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언약의 왕

아빠와 함께 2024. 11. 1. 14:44

언약의 왕  

2024년 10월 30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5-10

(1:5)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 인을 예비하니
(1:6) 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1:7)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
(1:8)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1:9)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돌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복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1:10)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왕가는 세습제로 이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왕이 있다는 것은 국가가 먼저 성립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누군가가 최고 지도자가 되어야 하니 실제적으로 권력을 한 사람에게 위임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가 안정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결합력이 깨어져서는 아니되겠지요. 이런 취지로 차기 왕은 왕자들에서 이어가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이런 상식을 바탕으로 해서 그다음에 주 관심사는 왕자 중에서 도대체 어떤 인물이 적당한가하는 점도 역시 일반 백성들의 상식에 물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자신이 가장 적합한 차기 왕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백성들에게 자신의 무리없는 괜찮은 왕자라는 사실로 알려졌음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고 나옵니다. 인물로 보나 체격으로 보니 인격으로 보나 자기만은 차이 임금님 감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도니야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왜 솔로몬이 차기 왕이 되느냐’에 감각이 없다는 겁니다.

즉 아도니야는 이스라엘의 왕을 인간적인 인격이나 인물이나 백성들의 선호도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어린 솔로몬은 (14살) 다윗 언약 앞에 깊숙이 잠복되어 있습니다. 아도니야의 어머니는 오늘 본문에 ‘학깃’이라고 나옵니다. 반면에 솔로몬의 어머니는 ‘밧세바’입니다.

어린 솔로몬은 연배가 한참 높은 형인 아도니야가 갖고 있는 권력에 대들 수 없습니다. 아도니야 측근에는 그동안 이스라엘을 지켜낸 군부 실세인 요압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 곁에서 에봇을 관리했고 언약궤를 지켜왔던 아비아달이 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아도니야가 차기 왕이 되는데 있어 상식선에서 그다지 하자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아도니야는 ‘다윗’에 이어서 이스라엘이 왕이 되는 것과 ‘다윗 언약’에 맞는 이스라엘이 왕이 되는 것이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는,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주신 자리이어야 합니다. 이점에 대해서 나단 선지자는 다윗 혈통의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 7:12-13) 즉 하나님께서 친히 왕이 되셔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하실 나라는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마련하시겠다는 약속을 나단 선지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후계자는 단순히 다윗 혈통이 아니라 ‘다윗과 하나님께 맺은 이 언약, 곧 다윗언약’에 준해서 정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보기에 아도니야는 이 다윗 언약이 해당되지 않는 왕자였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아도니야를 보좌해서 왕으로 옹립하는데 합류한 요압이나 아비아달 선지자도 역시 다윗언약에 부합되지 않는 인물인 것을 압니다.

요압은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을 위한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내부에 작용하는 지배력에 관심을 쏟는 자입니다. 말년에 다윗이 사단에 격동되어 인구조사를 실시할 때에 요압장군은 다음과 같은 신앙적인 조언을 합니다.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삼하 24:2-3)

요압이 모르고 있는 바는 다윗의 위치가 최고 제사장 역할을 담당하는 ‘왕’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죽어나갈 때, 다윗이 친히 제사장 역할을 해서 아나우나 타작 마당에서 번제를 드릴 때, 비로소 백성들의 죽음이 7만명에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언약이란 이처럼 인간의 제사행위의 한계를 벗어나 하나님께서 개입이 가능한 여지를 마련한 자가 이스라엘이 왕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아비아달에게는 선조되는 엘리 제사장의 저주가 그대로 흘러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내 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너의 사람이 네 눈을 쇠잔케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삼상 2:33,35)

그렇다면 솔로몬에게는 어떤 내력이 깔려 있습니까?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이레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삼하 12:15-16,18)

다윗은 밧세바 사이에 난 아이가 자신의 간음죄와 살인죄의 증표로 태어난 자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죽어야 될 자기는 죽지 않고 엉뚱하게 하나님께서 집중에서 아이를 죽으려 하니, 그 아이는 결코 죽을 아이가 아님을 그는 하나님에게 하소연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아이가 죽고 난 뒤에, 다윗은 그 아이가 자기 대신 희생되어야 될 자식임을 알았습니다.

동시에 자신이 영원한 죄인의 입장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야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밧세바라는 처를 영원히 놓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사무엘하 12:24-25에 보면,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 되실 분은, ‘사랑’ 그 자체로서 일체의 인간의 자기 잘남으로 가리지지 않을 분이 적절함을 되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죄로 인해 죽어야 될 자는 나 자신이지 결코 하나님은 아니어야 합니다”를 인식하고 있는 그들 속에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왕으로서 영원한 이스라엘을 구성하십니다.

이것이 다윗 언약을 드러내는 진정한 왕의 자격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아를 덮고 있는 선악 의식체계를 십자가로 와해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강-열왕기상 1장 5-10절(언약의 왕) 24103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상 1장 5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하니, 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돌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복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아멘.

오늘 이 말씀은 아도니야라는 다윗의 넷째 아들이 먼저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선포하는 그 대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도니야가 왕이 되겠다는 것은 아버지한테 어떤 허락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도니야는 생각하기를 아버지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차피 이 나라라는 것은 왕이 되는 이 이스라엘 나라에 숫자는 백성들이 많고 백성들이 나를 좋아하게 되면 하나의 그것이 권력이 되고 단단한 권력이 왕위를 보장한다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겁니다.

어떤 사람과 사람들의 모임에서 힘이라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이 나를 인정해줄 때 그게 힘이 되죠. 바로 아도니야는 그런 상식에 입각해서 왕이 될 그러한 분위기가 되었다 라고 해서 왕을 선포했고 거기다가 아도니야가 백성들 입장에서 생각해본 거에요. 생각해보면, 그동안 늙은 다윗 말고 지금껏 이 나라 이스라엘을 이만큼 지켜 온 것은 군부의 실세, 전쟁을 해서 유지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전쟁에서 공로자, 누가 가장 큰 승리를 일궈냈는가? 그건 요압이죠. 그거는 부정하지 못 합니다.

요압이 엄청난 나라를 적들로부터 지켜내는데 최고의 공신이 요압입니다. 그리고 이 제사장 아비아달은 평소에 다윗이 젊었을 때 사독과 함께 언약궤를 지켜냈던, 언약궤를 운반하고 다윗이 어려울 때 에봇까지, 측근에서 다윗의 에봇도 챙겼던 것이 아비아달이었습니다. 제사장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고 보는거에요. 아비아달은 하나님과 관계, 영적인 문제는 아비아달이 쥐고 있고 실제적인 외부의 군사력은 요압이 쥐고 있고, 그리고 자기는 다윗의 아들 가운데 제일 연장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다윗 다음에 왕이 되는 것이 백성들 입장에서 상식에 합당하죠.

“저것 아니야”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없다는 점에 착안해서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먼저 왕 되겠다고 선포하고 말았습니다. 그 대목이에요.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야 될 텐데, 왜 이 아도니야는, 자기가 네 번째 아들이고 열 번째 아들 솔로몬이 왜 왕이 되어서는 안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솔로몬이 왕 되어야 된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 말이죠.

서열상 자기가 그다음 차례이기 때문에... 첫 번째 맏이는 세 번째 (다윗의) 아들한테 맞아 죽었죠. 압살롬은 아버지한테 대들다가 죽었고 둘째는 아마 아비가일의 아들인데 그 사람도 병들어 죽었는지 소식 없고, 그다음에 가만히 있어도 자기 차례 왔네요. 4번째, 아도니야. 그리고 이 아도니야가 어떤 사람이냐? 5절에 보면, “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 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나무라거나 실망스럽다는 말을 평생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상식적이고 행동이 반듯한 인물이다. 그래도 왕이 되려면 백성들 보기에 얼굴 상태가, 얼굴 품질이 어느 정도 볼만 해야 되거든요. 근데 여기에 보니까 매력적이었던 모양이죠. 체용이, 몸 되지, 얼굴 되지, 체격 되지, 인품 되지... 왕 안될 이유 없죠. 백성들로부터 매력적인 인물로 권력을, 백성들의 의견을, 뜻을 모으는 데 하등 지장이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 아도니야가 왕이 되고 난 뒤에 백성들이 많이 돌아왔어요. 아도니야한테. 많이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아도니야 입장에서는 자기의 왕을, 셀프 왕이죠. 스스로 자기가 왕 되겠다 했고 거기에 대해서 어떤 지장 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솔로몬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아도니야의 문제가 솔로몬을 생각하지 않은 거에요. 그러니까 이대로 밀어붙이면 그냥 계속 왕이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왜 성경에서 이 아도니아가 왕으로 등극했는가? 열왕기상에 기록한 이유는, 보통 왕이 되려면 아버지 왕이 살아있을 때는 왕이 되지 말았어야 돼요. 아버지 죽고 난 뒤에 하든지, 안 그러면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에는 “너, 나 죽거든 왕 되라.” 이렇게 지명을 받든지 해야 되는데 아버지의 지명도 없이 아버지가 안 죽었는데 자기가 왕 되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성경에서 이 이야기 하는 것은 인간들이 일반적인 신앙, 하나님의 약속, 언약을 배제했을때에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자기의 본성을 드러내느냐 하는 것을 이 열왕기상 초반에서 먼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인간들은 나라 만든다 할 때 왕은 어떤 식으로 왕을 구축하는가? 그것은 ‘빨리 권력을 모은 자가 먼저 선빵 날려서 왕 된다.’는 그게 일반적인 인간들의 상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솔로몬은 뭐했느냐? 그때 솔로몬 나이가 14살이에요. 14살 같으면 중학교 2학년이에요. 사춘기 때에요. 자기 나이보다 많은 형이 왕 되겠다는데 자기가 뭐 할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못하죠. 그래서 우리는 이 열왕기상을 보면서 아도니야가 네 번째 왕이 되었다 할 때에, 선입관을 갖지 말아야 돼요. ‘다윗 다음에는 솔로몬이 반드시 된다.’ 이런 선입관을 갖는 것 자체를 우리는 일단 지워버리고 우리가 그 당시에 살았다 했을 때 아도니야가 왕 되는데 대해서 거기서 우리가 이의를 걸겠는가?

이의 안 겁니다. 왜 이의 안 거는가? 권력 잡은 자가 왕 되겠다는데 거기다가 우리가, “아니야, 이거는 아니야.”하고 까불다가는 우리 목숨이 날아가는데, 자기 죽을 일을 뭐 한다고 하겠습니까? “그래 아무나 돼라. 권력 있는 자가 왕 되는 게 당연하지. 솔로몬은 14살 권력도 없는데 못 되는 게 당연하지.” 당연하다는 것. 당연한 것부터 성경은 먼저 쭉 깔아요. 당연한 것부터. 그리고 난 뒤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당연한 게 문제라는 거에요. 인간은. 인간은 당연한 게 하나님 보시기에 거절당하는 마음가짐인데 그게 왜 그러냐 하면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개개인의 인간의 마음을 겨냥해서 찾아오게 되어있어요. 인간의 마음을 겨냥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우리가 이거는 안 믿는 사람도 다 알고 있어요. 천지를 창조한 것. 신이 있다면 천지창조 했겠죠. “그래서 뭐, 그래서 뭐? 해와 달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래서 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이 해와 달 만들었다 하늘, 땅 만들었다 지금 이게 말씀의 초점이 다가 아니고 어딜 뾰쪽한 바늘같이 찌르는 곳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집결해서, 응집되어서, 초점을 맞춰서 찌르는 곳이 뭐냐? 인간의 마음이에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갋아요. 인간의 마음까지 도착하는거에요, 말씀이. 그 마음이 뭐냐? 5절에 나옵니다.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이렇게 되어 있어요. 스스로 높이고 매사가 자기 위해서 머리가 돌아가고 생각이 돌아갈 때 그걸 향하여 언약이 드디어 슈슈슛 화살 쏘듯이 언약이 그걸 향하여 노리고 겨냥해서 화살처럼 날아가서 꽂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것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요, 무엇으로 커버되어 있느냐 하면 선악 의식 구조로 자기 자신을 커버, 방비하고 있거든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마귀의 마음이 인간 속에 퍼졌습니다. 퍼졌기 때문에 악마가 받아야 될 죄 값을, 악마와 동일한 마음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 그 죄 값을 같이 할당받게 되었어요. 참 이게 억울하다 할까, 아니면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까요.

악마가 받을 벌을, 그 지옥 불을, 인간도 같이 받게 된 이유가 악마 마음과 인간 마음이 똑같아요. 그게 뭐냐? 선악으로 자기를 커버하고 있기 때문에, 방어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으로 커버하고 있기 때문에 선악적으로 자기가 옳다 싶으면 그다음부터 자기가 업(up)돼요. 올라갑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여요. 자기를 높일 때 불쑥 나오는 그 멘트, 그 말이 뭐냐하면, “내가 뭐가 잘 못 됐는데? 내가 뭐가 죄인인데?” 모든 불신자들, 교회 다녀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불신자들이 한결같이 나오는 이야기가 그거에요. “내가 뭐가 잘 못 되었는데 십자가를 믿어야 되는가?” “나 잘못한 것 없다. 열심히 살았다.” 이거에요.

그것을 향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슛슛슛하고 화살이 과녁 꽂히듯이 꽂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열왕기상은 무엇과 무엇이 대립되어 있느냐 하면, 원래 솔로몬은 다윗 왕이 죽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솔로몬이 왕이 되게 되어있었어요. 그런데 그 시기가 앞당겨져요.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되어야 되는데 다윗이 죽기 전에 중간에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왕이 된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제서야 언약 안에 잠복되어 있는 솔로몬의 언약성, 하나님의 약속성을 끄집어내면서, 아도니야의 사고방식과 솔로몬 쪽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이렇게 극렬하게 대조 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거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대조가 안되면 언약이란 것을 알 길이 없어요. “솔로몬은 약속대로 왕 됐겠지” 아, 이러면 솔로몬이 왕 된 이유를 몰라요. 그런데 아도니야가 딱 등장하면서, 아도니야의 사고방식과 극히 대조적인 방식으로 솔로몬은 이미 왕 되기로 작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열왕기상 1장에서 어떤 식으로 그것이 밝혀졌는가? 이것은 아줌마와 아줌마의 싸움이에요. 여기에 5절에보면, 학깃의 아들이라고 했죠. 학깃, 얼른보면 남자 이름 같지만 사실은 여자 이름입니다.

학깃은 다윗의 부인이었어요. 다윗의 부인의 아들 아도니야에요. 그러면 이 다윗의 부인,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는 이미 어른이 되어서 대외적으로 백성들에게 “내가 왕이 될 상인가?”하고 돌아다니고 있고 14살 먹은 솔로몬은요, 열왕기상 1장에서 입도 뻥긋 안 하고 가만히 있어요. 잠복되어 있다고요 이게.

자기가 왕 되는데 자기가 한 말이 한마디도 없어요, 1장 전체에 보면... “왕 되는데 내가 뭐 한마디 할까요?” “하지마.” 아무소리 안 하고 왕 된 사람이에요 솔로몬이.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러면 솔로몬이 왕 되기 위해서 형성된 분위기는 누구 권한이냐? 이거는 학깃이라는 아줌마 말고 또 다른 아줌마가 있어요. 밧세바에요. 밧세바. 아줌마 싸움.

밧세바와 밧세바 같지 않은 여인, 학깃. 그 여인은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어떻게 대비되고 대조적인 차이가 있느냐를 열왕기상은 보여줍니다. 밧세바의 솔로몬은 “너 가만히 있어. 엄마가 알아서 할게. 너 가만히 있어.” 이랬어요. 밧세바의 특징은 이것이 남의 여자에요. 유부녀였다는 겁니다. 열왕기하 11장, 12장 보면 나오죠. 원래 다윗의 아내가 아니고 우리아 장군의 아내였는데 강제로 이 다윗이 그 여자를 강제로 뺏았다고 볼 수 있죠.

뺏았는데 이미 유부녀니까 남편이 있을 거잖아요. 그 다윗이 남편을 죽였어요. 남편을 죽이고 이제 다윗이 강제로 뺏아서 자기 아내로 삼았던 여인이 밧세바입니다. 그런데 이 밧세바가 등장하지 않으면 다윗은 다윗 언약에 준한 왕이 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은 인간의 상식, 인간들 보기에, 선악 체제 보기에 그 사람 참 괜찮네, 훌륭하네, 이런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속의 왕이 아닙니다. 그거는 세상 나라의 왕이에요.

인품 괜찮아, 인물 괜찮아, 체격 괜찮아. 그런 사람 왕 되겠다. 이스라엘 내부에도 그런 사람 있었어요. 여기 열왕기상 5장에 보면, 여기 셋째 아들 이름이 압살롬인데, 압살롬은 이거는 아도니야보다 더 타고난 인품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14장 25절 보게 되면,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남자가 사자털처럼 그렇게 해야 돼요. 우리나라에, 지금은 60 가까이 되었지만, 옛날 가수 가운데 머리털 하고 잘 생긴 사람 있어요. 신승우. 갑자기 신승우가 설교에 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꼭 만화영화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처럼. 그렇게 잘 생겼어요. “그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년말마다 깎았으며 그 머리털을 깎을 때에 달아 본즉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왜 머리털 이야기가 성경에 왜 나오냐? 압살롬은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았고 그리고 그렇게 인품도 대단했는데 남들이 자기 보는 눈도 있지만, 본인이 자기 보는 눈도 있을 것 아닙니까? 눈도 있으니까 이 압살롬도 그렇고 아도니야도 그렇고 공통점이 뭐냐?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워낙 잘생겼기 때문에.

자기부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고, 인물... 인물 이거 어떡해.” 맨날 자기 보면서 자기 인물에 도취 되어서 자기가 자기한테 반해서 “나 같은 인물은 왕이 될 상이다” 아주 자부하고 있던 사람들이에요. 자기부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장차 왕이 될 상 중에서 자기만큼 대단한 인품 되지, 얼굴 되지 다 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압살롬 이 사람이 지혜도 좋아서 재판도 잘해요. 15장 6절에 보면, 사람마다 와서 나한테 재판 받아라해서 중간에 다윗에게 가는 사람을 빼돌려서 자기가 결국은 반란을 일으켜서 죽게 되는데 이거는 아도니야도 마찬가지에요. 아도니야도 마찬가지. 그런데 유난히도 이 솔로몬은 누구 아들이냐 하면, 밧세바의 아들이에요. 흠잡으려면 하자 그 자체죠, 밧세바는...

아버지의 그 간음죄에다가 남편까지 죽였으니까 살인죄, 간음죄에다가 보태서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못났다는 유일한 증거가 뭐냐? 솔로몬이에요, 솔로몬. 그리고 그 증거로 밧세바하고 다윗과 사이에 낳았던 아들은 죽었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보면, 죽었거든요. 죽고 난 뒤에, 사무엘하 12장 24절에,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아도니야나 압살롬은 본인이 본인을 사랑해서 왕 되고자 하는데, 솔로몬의 특징은 뭐냐? 하나님의 사랑이 그 왕자 중에 유일하게 담겨있는 자가 솔로몬입니다. 인간은 자기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 받아주질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아주 다윗을 조져버렸죠. 간음죄에다가 살인죄에다가 다윗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일체의 모든 방어체계가 와장창 무너졌어요. 그 무너진, 자기를 근원적으로 죄인, 나는 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근원적으로 제대로 자기 자신을 아는 거기에 침투하는 그 여자가 밧세바였습니다. 그 밧세바와 더불어 나단 선지자가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전했지요.

그러니까 솔로몬 주위에 포진되어 있는 사람은, 14살 먹은 솔로몬은 아무 힘도 없고 이야기할 것도 없어요. 솔로몬을 지켜주는 것, 하나님의 사랑 받음을 지켜주는 것은 자기 다윗의 죄, 근원적인 죄를 아는 두 사람입니다. 하나는 나단 선지자, 하나는 밧세바라는 아내. 두 사람이 다윗으로 하여금 다윗이 훌륭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랑하심만 고스란히 다윗에게 남기게 하시는거에요.

왜? 이스라엘 왕 자리는 하나님의 왕의 대리자, 여호와 왕 되심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왕이 되신다면, 하나님께 버림받고 사랑받음, 이 두 가지 요소가 일찍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남아 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뭐냐? 다윗 언약에 속한 왕이라고 해요. 다윗이 왕이 아니고 다윗 언약에 속한 왕. 이 사람이 바로 다윗 다음에 솔로몬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 왕은, 자기가 왕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고 죽은 아버지 다윗의 그 자리, 사랑받은 자리에 솔로몬이 들어가는 거에요. 이게 잠언서, 전도서에 나오는 겁니다.

“다윗의 아들의 잠언이라.” “다윗의 아들 전도자라.” 자기 이름은 감추고 죽은 다윗을 계속 내세우는 이유는 이 자리는 내가 왕이 될 자리가 아니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사랑의 자리에 나는 그냥 걸쳐 들어가는 거에요. 그게 바로 언약입니다. 이 언약에 대해서 이미 나단 선지자가 알고 있었어요. 나단 선지자는 다윗 다음에 어떤 왕이 될 것인가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사무엘하 7장 15절, 17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성전 짓겠다는데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다윗으로 하여금 성전을 못 짓게 하시고, “니가 내집 지을려고? 아니야, 나는 사람이 지은 집에 나는 있지 않아.” “그럼 하나님, 하나님은 어느 집에 있는데요.?” “사람이 지은 집에 있지 않는 다니까.” “그러면 어느 집요?” “내가 있을 집을 내가 지을 거야.” “그런데 그 집은 어떤 집입니까?” “내가 다윗의 혈통 안에 내 집을, 하나님인 내가 지을 꺼야.”

이것을 나단 선지자가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나를 위해 집을 지을 것인데 그것은 다윗의 족보다. 다윗의 족보인데 그 다윗의 족보가 있음으로써 이스라엘은 영원히 하나님과 영원한 나라가 된다.”하고 나단이 이 모든 말씀을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했다 이 말이죠. “다윗 당신은 죽어도, 당신의 가문이 남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영원히 거할 집이십니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걸 쉽게 간단히 줄여서 말하면, “다윗의 가문으로 오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십니다.” “하나님 내가 다윗의 대를 이은 후손으로 올거야.” 그러면 다윗의 후손이 하나님이 된다면 그때 하나님의 집, 다시 임마누엘, 백성이 나와 함께 영원히 사는 집, 천국, 약속의 땅, 예루살렘 그래서 만들어지는 거에요. 그걸 이제 지상에서 어떻게 그걸 구현하는지, 다윗이 봤던 다윗 언약을 어떻게 재현하고 다시 반복시키는지, 그 역할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대기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죽고 난 뒤에 들어갈 생각 했는데 이 아도니야가 아주 훌륭한 역할을 했어요. 언약에 있지도 않는, 언약과는 대비가 되는 그 인간이, “나 왕 될래.”하고 등장한 거에요. 왕 될래.

그리고 “왕 될래” 하면서 등장하면서 거기에 같이 아도니야와 같이 붙은 자가 누구냐? 그게 바로 아비아달,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인데, 요압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언약과 대조되는 성격을 가진 인간이고, 제사장 아비아달도 하나님의 언약과 대비되는 성격을 가진 제사장이에요. 그러니까 아도니야, 요압, 아비아달, 3종 세트. 이 3명이 한 조가 되어서 권력을 차지했는데, 이 권력이 이스라엘 속 왕 자리를 놓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비 언약적 왕은 이런 쪽’이라고 보여주는, 이런 쪽.

언약이 아닌 쪽, ‘하나님이 약속한 바가 없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탈락되는 류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 가?’를 열왕기상 초반에 먼저 보여줍니다. 결국 열왕기상은요 끝까지 이 성격이 우세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망해요. 열왕기상, 하가 바벨론 포로잡혀가고 난 뒤에 쓴 책이거든요.

왜 우리는 망했는가? 망하는 요소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우리가 놓치지 말고 그 왕들의 잘못을 다 기재한 책이 열왕기상, 하에요. 그러면 요압은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가? 요압의 문제를 끄집어 내는 데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무엘하 24장 3절에 보면,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다윗이 말년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조사를 했어요. 인구조사를 했는데, 이게 이제 사탄이 격동해서 인구조사가 되었어요. 그때 요압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3절에,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다시 말해서 인구조사를 하지 말라고 요압이 왕의 최측근이니까. 군부의 실세니까 다윗에게 감히 조언을 했어요. “인구조사 안해도 하나님이 인구를 백배나 합니다. 임금님, 인구조사하지 마세요.”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게 왜, 우리 보기에는 굉장히 신앙적 조언처럼 느껴지는데 이게 왜 비 언약이냐? 바로 다윗이 제사장 중의 제사장으로서의 왕 됨을 요압은 보지를 못했던 겁니다.

인구조사 해서 여기에 백성들이 죽어 나갔어요. 3일 동안 죽어 나간 인구가 7만명 죽어 나갔습니다. 그때 이제 이걸 뭔가 다윗이 개입하지 아니하면, 이건 나머지 인구까지 진짜 몰살할 판이에요 완전히.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을 판이에요. 그럴 때 다윗이 뭘 하느냐 하면, 아라우나 타작마당에 나가서 다윗이 친히 제사장이 되어서, 중보가 되죠, 제사장이 되어서 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7만명 선에서 스톱이 되어버려요. 옆에 있는 천사보고, “천사야, 됐다 고만. 그만 죽여라. 됐어 됐어.” 스톱이 되는거에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다윗이 죄인으로 태어났거든요, 자기가 고백하듯이, 시편 51편, 자기가 죄인으로 태어나서 죽어 마땅하다 이 말이죠. 근데 왕만 죽어 마땅하면 안 되잖아요. 백성들도 죽어 마땅함을 경험해야 돼요. 그런데 사탄이 와서 다윗의 마음을 격동해서 인구조사를 하게 되니까 그 다음 부터는 하나님께서 백성들 7만명부터 사흘 동안 죽여나갑니다.

그리고 이 천사가 사람 죽이는 게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아요. 얼른 보면 모압이라는 장군이 말린 것이 잘한 것처럼 느껴지죠. 인구조사는 사탄의 일인데 요압은, “임금님 거기에 말려들면 안 돼요.” 조언했으니까 요압은 굉장히 언약적 인물로 보이지만, 그러나 그게 언약적 인물이 아니라 다윗 자체가 갖고있는 죄인으로서 제사장직을 하는 그 하나님의 언약적 핵심 부분을 다윗이 마지막으로 그 일을 해야되는거에요. 마지막으로.

“백성들이 죄인 맞습니다. 나도 죄인이지만, 백성들도 죄인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어떤 왕이 등장해서 그 왕이 대신 백성들의 죄를 제사를 지내야 비로소 이 죄는 용서가 됩니다.”라는 사실. “그것은 이스라엘 왕만이 할 수 있습니다”라는 그 계시를 다윗은 미리 보여줍니다.

요압은 아도니야 편에 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세욕이 아도니야와 더불어서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원했던 겁니다. 이걸 가지고 전문용어로 정치 9단,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김종필. 정치 9단. 내가 갖고 있는 권세가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는 생각을 끄집어 내는 거에요. 한 5선 국회의원 되는가.

그러면 여기에 아비아달은 또 이게 왜 비언약적인가? 하여튼 비언약적인 3명 다 모아 놨어요. 아비아달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열왕기상 2장 27절에 보면, “아비아달을 쫓아내어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아비아달을 쫓아내는 것은 사무엘상 2장 35절, 거기에 엘리 제사장이 나오는데 그 엘리 제사장 노선을 따라 마지막 끝까지 온 자가 아비아달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에게 저주한 게 나와요.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니가 니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존중히 여기고 그만큼 나를 멸시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너의 제사장 집안은 완전히 작살날 것이고 너는 처소에 환란을 볼 것이고 내 집안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내 단에서 모든 사람들이 젊어서 죽게 되고,” 그 다음에, “너희 가문이 제사장 가문이지만, 거기서 난 사람 가운데 나는 안 쓸것이고, 내 마음에 합당한 다른 제사장을 내가 따로 세울 것이다. 내 뜻대로 한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킨다.” 사무엘상 2장 36절에 나와 있어요.

그러니깐 아비아달이 비록 다윗과 함께 언약 지킨다고 고생하고 압살롬 반란때 충성을 했지만 그 사람 속에 내부에 흐르는 것은 엘리의 저주, 엘리 제사장의 저주 노선이 계속 가는 거에요. 결국 오늘 이 본문이 뭐냐 하면, 그동안 레위 지파 계통의 그 노선이 열두지파 가운데 레위 지파 말고, 이제 다윗 지파로 끊어진 채 노선 이동이 되었다는 거에요.

근데 노선 이동되는데 레위 지파에서 유다 지파로 노선 이동될 때 여기 결정적으로 한 것이 뭐냐?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살인했다는 그 점이 인간이 갖고 있던 선악 체제가 구원받는데, 천국 가는데 아무 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준 거에요. 선악 체계를 향하여 언약과 복음이 화살이 날아가서 그걸 절단하고 끊어버립니다. 그게 끊기지 아니하면 구원은 없어요. 왜? 그게(선악 체계) 있으면 자꾸 자기를 커버하고 선악 체계로 자기를 방어할 생각을 하니까요. 아도니야처럼.

요압처럼 권력 유지하려고. 아비아달처럼 “우리 집안은 엘리 제사장이다.” 엘리 제사장이 뭔데? 저주받은 제사장인데. 따라서 하나님의 저주는 결국 저주로 끝날 뿐이지 노선으로 도약하는 것, 이쪽, 레위 지파, 제사장 말고 제사장이 아닌 지파로 도약하는 거에요. 도약할 때는 이 유다지파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그들. 아무 자격도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왕이 되는 지위를 허락한 거에요. 왜? 간음죄에다가 살인죄니까 뭐 아무것도 없는게 지극히 당연하고 “저한테 왕 직을 주옵소서.”라고 할 말도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 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서 밧세바와 다윗이 낳은 애가 일주일 만에 죽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분명히 했어요. ““당신 아들 죽습니다.”하고 자기집으로 돌아가니라.” 15절,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죽는다 했으면 그냥 교통사고 나든지 죽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그냥 죽지 않고 아파요. 아플 때 다윗이 그 아기를 위하여 밤새도록 엎드려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기도했어요. 말려도 안 돼요. 왜냐하면 본인이 죽어야 되는데, 왜 밧세바하고 자기 사이 애를 왜 죽이느냐 이 말이죠.

본인이 죽어야 되는 데 애를 왜 죽이는지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이유를 알 수 없으니까 무조건 애가 살아 있어야 덜 미안하니까, “하나님, 내 아이, 내가 나쁜 짓 했기 때문에 나를 죽여야지 쟤는 죽이면 안 됩니다.”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여 제가 죽어야지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라고 그 죽어야 될 분과, 죽기 위해서 온 분과 살고 싶어서 환장한 나와 이렇게 어떠한 격차, 간격을, 그 차이점, 격차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에요. 이 간격이 우리를 살리는 거에요.

이 간격이 들어와야 우리는 구원받는 거에요. 천국가는 거에요. 왜? 이 간격이 있어야 구원해달라는 소리를 안 하죠. 주제 파악이 되니까. “나 같은 인간이 무슨 천국을 가요?” 그러니까 천국에 가는 거에요. 왜? 천국이 고스란히 그런 자에게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대로, 100프로 남아있기 때문에...

(애를) 죽였습니다. 죽고 난 뒤에 다윗은 알았어요. 나를 죽이지 않고 아들을 죽인다는 말은 이 죽은 아들의 취지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거에요. 따라서 다윗은 그 하나님의 “너는 죄인이야. 죄인으로 살아 인간아. 그래서 계속 너 대신 죽은 아들을 기억하란 말이야. 너가 죄인으로 사는 것이 이스라엘 왕 다운 태도야.”라는 그것을 간파하니까 다윗이 어떻게 했는가?

자기가 죄인 되기 위해서 모든 처보다 밧세바를 더욱 사랑하고 다윗이 늙을 때까지 밧세바에게 모든 전권을 일임했습니다. 모든 것을 밧세바한테 맡기고 자기는 국정운영을 밧세바를 통해서 전달받는 거에요. 오늘 열왕기상에서.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다윗 언약 안에서만 비로소 하나님이 왕 되심을 드러내는 왕이 등장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왕이었다. 이 왕을 따라서 장차 다윗의 후손에서 누군가 오실 것이다. 이게 바로 열왕기상의 핵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뭘로 둘둘 감았는지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감히 건방지게 구원해달라는 소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을 몰랐으면, 시건방지게 나오는 소리인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도리어 주님 십자가 앞에서 죽어야 될 분은 우리이지 예수님이 아님을 다시한번 깨닫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