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되지 않는 말씀
감금되지 않는 말씀
2025년 5월 1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7:11-21
(37:11) 갈대아인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
(37:12)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중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하여
(37:13) 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두목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가로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37:14) 예레미야가 가로되 망령되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방백들에게로 끌어가매
(37:15) 방백들이 노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으로 옥을 삼았음이더라
(37:16) 예레미야가 토굴 옥 음실에 들어간지 여러 날 만에
(37:17) 시드기야 왕이 보내어 그를 이끌어 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가로되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가로되 왕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
(37:18) 예레미야가 다시 시드기야 왕에게 이르되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관대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37:19) 바벨론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37:20) 내 주 왕이여 이제 청컨대 나를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 보내지 마옵소서 내가 거기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
(37:21) 이에 시드기야 왕이 명하여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두고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매일 떡 한덩이씩 그에게 주게 하매 성중에 떡이 다할 때까지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
예레미야 선지자에 대한 불만이 일부 유다 나라 지도층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집단의 의지 속에는 개개인의 의지와 의욕을 양보받은 형성되어 있습니다. 개인적 권력보다 집단 권력이 훨씬 효과적이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잘 아는 바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질수록 유다 나라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바로 이 거국적인 일치된 마음을 우습게 여기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밉상을 받은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즉 누가 체포하라고 하지 않더라도 나라를 걱정하고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예레미야의 의견을 격분을 일으킬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문지기의 두목을 그냥 불심검문 형식으로 체포합니다.
그것도 일방적 오해에 입각해서 말입니다. 그만큼 유다 나라의 분위기가 험악하고 극도로 긴장되어 있었던 겁니다. 누가 나라를 걱정하는 좋은 백성인지, 누가 나라를 팔아넘길 매국노인지를 자체적으로 판단하는 상황에 들어선 겁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예언 선포는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정치적 발언이 아닙니다.
체포하려면 하나님을 체포해야 할 겁니다. 실제로 나중에 신약에 오게 되면 유대 나라는 하나님을 체포하고 감금하고 죽여버립니다. 창조주를 피조물이 죽여버리면, 그 피조물들은 누가 만들은 것이 되지요? 죽어야 될 분이 자신이 창조했다면 자신도 또한 죽어 마땅한 존재가 아닐까요?
따라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대해서 곧 죽어도 메시야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닌 것으로 정리하게 됩니다. 이러한 메시야가 당하신 수모는 일찍 예레미야도 그 당대에 당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은 발설이 된 순간부터 그 어떤 장애나 방해에 구애됨이 없이 현실이 되어버립니다.
이점이 중요합니다. 매개로 사용한 인간에게 그 어떤 환란이 있더라도 말씀은 실현 절차에 이미 돌입했습니다. 비록 바벨론 군대가 애굽 군대의 이동 소식을 듣고 잠시 예루살렘에서 물러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면 기어이 예루살렘과 유다는 바벨론에 함락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군대의 일시적 물러남에 자기네들의 기대치가 곧 현실이 된양 의기양양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이 근원적으로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여부에 따라 성취에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스스로 자기 견해를 수정할 의사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 구원될 자가 생겨난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기이합니다. 선입견 빼고 말씀을 대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시편 119;129-13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의 증거가 기이하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즉 말씀 활동의 결과에 의해서 이 기이함을 기이함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는 생깁니다. 이들은 말씀 활동의 영향을 받아 자신이 ‘우둔한 자’임을 기꺼이 수용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총기로부터부터 자아의 우둔함과 어리석은 자로 전환되는데 있어 말씀은 어떤 식으로 작용할까요?
그 예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5-19)
예수님과 여인의 초반 대화에서 전혀 소통에 지장이 없는 기이한 말은 전혀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는 데 있어 여인은 반가와하며 동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여인은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은 않은 은밀하고 수치스러운 과거사입니다.
여인은 일단 버팁니다. “남편은 없나이다” 즉 물 길러오는 문제와 상관없는 남편 이야기는 그만 두세요라는 태도를 보입니다. 하지만 영생의 물을 주시는 주님 앞에서 여전히 자신에게 숨길 것이 있다는 바는 제대로 청산할 것이 무언지를 여전히 모르는 경우를 말해줍니다. 그 여인은 과거에 매여 있습니다.
아니, 자신의 과거 자아에 매여 있습니다. 헤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와 작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아 집착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실 수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과거에 다섯 남편이 있음을 폭로합니다. 그렇게 될 때, 여인은 자신의 자아 범주가 예수님에게 양도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선지자이십니다” 그 여인은 자아와 기꺼이 작별하고 예수님의 일하심과 말씀에 자신을 일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은 성도 내면의 세계를 부정하는 식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게 해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신임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기존의 자아는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자신이 평가하고 심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2장에서 주님은 이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7-48)
즉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심판 대상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자신을 심판하는 것과 예수님의 심판과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바로 성령을 통해 이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가면서도 상대들을 기꺼이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스데반 집사가 자체적으로 기뻐할만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이나 진리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면서 성립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자기로부터 벗어나야 복음과 진리에 방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없애지 않는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은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완전성을 갖춘 영적 능력이 됩니다.
바로 성도에게는 이 진리와 복음에 의해서 생산된 자들입니다. 이 기준에 의해서 심판이 진행됩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늘 일어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인 것을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3강-예레미야 37장 11~21절(감금되지 않는 말씀)25051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7장 11~21절입니다. 구약성경 1111페이지입니다.
“ 갈대아인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중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하여, 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두목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가로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예레미야가 가로되 망령되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방백들에게로 끌어가매, 방백들이 노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으로 옥을 삼았음이더라, 예레미야가 토굴 옥 음실에 들어간지 여러날만에, 시드기야왕이 보내어 그를 이끌어 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가로되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가로되 왕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 예레미야가 다시 시드기야왕에게 이르되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관대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바벨론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내 주 왕이여 이제 청컨대 나를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내가 거기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이에 시드기야왕이 명하여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두고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매일 떡 한덩이씩 그에게 주게 하매 성중에 떡이 다할 때까지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
상당히 긴데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의 사견으로 여긴 거예요. 하나의 정치적 의견으로 들어서, 다른 사람들은 전부다 이 민족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너는 오히려 반대로 망하는 것이 뜻이라고 이렇게 말해버리면, 당신의 그 말로 인해, 우리 이스라엘의 결집력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미워하기 시작한 겁니다. 공동체의 단결력을 예레미야가 훼손한다는 거죠. 그러면,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면, 예레미야를 잡아 가둔다고 해서 말씀이 취소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목격자가 목격한 사건을 그대로 이야기한다고 해서 목격한 사건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예요.
자꾸 사람의 견해처럼 그렇게 생각해서, 예레미야를 집어넣었어요. 옥에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을 옥에다 못 집어넣는 거죠. 물론 나중에 신약에 오면 하나님도 옥에 집어넣어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옥에 가두잖아요. 그리고 죽이죠. 사람이 하나님을 죽일 수 있다는 거, 이건 참 신기한 일이죠. 생명과 목숨을 주신 하나님, 창조주인데, 창조주가 죽어버리면 자기는 어디서 창조된 겁니까?
자기 손에 죽인 창조자에 의해서, 본인이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자기도 죽을 존재인 것을 고백하게 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은 엉터리라는 쪽으로 정리가 되어줘야, 하나님은 나를 만들었고,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느냐. 그것은 이스라엘을 포기 못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을 포기하면 이스라엘은 죽는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예레미야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이스라엘을 포기해라. 그러면 이스라엘이다. 이걸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려주면 내가 살겠습니다’라는 이게 우리 뜻이고, 하나님은 “너를 떠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라고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를 떠날 필요가 없는 게, 내게 주어진 것은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이건 마땅히 떠나야죠.
남의 것을 내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 것도 아닌데, 내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 내가 훼방질하는 거예요. 이러한 예레미야의 생각이라든지 하나님의 생각은 참으로 기이하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그 생각이 시편 119편 13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129. Thy testimonies are wonderful: therefore doth my soul keep them.
130. The entrance of thy words giveth light; it giveth understanding unto the simple.
그리고 129절에도 보면, “주의 증거가 기이하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주의 말씀이 기이하다는 말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거죠. 인간의 모든 아이디어는 나를 변명하고, 나를 지키고, 나를 정당화시키는 데서 말을 내뱉고, 그것을 나의 자랑거리로 회수하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말씀은 뭐냐 하면, ‘그런 너에게서 떼 내라. 떠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떠나라고.
떠날 수가 없죠. 인간은 자체적으로 이미 고장 났기 때문에. 연세 많은 분들이 자기 고집을 버렸던가요? 아니죠. 떠나지를 못합니다. 자녀들이 상당히 애를 씁니다. 그러면 떠나는 방법을 주께서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그것을 알면 되겠지요. 우리 힘으로는 못 떠나는데, 떠나는 방법이 있어요. 그 떠나는 방법을 우선 신약에서 하나 말씀드리고, 구약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약에 요한복음 4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 나옵니다. 물을 긷기 위해 온 사람인데, 주님께서 먼저 말을 걸어서 ‘이 물 말고 다른 물 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 있다. 너도 그 물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식으로 말해서 그 여인이 ‘다시는 물 뜨러 오는 수고 안 해도 되니까, 너무 좋습니다’라고 할 때, 여전히 그 여인은 자기를 못 떠났어요.
‘물이 없으면 나는 죽는다. 그런데 목마르지 않은 물을 줬다. 이런 횡재가 어디 있느냐. 이 물을 가져야 하겠다’라고 했으면 인간들이 기이하지 않아요. 참 친절한 아저씨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4장 16절에 보면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야~~, 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남편을 불러오라고 해요. 사생활을 건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사생활을 건드려요.
이 사마리아 여인의 사생활은 아무도 몰라요. 본인이 꼬깃꼬깃, 고이고이 숨겨놓은 것이기 때문에, 지금 나의 사생활을 남에게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과거의 사생활은 내가 간직하고, 나는 여기에 물을 뜨러 온 거예요. 물을 뜨고 마셔야 내가 사니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물을 떠서 마시는 것이, 진짜 너를 가리고 있고, 감추고 있고, 방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출발점을 어디에서 하느냐 하면, 너 자신의 잘못된 너를 감추고 있는 너의 사생활부터 네가 청산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나의 과거를 지키겠다는 그 나를, 새로운 나와 결별해야 하고 작별해야 한다는 거죠. 남편 이야기를 끄집어내니까, 이 사마리아 여인이 놀랐어요. ‘어떻게 나만 아는 사생활을 당신은 어떻게 알았죠? 당신은 선지자가 분명합니다’라고 나온 거예요.
예수님이 처음 그 말을 물을 때, 여자는 계속해서 감출 때까지 감춥니다. ‘지금은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슬슬 심문이 시작됩니다. 캐낼 때까지 다 캐내야, 허접스러운 내가 나를 포기하고 떠날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17~18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 여인은 평생 감추고 싶은 비밀인데, 요한복음 4장 17절을 통해서 대대로 공개되고 말았습니다. 다 들켰어요.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 명 있었고, 지금 사귀는 남편이 여섯 번째 남편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이 여인은 감추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감출 것이 없게 만드는 분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의 확장이에요. 내 범주의 넓어짐, 확대입니다.
그동안 내가 내 안에서 관리하고 통제해서, 이것까지는 내 것, 그다음부터는 타인이라고 된 이 범주를, 본의 아니게 강제조치로 인해, 완전히 주님의 말씀 범위 안에 자기가 포함되고 만 겁니다. 주께서 포함시킨 겁니다. 다시 예레미야로 돌아옵시다. 예레미야 본문에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말한 예레미야는 감금되었지만, 예레미야가 내뱉은 말씀은 예레미야를 감금시킨 그 민족까지 영향력이 확대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이 있는 거예요.
예레미야 하나 가둬봤자, 예레미야가 이미 발설한 그 말씀에 대해서는 너희들이 피할 길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무슨 수로 인간이 피합니까? 여기서 요한복음 12장에 어려운 대목을 어쩔 수 없이 소개 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게 어려운가 하면, 요한복음 12장 47절에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 하셨어요.
주님께서 서슴없이 이야기하신 거예요.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심판하지 않는다” 그러면 심판이 없다는 건가. “내가 심판하지 않는다”라는 거죠. 그러면 누가 심판하느냐. 진짜 어려운 건데요.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심판이 없는가.
아니에요. 구원은 심판 중에서 구원이 일어나는데, 그때는 내가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48절에 보면,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어디서 어려운지를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내가 아니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너희를 심판하겠다는 겁니다. 감금된 예레미야가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예레미야에게서 이미 내뱉어진 그 말씀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겁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포기하라고 했지?”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아, 이스라엘에게서 결별하라. 너희들이 생각한 이스라엘은 붙잡을 수 없어. 그건 이스라엘이 아니야”라는 뜻이에요. 너희들 자신의 집착 때문에 생긴 공동체이지, 그건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또 다른 예가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으니까, 가족들이나 스데반 집사 본인에게 굉장히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굉장한 오산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으면서 기뻐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고, 그 기쁨이 저들은 알지 못하니까 저들을 용서하라고, 기꺼이 용서가 나왔던 이유는 스데반 집사가 자기 하는 일에 큰 성공을 보았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자기 목숨이 복음 전하는데 섞이지 않았음에 성공했음을 기쁨으로 받는 거예요. 내 목숨 연연함이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발설된,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 그 진리를 전함에 있어서, 내 목숨이 거추장스럽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내가 앞으로 주의할 테니까, 내 목숨만 살려주세요’라는 이런 이야기를 안 하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어요.
물론 성령에 충만했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진리라는 것은,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 목숨과 바꾸지 않으면, 그건 진리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왜? 내 목숨보다 더 가치 있으니까. 자기를 없애지 않는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지금 성경에서 하는 이야기가 이 인간세계에서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말씀인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프리스테이트(Free State of Jones – 2018년 개봉)’라는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는 미국에서의 남북전쟁, 1864~1865년도까지 일어난 그 내용인데, 흑인들이 남부의 면화 농장에서 학대받고, 핍박받고, 나중에 힘 빠지면 죽여버리는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그들이, 북쪽연방에서 링컨 대통령이 나서서 노예를 해방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들을 드디어 해방했습니다.
해방해서 북부군에 속한 사람들 편에 붙어서, 남부의 노예들이 이제는 살았다고 북군 쪽으로 붙은 거예요. 그런데 그 북군에 속한 지도자가 뭘 내세우느냐 하면, ‘프리스테이트’, 그러니까 자유 국가주의를 내세웠던 겁니다. 여기서 자유 국가주의의 네 가지 원칙을 선언했는데,
첫째는 ‘한 사람의 가난이 다른 사람의 부가 될 수 없게 하자’였습니다. 내가 가난한 덕분에 남이 잘 사는 일은 없는, 그러한 나라를 만들자. 이게 첫 번째 나온 겁니다.
두 번째,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자기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할 자격은 없다’ 이런 것들은 그들이 노예 생활을 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거예요. 자기 일을 하는데, 나에게 강제로 자기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할 권리가 없는 그런 나라를 만들자는 겁니다.
세 번째, ‘자기 땅에서 난 것은 자기가 가져간다’ 얼마나 노예 생활이라는 것이 참혹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마지막 네 번째,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이게 네 번째 원칙에서 프리스테이트라는 자유 나라를 설립하게 되었고, 결의를 다졌어요.
이게 자유입니까? 과연 이게 자유일까요? 그렇게 나왔던 흑인들이 처음에는 굉장히 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뭘 알았느냐 하면, 이런 중요한 사실을 알았어요. 이렇게 자신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자유가 없는 자유민이다’
자유가 없는 자유민이라는 것이 뭔 뜻인가 보니까, 그들이 목화밭에서 목화 따는 기능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탈출한 거예요. 그렇게 나왔는데, 써주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그들은 글도 모르죠, 숫자도 모르죠, 국어가 안 되면 사회고 과학이고 아무것도 안 되죠. 하여튼, 인간 세상은 모르면 쓸모 짝이 없어요. 천국과 달라요. 무식하면 아무도 써주지를 않아요.
써주지를 않으니까, 뭐 밥값이라도 해야 하는데 수입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그렇게 지칭합니다. ‘나는 자유가 없는 자유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교육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누구에게 교육받아요? 다시 백인들 밑으로 또 들어가야 하죠. 인간세계에서 자유라고 하는 것은 내가 외친다고 자유가 아니고, 남이 그 인간을 쓸만한, 이용할 만한 가치를 품고 있을 때, 그게 되는 거예요.
편의점 취직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면 힘들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 말을 안 지키고 안 믿어도, 내가 너희를 심판하지 않겠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고 구원하러 왔다” 다시 말해서, 일단 인간세계에 자유를 줘요. 그런데 그것은 자유 없는 자유민처럼 된 겁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의 말씀이, ‘이제 자유다. 구원받아’라는 게 아니고, 주의 말씀이 드디어 해방된 자유민에게 적용을 시킵니다. 적용을 시키는 방법은 뭐냐. 방법은 스가랴 3장에 나옵니다. 스가랴 3장 1~4절에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기에 먼저 보면 마귀가 전제되어 있죠. 마귀가 통치하는 세상. 자유가 뭔지를 이제 이야기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옛사람, 자기밖에 모르는 옛사람, 나를 못 놓는 집착하는 옛사람, 자식이고 뭐고 나이가 들수록 자기밖에 모르는, 갈수록 자기밖에 모르는 나를, 주께서는 “옷을 벗겨라” 그러면 옷을 벗기면 됩니까? 그러면 자유 없는 자유민 되는데요? 그래서 옷을 벗기고 옷을 입혀요.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힙니다. 그 아름다운 옷이 바로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예수그리스도의 옷으로 입혀버려요.
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1. Then he showed me Joshua the high priest standing before the angel of the LORD, and Satan standing at his right side to accuse him.
2. The LORD said to Satan, "The LORD rebuke you, Satan! The LORD, who has chosen Jerusalem, rebuke you! Is not this man a burning stick snatched from the fire?"
3. Now Joshua was dressed in filthy clothes as he stood before the angel.
4. The angel said to those who were standing before him, "Take off his filthy clothes." Then he said to Joshua, "See, I have taken away your sin, and I will put rich garments on you."
5. Then I said, "Put a clean turban on his head." So they put a clean turban on his head and clothed him, while the angel of the LORD stood by.
예수님의 옷에는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모든 말씀이 완성된 상태, 말씀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완성된 상태로 말씀이 작동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말씀이 올 때는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이거 다 이뤘는데, 네가 지키려는 것과 바꿔치기 안 할래? 이게 거룩인데, 네가 지키려는 것과 바꿔치기 안 할래? 이게 전도인데 네가 생각하는 전도와 바꿔치기해야 하잖아. 이게 예배인데 바꿔치기해야지”라는 이게 바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야기한 성령으로 예배한 그날이 온다는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은 “어느 장소에서 예배하면 됩니까? 그리심산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라는 했지만, 이도 저도 이것은 네가, 옛사람이 익히 알고 있는 예배 장소이잖아요. 예배 자체가 예상도 못 한 다른 예배, 바로 다 완성되어서 네 속에 들어갈 때, 그것이 나와 너의 관계가 새롭게 수립된 그 예배, 그게 바로 영적 예배입니다.
따라서 그 예배 안에서는 우리는 그냥 흑인 노예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에서 그냥 남 하는 대로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말을 듣지 않고, 완성된 주님의 완성품으로써, 완성된 말씀을 내 목숨보다 더 귀하게 기꺼이 전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말씀 적용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이 다 이루어졌는지, 왜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그걸 찾아내려고 하지도 않는지, 다시 우리 자신의 잘못된 것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주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하고, 우리는 미진하고 결핍된 것을 너무 느끼고, 이 사이에 우리 자신의 옛사람이 방해물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