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 고고학
[베르그손 고고학] 저자 카미유 리키에 엄태연 옮김 읻다 출판사(서울: 2024)
Ⅰ 책 내용
1. 글 전체 분위기
베르그손의 철학은 점진적으로 상승할 것을 희망하기보다는, 경험을 따라 하강하고 점진적인 심화를 통해 순수지속의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철학이다. 무한정 후퇴하는 직관의 한계들 속에서 수행된다. 정초의 작업은 중요치 않다. 따라서 토대로 고정되는 주체도 중요하지 않다.
정초하는 것이 아니라 용해되는 철학이다. 땅 꺼짐을 노린다. 확신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변동될 위험을 선택한다.
2. 철학 도구는 직관, 철학 목표는 지속
개념을 분석하지 않고 접근한다. ‘지속’을 느끼려한다. 각가지 이미지들이 수렴되어 지속에 다가갈 것이다. 지속은 수직적으로 꽂아두어야 한다. 그래야 평면적인 공간 이미지와 교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와 여럿 사이에 놓인 지속은 피난처를 찾아야 한다. 한편으로 한 점으로 수축되어 신적 영원성 속에서 펼쳐지는 지속이 있고, 다른 편에는 이완되어 물질적 순간 속으로 뿌려지는 지속이 있다. 리듬을 갖는 의식들의 긴장이나 이완의 정도에 따라 존재의 계열 속에서 각각 자리를 잡을 것이다.
3. 나와 지속과의 관계
지속 속에서의 용해란 선잠 든 목동이 무심코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 시간에서 물러나는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의 노력-긴장과 이완-을 통해 (밑)바탕 속으로 자신을 용해시켜야 한다. 이 의지의 노력이 존재의 깊이 속으로 침잠하게 한다.
베르그손은 고정시킬 어떤 좌표도 없는 거대한 대양 속에 잠겨 들면, 시간적 흐름을 초과하는 바탕 없는 중간에 놓이게 된다. 이것이 절대이며 인간은 이 절대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구성적 주체성을 포기하며 자신을 용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물은 하나의 흐름이며, 사물 안에서 내적으로 작동하는 리듬을 부정하는 경우에 해당되는 대상이다. 자아도 역시 또 다른 흐름이며, 여타의 흐름들이 갖는 운동성을 자신의 운동성에 맞추어 조절함으로써 그것들 각각의 리듬과는 다른 하나의 리듬을 따르도록 강제하는 경우에만 주체가 된다.
주체는 흐름을 저지하여 자신의 발걸음에 맞추며, 그렇게 하여 흐름을 응고시키고 흐름이 갖는 역동적 깊이를 무효화하는 정적인 대면 속에서 흐름을 대상으로 상정한다. 달리 말하면, 유일한 시간적 흐름이 존재해서 그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포착하기 위해-시간 밖의 주체를 개념화하기를 추동함으로써-시간 밖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지속은 내 의식의 흐름 속에서, 그리고 내 흐름이 내 흐름 속에서 직조되는 다른 흐름들, 더 혹은 덜 이완된 흐름들과 관계하여 살아가는 대립 자체 속에서 절대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아무리 지성적으로 설탕이 녹을 것임을 알고 있고, 그 화학적 성분과 용해의 결과를 떠올린다 해도 설탕의 리듬은 나의 리듬이 아니고 나의 초조함과 상응한다. 나는 사건의 리듬을 따라야만 하고, 따라서 내 지속을 제거될 수 없는 것으로 경험해야 한다. “아무리 … 해도 소용이 없다.” 나는 의지가 나를 데려가는 곳, 즉 물리 과정의 종착점까지 갈 수 없다. 나는 시간을 가속화하여 사물들의 리듬이 내 리듬에 맞도록 조절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설탕의 리듬을 하나의 사건으로 채택하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즉 나는 때때로 나의 지속을 우주의 지속에 끼워 넣고, 우주가 총체적으로 지속함을 단언해야 한다. 우리가 초조해 하기 때문이다. 어떤 물리적 과정이 내 눈앞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을 가속하거나 늦추는 것은 내 지각에 달린 일도, 내 의향에 달린 일도 아니다.
설탕물이 내 기대에 부응하려면, 먼저 내 의식을 수직적으로 가로질렸던 지속의 리듬들 간의 격차를 표상의 공간적 지평 속에 동시적으로 재배치해야 한다. 요컨대 모든 흐름은 내 의식의 흐름에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고, 사회가 나를 위해 선택해 놓은 객관적 운동 속으로 용해될 수도 있다. 나는 원하는 대로 따로 취해진 각각의 흐름에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고, 한꺼번에 취해진 전체 흐름에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다. 사실상 ‘안과 밖’으로 나누어지느냐 나누어지지 않느냐는 내 주의에 달린 일이다. 행성의 자전운동과 같이 그것들 모두가 내가 원하는 공통된 리듬(시계 시간)을 부과하는 것 또한 내 주의에 달린 일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지속이 나의 지속 안에 들어올 수 있지만 내 지속은 엄밀히 말해 어떤 지속도 포함하지 않는다.
4. 과학의 한계
철학이라는 안개가 걷히고 나면, 남는 것은 기계론이라는 뼈대뿐이며 과학은 이것을 ‘절대’라고 부른다. 이것은 고체다. 고체의 견고함이 나타내는 지반 말고 다른 어떤 지반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남아 있는 다른 반쪽은 단단한 지반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에 잠겨 있는 어두운 깊이다. 이러한 깊이 속에서 우리 경험은 시간적 생성을 지성의 체에 거르지 않고 단번에 생성의 내부에 자리한다. 그때 지속은 망실될 수 있는 경험 속에서 주어진다. 존재 속에 지속을 정초하는 근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즉 존재와 우리 사이에 놓인 무의 환상을 경유하지 않고 존재를 직접적으로 사유하는 데 익숙해진다면, 지속은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다.
지성은 시간을 보는 일에 등을 돌리고, 흐르는 것을 혐오하며 손에 닿은 모든 것읋 고체화한다.
과학하는 사람들은 객관화된 촉지각(능동적 촉각)에서 출발하여 물질을 설명하려 한다. 원자적 실재론과 이 실재론에 내포된 원소적인 입자의 관념은 운동과 운동이 수축되어 나타난 질 사이에 원자나 다른 원소들의 고체성을 개입시키는 아주 일상적인 습관이다. 따라서 고체성과 충돌이 갖는 외관성의 명백성은 실천적 삶의 습관과 필요에서 빌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이미지는 사물의 바탕을 전혀 규명해주지 않는다. 액체와 기체 상태의 연속성에 대한 실험을 통해 고체 상태의 환원 불가능한 성격을 논박하는 판데르발스의 작업(기체-액체이 변환 조건을 계산하는 상태방정식 발견자)을 검토해보자. 베르그손이 이를 통해 원자가 액체이거나 기체적일 수 있음을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베르그손이 강조하는 것은 실재를 고체적이지 않은 것으로 사유할 때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다.
예1)
톰슨: 그는 음극선 실험을 통해 전자를 최초로 발견했다. 전자는 음전하를 띤 입자이며, 원자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 발견은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기본 입자라는 기존 관념을 깨뜨렸다. 그는 또한 원자 모형을 제시했는데 그의 푸딩 모델(plum pudding model)은 양전하를 띤 "푸딩" 안에 음전하를 띤 전자(건포도)가 박혀 있는 형태였다. 비록 후에 러더퍼드의 실험으로 수정되었지만, 처음으로 전자를 포함한 원자 구조를 설명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예2)
패러데이: 그는 전자기 유도 Electromagnetic Induction가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이다. 자석을 코일 근처에서 움직이면 전류가 흐른다는 것이고 이것이 발전기, 변압기, 전동기 작동의 원리가 된다. 패러데이의 법칙Faraday’s Law이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기장이 전기장을 유도한다는 원리이다. 그리고 그는 전기와 자기의 통합 개념 제시했다. 전기와 자기 현상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이 업적은 나중에 맥스웰 방정식으로 수학적으로 정립되었고, 현대 전자기학의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전기화학에서 전기분해 과정의 정량적 법칙을 제시했다. 패러데이의 전기분해 법칙은 물질이 전극에 얼마나 침착되는지를 설명하는 법칙이다. 이를 통해 전하의 양자화 개념이 발전할 수 있었다 (나중에 전자의 발견으로 이어짐). 그는 또한 전기장과 자기장이라는 ‘장(field)’ 개념 도입했다. 당시에는 힘이 "작용점 간에 직접 작용"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장(field)’이 공간을 통해 힘을 전달한다는 개념을 제안했다. 이 개념은 현대 물리학의 기본 패러다임이 되었다. (예: 양자장 이론, 일반 상대성이론 등)
하지만 이러한 물리학에서 제시하는 이미지들-소용돌이와 역선-은 그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원자-물론 관념화 되었다 하더라도-을 더 잘 포착하기 위해 사용될 뿐이다. 물질적 공간이 관념적이라고 주장하건 실재적이라고 주장하건,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객관화된 촉지각‘의 산물로 남아 있다.
물리학은 모든 감관이 촉각을 향해 수렴하도록 만들어 저도 모르게 지각이 실천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해 주지만 그러면서도 촉각 자체에서 단지 촉지각의 추상적 도식만을 남기고 이 도식으로 외부 세계를 구성한다. 우주적인 연속성을 가장 잘 암시하는 물리학 이론조차 계속해서 어떤 무색무취의 지각에 의존하고, 이러한 무색무취의 지각이 고체성의 관념을 제거하는 경향이 있다 해도 그 고체성을 떠받치는 촉각적인 기원을 제거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못한다. 이 흐름, 이 운동들, 이 중심들은 그 자체가 단지 하나의 무력한 접촉, 무효의 추동력, 무색의 빛과 관계해서만 규정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이미지들이다. 과학적 구성물들은 언제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그 정확히 말하면 그것들은 만질 수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감각을 통해 지각을 설명하는 것(물질과 기억)과 고체를 통해 물질을 설명하는 것(창조적 진화)은 서로 대칭적인 두 가지 오류다. 두 경우 모두 오류는 손과 촉각을 사유의 기관으로 삼는 것이다. 그렇지만 더 본질적으로 보았을 때 손과 촉각은 사유의 적용 지점에 불과하다. 정신은 신체를 통해 적용점에 투입된다. 이때 육화된 정신인 지성을 방향을 틀어 반대의 방향, 신체의 방향을 채택한다. 지성은 신체의 리듬을 따라 진동하고 지각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지각을 연장하여 고체에 도달한다. 지성적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모든 능력이 이렇게 지성 위에서 재발견된다. 어떤 의미에서 지성이 이 능력들에 근거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지성은 물질을 자신의 하강운동에 동반시켜 물질이 지닌 고유한 공간화의 경향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역할은 바로 모든 지각을 촉각의 용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과학은 미소 고체를 통해 지각을 재구성한다. 마치 고체성이 우리가 가장 가깝고 가장 잘 조작되는 것이라는 이유로 물질성의 기원에 놓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과학의 영역은 측정의 영역이다. 철학과 과학 간에 그 어느 때보다도 긴밀한 협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철학에서 정확성의 개념이 올바른 용도로 사용되어야 한다. 정확성은 방법의 실무이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획득해야 될 대상이다. -이것을 어떻게 의심하고 부정하냐. 따라서 과학은 부정확한 정신의 하나인 것이다. -지성은 자연적으로 정확하지는 않다. 직관은 더더욱 그러하다. 지성은 정확성 없이도 살아 갈 수 있고, 실천적 사태에 대해서도 이론적 사태에 대해서도 언어 속에 축적된 기성 개념들의 근사치에 머무를 수 있다.
고대인들과 근대인들 사이의 진정한 차이는 시간을 독립변수로 삼으려는 열망이다. 수학에서 뉴턴이 시간을 변량으로 취급하여 다른 모든 크기를 시간에 결부시켜야 한다고 했을 때 일어났다. 이들은 이를 통해 고대인들의 정적인 과학을 동적인 과학으로 전환시켰다. 시간이라는 요소가 방정식 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방정식은 시간의 어떤 순간에도 적용 가능한 것이 되었다.
이 과학들은 점차 수학적 정밀성에서 멀어지고, 이 점증하는 간극은 사실을 해석할 때 직관에 점점 더 큰 자리를 할당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직관은 각각의 과학이 제시하는 사실들로 정확해질 것이고, 이 과학들과 함께 지속의 깊이들 속에서 하강할수록 강렬해질 것이다. 각각의 과학은 사유가 머물러야 하는 지속의 층을 가리키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철학은 과학에 대한 숭배로부터 과학을 떼어내고, 과학의 영역을 과학의 준거가 되는 정확성에 한정하려는 것이다. 과학이 이 영역을 벗어나 무의식적 형이상학이 사실들에 대한 과잉 해석을 통해 과학적 설명의 공백을 선험적으로 채우려 할 때는, 부정확성을 죄목으로 삼아 이러한 형이상학을 현행범으로 붙잡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정확성이 전부는 아니다. 과학들에 가능한 한 정밀해지기를 요구하더라도 그것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자임하는 것보다는 덜 정밀할 것이고, 언제나 일부의 초과분을, 아무리 정밀하더라도 하나의 간극을 놓칠 것이다. 이 간극은 과학의 계산을 통해 해소될 수 없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과학이 제시하는 사실들을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이를 직관적으로 다룰 권한을 가질 것이다.
직관의 고유한 대상은 결코 정확성의 표적이 되지 않는다. 직관의 대상은 정의상 정확하지 않은 것이기에 만에 하나라도 과학이 실재를 완전히 수학화하는 경우에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철학이 직관을 단번에 참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점진적으로 참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직관이 어떤 응용도 겨냥하지 않기에 과학의 정확성에 얾매이기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관이 정확하면서도 동시에 부정확하다고 말하는 데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직관의 한계를 통해서 직관만이 실재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다른 접근들은 한계를 규정하지 못하기에 진리값으로 적절치 못하다-
시간은 시간 계산을 도입될 수 있는 단순 인수 t가 된다. 시간은 자체적으로 그 자신을 통해 이해되지 않고 동일성의 범주에 포섭되어 동시적이라 여겨지는 두 시간 간격의 같음으로 정의된다. 그렇기에 운동체의 속도를 계산하려면 시간의 단위 t를 제공하는 기준 운동(예컨대 언제나 동일한 높이에서 동일한 장소로 떨어지는 돌의 낙하운동)을 선택한 뒤, 그것을 운동체와 비교하여 이 운동체가 특정 공간을 주파하는 데 드는 시간을 측정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측정된 시간은 운동체의 경로 동안 셀 수 있는 t의 수와 동일할 것이다. 등속운동이라면 운동체의 속도는 d/t일 것이다, 변속운동이라면 더 복잡한 조작이 필요하지만, 이는 단지 미분을 도입하여 속도의 증감에 맞는 더 정확한 척도를 얻기 위한 것일 뿐이다. 아무리 미분을 인간 정신이 사용한 가장 강력한 탐구 방식으로 높이 평가한다 해도 근대 수학(산출적이지 않은 형태의 계산)이 시간의 본성, 즉 운동의 운동성을 붙잡으려 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수학이 고찰하는 것은 언제나 잠재적 정지점들, 부동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간격을 상상하더라도 이 정지점들을 나누는 간격은 수학에 의해 다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간격을 생각하더라도 수학은 언제나 그 간격의 끝점에 위치한다. 간격 자체, 한마디로 지속과 운동에 대해 말하자면, 이것들은 필연적으로 방정식 바깥에 남아 있다. 시간을 인간이 생각하는 순간, 시간은 인간의 생각을 비켜간다. 이것이 지속이다.
간격은 언제나 환원 불가능하다. 시간 측정에 사용되는 공간은 상호 왜재적인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시간을 무수한 순간들로 산산조각낸다. 순간을 상징하는 점들이 인접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수간들도 서로 직접적으로 잇따를 수 없다. 점에 공간적인 인접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순간에도 시간적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적 순간은 오직 사건의 도중에서만 즉 dt라는 간격을 가로지를 때만, 직접적으로 선행하는 순간에 연결될 수 있다. 물리학자는 이 간격의 지속을 등한시하고, 더 나아가 간격의 구체적 본성을 무시한다. 그는 동시성들을 세는 데 만족하고, 동시성들을 가로지르는 흐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요컨대 시간을 잰다는 것은 잠정적으로 고정된 지속의 단위를 자체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이 단위들의 수에 주목하는 일이다.
기계론적 과학이 시간을 언제나 이미 하나의 수, 즉 t+n으로 만들어 지속을 회피한다는 사실이 이미 가정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의 관념이 분석적으로 공간의 관념을 포함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베르그손은 단위들을 셈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것들이 질적으로 동일하고 수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을, 즉 동질적인 동시에 불연속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 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단위들은 ’이념적 공간‘을 전제한다. 유지된 단위들은 이념적 공간 위에서 병렬되어 서로 더해짐으로써 수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 수는 그것이 공간 속에서 점유하는 자리를 통해서만 다른 수와 구분되고, 수의 적용 조건으로서 요구되는 동질성과 불연속성은 공간을 정의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여기서 환상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공간 속에서라기보다는 시간 속에서 셈하는 습관을 들였다는 사실이다. 잇달아 셈할 때, 우리는 분명 지속의 순간들을 셈할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원치 않는다 해도 여기에는 공간의 점들이 동반되어 셈을 위해 필요했던 시간을 차례로 삭제한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오류다.
사유의 능력을 조건 짓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과학의 수행의 조건은 공간에 있다. 과학이 미래 사건들을 예측할 수 있게 하는 예지는 시간을 표상 공간으로 전환할 때에만 가능해진다. 미래로 나아가는 것, 심지어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조차 이며 내 의식의 현재 속에 필연적으로 기입되는 있는 체험된 시간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우리를 과거와 미래로부터 분리시키는 간격 속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일이다. 간격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그것이 뒤이은 사건 속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실 과학도, 의식도, 공간 속에서 눈앞에서 펼쳐져 볼 수 있는 것만을 시간 속에서 예견할 수 있다.
우리가 셈하는 것은 간격의 끝점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고 살아가는 것은 간격 자체다. 내 의식에게 이 간격은 절대적으로 결정되어 압축 불가능한 것이다. 의식과 시간은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된 것으로 나타난다. 의식은 지속 속에 존재하며, 이 지속을 해체할 수도 처분할 수 없기에 자신이 그것을 만들어내지 않았음을 안다. 심리학이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이 지속이다. 의식은 간격을 채우면서 그 간격의 본성을 직접적으로 포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음대로 늘일 수도 줄일 수도 없는 내 지식의 몫이다.
시간을 완전히 그려진 직선으로 대체하는 일반적인 변형 작업은 사실상 시간의 흐름을 무한히 가속한 결과에 불과했음이 밝혀진다. 과학적 법칙을 적용하는 과학자는 실제로 간격을 제거하고 시간을 무한히 가속시키며, 실재의 지속을 부인함으로써 그 사이를 건너뛰는 것처럼 작업한다. 달리 말하면 베르그손이 허구적으로 악령에 부여했던 전능함을 과학자는 실제로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다. 악령에게 속았다고 여겨졌던 과학자가 악령의 선동자이자 대리인이었던 것이다. 기만당한 이가 기만자였음이 드러나고 방법론적 허구는 과학의 실재성 자체에 결부된다.
가령 천문학자가 월식을 예언할 때에는 우리가 악령에게 부여했던 능력을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 그는 시간이 열 배, 백 배, 천 배 더 빨리 가라고 명령한다.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의식적 간격의 본성을 변화시킬 뿐이고, 이 간격들은 가정상 계산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몇 초의 심리적 지속 안에 천문학적 시간의 여러 해, 심지어는 여러 세기가 담기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문학자가 천체의 궤도를 미리 그리거나 그 궤도를 방정식으로 표현할 때 행하는 조작이다.
엄밀히 말해, 시간 속에서 예견한다는 것은 이미 공간 속에서 보는 일이다. 사실상 모든 예건은 봄이다. 항성의 회합이 일어날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회합을 간략한 형태로 일으켜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래할 사건과 우리 사이에 놓인 간격을 단축시켜 즉시 그 사건에 도달한다.
어떤 차원도 갖지 않는, 하나의 점으로 환원된 세계를 상상해 보자. 이 세계의 질적 변화 전체가 동시적으로 주어지려면, 그 변화를 잇따르는 점들이 병치된 직선 위에 펼쳐 놓아야 할 것이다. 차원의 추가는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시-공간이라는 말은 우주가 보존된다. 표상될 수 있는 보충인 공간을 첨가함으로써 현재 지속하는 우주를 종착점의 예측을 통해 과거로 옮겨진 우주로 대체하는 작업을 의미할 뿐이다.
5. 뇌 과학의 한계
우리는 기억이 어디에 보존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공간에서 끌어낸 이미지들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물리화학적 현상들이나 뇌 속에서 일어난다고, 뇌는 신체 속에 있다고, 신체는 그것을 둘러싼 공기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완료된 과거는, 만일 그것이 보존된다면, 어디에 존재하는가? 기억을 분자적 변양의 상태로 뇌피질 속에 두는 일은 단순하고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할 경우에는 현행적으로 주어진 저장고를 갖게 되고, 이 저장고를 열기만 하면 잠재적 이미지들이 의식 속으로 흘러들어 올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뇌를 이러한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면, 축적된 이미지들은 어떤 창고 속에 저장될 것인가.
발명된 이미지들의 평면은 지각된 우주의 이미지를 그 또한 하나의 이미지인 뇌 속에 집어넣은 일의 부조리함과, 마찬가지로 축적된 과거의 이미지들을 뇌 속에 흔적의 형태로 집어넣는 일의 부조리함을 동시에 말해준다.
기억의 보존이라는 문제는 이미지와 동일시된 기억들에 대해서만 제기되고, 또 동시에 취소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뇌가 이미지들을 담고 있는 거대한 저장고라는 이미지로 환원되었을 때 어떻게 자신이 부착된 우주 전체와 함께 스스로를 보존하는 지 물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순수기억이란 더 이상 어디에 보존되는지 물을 필요가 없는 정신이다. 베르그손적 무의식과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차이는 바로 전자에 장소론이 없다는 데 있다. 더 이상 물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닐 때에도, 여전히 ’어디에‘라는 질문의 의미를 가질 것인지 확실할 수 없다. 사진 필름은 통 속에 보존되고, 축음기 음반은 칸막이 선반 속에 보존된다. 그러나 기억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사물이 아닌데, 왜 용기(容器)가 필요한 것인가? 기억이 어떻게 용기(容器)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기억이 보존되는 장소는 없다. 기억은 공간이 아니라 지속으로, 기억을 구현하는 이미지를 초과하기 때문이다.
6. 과학에 대하는 올바른 태도
공간은 지속을 전제한다. 지속이 없으면 공간은 부분들을 병치시키기에 앞서 그것들을 보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직접적이고 자생적인 의식 속에서 전적으로 순수한 지속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격렬한 분석‘과 ’반성‘의 노력을 요구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세계 속에 투사하여 본능적으로 우리의 인상을 고체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자아는 표면적이다. 표면적이라는 말은 경멸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통해 스스로의 표면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물러남과 분리가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리고 비반성적인 것에 대한 반성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해도, 이것만으로는 아직 풍분치 않다. 이러한 행위는 언제나 그 행위를 낳은 자아로의 회귀를 통해 소여의 직접성을 날조한다는 혐의를 받기 때문이다.
7. 베르그손이 내린 결론
물질의 중량에 짓눌린 생은 힘이라기보다는 속임이고, 생의 역할은 그저 물질적 힘들의 놀이 속에 특정한 경제를 도입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질적 힘들을 굴절시키기 위해 그 속에 침투하는 생의 시작부터 유효한 행동을 위해 물질적 힘들이 힘들 자신에 반하도록 되돌리는 지성에 이르기까지, 관건은 언제나 상대방 물질의 힘을 잘 사용하는 데 있다. 따라서 생의 약동이 지닌 유한성은 그 힘들의 소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유한성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으로, 그 운동의 제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생의 힘이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멀리 나아가기는 힘들다. 약동은 더 상장하기 위해 분리되어야 했고, 여러 방향 중에서 선택을 내려야 했다. 지각한다는 것은 주저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다. 물질은 현재의 급박함이고, 생의 어떤 방식이든 미결정 상태에서 떠나기를 요구한다. 요컨대, 물질은 생에 선택을 강제한다. 따라서 들뢰즈처럼 생을 긍정적인 분화와 현실화의 운동에 연동하는 일은 오류일 것이다. 생을 분기하는 계열들로 분화시켜 그 계열들을 따라 상이한 종들이 창조되도록 이끄는 것은 생의 역량이 아니라 무력함의 결과다. 분리의 운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분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리는 부정은 아니지만 긍정도 아니다. 생의 차이는 제한이다.
원인은 무대 뒤쪽의 초월적인 배후 세계에서부터 자신이 우월적으로 포함하고 있었던 결과들을 세계라는 무대 위에 쏟아내는 것이 아니다. 원인은 실제로 결과와 동일한 세계에 속하는 원인이고, 자신이 생산한 결과들에 반작용하며, 스스로 창조됨으로써만 창조를 행할 수 있다
베르그손에게는 부정이 없다. 모든 중단은 역전이다. 긍정에 반하여 작동하는 부정은 모두 자동적으로 반대 방향의 긍정으로 작동한다.
인격의 탄생에는 이 노력이 일으키는 본질적인 피로가 동반되고, 어떤 이들에게 이 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병리적인 이상 현상은 인격의 붕괴가 아니라, 최초의 균형을 복원할 수 없는 경우 다른 균형을 재수립하기 위한 자연의 응답을 나타낸다. 미래를 향한 약동은 ½mv²이라는 식으로 표현되는 역학의 운동에너지에 비유해 보자. 자기 존재에 피로를 느끼는 인격은 자신을 구성하는 추동에 요구되는 노력을 경감시켜야 한다. 이때 인격은 미래로 던지는 과거의 질량을 감소시키거나(기억의 장애:기억상실과 이중인격) 동일한 질량을 미래로 투사하는 추진의 속도를 감소시킨다.(의지의 장애: 후에 분열증이라는 불리는 정신쇠약)
하지만 질병이란 치유의 시작이다. 인격성의 질병은 개체의 통일성에 반하는 특성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인격성의 해리 증상이라는 여겨지는 것들은 대부분 그저 인격적 통일성이 정신적 독성에 저항하는 작용일 뿐이다. 이로서 인간이란 결국 자신이 바라보는 구경거리다.
Ⅱ 복음적 평
책 579페이지에서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한다.
“의식을 통해 나 자신을 붙잡으려 할수록, 나는 내 과거의 총체화, 혹은 총괄과 같은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과거가 행동을 위해 수축된 것이죠. 내가 보기에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아의 통일성‘은 주의의 노력을 통해 나 자신이 수축되는 어떤 첨점, 혹은 꼭짓점의 통일성과 같은 것입니다. 이 노력이야말로 생 전체에 걸쳐 계속되는 것, 생의 본질 자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즉 베르그손은 자기로 수축되어 형성된 중심축됨을 포기하지 못한다. 아무리 자신과 그것을 둘러싼 자연 환경을 관찰하고 인류역사상이 나타난 각가지 의견들을 분석하고 검토해봤자 도리어 자신에 관해서는 더욱 날카로워진다. 그런 본인은 지금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그는 출구를 말하지 않는다. 그냥 노력과 몸부림을 제시한다. 그의 논리는 이미 부활의 세계에 미리 도달한 자의 자유함이 아니다.
지옥은 이렇게 꾸준히 무르익었다.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