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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랑의 은사를 구태여 자기백성에게 주시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이 하는 일과 반응에 대해서 초연할 수 있는지를 네가 한 번 해결해 보라는 겁니다
모든 가르침은 우리에게 율법적 기능을 발휘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범죄현장을 조성하기 위해서 사도를 통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친 거예요. “예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범죄의 현장이 되게 하는 겁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자기연민입니다. 고향’입니다. 같은 말로 ‘눈물’입니다. 사랑에 대한 육적인 반응이 눈물흘림이지요. “주여, 이렇게 고생 되게 했습니다.” 어쩌라고? 나의 눈물이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기소대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게 범죄자의 모습입니다. 회개의 눈물이 범죄자의 모습인 것을, 그게 범죄 현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선을, 그 흐름을 끊어버립니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누가 너를 정죄하더냐?” “주여, 그런 법망은 없나이다.”
주님의 말씀의 순서가 법으로 물어요. “너를 고소하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없다는 말은 뭐냐? “주께서 그런 것을 다 차단시켜서 보냈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주님이 보냈잖아요. 나에게 간음했다고 하는 모든 손가락질을 주님이 끊어서 다 보내버렸잖아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그 율법,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 외, 둘 다 다 이루어야 되는 겁니다.
㉮율법을 이루는 것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서 율법을 이루고,
㉯‘율법 외’를 이루는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으로 말미암아 율법 외에 주어진 하나님의 의로 만든 생산품,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성도가 되는 거예요.
사랑의 은사라는 것은 주님의 연속된 조치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인간은 육이거든요. 육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만들었어요. 우리보기에는 막 두려워서 벌벌 떨지만 하나님께서는 “레시피대로 요리 지금 잘 되고 있네.”
‘아, 내가 정말 점점 더 멀어졌구나.’ 내가 가고자 하는 천국이지만 천국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그동안 줄곧 해 온 거예요. “십자가 옆에 선 그 강도, 그게 바로 나에요.” 하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쪼다같이 십일조도 안 하고. 그러니까 강도질이나 했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 작업을 하시면서 율법 외에 한 의로 옮겨가는 작업을 하십니다. 율법 외에 한 의로 옮겨간다면 옮겨가는 그 작업이 뭐냐? 성경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다 알려주거든요. 성경은 다 알려줬어요.
피 흘리신 것은 예수님이고 택한 자의 죄를 거기에 섞어버립니다.
섞는 것을 가지고 죄에 대해서 전가했다고 합니다. 네 죄를 주님이 전가하는데 주님의 죄는 없고 우리 죄에요. ㉮우리 죄를 품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되면 ㉯그게 하나님이 원했던 하나님의 화목제물이 되고, 화목제물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의가 완성이 되면서 그 출렁이는 ㉱완성 안에서 우리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넘어가면서 뭘 해야 되는가? 벌벌 떠는 우리 자신을 우리는 아직도 육이 있으니까 쥐고 있지만 주님 쪽에서는 벌써 없어졌어요.
스스로 자기정리정돈 하지 마세요. 어차피 우리 육은 토대가 불안정합니다. 주께서 찢어지고 갈라지게 하는 겁니다. 마치 뒤꿈치 각질 갈라지듯이 아무리 약을 발라도 또 갈라지고 건조한 겨울철이 되면 또 갈라지고, 이 몸 저 몸 다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어차피 갈라질 거, 너 하나 가져가고 너도 하나 가져가라고 다 찢어주세요. 찢어지는 그것이 바로 바둑판 알들 확 쓸어버린 겁니다. 어쨌든 그건 내가 아니잖아요. 그것은 마귀가 만든 나라는 말이지요.
지키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반응을 나타내면 됩니다. “주님이 율법 외에 준비하신 것은 주님의 뜻의 일관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이 아니라 율법 외에 그리스도를 증명하라고 이렇게 새롭게 저를 만들어놓았잖아요. 저는 저 혼자가 아니고 주님의 은사로 함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온유고 화평이고 무례함이 없는 겁니다. 자기 자신은 주님이 다 대신 가져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