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지혜와 이방인

아빠와 함께 2025. 4. 17. 10:54

지혜와 이방인 

2025년 4월 16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0:1-5

(10:1) 스바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코자 하여

(10:2) 예루살렘에 이르니 수원이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약대에 실었더라 저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10:3) 솔로몬이 그 묻는 말을 다 대답하였으니 왕이 은미하여 대답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10:4)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 건축한 궁과

(10:5) 그 상의 식물과 그 신복들의 좌석과 그 신하들의 시립한 것과 그들의 공복과 술 관원들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현황하여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에 반했습니다. 그녀가 평소에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물어봤다는 것은 과연 솔로몬의 지혜가 그렇고 그런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인가 여부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만나서 그녀가 속에 담은 모든 것을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답변은 인간의 지혜를 초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스바 여왕은 알았습니다. 그가 솔로몬 왕국에 본 모든 것은 바로 모세 율법에 준해서 국가가 운영되고 있다는 겁니다. 제사장 나라나 신하들에 대한 관리가 모두 모세 율법체계가 가시화된 결과물이었던 겁니다. 이것은 나라 자체가 일반적인 나라가 아님을 뜻합니다. 즉 언약에 준해서 이 세상에 나타난 ‘언약 나라’였던 겁니다. 따라서 스바 여왕은 솔로몬 나라를 자기 나라에 벤처마킹으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나라는 여호와의 율법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방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스바 여왕은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특수성이 솔로몬의 왕국을 통해서 증명되었음에 같이 호응하고 참여하게 된 것만으로 영광스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이방나라나 이방인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의 독보성에 기꺼이 동의한다는 점이 언약이 절정기에 도달하면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즉 완성단계에 이른 언약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솔로몬과 스바 여왕의 만남으로 미리 보여주신 겁니다.

스바 여왕이 황홀한 정도로 솔로몬의 지혜에 반해버렸다는 사실은 다른 이방나라와 이방인이 감히 견줄 바가 될 수 없는 영광에 자신이 본국에서 자랑스레 가져온 모든 보화를 아낌없이 내놓고 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바 여왕의 태도가 언약의 본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운명에 경종을 올리는 현상이 된다는 겁니다.

즉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경외심은 결코 자신 존재를 완전케하고 완성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잠언 25: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솔로몬과 관계하는 하나님은 단순히 하나님이 아니라 지상에 왕 중의 왕으로 통치를 실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솔로몬을 통해서 보여주었지만 그 하나님께서 직업 지상의 왕으로 오신다면 모든 세상 왕들은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영광돌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여호와여 땅의 열왕이 주께 감사할 것은 저희가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시 38:4-5) 따라서 스바 여왕은 솔로몬은 결코 자신이 실익을 챙길 의사가 없습니다. 인간은 나름대로 자아를 바라보는 이상(理想)적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평생을 이상적인 나를 따르기 위해 고생을 합니다. 우리 인간은 보여지는 나를 연기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현실에 있어 자신과 자신과의 간격이 늘 벌어져 있습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늘 자기에게 개 목줄을 씌우고 자신이 자기를 끌고 다니는 식입니다.

이것은 한꺼번에 다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은 타인이 어릴 때부터 씌워진 자아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에 자신의 모든 것를 맡기는 겁니다. 스바 여왕은 바로 솔로몬 앞에서 이런 결심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솔로몬 시대 때의 언약에서 발산되는 영광는 빛나는 영광입니다. 하지만 그 영광은 더 온전한 언약의 영광을 위해 일시적인 영광으로 시들어 버리게 됩니다.

보다 완성된 언약 완성이 남겨져 있습니다. 그 마지막 남은 영광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온전히 언약을 이루었을까요? 마태복음 12:41-4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즉 언약이 최종적으로 완성이 되었음을 알리는 현상 중의 하나가 언약의 본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 말고 다른 이방민족들은 별 한 것도 없이 이 영광에 값이 참여한다는 겁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이 이방인들이 언약 완성, 즉 복음을 듣는 자세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바 여왕의 마음가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방인들의 자세가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본 자손들과 다른 이방인들을 심판하는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스바 여왕과는 달리 언약이 최종적으로 완성이 되면 모든 세상이 사모하는 그런 영광이 아니라 초라하기 짝이 없는 영광이 독생자 안에 함축되어 들어 있게 됩니다. 반면에 세상의 왕이나 권세자들은 이런 낮아짐의 영광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5-28)

세상들이 기대한 세상 영광은 실은 악마들이 인간을 미혹하는 영광입니다.(마 4:8) 예수님은 다른 모습의 최종 영광성을 보여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영광이 완수되는데 있어 난데없이 타이밍 맞추어서 이방인들을 출몰한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즉 처참한 십자가 죽음이 세상을 심판하는 최종 심판이 되는데 이는 이 십자가 안에서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마냥 복음이 좋아서 자신의 모든 가치가 포기하는 이방인들이 출몰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근원적인 지혜입니다. 즉 잠언 8장에 나오는 지혜는 인간의 근본 토대가 되는 생명이요 곧 예수님이십니다.(잠 8:22,3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복음 앞에서 자신이 늘 해체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6강-열왕기상 10장 1-5절(지혜와 이방인) 250416-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0장 1-5절입니다.

열왕기상 10:1-5

“스바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코자 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니 수원이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약대에 실었더라 저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솔로몬이 그 묻는 말을 다 대답하였으니 왕이 은미하여 대답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 건축한 궁과 그 상의 식물과 그 신복들의 좌석과 그 신하들의 시립한 것과 그들의 공복과 술관원들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현황하여.”

여기 인물 하나 등장하지요. 왕이 등장합니다. 여왕입니다, 스바 여왕인데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왕복 4천 킬로미터를 구애받지 않고, 그 먼 길을 불사하고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많은 예물, 선물을 들고서 왔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소문만으로 듣던 그 솔로몬왕, 솔로몬의 그 영광이 과연 이스라엘이 믿는 그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성이 있는가 확인차 온 겁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소문을 통해서 어떤 것을 신기하게 여겼는가? 솔로몬의 그 모든 지혜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인간을 초과하는 지혜라는 소문을 들었고, 그 지혜는 이스라엘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받은 것이라는 소문입니다.

그런데 스바 여왕도 나름 지혜롭거든요. 그래서 스바 여왕은 무엇을 확인하는가? 자기가 지금껏 알고 있었던 인간 지혜의 한계, 그 한계를 가지고 솔로몬에게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질문을 던져서 나오는 그 답변이 기껏 내가 알고 있는 그 수준의 지혜냐, 아니면 상상도 못 한, 예상도 못 한, 즉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지혜가 나온다면 내가 예상한 대로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솔로몬 왕국 이스라엘에 자기 뜻을 전달한 것’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자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온 겁니다.

지금 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온 것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정리가 돼요. 스바 여왕이 정리하는 것 말고 성경의 하나님이 정리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절정기에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그 영광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을 것’이라는 겁니다.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에게만 독점적으로 주어졌다고 이스라엘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준 하나님의 그 언약이 완성단계인 최절정기에 달하면 언약과 상관없는 이방 민족이 하나님의 영광의 소문을 듣고 그냥 거저먹으려고 찾아와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거예요.

복음이지요. 기쁜 소식입니다. 이사야 65장 1절에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할 때 여기서 ‘나’는 여호와를 이야기하고, ‘구하지 아니하던 자’라는 것은 이방 민족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걸 그대로 오늘 본문 열왕기상 10장으로 가져오게 되면 솔로몬은 솔로몬이 찾지도 않은 자에게 물음, 질문을 받게 되며 솔로몬이 찾지도 않은 자에게 찾아냄을 당하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솔로몬이 위대하냐, 스바 여왕이 위대하냐?’에 대해서 우리의 상식, 우리의 지혜를 엎어라, 하는 그 말이지요.

보통 가르치는 자가 가르침을 받는 자보다 더 지혜롭다고 여기는 것이 인간세계에서 통하는 상식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뭘 높이느냐? 가르치는 자보다 가르침을 받는 자가 더 위대하다는 겁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기 때문에 ‘내가 너보다 더 우위에 있다’라고 여길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데 가르침을, 그것도 즐겨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을 초과하는 능력이 가르침을 받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자신의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거예요.

그 예를 너무 들어서 저도 식상합니다만, 저는 그 영화 안 봤고 그 장면만 봤어요. <비트>라는 영화에서 정우성이 오토바이 탈 때 자기가 오토바이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오토바이에 몸을 맡기면서 손을 놔버려요. 손을 놓고 몸은 뒤로 약간 제끼면서 눈은 감고, ‘에라, 될 대로 되라. 나는 모르겠다.’ 자기 자신을 놔주는 겁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자기 자신을 놔줘요. 왜? 이 점을 좀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자기 자아가 형성돼요. 그러다 보니 거기서 생기는 것이 나의 이상(理想)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져요. 이걸 ‘자아 이상’이라 합니다. 이상적인 나를 그때부터 누가 따르는가 하면, 내가 따라요. 이상적인 나를 견지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평생 죽도록 고생합니다.

한번 형성된 나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거울을 보면 나타나는 이상적인 내 모습에 자기가 도취 되어서 남들 앞에서 어떤 연기를 하게 됩니다. 오늘 아침에 거울에서 봤던 그 모습을 내가 상대방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연기를 하는 거예요. 본인이 참 괴로워요.

그게 왜 괴로운가? 진짜 이상적인 나는 항상 사회에 나가면 먹히지를 않아요. 항상 딱 일치가 안 되면서 자꾸 실수가 일어나고 미흡해요. 돌아보면 이상적인 내 모습에 수준에 미달했다는 데서 오는 불쾌감, 짜증, 분노 이런 것이 자꾸 나에게 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안 놔줍니다. 자기에게 스스로 목줄을 걸어요.

참 불쌍하지요. 참 불쌍해요. 얼마 전에도 검찰 조사를 앞두고 자살한 사람이 있었어요. 아마 기업인이었나요, 그런데 왜 죽습니까? 평생을 자기 이미지를 관리했거든요. 그 이미지가 국가적으로 웃음거리가 된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그 이미지가 온 국민이 볼 때 완전히 쪼다가 된 거지요. 얼마 전에 자살한 그 여배우도 마찬가지고요.

평생 자기가 자기에게 목줄을 걸고 늘 채찍질하면서 ‘너는 너다워야 해. 알겠지?’ 하면서 자기를 스스로 학대해 온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스바는 나라의 여왕이에요. 국가 경영자입니다. 오늘 본문 보면서 사람들이 제일 어려워하고 궁금해하는 것이 있어요.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물었고, 솔로몬은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다 했다. 그래서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반해서 가져온 선물을 다 줬고, 더 줄 게 없어서 안타까울 정도로 너무나 만족했다.’라는 그 대목에서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것은 ‘도대체 스바 여왕이 뭘 물었고, 아이큐가 얼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솔로몬은 뭘 답변했는지?’ 이게 궁금해서 사람들이 미치는 거예요.

‘솔로몬 자기가 알면 뭐 얼마나 알겠어? 아인슈타인보다 똑똑해?’ 이러고 싶은 거예요. ‘모든 것을 물었는데 모든 것을 답변했다.’ 수학, 기하학, 물리, 화학, 생물, 라틴어, 아프리카어 등등 이런 거요. 거기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뭘 물었고 뭘 답변했는가?

답변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솔로몬의 모든 국가경영체제가 율법 체제 위해서 운영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사장제도부터 해서 모든 성전의 제도가 솔로몬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모세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르쳐 준 거예요. 율법을 통해서 가르침 받은 그대로 솔로몬은 국가 운영을 해 간 겁니다.

또 솔로몬은 기도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응답으로 받았어요. 그런데 솔로몬이 받은 지혜가 뭐냐? 딴 게 아니고 ‘율법을 현실화시키는데 어떤 식으로 하면 국가에 속속들이 적용되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지혜를 솔로몬은 기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은 거예요.

솔로몬이 그런 식으로 정치를 했다는 것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잠언서 25장 2절에 나옵니다. 1절에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라고 되어 있고요, 2절에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왕은 절대로 단독행위를 할 수가 없어요. 다윗 언약 안의 아들들, 곧 왕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왕에게 준 그것을 왕의 사적인 지식, 사적인 지혜로서 터트리는 것이 아니고 그냥 받은 것을 백성들의 모든 일상에, 일거수일투족에 그대로 스며들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실을 누가 알았느냐 하면, 스바 여왕이 알았어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스바 여왕은 솔로몬을 하나의 인간으로 보고, 자신도 하나의 인간으로 봤을 때 ‘인간이 많이 알아봤자 이 정도일 것이다.’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왕에 대한 소문은 그것이 아니고, 다른 왕들과는 다르게 솔로몬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지혜가 있다고 하니 무려 2천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낙타 몰고 온 겁니다. 그 낙타들 죽었어요, 무거운 선물 싣고 온다고. 다른 사람에게서는 짜내려 해도 도저히 짜낼 수 없는 초월적인 지혜가 솔로몬왕에게 진짜 있다면 이 모든 것을 제공할 용의가 되어 있다는 것이 스바 여왕의 생각이에요.

그런데 스바 여왕이 알았어요. 뭐냐 하면, 현재 솔로몬의 국가체제가 율법에 준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여기서 스바 여왕이 다른 나라의 일반적인 왕 같았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벤치마킹할 거예요. 벤치마킹이 뭔지 아시지요? 흉내 내기, 따라 하기.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써먹어야지.’

국회의원 흉내 내는 지방의회 의원들이 견학 간다고 꼭 서유럽에 가요. 왜 갔느냐고 하면 벤치마킹 한대요. 그쪽에서 하는 작업을 벤치마킹해서 자기 시나 군에서도 적용하면 ‘역시 시민들을 위해서 봉사하는구나’라고 할 거라는 거예요. 스바 여왕이 과연 그런 욕심을 냈을까요? 스바 여왕은 그런 욕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영광스럽고, 솔로몬의 나라가 이렇게 잘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있을 수도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특별히 이스라엘에게만 준 지혜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 지혜가 뭐냐? 다윗 언약이에요.

스바 여왕은 그것을 알았어요. 다윗 언약은 이스라엘만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특별히 이스라엘에게만 준 것이고, 그 언약의 혜택을 고스란히 이스라엘이 한 몸에 다 받고 있습니다. 다른 이방 민족이 그것을 벤치마킹할 권한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어요. ‘나도 갖다가 써먹어야지.’ 하는 그것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스바 여왕은 어떻게 했는가? 스바 여왕은 자신의 여왕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나름 지혜롭다고 했던 그 나다움, 이상적인 나, 나의 이미지 그 모든 것을 다 놓고 다윗 언약에 그대로 다 맡겼어요. 솔로몬의 이런 영광은 다른 나라 다른 왕들이 아무리 정치를 해도 이런 경지에까지는 이를 수 없다는 것을 확답으로 얻은 거예요.


뭐 라이벌 의식을 느낀다든지 시기하는 그런 게 아니고 오히려 속이 시원해요. ‘나도 그렇게 해야지.’가 아니라 솔로몬, 다시 말해서 ‘다윗 언약만 있다면 거기에 참여한 것 그 자체로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이렇게 되면 스바 여왕은 자기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자아상과 자기 사이의 간격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스바 여왕은 더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자기에게 매이지 않는, 남한테 잘 보이려 하는 모든 그러한 굴레로부터 깔끔하게, 신나게 거기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겁니다. 다시 한번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최절정기에 이르게 되면…, 그게 솔로몬 때 오래가지는 않아요.

잠깐 반짝, 했지만 언약이 최절정기에 올라가게 되면 과연 언약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증거 중 하나가 전혀 언약과 관계없는 이방인들까지 그 언약의 영광에 대해서 감사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 여호와를 찬양하게 된다는 겁니다.

시편 138편 4-5절에 보면 그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여 땅의 열왕이 주께 감사할 것은 저희가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절정기에 이르러 아주 크게 될 때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다른 주변의 왕국까지 그 여호와 하나님의 가치를 높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왕이 아니라 모든 만왕의 왕이 된다는 것이 언약의 최고 완성기에 하나의 현상으로서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스바 여왕이 만족스러워서 집에 돌아갔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버리면 안 돼요.

제가 아까 ‘가르치는 자보다 가르침 받는 자가 더 영광스럽다’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냥 훅 나오듯 등장한 것이 아니고 제가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하거든요. 마태복음 12장 40-41절에서 요나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41절에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요나 이야기에요. ‘심판 때’입니다. 그러니까 최종 심판이 진행된다는 것은 언약이 완전히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마지막 심판이 감행된다, 이 말이에요. 그전까지는 모의고사고 이제 마지막 최후의 심판은 언약이 완성될 때 감행되는데 그러면 그 언약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인자(人子), 예수님 자신이 모든 언약을, 스바 여왕도 그렇게 반했던 다윗 언약, 그 다윗 언약을 영원히 최종 상태로, 최종 경지로 올려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지혜로 인간을 심판하는 게 아니고 인간을 능가하는, 인간을 초과하는 지혜가 모든 인간을 심판할 그때 마태복음 12장 41-42절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보통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죠. 이 어려운 이야기를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사전에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22절에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여기 많은 사람이 예수님 보고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했습니까?”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이 “너희가 누구예요? 누구지?”(마 7:23) 이렇게 된 거예요. 그들이 분명 예수님 말씀을 전하고, 성경을 전하고, 복음도 전하고, 거기다가 귀신까지 쫓아내며 능력도 행했는데 정작 심판 때에 주님이 “난 너 몰라. 넌 내 사람 아니야.”라고 한 거예요.

그럴 때 그 선지자 노릇한 사람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제가 아까 언약이 최절정기에 올랐을 때 그 언약을 보면서 영광에 감격하며 찾아오는 그 이방인들이 소위 가르치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고 제가 말씀드린 이유가 이 본문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이야기했던 스바 여왕이 벤치마킹하려고, 한 수 배우려고 온 게 아니에요. 솔로몬에게 인간을 능가하는 초과적인 지혜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확인하러 왔다가 그게 확인이 됐단 말이죠. ‘솔로몬의 모든 지혜는 결코 인간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모세율법에 기초해서 국가가 경영됐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나 스바 여왕의 나라는 율법이 없기 때문에 절대로 솔로몬의 영광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하나의 국가를 경영하는 왕으로서 그냥 자신의 이상적인 인간을 포기한 거예요. 언약의 완성 앞에서 포기한 거예요.

그런데 “주여, 주여!” 하는 이 인간들은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면서도 절대로 안 되는 게 있어요. 뭐냐? 자기 자신을 포기를 못 합니다. 차라리 이방인이 더 나아요. 그 뒤에 나오는 것이 바로 ‘주여, 주여’ 하는 그들이 왜 잘리는가, 왜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 가느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다 했는데.

그것은 바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설명하면서, 마지막 때 자아를 포기 못 하고, 목사를 하든 뭘 하든지 자기를 포기 못 하고 자아 위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는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마지막 심판 때, 흔들기 할 때 전부 지진 7.2 강도에 의해 주저앉습니다. 다 무너지죠, 다 무너집니다.

스바 여왕이 감격해서, 그 언약에 반해서, 십자가 다 이루심 앞에서 다시는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인생 같은 그러한 무거운 부채, 짐, 내가 원하는 인생 그 자체를 포기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는 그러한 가벼움, 존재의 가벼움,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의 가벼움, 이건 마지막 언약의 영광이 제대로 나타날 때 가능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님 옆의 강도 아닙니까? 아낌없이 자기 자신을 포기했잖아요.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천국 간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여러 군데서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한테도 이야기했는데 예수님 제자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마태복음 20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연이어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했어요. 25절에 보면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치맛바람을 일으켜서 예수님께 부탁했어요. 우리 애 둘을 예수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할 때 22절에 “너희들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구나.” 그다음에 “세상의 집권자들은 임의로 너희를 다스리고 너희를 권세로 부리는 것을 자기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야기한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가르치고자 하는 자는 가르침 받는 자보다 못하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한다.”(마 20:28) 어디까지 섬기는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희생물로 주기까지 내가 왔다. 거기서 나온 것이 내 잔이다. 너희도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주관, 임금이 있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임금,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게 짐승입니다. 그 짐승 배후에는 악마가 있고, 악마한테 예수님께서 시험받을 때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세 번째 시험이 뭐냐?

오늘 스바 여왕과 한번 비교해 보세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인데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산에 올라 세상 모든 영광을 다 보여줬어요. 보여주면서 “당신이 나한테 절하면 이 모든 영광을 당신에게 줄게”(마 4:8-9).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악마의 제안은 ‘이기는 자가 이기는 거고 지는 자가 지는 것’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20장에서 주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지는 자가 이기는 자고, 이기는 자가 지는 자’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사실을 몰랐어요. 실패하지 않으려고 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꼭 성공하려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형성된 ‘성공해야 마땅하다’라는 자아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잘돼야 할 권한과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게 자기를 평생토록 족쇄 채운 것을 알지 못한 겁니다.

여러분에게 문제를 한 번 내볼게요. 스바 여왕이 단순히 솔로몬의 영광을 보고 “나 당신한테 반했다. 당신에게 한 수 배우겠다.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 Good!” 이랬더라면 아까 본 마태복음 4장의 광야에서 마귀가 모든 영광을 보여주면서 “이 영광 멋있지 않아? 나와 함께 손잡고 우리 영광스럽게 남을 같이 통치하자.” 이 시험과 차이점이 뭐냔 말이죠. 차이점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스바 여왕이 보았던 것은 일시적인 솔로몬의 제국, 왕국의 가시적인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으로 모든 다윗 언약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오실 때까지 그 영광이 아직 남아 있는 거예요. 그 영광은 대단한 영광, 사람이 보기에 현혹될 만한, 오늘 본문에서는 ‘현황(炫煌)’이라고 하는데요, 정신이 나갈 정도로 너무 영광스러운데 사람이 보기에 반할 정도의 그 영광이 이제는 예수님 가까이 오면서 내리막길로 꼴아박아요. 일종의 코미디 같은 그러한 예언도 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에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 말씀은 의도적으로 이미 이 세상은 악마가 왕으로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스꽝스러운 돈키호테같이 왕은 왕인데 자진해서 초라하고 별 볼 일 없는 “뭐 왕이 저 정도밖에 안 돼?”하고 조롱받는 왕으로 오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독생자 영광, 하나님의 영광인데 그 독생자와 결합이 되면서 지극히 초라하기 짝이 없는, 누구도 흠모하고 싶지 않은, 누구라도 외면하고 싶은, 그래서 하나님의 그 영광이 초라함 속에 함축되어 있어서 누구도 반기지 않는 그런 영광이 스바 여왕이 눈으로 봤던 솔로몬 영광보다 더 완성된 영광으로 오는 거예요. 참 어려운 이야기예요, 정말.

마태복음 21장에서 이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이 나옵니다. 2-3절에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해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일부러 끌고 오게 해서 뒤뚱뒤뚱, 그 무게를 감당 못 하는 나귀 새끼만 죽을 지경이에요, 주께서 그 나귀 새끼를 타고 그야말로 패배자 같은 왕, 보잘것없는, “저것도 왕의 행차냐?”라고 비웃을 만한 그러한 모습으로 주님이 의도적으로 연출했다는 것은 앞으로 이것보다 더 큰 낮아짐의 연출이 곧 뒤에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정도 연출에도 그 당시 유대 백성은 스가랴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보이는 대로 믿고 싶거든요. ‘나귀 새끼를 타고 온다는데, 그렇게 겸손하게 온다는데, 그러면 지금 저분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데 혹시 예수님이 메시아 맞을 수 있잖아.’ 그래서 그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마 21:9)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예루살렘에서 초막절 행사했거든요. 초막절 행사할 때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시가지까지 1시간 10분 동안 내려오면서 “호산나~” 노래를 불러요. 정통 유대인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마태복음의 이 대목을 그대로 연출합니다. ‘비록 나귀 새끼지만 그래도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대로 진짜 되었으니까 혹시 알겠는가? Perhaps, 아마도 왕일 수도 있겠잖아?’라고 하는데 이러한 연출마저, 십자가 죽는 연출 앞에서는 모든 다른 인간들까지 다 날아가 버렸어요.

자, 여기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그렇다면 마지막 때에 언약이 완성되면 이방인이 찾아온다는 그러한 예언, 유대인들도 못 알아본 예수님을 이방인들이 알아봐서 찾아온다는 그 말입니까?” 아닙니다.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시는 거예요.

그 대목이 요한복음 12장 20-23절에 나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지금 헬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오는 그러한 낌새를 가지고 예수님은 어떻게 그 현상을 해석하느냐 하면 “드디어 인자가 마지막 남아 있는 이 모든 언약까지 완성될 때가 비로소 되었다.” 그때를 맞춰 율법과 아무 상관 없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거예요.

이방인들이 언약의 완성에 기웃거리는 것은 그들의 어떤 행함이나 어떤 것도 없이 염치불구하고 언약의 완성을 공짜로 얻고자 오는 거예요. 왜 얻고자 오겠습니까? 자기가 천국 가는데, 영생 얻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거든요. 한 게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 저에 대해서 포기했어요. 제 행함을 포기했어요. 제 잘남을 포기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저한테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이제 저를 방치하겠습니다. 내 것을 해체하고 나를 나에게서 풀어주었습니다.’ 이제 네 마음대로 해라, 내가 나를 내 곁에서 풀어놔 버려요, 풀어놔 버린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모든 언약이 완성됐다면 유대인들은 모르는 걸 이방인이 알아채서가 아니라 ‘나를 만나러 오는데 유대인이 아니고 헬라인 이방 사람이 온다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십자가에서 마지막 최종적인 하늘의 영광이 될 그때에 맞춰서 이방인들이 찾아옴으로써 찾지 않은 자에게 내가 찾음이 되고, 그동안 나를 구하지 않은 자에게 답’이 되는, 그래서 그들이 묻고 예수님 자체가 모든 지혜의 답이 되는 거예요.

끝으로 솔로몬이 이야기했던 지혜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잠언서 8장 22절에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그리고 8장 1절에 보면,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그 지혜가 뭐냐?

천지창조 할 때 원천이었고, 근본이었고 토대에요. 그러니까 솔로몬이 아는 지혜는 뭐냐? 인간이 몰랐던 자기의 토대와 지혜, 창조의 원천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죠, 그 하나님과 내가 도킹하는 것, 우주 정거장에서 이렇게 만나듯이 도킹해서 이제는 뿌리 없는 내가 아니고 뿌리를 가졌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나의 뿌리를 새롭게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는 데서 우리는 정녕 우리 자신의 정신적인 무게에서, 심리적인 압박감에서 우리가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토대로 삼고 그리스도와 안에서 함께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솔로몬이 지혜를 이야기했고, 스바 여왕은 지혜를 찾아왔는데 도대체 그 지혜가 뭔지, 그 지혜가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살려주시는, 그리고 나중에 같이 만나게 되는 예수님의 지혜인 것을 이제는 알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앞에서 나를 포기하면서 맡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