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이사 가는 날

아빠와 함께 2025. 5. 25. 19:39

이사 가는 날

2025년 5월 25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9-10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구약은 하나님께 의도적으로 책정해서 벌리신 연극 무대가 들어있는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약속의 땅’이며 그 출연진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 출연진들의 조상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한 곳에 배회해야 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즉 이 땅에 대해서 그 어디에는 정착해서는 안 되는 인물로 쓰여집니다. 이것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가 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서는 뭐라고 표현될까요? “다 이루심”입니다. (요 19:30) 그런데 이 ‘다 이루심’의 당사자는 예수님 홀로입니다. 즉 예수님 외에는 구원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는 ‘인간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 구원 이야기’입니다. 이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구절이 바로 요한복음 14:2-3에 나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영원한 처소는 어디까지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국한되고 예수님 외에 다른 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시 오셔서 그곳으로 데려가지 아니하면 결코 그 어떤 자는 구원될 수 없습니다. 이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라는 분은 주님에 의해서 자신이 구원받은 상태를 ‘셋째 하늘’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서 알려줍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2-4)

셋째 하늘이라는 말은 첫째 아들과 둘째 하늘이 있다는 말입니다. 첫째 하늘이란 인간이 태어나면서 평생 바라보면서 그 밑에 놓여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아무리 탐구하고 노력해서 해와 달과 별과 함께 환경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첫째 하늘 아래서도 하나님의 자비심과 은혜와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냥 그림자와 흔적으로 주어집니다.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

그리고 시편 136:7-9에 보면, “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이 하늘 아래는 ‘인자하심’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감사함’보다 ‘기뻐함’으로 찾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교회 와서 구원받아 본인이 기뻐하겠다는 일념으로 꾸준히 다닙니다. 자기 기쁨, 곧 자기 행복이 자신이 감사할 분을 발견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둘째 하늘의 존재 의의를 알지 못한데서 비롯됩니다.

둘째 하늘은 영적 전쟁이 벌어지는 전쟁터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첫째 하늘 아래 있는 자들은 자신의 삶과 평화롭고 여유로우면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여깁니다. 요한계시록 12:7-8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둘째 층에 있는 악마는 스스로 신으로 행세하기에 ‘누구로부터 거절당한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합니다. 남들로부터 모욕당하느냐 차라리 스스로 자신을 자해는 쪽을 선택합니다. 모든 인간이 아담의 자식들이기에 이런 악마의 품성을 띠로 이 땅에 태어납니다. 즉 “내가 뭐가 모자라서 내 뜻이 관철되지 못하냐”라는 분노의 기질을 바탕에 깔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만나도 따질 기색입니다. “저 할 만큼 했습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둘째 하늘을 통과 못합니다. 당연히 셋째 하늘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점은 사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죽음 후 다시 찾아오시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최대의 성의있고 겸손한 태도를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은 운명을 선언하십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쉽게 말해서 끝까지 내가 원대로 되어지는 너의 인생을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인생사는 실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응답의 여파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다음과 같이 기도 응답받았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이미 성령받아 셋째 하늘에 합류한 사도는 자기 운명을 지상에 남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운명을 재현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베드로는 거절하므로서 베드로 성령으로 인해 벌써 구원시켜 놓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베드로에게 남은 지상 생애가 있다고 치더라도 그것은 ‘남은 지난 날을 마저 사는 것’에 해당됩니다. 그런 식으로 이미 다 이루심에 입각해서 남은 삶을 재해석하게 됩니다.

즉 이미 죽은 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남은 삶에 재방문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첫째 하늘에서 둘째 하늘로 거쳐 셋째 하늘로 가는 경로를 보여주게 됩니다. 이 경로를 따로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뿌려 놓으셨습니다. 소위 잘난 척 하는 우리 인간의 본성이 성령의 재해석으로 인하여 더욱 더 깊이 있는 피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겁니다.

나의 기쁨에서 예수님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는 삶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시 143“11-1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피 안에 각설탕처럼 용해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모든 게 나에 대한 보호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보호가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8강-히브리서 11장 9-10절(이사가는 날)250525-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9-10절입니다.

히브리서 11:9-10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여기 ‘장막’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장막’이 어느 것과 딱 연결이 되느냐 하면, 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되어 있어요. 갈 바를 알 지 못 했는데 갈 바를 알지 못한 그 증거물이 뭐냐? ‘장막’ 또는 ‘장막 생활’이 되는 겁니다.

갈 바를 알 지 못 했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의 의지라든지 자신의 어떤 계획 또는 목적, 자기 계발, 이런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 제거되고 거부되고 있다는 그런 생활을 말하는 겁니다. 자신의 어떤 목표를 세우더라도 하나님께서 때맞춰서 그때그때 그걸 거부하는 방식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 정착 생활, 정주하는 생활을 거절하는 운명을 집으로 표시하게 되면 장막이 되는 거예요.

‘갈 바를 알 지 못 했다’라고 이렇게 나와 있는 이것은 구약 시대거든요. 구약에서 갈 바를 알 지 못 했는데 신약에 넘어오면 이게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에 해당되는 것을 신약 요한복음 14장 3-5절에 보면 그게 ‘처소’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처소는 사람들이 미리 생각할 수 없는 처소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그러니까 이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승천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의 처소가 분명히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예비하러 가서 처소가 마련되면, 그래서 처소가 예비 되면 그제야 내가 다시 너희에게도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는 거예요.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구원할 수가 없다.’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저 구원 해달라’라는 이런 모든 인간의 의지와 욕구는 마귀가 집어넣은 거예요. 악마적이에요. 본인이 구원될 수가 없어요. 구원될 수가 없는데 왜 구원을 논하냐는 그 말이죠.

구원은 누구에게만 해당되느냐 하면, 예수님에게만 해당돼요. 예수님 홀로 아버지에게 구원되어서 하늘나라에 처소가 마련되면, 마련되고 그다음에 그냥 안 오시면 예수님 홀로 구원받죠. 처소가 마련이 되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처소가 마련되면 내가 다시 너에게로 가서 너를 내가 있는 곳에 가게 한다.’라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구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결정적 이유가 뭐냐? 예수님이 성령으로 다시 오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원래대로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이 될 수가 없어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구원을 말하는 교회는, 저는 이단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자기 구원 받기 위해서 교회 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을 거절하지 아니하면 교회 아무리 다녀도 소용없어요. 교회 오는 교인들 마음속의 모습을 저는 한 문장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주님, 저 할 만큼 했어요.” “어쩌라고? 너 교회 왜 왔는데? 너 교회가 위험한 곳인 줄 몰랐어?” 교회 와놓고는 하는 말이 저 할 만큼 했다는 거예요. 그거 왜 하죠? “죽어서 좋은 데 갈려고요.” 누구 맘대로요. 그건 네 생각이지 하나님 생각이 아닙니다.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해서,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연구했던 사람이 사도바울이 사도 되기 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사울이 사도가 되고 난 뒤에 어떻게 달라지는가?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을 이야기해 버려요.

첫째 하늘은 둘째 하늘에 의해서 막혀있고, 둘째 하늘은 셋째 하늘에 의해서 막혀있다는 겁니다. 막혀있다는 말은 첫째 하늘 밑에서 백날 생각해도 둘째 하늘을 모른다는 것이고, 셋째 하늘은 더더욱 모른다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 이렇게 절단되어 있고, 막혀있고,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이 세 개의 하늘의 관점에서 사도바울은 모든 편지를 다 써 버렸어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 ‘어떤 사람’은 뭐 자기 이야기죠. 2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사도가 되고 난 뒤에 초창기 자기의 경험치였습니다. 이 초창기 경험치에 근거해서 나머지 모든 편지가 나온 겁니다.

‘내가 셋째 하늘에 갔다.’ 그걸 가지고 구약 성경 전체가 다 설명이 됐던 거예요. ‘구약 성경 전체는 바로 첫째 하늘 아래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그러면 첫째 하늘은 뭐냐? 첫째 하늘을 보게 되면, 하늘에 별이 있고 달 있고 구름 있고 그렇죠. 중력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첫째 하늘에 손이 닿을 수 없습니다. 자꾸 땅으로 내려와요.

그 첫째 하늘 아래서 하나님이 ‘인간은 왜 구원받지 못하는가?’를 알리기 위해 하나의 연극 무대를 마련했는데 그 연극 무대가 약속의 땅이고, 그 연극의 출연진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도 연극이었고, 광야생활도 연극이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연극이었고, 거기서 몽땅 쫓겨난 것도 연극이었어요.

‘그거 봐, 안 되잖아. 성전 섬기고. 제사 드리고, 십일조 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봤자 소용없잖아? 구원 안 되잖아.’ 하나님이 꾸민 연극에 이스라엘 백성이 참여했고, 그 참여한 연극 시나리오의 끄트머리에 유대 나라가 있고, 유대 나라의 연극에…, 연극이라는 것은 일종의 가짜죠. 연극이니까, 실제가 아니니까요.

실제가 아닌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걸 실제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때 실제로 셋째 하늘에 계신 분, 아버지와 함께 있는 분이 둘째 하늘을 경유해서 첫째 하늘 밑에, 지금 연극이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 유다 역사 속에 그분이 꽂혔습니다. 삽입해 들어왔습니다.

들어오니까 첫째 하늘에서 사용했던 그 언어와 개념들, 사상들이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는 데에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도대체 저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들이 예수님 말을 아무리 들어도 몰라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해요.

그렇게 모르는 이유가, 예수님께서 셋째 하늘에서 첫째 하늘로 오는데 둘째 하늘을 경유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둘째 하늘은 어떤 내용이냐 하면, 악마와 주님의 나라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는 그 전쟁터가 둘째 하늘이었어요. 인간들은 모르죠. 왜냐? 그게 영적 전쟁의 층이기 때문에.

셋째 하늘에서 둘째 하늘로 오면서 영적 전쟁이 있는데 그 첫째 하늘 밑에, 구름과 별 아래는 조용해요. 아주 평온~합니다. 인간들이 행복을 찾으면서 ‘이렇게 사는 게 전부지, 뭐.’ 이러고 있어요. 그 첫째 하늘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산업화가 되어 있고 산업화에서 분업이 이뤄지거든요.

분업이 이뤄지니까 그 첫째 하늘 구름 아래서, 그리고 푸른 하늘 아래서 인간들은 각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종사합니다. 의료계, 건축계, 공무원, 교직, 고기 잡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 그리고 서비스업, 종교계까지 모든 게 분업화가 되어 있어요.

분업화가 되어서 사람들끼리 이야기합니다. “진실이 뭡니까? 진리가 뭐예요?” 자기가 하는 일이 진실이죠. ‘내가 하는 일 그게 정답이다.’ 왜? 분업화가 되어 있으니까요. 직장에 있는 남편 보고 “당신이 가사 일을 할 줄 압니까?” 모르죠. 남편은 자기 직장 일거리 가지고 집에 와서도 처리한다고, 잔업 한다고 바쁘죠.

그런데 “설거지도 제대로 못 하고…” 하면 “설거지는 당신 전공이지.” 가정주부로 분업화가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각자 각자 이 첫째 하늘 아래서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요. 그리고 죽을 때 뭐라고 하느냐? “저 할 만큼 했어요.” 그런데 할 만큼 했는데 그 분업 세계 산업화에서 쫓겨났습니다. 그걸 퇴직이라고 합니다. 퇴직해서 할 일도 없으니까, 연금 타서 사니까 갑자기 허무를 느끼는 거예요.

여러분, 허무를 느낄 때는 제가 팁을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대구 불로동에 가면 279개의 고분군이 있습니다. 서기 5-6세기 삼국 시대 호족들의 무덤이 있는데 거기 가서 한 번 누워보세요, 편안하게 누워서 하늘 보세요. 보면 구름이 하늘에 떠다닐 겁니다.

구름은 소멸의 이미지에요. 모든 형상이 다 떠오르지만 결국 소멸합니다. 그 구름 이미지가 잔디밭에 누워 그 구름을 쳐다보고 있는 내 이미지와 합치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끝까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첫째 하늘에서 숨을 거둡니다.

러시아계 미국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 1899-1977)라는 사람이 썼던 작품 중에 『창백한 불꽃』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그 소설에 보면 다양한 자살 방법들이 나와 있습니다. 관자놀이에 권총 겨누기, 독약 마시기, 욕조에서 정맥 끊기, 다리에서 뛰어내리기 등 뭐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사람이 추천하는 가장 최고 행복한 자살은 항공기에서 뛰어내리기였습니다.

불가능하죠. 비상구 안 열리면 못 뛰잖아요. 뭐 거기다가 제가 하나 더한다면 삼엽비행기에서 격투 벌이기, 이거 톰 크루즈가 했던 거예요. 그 작가가 이야기하는 것, 즉 인간이 사는 게 뭐냐? 지연된 자살이라는 거예요. 왜? 어차피 의미 없으니까, 하늘에 떠도는 흰 구름 같은 거니까.

뭔가 열심히 일을 할 때는 자기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남들이 인정해 주니까요. 그러나 이제 손 떨린다고 직장에서 나가라고 했을 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뭐냐? 이것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에요. 아무런 해답도 없이 그저 열심히 일해서 가정을 이루고 다 했는데 아무런 해답도 없이 그냥 죽어가는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기는 ‘자기에게 답이 있다’라고 생각하는데 인간은 답이 아니에요. 그걸 몰랐던 거예요. 내가 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첫째 하늘 밑에서 인간은 어떤 신체, 키 168에…, 그런 식으로 신체가 있지만 그건 답이 아니에요. 답도 아닌 것들이 답도 아닌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면서 답인 양 평생토록 같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은 평생 수천 명을 만나도 결국 남을 만난 적이 없어요. 자기 모습을 거기서 찾을 뿐입니다. 자기 모습을 찾기 위해 그 사람을 만난 것뿐이고, 수만 명하고 이야기해도 자기 이야기만 했을 뿐이지 남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해외에 나가서 수백 명 만나도, 이를테면 호주가게 되면 수백 명을 만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만나도 어느 누구도 나를 부수는 타자는 없어요. 여기 있는 내 육체 덩어리가 호주에 갈 뿐이에요. 내가 답이 아니에요. 답을 외부에서 주는 게 아니에요. 답은 뭐냐?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뭐냐고 해놓고 답 안 주면 곤란하잖아요. 답 알려드리겠습니다.

부부 생활에 있어서 여러분, 제가 또 하나의 요령과 팁을 드리겠습니다. 부부 생활할 때 어떻게 생활해야 부부가 화목하냐? 결혼하신 분들 잘 들어놓으세요. 결혼하고 난 뒤에 청혼 하세요, 매일 같이. 결혼하고 난 뒤에 “여보, 나 당신하고 살아도 돼?” 매일 묻는 거예요.

매일 물으면 상대방이 그때마다 거절할 거예요. “나 너하고 안 살아.” 그다음 날 또 묻는 거예요. “여보, 나 당신하고 같이 살아도 돼?” “나 너 같은 남자랑은 안 살아.” 또 거절당하는 거예요. 이 거절의 끝이 바로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의 너하고 나는 안 살아.” 왜? 주님 혼자 빠져나왔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서 주님 혼자 빠져나왔어요. 삼 층에서 이 층, 그리고 일 층을 거쳐서 가실 때 “다 이루었다!” 하시고 홀로 갔어요. 그러면 남아있는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다 이루었다.’의 그 수준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걸 추잡하고 더럽다고 이야기해요. 그걸 속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거룩하신 것은 주님밖에 없어요. 다 이룬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말하기를 “주님 저하고 같이 살아요.” “안 살아.” 거절합니다. 늘 이렇게 거절하고 사는 것, 예를 들면 대기업 임원인데 곧 퇴직합니다. 퇴직할 때 이런 조언이 필요해요.

“당신은 대기업 임원이라는 그 괜찮은 소리 듣는 것이 버릇되어 있을 건데 퇴직하는 지금부터 당신은 모욕적인 발언을 듣는 훈련을 하세요. 그게 당신이 퇴직하고 난 뒤에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모욕을 받는 거예요. 결혼했는데 상대방에게 “난 당신하고 안 살아.”라고 모욕받을 때 그럴 때 그동안 내 말만 하고 내가 원하는 사람만을 만났던 그게 바로 답이 아님을 몰랐던 어리석은 삶이었다는 거예요.

‘삼층천에서 보는 안목을 내가 왜 몰랐던가?’ 같은 인간들끼리 만나면서 ‘나 어때?’ 그런 내 정당성, 내가 남한테 인정받는 거 그거 외에 뭐가 있어요? 없어요. 같이 일하다 보면 인정해 줘야 하지만 나중에 늙어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때 누가 인정해 줘요? 늙어서 70 넘어 취직하려고 하면 거절당하죠. 안 되죠.

신약 성경 특히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편지 전체가 이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의 내막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내막을 소개할 때 그 내막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주님으로부터 거절당한 사람만이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이에요.

‘넌 그냥 이 땅에서 정착해 살아. 나 혼자 하나님 아버지한테 갈 거야.’라는 그 마음, 주님이 다녀갔던 그 마음, 없는 처소를 만들기 위해 다녀가신 그 분의 마음, 그분이 처소에 갔기 때문에, 그 처소에 가신 그분의 마음이 우리에게 왔을 때 비로소 우리가 아는 것이 ‘우리는 첫째 하늘도 모르고 둘째 하늘도 모르고 셋째 하늘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랐습니다.’라는 그 내용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과 그리고 사도들의 편지 속에 다 담겨 있는 거예요. ‘주께서 저 같은 인간 거절할 만하네요.’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하여금 약속의 땅을 방랑 생활 하게 만들면서 뭘 주느냐?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주님께서 약속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개입하면서 그 약속 안에는 ‘다 이루었다.’가 있어요.

‘다 이루었다.’를 가지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게 되면 그들은 뭐라고 고백하느냐? “나의 갈 길을 내가 알지 못 하나이다.”하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해요. “나 이런 목적을 세웠습니다.”라는 식의 것들은 다 부서지죠. “나의 갈 바를 알 지 못 했습니다.”

갈 바를 알 지 못 했다면 어떻게 되느냐?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을 때 그 사람의 소속은 ‘다 이루었다.’의 소속이고요, 여기 중요한 대목입니다. ‘다 이루었다’의 소속이거든요. 이미 완결된 ‘다 이루었다.’를 가지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모든 날에, 하루의 일과에 재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재해석을 해버리면 ‘다 이루었다.’를 가지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전부다 지난날로 만들어버려요. 간추리면 ‘우리들은 남은 지난날을 삽니다.’ 이런 뜻이에요. 우리가 앞으로 더 십 년을 살아도 주님이 ‘다 이루었다.’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그것은 다 지난날이에요.

5년 후, 또는 2035년, 2040년, 남은 날이 어떤 날이라도 우리는 알 지 못 하고, 지난 살아온 날도 알지 못하는데 ‘다 이루었다’라는 해석 기준이 우리에게 꽂혀 버리면 우리 모든 것이 “개뿔도 모르고 살았습니다.”가 돼요. ‘개뿔도,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뭔가 아는 체를 하면서.

개뿔도 모르니까 당연히 주님 앞에 거절당하죠. “너 오지 마. 넌 첫째 하늘에서 살다가 죽어.” 사실은 나중에 지옥 가지만. 결국 지옥에 가게 돼요. 셋째 하늘과 더불어 지옥이 만들어지거든요. 그러면 뭘 모르고 있느냐? 너는 지금 둘째 하늘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면 첫째 하늘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첫째 하늘에서 인간은 자기의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저 할 만큼 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쁜 짓 안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 핑계를 댑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이 마지막 믿는 것은 바로 근육, 자기 근육에 집중해요.

머리든 기술이든 인공 지능이 다 뺏어 가버리고 남는 것은 힘으로 해야 할 일, 근육 가지고 살아가는 그게 기반이고 그 위에 사람으로 대우받으려고 약간의 지식과 기술을 익히지만 결국 남는 것은 근육질, 힘입니다. 그냥 짐승이에요. 그냥 짐승처럼 사는 겁니다, 인간은. 모든 것은 거품이었죠.

짐승처럼 살면서 인간처럼 살려고 이렇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흙일뿐인 짐승 같은 인간에게 악마가 마음을 줬어요. 어떤 마음을 줬느냐? 악마는 어떤 누구에게도 거절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요. 제일 싫어해요. 왜?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요. 거절당하는 걸 제일 싫어해요.

이 마음을 인간들 속에 악마가 다 심어놨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와서 성경 보면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인간들은 ‘바르게 산다는 게 뭐냐, 착하게 산다는 게 뭐냐? 어떨 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고, 어떨 때 하나님께서 너 구원할게, 하는지?’ 그러한 모든 지식과 모든 지혜를 확보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를 쓰면 뭐 합니까? 일본 가면 후지산 있죠? 후지산 보면 재밌는 게 그 위에 하얀 눈이 고깔처럼 덮여 있어요. 아무리 성경 보고 기도하고 뭐 열심히 해도 내 속에 남아있는 후지산 꼭대기 같은 자기 정당성, 무슨 수로 그게 없어집니까? 그게 자기 의인데요. 자기 존재의 정당성이고 자기 존재의 가치인데요.

악마는 인간에게 그동안 모든 종교를 다 허락했어요. ‘열심히 해. 기도 해. 마음을 낮춰야지. 낮추고 또 낮춰야지.’ 온갖 거 다 해요. 다 하는데 백날 하면 할수록 뭐가 누적이 되느냐 하면, 후지산의 자기 정당성과 자기 의는 점점 더 두꺼워져요.

그 두꺼워짐이 있으니까 거기서 분노가 나오고 화가 나오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걸 아시고 “네 윤리·도덕과 그 착함,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 의로움, 그거? 둘째 하늘 통과 못 한다.” 둘째 하늘은 통과 못 한다. 둘째 하늘은 악마의 세계에요. 악마가 영적 전쟁을 하는 겁니다. 착하다고 둘째 하늘 통과 못 하고, 둘째 하늘 통과 못 하면 셋째 하늘로 통과 못 해요.

1차원이라고 하는 것은 2차원의 그림자를 말합니다. 2차원은 3차원의 그림자를 말하는 거예요.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 공간, 3차원의 공간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그림자입니다. 그게 히브리서 8장에 나와요. 8장 5절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인간은 자기가 그림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주체자라고 생각해요. 내가 영원한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을 만난다는 것은 내가 주인공 됨을 점검하고 확인차 만나는 거예요. ‘나 어때? 나 괜찮지, 그치?’ 이걸 남을 통해 듣기 위해서, 이 소리 듣기 위해서 우리는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호주가서 일할 때도 그 소리 듣고 싶어 할 거예요. 그러나 어느 누구도 “너 나의 그림자야.”라고 이야기할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네가 실체라고? 네가 너라고? 난 너 거절한다. 난 너 거절해.” “맞습니다. 거절하셔도 맞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이미 사도바울같이 이미 셋째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자기의 남아있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그 ‘다 이루었다.’의 차원에서 그것을 재해석 할 때나 나오는 현상이에요.

“주여, 앞으로 십 년 이십 년 더 살아봐야 주님 앞에 거절당하는 내 모습뿐입니다. 그게 바로 인생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셋째 하늘, 다시 말해서 이미 처소에 간 사람에 한해서만 가능한 상태에요. 셋째 하늘 들어간 사람을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뭐 소개 안 해도 여러분이 다 알아요.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 그 스데반 집사의 죽을 때 모습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도행전 7장, 거기서 셋째 하늘이 어떤가 보세요.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5-56).

“너 안 보여? 난 보이는데!” 이게 셋째 하늘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첫째 하늘 밑에, 해와 달 밑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미친 거 아니야? 야! 저거 미쳤어. 돌 던져라!” 사도행전 7장 57-59절에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지금 스데반 집사님은요, 누구하고 대화하느냐 하면 주님하고 대화하는 거예요. 이게 셋째 하늘의 ‘다 이루심’의 상태에요.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해서 셋째 하늘에 갔습니까? 성령에 충만해서 온 거예요. 처소가 마련되었고, 처소가 마련된 자에게 주께서 찾아와서 그래요.

지난 화요일 서울에 갔는데 예약 택시가 와요. 대구 예약 택시는 앞에 ‘예약’ 그 글자만 번쩍번쩍하거든요. 그런데 서울 택시는 다른 점이 있어요. ‘예약’이라는 그 글자 뒤에 전화번호 뒷자리가 나와요. ‘이 번호로 예약하신 분 맞죠? 그분을 찾습니다.’ 이런 거예요.

그 예약 번호가 구원받는 비밀이거든요. 에베소서에서 그걸 ‘비밀’이라고 했어요. 성령 받아야 아는 비밀, 그 비밀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시공간을 떠나서 지금 십자가 사건 안에 같이 계신 분 혹시 계십니까?” 하고 찾아오는 거예요.

이럴 때마다 제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요. 옛날에는 우리 교회가 여자 집사님들도 같이 돌아가면서 기도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어떤 집사님이 기도했는데 아직도 그 시간 기록이 안 깨졌어요. 제가 알기로는 10초나 15초 기도해서 제가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기도 내용이 이미 해답이었어요. 제가 기억하는 내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믿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걸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피 안에 각설탕이 되어서 용해되어라.’

내가 착하냐, 안 착하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이 문제에요, 환경이. 첫째 하늘 아래서의 환경이 전부냐, 아니면 둘째 하늘 아래서의 환경이 전부냐, 아니면 셋째 하늘, 다 이뤘다는 환경 안에서의 전부냐? 셋째 환경 속에서는 “주여, 십자가가 바로 새로운 저의 거처고 영원한 집입니다. 그게 처소입니다.”

그 처소에 윤리·도덕, 착함, 성실함, 헌금했다, 예배했다, 전도했다…? 이거 누가 좋아하느냐 하면 악마가 “와, 밥이다. 우리 밥이다!” 이렇게 합니다. 왜? 둘째 하늘 통과 못 할 게 뻔하기 때문에요.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녀가 하늘나라 간다고 이야기했거든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셨느냐 하면, 주님은 셋째 하늘에서 바로 첫째 하늘로 온 게 아니고, 둘째 하늘을 경유해서 왔단 말이죠. 경유해서 오니까 거기에 마귀가 있었단 말이죠. 그게 요한계시록 12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7-8절에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그러니까 둘째 층, 중간층이 뭐냐? 악마하고 싸우는 층이에요. 여러분, 이거 아셔야 해요. 이 세상에 인구가 80억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70억 넘어 80억 가까이 갔을 거예요. 통계적으로 말해서 인구가 80억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첫째 하늘 아래서 분업화되어 있는 그쪽의 전문가들, 박사들이 하는 소리고 셋째 하늘에서 이 세상은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마지막 아담, 또 하나는 그냥 아담, 이 세상은 딱 두 사람밖에 없어요. 한쪽은 주의 이름, 한쪽은 인간의 이름 딱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아무리 자식을 낳고 몸부림치며 애를 써도 첫째 아담의 사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아담의 그 아담, 아담의 반복, 계속 반복, 무한 반복의 80억을 낳은 거예요. 이게 셋째 하늘의 안목입니다. 그 셋째 하늘의 안목, 그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는가?

자기 의와 자기 정당성, 나의 가치, 의미 그거? 그거 빠꾸 당합니다. 둘째 하늘에서 빠꾸 당해요. 통과를 못 해요. 그동안 신앙생활 뭐 했습니까? 여러분, 둘째 하늘을 자기 윤리·도덕 가지고 자기 의가 있다면, 후지산 그 꼭대기에 있는 자신이 있다면 둘째 하늘 통과 못 하고요, 물론 당연히 셋째 하늘로 통과 못 합니다.

이거 모르시면 설교 진도 못 나갑니다. 여기서 잠시 멈춰야 해요. 이거 모르고는 더 들어봐야 소용없어요. 더 들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안 그래도 착한데 교회까지 나와서 착한 인간으로 행세하려는 거? 그거 마귀가 피식 웃습니다. 피식 웃어요.

첫째 하늘에 셋째 하늘의 그림자가 있고, 둘째 하늘에도 셋째 하늘의 그림자가 있어요. 그리고 첫째 하늘 아래에 둘째 하늘의 그림자도 있어요. 있는데 인간은 자기 자체로 의미가 종결되고 완결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게 민주주의거든요.

‘내 행복을 위해서 당신은 뭘 해줄 겁니까?’ 그게 민주주의에요. 첫째 하늘 아래서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그림자 적인 요소, 하나님이 이렇게 두꺼운 성경책을 줘도 그 전체에 대해 해석을 못 하고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아, 내가 착하게 살면 천당 간다는 이야기구나.’ 이렇게 마귀가 좋아할 해석만, 주석만 실컷 보고 하는 거예요.

옛날에 제가 젊었을 때 많이 부르고 들었던 노래 중에 <고래사냥>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송창식이 불렀던 노래지요. 거기 보면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돌아앉았다는 말이 뭡니까? “아저씨 저 좀 일하면 안 됩니까?” 휙 돌아앉았어요. “저 시간 남는데 편의점 아르바이트 어떻게 좀…” 그래도 휙, 전부 다 돌아앉았어요. 내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도 돈벌이하면서 ‘아, 사람답게 사는구나.’ 그 티를 내려고 하는데 모두가 돌아앉았어요.

그러니까 그 젊은 날의 청춘에서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그래서 그 노래 가사에 보면 완행열차 타고 동해바다로 가서 고래나 잡자는 거예요, 송창식이. 그런데 고래사냥도 다 주인이 다 터 잡고 있어요. 다 주인이 있다고요, 이 땅에. 내가 살 틈을 안 줘요.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드리면, 첫째 하늘 속에 하나님의 셋째 하늘의 그림자가 구약에 이미 비춰 있습니다. 시편 19편 1-4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여러분,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야기하는 것을 누가 측정기를 가지고 측정해 냈습니까? 첫째 하늘에 속한 인간은 계시에 무능해요. 해석해도 완전히 다 이룬 데서 해석을 못 하고 그냥 ‘앞으로 이렇게 하면 잘되겠지.’ 하는 자기 계획 가지고 해석하기 때문에 그 해석은 소용없어요. 기껏 해봐야 그 의미가 자기에게 축적되니까, 자기 잘남으로. ‘나 해석 잘했다. 나는 구원 받을만한 믿음 가졌다.’ 이런 자기 해석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거절 대상입니다.

우리 믿음으로 구원 못 받아요. 그게 에베소서 2장 8절에 나오잖아요. 네 믿음 말고 선물로 준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 믿음은 내 믿음 아니에요. 예수님 믿음, 찾아오신 예수님 믿음이에요. 다 이루었던 믿음입니다.

시편 136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5-9절에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설명이 필요합니다. 어떤 설명이 필요한가? 지금 성경 시편에서 첫째 하늘, 해와 달과 별이 있는 첫째 하늘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가 작동하고 있는 중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을 들었던 그 당시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 인자하심을 찾을 수가 없어요. 찾을 수가 없다고요.

첫째 하늘 아래 이미 들어와 있는 셋째 하늘의 그림자를 인간이 찾을 수가 없어요. 왜 찾을 수가 없는가? 인간은 기뻐할 거리에 광기를 내기 때문에. 그러니까 미쳐버린 거예요. 자기 기뻐할 것을 찾는데 미쳐 있습니다. ‘내가 이 힘든 세상 사는데 내 힘듦을 보상해 줄 어떤 기쁨은 없을까? 돈, 건강, 자식 공부 잘하는 것, 가정 화목 그런 것이 내 보상의 기쁨이 될까?’ 그런 것에 매진 한다고 완전히 미쳐 있어요.

거기다가 “여러분은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하니까 사람들은 ‘아, 여기에 내가 구원받는 기쁨까지 더 얹으면 되겠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어디서 못 벗어나느냐 하면 자기 기쁨에서 못 벗어나요. 자기 기쁨에서 벗어나야 그다음에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기쁨으로 멈추면 감사가 아니에요. 자기 즐거운 것을 챙기는 것밖에 안 돼요.

감사라 하는 것은 종속되는 겁니다. 날 보호하는 데서 오는 기쁨에서 벗어나야 ‘성경 전체는 주님 자신이 하시는 일을 보호한다는 이게 성경의 핵심인 것’에 비로소 눈이 열린다니까요. 주보에 보면 요약이 되어 있잖아요. 그 첫 문장이 “집은 나를 보호하는 거처입니다.” 맞지요. 비 오는데 집 없으면 비를 다 맞잖아요. 집은 나를 보호합니다.

문제는, ‘집이 나를 보호한다.’라는 이것의 오류를 찾으세요. 이 문제, 집이 나를 보호한다는 그 말이 거짓인 이유를 대세요. 못 찾지요.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집이 있다는 그 기쁨이 진리를 차단했기 때문이에요. 진리를 차단했어요. ‘나는 집 있다. 너는 집 없지? 너는 전세 살지? 나는 내 집이 있다.’ 그런 거요.

이게 자기 기쁨에 자기가 못 벗어나는 거예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기쁨도 다 사그라져요. 사람은 구닥다리를 제일 싫어하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새로운 기쁨을 찾아 나섭니다. ‘에이, 퇴직하고 카페나 할까?’ 이런 거요. ‘더러워서 그만 사표 내고 다른 것 할까? 성실히 하면 되겠지.’ 누구를 위한 성실입니까? 누구를 위한 성실이지요?

기껏 나만을 위해서 살았으면서 평생토록 성실하게 살았다고요? 그게 누구를 위한 성실이었습니까? 본인의 기쁨이었잖아요. 본인의 행복이었잖아요. 그것은 당신 종교잖아, 당신 종교. 그거하고 셋째 하늘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셋째 하늘에 올라간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이렇게 합니다. ‘땅에서 말하는 그 말로 셋째 하늘은 표현이 안 된다.’

표현이 안 되면 그 그림자는 뭐냐? 사도바울이 가는 길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똑같아요. 그리고 사도바울뿐만이 아니고 사도 베드로도 똑같습니다. 그게 요한복음 21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이런 내용으로 마감을 짓는데요,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지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인생이 그 끝장나는 그때를 의도적으로 비교하시는 거예요.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아, 이 이야기 듣고 베드로 얼굴이 싸~ 했을 거예요. ‘내가 주님 사랑합니다’ 백날 해도 막상 주님의 이 이야기 듣고는 얼굴색이 변했을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 성령이 오게 되는데 베드로가 성령을 받으면 알아야 해요.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었던 기도가 맞는데 그 예수님에게만 해당되었던 그 기도가 예수님 처소에 합류할 모든 인간의 기도로 대체했다는 사실이에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아버지의 뜻 그거 뭡니까? 피잖아요. ‘평생 십자가 피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그래서 제가 용해(溶解), 녹는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각설탕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꾸 예수 믿는다, 십자가 믿고 구원받는다고 해도 아직도 자기가 단단한 고체가 되어 있어요.

‘구원은 이제 받아 챙겼고, 나는 기쁘고, 어려울 때마다 주께 기도해야지.’ 이러고 있어요. 환경문제로 가야 할 것을 다시 환경에서 개체로 와 버린 거예요. ‘나는 이제 갈 바를 안다.’라고. 갈 바를 알면 안 돼요. 갈 바를 알 필요조차 없어요. 뭐 한다고? 감사하기 바빠서요, 감사하기 바빠서.

여태 이야기한 것이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시편 143편 1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천천히 한 번 읽어볼게요. 어떤 게 함축되어 있는지 보세요.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잘 따라오고 계시지요?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살려주세요!” 안 살려줍니다. “내가 너를 끌어낼 거야.” “하나님, 살려주세요.” “아니 안 살려줘. 네 말 안 들어. 내가 강제로 끌어낼 거야.” 끌어낼 때 무엇과 무엇이 교체되느냐 하면, 내가 행한 모든 잘남과 정당성, 남한테 거절 받기를 싫어하는 나의 오기, 고집, 자존심 거기서 주님의 죽으심으로 끌어낼 거예요.

끌어내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이미 죽은 자로 우리는 이 세상에 재방문한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재방문. 남자분들은 전부 다 군대에 다녀오셨지요? 군대는 우선 신병훈련소로 가지요. 신병훈련소에서 제일 마지막 훈련코스가 뭐냐? 제대한 지 벌써 오십 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잊지를 못하겠어요. 그게 화생방훈련입니다.

방독면을 일단 쓰게 해요. 그런데 밀폐된 공간에서 가스를 터트려 놓고 “지금부터 방독면 벗는다. 실시!”라고 해서 방독면을 벗겨버려요. 방독면 쓰고 있으면 ‘독가스라고 뭐 별것 없네. 견딜만하네.’ 뭘 모르느냐 하면 환경을 몰라요, 환경을. 자기가 속해 있는 환경이 얼마나 지독하게 지옥적이고 악마적인지를 몰라요.

‘나는 교회 다니니까 성령과 함께 있으니 힘들지 않다.’ 이러고 있어요. “방독면 벗는다!” 해서 벗겨놓으니까 켁, 켁! 눈물 콧물 다 쏟는 거예요. 조교가 “나가라!” 그 소리를 빨리해 주기만 바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 끝나면 문 열어주고 “다 나가라!” 해요. “나가라!” 오늘 설교 제목이 ‘이사 가는 날’이에요. 매일매일이 나가는 날이에요. “나가라!”

누가복음 17장 31-33절에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지금 이 말씀을 우리보고 지키라고 하면 지킬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설교 마지막이니 잘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말씀이지만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기도원에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수도원에 간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못 지켜요. 못 지키는 데 나중에 성령이 오게 되면 무엇이 어떻게 되느냐?

이 말씀을 내가 매일 같이 못 지키고 있어서 하나님이 나의 그 옛사람을 보고 ‘너는 천국에 오지 말라’라고 거절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시킵니다. 어떤 입장에서? 이미 주와 함께 구원받은 입장에서. 그러니까 성경을 보면서 늘 거절당하는 감사가 있어야 하지요. “나 당신하고 안 살아.” 해서 거절당했는데 여전히 같이 살아.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 고마움은 뭐냐? 하루치밖에 안 돼요. 다음날에 “여보, 나 당신하고 살아도 돼?” “내가 너하고 사느니 차라리 죽으련다.” 또 거절당할 때 오는 그 감사, 그 고마움. 그런데 이런 일은 별로 없지만 가끔은 “나 당신 같은 남편 만나서 정말 좋아.” 그렇게 되면 그것은 뭡니까? 사탄의 시험이지요. 갑자기 우쭐해져요. 결혼을 잘했다는 어떤 보람 같은 것을 느낄 때 우쭐해지는 거예요.

아, 그거 둘째 하늘의 영적 전쟁이 개입된 거예요, 둘째 하늘의. 셋째 하늘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가끔은 둘째 하늘로 내려와요. 우쭐대면서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냐 하고 정신 못 차리다가 또 첫째 하늘로 내려가 버리면 그때는 이 성경 말씀 지킨다고 아주 용을 써요. 악을 씁니다. 성경 말씀 지켜서 천당 간다고.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과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 이루신 분이 찾아와서 ‘너는 너의 세계 말고 나의 세계에 영원히 살게 되었음’을 통보해 줄 때 그때부터 ‘왜 내가 만든 세계가 셋째 하늘에서 거부당하고 거절당하는지’를 깨닫는 가운데서 기쁨과 더불어 감사할 분에게 영원히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주일 낮 설교(250525)요약 히브리서 11장 9-10절(이사 가는 날) 이근호 목사


어제 했던 주일 낮 설교를 잠시 요약해드리겠습니다. 복잡한 내용들이 많이 있어요. 처음에 복잡한 내용은 신약의 수직적인 구조와 구약의 평면적인 구조, 그 구조의 차이는 뭐냐?

수학에서 차원 문제에 있어서 2차원은 1차원에 그림자만 나타나죠. 1차원, 선 위에 있는 존재는 면적 위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 파악을 못하고 그냥 그림자로, ‘이거 뭐야? 흔적이네? 없어지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림자의 특징은 없어지는 거죠. 소멸하는 거죠. 3차원에 대한 실체는 2차원에서는 그냥 그림자로 있다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3차원 공간을 지금 헤매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 그게 3차원 공간이거든요. 3차원 공간에 갔을 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3차원 공간에서의 목적지는 3차원 공간이 목적지가 되어야 되는데 3차원 공간 안에서는 어떤 도착지점이 없어요. 없으니까 헤맬 수밖에 없죠.

헤맨다는 것은, 거기서 감을 잡아야 되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여기가 영원한 곳이 아니구나.’하는 감을 잡아야 됩니다. 감을 잡는 그 안에 그들은 공간 속을 헤매면서 그들은 특수한 시간들을 같이 겪게 되는 겁니다. 시간들을 겪는데 결국 아브라함도 죽고 이삭도 죽고 야곱도 죽어요.

이것을 합쳐버리면 ‘이 3차원 공간에서 표현될 수 있는 (하늘나라) 흔적은 죽어서 사라짐’입니다. 죽어서 사라짐. 보통 이 3차원 공간에서 죽으면 끝입니다. 더 이상 이야기할 거리가 없는데, 하늘나라가 3차원 공간에 들어오게 되면 죽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거리가 생기는 거예요.

막벨라 굴에 집합해서 사라집니다. 사라진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지 없어진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사라지면서 ‘갈 바를 알지 못했다’가 ‘있을 곳이 못된다’로 전환되죠. 아, 이곳은 우리가 있을 곳이 못된다. 그런데 있을 곳이 못되는 곳에 왜 우리를 보냈는가?

신약에 오게 되면 사도 바울이 아주 파격적인 고백을 해요. 내가 셋째 하늘에 갔다는 거예요. 셋째 하늘은 무슨 뜻이냐 하면 둘째 하늘을 거쳤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왜 이 아브라함 이 사람들은 셋째 하늘을 모르는가? 둘째 하늘에 막혀있었습니다.

셋째 하늘에 있는 요소가 둘째 하늘로 오면서 왜곡되게 되어 있어요, 전부다. 왜곡이라 하는 것은 상(象/像)이 틀어지는 거예요. 엉뚱하게 틀어지는 거예요. 틀어지면서 첫째 하늘에 도착하니까 첫째 하늘에 사는 입장에서는 셋째 하늘에 속한 자들에 대해서 왜곡하고 곡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어디서 오셨습니까?’라는 말을 보통 안 믿는 사람들은 하지만, 아브라함은 천사에게 ‘어디서 오셨습니까?’ 말을 안 해요. 삼손의 부모는 천사한테 ‘누구십니까?’ 물었잖아요(삿 13:17). 누구십니까, 물을 대상이 아니에요. 그들은 3차원 공간에 그림자로 왔던 하늘나라의 흔적이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셋째 하늘에서 왔단 말이죠. 그럼 궁금한 게 둘째 하늘을 어떻게 통과했나 하는 거예요. 첫째 하늘에 있는 인간들은 그냥 눈에 보이는 해와 달과 별과 인류사는 영원히 간다, 끝이다, 다른 세계는 없다 이렇게 되겠죠. 그런데 시편 19편과 시편 136편에 보면, 해와 달을 만드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인간에게 그걸 믿으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에요. 왜냐하면 창세기 9장에 무지개 있잖아요. 창세기 9장에 모든 첫째 하늘을 무지개 아래쪽에 두었다고요. 무지개 아래쪽에 있으니까 무지개부터 셋째 하늘 사이는 노아 홍수, 심판했다는 그러한 요소가 차 있는 거예요.

두꺼운 심판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간은 몰라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계절, 햇빛과 공기를 주시니까 여기가 일종의 온실같이 느껴져서 이 세상 안에서만 모든 자기의 세계관이 여기서 확정되도록 그렇게 됐단 말이죠. 그런데 창세기 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무지개 안에 뭐를 집중해서 이야기하느냐? 피 이야기했어요.

피 있는 것 먹지 마라. 피 흘리지 마라(창 9:4-6). 어떤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데, 피째 먹지 마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마라는 말은 너희 인간들이 낼 수 있는 피와 하나님 법에 의해서 생긴 피를 철저하게 구별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생긴 피만 셋째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럼 이 피는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심판 속을 같이 경험했던 방주 안에 있는 정결한 짐승의 피죠. 방주 안에 짐승의 피. 그 짐승의 피는 시편 136편의 말씀처럼 자비를 나타내는 거예요, 자비. 유일한 자비.

그래서 노아의 함과 노아의 가나안은 이 자비성을 몰라서 아버지가 술 먹고 벌거벗을 것을 보고 얼레리 꼴레리 한 거예요. 이 자비심을 놓치니까. 자비심을 놓치니까 둘째 심판에 그대로 노출되는 겁니다. 아래 세계는 둘째 심판의 통제 하에, 지배 하에 들어간다.

그럼 셋째 하늘로 통과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피에요.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피만이 첫째, 둘째, 셋째를 통과하는 경로를 형성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두 번째 층을 통과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모든 인간은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셋째 하늘에서 첫째 하늘로 오니까 이사야 53장 말씀처럼 형편없는 몰골로 오는 거예요. 형편없는 몰골로. 누가 저 사람을 저렇게 망가지게 했지? 둘째 층을 통과한다고, 마귀를 통과한다고 그렇게 형편없이 된 거예요.

둘째 층을 통과하면서 망가진 모습으로 왔을 때 그 둘째 층의 망가진 모습이 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첫째 층에 속한 모든 인간이 둘째 층에서 전쟁 벌이고 있는 악마하고 한통속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첫째 하늘에 속한 인간들은 메시아를 처참하게 망가뜨려줘야 되죠. 처참하게.

그리고 난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환경, 해와 달 등은 ‘아무 문제없다’가 돼요. 아무 문제없는 공간이 됩니다. 첫째 하늘 아래서 악마가 인간을 이런 식으로 양육하고 있는 거예요. 훈육하고 있고 사육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 문제없다.

‘아무 문제없다’는 것을 주일 낮 설교에서 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 할 만큼 했습니다.’ 저 할 만큼 했습니다. 이 문장입니다. 아무 문제없는 세상에서 저도 할 만큼 했으니까 이것은 세 글자로 표현할 수 있어요. ‘정당성’. 다섯 글자로 ‘나의 정당성’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 어디 가도 내 나름대로의 할 도리 했기 때문에 나는 정당하다. 어쩌라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의식으로 인하여 둘째 층을 통과 못해요. 둘째 층을 통과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첫째 층을 통해서 첫째와 둘째가 한통속이 되었다는 것의 증거물을 갖고 있어야 둘째 층을 통과할 수 있거든요. 그 대표적인 분 중 하나가 스데반 집사에요.

스데반 집사가 셋째 하늘 이야기를 해버렸다고요. 귀를 막고 짱돌 던졌잖아요. “안 보여, 너희? 예수님 서신 것이 보이는데?” 이 얼마나 도발적인 발언이에요. “뭐? 하늘, 구름?” 요즘 과학자가 이야기한다면 “하늘 뭐? 전자의 산란? 입자? 분자, 원자 그것만 보이는데.” 왜? 그것만 측정하고 있으니까. 양자, 광자 이런 것만 보이는데. “예수님이 안보여?”

이렇게 되어버리면 층을 아래층으로 고정시킬 것이 아니라 세층으로 확장해서 그걸 한꺼번에 보는 눈이 필요한 거예요. 그 눈은 그 안목은 예수님께서 주셔야 되죠. 성령으로 주셔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다녀갔기 때문에 1층, 2층, 3층 다 보이는 거예요. 다녀가지 않으면 1층, 2층, 3층이 있는 걸 모른다고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 죽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했잖아요.

그래서 다녀가시면서 주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어제 낮 설교에서 이 문장으로 제가 함축을 했습니다. 어떤 안목을 가지느냐? ‘우리가 살 남은 날은 지난날이다.’ 우리의 앞으로 남은 날은 지난날만 살 게 남아있어요. 지난날만.

어째서 이게 가능하냐 하면 죽은 다음에 재방문하면 돼요. 이미 죽은 다음에 재방문하게 되면 우리가 살 남은 날이 결국은 내가 죽어서 거쳐야 될 날들만 아직 우리가 살 날로 남아있습니다. 그 말은 앞으로 살면서 해야 될 일은 우리가 꼭 죽어야 한다는 근거를 제시하는 날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죽을 짓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멀었어요. 그 죽을 짓은 아직 많이 남아있거든요.

죽을 짓을 할 때 악마에 속한 자들은 이걸 싫어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악마 자체가 신이기 때문에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거절’ 이것을 제일 싫어해요. 누가 나를 거절하는 걸 제일 싫어해요. 누가 나를 거절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런데 그 심성을 인간도 똑같이 닮았어요.

닮아서 자기 행함의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서 누가 나를 거절하게 되면 반드시 반대로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유대인들은 자기가 구원받은 대표적 모델이라고 여겼는데 그들의 구원을 거절했잖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아무도 구원될 수가 없죠.

주께서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이 땅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1층과 2층, 3층 각각의 내용에 대해서 한꺼번에 보게 하는 겁니다. 특히 2층 같은 경우에는 자기 정당성과 자기 자존심이 있는 한 절대로 못 통과하는 거예요. 퇴짜 놓는 거예요. 하늘나라에서 퇴짜 놓는 거예요.

그런데 모든 인간들은 일본에 가면 있는 후지산이죠. 자기 딴에 낮추고 낮췄습니다, 비웠습니다 했지만 결국 이 고깔 같은 자기 의가 없어지지 않아요. 없어지지 않습니다. 끝까지 가요. 그러면 성령 받은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 후지산꼭대기에 있는 하얀 눈, 눈 쌓임 이것을 확인하는 삶이죠.

그럼 왜 이렇게 자기 의, 자기 정당성이 살아 있는가? 인간으로서 스스로 거절할 수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게 내 삶의 기쁨이 되기 때문이에요. 삶의 기쁨. 그러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기쁨 가지면 안 되느냐? 안되죠. 그게 뭐를 가로막고 있어요? 나의 구원받은 기쁨은 어디로 다시 돌아오느냐 하면 내 것으로 돌아오거든요.

그런데 감사는 뭐냐 하면 내 외부의 인물에 대한 거예요. 외부. 나한테 감사하는 게 아니고 내 바깥의 인물에게 감사하면, 이 삶의 기쁨마저 좌절되고 그 속에서 감사로 고마움으로, 나한테 말고 다른 분께 대한 감사로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기뻐해도 탈이에요. 구원받은 기쁨도 복음의 기쁨도 탈날 정도에요.

그 감사는 아까 시편 136편도 이야기했지만 ‘해를 봐라. 달을 봐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이렇게 되거든요. 비로소 첫째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속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하나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파악이 되는 거예요.

그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방독면을 벗자’에요. 방독면을 벗어버리면 우리는 지옥에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럼 천사 조교는 뭐라고 합니까? “빨리 나가!” 하죠. “빨리 나가. 이 세상 빨리 나가. 얼쩡거리지 말고. 빨리 나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기를 소원하죠. 빨리 빠져나가기를. 더 있다가는 숨이 막힐 지경이에요. 이거 뭐 코로나 예방주사 또 맞아야 되지, 온난화 때문에 뭐 하죠.

특히 설교에서 말 안했습니다만 이 말까지 하려 했었어요. 후지산 눈 있잖아요. 온난화가 되어버리면 꼭대기에 있는 후지산 눈이 녹습니다. 그러면 눈이 산꼭대기에 있지 않고 우리 삶의 모든 형편에 이 자기 의가 다 녹아져있어요. 자기 정당성이.

따라서 정리하라면 이거에요. ‘환경문제’라는 거예요. 인간의 자질이 어떻고 인간이 얼마나 덜 훌륭하냐 더 훌륭하냐 그런 데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내가 좀더 열심히 할 걸, 바르게 하면 이런 일 없을 텐데, 그런 거 다 악마의 속임수에요. 환경문제입니다. 새로운 환경.

그래서 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이 이야기하신, 아직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는 기도, ‘십자가를 믿게 하옵소서. 아멘.’ 십자가 안의 각설탕처럼 녹아지게 하는 역할이 바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모든 것은 네 뜻대로 안 된다. 겟세마네에서 나도 겪었어. 내 뜻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는 그것을 응답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카피하면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 첫째 하늘 살면서 하셨던 모든 것이 우리한테 그대로 카피되어서 우리 마음대로 안돼요.

심지어 죽는 것마저도 베드로는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죽지를 못합니다. 어차피 죽은 인간이니까 네 죽음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재방문이니까. 고향 방문이거든요. green grass of home. 옛날 살던 동네에 재차 방문이니까 어떻게 죽든 살든 주님의 죽으심을 카피하듯이 그렇게 살면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