 만군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이 행할 때 애굽에서 나올 때 길에서 대적하기를 내가 추억하노니 이건 누구 추억입니까?
그 당시 사람들의 추억이 아니지요. 누구 추억입니까? 하나님의 추억이죠. 광야 때 출애굽기 17장에서 아말렉이 갑자기 급습을 했어요. 모두 기진맥진할 때에 비겁하게 뒤에서 달려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할 때 모세가 지팡이 들고 승리했던 그 대목이잖아요.
그때 아말렉은 이미 하나님께 찍혔어요. 찍혔기 때문에 아말렉에 대해서 손 좀 봐야 되겠다는 그 기억을 누가 갖고 있어요? 하나님 자신이 갖고 있어요. 이 하나님이 갖고 있는 이 일을 누구한테 맡기느냐,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은 왕이 하나님의 추억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그 보복심을 가지고 하나님 심정이 되어서 하나님의 그 잔인함을 사울 왕이 해내야 되거든요.
그래서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고 남녀나 어린아이 소아나 젖먹이 아이까지 우양과 약재와 나귀를 죽이라. 라고 하셨어요. 하셨는데, 9절에 왕은 사로잡고 죽이지 않고, 왕은 사로잡고 백성은 진멸했고,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기름진 것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여기 사울이 했습니까? 사울과 누가 또 했습니까? 사울과 백성. 이 백성이 나빠요. 백성이.
사울 왕을 왕 달라고 이야기한 건 백성들이었습니다. 특히 장로들. 장로들이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왕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 백성들이 동의하여서 자기가 원하는 왕을 했다, 이 말이지요. 했는데, 그 백성들이 몰랐던 것은 우리가 왕을 이렇게 천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부합되는 왕을 하나님께서 천거해서 세울 거라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어요.
하나님은 백성의 마음과 정 대비되는 왕을 대비되는 왕을 하나님께서는 진짜 왕으로 세웠는데, 사울 왕 같은 경우에는 백성들이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이거는 진짜 왕이 아니고, 사라질 왕을 뽑은 겁니다.
이제부터 왜 사라져야 될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이제는 그걸 드러내야 되겠죠. 그게 아말렉을 갖다 붙였고 과연 예상대로 하나님의 그 복수심 그 잔인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들은 좋은 것을 좋다고 살려 준 거예요. 요점을 좀 더 보기 위해서 이게 어떤 취지냐 하면 민수기 25장도 마찬가지예요. 민수기 25장에 거기 보면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했고 이건 하나의 종교 행사니까요. 염병이 퍼져서 죽은 자가 24천명 했어요. 24천명이 퍼지니까 여기 11절에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노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나라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그 비느하스도 동일한 질투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그 남자 여자를 죽여 버렸다. 죽이니까 어떻게 됐어요? 그 전염병이 스톱이 됐어요. 그 남자를 이에 8절에 보면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 사이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여자의 배를 꿰뚫고 두 사람이 죽으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쳤더라.
한마디로 말은 뭡니까? 제발 좀 네 양심 같은 것 좀 생각하지 말고, 네 위신 체면 이런 행동을 했을 때 나는 얼마나 내가 착하고 훌륭해 보이는가, 이런 것 좀 생각하지 말고, 네가 정말 기름부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다면 주님의 잔인함으로 무장되어서 그게 너의 일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연극할 때 요압이 약점은 뭐냐, “다윗 당신이 뭐 이스라엘 왕이라고? 뭐 권력이 있어? 그러면 당신은 율법대로 똑바로 했어? 안했어? 다른 사람은 율법대로 지키라 해놓고, 당신 집안 식구는 바로 살려주잖아. 봐! 응? 그래서 이제 압살롬을 데려오라. 그러면 돼? 압살롬을 죽여야지.”
그런데 다윗은 압살롬을 너무 좋아해요. 인물도 잘 생기고 너무 좋아해요. 인격이 또 훌륭하고 하니까. 그러니까 일관되지 않다는 거예요. 말씀에. 요압이. 다윗이 권력은 있지만, 제대로 일관되게 하는 사람은 요압 자기뿐이라는 거예요. 왜? 압살롬이 과연 한 사람이 왕권에 도전했잖아요. 그러면 아버지 다윗은 자기 아들이라고 싸고돌아서 “압살롬은 살려줘라. 죽이지 말고.” 분명히 다 듣는 데서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압살롬이 나무에 대롱대롱 달렸을 때에 백성들이 주저하니까 그들이 주저하니까 요압이 있다가 내가 책임질테니까 죽여버려. 이랬다고요. 그런데 여러분 요압이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고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니면 자기가 확보한 권력을 지키기 위함이에요?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함이에요.
그게 바로 사무엘하 이야기에요. 거기에 대해서 다윗은 아무 소리 못 하고 있어요. 인간의 연약함이고 약점입니다. 다윗이 믿음이 없는 게 아니에요. 믿음이 없는 게 아니고 믿음이 있는데 어디까지는 참아, 하나님께서 만약에 저 이방 민족이 왔다 하면 가차 없이 다윗은 죽여 버립니다. 그게 이제 사무엘하에 나오거든요. 잔인하게 죽이는 게 나옵니다. 그 이야기 있다는 걸 들으시고 그런데 자기 집안에는 싸고돌아요.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그건 뭐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당연한 거 아니냐. 그리고 또 여기 사무엘하에서 므비보셋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므비보셋은 그 다윗과 요나단이 의리를 지킨다고 너한테나 내가든 상호 보호주의를 했어요. 여호와 앞에서 우리 맹세할게. 네가 어려움 당하면 내가 도와주고, 내가 어려움당하면 너가 도와줄게. 그렇게 해서 다윗이 요나단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안 그러면 죽었어요. 사울 왕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정보를 몰랐는데 중간에 요나단이 와서 알려줘 가지고 지금 이 주위를 피해야 한다. 빨리 안 피하면 죽는다, 해서 화살 쏘아 가지고 그때부터 양궁이 발달했는지 모르지만, 화살 쏘아 가지고 비밀리에 양궁하는 것처럼 화살 주는 것처럼 해서 전달하지요.
그래서 이제 그 의리. 그 의리 때문에 그 요나단의 애가 절둑발이인데, 사울 왕 다음에 나단 아들 거기 권력 서열에서 장애자가 탈락이거든요. 그래서 므비보셋에 대해서는 그 아버지하고 맺은 의리 때문에 돌봐줄게. 그렇게 했는데 그 종이 있어 가지고 종이 그 점을 이용해 가지고 그 므비보셋 재산을 거의 반이나 털어갔어요.
그럴 때, 종이 그런 짓을 했다. 했다는 것을 눈치를 채야 되는데 다윗은 거기에 대해서 감을 못 잡아요. 여기서 사무엘하 9장 10절 한번 봅시다. 그 종 이름이 시바인데요. 시바인데, 시바 아들이 15명이고 종이 20명이라 했는데. 그 사무엘하 16장에 1절에서 4절에 보면, 시바가 일부러 찾아와 가지고 중간에 끼어들어서 다윗이 다시 돌아오니까 이 권력이 해방된 줄 알고 권력 따라서 그것 또 춤추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 자체가 전부 다 권력 따라 움직이는 거예요. 힘 따라. 여러분들이 아까 공부했으니까 다시 복습하는. 권력이라는 게 어디서 생기는 겁니까? 법에서 생기죠. 그냥 살면 안 됩니까? 무료해서 재미없으면 못 살아요. 내가 권력 어느 정도인지 자꾸 확인하는 그 재미로 사는 거예요. 남편인데, 남편이 맨날 처음부터 끝까지 맨날 과장이다. 그러면 애는 커가는데 과장으로 인생 끝나라 하면 부인이 아이고~ 답답아, 답답아, 너도 좀 뭘 하든지 해 가지고 좀 승진 좀 해라. 참 답답해 미치겠다.
특히 회사도 그렇지만, 공직에서는 더 답답해요. 맨날 그저 9급 들어가 가지고 7급으로 있어 버리면 맨날 그 승진이 만날 떨어지고 하게 되면 그 부인이 답답하다고 하죠. 그러면 부인이 이제 할 수 없어 한우 사들고 또 특히 군인, 군대 같으면 자기 남편이 소령이라면 중령 찾아가 가지고 또 잘 비비고 그 집에 또 김장해 주고 또 이렇고. 특히 그런 게 제일 공간 제일 심한 게 뭐냐 하면, 하급자의 부인이 상급자의 부인의 자진해서 종이 되는 단체가 뭐냐 하면 해외 공관장들이에요.
그 대사 앞에 다 대사의 직원들 보면 전부다 따로 독립해서 살잖아요. 해외에서. 대사 부인은 왕이에요. 그냥 지 아들 과외부터 해가지고 전부 다 밑에 부하 부인들이 다 하는 거예요. 옛날에 군대도 요새는 그런 게 없겠지만, 옛날 군대도. 지금도 군대도 그렇게 약간 남아있어요. 그런 것 하나도 다윗이 권력의 흐름에 대해서 제대로 정리 정돈을 못 하고 있어요. 워낙 세기 때문에.
자, 이제 우리가 이제 강의를 이제 마치면서 이게 분명히 이거는 알아야 돼요. 뭘 알아야 되는가, 왜 인간은 권력에 휘말리고 권력에 울고불고 하느냐, 권력이라 하는 것은 법을 시행하는 권력을 말합니다. 법을 시행하는.
그러면 자기도 법을 시행하면 이건 뭡니까. 이거는 법 초월자가 되겠죠. 법 초월자. 권력이 센 사람은 법을 자기가 만들고 그 법에 대해서 자기가 예외가 돼요. 그야말로 신이 되는 겁니다. 그럼 만약에 이 법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면 이거는 뭐 꼼짝 마라, 지요. “야! 법대로 해야 돼! 안하면 죽어.” 이러니까 이거는 노예 아니라도 자연적으로 권력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노예가 돼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국가에 있어서의 왕이라 하는 것은 모든 권력의 최정점인 자가 왕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또는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거예요. 기름 부었다. 기름 부었다는 말은 철저하게 이 왕이 허수아비 왕이 되는 거예요. 순종이 뭐보다 낫다? 제사 율법보다 순종이 먼저라는 거예요. 순종이 먼저라는 겁니다. 사무엘 선지자에 의하면.
따라서 기름 부었기 때문에 기름 부은 자가 주님의 지시에 따를 뿐이지 자기가 갖고 있는 권력 가지고 자기를 최종 의미자로 두는 그런 활동은 다윗은 못 하는 겁니다. 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그 사무엘하 그 끝부분에 보게 되면 다윗이 인구 조사할 때에 누가 인구조사 하지 말라고 누가 간섭합니까? 요압이 했습니다. 굉장히 신앙적으로 나오지요. “왕이여, 이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큰 숫자를 줄 수 있는데 이러면 안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인수한 것은 누가 그렇게 독촉한 거예요? 마귀가 그렇게 독촉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다윗 언약에 속한 이 다윗이라는 인물이 세상에서 메시아 제대로 여전히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데 어쩔 수 없이 왕 되었거든요. 어쩔 수 없이 왕 되었으니까 이미 가진 권력을 자진해서 포기를 못하는 한 권력에 휘둘리게 되어있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 인간의 나약함 그리고 인간의 나약한 연약함은 하나님의 잔인함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지 못했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잔인함을 무장하지 못하는가,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잔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말로만 말고 실제로는 나는 그걸 나한테 그렇게 칼로 나를 찌를 그러한 마음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이처럼 기름 부은 자는 다윗을 지나서 언젠가 다윗의 자손이 올 때까지 유보돼야 되는 거예요. 다윗을 지나서.
자,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오늘 사무엘하는 우리 누구 보고 이야기하는 거, 우리 자신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제가 지난날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기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한 온전한 사람을 원하니까, 내가 나의 온전함에 나는 모든 사활을 다 걸어야 되겠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만약에 온전함의 교회가 시키는 대로 부흥 집회 뭐 다 다녀보니까 나보다 점점 그건 자기 온전한 자기 관리에 소홀이 하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더라, 이 말이지요.
그러면 상대적으로 저 사람은 신앙이 낙오된 사람으로 판단이 되는 거예요. 낙오된 사람으로 판단되니까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봉사하고 새벽 4시부터 밤 11까지 새벽기도부터 하는 나로서는 우월감을 갖게 된 거죠. 그게 나의 어떤 교회 내에 뭘 가졌다? 권력을 향료하는 거예요. 목사도 인정해 주고 너희들도 이근호 선생님처럼 되어라. 하는 그게 막 입에 달려서 목사님의 설교시간에 막 나오고요.
그러니깐 그것이 네가 그만큼 높다는 뜻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고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차원으로 하는 거 가지고 더욱더 열심히 성가대, 주일학교, 모든 봉사에 그 완전히 거기 올인한 거죠. 열심히. 그거는 목사한테 인정받아서 그런 게 아니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요. 목사님이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준다는 그 생각이 있었습니다. 교회 가는 것은 내가 존재의 사는 이유가 되었어요. 교회 가는 것.
술 담배 저주하고 하여튼 조금이라도 막 살펴서 눈에 띄는 거 비 신앙적인 행동, 말을 함부로 하는 거. 그런 것들 보면서 나는 즐거웠지요. 저 사람도 나보다 못하는구나! 교회 가서 그거 찾아내는 재미로. 장로 집사해도 하는 꼬라지보고는. 그래서 나는 저런 장로 보다는. 목사는 생각 안 나고 목사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같은 하사에서는 특무 상사가 최고잖아요. 장교 될 생각은 없고. 장로, 최고장로가 되면 목사 섬기고, 하나님 섬기면서, 그렇게 살리라. 그리고 주변도 니는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막 격려해 주니까 했지요.
그러나 어느 날, 로마서 3장에 십자가를 아는 순간, 하나님은 인간이 하는 걸로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시고, 기뻐하는 것은 따로 있다. 율법외의 한 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기뻐한다. 그 아는 순간, 그동안 폭삭 속았수다! 제주도 말이 아니고, 제주도 말로는 수고했다는 뜻인데, 서울말로 완전히 마귀한테 속은 거예요. 하나님은 십자가 자기 피 밖에 없다.
그런데 누가 방해자다? 온전한 내가 방해자니까 나를 죽이는 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 그럴 때 이제는 반대로 기적처럼 나처럼 살았던 자들을 가만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 같이 있을 수가 없겠죠.
다윗은 바로 이처럼 왕의 자리가 자기 내가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음을 아는 자리가 바로 주께서 주신 성신이 임한 자리가 바로 왕의 자리고 내가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사실을 발견하는 그 기쁨. 그 기쁨위에 더 큰 기쁨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열심히 하게 해 놓고, 결국 자기의 한계에 부딪히게 하시고, 나도 어쩔 수 없이 권력에 휘둘리는 재미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런 나약하고 내 힘으로 해결할게 아무것도 없다는 이 무의미가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