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복음 없는 세상

아빠와 함께 2025. 5. 17. 08:42

 

 

서울강의20250515a 요한일서 4장 6절(복음 없는 세상)-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4장 5절부터 하겠습니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너무나 당연하죠. 이걸 칠판에 간단하게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동그라미가 있는데 이 동그라미가 세상이다. 5절에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동그라미 안에 사람들이 있고),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동그라미 안 사람들끼리 서로서로 대화(↔)),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소통이 형성되고, 중지(衆志, 여러 사람의 생각이나 의지)가 모아진다 하죠, 의견이 모아지죠. 서로 이해가 되고 서로 잘 통하니까.

그래서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끼리 잘 통한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아무 문제없음.’ 아무 문제없어요. 세상에 사는 사람이 세상 속에 사는데 문제 될 게 있다, 없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없다는 말은 ‘전혀 잘못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뭐가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혀 잘못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차분하다’ 또는 ‘당연하다’ 또는 ‘정상적이다’. 정상적이고 아까 얘기한 것처럼 문제없다. 전혀 문제가 없는 거예요.

이 전체를 한 마디로 말해서, ‘잘못이 없다. 잘못되지 않았다.’ 이게 어디 안에 이야기입니까? 이 세상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아무 문제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문제 삼는 게 문제가 되겠죠. 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단 말이죠.

그러면 이 세상에 대해 성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여러분들이 “저희는 이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그 범위 내에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뭡니까? 아무 문제없죠. 아무 이상 없고. 당연하고 정상적이고 심지어 차분하기까지 한 거예요. 차분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이 세상 안에 사람들 특징은 침착한 거예요.

아무 문제없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되죠. 문제가 있으면 예수를 믿고 하나님 믿고 하겠는데. 보세요. 지금 여기 나와 있는 것이 인간들이잖아요. 인간들끼리 얼마든지 지금 차분하게 정상적으로 잘 살고 있단 말이죠. 굳이 하나님을 여기다 동원시키고 예수님을 동원시키고 그럴 필요는 전혀 없는 거예요.

거기다 천국도 이야기하고 지옥도 이야기하는데, 천국과 지옥 이야기라는 것은 차분하고 정상적이고 침착하고 잘못된 것이 없는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말한다는 것은 그건 농담거리입니다. 그걸 보통 술집에서 안줏거리라 하죠. 안줏거리, 농담거리에요. 재미삼아. 본인이 아무 문제없는데 천국, 지옥에 대해서 그걸 진지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자기가 아무 문제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먼저 이 세상 안에 있는 사람들을 충분하게 이해해줘야 돼요. 그들의 의식에 대해서 완전히 동의할 마음준비가 다 되어 있어야 돼요. 아무 문제없습니다. 아무 문제없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아무 잘못된 것이 없다.’ 같은 말로, ‘잘못되지 않았다.’ 이 원칙이 세상 안에서 통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어떤 사람이 죽었어요. 눈감고 죽었습니다. 세상 원칙은 아까 이야기한대로 아무 문제없고 아무 잘못된 게 없죠. 그럼 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어떤 죽음입니까? 잘못됨이 없는 죽음이죠.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당연한 건데, 차분하고 당연하고 침착하고 아무 문제될 것이 없는 죽음이에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경솔하지 않는 죽음. 늙어 죽는다? 당연한 사망.

이 세상 안에 또 해와 달과 별. 이 인간세계 안에서 해와 달, 이거 문제 있습니까? 아무 문제없어요. 해 빛나는 거, 달, 별? 아무 문제없습니다. 짐승들? 아무 문제없어요. 나쁜 개는 없습니다. 나쁜 개는 없죠. 나쁜 개도 없지만 나쁜 사람도 없고 나쁜 고양이도 없고.

고양이 키우고 개 키우는 것, 나쁘지 않은 내가 나쁘지 않은 개 키우고 나쁘지 않은 고양이 키우고. 여기에 뭐 하자가 있어요? 나쁘지 않은 내가 나쁘지 않은 남편 키우고 아내 키우고 자식 키우고. 자식들 있죠? 결혼 안 한 사람 빼놓고 결혼한 사람들은 자식들 있잖아요. 나쁜 자식은 있어요, 없어요? 나쁜 자식이 없죠. 왜냐하면 든든한 내가 어미고 아비기 때문에. 내가 안 나쁜데 안 나쁜 나에서 태어난 자식이 나쁠 리가 없죠.

그래서 문장을 적어보면 ‘우리 집 개는 물지 않습니다.’ 지금 물린 사람이 벌겋게 살점 떨어져나갔는데, “우리 집 개는 물지 않습니다. 내가 쭉 지켜봤는데 우리 집 개는 물지 않습니다.” 똑같이, “우리 집 애는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내가 쭉 지켜봤는데 우리 애같이 착한 애가 없어요. 우리 애가 어떻게 선생님을 때려요? 폭행해요? 그럴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뭔가 우리 애를 학대했겠죠.”

그래서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을 볼 때 문제가 없어요. 문제없는 나와 이웃과 이 모든 것이 소통되고 의견이 모아진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가 아무 문제없다는 거예요. 전혀 문제없이 정상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어요.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협박, 공갈에 넘어갈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뭐 불심판이니 물심판이니 그런 것은 옛날에 지나간 전설이고 신화에 불과하지, 본인이 지금 정상적인데 하자가 없는데 거기에 주눅 들고 공포를 느낄 이유가 없는 거예요.

자, 그런데 6절을 봅시다. 지금까지 이 세상을 잘 이해했죠? 이 세상은 아무 문제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동그라미 안 세상이 미혹됐다는 거예요. 대(大)사기꾼. 미혹이라는 것은 악마를 말하죠. 악마의 영이 임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본인이 생각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악마의 영이 임해서. 그 이야기를 이 세상 사람에게 들려줬다고 생각합시다. 그럼 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반박하겠습니까?

“당신들은 악마에 속해서 지금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속고 있는데 그것은 당신을 파멸로 이끌 겁니다.”라고 한다면 그들이 뭐라고 반박하겠어요? “내가 꼭 문제 있어야 됩니까?”라고 반박하겠죠. ‘나는 내가 보기에 내 일상생활이 그렇게 평범하고 차분하고 아무 문제없는데, 당신은 성경에 근거해서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하니까 그럼 내가 꼭 문제 있어야 당신 속이 시원하겠냐?’ 뭐 이런 식이겠죠.

“당신이 나한테 문제 있다는 그 자료를 갖고 오라. 근거를 갖고 오라. 내가 근원적으로 문제 있다는 근거를 갖고 오라.”라고 한다면 어떻게 답변하셔야 되겠습니까? 난 문제없는데 당신은 문제 있다고 하니까 문제 있다는 근거를 제시해보라고 하면 여러분 뭐라고 이야기해야겠어요? ‘당신은 무조건 나빠. 내가 나쁘다 하면 무조건 나빠.’ 뭐 그렇게 답변해야 되겠습니까?

이 요한일서는 성경 전체에 속했잖아요. 그럼 여러분들이 세상을 충분히 안다고 치고 이 그림을 지우겠습니다. 여기 존재(인간)가 있다고 합시다. 성경은 인간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존재 이전과 존재 이후가 존재를 관통하고 있다고 봅니다. 야외 캠핑 가서 바베큐할 때 고기에 양념 발라서 빙빙 돌리잖아요. 그럼 그냥은 못 돌리고 쇠꼬챙이 꽂아서 돌리잖아요.

이전과 이후에서 존재를 규명해야 된다는 거예요. 존재에 대해서. 그런데 아까 여러분들이 보tu야 될 게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전부 다 따로 놀죠. 따로 놀면서 자체적으로, 자기 충족적이라 하는데, 자체적으로 자기는 문제없잖아요. 문제없고 너도 문제없고 문제없고 문제없고 문제없고,… 그래서 전체가 문제없다. 이게 이 세상이에요. 그러니까 내 존재 이전과 이후가 없어요.

그럼 존재 이전과 이후를 어떤 식으로 한번 찾아봅시다. 창세기 38장 26절부터 끝까지 보게 되면 이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30절까지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유다의 며느리가 다말이죠. 그런데 시아버지하고 며느리 다말하고 동침을 해서 애를 낳았습니다. 애를 낳았는데 쌍둥이를 낳았어요. 쌍둥이를 낳았고 먼저 나온 애가 세라, 나중에 나오도록 되어 있는 애가 베레스인데, 나올 때 갑자기 베레스가 속도를 높여서 자기가 제키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먼저 나온 베레스가 장자가 되고 세라가 나중이 된 겁니다.

38장 29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터쳤다는 이름으로써 베레스라 했다. 그리고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먼저 손을 내밀 때 쌍둥이니까 구분하기 쉽도록 산파가 먼저 나온 손에 빨간 실을 딱 맸는데, 먼저 나온 애가 막 나올라 하는데 뒤쪽에 있는 주자가 앞을 밀어 내치고 제치고 먼저 나온 거예요. 제친 자가 먼저 나와서 걔가 장자가 되고, 손은 내밀었지만 그래서 손에 붉은 실은 있지만 결국은 그게 첫째에서 밀려서 둘째가 된 것이 세라입니다. 그리고 세라는 나중에 이름도 없어요.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베레스가 그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계속 이어나갑니다(3절).

이 두 쌍둥이는 시아버지하고 며느리가 동침해서 낳은 애에요. 그렇다면 시아버지하고 며느리가 부부란 말입니까? 부부가 아니에요. 그다음 계속 동거 생활한 게 아닙니다(창 38:26). 그냥 그때뿐이에요. 그러니까 이전에 베레스 또는 세라, 베레스, 세라라는 존재가 있기 전에 이 존재를 형성하는 다른 어떤 특별한 요소가 있어서 이것을 꼬챙이처럼 꿰어서 존재가 되었고 그 뒤에는 세라보다도 베레스가 장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가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이후’잖아요.

그러니까 존재를 규정할 때는 이전과 이후 그 사이에 존재가 있으면 이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고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된단 말이죠. 존재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거죠. 눈에 보이는 것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고 이후에도 무슨 일이 있었다.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이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은 아무 문제없다고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과 완전히 다른 세계에요, 다른 세계. 존재의 토대와 존재 이후의 세계까지 그 내용이 이 존재 안에 나 안에 함축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방금 이것의 근원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서로 아무 문제없다고 했어요. 서로 의견도 잘 맞고 하자 없고 침착하고 차분하게 평화롭게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없는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문제냐 하면 예수라는 분이 오셨는데 그 분은 아버지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가는 사람이에요.

아버지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간다는 그 증거가 뭐냐? 증거가 바로 죽으시고 그 다음 사흘 만에 부활했죠. 그럼 예수님 빼놓고 다른 사람은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안했죠. 그럼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예수님이 침투함으로써 졸지에 ‘문제없음’에서 뭐로 바뀌었어요? ‘문제 있음’으로 바뀐 거예요.

같은 인간들끼리 백날 카페에서 이야기해봐야 문제없어요. 그 카페에 예수님께서 오셔도 문제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몇 마디 하니까 기분 나쁘다고 예수님을 쳐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쳐 죽였어요. 사람들은 그분이 메시아인줄 모르고 쳐 죽였는데, 죽이고 난 뒤 무덤에 집어넣었는데 삼 일만에 부활했다.

그러면 그 카페에 있던 사람은 아무 문제없는 사람이 예수님과의 상호관계 때문에 갑자기 뭐로 바뀌었습니까? ‘나는 왜 부활 안 되지? 왜 나는 사흘 만에 부활이 안 되지? 나는 왜 ‘사흘 만에 부활’이라는 것이 안 기다려지지? 나는 그냥 문제없는 이 세상에서 학교 나와서 취직해가지고 결혼해서 아파트 사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면 나는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되지, 죽어서 다시 부활해야 된다는 생각이 왜 나는 없지?‘

십자가 죽음과 관련 없다는 이 자체가 인간은 근원적으로 문제 있음으로 탄로 난 거예요. 밝혀진 겁니다, 문제 있음으로. ‘나는 문제없다’부터 시작해서 예수도 연구하고 신학도 연구하고 교회도 다니고 성당도 다니고 하다가, ‘나는 문제 있음’으로 시작해서 다시 한번 나는 내 학교, 내 가정, 내 교회, 내 성당, 내 사업, 직업, 아파트까지 전부 다 다시 생각하도록, 문제없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이 모조리 다 문제고 하자거리라는 것을….

출발점을 예수님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예수님부터. 그럼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예수님은 어디서 왔습니까? 아버지께로부터 왔죠. 아버지께 듣는 사람이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께로 간 사람이 이 세상에 꽂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빼놓고 문제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다 문제 있는 거예요.

‘나는 나에게 노폐물이다.’ 쓰레기다 이 말이에요. 나는 쓰레기다. 한 순간도 내가 쓰레기 안 된 적이 없고, 한 순간도 내가 정상적인 게 없고, 한 순간도 내가 잘했다 하는 것이 단 하나도 없고, 내가 바르게 살았다는 구석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안 죽었지만 앞으로 살아서 죽을 때까지 어느 것도 내가 잘했다는 구석은 단 한 순간도 없어요. 다 문제 있어요.

이 사실을 한 단어로 하면 이렇게 됩니다. ‘경계’. 경계라 하는 것은 이쪽과 저쪽 사이에 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사이에 구분 짓는 선, 이게 경계선이잖아요. 여러분께 하나 물어봅시다. 지평선과 하늘의 경계선은 어디입니까? 지평선 그 자체죠. 그러면 또 묻습니다. 지평선 따라가면 하늘에 갑니까, 땅에 갑니까? 지평선 따라가면 하늘에 올라갈 수 있습니까, 계속 가다보면 땅이에요? 어느 쪽입니까? 아, 저기 지평선 있다. 따라가야지. 그럼 지평선 또 있죠. 가는 만큼 밀리죠. 5미터 가면 지평선이 5미터 밀리고 10미터 가면 10미터 밀리죠.

결국 인간은 예수님께 접근할 수 있어요, 없어요? 접근할 수 없죠. 인간은 문제가 있다 하든 없다 하든 인간은 주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나라에 가려면 자기가 전적으로 나쁜 게 아니고 약간은 좋은 게 있을 때 그 좋은 것을 매개로 해서 옮겨 타기가 가능하거든요.

양심이 착하다든지, 처음부터 그렇게 나쁘지 않다든지 뭐 그런 요소 있으면 그걸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갈 수 있는데, 지평선을 백날 따라 가봐야 하늘에 갈 수 없는 것처럼, 키 크다고 하늘나라 가는 게 아니에요, 갈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백날 살아봤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자기가 동참할 수 없습니다. 동참할 수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구원 받는다’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은 뭘 이야기하느냐? 경계를 이야기해요. ‘너는 너고 네가 속한 세상은 이렇고 우리 주님의 세계는 이렇다.’ 그것만 이야기해요. 그것만 이야기한다고요. 자기 주제를 알고 분수를 알아라.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하게 되면,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모든 인간은 정상적으로 잘 돌아간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문제없는 이 세상에 졸지에 문제가 생겨버린 거죠. 문제가 없는 세상에 졸지에 문제가 생겨버린 거예요. 그 문제는 절망적이에요. 해결될 수 있는 대책이 없는 문제에요.

그럼 우리가 뭘 할 수 있느냐? 이건 할 수 있죠. 예수님 관점에서 나 자신을 다시 보고 예수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다시 보는 것, 그건 할 수 있어요. 그럼 어떻게 그게 되는가? 예수님의 영을 받으면 가능하죠. 그걸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기 자신을 좋은, 질적으로 괜찮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우린 못해요.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영이 와서 주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내가 전에 약간 알았던 나의 문제점이 주의 영, 성령으로 인하여 이제는 그 문제점이 점점 더 한도 끝도 없이 더 깊이 내려가요. 형편없이 되는 거예요.

아까 노폐물이라 했죠. 다른 말로 하면 쓰레기죠. 쓰레기도 쓰레기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우리들이 상상한 이상으로 쓰레기에요, 내가. 여러분 전체가. 뭐 버리면 되겠지. 버릴 데가 없어요. 내가 나를 처분하고 처리할 수 있으면 꼴 보기 싫은 이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데 버릴 장소가 없어요. 주께서는 버릴 장소를 주시지 않았어요.

버려도 주님이 버리지, 우리가 버리는 게 아닙니다. 구원해도 주님이 구원하지, 우리가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어쩔 수가 없다는 거예요. 하자 있고 문제 있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할 것은 뭐냐? 나라는 존재, 이 썩어빠진 나라는 존재가 어째서 이렇게 썩었느냐 하는 것은 내 존재 이전과 내 존재 이후로 바비큐 하듯이 꼬챙이를 꽂아서 돌아보는 일을 할 수 있어요. 그 꼬챙이가 뭐냐?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여러분 알아 맞춰보세요. 언약에 의하면, 복 있는 사람이 있고 저주받은 사람이 등장한다는 거예요. 언약에 의하면. 그럼 우리는 어디에 속합니까? 복 있는 사람입니까, 저주받은 사람입니까, 언약에 의하면? 이게 문제입니다.

문제가 너무 어려우면 문제를 다시 고치겠습니다. 언약이 없다면, 나는 복 있는 사람입니까, 저주받은 자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언약이 없다면, 하나님 말씀이 없다면, 약속이 없다면 나는 복 있는 자에요, 저주받은 자에요? 어느 쪽입니까? 이 문제도 어렵고, 이 문제도 어렵고.

언약이 없다면? 아까 강의했잖아요. 우리는 아무 문제없어요. 우리는 전부 다 복 받은 사람입니다. 심지어 교도소 다섯 번 가도 복 받은 거예요. 왜? 자기 양심은 살아 있잖아요. 내가 재수 없어서 걸렸지,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 효도하고 나름대로 착하다 이 말이죠. 나 깡패세계에서 얼마나 의리 있다고. 같은 양아치한테 짜장면 혼자 다 안 먹고 간짜장, 짬뽕 곱빼기 반 나눠줄 정도로 의리로 사는 사람이야.

인간은 언약이 없으면 어떤 구석이라도 자기의 착한 구석을 기어이 찾아내고 말아요. 그리고 그걸 보람으로 삽니다. 참, 세상은 더러운 세상. 그 나쁜 사람이 잘 살고 나 같이 착한 사람은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느냐? 그러니까 내가 힘들게 사는 것은 내 탓이다, 남 탓이다? 어느 쪽입니까? 하나, 둘, 셋. 남 탓이다! 그거 당연한 거 아닙니까.

어떤 미국 대학생은 이랬대요. 하버드 학생인가가 이렇게 자기 부모를 저주했어요. 왜 나한테 167cm를 물려줬느냐? 왜? 남들은 키 180인데, 왜 나는 꼬마라는 유전형질을, DNA를 왜 물려줬느냐? 나는 부모를 저주한다고 했어요. 좀 극단적인 모습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은 척 하면서도 여러분들이 인생에 모든 걱정이 들고 힘들 때 누구 탓합니까?

나 니 때문에 못 살겠다. 나 니 때문에 못 살겠다. 너를 만난 게 나한테는 저주야. 착한 나를 네가 와서 다 망쳤어. 나 니 때문에 매일 술 먹는다. 맨날 술이야~ 니 때문에 술 먹어. 니 때문에 담배 피워. 좀 더 잘해봐. 나 잘할 수 있는 사람이야. 니가 워낙 나를 성질나게 하니까 나도 못 참아서 그렇게 하는 거지, 따지고 보면 나 훌륭한 사람이야. 나 너 만나기 전에 참 좋은 소리 많이 들었다고.

언약이 없으면 전부 다 자기가 자기를 규정할 때 뭐로 규정한다? 나는 복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보는 거예요. 그럼 두 번째 문제는 풀었죠. 그다음 문제 봅시다. 언약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간단하죠. 전부 다 저주받은 자에요, 언약이 있으면.

그래서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속한 인간은 아까 그랬잖아요.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고 세상이 저희 말을 듣죠. 그렇게 저희 말을 들으면서 의견이 하나로 모이잖아요. 그 중지(衆志)가 모여서 그들이 한 것은 뭐냐 하면 뭐를 죽인다? 언약을 죽이는 거예요. 언약을 죽이면 자기는 저주받은 자에서 졸지에 뭐가 됩니까? 아무 문제없어요. 정상적이고 차분하고 침착하고 늘 수시로 착한 일에 대해서 복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있는 언약을 없애버리면 자기는 아무 문제없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는 어떻게 되었어요? 누가 따먹었습니까? 인간이 따먹었죠. 배후에 누가 있었어요? 악마가 부추겨서 뭘 따먹었어요? 선악과를 치워버린 거예요. 선악과를 치워버린 겁니다. 바로 그 후예가 누구라고요? 오늘날 인간들이에요. 아무 문제없는 인간들이에요.

그래서 인간들은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또 뒤끝이 있죠. 치워버린 그것,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끝까지 그걸, 치워버린 것을 심어버린 거예요. 인간은 또 언약을 치워버리고 (하나님은) 또 심고, 치워버리고 또 심고. 언제까지 가는가 한번 보자. “우리는 정상적이다.” “이래도 정상적이냐?” “죽이자.”

그래서 가인이 누굴 죽입니까? 아벨을 죽이죠. 상당히 중요한 문제거든요. 선악과도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지시, 말씀. 언약이 지워지면 또는 공격받으면 또는 모독 받으면 또는 핍박받으면 반드시 여기서 두 개의 노선이 발생합니다. 두 개의 노선이 발생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으니까 이건 문제 낼 필요도 없지만 여러분께 물어볼게요. 유다와 그 며느리 다말 가운데 누가 잘못되었어요? 누가 언약을 무시했고, 누가 언약을 무시하지 않았습니까, 아까 두 사람 중에서? 유다는 언약을 무시했고, 다말은 언약을 무시하지 않았죠. 그래서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하는 그런 사태를 일으킨 거예요.

언약이 핍박받으니까 여기서 발생된 것이 두 노선이죠. 베레스와 세라. 이제 여러분들이 쉽게 되죠. 그러면 여러분 다 풀 줄 아는 문제 내겠습니다. 에서와 야곱 가운데서 누가 언약을 무시하고 누가 언약을 존중했습니까? 에서죠. 에서가 언약을 무시했어요. 왜? 창세기 25장을 볼게요.

성경을 본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똑바로 보는 걸 말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남들이 이야기하는 그 나 말고, 내가 생각하는 나 말고, 성경에 언약에 비추어서 내가 누구냐를 보는 거예요.

창세기 25장 23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했죠. 여기서 큰 자가 누구죠? 에서. 작은 자가 누굽니까? 야곱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돼요? 분명히 상식적으로서는, 아무 문제없는 이 세상에서는 맏이가 동생보다도 우대받는 세상이죠. 그래야 이 세상은 문제없을 게 아니겠습니까. 만약 어떤 가정에 맏이가 있는데 둘째 아들에게 모든 게 상속됐다면 다른 사람들이 기이히 여깁니다. “아, 우리 집은 안 그런데. 너희 집도 그래?” “안 그래.” “이상하다, 그 집만 왜 그렇지? 그 집에 문제 있구나.” 이런단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뭘 정상으로 여기는지 알아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려고 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잘 아시거든요. 거기다가 강제로 뭘 집어넣는다 했습니까, 아까? 언약을 집어넣는 거예요.

언약을 집어넣으면, 정상적이다, 우리는 문제없다, 하자 없다, 이런 식으로 가는 데다가 여기 계시가 뭐냐 하면 먼저 태어난 자 에서, 나중 태어난 자 야곱을 줘놓고 그 두 존재에 대해서 전과 후로, 먼저 태어났지만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나중 태어난 자가 먼저 태어난 대우를 받는단 말이죠.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전복시키느냐? 존재의 이면, 뒤쪽을 들추기 위함입니다. 인간 존재의 뒤쪽을 들추기 위해서. 존재의 뒤쪽을 들추면 거기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화투 뒤쪽에 뭐가 있어요? 벌건, 색깔도 별로 안 좋은 그런 색이 나오죠. 인간의 존재를 들추면 거기 뭐가 나와요? 마귀 나와요!

마귀가 인간을 정상이다, 정상이다, 문제없다, 하자 없다, 침착하다, 훌륭하다, 계속해서 선악과 따먹으라고 부추긴 마귀가 지금껏 인간 배후에서 우리 자신은 문제없고 하자 없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해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을 만날 때는 전부 둘 다 화투짝이라고 보면 됩니다. 니 몇 월달이가? 5월달이가? 난 7월달. 전부 다 뒤에 색깔도 벌건, 이상한 더러운 색깔 들고 전부 다 감추고 자기 악마성을 감추고 전부 다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마주하는 거예요.

하늘도 못 올라가면서. 죽어서 부활이 어디 있어요, 부활이. 아버님 돌아가셨습니까? 살아계셔요,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셨어요.)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까? (아니요.) 그럼 아버님은 살아계실 때 부활될 수 없는 분입니다. 그 부활될 수 없는 분이 권사님을 낳은 겁니다. 그래서 권사님 부활되려면 그 아버지 말고 다른 아버지가 필요해요. 부활되신 주님이 필요합니다. 부활되신 주님.

부활되고자 시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좌절되고 실패해요. 왜냐하면 문제성 있는 자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역시 문제성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를 믿고 교회 나오고 성경 읽고 백날 해봐야 그게 전부 다 문제성이 더 깊이 있게 나타날 뿐이에요. 문제성이 더 깊이 있게. 교회 안 다닐 때는 그냥 ‘나 약간 문제 있는 게 아닌가’ 하다가 교회 나와서 성경 보게 되면 ‘아, 이거는 전혀 가능성 없네. 끝났어. 끝났어. 가능성 없네.’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해석은 ‘하나님의 중심축’에서 모든 것이 해석되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중심축에서. 이 중심축은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 사건이죠. 죽었다 부활했던 십자가 사건. 이 십자가 사건을 중심축으로 해서 하나님의 관점이 세상에 흘러나옵니다. 흘러나오게 되면 예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뭐가 돼요? 죄가 되는 거예요. 이게 성경해석이에요.

그러니까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뭐가 돼요? 죄가 되는 거예요. 성경공부도 뭐가 됩니까? 죄가 되는 거예요. 아니, 살아있다는 자체가 죄가 살아있는 거예요. 어떻게? 나라는 존재는 전과 후, 예수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있던 일과 십자가로 끝나는 그 사이에서 나의 존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이 죄인을 관통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고요.

예수님의 의가 꽂혔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 되는데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 중심축을 강조하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우리를 뭐 되게 해요? 더욱더 죄인 되게 하시는 거예요. 성령이 하시는 일은 죄인 되게 하는 거예요, 반드시. 성령이 아주 신이 났어요. 어느 것 하나 죄 아닌 게 없게 됨으로써 더 이상 내가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거나 내가 나를 인정하려는 모든 시도를 그만두게 하십니다.

사람이 사는 게 힘든 이유가 인정받으려 하니까 힘들어요. 나 사람구실하고 있다는 것을 남을 통해 우회적으로 얻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솜에 이슬이라든지 솜에 물 묻으면 솜 무게가 어떻게 됩니까? 축축하게 되고 무겁죠. 청바지 물에 적셔보세요. 걷는 것도 힘들어요. 물에 푹 젖으면. 답답하죠.

내 중심으로 사는 걸 그만큼 힘들게 만든다니까요. 주님은 예수님 중심으로 보는데 우리의 육신은 매사를 내 중심으로 움직여서 내가 내 일하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나의 일을 하려고 해요. 나의 일을 하려고 하니까 나의 일을 하는데 나의 일을 시작하는 것은 마귀가 시키는 거거든요.

나의 일을 하는데 누가 도와주겠어요? 마귀가 온 호들갑을 떨면서 도와주는 거예요. ‘요번에 이렇게 한번 해봐라. 요번에는 이렇게 한번 해봐라. 너 잘 될 거야. 네 일은 네가 성사시켜야지. 그래야 남들한테 인정받아.’ 이런 식으로 계속 마귀가 조언을 해주고 격려를 해주고. 일곱 번 쓰러지면 몇 번째 일어선다? 기어이 여덟 번째 일어나게 만들어요.

우리는요, 일어날 필요가 없어요! 안 일어나면 돼요, 그냥. 난 그냥 벌벌 기면서 살아가도 돼요. 아무 일 없어요, 그게. 그게 우리 죄인에 합당한 우리 삶의 모습이기 때문에. 땅에서 벌벌 기면서 일체 남한테 인정받는 거 없이. ‘아이고 인간아, 나 같으면 죽었다. 저래가지고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라는 소리를 들어가는 거. 그만큼 우리 안에는 내가 지킬 만한 어떤 추가적인 힘은 없어졌다, 없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인생의 짐이 가벼운 겁니까. 진짜 껍데기만 남는 거예요.

자, 예를 들어 과학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파장이 380~780nm 사이를 가시광선(可視光線, visible ray)이라 해요. 빨, 주, 노, 초, 파, 남, 보,에서 780nm 이후부터는 파장이 기니까 적외선(赤外線, infrared)이고, 보라색 쪽은 자외선(紫外線, ultraviolet)으로 파장이 짧은 거예요. 그 사이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광선이죠. 그럼 그밖에 있는 광선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과학적으로 따져도 인간은 세상의 일부만 채택하고 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리고 중력도 생각해봅시다. 중력을 생각해보면, 50cm 위에 시계가 있고 그보다 50cm 낮게 시계가 있다면 이 시계가 똑같이 갈까요, 다르게 갈까요? 위에 것은 빨리 가고요, 아래 있는 것은 늦게 가요.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왜냐하면 지구의 질량 영향을 낮게 있는 시계가 더 받기 때문에 늦게 가고, 위에 것은 지구의 거대한 질량 영향을 적게 받기 때문에 빨리 가는 거예요.

잘 안 믿겨지시면 다시 해보겠습니다. 사람 머리가 있고 발이 있잖아요. 머리가 빨리 늙습니까, 발이 빨리 늙어요? 어느 쪽이 먼저 늙습니까? 머리가 빨리 늙어요. 왜? 지구로부터 멀기 때문에. 우리 몸은 똑같이 늙는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과학적으로.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라요. 도대체 어디까지 모르는가도 모르고 어디까지 아는가도 몰라요. 내 존재의 시작과 끝을 인간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멈췄다 합시다.

 

 

 

서울강의20250515b 요한일서 4장 6절(복음 없는 세상)-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을 한번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존재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모르고 있는 전후가 있는데 그 전후를 누가 이야기해준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이 오셔서 전후를 이야기해줘요. 전후라 할 때 예수님의 관점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요. 십자가 외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안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지혜가 그냥 지식이 되면 십자가 필요 없이 강의하면 돼요. 또는 생중계 하든지 이렇게 하면 되는데 지혜 주시는 자가 죽어버려요. 그런데 지혜 주시는 자가 알아서 자살해 죽는 게 아니고 지혜를 받겠다는 사람들이 지혜자를 죽여 버렸으니까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경계, 단절이 생긴 거예요. 더 이상 돌파할 수 있는 모든 길을 인간들이 차단시킨 거예요, 인간들이.

인간들이 차단하도록 배후에서 악마가 그런 짓했고 하나님은 “나와! 너 악마 나와! 악마 네가 할 짓을 해야지.” 악마로 하여금 할 짓을 하게 해서 악마에 속한 모든 인간들은 천국 가는 길이 차단되도록 하나님이 조치를 하신 거예요. 어떤 인간도 성경공부해서 구원받는 인간은 아무도 없게 만들었단 말이죠. 예배하고 종교 가져서 구원받는 사람 없게 한 거예요. 지금 그걸 언급하는 거예요.

인간은 실수만 하고 죄만 지었는데 거기서 어떤 노선이 나왔다? 두 개의 노선이 나온 겁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가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에서가 한 사냥고기를 너무 좋아한 거예요. 사실은 맛있는 음식을 누가 이깁니까? 자기가 먹고 싶은 맛있는 음식 주는데 거기에 정이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 저 큰아들 꼴도 보기 싫어.’ 이런 마음을 주시지 않았어요. 오히려 반대에요. “큰아들 최고야. 사나이가 됐으면 큰아들처럼 돼야지. 고기도 얼마나 맛있다고. 야, 큰아들. 사냥한 고기해와. 너한테 모든 재산, 모든 축복을 넘겨줄게.” 이게 이삭이잖아요. 이삭.

이삭은 뭘 고려 못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고려 못했죠. 그냥 이삭이 있는 큰아들한테 넘겨주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거기서 두 개의 노선이 나온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 겁니다. 그 두 개의 노선은 인간이 실패해야 돼요.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와 충돌해야 비로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는 고맙게도 주께서 우리를 십자가에 충돌하게 만들었어요. 만들어서 십자가 믿고 구원받겠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성령이 와서 깨닫게 하는 거예요. ‘야, 십자가 믿어라,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해서 야무지게 믿었는데 야무지게 믿은 그게 바로 죄였구나. 그게 꼼수였구나.’

믿는 나를 내가 믿음으로써 구원받고자 내가 나한테 시도한 거예요. 나에 대해서 포기할 생각 없이 끝까지 나를 붙들고 나를 천국에 집어넣을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건 언약이 아니거든요. 그건 나의 포부고 나의 야무진 야망이란 말이죠. 욕심이고.

‘살아서는 고생했지만 죽어서는 호강하자.’ 그건 탐욕이라고요. 탐욕. 그건 탐욕이란 말이죠. ‘교회 가면 구원받는다는데 난 바보같이 구원 못 받고 하면 나만 손해잖아. 나도 교회 가서 구원받아봐야지.’ 이런 생각, 이런 생각이 마귀적 생각이란 것을 누가 알겠어요? 이게 마귀가 시킨 거라는 걸. 자기 포기가 안 되잖아요.

마태복음 14장 한번 보겠습니다. 14장 28-32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어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걸어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졌어요.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바람 누가 불게 했습니까? 주님이 불게 했죠. 주님이 불게 했어요. 자,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이 베드로 평소 입장에서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없다고 생각했어요? 물 위를 걷는 게 있을 수 없죠.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자체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주님 지시를 따른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 중심축으로 자기의 행동이나 생각을 안했던 겁니다. 순간적으로 내가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된다는 이 자체가 다 날아가 버린 거예요. ‘주께서 명령하시면 주의 명령이 능력이 되어서 나는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그 노선만 남고 나머지는 다 없어진 거예요.

그런데 그러다 물을 본 거예요. 내가 미쳤지. 왜 물 위를 걸어? 자기 자신이 평소에 물 위를 걷지 못한다는 인식으로 돌아오자 물에 빠져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 베드로가 두 종류의 베드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와 물에 빠졌던 베드로에요. 적어볼게요. 물 위의 베드로, 물에 빠져 죽어가는 베드로.

이 둘 중에 이 세상 사람들 입장에서 어느 쪽이 인간적입니까? 바다에 빠지면 죽는 이것이 너무나 인간적이고 여기에 서로의 말이 오고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 위를 왜 걸어? 배 타고 가야지. 왜 걸어. 걷고자 하는 게 잘못이지.’ 모든 인간은 전부 다 여기에 속해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물 위를 걷는 베드로와 물에 빠진 베드로 두 노선을 제시함으로써 모든 인간들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한계에서 어떤 인간도 물에 빠져 자기 힘으로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게 성경의 마태복음 14장에 나와 있어요.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축에서 나온 견해, 그 관점으로 인간의 모든 한계와 형편과 처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성경은 인간의 존재가 있다면 이 존재에서 (존재 이전에) 예수님의 관점과 (존재 이후에) 예수님의 관점으로 전후로 이 존재를 꿰뚫어 보죠. 꿰뚫어보면 이 가운데서 우리는 뭐가 되죠?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이 꿰뚫어보는 작업을 예수님이 하셨잖아요. 그 다음에 누가 하느냐 하면 성령님이 하셔요. 성령님이 예수님의 코스대로 갑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코스 바깥으로 나가지를 않아요. 다시 요한일서 4장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6절에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성령은 무슨 영입니까? 진리의 영이죠. 그러면 성령이 아닌 모든 사고방식은 뭐에요? 이 세상 사고방식은? 사기꾼이죠. 대(大)사기꾼, 큰 사기꾼, 악마죠. 악마의 영이 이렇게 인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 악마는 인간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무 문제없다. 죽는 것은 그건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뭐? 뭐? 아무 문제가 없어. 교회 가는 건 안 말릴게. 그러나 놀러 다녀라.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런 견해도 하나 있다, 이렇게 봐. 중요한 것은 네가 중요하지. 하나님보다 네가 더 중요하잖아. 이건 이론으로 따지지 마. 네 몸이 그걸 말해줘.” 악마가 이야기해요. “네가 ‘하나님이 중요하다. 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의 뜻으로 살겠다.’ 백날 해봤자 네 몸이, ‘역시 내 몸이 더 중요해.’ 하잖아.” 건강할 때 하나님 찾지, 몸 아프면 누구 찾아요? 하나님 원망하고 건강할 때 내 모습 다시 돌려줘, 하죠. 내가 이렇게 아픈 대우를 받을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우기죠.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그걸 ‘복음’이라 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최종적이고요. 더 놀랍고 무서운 사실은 확정적이라는 거예요, 복음이. 모든 인간 존재가 십자가로 이미 관통되어 뚫려버리면, 이미 확정되어 있어버리면, 십자가 없이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미혹의 영이죠, 사기꾼이죠, 사기 치는 영에 의해서 ‘이 세상은 아무 문제없다. 뭐 다 정상적으로 사는데.’ 이런 생각이 애들 장난입니다. 애들 장난이에요.

애들 장난 가운데 어떤 종류가 있는지 몇 가지 나열해보겠어요. 대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트럼프의 관세 재협상, 김정은 북한의 핵폭탄 제조, 이게 전부다 뭡니까? 애들 장난 같아요. 왜냐하면 이게 확정된 게 아니기 때문에. 최종적인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 사람들이 울고 웃고 난리도 아니에요.

여기에 대해서 십자가를 뭐라고 하느냐, 성경에서는? 장난 같은데 인간은 장난에 진지해져요, 갑자기. 여기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고 목숨을 맡기고 이거 아니면 안 된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것에 대해서 딱 이렇게 이야기해요. “복음은 비밀이다.” 안 가르쳐주지~ 복음은 ‘비밀’이다.

비밀은 비밀을 아는 자에게 기쁨을 줘요.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어떤 일이 일어난다할지라도 비밀 속에 있는 사람은, 그거 어차피 장난이잖아. 그게 뭐? 그게 뭔데?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확정적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게 진리가 아니죠. 악마가 우리에게 겁주는 거죠.

그래서 이 비밀의 특징, 비밀이 나타나는 방법은 예수님께 일어났던 방법과 똑같아요. ‘나의 죽음을 통해서 밖으로 반영된다. 또는 고백된다, 이 비밀이.’ 내가 이미 살아도 죽은 자라는 사실을 동반해서 이 비밀이 바깥으로 고백되는 거예요. 그래서 살고자 하는 자는 어떤 경우라도 그건 비밀이 아니에요. 지금 안 죽었으니까 악착같이 살아보자는 것은 비밀을 훼방하고 가리는 거죠. 내가 살아도 이게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라는 자에게만 이 비밀이 가리어지지 않고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비밀을 그냥 들고 나왔던 사람 중에서 두 사람만 이야기할게요. 노아와 모세. 둘 다 공통점이 뭐냐 하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에요. 노아는 어디에 죽었느냐 하면 바로 방주. 방주를 통해서 노아는 죽었어요. 세상에 노아는 죽고 새로운 노아는 방주 안에서의 노아죠. 이걸 언약 안에서의 노아라고 합니다. 세상에 있던 노아는 죽었어요. 주께서 마련한 새로운 공간, 방주 안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노아를 새롭게 만들어줬습니다.

따라서 노아가 나올 때 노아는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어디 아래서 사느냐? 노아는 무엇을 의식하게 되었는가? ‘무지개’ 밑에서 펼쳐지는 세상. 이 무지개를 노아는 의식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창세기 9장에 나오거든요. 창세기 9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그러니까 노아는 무지개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죠. 전에 있던, 이 땅에 살았던 나 노아는 이미 죽었고 방주 안에 실려서 살았잖아요. 천하의 노아라도 방주 없으면 어떻게 돼요? 물에 빠져죽죠. 방주 안에서 노아는 새로운 노아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방주 안에 있는 자는 산다.’와 ‘언약 안에 있는 자는 산다.’는 같은 말이거든요. 이 원칙을 하나님께서는 그 뒤에 무지개를 통해서 그걸 확정시키고 고정시켰다. 결정지었다 이 말입니다. 언약 없이는 어느 누구도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무지개를 통해서 결정지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무지개는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 가르쳐지고 어떤 식으로 이해되고 있습니까? 물방울이 햇빛을 반사시키는 하나의 프리즘 역할이다, 이걸로 끝나요. 그게 무지개잖아요. 비온 뒤 쌍무지개도 생기고 무지개 뜨잖아요. 무지개, 비오면 다 생기는데 그게 뭐? 어때서? 이 세상 아무 문제없어.

뭘 잊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이 세상을 물로 덮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이 세상 아무 문제없다는 거예요. 노아 물심판은 장차 올 불심판의 전조현상이거든요. 전조현상. 낌새에요, 낌새. 그 무지개 언약이 결국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 언약까지 가요. ‘내 살과 피를 먹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 이미 확정적 언약이에요, 확정적 언약.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나지 않으면 너는 다 죽었다.’ 이게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준 거예요.

사람 육체가 죽으면 어떻게 부활됩니까? 죽으면 끝나는 거죠. 흙이 되죠. 그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잖아요. 극히 상식적인데 주님께서는 언약은 문제성 있는 인간의 말을 듣지 않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확정적인 언약을 십자가의 부활로 정해버렸어요, 마지막 때는.

그래서 언약 가운데 언약을 통한 삶이란 ‘내가 굳이 살 필요 없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언약이 사니까. 내가 사느냐, 내 안에 언약이 사느냐 이 말입니다. 노아가 늙어죽었죠. 구백오십 세에 죽었죠. 노아가 늙어죽어서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노아는 언약 안에 있죠. 그게 죽은 게 아니고 산 거예요.

아브라함이 죽었죠. 이삭도 죽었죠. 야곱도 죽었죠. 그들은 어디에 가서 삽니까? 하나님 나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살죠. 언약 안에 살고 있는 겁니다. 언약 안에. 그러니까 내가 굳이 살 필요 없는 이유가 내 안에 언약이 살아있으니까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 되는 거예요.

좀 이따 모세하고 모세 전에 복사해온 것 한번 봅시다. 가사를 보겠어요.

[Wish you were here]
Pink Floyid (영국 록밴드, 1975년 발매 앨범 타이틀 트랙)

So, so you think you can tell
그래서 넌 구별할 수 있단 말이지
Heaven from Hell?
천국과 지옥을?
Blue skies from pain?
파란 하늘과 고통을? (물음표입니다.)
Can you tell a green field
From a cold steel rail?
그럼 푸른 벌판과 차가운 철길은? (네가 구분할 수 있어?)
A smile from a veil?
미소와 가면은? (물음표죠.)
Do you think you can tell?
그것도 구별할 수 있어?

Did they get you to trade
Your heroes for ghosts?
저들이 네 영웅과 유령을 맞바꾸게 시켰나?
Hot ashes for trees?
뜨거운 재 대신에 나무를?
Hot air for a cool breeze?
더운 공기 대신 찬바람을?
Cold comfort for change?
달갑지 않은 위로 대신 변화를?
And did you exchange
너 스스로 맞바꾼 건가?
A walk-on part in the war
전쟁에서의 단역 대신
For a lead role in a cage?
새장에서의 주인공으로?


노래 가사입니다. 지금 이게 무슨 뜻이에요? 쭉 나오는 게, ‘네가 구별할 수 있나?’ 구별할 수 있느냐를 묻는 이유가 뭐죠? ‘천국과 지옥을 네가 구별할 수 있어?’ 이 말은 뭐냐? ‘네 중심으로 생각해서 네가 내린 결론이 너는 옳다고 생각해? 그게 틀린 거야.’ 이런 뜻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여기 2절에 보면,

How I wish, how I wish you were here
얼마나 좋을까 네가 여기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We're just two lost souls
Swimming in a fish bowl
우리는 그저 어항 속을 헤엄치던 길 잃은 두 영혼일 뿐

‘우리는 그저 어항 속을 헤엄치던 길 잃은 두 영혼일 뿐’이다. 어항 속에 갇혀 있는 거예요. 어떤 공간에, 영역에. 이 가사를 보니까 굉장히 어렵죠? 어려운데 제가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더운 공기 대신에 찬바람을 내가 선택한다고 불어오느냐 이 말입니다. ‘아, 나 찬바람 맞고 싶어.’ 선택한다 해서 오느냐 이 말이죠. 주어진 거예요, 주어진 것.

주어진 것인데 내가 그 의미를 파악하고 그 원인을 안다는 게 우리에겐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내가 만들었으면 ‘나는 이런 이유 때문에 이런 걸 만들었다.’가 되는데 무조건 주어진 것에 대해서… 전쟁에서 단역, 장군이 아니고 졸병으로 가다가 전사한다면 그건 어떻습니까? 내가 장군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안 그러면 내게 주어진 겁니까? 우리는 군에 가기도 싫어요. 무슨 전쟁을 해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주어진 건데, 주지도 않은 네가 그냥 받기만 한 네가 무슨 근거에 의해서 이게 옳다, 그르다를 네가 구분할 수 있느냐는 거죠. 주어진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이 노래 가사가. 천국과 지옥을 구분해서 간다고요? 지옥을 선택할 사람 누가 있는데? 아무도 없죠.

그럼 뭡니까? 지옥은 가고 싶어 가는 게 아니고 주어진 거고, 천국도 지가 좋아서 가고 싶다고 가는 게 아니고 천국도 주어질 때 가는 거라는 거예요. 세상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손에서 이미 벗어나고 넘어선 거예요.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뜨거운 재 대신에 나무를?’ 나무는 뜨거운 재가 아니라고요? 의성에 산불 나보세요. 나무가 뜨거운 재죠. ‘달갑지 않은 위로 대신 변화를?’ 너에 대해서 위로한다? 슬픈 나를 위로할 때 그 위로한 자가 나중에 나한테 돈 빌려달라고 사기 치면 어떻게 하려고요?

‘전쟁에서의 단역 대신 주인공으로?’ 주인공인데 그 주인공이 어떤 주인공이냐? cage, 새장에 갇혀있는 주인공이죠. 지금 우리 형편이 서로 주인공이라고 보니까 새장 안에 갇혀있는 주인공이고 전쟁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도 하나의 소모품이 되는 졸병 역할을 할 뿐이다 이 말이죠. 우리가 세상에 대해 ‘내가 구별해서 내가 원하는 쪽으로 내가 선택할래.’ 그런 처지나 입장에 놓여있지 않다는 겁니다.

자, 이러한 세상을 생각해볼 때 그럼 우리가 이 힘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힘든 것, 내가 결정할 수 없고 주어진 대로 버틸 수밖에 없는, 더운 바람 오면 더운 바람 다 쬐야 되고 찬바람 불면 벌벌 떨어야 되는 이 나약하고 허약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죠?

똑같은 처지에 너만 있으면 서로 위로하면서 살겠다는 거예요. ‘Wish you were here’ 네가 나와 똑같은 처지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나라 노래에 이런 게 있어요. ‘인생은 미완성’ 노래 있죠. 그 노래 가사를 보면 이런 가사가 있어요. ‘사슴처럼 기대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이진관 (1986)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사랑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 해
사람아 사람아 우린 모두 타향인 걸
외로운 가슴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 마는 그림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야 해
친구야 친구야 우린 모두 나그넨 걸
그리운 가슴끼리 모닥불을 지피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새기다 마는 조각
그래도 우리는 곱게 새겨야 해

등 기대고 살자. ‘기대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 노래거든요.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이거 뭐 저작권 안 걸립니다. 내가 부르는 거라.

그런데 이 팝송에는 지금 뭐가 빠져있어요? 오늘 강의에 의하면, 최종적이고 확정적인 비밀, 복음이 빠져있잖아요. 그렇죠? 빠져있으면서 이런 문제가지고 이 세상에 속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게 되면 “너만 고생하는 줄 알아? 나도 그런 고생해.” 그다음에 나오는 위로가 뭡니까? “아무 문제없어. 다 우리 잘못 아니야. 우리는 잘못 없는 죽음을 살고 있는 거야. 죄와 죽음 관계없어. 살다보면 다 죽어. 그냥 살 때까지만 살면 돼. 그전에 맛있는 거 사먹고 여행하고 싶으면 여행하고 그렇게 살면 돼. 왜? 다 그렇게 살아. 너만 유난떨지 마. 인생은 원래 그런 거야.”

뭐가 빠졌죠? 비밀 빠졌죠, 복음 빠졌죠, 십자가 빠졌죠, 언약 빠졌죠, 경계 빠졌죠. 차 빼고 포 빼고 다 빠진 거예요. 다 빠지고 다만 있는 것은 뭐만 있어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세요.’ 그런데 위로가 안 된다니까요. 이 가사에 보면 위로가 안돼요. 우리를 위로한다는 그 목사나 교회가 나중에 위로를 명분으로 얼마나 돈을 빼내고 헌금 빼낼지 누가 알겠어요? 사기를 칠지. 아까 미혹의 영이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표현을 어떻게 했지요? 미혹의 영이? (사기꾼.) 그냥 사기꾼이 아니에요. 대(大)사기꾼. 큰 대자, 큰 사기꾼이에요, 큰 사기꾼.

참, 뒤쪽 가사를 마저 읽어야 돼요.

Year after year
해가 흘러도
Running over the same old ground
늘 같은 곳을 내달리며
What have we found?
우리는 무엇을 찾았을까?
The same old fears
변함없는 두려움 뿐 (이 두려움을 어떻게 이깁니까? 혼자 벌벌 떨기 심심하니까 벌벌 떨더라도 어떻게 합니까?)
Wish you were here
네가 여기 있으면 좋을텐데 (네가 여기 있으면 공포가 좀 덜할텐데)

이게 바로 연인 사이고 이게 바로 부부 아닙니까. 둘 다 진리도 모르는 주제에 그냥 비비고 살면 비비고 되지요. 만두나 사먹고. 이게 뭐에요, 이게? 이것도 대책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도와주겠지. 뭘 도와줘요? 이미 확정했는데.

성경의 뜻은 이겁니다. 십자가 꽂히면 이렇게 돼요. ‘인간은 그 자체로 쓸모없다. 미련두지 말라.’ 이거거든요. 인간에게, 쓸모없으니 미련두지 말라는 말은 자기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고 어딜 쳐다보란 말입니까? 확정되고 이미 고정된 것. 바로 나를 관통하는 그 생명, 그 십자가. 성령으로 오셔서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고마움. 그 고마움이죠.

복과 저주 가운데 우리는 어디에 속했습니까? 우리는 저주에 속했다는 것은 어떤 경우냐? 이미 복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파악되는 거예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파악되는 거예요. 이미 하나님의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 저주받아 마땅함을 아는 거예요, 이게. 골라잡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이것은 내 구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확정된 언약,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무지개 같은 언약, 십자가 언약-십자가도 원래 무지개가 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 양 죽을 때 무지개가 촥 있거든요. 그 무지개가 더 세밀화된 것이 십자가에요.

무지개 언약, 노아 언약을 더 명백하게 확고하게 정확하게 보여준 게 십자가에 꽂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무지개 언약은 지상에 피, 위에는 무지개거든요. 피가 아름답다. 피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아름다운 무지개, 피의 처참함. 이것이 연계가 된다는 거예요. ‘처참함이 아름다움과 연계가 된다.’ 이것은 인간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데 비밀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처참한 스데반 집사인데 하늘나라에서는 주님이 마중 나오고 있어요. 그 연계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납득되겠어요? 납득이 안 되죠. 스데반 집사가 처참하게 돌에 맞아죽는 것은 그것이 쓸모없는 스데반을 주님께서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스데반이 안됐다 하지 말고, 주님은 대단하다고 봐야죠. ‘주님은 역시 일관되고 변함이 없구나.’ 이걸 파악하면 돼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이고, 그래도 스데반 집사가 참 훌륭하구나.’ 이렇게 생각한다고요. 그럼 당신이 한번 훌륭하게 해보지? 싫어요! 왜 싫을까? 왜 싫을까요? 그게 나의 일 따로, 주의 일 따로 구분 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일이 없이 나의 일이라고 여기는 것을 다 어디다 집어넣느냐 하면 주님 자신의 일로 전환시키길 원하고 있는데 우리는 주의 일, 주의 일이라 해놓고 또 나의 일을 따로 뽑아내요. 이거 반칙이거든요.

주일 낮 설교한 것처럼 애국가 부를 때 태극기 보면 되는데 애가 지루하니까 부모를 쳐다본다고요. “고개 돌려서 저쪽 보라고. 저쪽. 이쪽 보지 말고, 저쪽 보라고.” 십자가 바라보면 되는데 “십자가 바라보면 엄마 오늘 햄버거 사줄 거야?” 또 자기 생각한다고요.

그래서 미혹의 영과 진리의 영이 함께 있는데 요한복음 16장부터 살펴봅시다. 끝에 보면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아…!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자, 다시 말씀 보겠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걱정하지 마라. 이겼다.’ 너희가 이긴 거예요, 주님이 이긴 거예요? 주님이 이겼죠. 왜 자꾸 내가 이긴 걸로 눈을 나한테 돌립니까? 우리는 이길 가치가 없어요. 왜? 쓸모없고 아무 가치 없기 때문에 자기한테 집착하거나 애착을 갖고 미련두면 이건 마귀만 좋아해요. 큰 사기꾼이 자꾸 이런 식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거예요.

‘하나님 믿는 건 좋지만 하나님보다 네가 더 소중해.’ 이것이 마귀가 우리 안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겁니다. 심지어 밤잠을 안 자도록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잠을 못 자게 만들어요. 잠을 못 자게 만드는 거예요. ‘아, 내일 시험 합격 발표 날인데 취직되었을까, 안 되었을까?’ 잠을 못 자게 만들어요. 취직되면 승리한 거고, 떨어지면 ‘아, 이력서 벌써 200장 넣었는데 또 안 되나?’ 이렇게 된다고요. 초조와 불안에 어쩔 수 없게 하는 거예요. 초조와 불안에.

태극기고 애국가 소리는 들리지도 않아요. 십자가는 보이지도 않고 지금 합격되어서 ‘이제는 나 살았어. 나는 이제 돈벌이하면서 살아.’하고 부모한테 합격증 보이며 외치는 자랑스러운 내 모습에 본인이 반해버린 겁니다. 심지어 그걸 또 연습까지 하는 사람도 있어요. 외칠 때 두 팔을 벌리고 외칠까? 그걸 연습까지 한다고요.

나는 합격될 자격도 없고 나는 천국 갈 자격도 없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때 이미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취직이라는 것은 공짜로 월급 주는 데가 아닙니다. 괴물이 되지 않으면 월급이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 세상 전체가 지옥인데 지옥에서 산다는 것은 배나 지옥백성 아니면 못 살게 되어있어요, 이 구조가. 이 세상의 구조가. 멀리 중국 출장까지 다녀야 밥 먹고 사는 세상입니다. 그냥 한국에 있는 상품 사서는 장사가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중국 가서. 그게 무슨 고생이에요. 내가 꼭 이 짓까지 해야 되는가, 자기 회의가 밀려오면서.

이제 방금 이야기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이 두 노선으로 나누어졌죠. 왜 나누어지느냐 하면 언약이 개입하니까 그래요. 그 점에 대해 모세는 조금 이따 이야기하고 노아 하나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창세기 9장 24절부터 보면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여기 작은 아들은 누구냐 하면 바로 함입니다.

함도 저주하지만 저주에서 가장 강렬한 저주는 본인 저주보다도 본인이 애지중지하는 자식을 저주해버리면 그보다 더 큰 저주가 없겠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가나안 아버지가 함이거든요. 그러니까 너만 저주받고 자식은 뭐 괜찮다가 아니라 자식 대대로 너 때문에 저주 받았다는 거예요.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자율성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저주해버리죠.

노선이 몇 개 생겼어요? 두 개 생기죠. 두 개 생깁니다. 자, 그러면 모세는 어떠냐? 모세는 뭐 말할 것도 없죠. 모세도 40일 산에 올라갈 때 이미 죽었어요. 모세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신나는 복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 떠나서 죽었잖아요.

사람을 떠나서 산 위에 가서 화산 속에 들어가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그게 살아있을 때 상상도 못한, 제대로 산 것이 죽음의 세계라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그래서 모세가 내려온 것은,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이미 잘 살고 있는데 돌판 들고 땅에 내려왔어요. 땅에 내려오자마자 성질부리죠. 에이, 인간아. 이거는 저주받아 마땅하다.

이것은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사도행전 4장 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자, 여기서 두 개의 말이 있어요. 하나는 무슨 말입니까? 사람의 말, 또 하나의 말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

두 노선이죠. 베드로 사도가 이 둘을 같이 봤습니까, 달리 봤습니까? 달리 봤죠. 달리 봤어요. 예수님도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그다음에 뭡니까?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했죠(23절). 그러니까 두 노선을 계속해서 고집하는 거예요. 오늘 여기 본문에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언약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이 세상은 아무 문제없어요. 그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죽는 것도 자연적으로 아무 문제없는 하자 없는 죽음이 되고요. 아프면 병원가면 되고 죽으면 장례식장 가면 되고. 보람상조에 부탁해서 보내면 되잖아요. 뭐가 문제 있어요? 태어나서 일 년 되면 돌잔치, 생일마다 뭐해주면 돼요? 생일파티해주면 되고 한 일곱 살쯤 돼서 크리스마스 때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선물주면 되고.

아니, 세상에 도대체 뭐 그리 골치 아파요? 아무 문제가 없는데. 공부해서 지 성적에 맞는 대학가면 되고 졸업해서 지 취미에 맞는 직장에 취직하면 되고 그러다 결혼하고 싶으면 솔로 나가서 마음에 맞는 남자 ‘나는 선택하겠습니다’해서 둘이 눈 맞아 결혼하면 되고 결혼하면 애 생기고 애 생기면 넓은 아파트 필요하고. 요새 애 낳으면 나라에서 보조금 많잖아요. 그걸로 잘 키우면 되고. 그게 사는 거 아니에요? 그게 전부 아닙니까? 뭐가 문제 있어요? 일요일에 골프치고 하다가 재미없으면 교회가면 되고.

어차피 애들 놀이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애들 놀이에요, 그냥.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냥. 십자가가 관통을 안 하니까 이런 이야기가 하나의 안줏감, 여담으로 들리는 거예요. 실제가 아니고. 실제는 뭐다? 나는 아무 문제없다,에요. ‘나는 아무 문제없다. 나는 하자 없다. 나는 쓰레기 아니다. 나는 죄인 아니다.’ 이 생각이에요.

그래서 교회 안 나오는 불신자보다 교회 나오는 불신자가 더 독해요. 더 독하다고요. 교회 안 다니는 불신자는 양심에 찔려서 나 혹시 지옥 갈까 싶어 겁나는데 교회 다니는 불신자는 말씀주면 다 튕겨내요. 말씀주면 다 튕겨낸다고요. 골키퍼에요. 말씀이 내 안까지 들어올까 싶어서.

다시 말해서, 사람의 말이 있는데 행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말 속에 침투할까 겁나서 다 튕겨내요. 나는 오직, 오직 꾸준히 나는 사람의 말만 듣고 산다. 그게 오늘날 교인의 모습들이에요. 사람의 말만 듣는 것. 복음은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그걸 알기 쉽게 해석해 달라. 알기 쉽게 해석하면 그게 뭡니까? 위로죠. 잘 된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같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저희가 세상의 말을 듣느니라.’ 이 계시가 예언이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딱딱 들어맞는지.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아주 신났어요. 거봐. 요한일서 말씀하고 딱 맞네.

요한복음 한번 봅시다.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먼저 성경말씀은 예수님과 인간을 구분하고 이 구분이 더 나아가서 인간과 인간을 구분합니다. 예수님과 인간을 구분하고, 예수님과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에서 확보되고 정립된 기준에 의해서 인간과 인간의 두 개 노선이 나옵니다.

이건 별로 어려운 것 없어요. 쭉쭉 읽어보면 됩니다. 요한복음 3장 31절,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누굴 이야기하는 겁니까? 예수님 이야기죠. 예수님은 위의 것을 이야기하고 땅에 있는 인간들은 땅에 속한 이야기만 한다. 구분되잖아요, 벌써.

그다음에 3장 33절,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34절,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그럼 성령 받은 자는 뭐가 됩니까? 36절에 성령 받아서 아들을 믿게 된 자들에겐 뭐가 있고?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가 있죠.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보세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영생 받은 인간과 저주받은 인간이 구분되잖아요. 예수님과 인간 구분이 성립되는 그 기준에 의해서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나누어진단 말이죠.

요한복음 5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되어 있죠. 이것도 바로 인간과 인간 구분에 대한 겁니다.

요한복음 8장 2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어디서 났습니까? “위에서 났”죠.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과 인간을 구분하죠.

구분하는데 이 구분이 그다음 뭐로 이어지는가? 인간 대 인간의 구분으로 이어집니다. 그게 요한복음 8장 24절,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믿는 자는 살고 믿지 않으면 죽는다는 뜻이에요.

그다음 요한복음 10장 28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있다, 없다? “없느니라” 이 주님의 기준이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면 그 인간은 영생을 얻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인간 입장에서는 이건 희한한 일이에요. 왜 저한테 이런 걸 주십니까? 그건 너 때문에 주는 게 아니고, 내가 아버지와의 기준을 기준답게 증거하고 그걸 표내기 위해서 너희는 나한테 채택된 거라 이 말이죠. 나한테 편입된 거예요. 너는 나한테 사용되는 나의 도구라는 거예요. 주님의 도구고 주님의 증인 되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뭐 수작을 부린 게 아니고 주께서 친히 주시는데 뭐 안 받을 재주가 있습니까? 성령 받았죠? 갔다 버릴 거예요? 성령이 세상을 이겼잖아요. 세상을 이긴 것이 나한테 오니까 늘 그 이김이 모든 내 중심을 이기는 거예요. 나는 내 중심을 보고 싶어도 나보다 더 힘센 십자가 보라는 영이 나로 하여금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다른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오늘 요한일서 4장에 나온 말씀 그대로 되는 겁니다.

자, 그다음에 아까 요한복음 5장 26-28절 빠졌죠. 다시 한번 봅시다. 27절,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음성을 도망치고 기피하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세상은 아무 문제없어. 우리는 예수, 하나님 그거 몰라도 돼. 중요한 것은 남들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이게 정상적인 거야. 차분하고 침착하고. 이거 뭐 아무 탈 없어.’라고 안심했던 자가 결국 죽잖아요. ‘죽으면 죽지 뭐. 죽어도 아무 하자 없는 죽음이야. 죽으면 그냥 흙이 되는 거야.’라고 했던 그들이 누굴 만나게 돼요? 확정적이고 결정적인 기준 되시는 분을 만나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어떻게 돼요? 그들은 바로 지옥에 들어가죠.

자, 이제 최종 정리하겠습니다.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면 결국 이 세상은 아무 문제없어요. 교회 안 다녀도 괜찮고 절에 가도 괜찮고 절에 안 가도 괜찮아요. 아무 문제없어요. 문제없는데 사달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문제없는 세상에 누가 문제를 일으켰어요? 누굽니까? 이 평화로운 세상에 누가 자꾸 분란을 일으켜요? 누굽니까? 그분이 누구에요, 그분이?

주님이잖아요. 인간적으로 주님을 믿을 수가 없죠. 우리는 무시하고 싶어요. 왜? 내가 문제없는데 자꾸 문제 있다 하니까 선악과 따먹는 식으로 주님을 없애고 싶어요. 그런데 성령이 왔다고 칩시다. 성령이 나보다 더 세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없앴는데 성령이 내 힘에 의해서 물러가지를 않아요. 계속 찾아와서 십자가 이야기합니다.

“너는 쓸모없거든. 네가 쓸모없다는 것을 내가 특별히 너한테만 알려주는데 그걸 기뻐해. 네가 아무 가치도 없어. 그러니 너한테 미련 갖지 마. 이게 사실이야. 특별히 너한테만 이런 비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거야.” 해놓고 주님께서 다짐을 한다면 “자, 다시 한번 해보세요. 왜 기쁘냐?” “내가 쓸모없다.” “오케이, 잘했어요.” “네가 왜 기쁘죠?” “나는 걱정할 가치도 없어.”

“그래! 넌 걱정할 가치도 없어. 그동안 살아온 것도 덕으로 산 것이니까 네 자신에 미련 갖지 마. 하지만 너를 찾아온 그분이 죽이든 살리든 그건 주님의 소관이지, 네가 살고 싶어 사는 게 아니야. 너는 주께서 허락한 대로 살면서 내가 죄인이고 주께서 이 죄인을 구원했다는 것을 네가 전하게 될 거야.”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없는 것과 말씀이 있는 것과의 차이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이겼다는 그 점, 그리고 이미 그 말씀의 기준이 영원히 확정되었고 결정났다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