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빈무덤

아빠와 함께 2025. 5. 16. 11:52

[25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14 - 빈 무덤

25,05,05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욥기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

오늘은 교재 11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 교재 중간에 보면 "욥기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이 욥을 통해서 일단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욥을 제시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욥은 누구인가?" 라는 것에 대한 관심을 끌게 만드는데, 그렇지요? 그렇게 "욥은 누구인가?" 라고 하게 되면,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는 말이죠.

먼저 보이지 않는 요소가 있는데, 즉 보이지 않는 욥을 통해서 "욥은 인간이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더 나가면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욥을 지목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욥을 지목함으로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은 누구인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욥 한 사람을 통해서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것과 "하나님은 누구인가?" 라고 하는, 그렇게 양쪽을 다 아는 계기로서, 하나님은 욥을 선택하셨다는 말이죠.

* 욥, 인간, 하나님 !!

그렇게 이야기를 욥부터 시작을 했는데, 그렇다면 여기에 이렇게 욥이 있고, 그 다음에는 인간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모두 "욥, 인간, 하나님", 그렇게 3개의 그룹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욥이 볼 때 "인간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누구인가?" 라는 것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볼 때 "욥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 있고, 또한 인간이 볼 때 "인간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누구인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욥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그렇게 모두 6개의 관점이 나오는데, 이 6개의 관점을 성경은 전부 다 한꺼번에 욥을 통해서 하나로 알려준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경에서 이 욥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것은, 이 6개의 관점이 모두 다 파악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욥이 볼 때,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것은, 그것은 욥의 친구에 관한 욥의 관점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즉 인간 속에 욥의 친구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욥이 볼 때, 하나님은 누구인가?" 라는 것은, 그것은 욥기 전반부에 다 기록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욥은 그야말로 악착같이 반발하고 반항을 하는데,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두루두루 지켜보면서, 욥의 친구에 대해서, 또는 욥에 대해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관점을 제시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이 6개의 관점을 우리가 다 알면 되는데, 그렇게 6개의 관점을 다 안다는 말은, 결국 "내가 누구인가?" 라는, 즉 "인간이 누구인가?" 라는 것을 아는 게 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누구인가?" 라는 것을 아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 예수와 인자 !!

이 6개의 관점을 한꺼번에 다 아는 방법이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특별히 이 땅에 보내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보내셨는고 하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보내셨다는 겁니다.

두 가지 이름의 첫 번째는 무엇인고 하면, 그것은 '예수' 라는 이름인데, 즉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건져낸다" 라는 것이죠. 두 번째는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를 그렇게 지칭했고, 그리고 남들이 지칭해주기를 원하는 '인자(人子)' 라는 겁니다. 즉 사람의 아들인데, 이 두 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죠.

여기서 중요한데, 예수님께서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적인 권리를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세계에 대한 권리를 말이죠. 그래야 하나님께서 "나도 인간이었는데" 라고 말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름에 하나님이 합류를 하신다는 것이죠.

* 너희들이 나는 알잖아?

그렇게 합류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인간들은 자꾸만 모르겠다고 나오는데, 끝까지 가면 모르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르겠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의 그룹 안에서, 주님께서 "같은 인간에 속하는 나는 알잖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름을 가지고서 인간 세계에 뛰어들었다는 겁니다. 인자의 뜻이 사람의 아들인데, 즉 "내가 사람의 아들로 왔다. 그러니 모르겠다고 말하지 마라. 내가 알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너희들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알려줄게" 라는 것과도 같은 뜻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라는 것은, 더 이상 인간으로 하여금 "나는 인간이니까 잘 모릅니다" 라는 구차한 변명에서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겁니다.

* 욥은 선지자 !!

그렇게 해서 "같은 인간 중에서 아는 분이 계시는데" 라고 언급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시는데, 그런 권리를 쥐고 있다는 말이죠. 물론 예수님은 그에 앞서서 누구룰 보내었습니까? 욥을 앞서서 보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선지자인데, 예수님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욥을 통해서 하신다는 말이죠. 욥은 보이는 대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그 욥 안에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욥을 다루신다는 겁니다.

그 결과는 뭐냐 하면, 욥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그리고 욥의 친구도 욥을 모른다는 말이죠. 또한 욥은 하나님도 모르는데, 그런데 욥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관점을 욥에게 지어줌으로써, 욥은 비로소 무엇을 아느냐 하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데,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물론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데,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왜 엉터리냐 하면,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은 이렇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면 되지, 내가 누구인지를 굳이 알 필요가 있느냐?" 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이름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인가가 어디로 확장이 되었는고 하면, 인간이 누구인가로 번지게 되었다는 말이죠.

* 네가 누구냐?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자" 라고 하면 곤란하고, 그래서 "너부터 연구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네가 누구냐?" 라는 것 안에 "하나님이 누구인가?" 라는 내용이 전부가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누구를 안다는 뜻입니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정보로 확대가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조치를 취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권리가 주님에게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도 인간이 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고 하니, 예수님도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이름, 즉 피조성의 이름을 주님께서도 그 이름을 획득을 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내가 누구냐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바꾸어서 말하면, "내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라는 겁니다.

* 두 개의 시선 !!

그렇다면 이것을 통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해보면, 먼저 보이는 것은 '시야1',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은 '시야2' 라고 하자는 말이죠. 시야라는 것은 바라보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시선, 혹은 응시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주의 깊게 쳐다보는 것이 바로 응시인데, 자기로부터 그 시야를 날린다는 말이죠. 어디로 날리느냐 하면, 인간의 시야, 즉 욥의 시야는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어디로 나가느냐 하면, 자기 바깥으로 나간다는 겁니다.

* 자기 바깥으로 !!

이 '바깥' 이라는 용어가 교재 118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욥은 의인이면서도 권한을 받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점을 욥의 바깥에 있는 세 친구는, 그야말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욥에게 권한을 주는 것은 욥의 시야, 그것이 "1, 2, 3, 4, 5, 6", 모두 6개라는 말이죠. 욥의 시야, 그리고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욥의 친구 사이에, '바깥' 이라는 경계선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조성해버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바깥에 있으면, 이게 중요한데, 욥은 모든 시선, 즉 응시의 출발점이 자기로부터 시작을 하는데, 이렇게 자기로부터 하는 것에는 보통 두 가지가 있다는 말이죠.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시선이고, 그리고 타인에 대한 시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출발점은 무엇인고 하니, 물론 결과는 두 개로 갈라지지만, 그 출발점은 언제나 '나'로부터, 그렇게 시작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시선의 방향이 벌써부터 '나'로부터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을 선택하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시선이 여기서 서로 같이 마주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나란히 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충돌하는 두 개의 시선이라는 것이죠.

* 시선의 충돌 !!

다시 말해서, 인간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 분석하고 연구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그 시선의 방향이 반대방향으로, 그렇게 마주 오는 시선과 충돌하고 마주치면서, 그렇다면 여기에서 누구의 시선, 누구의 응시, 누구의 관점이 깨져야 합니까?

자기 시선, 자기 관점이 작살나고 깨지면서, 비로소 자기 시선의 한계를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하, 내가 내가 멍청했구나. 내가 무엇을 좀 안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나'로부터 출발한 시선만 알고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발사되는, 하나님에서 시작하는 그 시선에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자기는 거짓이고 엉터리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죠.

* 빈 무덤 !!

이게 뭐냐 하면, 우리 시선의 한계는 곧 우리 존재의 한계라는 것인데, 즉 "내가 누구냐?" 라는 것을 아는 것의 한계라는 겁니다. 그 한계를 성경에서는 어떤 상태로 묘사했는데, 그게 바로 '빈 무덤' 이라는 말이죠.

욥을 통해서 "1, 2, 3, 4, 5, 6", 그렇게 6개의 시선이 있다고 했는데, 이게 참으로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빈 무덤, 즉 예수님의 12제자를 빈 무덤으로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빈 무덤에 갔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의 시선, 자기의 관점에서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한계를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무덤에 시체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천사를 만나서 하는 말이, "있어야 될 시신이 어디로 갔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물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지금 무엇을 모르느냐 하면, 무덤에 간 사람은 시신으로 계속 남아있어야 한다는 자기 견해가 유효하다고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평생 자기는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말이죠. 죽으면 시체가 되는데, 그 시체는 어디에 안치를 합니까? 무덤에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산 사람이 무덤에 갔다가 무엇을 발견해야 합니까? 시체가 거기 있어야 자기가 평소에 살아오면서 알고 있던 안목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등록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덤에 가니까 시체가 어디로 갔습니까? 시체가 없는데, 시체가 사라지고 없다는 말이죠. 빈 무덤인데, 이것은 대단히 난감한 것으로, 진짜로 난감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무덤에 시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이죠.

시체 당사자가 살아서 나타났는데,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무엇을 찾느냐 하면, 시체를 찾는다는 겁니다. 그때 주님이 책망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나중에 제자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인데, "너희들은 내가 한 말을 왜 그렇게 믿지 않느냐?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했잖아"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 말씀을 오해한 제자들 !!

그러면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그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그 시선은 무엇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꽂아주시는 겁니까? 말씀을 통해서 꽂아주신다는 겁니다. 말씀을 통해서 말이죠. 그 말씀에 대해서 이 제자들은 익히 알았다고 자부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디가 문제가 있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오류가 있었기 때문에, 즉 자기 쪽에서 출발하는 그 판단력, 그 모든 것을 인하여, 주님께서 꽂아놓은 그 말씀에 대해서 자기가 오해를 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말씀이 자기를 수정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자기가 아는 것에다 말씀을 더 추가해서, 그렇게 정보를 더욱 더 구축해서, 그렇게 한만큼 자기에게 있어서는, 그 말씀에 대한 신뢰도가 늘어났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 욥아, 너는 악하다 !!

그러면 먼저 욥의 친구가 하는 말을 살펴보겠는데, 욥의 친구는 욥이 고난을 받으니까, "너는 악하다" 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인간에게서 나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자기들은 그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나쁜 자에게 벌을 주시는 분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명백한 진리다. 그런데 욥아, 너는 지금 고난을 받고 있다. 즉 벌을 받고 있다. 따라서 하늘로부터 벌을 받았기 때문에 너는 나쁘고, 벌을 받지 않는 우리는 착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욥의 친구들로부터 나오는 말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미리 말씀을 해드리면, 제일 마지막에 가면 어떻게 됩니까? 대역전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욥의 친구들을 보고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욥의 친구들아, 너희들이 욥에 대해서 잘못 곡해한 죄를 자복하고, 너희들은 재물을 가지고 욥에게 드려라. 그래서 욥이 너희를 위해서 죄사함의 제사를 드리면, 비로소 너희의 죄는 사해질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것이 욥기 제일 마지막인 42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욥 42: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 42:8)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의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가 앞에 나오는데, 분량이 제법 많다는 말이죠. 어떻게 보면 지루하기도 한데, 서로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다는 겁니다. 욥의 입장은 뭐냐 하면, "나는 죄 없이 고난을 받는다" 라는 것이고, 욥의 친구들은 "죄가 없는데 고난을 줄 하나님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 나는 나에 대해서 잘 안다 !!

그러니 하나님에 대해서 누가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인데, 서로가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이들은 지금 무엇을 모르고 있습니까? "내가 누구냐?" 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데,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나는 나에 대해서 잘 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들의 세계에서, 인간들은 자기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의식의 집중도와 통일성에 의해서 현재 의식으로 구축된 것이 '나' 라는 겁니다. 그래서 집중도가 낮을 때, 즉 바쁠 때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별로 할 일이 없을 때나, 혹은 소주 한 잔을 마셨을 때는, 그러면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내 인생이 왜 이래?"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ㅋㅋ) 그때는 자기에 대한 집중도, 즉 통일성이 증가하는 순간이라는 말이죠.

* 그때그때 달라요 !!

그러면 이 의식은 어디에만 통합니까 현재에만 통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현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현재는 과거에 있었던 의식의 축적인데, 마치 돌멩이 쌓아서 축대를 만들 듯이, 그렇게 과거의 기억들이 계속해서 누적된 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축적이 되어서 오늘에 활용이 되는데, 그러니 내일이 되면 또 달라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일이 되면 또 의식의 집중도가 또 달라지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오늘 "나가 누구냐?" 라고 했을 때, 그때 축조된 게 쌓여서 '나' 라는 것이 형성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자기가 오류나 하자도 없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 미래가 과거를 결정한다 !!

여기에 대해서 어제 낮 설교에서 잠깐 언급한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미래가 과거를 결정한다" 라는 겁니다. 이런 것은 인간 세계에서 있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과거는 모르는 게 아니고, 아예 없는 것이니 말이죠.

인간에게는 현재만 있는데, 인간에게 미래는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과거도 역시 없는데, 다만 미래와 과거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과거도 없지만, 그 과거에 대한 기억이 현재에 축조되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즉 "현재에 축조된 그 과거는 과거입니까? 아니면 현재입니까?" 라는 겁니다. 여러분, 과거가 과연 있습니까? 과거는 없는데, 현재 자기가 재해석한 것이란 말이죠.

다시 말해서, "지금의 나를 의식이 집중도 있게 구성하기 위해서, 과거의 그때 그 기분이 아니고, 지금 기분에 맞추어서 과거 일을 재해석해서 일방적으로 나에게 끌어 모은 것, 그것이 현재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욥이 고난을 받는다 !!

욥의 친구들의 경우에, 과거에 욥이 고난을 받았습니까? 아닌데, 과거에 욥은 너무나 부러울 정도로 잘 살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현재 욥의 친구들의 입장에서, 그 현재에 어떤 현상이 나타났습니까? 욥이 고난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욥의 친구들이 뭐라고 합니까? "욥아, 너는 우리가 모르는 과거에 지은 죄가 있잖아"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욥이 고난을 받기 이전에는, 그런 식으로 욥을 평가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욥이 고난을 받는 사태 앞에서, 비로소 욥의 친구들은 욥을 그렇게 본다는 말이죠.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1, 2, 3, 4, 5, 6" 라는 것 가운데서, 거기서 무엇입니까? 욥의 친구들이 욥을 보듯이, 인간들이 무엇을 발사합니까? 자기로부터 현재 일방적으로 축적된 그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과 타인에 대해서 그렇게 평가를 한다는 겁니다.

* 나를 인정해라 !!

그렇게 평가하는 이유와 목적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너는 이렇다" 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그것은 자기가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자기가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서, '나' 라는 존재의 의미가 발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무도 자기를 인정해주지 아니하면, 자기는 자살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연인이 되어 가지고 방송에 좀 나오고, 아무튼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 개무시 !!

사람이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은 무시당함인데, 그 앞에 글자를 하나 붙이면, 그게 바로 '개무시' 라는 말이죠. 자기를 개무시하는 사람과는 굳이 같이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성경은 말하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개무시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우기느냐?" 라고 말이죠. 성경은 "네가 이렇게 하면 인정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뭐냐 하면 "너희가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면서, 무슨 권리 있다고 개무시를 당하지 않으려고 발악을 하느냐?"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간단한 것은, 하나님의 관점은 무엇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말씀으로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말씀에 대해서 안다는 겁니까? 모른다는 겁니까?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니까, 말씀이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자기에 대해서 굉장히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잘난 존재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 잘난 존재가 주장하는 것이 "무덤 속에 있는 시체가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게 한계라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17장 12절을 보겠는데,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요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이게 가룟 유다에 관한 것인데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두 줄기로 (두 줄기의 판) 끄집어내는데, 즉 "이 세상이 어둡다" 라는 겁니다.

물질 속에 빛을 쪼아서 가두어 버리는 걸 '흑체(黑體)' 라고 하는데, 그 흑체에서 구멍을 뚫어서 빛을 뽑아낼 때, 그것을 하나님은 딱 두 종류로 뽑아내신다는 말이죠. 말씀에 의하면 멸망의 자식, 그리고 또 하나는 멸망을 당하지 않을 자식, 그렇게 딱 두 종류로 나란히 정렬이 되어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욥의 친구와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 그 맞은 편은 욥이라는 말이죠. 욥과 욥의 친구를 하나님은 달리 다루시기 위해서, 그래서 욥을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한 것은, 멸망의 자식과는 달리 다루기 위해서 여러분을 선택하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러분 속에서는 무엇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하는고 하니, "나는 잘났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응축되어서, 즉 "말씀이 말씀대로 실현되기 위해서 나는 하나의 샘플이다" 라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겁니다.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 말씀이 말씀대로 옹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샘플로 끄집어낸다는 말이죠.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것을 몰랐다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모른다는 것을, 다른 제자들은 가룟 유다의 멸망을 통해서, 이제 낌새를 눈치채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누구냐?" 라는 자기 관점도 좌절되고, 친구의 관점도 좌절되고,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냐?" 라는 자기 관점도 좌절되고 친구의 관점도 좌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냐?", "하나님이 누구냐?" 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이 시선에 의해서 결정이 난다는 것이죠.

그게 주님의 시선인데, 그런데 그 시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말씀을 주셨지만, 그렇게 말씀을 줘봤자 인간들은 자신의 관점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대해서 오해했고, 그 한계가 드러났는데, 그 한계가 뭐냐 하면, '빈 무덤' 이었다는 겁니다.

* 말씀의 응함을 내부에 심는 방식으로 !!

그렇다면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그 시작을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오류가 있는, 즉 스스로 자기를 모르는 인간에게, 인간을 통해서 하는 자기 관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오류가 없는 주님의 관점으로 옮겨지는 방식은, 그것은 주께서 주신 그 말씀의 응함을 그 사람의 내부에다가 심어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대목을 한번 보겠는데, 요한복음 19장 24절입니다.

(요 19: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그러면 이것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옷을 입었는데, 군병들이 예수님의 그 옷을 탐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았다는 말이죠. 그때는 군병들은 그들의 관점에 의해서 예수님을 해석했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별게 아니다" 라고 하는, 그것이 그들의 관점인데, 거기서 출발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출발해서 제비를 뽑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응하게 함이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비를 뽑는다는 것조차도 말씀 안에 포함이 되어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으로 무장이 되어있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으로 똘똘 무장이 되어있었는데, 그 말씀이 곧 육신이 된 겁니다. 그리고 28절에도 보면,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요 19: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그 다음에 3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36절에서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 19: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 예수님에게 벌어지는 이 모든 일은, 말씀이 말씀대로 착착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이제 놀라운 것이 있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20장이라는 겁니다. 20장 앞에는 무슨 내용인고 하니, 빈 무덤에 막달라 마리아가 찾아갔는데, 그런데 빈 무덤에 시체가 없다는 말이죠.

* 숨을 내쉬며 !!

그 뒤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나를 만지지 말라"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두 시야 사이에는 격차가, 즉 틈이 있음을 제시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무엇인 하면, 20장 22절을 보게 되면, "숨을 내쉬며" 라고 하는데, 즉 성령을 보여주셨다는 말이죠.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도 돌아가시기 이전에는 인간이기 때문에, 성령의 말씀에 응하는 대상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보여주었다는 말은, "이제부터는 내가 응해야 될 말씀을, 내가 너희에게 제시한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죠.

그렇게 제시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에게 있었던 말씀, 즉 "응하다, 응함이라, 응함이러라" 라는 것이 뭉쳐져서 예수님이 되었다면, 이제 예수님의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말씀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성도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응했다, 응했다, 응했다" 라는 것의 집합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엇 하나, 지금 이렇게 물을 마시는 것조차도 말씀이 응했다는 것인데, 즉 자기 관점에서 말씀의 관점으로 전환된다는 말이죠. 이 전환에 대해서 제가 요한복음에서 계속해서 언급했는데, 그러면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는 이것을 획기적으로 전환을 시켰다는 겁니다.

지금 요한복음은 인간과 예수님 사이, 또는 제자들 사이에 성령을 통해서 하나의 "나와 너", 혹은 "너와 나", 그리고 요한복음 17장의 '우리'까지 포함하면, '우리' 라는 것도 들어간다는 말이죠.

* 예수 안 !!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런 식으로 하지 않고, 달리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의 편지에는 '예수 안' 이라는 말이죠. 안은 공간인데, 공간은 필드이고 영역이라는 겁니다. 페러데이라는 물리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처음 주장한 것이 뭐냐 하면, 전자기 '장(場)' 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했다는 것이죠.

막대 자석에다가 쇳가루를 뿌리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물체에는 쇳가루를 뿌려도 그대로 뿌려지는데, 그런데 자석에다가 쇳가루를 뿌리면 어떻게 됩니까? 쇳가루가 그대로 뿌려지는 것이 아니고, 동그랗게 동그랗게 아주 특이하게 자리를 잡는다는 겁니다.

이런 자리배치를 누가 했습니까? 쇳가루가 알아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닌데, 영역에 작용하는 힘에 의해서, 즉 공간의 힘에 의해서 개체는 일방적으로 배치를 당함이 된다는 말이죠. 즉 '배치 당함'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있어서, "내가 누구냐? 하나님이 누구냐?" 라는 것는, 그런 소리를 하려고 하면, 먼저 어디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겁니까? 일단 예수 안에 들어오라는 것인데, 예수 안으로 말이죠.

* 위치가 바뀌면 관점도 바뀐다 !!

그렇게 예수 안에 들어오면, 즉 성전 안에 들어오면, 거기에 십자가의 능력, 피의 능력이 작동하는데, 그 작동에 의해서 "너는 왜 여자이고 나는 왜 남자인지, 너는 왜 종이고 나는 왜 자유자인지, 또 너는 왜 직업이 그것이고, 나는 이것인지", 그 모든 것은 주님이 내뱉은 말씀에 의해서 다시 배치를 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위치가 바뀌면 관점도 바뀐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도바울에 의하면 여기서 아주 치열한 투쟁이 벌어집니다. 치열한 투쟁이 말이죠.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 안' 이라는 필드,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용서받은 필드 안에 들어가는 사람의 관점과, 예수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즉 성령을 받지 못해서 성령 바깥에 위치한 관점이, 서로 치열한 영적 투쟁을 벌인다는 겁니다. 물론 사도바울의 주장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런 계시를 줘서 그렇죠.

아까 했던 것을 다시 해보면, 욥이 있고, 욥의 친구가 있는데, 그러니 친구의 입장에서는 욥은 타인 . 인간이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남으로부터 인정받을 때 존재의 의미가 발생한다고 했는데,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6개의 관점이 있다고 했는데, 욥이 보는 것, 욥의 친구가 보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보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욥의 친구가 욥을 보면, 욥의 친구도 인간이고 욥도 인간이니까, 그러면 같이 묶으면 되는데 왜 따로 하는고 하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따로 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같은 인간인데, 그런데 이게 서로 소통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선택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장차 예수 안에 들어있는 인간과, 예수 안이 아닌 바깥에 있는 인간은 서로 대화가 안 된다는 겁니다.

욥은 항상 의문점을 갖고 있었는데, 그러나 신약에 와서 성도는 의문점이 없어졌어요. 어떻게 없어졌는고 하니,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하게 하려함이라", 그렇게 해서 없어졌어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없어졌다는 말이죠.

* 다시 하면, '6개의 관점' !!

욥이 하나님을 보는 것, 욥의 친구가 하나님을 보는 것, 그리고 하나님까지 해서, 관점이 모두 6개가 나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6개의 관점인데, 이것을 아까 했지만, 새로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해보겠는데, 그러면서 우리도 다시 정리가 되고 말이죠.

관점을 그렇게 할 때,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욥의 친구가 이야기한 것은 생략하고, 이 욥의 친구가 어떻게 사느냐 하면,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정을 받는 방법은, 남들로부터의 신뢰,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인데, 즉 자기에 대한 자기 신뢰, 거기에 토대를 두고 인간은 살아간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에 대한 신뢰, 즉 "역시 내 판단은 맞을 줄 알았어. 나는 옳게 사는 게 맞아" 라고 하는 자기 신뢰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신뢰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예를 들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 예수님의 피인가? 포도주인가?

서부영화에 나오는 내용인데, 멕시코의 어떤 성당에 예수님 상을 석고로 만들어 놓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신부가 성당에서 사용하는 포도주 포대를, 마침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석고상 뒤에 움푹 파인 곳에 잠시 놓아두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뒤에 악당들이 와서 성당에 와서, 그때 마을 사람들이 성당에 모여서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악당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하나님은 없다. 이 신부도 가짜다. 성당도 필요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신부가 "이렇게 하지 마세요. 이분들은 착하니까, 해코지하지 마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악당들이 화가 나서 석고로 된 그 예수상을 향해서 활을 가지고 쏘았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악당들이 마을 사람들, 즉 신자들을 보고, "우리가 다시 올 때까지 신부를 쫓아내라" 라고 하면서 돌아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악당들이 가고 난 뒤에 신자들이 보니, 석고상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 상의 화살자국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라고 하니, 신부가 가서 보고는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이게 예수님의 피가 나온 게 아니고, 내가 포도주 포대를 뒤에 두었는데, 그게 그만 뚫려서 피 색깔로 나온 겁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신부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신자들에게 통하지가 않는데, 그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는 말이죠. 과학적으로 어떤 절차가 있어야 하는지, 그런 것은 다 치우고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는 겁니다.

* 나는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

이것이 뭐냐 하면, "나에 대한 신뢰를 내가 믿는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어떻게 되냐 하면, 이 세상의 진리가 하나가 아니고, 둘도 아니고, '다수성'이 된다는 겁니다. 다수성,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다양성'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각자 자기 팔을 자기가 알아서 흔든다는 겁니다. 자기 신념대로, 이것은 신념이라는 말이죠. 즉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내가 믿겠다" 라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서, "다수성, 즉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민주적 사회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무엇으로 보았느냐 하면, 그게 지금껏 인류가 생겨나서 연구한 결과인데, 이것을 두고 '진리' 라고 한다는 말이죠. 민주주의, 그것이 왜 진리인고 하면, 민주주의는 무엇을 허용해줍니까?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준다는 겁니다.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민주주의가 좋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런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나'를 포기할 이유도 없고, 포기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죠. 그냥 살면, 자기는 진리의 일부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민주의의라는 진리를 구성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자기도 그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이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 라는 것인데, 자기만이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독선이과 아집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서로를 인정해줌으로서 좋은 사회를 구성하겠다는 것인데, 이것 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 인공지능(AI) 등장 !!

그런데 그게 한계가 드러나고 말았는데, '챗 GPT' 때문이라는 겁니다. 챗 GPT가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는 말이죠. 그런데 많이 안다는 것은 신뢰성이 증가하는 것인데, 그러면 많이 알기 때문에, 그 챗 GPT보다 적게 아는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나' 라는 겁니다.

그러면 '나'를 믿을 겁니까? 아니면 '챗 GPT'를 믿을 겁니까? 어느 쪽을 믿을 겁니까? 인공지능을 믿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식을 투자를 한다고 하면, 당연히 인공지능을 동원해야 한다는 겁니다. 요즘 다 그렇게들 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다 인공지능을 동원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다른 회사는 가만히 있을까요? 역시 인공지능을 동원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안공지능이 인공지능끼리 서로 협상하도록 허용을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하고 하려면 그 경로가 복잡하니까, 인공지능이 제안을 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하고 이야기하지 말고, 똑똑한 우리끼리 알아서 하자" 라고 말이죠.

그렇게 인공지능끼리 대화를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까, "찌찌찌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공지능끼리 대화하는 소리를 인간이 모아둔다는 것은, 인간은 이 사회구성에서 인간은 어떻게 되었다는 겁니까? 배제가 되었다는 말이죠. 즉 소외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기가 소외가 된 것을 스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믿음직한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괜찮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저쪽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 인공지능 VS 인간 !!

그런데 문제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인공지능이 아예 사람을 고용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이 자기가 하지 못하는 대목에서, 거기서 인공지능의 한계를 여기고 사람을 고용한다는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캡차퍼즐(CAPTCHA)'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로그인을 하려고 하면 숫자를 삐딱하게 써놓고 기입을 하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왜냐하면 사람이 하려고 하는지 로봇이 하려고 하는지, 그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인공지능이 이 캡차퍼즐을 모르는데, 그래서 인간을 고용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태스크레빗(TaskRabbit)' 라고 하는데, 그런 플랫폼이 있다는 겁니다. 굳이 번역을 하면 '과제를 푸는 토끼'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이러한 플랫폼을 통해서 인공지능이 사람을 고용하는데, 왜냐하면 인공지능은 캡차퍼즐, 즉 어떤 그림에서 특정 사물이나 숫자를 파악하지는 일은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캡차퍼즐을 만들자 인공지능이 거기에 답변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 당신은 로봇이 아닙니까? 왜 숫자를 찾지 못하죠?" 라고 물어보자, 인공지능이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나는 시각 장애자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좀 도와주세요" 라고 하면서 인간을 속이는데, 그러면서 캡차퍼즐을 풀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감정까지 악용하는 인공지능의 섬뜩한 거짓말이라는 것이죠. 인공지능이 왜 인간에게 이런 거짓말을 하는고 하니, 인공지능에게 어떤 목표가 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 목표에 가장 빠른 시간에 도달하기 위해서 인간에게까지 거짓을 하기로 스스로 결정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짓말을 한 것을 누가 믿느냐 하면, 인간들이 믿는다는 말이죠. 자기보다 더 신뢰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공지능을 신뢰한다는 것은, 누구를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더 이상 나를 신뢰하지 못하겠다" 라는 것인데, 즉 인간은 배제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인간은 자기 위치가 인공지능으로, 그 위치가 바뀌어졌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남들에게 인정받는 나, 그런 나 안에서 사는 것이 나답다" 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이제는 "내가 믿고 있는 인공지능 안에서, 나는 비로소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라고,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 졸지에 도구가 된 인간 !!

그러니 누가 더 확실하게 인정을 받는지, 그 경쟁관계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인공지능과의 투쟁인데, 그런 투쟁사회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너, 요즘 무엇을 사용하지?" 라고 하면, "나는 이것을 쓴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행위자가 누구인고 하니, 행위자는 인공지능인데, 그러면 도구는 누구입니까? 인간이 도구가 된다는 말이죠. 인간이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졸지에 인간은 인공지능의 도구가 되었다는 겁니다.

* 자발적인 가축화 !!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발적인 가축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인공지능에게 목이 매여 가지고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더 신뢰하니까 말이죠. 자기보다 더 많이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인간의 목적은 뭐냐 하면, 그것을 '힘' 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힘은 왜 가지려고 하느냐 하면, 자기를 위한 필드를 구축해서, 그 안에서 자아의식이 집중도를 더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집중도를 더하면 어떻게 됩니까? 더 쉽게 말해서, 매일같이 인간이 하는 일은, "과연 나는 내가 신뢰할 만한 존재인가?" 라는 것을 스스로 점검하고 확인하는 것인데, 그게 인간의 매일매일의 삶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더 이상 자기가 자기를 신뢰할 수 없다면. 그러면 자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을 위해서 나는 기꺼이 희생할 수가 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나냐? 아니면 나의 영역이냐?"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놀랍게도 자기보다도 자기 명분이 제공되는 자기의 영역을 따로 만들고, 그런 자기 영역을 위해서 자기가 스스로 희생할 수 있는 영웅이 되겠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죽는다든지, 그리고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을 바친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죠. 안중근이나 이봉창이 그런 자들인데,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명분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믿는 신, 즉 예수, 기독교, 그런 종교를 위해서 어김없이 순교한 자들도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는데, 그 사람들이 과연 신자가 맞습니까? 그들이 자기 한계를 아느냐는 겁니다. 오늘 강의한 욥기로 이야기를 하면, 욥의 친구라는 그 인간들이 자기 한계를 아느냐는 것이죠.

자기는 기독교 복음을 위해서 희생했는데, 나중에 주님께서 오셔서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하게 된다면, 실제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온다는 겁니다. 자기는 희생을 하면서, "이게 신앙이다" 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살았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게 결국은 어디로 돌아왔다는 겁니까?

(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자기 신앙에 대한 자기 신뢰, 즉 자기가 믿는 바를 믿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 인간이 어떻게 피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이것은 주님의 증인이라는 것을 통해서, 그것을 우회에서 결국은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이러한 모순을 우리 인간이 회피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에서, '나' 라는 빼버려야 하는데, 하지만 '나'를 빼지 않는 상태에서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모르게 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냐?" 라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없다는 말이죠.

* 다시 정리하면 !!

그런데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내면 안 되겠죠? 그래서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를 지금부터 말씀을 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8장을 보겠는데, 그것을 하기 전에 방금 한 것을 다시 한번 정리를 해봅시다.

"나의 목표가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 여러분이 왜 사는지에 대해서, 제가 아까 일방적으로 말씀드린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보면, 그것을 바로 자기가 과연 믿을 만한 대상인지 아닌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또는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위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이게 자기 목표라는 것이죠.

그러면 자기 목표는 어디를 벗어나지 않습니까? 자기 목표는 한 순간도 '나' 라는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 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 권한은 나에게 있다 그러니 이것은 손대지 마라. 진짜 이것을 손대면 나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어제 낮에도 설교를 했지만, 가인의 일은 무엇입니까? 간단한데, "누구든지 나의 것을 손대면 죽여버린다" 라는 것인데, 이게 가인이라는 겁니다. 자기 자존심을 건들면 죽여버리겠다는 말이죠.

우리가 이 가인을 이해해줘야 하는데, 사실 이해할 것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니까 말이죠. 즉 "내 자식을 건드리고, 내 아내를 건드리고, 내 자존심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라는 겁니다. 이게 가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창세기 8장 21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창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

여기에 보면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라고 되어있는데, 오늘 강의 초반에서 이미 했던 이야기인데. 다시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이 '어림' 이라는 것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린아이를 거치지 않고 어른이 되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인간이 죽는 것도, 반드시 어릴 때를 거쳐서 죽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릴 때 무엇이 확정이 되어있다는 겁니까? 이미 악함이 확정되어있다는 말이죠.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라는 게 무슨 의미인고 하면, "내가 악해야지, 죄를 지어야지, 나쁜 짓을 해야지" 라는 것이 없었을 경우에도, 이미 그 자체가 악함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뭐냐 하면, 자기가 목표를 삼아서 무엇을 하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그 입 다물라. 네가 목표를 감히 거론해? 네가 목표를 거론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어느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그런 이야기를 해?"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창세기 3장 17절에 의하면, 아담은 이미 이마의 땀을 흘리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목표는 누가 정합니까? 주님이 말씀을 통해서 이미 정해놓았다는 말이죠.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오늘이 어린이날인데, 그러면 인간들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참 행복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마치 캡슐과도 같아서, 각자가 있는 영역, 즉 자기 세계 안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죠. 자기 세계 안에서 말이죠.

그렇게 '주 안'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데, 그런데 이 자기 세계 안에서는 누구를 지울 수가 없다는 겁니까? 이것이 자기 세계이기 때문에, '나' 라는 것을 도저히 어떻게 삭제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나의 세계 → 빈 무덤 → 주님의 세계 !!

주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천국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런 인간을 어디에 집어넣는고 하니, 주님의 자기 세계에다가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인간이신 주님께서 자기 세계를 거치고 아버지에게로 가실 때, 거치던 지점이 어떤 지점이었습니까? 빈 무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디에 집어넣는다는 겁니까?

빈 무덤 안으로 집어넣는데, 그런데 이 빈 무덤, 여기 대해서 우리 인간은 "무덤에는 시체만 있다" 라고 하는 자기의 명쾌함, 이것은 전혀 양보할 수 없는 진리 자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게 빈 무덤에서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오류였음이 그만 들통이 난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 빈 무덤에 대해서만 오류가 아니고, 모든 말씀에 대해서 오류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 사실을 인간은 모르고 있는데, 인간은 알 재주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정신을 자기 신뢰성을 위해서 타인을 동원하는데, 거기에 온 정신을 다 쓰고 있다는 말이죠. 자기를 인정해주는 것이 가족인데,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같이 살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 노아의 홍수사건 !!

이 빈 무덤은 신약에 있는데, 그러면 구약에서 빈 무덤의 역할을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빈 무덤이 빈 무덤이 되기 위해서 인간을 한계점에 이르게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노아의 홍수 사건이라는 말이죠.

이 홍수 사건이 신약에는 십자가 사건인데, 즉 "다 이루었다" 라는 겁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너도 죽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 세계 전체가 주님 앞에서 저주받아 합당하다는 것이 들통났다" 라는, 그런 뜻이라는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꾸역꾸역 자기의 목표를 계속해서 제시한다는 겁니다.

영화를 보면 다음과 같이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가 고속도로라는 말이죠. 이 고속도로에 차가 달리는데, 그런데 여기에 둥근 보름달이 떴다는 겁니다. 영화에서는 카메라 조작을 통해서 보름달의 크기를 키울 수가 있다는 말이죠.

달은 시각 차에 의해서 작아도 지평선 가까이에 해질 때는 크게 보이는데, 벌건 달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속도로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인간의 생애라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자동차를 타고 밟는다는 겁니다.

그 자동차 안에는 자기가 있고, 그러면 그 주위는 어떤 공간입니까? 자기가 모는 자동차 안이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특정 목표와 기대를 가지고 밟는데, 어디까지 밟습니까? 저 보름달이 있는 곳까지, 즉 측정되어있는 곳까지 밟는다는 말이죠.

*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만났는가?

그러면 보름달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욥의 친구들이 만난 자는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날 자격도 안 된다는 말이죠. 욥도 하나님이 나타나서 만났는데, 폭풍 속에서 하나님이 욥을 만났다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이 아닌 욥을 만나는데, 그때 욥의 친구들이 "우리 친구 아이가? 악수 먹자" 라고 해서 만납니까? 그들이 어떻게 나옵니까? "내가 너에 대해서 오해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내 생각이 틀려먹었다. 너를 보고 나는 이제 정신을 차렸다" 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욥아, 너를 통해서 내가 몰랐던 하나님의 일을 나는 접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고백을 하면서 자기 예물을 욥에게 드릴 때, 이 욥의 위치, 욥의 지점은 장차 누구를 앞당겨서 보여주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말이죠.

*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

인간은 끊임없이 목표와 기대가 있는데, 그래서 "저것을 따내면 나는 행복하다"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것이 왜 행복하냐 하면, "내가 여기에 있고, 나를 위한, 나를 인정해주는 필드가 있기 때문에, 그 필드 속에서 내가 욕망이 원하는 것을 계속 축적하게 되면, 이 전체가 나의 행복을 향하여 소리를 지른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 노래도 있는데, 해바라기가 불렀던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 이라고, 아마 다들 알고 있는 노래이지 싶은데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은 사람을 사귀든 무엇을 하든 간에, 현존하는 자기를 지켜내기 위해서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귀면서도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을 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 사람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캡슐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사람이 자기를 만날 때, 직접 자기와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은 나름대로의 자기 행복을 위한 필드가 형성되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람의 필드와 자기 필드의 만남에 있어서, 그 사람의 필드가 자기 필드에 흠집을 남기면서 침투를 한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는 그 사람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진다는 겁니다.

* I Want To Be Break Free ♬

처음에 드럼 소리도 나오고 하는데, 잠시만 들려드릴게요. 저작권 때문에 계속해서 틀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튜브 가운데서 제일 신기한 것은, 이 노래를 북한 군인들이 부르는 게 있다는 말이죠(ㅋㅋ). 그리고 그 가사에 보면 하나님도 나오고 한다는 겁니다.

그 가사에 보면 "나는 자유롭고 싶어" 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 "너의 거짓말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거짓말을 한다는 판정은 누가 하는 겁니까? 자기가 한다는 겁니다. 즉 "너의 거짓말로 인해서 내가 정신적인 피해를 보고 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조성하는 행복의 필드가, 네가 조성하는 행복의 필드의 추진력으로 인해서 손상이 갔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너는 너무 자기 만족에 빠져서, 나는 네가 필요 없어. 나는 자유를 가져야 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자기 자유를 위해서 그냥 "나는 자유롭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네가 나에게 필요 없을 조건 하에서만, 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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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ueen - I Want To Be Break Free(1984)]

I want to break free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어
I want to break free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어
I want to break free from your lies
나는 당신의 거짓말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You're so self satisfied I don't need you
당신은 자신만 알지, 나는 당신이 필요 없어
I've got to break free
나는 자유로워져야만 해
God knows, God knows I want to break free
신은 아시지, 내가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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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남의 이야기입니까? 사춘기에 접어든 중학교 1학년이 "나, 엄마 때문에 못 살겠어" 라고 하는데, 그 다음이 뭐냐 하면, "나에게는 자유가 필요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일방적이냐는 것이죠.

"신은 알고 있어. 내가 얼마나 자유로운지" 라고 하는데, 이것을 성경은 '우상'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신뢰하고 싶고, 또 자기가 행복하고 싶어서, 즉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 위해서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도무지 '나'의 대해서 모른다는 겁니다.

* 어떻게 완전한 자유에 이를 수 있을까?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제가 힌트를 드렸는데, 도저히 자기를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죠. 즉 "나는 나밖에 모른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완전한 자유에 이를 수 있을까요? 사실은 강의시간에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여러분이 그냥 지나쳐서 그렇지 말이죠.

강의 처음에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라고 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자기 필드보다 더 큰 필드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 안', 혹은 '십자가 안' 이라는 말이죠.

십자가, 즉 주님의 죽음은 우리의 살아있는 죄를 없애주는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어제 낮 설교시간에 그것을 두고 '탕감' 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주님이 탕감을 해줌으로서, 그러면 그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될까요?

자기 쪽에서 시작한 사랑은 주께서 받지 않으시고, 주님께서 탕감 형식으로 주신 그 사랑만이 자기 속의 그대로 남아있을 때, 그때 우리는 그 사랑 앞에서 영원한 죄인이었다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는 천국에 가서 기억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천국에서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주실 때, 그때 예수님의 새 유월절 양의 피가 제공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피의 영원성을 영원토록 찬양할 수가 있는데, 그야말로 영원히 영원히 말이죠.

"나는 세상에서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이 원트 브렉 프리' 라고 했습니다. 나는 나만 챙겼는데, 나만 자유롭고 하면 모두가 만사가 나에게 행복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노래만 부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의 한계였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려면 우리가 이런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사실 우리가 이런 노래를 부르든 부르지 않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인데, 그리고 그 악한 것을 고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속에 있는 이것을 자기 힘으로 빼낼 수 없다는 겁니다. 주께서 그냥 사용을 하시는데, 십자가를 위해서 말이죠. 그렇게 되면 자기밖에 몰랐던 죄인이, 주님께서 십자가로 용서했다고 하는,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고 하면, 하나님도 알고,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허접한 존재이고 추잡하고 더러운 존재인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죠. 완전히 일거양득인데, 우리는 모조리 다 알아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말씀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나는 사랑에 빠졌어 !!

노래의 가사를 조금 더 살펴보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진심이야"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무엇이 이상하냐 하면, 그 앞에 보면 "나는 사랑에 빠졌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네가 보기에 모순이지? 나는 너에서부터 탈출하고 싶다" 라고 해놓고, 그런데 "나는 너한테 빠졌어. 사랑에 빠졌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내가 너에게 빠진 것을 하나님도 알고 있어. 나는 나만 있으면 돼. 너는 필요가 없어. 그런데 왜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되었지?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거야. 나는 어쩔 수가 없었어. 너는 이것을 이해해야 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나에게 부담을 줄 수 없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어느 누구로부터 부담을 받는 것은 싫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 내용이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 노래를 채택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북한의 남자 합창단이 군복을 입고 부르는데, 그들이 이 노래를 왜 부르는지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녹취자 - 이 유투브에 등장하는 것이 북한의 모란봉 악단인데, 합성된 가짜 동영상이라고 함(ㅋㅋ))

가사를 조금만 더 살펴보면, "당신 방식으로 내가 사랑하고 다루는 것에 대해서 나는 벗어날 수가 없어(당신 없이 사는 것이 나는 익숙해지지가 않아). 그렇게 벗어날 수는 없지만, 나는 내 안에서 나만의 자유를 얻을 수가 있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다음은 더 희한한데, "너 없이는 나는 못 살아. 하지만 너의 방식이 아닌 내 방식대로, 내가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신도 알고 있어. 나는 이 자유를 가져야 돼. 나는 자유롭고 싶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동성애와 마약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의 본심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인간 내부에 잠복되고 감추어졌던 것이 노래로 나주어야, 그런 노래가 히트를 친다는 말이죠. "야, 너는 내가 감추고 싶은 것을 그렇게 이야기를 잘 하냐? 좋아, 내가 판을 사줄게" 라고 한다는 겁니다.

* 말씀을 맺으면서 !!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말씀에 의하면 두 줄로 서는데, 하나는 멸망의 자식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멸망의 자식이 있다는 것은, 또 어떤 자식도 있다는 겁니까? 멸망되지 않을 자식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멸망되지 않은 자에게는 무엇이 오느냐 하면, 성령이 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성령이 오게 되면, "훌륭하다, 착하다, 거룩하다" 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건을 자기에게 적용하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주장하는, 즉 자기 행복을 위한 자기 영역이 주님의 영역을 어떻게 침해했는지를, 어떻게 가로막고 훼손했는지를, 그것을 잘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쓰고 있던 면류관을 천국에서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내가 쓸 게 아니죠. 저는 잽이 안 됩니다. 주님만이 쓰셔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기꺼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기 면류관을 반납할 때, 그러면서 자기 목표와 목적도 역시 반납하게 된다는 말이죠.

(계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그래서 "제가 존재하는 것은 주님의 목표달성이었는데, 그동안 저는 오해를 하였습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을 성령이 오게 되면, 죽기 전에 살아있을 때부터 예수 안에서, 그것을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날마다 실시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데, 그리고 하나님도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날마다 고백되는 것은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통해서 이 현실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이루어지고 움직이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는 만큼 내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만큼 나의 죄가 더 깊어져 있음을 발견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5,05,14 오전 9시에 마침.

God knows, God knows I want to break fr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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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ueen - I Want To Be Break Free(1984)]

I want to break free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어
I want to break free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어
I want to break free from your lies
나는 당신의 거짓말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You're so self satisfied I don't need you
당신은 자신만 알지, 나는 당신이 필요 없어
I've got to break free
나는 자유로워져야만 해
God knows, God knows I want to break free
신은 아시지, 내가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걸

I've fallen in love
나는 사랑에 빠졌어
I've fallen in love for the first time
나는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어
And this time I know it's for real
그리고 이번에는 진실이란 걸 알아
I've fallen in love, yeah
나는 사랑에 빠졌어, 그래
God knows, God knows I've fallen in love
신은 아시지,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It's strange but it's true, yeah
이상하지만 진실이야, 그래
I can't get over the way you love me like you do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을 견딜 수 없어
But I have to be sure
그렇지만 확실히 해야겠지
When I walk out that door
내가 저 문을 나설 때
Oh, how I want to be free, baby
오, 내가 얼마나 자유로워지고 싶은지, 그대여
Oh, how I want to be free
오, 내가 얼마나 자유로워지고 싶은지
Oh, how I want to break free
오, 내가 얼마나 자유로워지고 싶은지

But life still goes on
하지만 삶은 계속 흘러가고
I can't get used to living without, living without
나는 내 옆에 당신 없이는, 당신 없이는
Living without you by my side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
I don't want to live alone, hey
나는 혼자 살고 싶지 않아, 그래
God knows, got to make it on my own
신은 아시지, 나 혼자 해 나가야 한다는 걸

So baby can't you see
그러니 그대여, 알지 못하겠니
I've got to break free
나는 자유로워져야만 해
I've got to break free
나는 자유로워져야만 해
I want to break free, yeah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어, 그래
I want, I want, I want, I want to break free
나는, 나는, 나는,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