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 없애기
제사장 없애기
2025년 6월 11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2:27-33
(12: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12: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12:31)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12:32) 팔월 곧 그 달 십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12:33)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내가 있음’은 그냥 가만히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있음’으로 발달합니다. ‘네가 온전하면’ 할수록 ‘지독한 자기 동정’은 강화됩니다. 덩달아 내가 나에게 협박하는 정도로 심해집니다. 이게 바로 ‘자기 처분권 행사’입니다. 세상 사는 것이 힘든 이유는, 자신이 자기를 협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인과는 달리 특이한 삶을 보여주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지정받은 신분에 의해서 움직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은 ‘죽음’을 다루는 자들입니다. 살아 있는 것들도 죽음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제물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살아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늘 자신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발휘하려는 ‘자기 처분권’도 같이 날아가버리게 됩니다. 인간들의 ‘자기 처분권’의 발휘는, ‘내 것은 내 소유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당연한 사실이라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의 보편적 민족과 나라가 바로 ‘이방민족’입니다.
이방민족들의 특징은 자신들에 대해 하등 이상한 점을 찾아내지도 못하고 문제점도 없다고 여깁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성경 말씀은 이방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준 겁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에 문제점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의 왕인 여로보암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해 준 일반 백성들의 종교생활에 편의를 도모하는 정책을 제시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의 구별되는 점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두고서 상대하시는 소위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아예 하나님과 전혀 관계도 모르는 이방민족은 그냥 개같은 짐승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어지면서 북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과의 차이점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상대가 되는 사람이지만 북쪽 이스라엘은 그 인간됨으로 ‘하나님을 파괴’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남쪽 유다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남쪽 유다나라에서는 끝까지 긍휼과 죄사함을 행사할 메시야의 등장과 관련있다는 점에서 차이납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파괴’하는 이유는 이미 백성들 사이에 우상숭배가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성이나 아주 여호와 하나님 백성임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니 왕의 입장에서는 백성들과 이견이 없어야 나라에 대해 왕으로서 ‘자기 처분권’을 호응 속에 행사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의 제안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형상”이다고 하면서 송아지 형상으로 제단을 만들어주는 겁니다. 단과 벧엘에 이 두 송아지 제단을 설치하는 것은 오늘날 백두산과 한라산에 각기 제단을 세워두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반 백성들이 자신에 대한 ‘인생 처분권’에 전혀 방해받지 않아서 불만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사장 존재’를 굳이 없애려는 것과 백성이나 왕들의 자기 처분권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그것은 제사장은 유월절 사건의 반복입니다. 제사장은 송아지 형상으로 여호와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제물의 죽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제시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죽음이란 무의미의 극치입니다. 즉 인간은 ‘있음’은 유월절 양 앞에서 무의미 형상입니다. 이사야 40:6-8에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형상으로서 자신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식물에 있어 열매나 꽃은 외부로 보이는 영광처럼 여기지만 그 모든 힘은 보이지 않는 ‘어두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바탕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의 모든 인간다움과 의미있어 보이는 형광은 소멸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의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일은 ‘자기 처분권’을 발휘해서 계속 온전함의 강도를 높이는 겁니다. 즉 날마다 하나님 집회에 모이기를 힘쓰는 것에 보람과 보상과 기쁨을 갖는 것은 자신이 그만큼 계속 향상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은 ‘네가 있나 제사장이 있나’를 묻습니다. 내가 있으면 나의 일이 되고 제사장이 있으면 주님의 일이 됩니다. 인간이 출생하고 성장하고 자기 삶에 충실한 것은 실은 다 주의 일, 곧 제사장의 일, 곧 희생제물의 죽음을 들추기 위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쪼개시고 시간을 반으로 쪼개서 마주하게 하십니다. ‘반새대칭성’입입니다.
그러면 ½+½은 온전한 1이 될 것 같지만 그 틈, 간격, 간극을 통한 새로운 범위의 세계를 출현합니다. 이 세계가 곧 ‘제사장의 세계’입니다. 기존의 모든 인간세계의 의미를 죽음으로 덮어버립니다. 이미 출애굽부터 이 제사장의 나라를 목표로 잡혀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5-6)
이 목표에 대해서 과연 예수님이 제사장 되어 신약에 성취시켰습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6) 또한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10)
자기 차가 없다면 차에 대한 모든 것으로 걱정될 리가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없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여긴다면 걱정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계속 자기 것이라고 있다고 여기니 죽을 때까지 걱정을 따라 다니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제사장 삶으로 사심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제사장의 그림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4강-열왕기상 12장 27-33절(제사장 없애기) 25061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2장 27-33절입니다.
열왕기상 12:27-33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드디어 이스라엘이 둘로 나누어졌지요. 북쪽 이스라엘의 약점이 드러났습니다. 그 약점은 바로 국가의 권력, 결속력을 다지고 또 다지는 과정속에서 인간의 본색이 드러난 거지요. 본색이 드러났다는 말과 약점이 드러났다는 말이 같은 말이 되는 이유가,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 약점을 덮은 거예요.
그 약점이 노출되면서 왜 하나의 이스라엘이 둘로 나누어졌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분명히 여기서 우리가 다음과 같이 정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둘로 나눠진 이유는 바로 백성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우상을 섬긴 것도 백성들과 죽이 맞았기 때문이에요. 백성들은 그 이스라엘, 자기가 속해 있는 그 이스라엘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자기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사람들이 보통 신자와 불신자 둘로 나누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신자 불신자로 나누기 전에 세분류를 먼저 등장시키고 나중에 둘로 정리 정돈 하십니다.
처음에는 두 분류겠지요. 이방인과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이렇게 둘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1장, 12장 죽 나오는데 솔로몬 이후에 셋으로 나눠집니다. 이방 민족, 북이스라엘과 그리고 남쪽 유다, 이렇게 셋으로 쪼개고 나누시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쪼개고 나누셨으면 그렇게 쪼개고 나눴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우리의 할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이 세 가지 나라의 차이점을 아셔야 합니다. 이방 민족과 북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의 차이점은
첫째, 이방 민족은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본 적도 없다는 거예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것은 사람도 아니에요. 그래서 개같은 이방인들이라고 규정이 된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았기에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흙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그러면 이방 민족과 북이스라엘의 차이점이 뭐냐? 이방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적이 없지만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적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사람 취급을 해줬다는 거예요.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사람 취급을 받았으면 그들도 영원히 구원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당연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북이스라엘이 사람 취급을 받았다 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을 파괴하는 기능을 하기 위한 인간들, 사람들이에요.
이방 민족은 아예 하나님을 몰라요. 신도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을 알았어요. 율법도 받고 다 알았어요. 알았는데 북이스라엘의 인간들 내부에 하나님에게 도전하고 대적하는 어떤 힘 같은 것이 북이스라엘을 통해서 노골화되기 시작합니다.
‘저 여호와 하나님을 파괴해야 한다.’ 본문 보면서 여러분 보기에 여로보암이 문제라고 생각을 하실 거예요. 그런데 아까 본문 죽 보니 분위기 이상하지요. 여로보암만 문제가 아니고 온백성들이 똑같이 여로보암과 같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뭘 뜻하느냐?
여로보암이 일방적으로 백성들에게 지시했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로보암에게 ‘우리는 당신 같은 왕이 필요했었어요. 우리의 심정을 당신이 이해를 해주니 고마워요.’ 하면서 자기들이 평소에 하고자 하는 그 일에 대해서 왕이 뒷북 치듯 분위기 맞춰주는 그런 왕인 것을 북쪽 이스라엘은 굉장히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산당을 섬겼거든요. 본문에 내용 나오지요? 우상을 뒀는데 열왕기상 12장 29절에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단이라는 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백두산입니다. 백두산까지 가서 우상을 섬겼다 그 말이지요. 여로보암 임금은 거기에 호응을 해준 거지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아니고 북쪽의 이스라엘 백성들만 호응했겠지요.’라고 생각하는 데 그게 아닙니다. 나라를 둘로 구획해서 쪼개기는 왕과 여로보암 사이에서 조정되었지만 그 백성들 대다수가 이미 우상에 푹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로보암쪽은 10지파나 되니까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80퍼센트 얻으면요, 당선은 그냥 된 거예요. 그것은 대다수라고 볼 수가 있어요.
물론 북쪽에도 ‘이것은 아닌 것 같다’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제 말은 대다수라는 거예요.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주변 대다수의 사상이, 생각들이 있으면 끽소리 못 합니다. 끽소리도 못 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 대놓고 반항할 수 없어요. 회사 전체가 천주교인들이다. 그 천주교를 감히 공격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이 본문 보면서 뭘 생각해야 하느냐? 여로보암의 신앙관을 탐색해야 하고 그것을 추적하고 분석해야 해요. 여로보암의 신앙관은 어떤 신앙관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성을 믿습니다. 국민은 위대하다. 그게 왕의 처신 방법이에요. 통치를 한다는 것은 남쪽에 있는 여로보암처럼 “아버지 허리보다 내 새끼손가락이 더 굵다”(왕상 12:10)라는 식으로 하면 안 돼요.
그것은 어리석은 겁니다. 백성들의 호응이 없으면 정치하는 것이 뻑뻑해서 본인이 힘들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왕이 하는 일은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려서 백성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면 나라가 어떻게 잘되느냐 하면, 질서가 잡힙니다. 질서가 잡히고 왕과 백성 사이에 소통이 잘 되니까 그다음에 여러 왕의 정책에 대해서 호응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나라가 평화롭게 돼요.
자 ‘여로보암의 신앙관이 뭐냐?’ 이렇게 시작했으니까 이번에는 백성들의 신앙관이 뭐냐?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재래시장에 가면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채소 팔고 있지요. 제가 이렇게 묻는다고 합시다. “할머니, 할머니를 대신 살게 하는 제사장은 어디 있습니까?”
그 할머니들 평생 제사장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요. 내가 그런 질문을 했다면 “나? 자식이 나를 돌보지 뭐.” 자식이 나를 돌보는 거예요. 이게 국민들, 백성들, 그것도 오래도록 인생을 산 할머니들의 한결같은 내부 마음이에요. 나와 친한 가족이 나의 노후를 돌봐줄 것이라는.
그렇다면 그 할머니의 일관성 있는, 물론 다른 할머니들도 다 마찬가지지만 그 일관성 있는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제사장 없이도 여기에 살아 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할머니가 만약 누가 권해서 성당이나 교회에 갔다 칩시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기존의 단단한 줏대에 뭔가를 보태요.
“하나님이여, 서울에 간 우리 아들딸 건강하고, 무탈하고, 서로 안 싸우고 편안히 잘 지내게 해주옵소서, 지켜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겁니다. 전혀 달라진 것이 없지요. 그리고 성당이나 교회에 가서 좀 더 공부를 한 사람은 이렇게 할 거예요. “하나님이여, 우리 자식도 제사장이신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게 해달라”라고 했을 거지요. ‘제가 간곡히 기도합니다.’ 그렇게 되는 거지요.
이것은 무엇이 유지되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여전히 내게 있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존재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주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맞지요. 레위 지파는 일반 다른 지파와 다릅니다. 제사장은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주의 일은 뭐냐? 주의 일은 나를 죽이는 일이 주의 일이에요. 이거 아셔야 해요. 나를 없애는 것이 주의 일이에요. 그동안 얼마나 오해했는지 몰라요. 물론 저도 그동안 많은 오해를 했지요. 제가 20대 중반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열심히 교회 다니고 봉사했습니다.
아직도 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대구분들은 알 거예요. 수성구 지나서 가창 댐이 있어요. 경치 좋은 계곡을 죽 따라가면서 기도원들이 있어요. 댐 근처에도 있고 댐 가기 전에도 있지요. 거기 지나갈 때 기도원들 보면서 뭘 느꼈는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었느냐? 저 기도원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기에 내 모습을 집어넣고 그 안에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예요. 그렇게 기도하는 내용이 뭐냐 하면 나의 온전함이에요, 온전함. 하나님 믿는다는 것은 뭐냐?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온전한 내가 되는 것이 하나님 잘 믿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교회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이유가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나의 온전함이 점점 더 향상되는 것 같고, 그 온전함이 더 풍성해지고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거의 잘 안 가지만 가끔 그쪽으로 갈 일이 있을 때 계곡에 있는 기도원이나 교회를 볼 때 갑자기 옛날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기억이 확 올라와요.
그 당시 대구 성일교회 다녔거든요. ‘모이기에 힘쓰라’라는 히브리서 10장 25절의 말씀이 있잖아요. 교회 가서 모이기에 힘쓸 때마다 모이는 그 시간이 그렇게 기다려졌었어요. 왜 기다려졌느냐 하면, 내가 온전할 수 있는 그 기회를 내가 포기할 수 없었어요.
모이기에 힘쓰고 거기에 합류하게 되면 나는 점점 더 완벽한 자가 되기에 어떤 점이 좋으냐 하면, 남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는 실력이 늘어나는 거예요. 그 사람의 문제점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동시에 비례적으로 나는 점점 더 완전에 가까울 때 이 세상이 꺼지고 이 세상이 다 사라져도 나는 좋았습니다. 왜? 나는 온전하니까.
그 재미없이는 모이기에 힘쓰지 않을 거라는 말이지요. 그런 즐거움이 없다면. ‘지옥 갈 인간들은 교회 나오지 마. 나 혼자라도 있겠어.’ 모든 것이 없어져도 온전한 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온전한 나를 없애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었던 겁니다. 그게 어디서 나타났느냐 하면, 바로 유월절 사건이고 그 유월절 사건을 반복하는 일이 제사장의 일입니다.
제사장의 존재는 뭐냐? 나는 나를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온전한 내가 되도록 시도하려면 누구를 밀치고 없애야 하느냐 하면 제사장의 존재를 없애는 거예요. 진짜 제사장입니다. 그 제사장을 없애고 백성들이 원하는 온전해지고자 하는 것을 호응해 줄 수 있는 가짜 제사장을 북쪽 이스라엘에서 세우는 거예요. 그게 인간쪽에서 하나님을 파괴하는 일이었던 겁니다.
그러면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의 차이점이 뭐냐? 남쪽 유다는 자기 처분권을 포기했느냐?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북쪽과 똑같아요. 똑같은데 남쪽 유다의 특징은 하나님의 죄사함과 긍휼하심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분이 남쪽에서 나온다는 점이 달라요. 하나님의 다윗의 등불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존재는 하나님의 일을 다루고 작업하는 자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여기 있느냐?”라고 물어요. “예. 내가 있습니다.” 땡, 틀렸습니다. “네가 살아있느냐?” “예. 살아있습니다.” 틀렸어요. 땡입니다.
제사장은 유월절, 대신하는 양의 작업에 동참해 있기 때문에 “네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제사장이 있다.” 앞으로 네가 있다고 하지 말고 “제사장이 나에게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해요. 네가 살았다고 하지 말고 “제사장이 네 속에 살아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하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가 없으면요, 참 좋은 점이 있어요. 자기가 없으면 아무 걱정할 게 없어요. 모든 걱정은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 잠시라도 한 세 시간만이라도 내 차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 차가 없다고 한다면 차 기름값, 보험료, 차 고장 날 거, 차 사고 날 걱정 등등, 어떻습니까? 일시에 없어졌죠. 만약에 이 세상에 내가 없다면 남과 다툴 일도 없고, 남이 날 어떻게 볼 지 걱정하거나 염려할 일도 없어요.
그러니 이렇게 좋은 게 어디 있습니까? 이게 은혜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백성들은 ‘내 인생은 내가 처분한다’라는 거예요. 이건 지독한 자기 동정입니다. 이 지독한 자기 동정이 평생 자기를 괴롭혀요. 늘 이렇게 바들바들 떨며 살아갑니다. 그것도 어느 때 끝나는 게 아니에요. 끝날 기미가 안 보여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있는 걸 어떡해요?’ 자꾸 내가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는 거예요. 아닙니다. 내가 있다는 것은 착각이고 이것은 오류입니다. 내가 없어요. 내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일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누구 일이다? 주의 일이죠. 주의 일에 나의 출생, 그동안 성장 과정, 나의 결혼, 일상생활, 내 아픔, 죽음까지 유월절 양에다가 담아서 전환시켜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일을 유월절 안에다가 주의 일로 전환시키면 그다음부터는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있지도 않은 나의 일이 아니고, 분명히 계시는 주님의 일로서 내가 아프고, 태어났고, 키 컸고, 자라났고, 결혼하고, 아파트 사고, 늙어 죽고, 이게 몽땅 주의 일이 돼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뭘 궁금해야 하느냐? ‘그러면 나의 일이 주의 일로 바뀌는 방법이 뭡니까?’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살아있는 내 존재 자체를 없애고, 살아 있는 나를 죽은 자로 없애고, 그래서 나는 없고 제사장 있고, 나는 살아있지 않고 주님의 제사장이 살아있다는 것으로 그렇게 바꾸는 방법이 뭐냐를 궁금해야 해요.
방법은 이겁니다. “네가 나한테 육신 사용료 준 적 있어?” 육신 사용료. 이게 주님이 나한테서 나를 뺏는 방법이에요. 만약에 내가 살아있으면 나는 평생 누구한테 협박당하느냐 하면, 평생 나는 나한테 협박당해요. ‘살아있는 널 어떻게 관리하려고 행동을 그렇게 해?’
만약에 차가 없는데 어떤 보이스피싱이 전화를 자꾸 걸어요. “여기 경찰서인데요, 당신도 모르게 당신 차가 사고를 내서 지금 고소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합의금으로 돈을 이체하시기 바랍니다.” 그거 듣고 난 뒤에 차도 없는데 ‘어떡하지? 어떡해?’
“당신 차 때문에 그 사람 조카가 죽었대요. 사망합의금 조로 우선 2천만 원 먼저 내기 바랍니다.” 그 소리 듣고 얼마나 부들부들 떨겠습니까? “‘난 인생 망했다, 망했어.’라고 이럴 줄 알았지?” 전화기에 대고 이렇게 이야기 할 거예요. 협박을 남이 하는 게 아니에요. 본인이 본인을 협박해요. ‘너 그러면 죽어. 너 그러면 너다움이 날아가는 거야. 무슨 낯짝을 들고 살려고 해, 남은 생애를! 부끄럽지도 않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죠. 말만 위로조로 하는 게 아니에요. 거기에 합당한 조치가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 조치가 뭐냐 하면, 육신 사용료를 달라는 거예요. 내 몸이 이미 어떻게 됐다?
내 육신이 이미 하나님의 소유로 전환됐다는 말이죠. 이제는 내 것이 내 거라는 협박과 두려움에서 그만 떨라는 거죠. 아무 일이 안 생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일이 생기는데 그 모든 일이 주님 자신을 원해서 자기가 만든 협력하여 선을 이룬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우리가 내 일이라고 착각해서 걱정을 본인이 늘어지게 합니까? 본인이 본인에게 협박 공갈하고요. 내가 나한테 ‘너 똑바로 안 살면 죽어.’ 이런 식으로 하고. 큰 오류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여로보암이 단, 이곳은 백두산이고요 벧엘은 북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한라산이에요. 저 위와 남쪽 저 끝에다가 두 개의 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여로보암이 말합니다. “너희들이 섬기고 있는 신이 바로 이 송아지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오케이.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특정 왕이 잘못돼서 나라가 두 조각났다는 것이 분명하고 첨예한, 뚜렷하게 보이는 원인이 맞아요. 하지만 그 배경으로 자리 잡은 백성들의 요구조건을 여로보암이나 르호보암이나, 나중에 르호보암도 마찬가지고요, 솔로몬도 거부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백성 개개인의 인생에 자기가 처분권이 있는 것 같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이 나라의 모든 권력도 왕에게 처분권이 있어서 내가 왕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 독재라는 것이 국가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교회에도 있고, 가정에도 있고, 직장에도 있고 어딜 가도 있는, 심지어 초등학교 4학년 2반에도 독재가 있어요. 독재가 있을 때 사람들은 말합니다. 참고만 있으면 독재가 생긴다는데 그건 잘못된 거예요.
참고 있으면 독재가 생기고 참고만 있으면 그 독재자의 노예가 된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인간은 애초부터 노예예요. 누가 나한테 지시하기를 원하고 나는 그 지시에 따르는 관계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게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처분권이에요. ‘나에게는 날 처분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난 여기 있으니까.’ 정말 있어요? 내가 살아 있습니까? 정말 살았습니까?
자, 이제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의 일을 주의 일로 전환하는지 그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방법은 북이스라엘과 남쪽을 둘로 쪼갭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시간을 반으로 쪼개서 그다음에 서로 마주 보게 하는 거예요. 반사 대칭성, 마주 보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보통 세상의 물체는 둘로 쪼개서 처음에 쪼개진 것과 마주 세웠을 때 그 둘을 더하면 다시 전체로 하나가 되게 되어 있어요. 1을 쪼개면 2분의 1과 2분의 1이 생깁니다. 2분의 1 더하기 2분의 1은 1이 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게 틀렸어요. 2분의 1 더하기 2분의 1은 1이 아니에요. 틈, 간격 또는 간극이라고 하는데 그 틈 사이에서 쪼개놓으면 쪼개기 전에 몰랐던 여분의 것이 거기서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제사장이 필요한 이유가, 제사장은 제물을 쪼개는 자들이에요. 희생, 살아있는 양을 죽이고 살아있는 소와 염소를 죽이는 자들이에요. 죽은 것 가져와서 바치는 게 아닙니다. 산 것을 쪼개서 바치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여러분들이 알기 쉽습니다.
물체는 아주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에는 그 구성되어 있는 모든 입자를 다 더하면 원래 총량의 무게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양자 물리학자들이 실험하고 조사를 해보니까 더 커요. 부분들의 합이 전체보다 작아요. 뭔가 셈하지 않은, 헤아리지 않은 요소를 찾아내지 못했어요. 그게 따로 있어요.
하나님의 방법은 이겁니다. 하나의 이스라엘을 둘로 쪼갭니다. 쪼개놓고 마주 보게 해요. 마주 보면 북쪽이나 이스라엘이나 우상 섬기는 건 똑같아요. 인간은 똑같아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살아있고 따라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관리한다’라는 처분권, 그 점에서 우상이 딱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사장이 존재하는 이유를 몰랐어요. 그러면 제사장은 뭘 하느냐? 인간을 둘로 쪼개면 내가 여기 있지 않고, 살아 있지 않고 죽잖아요. 그 죽음, 어두운 죽음, 그 죽음을 다루는 직업이 제사장이에요. 그 죽음 안에 있는 세계의 범위와 넓이와 면적이 살아있는 두 개의 합보다 더 훨씬 크다는 것이 제사장을 통해 알려집니다.
‘너는 살아있는 네 세계밖에 모르지? 그래서 벌벌 떨면서 살지? 그러나 네가 없다고 생각하고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비로소 틈새에서 나온 세계가 네가 벌벌 떨고 무서워하는 그 모든 것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고 용납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너희들이 쪼개는 그것을, 자기가 없어지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는 본래부터 내 몸은 누구 것인가 하면 하나님, 주의 일에 속한 거예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을 위해서 출생시켜 놓은 거예요.
주민등록에 19…, 뭐 이렇게 나가잖아요. 어쨌든 출생했잖아요. 출생하는 것이 주의 일에 해당되게 되면 그것은 나의 출생이 아니고 제사장의 출생이라고 하나님의 율법이, 말씀이 알려주는 겁니다. 이게 이사야 40장 6절에서 8절까지 다 나와 있는 말씀이에요.
오늘 열왕기상에 보면 두 송아지를 만들었잖아요? 출애굽기 32장 4절에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이렇게 했어요.
이게 우상이라는 말을 안 해요. 그들에겐 우상이 없어요. 사나 죽으나 여호와예요. 여호와와 동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 내부에 있는 여호와를 바깥에 형상화시키니까 그게 송아지인 거예요. 그 아이디어는 어디서 왔는가? 애굽의 신, 그것도 거룩한 애굽의 신을 형상화해요. 왜? 죽음을 다루는 제사장이 없기때문에.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에 접어들었어요. 제사장은 뭐냐 하면, 나를 쪼개고 내 안에 있던 죽음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작업 하시는 분이에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오늘날 영원한 제사장은 누구십니까?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거예요.
예수님이 표준 모델이라고 하나님은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내가 살아있고, 나는 내 위주로 있고 제사장인 예수님을 믿어도 보조로 믿고, 다시 말해서 제사장을 내 중심에서 추방해 버리면 그때부터는 내 중심이 내가 표준 모델이 돼요.
이게 바로 긍휼이, 죄 사함이 없는 이방 나라 북이스라엘 그리고 망해가는 유다가 다 같이 이런 거예요. 유다는 제사장이 있지만 제사장 의미를 몰랐고, 북이스라엘은 제사장을 추방하고 없애버리고 엉뚱한 일반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웠어요.
출애굽기 28장에 보면 제사장은 반드시 아론과 그 자손이 하라고 되어 있어요. 그때 조건을 달았습니다. 3절에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냥 아론 자손에게 제사장을 하게 하라고 그렇게 한 게 아니고 그들에게 ‘내가 지혜로운 영을 채운 자들’이라는 조건을 붙여요. 지혜로운 영이 있는 자들이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물론 기본은 아론의 자손들이고요. 아론의 자손들이 뭐 한두 명입니까?
지혜로운 영이 뭐냐? 바로 죽음의 의미를 아는 자에요. 죽음의 세계가 살아있는 인간 세계보다 훨씬 크고 깊고 마지막에는 결국 죽음의 세계가 모든 걸 덮는다는 거예요. 죽음의 세계라는 것은 인간이 모르는 어둠의 세계죠.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나무에서 꽃이 피죠. 줄기에서는 과실, 앵두같은 것들이 맺히잖아요. 그 능력이 어디서 나왔어요? 어두운 데서 나왔어요. 그 어두운 데가 어디냐? 땅 밑이 어두워요. 어두운 땅 밑에서 기가 올라와서 그렇게 열매와 꽃이 피는 거거든요.
이사야 40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방금 이야기한 식물의 예를 염두에 두고 이사야 40장을 한 번 보세요. 6절에 “모든 육체는…” 그 뒤엣 말을 □(빈칸)로 해놓고 “모든 육체는 다 겉멋이다, 껍데기다.” 즉 모든 육체는 기본이 아니다. “네가 육체에 사용료 준 적이 있나? 마치 네 것처럼 사용료 안 줬잖아. 내 것이야.”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은 다른 곳에 바탕을 두고 모든 육체가 거기서 쏟아져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겠습니까? 육체를 어디다 돌리면 되겠어요? 그 육체를 말씀의 세계로 돌려서 말씀과 육체의 관계를 재정립하면 그것이 바로 제사장의 세계, 주의 나라의 세계 그게 천국이겠죠?
“육체야 들어라.” “예. 듣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사 40:6) 뭔가 수상하죠? 그 뒤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 40:7-8)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아까 송아지 형상 있죠. 송아지 형상이 신이라고 했단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곧 유다 나라 선지자인 이사야가 말합니다. ‘송아지가 형상이 아니고 인간이 형상 같은데, 그 형상인데 그 형상이 어떤 형상인가? 소멸하는 형상, 점점 더 소멸하는 형상.’ 꽃 같은 형체가 있는 것 같이 보이고, 풀 같은 형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뭐가 된다? 점점 점점 “어? 없네? 거 봐. 인간 없잖아. 인간 죽었잖아.”
여러분들이 만약에 천국 가거든 천국으로부터 이런 축하 인사를 받을 겁니다. “천국에 들어온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 숯덩어리야! 흙덩어리야!” “예수님의 피의 나라, 죄 사함의 나라에 들어온 것을 축하드립니다.” 왜? 예수님은 말씀의 완성이지만 우리는 그 말씀의 완성에 의해서 반드시 말라야 하고 시들어 버려야 되는 거예요.
마르고 시들게 하는 그 능력이 예수님 십자가 능력에 의해서 부는 바람입니다. 있지도 않는데 내가 있다고 우기고, 내가 죽었는데 살았다고 우기는 것은 벌써 우리 곁에서 제사장을 삭제시킨, 제사장이 빠져버린 모습이에요. 제사장이 빠져버렸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태어날 때도 혼자 태어났고, 장에 갈 때도 혼자 가고, 공부할 때도 혼자 했고, 결혼할 때도 혼자 했고, 교회 다니는 것도 혼자 했고, 예수님 믿는 것도 혼자 했고, 옆에 제사장의 존재는 없고, 전부 다 나 홀로 TV 보고, 나 홀로 춤을 추고, 울고불고…, 그러고 있다고요.
마태복음 8장 20절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제사장이 표준 모델이에요. 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곧 “나 소멸하러 왔단다!” 그러니까 그 소리 듣고 어떤 제자가 “예수님,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제가 장례는 치르고 따르겠습니다.” “이미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의 이벤트 벌이게 해라. 넌 살아야 할 거 아니야?” 어린 양의 혜택을 입는 자로 새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사장을 구박하지 말고 제사장 증거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뭔가, 뭔가 애초부터, 근본부터, 뿌리부터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못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지,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지옥 안 가야 되는지, 그 소관이 우리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인 것을 우리는 정말 몰랐습니다. 내가 온전할 때 그게 신앙인 줄 알았습니다. 온전한 나를 없애주시는 주의 일에 감격하고, 감격하고 또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