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일치된 마음

아빠와 함께 2025. 6. 18. 22:29

500강-YouTube강의(일치된 마음 에스겔 11:19)20250617-이 근호 목사 

 

 

제500강, ‘일치한 마음’ 또는 ‘일치된 마음’.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마음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살아온 성장과정, 가정환경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수많은 변수들이 침투해 들어옵니다. 상황들이 침투해오기 때문에 그 침투한 상황들, 사태를 본인의 마음이 편집하면서 자신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조립하기 때문에 똑같이 일치된 마음은 아예 없습니다. 

 

당신하고 나하고 마음이 같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 상황이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을 내가 찾고 있다. 당신도 찾고 있는데 나도 찾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동일한 피자를 두고 형제간에 먹는데 똑같은 피자를 뜯어먹었다고 해서 형의 마음, 동생 마음이 일치되지 않잖아요. 같아지질 않죠. 

 

이런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진라면에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순한 맛, 또 하나는 매운 맛이 있거든요. 순한 맛 진라면 먹으면 마음이 순해집니까? 그럴 일 없잖아요. 그럴 일 없죠. ‘마음 순하다’, ‘진라면 순하다’ 같은 ‘순하다’는 형용사가 동일하게 쓰여지질 않습니다. 똑같은 피자판을 먹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도 사람의 마음은 그 상황에 적응하는 바탕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마음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11장 19절에 보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일치된 마음이 없음을 분명히 전제로 깔고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라고 했다는 것은 마음이 도저히 똑같을 수 없는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가운데서 우선 하나님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일치된다면 동일한 주님의 마음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일치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빌립보서 2장에 있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절)에요.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의 마음이니. 열두 제자가 다 마음이 하나 같지 않아요.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그들은 똑같은 복음을 이야기해요.  

 

그들이 성격이 똑같아진 게 아닙니다. 성격이 똑같아진 건 아닌데 근원적으로 내면 깊은 곳에서 궁극적으로 내미는 마지막 마음은 바로 복음을 내놓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느 인간도 의롭다 할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이 점에 대해서 일치된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에스겔 11장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神)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라고 그렇게 되어 있죠. 여기에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는 이 절차, 이 과정을 성령께서 시행하시는데 성령께서 어떻게 이걸 하시느냐? 신약에 오면 기도를 통해서 그렇게 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기도케 하십니다. 기도하면 성령 오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아예 기도를 하게 하셔요. 기도를 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에 대해서 어떤 마음인 줄 모르기 때문에 병원에 가서 x-ray찍는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자기 마음을 자기가 평가 못해요. 그냥 찍어보는 거예요, 그냥. ‘주님이여, 제 마음 한번 찍어주세요.’ 이게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게 되면 기도는 약속대로 기도가 실시돼요. 그 약속 중 하나가 에스겔 11장 19절입니다. 굳은 마음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꿔치기하는 작업을 기도를 통해서 하게 하십니다. 기도를 하게 하시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하는 것은 기도 끝날 때 붙는 이름으로 알 수 있어요. ‘이 모든 것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예수의 마음으로 자기 백성의 마음을 밧데리 갈아치우듯이 늘 수시로 갈아치우는 것을 주께서 기도를 통해 하게 하십니다.  

 

그럼 기도는 언제쯤 하면 됩니까? 그런 것은 묻는 게 아닙니다. 기도를 언제 하느냐, 어디서 하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주께서 밀어붙이기 나름이지, 본인이 기도시간 정해서 한다고 뭐 주께서 반드시 응답주고 하는 게 없습니다. 그럼 어떤 타이밍에 하게 하시는가? 굳은 마음일 때, 굳은 마음을 적절하게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는 그 시점에서 하게 되죠. 

 

자, 그러면 여기서 굳은 마음은 어떤 마음을 굳은 마음이라 하느냐? 여기 굳은 마음을 돌 같은 마음, 원뜻에 의하면 돌 같은 마음인데 돌 같은 마음이 굳은 마음이죠. 딱딱한 마음, 씨도 안 먹히는 마음, 굳히기에 들어간 마음, 어떤 뭐가 있더라도 이 마음은 내가 양보 못합니다,하고 버티는 마음. 

 

‘버티는 마음’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나는 수긍하겠습니다.’하는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에요. 굳은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이 대조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부드러운 마음이라 하는 것은 원뜻에 ‘고기(살)’같은 마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주면 주는 대로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앞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든 그것은 주님이 할 소관이지, 내가 미리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거죠. 

 

다만 돌멩이가 그대로 유지되다가는 주께서 준비한 게 안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돌을 아주 잘게 부숴서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전환되는 그 작업을 주께서 해주시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 찾아갔을 때, 사람들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 대해서 어떤 선입감을 갖느냐 하면 ‘엘리사벳은 참 착할 것이다. 뭐 보나마나 미모는 기본이고.’ 이름도 엘리사벳이잖아요. 엘리사벳치고 못난 배우 봤습니까? 엘리자베스 테일러, 이쁘잖아요. 이름 자체가 이쁘단 말이죠. 이쁘니까 마음도 이쁠 거고.  

 

그러니까 엘리사벳에 대해서 천사가 와서 마리아한테 아기 예수에 대해 예언할 때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완벽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 순간에 사용했을 뿐이지, 마리아와 이야기하고 난 뒤 집에 가다 이웃집하고 대판 싸우고 남편하고 싸우고 그럴 경우가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됩니다. 주께서 그때 그렇게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기도에 대해서 성령께서, 실제로 신약에 오면 신약은 성령이잖아요, 성령께서 구약의 에스겔 예언대로 “새 신을 주며”라고 했으니까 신약대로 하면 새 영을 그들에게 준다 이 말입니다. 새 영이 왔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누가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여기 생선 나오죠. 이 대목에서 어떤 사본에 보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이런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줄 아버지가 누가 있느냐. 같은 뜻이에요.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알과 전갈. 하나는 살리는 것이고 전갈이니까 하나는 죽이는 거죠.  

 

그러니까 일치된 마음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어이 자기 사람, 자기 백성, 천국 백성을 어떤 경우라도 기어이 살려내겠다는 집념이 담겨있는 것을 기도의 응답으로 주시는 겁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자, 이 대목에서 결론이 나오는데요. ‘성령주시면 우리한테 뭐 줍니까?’라는 말이 성립 안 되고 그냥 성령주시면 성령주심이에요. 성령주심으로 끝났어요.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예수님의 마음을 주게 되면 이게 바로 부드러운 마음이에요. 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어떤 지시를 하고 세상에서 어떤 수모를 당해도 그것을 기꺼이 감수했어요. 그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따라서 일치된 마음이라 하는 것은 각자 당하는 사태는 다 다르더라도 그냥 이런 것, 저런 것 하나 주께서 살리기 위해서 주신 상황이라고 생각하시면 그게 성령이 여러분 속에 있다는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