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개 입자
서울강의20250417a 요한일서 4장 1절(매개 입자)-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4장 1-3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이 말씀을 우리가 이야기하려면 여기 나오는 몇 가지 단어에 대해서 관심사를 갖고 있어야 됩니다. ‘영’이라는 단어 나오고요, ‘거짓 선지자’ 나오고, 그다음에 ‘예수 그리스도’ 나오고, 그다음에 ‘하나님’ 나왔어요. 초반부터 제가 문제를 던지면 이렇습니다.
요한일서 4장 1절에서 3절까지인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영’이라든지 ‘거짓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이것이 의미 있겠습니까? “영,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 여기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까? 도를 아십니까, 뭐 이런 거요. 이런 거 알고 싶습니까?” 물었는데 “아니요.” 한다면, 이 말이 무슨 효과가 있습니까? 없죠.
그렇다면 그다음 질문, 여기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럼 어디에 관심 둡니까? 그 점에 대해서 3절에 나옵니다. 그 점에 대한 단어가 나와요. ‘세상’. 영, 거짓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 이런 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여기에 관심이 없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되게 비중 있게 관심을 두는 분야가 있어요. 요한일서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상에 관심 두고 산다’는 겁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세상에 관심 두고 산다.’ 세상에 관심 두고 사는 것에 대해서 지금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말하기를,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무리한 요구에요. 세상에 사는 사람이 세상에 관심 두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죠.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하고 물어보게 되면 거짓 선지자, 또는 적그리스도가 이미 세상에 출몰해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 관심 있으려면 이 세상에다 거짓 선지자, 적그리스도를 집어넣어서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 거짓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적그리스도 여기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세상을 보는데 이 요소들을 빼고 세상을 보는 거예요. 그 요소들을 빼고.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영과 거짓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적그리스도 여기 관심을 두는 사람 있잖아요, 여기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관심 있어야 된다, 없어야 된다? 뭡니까? 여기에 관심 두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관심 있어야 된다, 없어야 된다, 둘 중 어느 거예요? 관심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관심 있어야 돼요.
미스터 빈이라는 영국에 유명한 코미디언이 있는데 그 코미디언이 돈으로 하면 백억이 넘는 영국의 미술품을 미국에 전시하기 위해서 들고 가요. 그런데 미스터 빈이라는 코미디언이 심심한 걸 못 참거든요. 그게 할머니가 옆으로 앉아있는 그림인데 뭘 하다가 자기가 실수해서 그림에 튀었어요. 보니까 원화가 좀 훼손됐잖아요. 훼손되니까 훼손된 그걸 안 들키려고 붓을 가지고 자기가 거기다 덧칠을 했는데 이게 더 망쳤어요. 나중에는 그 할머니 코가 뭉개지고 도저히 못 볼 지경으로 된 겁니다.
그럼 그 미스터 빈이라는 코미디언이 명화의 가치, 명화가 얼마짜리냐, 얼마나 예술적으로 아름다우냐 그런 데에 관심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가 한 일에 관심 있어요? ‘이거 들키면 안 되는데.’ 여기에 관심 있죠.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세상을 볼 때 ‘내가 세상에서 여유있게 행복하게 난 착실하게 산다.’ 여기에 관심 둘 거냐? 아니면 이런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가 네가 관심 두는 이 세상에 벌써 나타나서 활개치고 있다는 그런 것을 고려하고 감안해서 관심 둘 거냐?’고 묻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적그리스도가 뭔데? 물을 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아는 세상에 대해서 내가 미처 모르는 요소가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이왕 세상사는 거 세상에서 말썽 없이 어려움 없이 힘들지 않고 편안하게 살면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겠다. 오케이. 넓히는데 그럼 적그리스도가 뭐냐?’ 이렇게 물을 거잖아요.
그럼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적+그리스도에요. 적그리스도를 알려면 뭘 알아야 돼요? 그리스도를 알아서 그리스도에 반대하는 것이 적그리스도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나는 영, 이딴 거 모르겠고 나는 교회도 안 다녀서 모르겠고 나는 이 땅에서 내 할 일만 하고 그냥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소원입니다. 이런 개념에 대해서 나는 아예 거부합니다.’라고 나왔을 때 사도 요한은 뭐라고 하느냐?
네가 생각하는 세상이 적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렇게 좋은 세계가 아니고 이것은 위험한 세계라고 알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왜 위험하냐? 적그리스도가 여기서 지금 벌써 활동을 개시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거예요. 그럼 위험하니까 이 세상에 관심 두는 사람은 이 적그리스도를 파악해서 멀리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겠죠.
그러면 적그리스도가 뭔데?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에 반대하는 게 적그리스도다. 그럼 그리스도가 누군데? 이렇게 된단 말이죠. 그리스도가 누군데? 하는 그 순간, 이 사람은 ‘그리스도가 누군데?’ 하는 데까지 나가질 않아요. 왜냐하면 사람이 그리스도에 관심 두는 순간, 이 세상에 관심 두는 나의 의미는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날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차라리 적그리스도 모르고 그리스도 모르고 하나님 모르고 거짓 선지자 모르고 영 모르고 그냥 내가 이 세상에서 내 한 몸 편안히 사는 거, 나는 여기에 그냥 굳힐래. 나는 이렇게 살래.’ 그렇게 등장한다면 성도로서 그 사람에게 뭘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3절에 나와요.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은 어디에 속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에 푹 빠져있는 사람, 요한일서 여기에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당신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 하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께 안 속해도 괜찮아, 나. 하나님께 속하기 위해 환장하고 그런 거 내 취미에 안 맞아. 내 취미는 그냥 세상 속에서 편안하게 그냥 아는 대로 배운 대로 세상 사람이 되어서 살아가는 그게 나의 전부다.
Let it be. 그냥 나대로 살래. Let it go, Let it go~ 있잖아요. 복음이고 뭐고 좀 하지 마. 도를 아십니까, 그 소리하지 말고 그냥 세상에 사는 대로 내버려 둬, 좀. 내비 둬. 그냥 내버려 둬. 나 이런 거 딱 골치 아파.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자. 너는 성경공부 하든지 말든지 난 모르겠고, 그 시간에 난 세상에 관심 있다. 지금 LG가 1등인지 2등인지 그게 문제고, 다음 투수가 누구냐 그게 문제다.
그런 사람을 보고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3절에 의하면,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했다고 이야기하죠. 제가 지금 시비 거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이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에 관심 있습니까? 지금 실컷 욕을 한 게 뭐냐 하면 세상에만 마음 두고 성경은 일체 그딴 거 몰라도 된다는 사람 욕했잖아요.
그 사람에게 이야기할 게 결국 뭐냐 하면 “당신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했습니다.”는 그런 판결을 줘도 “그래, 알았어. 너희끼리나 잘 속해. 나는 안 속하는 게 편해.” 이렇게 배짱 튕기고 나갔을 때,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답게 그들과 어떤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나 요한일서 빨리 알고 싶어 미치겠어.’ 이렇게 관심 둡니까? ‘나는 세상 사람들이 아는 세상 말고 성경말씀에 의해서 이 세상에 무슨 불결한 것들이 섞여있는지 난 궁금해 미치겠어.’ 그런 데에 평소에 목숨 겁니까? 매일같이 그렇게 살지는 않죠. 불현듯 ‘성경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이 불현듯 올라오면 그건 보통 복이 아니에요.
말씀의 특징은 잠자는 자를 깨우는 겁니다. 깨우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깨우는 거예요. 깨봐야 또다시 잠들겠지만, 어쨌든 간에 순간적으로 깰 때가 있어요. 말씀에 대해서 감각이 살아나고 반응을 보이는 아주 희귀한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걸 바로 ‘영(靈)’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
‘영을 알자. 성령을 알자.’가 영이 아니에요. 성령을 알자, 영을 알자, 하나님을 알자, 예수님을 알자,라고 하는 것은 어떤 심보가 깔릴 수 있느냐 하면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이 세상 사는데 세상에 대해서 좀 더 잘 알아야 그만큼 나는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지 않느냐.’라는, 자기가 편안하게 살고 싶은, 그렇게 실패 없는 인생을 내가 확보하기 위해서 그러한 태도로 나설 수가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조차도 뭐냐? 세상을 자길 위한 세상인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은 살았고”라는 말씀이 나와 있죠, 성경에. ‘말씀은 살았고 네 안에 역사하느니라’ 그런 이야기 있죠. “말씀은 살았고” 그다음에 히브리서 4장에 보면 거기에 운동에너지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이 운동력이 있다면, 그럼 말씀이 영으로 오셔서 나를 깨운다면 그 순간 주도권은 말씀에 있습니까, 나한테 있습니까? 말씀에 가 있죠. 그럼 세상에 대해서 보다 세상을 말씀대로 잘 알아서 내가 이왕 세상사는 거 제대로 실패 없이 보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겠다는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 주도권은 하나님한테 있는 거예요, 자기한테 있는 거예요? 결국 자기한테 있는 거죠.
그러니까 주도권이 성령에 있어서, 그러니까 성령은 바람같이 불잖아요, 바람이 주도권을 갖고 있어서 나를 깨울 때 결과적으로 요한일서 4장이 새롭게 해석되어야 되는 거예요. 이 해석을 내가 해서 바르게 살겠다는 그러한 의도는 포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포기해주시기를 바라요.
하나님께 속했다는 그것은 요렇게 노력하면 하나님께 속한 걸로 하나님께서 허락해준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자는 어떤 일이 발생되든 그건 하나님 소관이지, 그건 내 소관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영을 받은 사람의 특징, 이제 슬슬 중요해 보이는 거 나오죠, 중간 중간에 중요한 것은 크게 써야죠. ‘영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어떤 책임도 자기에게 짐 지우지 않는다.’ 어떤 책임도. 정말 무책임한 사람이에요, 정말 무책임한 사람.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이에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에요. 요한일서에서 계속 하나님께 속한 것과 이 세상에 속한 것 간의 간격을 만들어놨어요. 떼어놨어요. 둘을 떼어놨다고요. 전혀 다른 두 개의 세계가 따로 형성되었다고 요한일서 전반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냥 보면 되죠. 요한일서 4장 5-6절,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죠.
5절을 다시 보면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되어 있죠. 여기 ‘세상’에 ‘하나님 세계’를 집어넣으면, “저희는 하나님(세계)에 속한고로 하나님(세계)에 속한 말을 하매 하나님(세계)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이렇게 되겠죠. 그렇죠?
그러면 이걸 한꺼번에 단박에 정돈시키는 말은 그겁니다. ‘주도권’. 주도권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책임도 자기에게 짐 지우지 않는다.’가 성립되는 거예요. 만약에 ‘아휴, 내가 그런 일 해서는 안됐는데. 왜 그런 죄를 지었고 실수를 했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어요? 지금 죄지은 나의 상태를 내가 파악해서 어떤 상태로 나를 돌리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그 죄가 없어진 그 상태가 되는 그런 나를 내가 그리워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소원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영화(<배드 타임즈: 엘 로얄에서 생긴 일(Bad Times at the El Royale)>, 미국, 2018)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월남전에 가서 사람 123명을 죽였어요. 베트공을 죽였단 말이죠. 그 사람이 제대하고 난 뒤에 호텔 매니저로 취직이 되었는데 아무리 거기서 보람을 갖고 호텔 매니저 활동을 하고 열심히 일해도 내가 사람 123명 죽였다는 자기 존재의 무게, 죄의 무게가 너무 견딜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호텔에 신부님이 오셨어요. 신부님이 오시니까 그 매니저가 다른 데 뭐 관심도 없어요. 그 신부를 붙들고 제발 이 무거운 죄를 용서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그 신부는 가짜 신부에요. 자기 동생이 호텔 5호실인가 거기에 강도질했던 돈을 마루 뜯고 숨겨놨는데 그 거액을 얻기 위해서 신부 복장으로 위장해 들어온 가짜 신부에요.
그래서 그 사람이 ‘난 진짜 신부 아니고 가짜 신부입니다.’라고 월남전에서 123명 죽인 그 매니저한테 숱하게 이야기했어요. 그 매니저 하는 말이, 그건 난 모르겠고 나의 소원은 당신이 내 죄를 신부의 자격으로 용서해주면 좋겠다는 거예요. 결국 마지막에 총에 맞으면서 같이 있는 사람한테 부탁해가지고 그 가짜 신부가 진짜 신부행세를 합니다. “내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이제는 내가 너무나 통회하면서 회개하고 내 죄를 아뢰오니 신부님 말씀해주세요.”하니까 그 가짜 신부가 “이제부터 너의 죄는 다 사했느니라”라고 해요. 그러니까 그 소리 듣고 123명 죽인 그 사람이 죽어가면서 이제 편안히 눈을 감고 곱게 죽을 수 있다는 영화에요.
자, 자기 죄 회개하고 사함 받은 그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까? 말도 안 되죠. 그 사람이 자기가 예전에 성당 다녔기 때문에 천주교에서 죄를 어떻게 사한다는 것을, 그 방식과 시스템을 알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그냥 시스템이다. 그게 뭐 별 거라고.’ 했는데 막상 자기 마음에 큰 짐이 있으니까 ‘가짜라도 좋으니 내 짐만 옮길 수 있다면 당신이 가짜 신부든 진짜 신부든 나는 전혀 개의치 않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당신이 진짜 메시아든 아니면 적그리스도든 거짓 선지자든 참 선지자든 거짓 영이든 나는 그런 거 모르겠고, 중요한 것은 내 죄가 사해진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합니다.’라는 것이 바로 이 세상 구성 요소의 일부로서 이 안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볼 때, 소위 교인들이 세상에서 발 뗀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제 여러분 아시겠죠?
천주교?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진심어린 회개를 하고 용서의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어여삐 여겨서 너의 죄를 사한다, 교회에서 이 말을 해요, 안 해요? 기도원에서 이 말합니까, 안 합니까? 하죠. 그동안 당신이 죄 용서 못 받은 것은 진심어린 회개가 안 되었기 때문에 깊은 회개를 하면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용서해준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무슨 면이 날아가느냐? 절단면이 무효화돼요. 절단면이 무효가 됩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눈치를 보니까 못 믿겠다는 이야기 같은데… 여기 요한일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되어있죠. 자, 그럼 이제 문제 나갑니다. 형제를 위해서 우리 목숨을 바치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입니까? 아니죠. 아니면 아닌 이유를 대세요.
아닌 이유가 이래요. ‘남 혹은 남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있어 하나님께서 나의 목숨을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음에 대해 내가 기꺼이 동의합니다.’는 뜻이에요. 남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내가 거기에 투입된다면 그 영혼을 구원하는 데 있어 내 목숨은 전혀 하찮은 거고 내 몫 챙길 수도 없고 내 위신, 체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할지라도 그게 뭐가 대수냐 이 말이에요.
내 사정을 왜 봐주는데? 타인의 목숨을 위해서 너는 기꺼이 희생하는 게 마땅하니라. ‘마땅하다’는 말이 뭔 뜻이에요? 그건 당연한 레시피 아니냐 이 말이죠. 라면에 스프 넣는 게 당연한데. 라면에 스프 넣는 거 맞죠? 그런데 스프는 찔찔 짜면서, “라면 맛있게 되는 건 좋지만 나는 뜨거운 물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그럼 나는 어디서 본전 찾아?”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기를, “네 생각이 왜 거기서 나오냐?”
그 말을 제가 아까 한 말로 달리 하면,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도 내가 나한테 짐 지울 필요 없다. ‘내가 어떤 일을 해도 나는 잘못이 없다’ 그런 뜻으로도 이해되지만 그런 뜻만 이해되는 게 아니고, ‘내가 남한테 이용된다 할지라도 본전 찾는다는 것은 나한테 있을 수 없다’ 그런 말로 생각하면 돼요.
남이 더 살든 내가 미워하는 원수가 더 살든 내가 더 살든, 졸지에 내가 일찍 죽는다면 그게 왜 내가 신경질 낼 일이냐 이 말이죠. 왜 자꾸 내 본전 찾기와 자아의 내 목숨 어디까지냐, 왜 그런 생각을 자꾸 굴리느냐 이 말이죠. 제가 이 문장을 쓴 이유가,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몇 년을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한 80? 90? 지금까지 몇 년 산 지 모르겠지만, 그 삶 동안에 우리의 정신 무게의 질량이 그렇게 무거워진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착한 일하는 건 좋은데, 내게 돌아올 내 몫은? 그럼 내가 챙길 내 이익은?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요, 나는 주도권이 나한테 있기 때문에 내 어떤 행동에 대한 그 결과는 내가 책임지고 내 것으로 추수를 해야 되겠다는 거예요. 바보 등신같이 손해만 보고 그렇게는 못살겠다는 거예요. 잘 이해하셨죠? 그게 바로 세상입니다. 그게 바로 세상이에요.
이 세상에 관심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한테 관심 있지, 세상에 관심 있지 않습니다. 끝까지 내 인생이기 때문에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아무도 내 인생에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것에 철두철미한 신봉자에요. 자기가 자기에게 엎어지는 교주도 되고, 자기에게 유일한 충성된 신자가 자기에요.
그런 자에게 요한일서 4장에 “여기 영들을 봐라. 거짓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 적그리스도 나오는데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나 거기에 관심 없어.” 다른 말로 하면, 나의 관심은 나에게만 있어. 이게 바로 ‘세상’이고 그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요한일서 말씀은 교회에 다니고 교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를 받아도 여전히 그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증거는 뭐냐? 자기 인생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지는 것, 그러한 의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의 정신적인 무게감이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세상에 속한 사람 이야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 이야기해야죠, 하면, 예, 하나님께 속한 사람 이야기해드릴게요. 세상에 속한 사람은 자기한테 관심 둔다. 오케이. 그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예수님’과 ‘성령’의 ‘관계’에 ‘끼어든’ 사람입니다.
예수님, 주도권자. 이걸 두 자로 줄이면 ‘주여’ 또는 ‘주님’ 되죠. 성령님도 주도권자에요. 성령님도 ‘주 성령께서’ 이렇게 하죠. 성령님도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이죠. 그러니까 주도권을 갖고 있는 분들 속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여기 끼어들게 되면 끼어드는 순간 자기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에게 주도권이 없는데 자기 일이 없죠.
그러면 예수님과 성령 관계 속에 끼어들었다는 이것을 아주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매개 입자’라고 합니다. 매개 입자. 보통 과학에서 많이 하는 이야기인데, 매개 입자. 매개한다. 그냥 연락책.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성령, 성령은 우리를 통해서 주님. 주도권은 예수님과 성령이 갖고 있는데 여기에 매개 입자로 그냥 심부름꾼으로 끼어드는 거예요. ‘내 인생은…’이란 것은 여기선 용납이 안 되죠.
우리가 주님한테 끼어들면 되잖아요, 이렇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으로서 늘 연락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끼어든 자리가 ‘예수님께 끼어든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이 성령님께 지시를 내린 그 활동 속에 우리는 여기서 끼어드는 거예요.
끼어들 때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니까, 연락하니까 ‘매개’.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개체니까 ‘입자’. 합해서 하나의 ‘매개 입자’라 하는 거예요. 시켜만 주이소, 이런 거죠. ‘시켜만 주이소.’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질 게 없기 때문에.
‘매개 입자’라는 말을 굳이 제가 쓰는 이유가 힉스 입자라는 게 있어요. 힉스 입자(Higgs particle, Higgs boson: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에 따르면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입자의 하나로 스핀이 0). 물리학에서 질량을 처음으로 만들어내는 입자가 힉스 입자에요. 걸쭉한 젤리 같은 그러한 에너지의 공간에서 어떤 저항을 느끼는데 그 저항이 질량이라는 그런 이론입니다.
질량이라 하는 것은 에너지의 저항을 수치로 나타내는 것이다, 시공간 내에서. 그렇다면 힉스 특징이 뭐냐? 남을 질량 있게 하기 위해서 본인은 매개 입자기 때문에 질량이 없어요. 매개 입자가 질량이 없어요.
“네 정신 무게, 마음 무게가 얼만지 저울에 달아보자.” 해서 달아보니까, 0. “내려가, 내려가. 그럼 너는 활동이 뭐냐?” “주님의 일하고 성령의 일을 합니다.” 이거죠. 내가 주님이 아니고 내가 성령은 아니에요. 그러나 예수님을 드러내고 성령을 드러내는 매개 입자로서의 부름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매개 입자가 질량이 없으니까 성도를 매개 입자로 쓰기 위해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성도의 마음의 질량을 박탈해야 되겠죠. 박탈해야 돼요. 박탈하는 방법이 예수님께서 요단강 세례 받을 때 그때 하늘에서 누가 내려오셨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오셨죠.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예수님 고유 질량이 박탈되게 했어요. 박탈하고 아버지와 예수님의 말씀의 관계만 남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했습니다.
박탈하는 마지막 박탈 장면이 바로 겟세마네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내용은 잔을 잔 되게, 쓴잔이 쓴잔 되게 되기 위해서 그 쓴잔에 대해 예수님 자신이 어떠한 저항을 갖지 않도록 성령께서 힘을 주신 거예요. 저주의 잔을 마셔야 된다는 그러한 아들의 역할에 대해서 아들 본인의 저항이 거기에 방해 놓지 않도록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신 겁니다.
그 저항력이 얼마나 센지 예수님의 땀이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진다 했어요(눅 22:44). 죄 있는 육신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발심은 그만큼 지독한 거예요. ‘이 쓴잔을 마시는 건 좋은데, 그럼 나는? 내게 돌아올 이익은?’ 이거 생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하겠죠.
예수님이 가졌던 육신을 지금 우리가 입고 있잖아요. 입고 있으니까 성령께서 영에 속한 자, 오늘날 우리를 어떻게 만들어요? 우리를 매개 입자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무엇을 삭제시키고 박탈합니까? 우리에게 어떤 책임이 주어지지 않도록 박탈하는 거예요. 박탈.
박탈한다는 말을 제가 잠시 바꾸겠습니다. 박탈한다는 말을 박피로 바꾸겠어요, 박피. 박피라 하는 것은 피부 확 밀어버리는 것. 이거 야매로 하면 안돼요. 야매로 하면 나중에 얼굴 벌겋게 됩니다. 진료는 의사한테. 야매로 하지 말고 돌팔이한테 하지 말고. 한 달 지나도 벌건 게 안 가라앉아서 마스크 쓰고 교회와요. 50, 60대가 되면 여자 분들이 “박피 어디서 하셨어요? 피부 좋으네.” 이런 소리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날 것이 그렇게 좋을 수도 있어요.
하여튼 박피를 해야 의미가 없어져요. 내 의미가 없어진다고요. 그럼 박피를 어떻게 하느냐? 그게 궁금하잖아요. 박피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죄 있는 육신에 법(의식)이 들어있어요. 법. 선악체계인 법이 들어있어요. 이게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거예요, 법이.
제가 아까 안양강의에서 한 것 기억나시죠. 법이 있으면 내가 타인을 이길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해요. “너 법 지켰어, 안 지켰어? 못 지켰지? 나 법 지켰어. 그러니까 나는 의롭고 너는 나보다 못났어.” 그러니까 이게 뭡니까? 나에 대한 내 책임을 다한 거고 내가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을 챙기는 거예요. 이익을 챙기는 거거든요.
그러면 질량이 없어지는 게 아니고 점점 더 잘난 체가 계속 적금 붓듯이 쌓이는 거예요. 잘난 체 통장이 서른 다섯 개에요. 내가 과거에 이렇게 잘났고 유치원 때 이렇게 잘났고 국민학교 때 이렇게 잘났고, 전부 다 잘난 체한 과거 일기장이 수북하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다 20대에는 죄 회개한 그것도 또 어떻게 됩니까? 죄를 회개하면, 법이죠,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이 사해준다.’ 이게 하나의 법의 문장이 되어버리죠. 이걸 하게 되면 이런 결과가 반드시 따라온다는 법체계죠. 율법에서 벗어나야 돼요, 안 그러면 율법대로 살아야 됩니까? 이걸 묻는 것이 여러분한테 큰 실례인 것을 제가 너무 잘 압니다. 어제 안 그래도 방송 중단돼서 얼마나 미안스러운지….
갈라디아서 2장 한번 봅시다. 2장 18-19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왜 내가 주님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겁니까? 그것은 단독적으로 내가 의로운 존재인 것을 확인하고 싶을 때 법이 없으면 ‘법 지켰다’가 안 되니까 내가 의로울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 법을 세우는데, 여기 18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 율법을 헐어버렸다 이 말이죠. 주님은 율법을 헐어버렸고 인간은 율법을 세우고, 지 잘난 체하려고. 이게 어떻게 성도가 될 수 있느냐 이 말이죠.
예수님이 율법을 헐어버린 방법이 뭐냐 하면 그 율법에 의해서 본인이 돌아가셨던 거예요. 그 방법이에요. 율법 필요없다,가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로 규정되는 것으로 더 이상 율법이 주님한테 또는 성도한테 뭐라 할 수 없는 다른 영역, 차단된 또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겁니다. 율법이 작동하는 세계 말고 법이 작동하는 세계 말고, 율법에서 벗어난 자들끼리 따로 모이는 세계가 예수님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거예요.
따라서 자기한테 정신적인 무게가 없는 게 분명한 이유가, 법이 있어야 내가 자꾸 누적이 된 내 잘남이 있는데 그 잘남이 더 센 율법에 의해서 이게 전부다 죄로 드러난 거예요. 착하다, 착하다, 더 착한 것 없나? 아니, 이것보다 더 착한 것 없나 하다가 결국은 더 센 율법에 얻어맞아가지고 ‘너는 저주받아 마땅해’라는 평가를 받고 꼼짝없이 저주받아버렸다 이 말이죠. 저주를 이미 받아버렸잖아요.
회개했습니까? 내가 율법 회개해서 저주에서 벗어난 거예요? 아니에요! 회개와 상관없이 그냥 우리를 도끼로 이마 까라는 식으로 율법이 우리를 죽여버려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회개해서 옛날처럼 다시 깨끗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어떤 방안이 율법 법 안에서는 그게 성립 안 되는 거예요. 성립될 수가 없어요. ‘율법 지켜서 율법에서 벗어난다’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갈라디아서 사도 바울의 복음이에요.
19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끝났죠. 나는 뭐했다? 죽었다. 누가? 율법이 나를 죽였다. 그러면 율법으로 나를 죽게 하신 그분이 나를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만들었다. 그럼 율법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주도권은 누가 갖고 있습니까? 주님,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고 나한테는 주도권이 없죠. 주도권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아직도 내가 나한테 책임지고 내 인생은 내 관리 하에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우긴다면 그런 사람은 이 매개 입자가 될 수 없어요. ‘주님, 내가 이렇게 전도할 테니까 헌금할 테니까 주님은 나한테 뭐 주겠습니까?’ 이런 거래하는 식으로 종교생활을 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 바칠 테니까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겠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약속이잖아요. 죽도록 충성하라. 그럼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 했으니까 주시겠어요, 안 주시겠어요?’ 이렇게 윽박지르고 닦달 내듯이 주님께 달려드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죽지도 않으면서 성경을 이용해서 자기 방식으로 자기가 책임지고 살려는 이것들을 요한일서 4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걸 ‘적그리스도’라 해요. 그게 바로 거짓 선지자에요.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무엇의 박탈, 박피가 일어나지 않아요? 내 속에 있는 법의 여러 가지 형식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쉬운 예로 골조, 철근 골조라고 보면 돼요.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교훈과 계명과 지시가 하나의 철근으로 골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엄마가 이야기했어.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이건 반드시 지키라했어.’ 이런 게 어릴 때부터 남아있다고요. ‘다른 건 나한테 안 그랬는데 외출해서 돌아오면 반드시 집에서 손 씻으라 했어. 손 씻어야 돼.’ 또는 목사 가정 같으면 ‘어떤 경우라도 식사 앞에서는 식사 기도해야 돼.’ 이런 것들이 내 안에 자아가 이루는 골조가 돼요. 뼈대가 돼요.
뼈대가 되고 거기서 콘크리트를 쳐버리면 그게 나의 자아상이 되는 겁니다. 법대로 살았다, 그래서 칭찬받았다는 그 의로움이 누적되어버리면 그것은 내 자아라는 내 집이 되는 거죠. 아주 자랑스러운 내 집이 되죠. 그렇게 내 집이 되게 되면, 율법이 그대로 살아있고 나의 의가 살아있는 그 속에 누가 작용하는가? 바로 거짓 영과 적그리스도가 작용하니까 아까 하는 말씀처럼 이 세상에는 누가 작용한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작용한다는 그 사례가 되는 거예요. 하나의 예가 되고 샘플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4장 6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렇게 구분하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성령님의 관여 하에 예수님이 뭐를 통과했습니까? 모든 이 세상의 유대인 법체계, 그 철근 구조를 통과했죠. 통과하고 마지막에 통과한 것이 뭐냐 하면, 율법을 다 이루었잖아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된다는 모세 율법의 그 핵심요소, 그 어린 양이 되셨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과 성령 사이에서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성공하도록 했죠. 이제는 차례가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완료한 그 성과를 가지고 성령에게 지시를 내려서 성도들이 예수님과 성령의 영광 받은 여기에 매개 입자로서 참여하도록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직접 오시는 겁니다.
이렇게 매개 입자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예수님께 갈 수 없는데 성령이 와서 도와줘서 예수님께 간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성령은 필요할 때만 써먹고 나머지는 발길로 차버리는 경우가 되죠. 지금 예수님하고 나하고의 관계처럼 생각하는데 성령과 예수님 사이에 그런 관계는 없어요.
아버지의 영으로서 예수님이 관여했다는 말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예수님을 사용했다면, 지금은 예수님의 뜻을 위해서 우리가 사용되기 때문에 예수 믿어서 구원 얻겠다는 내 나름대로의 이득과 내가 할 내 책임은 다 했다는 그런 의식은 성령님에 의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박탈되어야 되겠죠. 그것은 박피되고 제거되어야 됩니다. (율)법적인 요소를 성령이 와서 다 샅샅이 끄집어 당기시는 거예요.
이것만 하고 10분 쉽시다. 어떤 모텔에 갔는데 그 모텔 투숙객이 호텔이나 모텔에 있는 도청장치를 있는 대로 다 뽑아가지고 책상에 열댓 개 놓았다 칩시다. 그러면 그 도청장치를 하나의 율법적 골조로 보는 거예요. 왜? 법이 있으면 자연적으로 우리가 뭐가 되기 때문에? 나의 의가 계속 생산되겠죠.
성령께서 그걸 어떻게 합니까? 다 뽑아내죠. 다 뽑아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정신적인 질량을 0으로 만들어요. 0으로 만들죠. 만들면 뭐합니까? 세상에 나가면 똑같이 법적으로 하다가 또 누구한테 걸리죠? 성령한테 걸려가지고 또 뽑히죠. 우리 속에 있는 법적인 골조가 있는 대로 싹싹 다 뽑히면서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50417b 요한일서 4장 1절(매개 입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매개 입자했죠. 매개 입자의 특징이 뭐라고 했죠? 질량이 없다 했습니다. 자기한테는 질량이 없고 남에게 질량을 부여하는 기능이에요. 힉스 입자가 그런 기능을 한다고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데, 그럼 내가 없다면 예수님 안에서의 나는 어떻게 구성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죠.
그것은 간단해요. 말씀으로 재구성합니다, 우리 자신을. 말씀으로 재구성해요, 말씀으로. <오페라의 유령(Phantom Of The Opera)>이라는 뮤지컬을 제가 보지는 않았는데, 그 뮤지컬에 나오는 유령이 얼굴에 쪼깨진 가면 하나 쓰고 나오죠. 이걸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가면 있잖아요, 물질로 만든, 사물로 만든 가면 쪼가리, 그것도 얼굴 일부를 가리는 쪼가리 빼놓고 나머지 다 귀신이라면? 유령이라면?
그래도 그 사람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가면 때문에.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몸체를 보이는 형식으로 일부 드러내는 것, 이게 바로 말씀에 의해서 전환되는, 변형되는 육신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육신은 어디로 환원되는 거죠? 도로 말씀 자체로 환원되는 거죠.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요한일서가 사도 요한이 쓴 것이기 때문에 요한복음과 관련해야 돼요. 내용이 연관되어 있으니까요. 요한복음 1장에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되어 있으면서 무엇과 대비를 해요.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다음 그 뒤에 붙어있는 요소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죠. 그런데 17절이 중요해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 안에 있는 세계가 모세 세계하고 다르다는 거예요. 모세의 세계는 무엇의 세계냐? 율법, 법의 세계에요. 법이 있다는 말은 인간 자아가 고유한 자기 질량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질량을 갖고 있다는 말로 자꾸 이렇게 물리적인 표현으로 하니까 여러분들이 안 와 닿는데 그럼 물리 말고 다른 표현으로 할게요. 그만큼 인간의 마음이 부패했다 이 말입니다.
마음이 정상이 아니다 이 말이죠. 마음이 부패했으니까 어느 정도 부패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거예요. 율법을 준 거예요. 성령이 우리 인간에게 도달될 때 도달지점이 있어요. 그 도달지점을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마음이 눈에 안 보인다는 거예요. 신체, 손, 발 이건 보이는데 마음은 안 보이는 거예요.
목욕탕에서 다른 사람의 신체를 보면 다른 사람 신체가 있거든요. 있는데 그 사람의 마음은 어디 있죠, 그럼? 마음은 어디 있습니까? 이미 신체성, 또는 물질성을 벗어나 있죠. 마음은 물질성과 신체성과는 따로 피어나는, 어렵게 말하면 ‘수반되는’ 이렇게 말하는데 그건 너무 어려운 말이고, 거기서 풍겨 나오는 그 무엇. 그걸 총괄해서 뭐라고 합니까? 그걸 ‘마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이 몸을 가지고 뭘 하는데 휴지를 길에 툭 던지니까 ‘저, 저 마음 꼬라지 봐.’ 이러잖아요. ‘저 행동 봐.’만 하지 않고 거기서 마음이 왜 나오냐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마음이라 하는 것은 인간세계에서도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인간관계로 이야기하지만, 특히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볼 때에 그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겁니다.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언약, 또는 복음, 말씀이 안 나오면 그 사람은 그냥 움직이는 흙덩어리에요. 그냥 죽음만 펄펄 날린다 이 말이죠. 예레미야 17장 9절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알리요마는’ 이런 단서를 붙였어요.
어떤 인간도 부패했다. 쉬었다. 냉장고에 음식을 넣어놨는데 쉬었다. 못 먹는다 이 말이에요. 자기 마음이 썩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마음이 썩었기 때문에 썩은 것을 말 못하죠. 이게 어느 정도 어려운 말인가 하면 이 말이에요. ‘믿지 않음으로 믿어라.’ 믿지 않는 방식으로 믿어라 이 말이에요, 믿지 않는 방식으로.
이 말의 문장에 어떤 뉘앙스가 들어 있느냐 하면 ‘썩은 인간이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안 받는다.’를 인정하라 이 말입니다. 썩어있는 내 마음에서 나온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다. 왜? 말씀에 입각해보면 우리 마음은 만물보다 심히 썩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인간은 썩은 마음이잖아요. 썩은 마음으로 율법이 와서, 아까 골조에게 율법이 찾아오게 되면 거기서 뭐만 펄펄 나오겠어요? 썩은 마음만 계속 나오겠죠. 썩은 마음만 계속 나오기 때문에 그것이 모세 율법의 기능이다 이 말이죠. 모세 율법의 기능은 썩은 마음만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이 독생자에게 와서 풍겨 나오는 것은 은혜와 진리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나온다 이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은혜와 자비가 나온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없으니까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주도권을 못 쥐는 거예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왜냐하면 알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루었던 말씀과 관련되어 있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그냥 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앞장세워서 와요.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그 말씀 나오는데 여러분 들어보면 ‘아, 그 말씀 들은 적 있다.’ 이렇게 나올 거예요.
요한복음 16장 보게 되면 13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누구의 영광입니까? “내(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알리겠음이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고 누가 와서 이 말씀을 하게 하시느냐 하면 성령께서 이 말씀을 하게 하셨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다 이루셔놓고 나서 이제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가지고 자기 백성에게 찾아와요. 왜? 모든 인간의 마음은 썩었기 때문에 못 알아보니까요. 알아볼 수 없습니다.
썩은 마음의 특징이 뭐냐? 썩었다는 것은 율법이죠. 율법이 온다는 것은 우리 안에 어떤 골조가 있다 했어요? 법 인식을 갖고 있죠. 법 인식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늘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나의 존재가 얼마나 잘났나’ 거기에 치중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법적으로 하자 없느냐? 나는 얼마나 법적으로 완전한 인간인가? 난 지금 법적으로 어느 수준까지 높아지고 있느냐?’ 그런 것을 늘 측정하는 거예요.
이 측정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점진적으로 절대에 이르겠다는 열성과 야심.’을 말해요. 점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어디에 이른다고요? ‘절대 의’까지 최선을 다하여 갈 때까지 가보자.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의로워지겠다는 그걸 점검하고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뭡니까? 성경말씀을 뭐로 사용하기 때문에? 법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예수님 죽인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의 주특기잖아요.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짓하고 있잖아요. ‘전보다 여러분 많이 나아졌습니까? 많이 성화되셨습니까? 좀더 거룩해지셨습니까?’ 계속 본인이 본인에게 책임을 안겨주는 것, 누가 한다고요? 적그리스도가 악마가 그 짓하게 만들어요. 거짓 선지자들이 그 짓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들은 가만히 들어와서 복음의 자유를 엿보고 그 복음의 자유를 취소시키게 만들어요. ‘당신이 교회 20년 다니고 당신 뭐 효과 본 거 있어? 달라진 거 있어? 인품이 바뀌어야지.’ 계속해서 마귀가 사적으로 마치 개인이 안 죽어있는 모습으로 나를 설정해놓고 계속해서 내 문제에 대해 집중하게 만드는 것, 마귀의 마지막 카드잖아요. 포커가 이거에요. 마귀가 마지막 내는 포커가 이거라니까요.
“나 예수 믿는다.” 그럼 마귀가 뭐라고 합니까? “그래서 예수 믿어서 너 구원 받았어?” 꼭 나한테 실제 이익이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이 마귀가. “예수 믿는데 너희 가족은 전도했냐?” 이거 묻는다니까요. 이렇게 물어요. 예수 믿는 게 중풍은 왜 들었지? 예수 믿는 게 치매가 왜 들었어? 이런 거. 예수 믿는데 허리가 왜 자꾸 아프지? 내가 벌 받았나? 내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벌 받은 거 같아.
완전히 모세 율법 안에 가두어놓고 거기서 ‘꼼짝 마라’하고 못 벗어나게 만들어요. 그래야 자기 밥이 되니까. 동네 일곱 귀신 다 데려와서 이걸 시키는 겁니다. 어떤 위인전을 읽어준다든지, 교육에 성공한 그런 사례를 줘가지고 뭐 감동받게 한다든지, 그렇게 해서 기어이 내가 나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 악마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시키죠.
이게 거짓 선지자고 적그리스도의 활동이라면, 지금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다루는가? 궁금하죠? 궁금해야 되는데. 이게 아니라면, 그럼 성령께서 어떻게 다루는가? 요한복음 3장을 보겠습니다. 3장 12-14절까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특히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왜 난데없이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하다 불뱀에게 잡힌 그 경우를 주님께서 불쑥 여기다 등장시켰는가? 그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민수기 21장에서 아시다시피 원망하다 불뱀에 물려 죽었잖아요.
그때 모세가 기도를 어떻게 했느냐? 백성들이 죽어나가니까 모세가 중간에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이 불뱀들을 물러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민수기 21장 6절에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백성들이 모세에게 요구를 하는 거예요. 그 요구가 뭐냐 하면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모세가 그렇게 기도해달라고 모세에게 윽박지른 거예요. 이 뱀들이 떠나게 해달라. 물론 모세가 그대로 기도했겠죠. 그런데 모세가 받은 기도응답이 모세 본인조차도 생뚱맞은 겁니다. 이런 식으로 대책이 올 줄은… 상상도 못한 대책이 주어졌어요.
그게 뭐냐 하면 뱀이 떠나게 하지 않아요. 오히려 뱀쪽으로 그들이 다시 집중해서 몰리도록 그렇게 조치했습니다. 한번 볼게요. 백성들 입장에서 1.뱀이 떠나야 우리가 산다. 당연히 이거 요구했죠. 현재 백성들 입장에서 자신이 하나님께 원망한 게 문제입니까, 뱀이 문제입니까? 자기는 원망한 것보다도 뱀이 와서 자기를 물어서 자기 일가친척 많이 죽어나가는 이게 사태의 심각성이라고 보는 거예요. 따라서 문제해결은 우리를 무는 뱀이 우리 곁을 떠나가면 된다고 보는 겁니다.
떠나가도 된다고 보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지금 무슨 문제가 해결 안됐어요? 원망하는 이 부패한 마음은 치료가 안 되잖아요. 그렇죠? 뱀이 와서 원망하는 자를 물었다는 말은, 혼내주려고 한 게 아니고 그동안 너희들이 미처 몰랐던 이 하나님의 심정, 마음을 그들이 이제는 헤아릴 수 있는 사람으로 달라지라고 이 뱀을 보낸 거예요.
그런데 그들의 지금 급선무는 뭐냐? 자기 마음이 달라지는 게 아니고, 독사한테 물려서 많은 사람이 죽고 어떤 사람은 다쳐있다는 이 난감한 사태가 자기들한테는 심각한 거예요. 그 마음 자체가 또 이게 부패한 마음이고 얼마든지 다음에 또 원망할 소지가 다분하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이걸 다시 한번 쓰게 되면, 1.백성들 입장: 뱀이 떠나야 우리가 산다. ①하나님을 원망했다. ②뱀이 와서 물었다. ③그래서 백성들이 죽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는 게 아니고, 이 불뱀을 본격화시켜버려요, 중앙에다가. 뱀을 떠나게 한 것이 아니고, 뱀이 물도록 하나님께서 지시했다는 그 점과 더불어서 2. 하나님 대책: 뱀이 물었던 그 현장에 하나님이 직접 나섰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뱀에 물려 죽었다,가 아니라 너희들이 나를 원망했다는 것을 다시 뱀을 그 자리에 세워서 분명히 하겠다는 거예요. 뱀을 그 자리에 세워서.
그렇게 되게 되면 그다음에 중간에 있는 매개 입자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3.모세: 놋뱀을 고정화시켰다. 놋뱀을 그 현장에 고정화시켰어요. 딱 꽂았어요. 꽂아놓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9절,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가 돼요. 놋뱀을 쳐다본즉.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원망한 것은 죽어 마땅하다’는 그 사실을 자기 속에서 받아들인 사람은 산다는 거예요. 이 모든 이야기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광야생활에서 나오는 거예요. 광야 생활은요, 그 자체가 죽음의 세계에요. 다시 말해서 살 수 있는 방안이 되는 모든 걸 다 치워버린 동네에요.
남은 것은 우리가 이미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게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유월절 밤에 이미 이스라엘은 다 죽었어요. 애굽은 진짜 죽었고, 이스라엘은 죽은 그들이 다음 광야생활까지 유예된 거죠. 90일, 관세 90일 트럼프가 유예시켰죠. 중국 빼놓고. 유예를 시킨 거예요.
그 장면이 출애굽기 15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마음이 부패해서 자기중심으로 보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치료한다는 말은 너희들은 환자란 뜻이에요. 환자라는 뜻인데, 너희들은 애굽 죽을 때 진작 죽어 마땅하지만 치료해주기 위해서 어디로 인도했다? 치료해주기 위해서 이미 우리는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상황 가운데 들어오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광야가 하나의 수족관이라면 이스라엘 사람은 그 안에 놀고 있는 금붕어에요. 물고기에요. 죽음에 갇혔어요. 죽음에 갇힌 거예요.
이제 남아있는 것은, 어떤 경우에 삽니까? 우리는 죽어 마땅함을 광야 생활을 통해서 그것을 인정하고 드러내면 되죠. 죽어 마땅함을. 방금 제가 설명한 것은 민수기 21장 이야기입니다. 민수기 21장은 별로 어렵지 않은데, 요한복음 3장 14절이 어려워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했어요.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뱀과 자기 자신을 어떻게 봤습니까? 일치시킨 거예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대목이에요. 왜 어려우냐 하면 ‘내가 너희에게 해줄게.’라고 생각하잖아요. 구원자다, 메시아다, 우리를 구원해주신다. ‘나는 여기 있는데 구원자가 와서 우리를 구원한다.’가 되잖아요.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그럴 자격이 없고, 나는 내가 나한테 해야 될 일을 내가 나한테 할 뿐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신에게 해야 될 일은 민수기 21장을 자신의 일로 자신이 받아들이는 거예요. 죽음 안에 있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죠, 죽어가는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예수님이 죽음 상황 속에 있는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로 주님께서는 자기를 자부하시는 겁니다.
자부한다는 말을 제가 하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게 나오죠. 나다나엘이 고백한 거예요. 1장 49절에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뭡니까? 이스라엘의 “임금”이죠. 아까 안양강의에서 했었지만 임금은 무엇을 대표한다? 전 백성들의 의미를 축약해서 자기라는 하나의 몸으로 표상한다, 이게 왕의 입장입니다. 왕 안에 백성들이 소복이 들어있다고 보시면 돼요.
그럼 왕의 운명이 곧 남아있는 모든 백성의 운명과 같은 결과를 낳는 거예요. 그게 다윗 언약이죠. 왕하고 언약을 맺음으로서 백성은 왕이 맺었던 그 언약의 효과의 공로를 그냥 무상으로 아무 대가없이 그냥 받아서 누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속하고 그 왕과 왕의 나라 왕국에 들어가게 된 사람을 그 왕의 그 백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요한복음 3장을 다시 보게 되면 어떻게 예수님이 뱀과 합치가 될 수 있느냐? 이 문제를 우리가 풀어야 되겠죠. 아까 힌트는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은 이미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 빛이 아니고 어두움이에요. 빛이 왔으되 못 알아봤습니다.
어두움은 그냥 가만 있는다고 어두움이 아니고, 어두움 값을 해요. 빛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납니다. 어두움을 뱀이라고 봅시다. 왜냐하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뱀이 자기를 해치는 나쁜 거라고 봤거든요. 자기는 항상 고귀하니까. 자기는 항상 소중한 존재인데 소중한 존재를 해코지하니까 백성들이 저 뱀을 떠나가게 해달라고 모세한테 기도 부탁을 한 거예요.
그런데 떠나가기는커녕 그 해로운 뱀을 다시 한번 그 백성들 중심에 딱 고정화시켜버려요. 꽂아버렸으니까 벌써 그들이 원망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원망을 지속시키는 방식으로 놋뱀을 그 자리에다 꽂은 거예요. 지속시키는 방법으로. 내가 불뱀을 보냈다는 것이 불뱀을 보낸 그때로 끝나버리면 네가 원망했다는 것은 그때 지나가면 그만이잖아요.
이제는 계속 원망할 수밖에 없는 마음가짐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살아있는 뱀은 그냥 기어서 가버리니까 놋뱀을 만들어 꽂을 수 있게 한 거예요, 그 한가운데. 놋뱀이 뭐 녹슬고 그럽니까? 그냥 꽂을 수가 있다고요. 봐라 이 말입니다. “봐라! 너희들 마음 모르지? 이 놋뱀 같은 게 너희 마음이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민수기 21장의 원칙을 예수님 자신의 육신에 담아버렸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뭐가 돼요, 역할이? 이스라엘 되죠. 이스라엘 임금이니까. 지금 유대인들은 이 세상이 어두움의 세계이고 어두움에 속해서 이미 죽어있다는 사실을 일체 인정 못해요.
마음이 부패해서 일체 인정을 못하고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 자기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출발을 ‘이렇게 날 믿으면 구원 받는다’가 아니라 그렇게 하기 전에 예수님 자체 내에 부패한 인간이 못하는 그 일을 인수인계해서 예수님 자신의 일로 그냥 받아주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도 인간이니까. 받아줘버리면 누가 누구를 물었어요? 뱀이 이스라엘을 물었죠. 이제는 예수님을 누가 물어요? 유대인이라는 뱀들이 무는 거예요. 그래야 그 상황극이 되니까.
여러분들 그걸 아셔야 돼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물지 아니하면 예수님은 높이 들릴 수가 없어요. 지금 여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뱀과 인자와의 연관성은 ‘들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들린다는 것은 뭘 의미하느냐? 12절에 나오죠.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자, 하늘은 땅에 있지 않고 들려서 위쪽에 하늘이 있죠. 위쪽에. 문제는 땅과 하늘이 그냥 땅에서 10미터, 20미터 뜨면 그게 하늘이 되는 게 아니고, 땅에서 거부당해야 비로소 하늘이 발생돼요. 거부당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사망당한 경우가 발생된다는 의미입니다. 발생되어야 돼요.
그러면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임금 되시는 주님은 바로 뱀 같은 유대인들에게 물렸죠. 물리면 어떻게 됩니까? 사망하죠. 사망함으로써 유대인들과 예수님 관계는 이제는 완전히 절단난 거죠. 갈라진 거죠.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찾아올 수 없죠. 왜? 죽여 보냈으니까. 그러면 인간은 영원한 어두움의 자녀로서 지옥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민수기에서 모세가 놋뱀을 든 것을 자기에게 인수인계했잖아요. 그러면 민수기 21장에서 주님께서 놋뱀을 꽂아놓은 것은 ‘너희들이 나를 원망했다’로 끝납니까, 아니면 원망한 자를 살리려고 한 겁니까? 살리겠다는 하나님의 취지도 예수님에게 있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손 털었죠. ‘예수님 죽였다. 일 해결 잘했네. 이제 바이바이다.’ 바이바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이제는 인간이 갈 수 없는 하늘로 들려올라갔어요. 그 취지가 뭐냐? 원망한 인간은 죽어 마땅한데, 그래서 그들은 보낸 뱀이 싫어서 뱀 좀 꺼지게 해달라 했는데, 도리어 뱀이 한 가운데 고정됨으로써 그 뱀을 쳐다보는 자는 아파 죽어가더라도 이제는 깨끗하게 산다 하잖아요. 산다.
이 말은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면 어떤 경우가 생긴다? 사랑받을 수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사랑의 능력이 되는 거예요.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이들에게 사랑이 주어져서 그게 바로 놋뱀을 쳐다본 자는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라면 그 취지대로 민수기 21장을 자기 몸에 인수인계했던 인자도 들린다는 거예요.
들리려면 반드시 인간이 예수님을 죽여야 돼요. 죽여서 바이바이돼서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야 돼요. 그래서 어두움은 어두움이고 빛은 빛인데 주님이 거기서 인자로 들림으로 말미암아 마치 살리는 놋뱀 기능을 행사함으로써 그다음에 15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뭘 얻는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 여기서 믿음은 인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믿지 않음이 선물로 받는 믿음의 재료가 됩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 구원 받는 거예요. 그것을 성령에 의해서 믿게 되었다는 거예요. 나는 믿지 않았는데 성령이 와서, 성령이 누굽니까? 들리신 인자의 영이 성령 아닙니까, 인간에게 당했던 분의 마음, 성령은 마음이니까 영이 오게 되면 믿지 않은 우리가 예수님의 성령에 의해서 비로소 예수라는 분이 십자가 죽었던 그 의미가 의미있게 다가오게 되었어요.
그러면 주도권은 어떻게 됩니까? 믿는 자의 주도권은 누구한테 넘겼어요? ‘내가 믿는다’가 아니라 ‘주님이 믿게 하셨다’가 되죠. 그럼 주도권은 하나님 쪽, 예수님 쪽, 성령 쪽에 있죠. 그 이야기가 요한복음 3장 21절에 있습니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너한테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누구 안에서 나온 결과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행위의 연속으로서 너희들이 독생자를 의미있게 받아들이는 그런 결과를 낳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두움에 있는 사람은? 20절, 악을 행하는 사람은 빛을 미워하죠. 악을 행하는 사람은 빛을 미워한다는 말은 악을 행한다는 주도권이 그 인간에게 있지 않고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악마한테 있는 거예요. 마귀한테 있는 거예요. 그걸 ‘미혹의 영’이라 해요. 미혹의 영.
성령의 영은 예수님에게서 나오지만 미혹의 영은 악령이죠, 악마에게서 나오죠. 악마가 인간으로 하여금 빛을 미워하게 만드는 거예요.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고, 인간 배후에 있는 마귀가 지옥 갈 사람들을 다루다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의 십자가 죽음에 관심이 없고, 거기에 대해서 신경도 안 쓰고, ‘그거 뭐 정치적인 하나의 사실인데. 십자가 죽은 사람이 뭐 한둘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무마하고 넘어가는 거예요.
그렇게 무마하고 넘어가게 되면 악에 속한 사람은 자기를 누가 책임집니까? 본인이 책임지겠다는 의식이 바로 악마에 속한 거예요. 악을 이기지 못한 악마에 예속된 자들의 특징이에요. 나 악마다,하고 얼굴 시퍼렇게 해서 오는 게 악마가 아니라 복음의 빛을 거부하면서 살아가는 멀쩡한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멀쩡하고 남에게 희생하면서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 남을 도와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어떤 사람은 신안 섬에 가서 자기는 은퇴하고 노인들 이발해줘요. 그 사람 성도입니까? 제가 어디서 봤느냐 하면 <6시 내 고향>에 나와요. 옛날엔 보지도 않던 거예요. <가요무대> 이런 거 보지도 않았어, 그런 건 노인들이 본다고. <인간극장> 보지도 않았다고요.
하여튼 간에 KBS, MBC 모든 언론기관과 사회 모든 법적 체제가 총동원해서 뭐만 가려요? 빛만 가려요. 빛.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것을 가려버리는 겁니다. 가릴 때 그들은 조직적으로 법적인 체제를 갖추어야 될 이유가 법이 있어줘야 괜찮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자체적으로 선악체계로 가동해서 이걸 계층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은퇴해서 이발해주는 사람은 착한 것, 음주운전해서 사람 치는 그건 나쁜 것. 이렇게 자체적으로 해줘야 질서가 유지되거든요.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사무실 뒤편에 테니스장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신입 사원이 회사 입사해보니까 테니스장이 있는 거예요. ‘야, 이거 나 테니스 좋아하는데.’하고 퇴근하고 난 뒤 테니스장에서 테니스 치니까, 온지 3주된 신입이거든요, 인턴이에요. 테니스 칠 때 거기 고참 직원들이 뭐라고 합니까? “싸가지 없이… 너 들어온 지 얼마 됐어? 지금 테니스장 하나밖에 없는 거 네가 하게 되면 테니스 치는 고참들은 어떻게 돼? 허락 맡고 해.” “제 순서는 언제 옵니까?” “새벽 2시에 올 거야. 어디서 신입이…”
그게 뭡니까? 회사 조직 내의 법이죠. 그런 것을 제가 어디서 힌트 얻었느냐 하면 지하철 타고 오면서 대광역 지나는데 테니스장이 있었어요. ‘아마 분명히 회사에 저런 일이 있을 거야.’ 다음에 인천 가는 지하철 타고 한번 와보세요. 테니스 치고 있어요, 거기에.
모든 조직이 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그 법속에서 돈벌이하면서 거기서 직원으로 살고 직업가지면서 무엇이 몸에서 나오겠습니까? ‘나는 정당하다. 나는 법을 준수하고 그래서 나는 대우받아도 마땅한 존재다.’ 이걸 요한복음으로 하면, 어두움. 미혹의 영에 빠진 사람. 그런 사람에게 적그리스도 이야기하면 ‘무슨 나하고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렇게 될 거예요.
오늘 아침 해외 토픽으로 나온 건데 인도에서 한 사람이 인형 뽑기 기계 안에 인형을 다 가져갔어요. 무슨 기술이 좋은가 CCTV를 보니까 세 살 먹은 애를 구멍에다 집어넣었어요. 애가 안에서 작업을 해서 안에 있는 인형을 바깥으로 다 빼돌린 거예요. 그걸 아버지는 챙기면 돼요.
거기서 내가 은혜를 받은 것이 바로 성도가 성경말씀을 법으로 여겨서 그걸 지킨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세 살 먹은 애가 되어가지고 그 안에 있는 모든 보화를 성도에게 직접 친히 주신다는 겁니다.
내가 지켜서 복을 받는 게 아니고, 성령이 예수님이 행한 그것을 가지고 구멍 속으로 들어가서 그걸 몽땅 우리에게 다 주시는 거예요. 주시는 게 뭐냐?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배치, 위치, 입장을 주시는 거예요. 매개 입자니까. ‘너는 이거 이거 해. 이거 이거 이렇게 해.’라고 위치를 주는 겁니다.
주게 되면 우리는 매개 입자라 질량이 없죠, 내 마음의 무게가 없는 거예요, 무게가 이미 박탈당했으니까, 없으니까, 어느 장소에서든 말씀만 전하면서 그 말씀을 전하면서 그 말씀에 의해서 말씀의 활동력에 의해서 우리 새로운 자아가 구성되는 겁니다. 나라는 게 구성이 돼요.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졌어요.
그러니까 뮤지컬 <오페라 유령>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그냥 육체 쪼가리만 하나 있는데 실상은 유령 같은 존재가 우리 자신인 거예요. 유령 같은 존재.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어요. ‘word’ 유튜브에 어제 수요일 동영상 한번 보세요. 처음에는 시커멓게 음성만 나오잖아요. 그런데 5분 남겨놓고 내 탈이 나와요. 오페라 유령이 나온다고요. 탈이 나오더라고요. 앞에도 내 자아고 뒤에도 내 자아에요.
자, 여기에 대해서 적그리스도나 거짓 영들은 옛날에 내가 나라고 여겼던 그것을 고집해요. 내가 나라고 여겼던 것을 고집합니다. 거짓 선지자 이야기하고 끝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을 보겠습니다. 11장 3절에, “뱀이 그 간계로 이와(하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죠.
뱀이 하와를, 여자를 먼저 미혹케 한 것은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말씀관계를 청산하게 그렇게 뱀이 한 거죠. 하나님은 분명히 따먹지 말라 했잖아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말씀에 의해서 구성되는 인간을 원했어요. 말씀이 살아있는, ‘따먹지 마라’가 계속 살아있는, 말씀이 실효성 있는 그런 인간을 봤는데,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그런 인간 된다는 것을 악마가 알고 중간에 자기가 끼어들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사이에 악마의 더러운 마음이 들어갔어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악마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다. 독자행동을 하는 천사입니다. 독자행동을 했어요. 독자행동이라 하는 것은 딴 게 아니죠. 자아성의 부각이에요. 자아성의 부각. 그래서 그 아담의 후손들이 태어나면서 태어나는 족족 전부 다 악마성을 내부에 품고 태어나요.
마치 붕어빵 같아. 앙꼬를 듬뿍 담고 악마성을 내부에 담고 그 노릇노릇한 껍데기 있잖아요, 껍데기만 인간 탈을 쓰고 이 땅에 태어나서 돌잔치 한다고 마이크 잡아라, 실 잡아라, 돈 잡아라, 책 잡아라 이렇게 하잖아요. 시작부터가 이미 독자성을 품고 있어요.
독자성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뭐라고 하든 간에 그 판단은 누가 내린다? 내가 내린다. 그 판단 내리는 기준은 뭐냐? 나한테 무엇이 이득이고 내가 절대자가 되는데 어떠한 재료 같은 것이 필요하냐를 파악해서 끌어 모으고 있어요. 끌어 모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 만남에서 복음 안 나오면 그냥 흙이라고 보시면 돼요. 복음이 안 나오면. 오랜만에 길에서 동창생을 봤다. 차마 ‘이 흙아!’ 말은 못하지만… 왜냐하면 흙이 인간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이 붙여준 가명이거든요. 인간의 본명은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본명을 찾는 여정이죠. 성도는 자기 본명, 여호와의 이름을 찾아가는 여정이에요. 그 이름이 뭐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공통점은 여호와. 여호와께서 우리의 대표 이름이 되어버리는 것. 이마에 주의 이름을 박아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부르는 모든 것은 아담의 이름이에요. 육신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라고요. 그러니까 이름대로 그 이름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그냥 흙이에요. 아담 자체가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갈 인간이 이름을 지어줬으니까 네 운명이나 내 운명이나 마찬가지죠. 이름 있으면 전부다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흙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율법으로 예레미야 17장 9절에서 아까 이야기했죠. 너희가 흙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너희 마음이 심히 부패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부패하다고 했습니까, 17장 9절에? 만물보다 썩은 것이 너희 마음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되어야 돼요? ‘만물보다 썩은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를 재료로 해서 새로운 이름이 주어지죠.
썩어빠진 이 마음에 대해서 내가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썩어빠진 내 마음을 어떻게 요리할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것은 이미 율법에 의해서 규정되었기 때문에 이제 중요한 것은 모세 율법이 아니라 독생자의 은혜요, 자비, 사랑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은 이렇게 해석하면 돼요.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그 사랑은 높이 들린 놋뱀과 마찬가지인데, 어떤 경우에 그 사랑이 주어지느냐 하면 이미 너희들이 그 독생자를 죽음으로 몰아세워서 너희를 버릴 때 비로소 본격적으로 주님과 성령의 작업이 시작되는 거예요. 미혹의 영과 다른 차이나는 활동을, 자기 백성만 골라서 활동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된다 이 말입니다.
따라서 방금 하는 말에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내 마음은 썩었다는 말씀이죠. 그러니까 나는 말씀에 의해서 재구성되는 거예요. 내 마음? 난 썩었어. 나? 죄인 중의 괴수야. 나? 불신자. 믿지 않음으로 믿게 된 사람이에요. 죄인 됨으로써 의인이 된 사람. 이게 바로 말씀을 내가 공부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서 새롭게 개시되는 그 십자가 능력의 확장으로 되어진 새로운, 십자가가 만들어낸 십자가 안의 새로운 피조물의 등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전혀 차이를 못 느끼는데 말씀이 와서 자극을 하니까 비로소 잊어버린 그 차이성이 개입이 다시 한번 떠올라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비록 내 힘으로 나를 달라지게 할 수 없지만 밤낮으로 들락거리는 성령의 역사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이미 속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