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10/13

아빠와 함께 2024. 10. 14. 06:26

히브리서 7:20-22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간단히 이야기 해서 이렇습니다. 시작한 게 있고 끝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되게 하는 방법이 뭐냐? 끝을 시작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 끝이 뭐냐? 하나님의 최종 보증한 것을 집어넣는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 약점 가진 채로의 ‘정녕 죽으리라’를 넘어서는, 다른 보증을 가지고, 끝부분이죠, 다른 끝부분을 우리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는데 뭘 집어넣는가?

바로 22절에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그럼 앞에 있는 보증은 마지막 보증에 비해서는 모자라죠. 율법이라는 보증, 그 보증보다 더 나은 보증이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이제 고린도후서 1장에 나오는데요. 1장 21-22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주셨다. 그 성령의 자리에다가 이걸 집어넣어 보세요. 최후의 보증, 최후의 능력. 이미 끝이 난 그 이후의 능력을 우리 마음속에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이 성령의 보증을 받은 사람은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의 문제점, 우리의 약점을, 그 시작점을 되씹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겁니다.

이미 우리 속에 마지막이 와 있기 때문에 도대체 시작은 어떻게 시작해서 마지막이 미리 와야 되는지를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우리의 시작점을 추적해 볼 수 있는 거예요, 시작점을. 어디서부터 문제가 되었나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우리의 일상은 뭐냐? 기어이 살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살아보려고.

살아보려 하는데 인간들이 구상하고 있는 그 노력은 뭐냐 하면, ‘법적으로 정당하면 더 살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선과 악을 아니까 악한 자는 망하고 선한 자는 잘 된다. 따라서 내가 잘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선하면 된다. 선한 방법은 뭐냐? 성경 말씀 지키면 되고, 믿으면 되고, 성경 말씀대로 살면 되잖아.’ 이런 아이디어가 싹 올라오는 거예요.

성경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이미 왜곡된 마음가짐 가지고 성경을 봐요. ‘내가 이 땅에서 죽는데 성경 말씀 지키면 죽어도 살지 않겠느냐?’ 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구원론이죠. 엉터리죠. 거짓말이죠. 하나님 믿는 이유, 성경 보는 이유, 예수 믿는 이유, 그 이유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덕에 나 자체가 ‘정녕 죽으리라’에서 탈피해서 ‘살리라’로 바꾸려는 하나의 꼼수를 부리고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