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십일조와 맏물

아빠와 함께 2024. 9. 12. 09:16

십일조와 맏물

2024년 9월 11일              본문 말씀: 말라기 3:10-12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3: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3:12)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통해 스스로 활용성을 적용시키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함입니다. 이 활용성에 동원된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을 주신고 그 약속으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십일조이며 이 십일조만 하늘 나라 창고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십일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맏물’이라는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세계에서 맏물의 시작은 이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분명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하고 오로지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태우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불쏘시개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입니다.

아브라함은 압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자식 이삭이 제물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모릅니다. 자기 자신이 제물이 되리라는 것은 꿈에서 생각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안 죽일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이 이삭을 바치는 것은 ‘시험’에 해당됩니다.

즉 ‘시험’이란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겁니다. 하나님 홀로 하시는 일에 초대된 겁니다. 이 일로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바라볼 때, 이미 ‘죽은 자’로 바라본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창고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소위 살았다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은 그 안에 모든 것을 죽이시는 기능이 있습니다. 죽음을 전제해야만이 생명의 열매가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생명입니다. 그런데 생명 안에는 ‘언약대로 죽으심’이 담겨 있기에 결국 생명 안에는 ‘언약의 완성’이 들어 있는 바가 됩니다.

여기서 ‘맏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를 살펴봐야 합니다. ‘맏물’은 할례 언약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제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레 19:23-24)

즉 약속의 땅에서 생산된 농산물이라도 함부로 먹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는 농산물을 먹는 그 당사자조차 하나님 언약의 배달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할례란 원래 사람보다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약속의 땅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과목까지 할례를 행합니다. 그래서 거기서 나온 열매라고 해서 다 십일조 대상이 되는 게 아닙니다.

십일조 바칠 것인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라”(민 18:12-13) 이 십일조를 실질적으로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살 땅이 없는 사람입니다. 레위인들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입니다. 3년 만에 드리는 십일조는 그들의 것입니다. “제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신 26:12)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복이란 땅이 아니고 땅의 소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복의 원형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복’이라는 것은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즉 그 어떤 복도 인간 소유가 되지를 못하고 언약 소유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창 24:35)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창 26:12-14) 그런데 복의 수혜자가 되려면 그 사람은 언약이 주는 죽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아벨이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와 사울 둘 모두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이 두 사람 중 누가 언약에 의해서 죽임에 쫓기게 될까요? 바로 다윗입니다. 이유도 없이 맹목적으로 죽음을 쫓기게 됩니다.

이 죽음, 바로 할례 언약이란 혈육의 생식 능력의 고리를 자르면서 육신의 죽음을 뜻하는 언약입니다. 이처럼 맏물이란 그 안에 죽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다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삭은 비록 숲 속의 양으로 인해 살아났지만 실제적으로 이미 죽은 자가 됩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죽은 자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은 이미 죽은 인간에 의해 달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착하게 살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착함에 기초해서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완전 죽음을 기초로 해서 생명을 주십니다.

할례 언약의 죽음을 품은 그 맏물에게만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창고를 허락하십니다. 이스라엘 율법에 시형제 혼인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맏이의 자식만 계속 인정하시는 겁니다. 맏이가 되는 자가 자식이 없으면 형수는 시동생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죽은 맏아들의 대를 이어 자식이 되는 제도입니다.(마 22:24-28) 이처럼 맏물은 언약적 죽임으로 채워집니다. 

이것을 실제로 맏물다운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시간적인 할례 상태라 할 수 있는 1,2,3일 지나고 제 3일째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유일하게 통과하신 분이십니다.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만이 유일한 맏이로서 하나님께서 인정받으심을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임하게 되면 바로 그 사람이 예수님의 형제요 천국 창고를 채울 좋은 십일조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것을 가지고 살 생각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강-말라기 3장 10-11절(십일조와 맏물) 24091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3장 10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오늘 이 말씀은 우리 주님한테는 일체 잘못이 없고 우리 인간에게 모든 잘못이 인간에게 있다는 전제로 하시고 이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대상이 누구냐 하면 약속의 땅에 살던 하나님의 백성을 언약 백성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을 주신 적이 있는 그 백성을 상대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너의 이야기 하지 말고, 네가 생각하는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너에게 준 이야기가 어떤 결실을 맺고 돌아오게 하는 그 공간이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인데 그 열매가 안 돌아온다 이 말이죠.

안 돌아오니까 하나님께서 질책을 하시면서 십일조라는 형식을 돌아오는 시스템이 작동이 되어야 되는데 지금 나의 창고에 너희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창고가 텅텅 비어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내 한테 내라고 할 때 하나님도 어지간히 궁하기는 궁하시는구나, 우리 인간한테 의지할 정도로 나약한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그렇게 돈을 심하게 밝힐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에 땅에 있는 자기 백성이 잘못이 있고 하나님 자체는 잘못이 없다는거에요.

이게 약속의 땅에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 사이에 형성되는 정서적인 기류입니다. 이방인들이 “나 하나님 믿을래” 이런 이방인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가 안돼요. 이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옛날에 일제 시대 때 종로 5가를 누비면서 상인들 삥 뜯은 깡패들이 있었어요. 동대문파. 대표자가 누구냐? 김또깡. 김두환입니다. 김또깡이가 깡패인데, 김또깡 말고 그 뒤에 많은 깡패들이 시라소니 해가지고 깡패들이 많이 나왔어요.

근데 깡패들이 그 상인들에게 삥을 뜯으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너희들 장사하도록 잘 지켜줬기 때문에 다른 파들이 너를 괴롭히지 않도록 내가 다 지켜줬잖아. 만약에 니가 우리 동대문파한테 만약에 자릿세 안내면 그때 다른파가 와서 너희들을 괴롭게 하리라. 그러니까 너희들이 나한테 세금을, 자릿세를 안내는 것은 자릿세를 거두는 이 김또깡, 동대문파에 잘못이 있는게 아니고 안내고 있는 너의 잘못”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이렇게 생각을 한번 해보면, “깡패인가?” 지금 현대인들 입장에서는 이거에요. “하나님 먼저 잘해주면 고맙다고 여기고 섭섭하지 않게 해드리겠다”는 이런 자세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뭘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이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인생을 흡족하게 안 만들어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세금 안 낸거다 이 말이죠.

흡족하게 한다면, 만약에 갑자기 난데없이 10억을 벌게 해준다면, 1억 안 내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다음에 100억을 벌게 해줄거니까. 10억 내면 되니까. 그래도 9는 남잖아요. 우리들 생각에서 십일조를 내라고 강요하는 하나님 쪽에서는 하나님이 이런 말을 듣고 항상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우리 인간 쪽에 뭔가 잘못돼 있다는 생각을 해야 될텐데 이 본문만 떡 하면, 어떤 생각 드느냐 하면, “아이 참, 줘라, 줘라.” 이런 식이에요. “그 뭐 인간의 콩고물을 뜯어 먹어도 어디 벼룩의 간을 떼먹지, 뭐 인간보고 십일조를 내라고 하느냐.” 이런 식으로 “줘버려. 줘버려.”

다시 말해서 여전히 십일조를 안 내나, 내나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근원적인 문제가 없다는 것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 십일조를 거론하는데, 인간들 생각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관리에 자금이 지금 재정, 국가 재정이 모자라서 “좀 재정 좀 채워라. 뭐 돈이 좀 있어야 너희에게 이스라엘, 유대 나라를 내가 돌볼게 아닌가” 이런 식으로 협박 공갈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자기는 잘못이 없고 “하나님이 궁해도 많이 궁하구나. 그러면 대자대비한 우리 마음, 인간들이 마음이 넓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조금 도와주면서 십일조 내주자. 뭐 이렇게 경품까지 걸렸으니까.” “십일조 내면 너희들이 앞으로 이 동대문에서 장사하는데 깡패들 안 오도록 내 조치해줄게.” 이런 복을 받는다는 거에요. 지금, 그러니까 하나님 쪽에서 복이라고 제시하는 그것 조차도 너희의 것은 하나도 없고 다 원래 내 것이야 라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진작에 이 약속의 땅에서 멸망해도 마땅한데, 내가 너희들 십일조 할 때까지 좀 기다려 봐가지고 만약에 그래도 이렇게 내가 십일조 내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 내면 그때는 너희들은 황충이 와 가지고 너희가 마지막 남아있는 토지 소산의 모든 열매와 과실 다 따먹고 너희들이 애지중지하는 포도나무 과실까지 다 열매 없도록 추수 전에 다 떨어지게 만들겠다. 수확물이 전혀 없게 만들겠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님과 인간의 대등한 관계가 아니고 철저하게 주종관계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죠. 자, 그러면 오늘 본문들 이제 차근차근 한번 살펴봅시다. 먼저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 여기서 창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창고. 하늘나라의 창고가 있다는 이 뉘앙스는 신명기 28장에 12절에서 나온 건데요.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에 아름다운 보고,” 보고가 창고에요.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창고를 열어서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라고 해요.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내 율례와 법도를 지킬 경우에만 복을 이 말이에요. 어디서 주는가? 창고에서, 창고에 있는 복을 주겠다는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창고 안에 뭐가 들었는데 그걸 주느냐? 창고 안에 들은 것이 십일조라는 겁니다. 그러면 십일조 창고죠. 십일조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못 들어가는 창고에요. 그러면 그 하늘나라의 창고에 들어갈 수 있는 십일조가 도대체 작물 가운데서 어떤 작물에게 해당되는가. 민수기 18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 즉,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 처음 익은 모든 열매.” 처음 익은, 첫 소산. 맏물이죠.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려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 드려라.

자, 그렇다면 첫 열매, 첫 소산, 약속의 땅에서 어떤 생산, 농산물이 생산된다는 것은 인간의 노동의 결과가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는 거에요. 사람이 농사한다고 소산을 낼 수 있는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약속의 취지가 품어 있는 채 생산하게 되어있어요. 약속의 취지가 약속이 빠진 그냥 뭐 포도, 무화과나무, 양, 염소 소용없습니다. 약속을 그 안에 담아 있어야 돼요. 땅에, 그러니까 그 약속의 땅은 어떤 신기함을 제공하는 땅이 되는 겁니다. 창세기 25장 35절과 창세기 26장 12절 14절 24절에 보면 이거는 찾을 필요도 없이 제가 설명하면 돼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아브라함을 창대케 했다. 양과 은, 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에게 크게 두셨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사람, 언약을 받은 사람입니다. 언약을 받았다는 그 티를 하나님이 아브라함 가는 곳마다 그 소산물, 그 소유물을 늘이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은 언약으로 인한 복 받은 사람이라는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이번에는 창세기 26장, 이번에는 뭐냐? 이삭이에요. 26장 12절에서 14절도 그렇고 12절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이 애쓴다고 이렇게 백배나 거부되는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때만 가능한겁니다.

근데 이삭이 뭐며 아브라함이 뭐라고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안 주는 복을 그들에게 복을 주는 겁니까? 그거는 그들은 복을 운반하는 복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약속을 운반하는 운반체이기 때문에 “약속이 약속대로 유지되게 되면 복이 주어진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거에요. 소유물이 늘어난다는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이 소유물은 아브라함의 소유물도 아니고 이삭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왜 그러냐? 이삭이 범죄하고 아브라함이 범죄 하면 그 소유물 다 날아가죠.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그냥 눈에 보이는 인간, 아브라함과 눈에 보이는 이삭을 이용해서 이 언약의 주인이 이 아브라함에게 준 모든 복의 주인이라는 뜻이에요.

언약을 내리신 그분이 이 복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브라함, 이삭 그 개인적인 것 말고 이걸 집단화시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약속을 언약적 약속을 그대로 구현하는 집단이 생겼으니,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은 어느 땅에 사는가? 약속의 땅에 삽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에 나오는 생산물은 이것이 이스라엘의 소유가 아니고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소유고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스스로 성취했다는 증거물로 이스라엘이라는 일꾼을 동원해서 생산물을 확산시키고 확대시키고 풍성케 한거에요.

그러면 소유만 많으면 그게 복이냐?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 복의 내용이 세밀화 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레위기 19장 23절에서 24절인데, 오늘 설교에서 첫 번째 부딪히는 어려운 대목이니깐 이거는 잘 봐야 돼요. 레위기 19장 23절 24절,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것이요,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에 할례라는 말이 나옵니다. 할례라는 것은 사람 중에서 남성의 생식기 끝을 자른걸 할례라고 하는데 할례라는 것은 사람을 대상으로 주어지는게 할례인 줄 알았는데 여기 레위기 19장 23절 24절에 보니까 “각종 약속의 땅,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받지 못한 걸로 여기되” 이렇게 되는거에요.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데 그게 몇 년이냐? 삼년 동안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1년, 2년, 3년이 지나야 되고 제 4년째는 니가 먹을수는 있되 할례받은 과일이라는 의미를 니 속에다가 집어 넣어야 된다는 것.

어렵죠?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이야기했고 누구든지 할례받지 않으면 내 백성이 아니라고 했고, 할례받지 않으면 거룩한 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만드시고 거기에 열매조차, 과목조차, 과수마저, 전부 다 거룩한 과수를 맺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 창고에 들어갈 그 십일조, 십일조는 맏물입니다. 그 맏물이 그냥 하나님의 창고에 못 들어가고 거룩한 창고이기 때문에 거룩이라는 절차를 지니는 그러한 과수. 포도, 무화과나무. 그런 것들, 양, 소. 낙타도 마찬가지고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는 거에요.

할례받은 과일을 드려야 된다. 할례받은 생산물을 드려야 된다는거에요. 그러니까 이 과일 안에도 하나님의 할례 언약이라는 약속이 그 안에 삽입되어있고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드릴 때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맏물 십분의 일이에요. 처음 소산 십분의 일이에요. 십분의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처음난 것이다 이 말이죠. “니 것이 아니고 내 것을 내 것으로 가지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완성자는 하나님이 스스로 재배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의 땅의 활용성을 충분히 활용하시고 그것의 결과를 자기에게 적용시키십니다. 그러니까 그 적용시키는 그 강조점이 뭐냐? 맏물에 있는거에요. 그러면 맏물은 반드시 할례를 행한다. 맏물과, 십일조라는 맏물과 할례의 연관성은 뭐냐? 도대체 어떤 것을 받겠다는 말인가? 왜 1년, 2년, 3년 동안은 왜 못 먹는가? 1년, 2년, 3년은 1년, 2년, 3년이라는 시간으로 표현한 할례입니다. 그러면 할례의 뜻은 뭐냐 하면, 피를 내는 거에요. 출애굽기 4장에 할례를 피 언약이라고 하는데, 피는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

러니까 이것을 연결시켜 보면, “우리는 1년, 2년, 3년 동안 그 열매를 못 먹는다. 왜? 우리는 열매를 먹을 자격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런데 3년이 지나고 3년 지나고 네 번째에는 먹을 수 있다. 왜? 할례의 시기가 끝나고 완료되었기 때문에. 할례라는 언약 자체에서 오는 생명이 할례 언약을 경유함으로써 할례 언약이 완성되었다는 그 뜻으로 이제는 니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먹는 그러한 생명의 백성이 된다는 뜻이에요. 첫째 둘째 셋째 그다음에 부활. 어디서 많이 관련성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왜 돌아가시고 그다음 오후 다섯 시에 왜 안 일어났죠? 주께서 돌아가시고 일주일 뒤에 왜 안 깨어났죠? 주님 죽으시고 한 24시간 만에 다시 왜 부활하지 않았습니까? 왜 3일을 경유해야 될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모든 인간은 이미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죽어야 되는 이미 죽은 인간이에요. 죽어 마땅하고 이미 죽은 인간이에요. 죽은 인간은 하늘나라의 창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거기에 저장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인간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무엇을 경험케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너희들이 죽음이라는 것을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 죽음을 체험하고 언약에 의해서 죽음을 경험한 그 자가 될 때 그 존재가 될 때 나는 하늘나라 창고에 들어갈 수 있는 내 백성이라고 그렇게 간주 하시겠다는 겁니다. 상당히 어렵죠. 맏물이라 할 때 이게 어렵지만 여러분 쉽게 하려면 아브라함의 맏물이 누구죠? 맏이가 누굽니까? 먼저 이스마엘이, 아들이 있어요.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이미 죽음을 낳는 인간의 혈육적 자식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은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없는데 하나님께서 천사 세 명을 보내서 “내년 때에 니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름은요?” “니 방금 비웃었잖아.” “하이고. 이미 제 아내가 태가 죽었는데 이 나이에 무슨 자식을 낳습니까? 진짜 웃긴다 그지? 허허허” “방금 그게 이름이라. 방금 웃었잖아. 농담이라 여기고 웃었잖아.” 그러니까 천사가 갑자기 웃었다는 데서 확 차고 들어오니까 아브라함 왈, “제가 언제 웃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웃었습니까?”

이 웃음가지고 천사하고 지금 시비 걸고 있어요. 그것 아무것도 아닌데. “웃었잖아.” “안 웃었습니다.” 웃음이라는 그 이름. 웃음이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는 뭐냐? 하나님께 받는 어떤 것에는 인간이 끼어들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은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어요. 하늘나라에 가는 그 기초는 이삭을, 이스마엘 말고 두 번째 태어난 그 이삭이 맏물이 돼요. 맏이가 돼요. 그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어떤 체험을 하느냐 하면, 아버지의 손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옆에 있는 양으로 말미암아 대신 죽음으로써 살아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천국의 창고에 들일만한 거룩한 백성의 요건이 뭐냐? 말씀과 너 목숨과 바꾸라는 겁니다.

말씀 지켜서, 십일조 지켜서 복받을 생각하지 말고 그 말씀하고 말씀 받아들이고 “니는 그냥 죽어라” 이 말이에요. 그러면 말씀이 니 속에 들어와서 너는 말씀의 운반체가 되어 가지고 그럴 경우에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게 왜 그러냐하면 창세기 3장에 인간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죽었습니다. 이미 죽었어요. 따라서 착한 것도 죄가 돼요.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니까. 착한 것도 죄가 되고 악한 것도 죄가 돼요. 인간이 자기가 기어이 안 죽을려고 버티고 살라고 애쓰는 그 기초가 뭐냐? 착하게 살면 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냐? 착하게 사는걸 기초로 해서 나한테 찾아올 생각하지 말고 좀 죽어라 이 말이죠. 니 죽음이 너의 기초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럼 자살할까요? 어떻게 죽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구약성경 다윗과 사울의 관계에서 여러분 잘 밝혀집니다. 사무엘이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 이상하게 사무엘 선지자는요, 이스라엘 내에 왕을 동시에 두 명의 왕을 세웠어요. 하나는 사울, 사울에게도 기름 부었습니다. 그 사울도 기름 부은자에요. 그다음에 누구냐 하면 사울이 왕으로 있는 그 가운데서 몰래 사울한테 걸리면 안 되니까 무서워가지고 몰래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줬습니다. 그러면 졸지에 이스라엘 왕이 기름부은자가 두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두 명의 이스라엘 왕이 동시대에 두 개가 생기도록 왜 허용하느냐? 한쪽이 한쪽을 죽으라고 잡아 다닙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받은 동생이에요. 하나님께 속한 자를 땅에 있는 하나님이 거부한 자가 땅에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거기서 나온 게 흘린 것이 아벨의 피에요. 그 아벨의 피의 요소가 그 뒤에 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모든 언약 속에 그 하나님에게 받아지는 자의 피가 언약의 내용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모리아 산에 못 바쳐요. 아들 이삭을 바쳐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사실은 죽은 자에요. 왜냐하면 제사로 인하여 죽은 자인데 이삭이 죽어야 될 자리에 어린 양이 옆에 숲에 있는 수양이 들어와서 죽었기 때문에 이삭은 그때부터 뭐냐? “진작에 죽어야 되는 데 하나님의 준비하심 때문에 지금 살아났다.” 따라서 이삭 안에는 벌써 죽었다가 내용으로 포함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죽었다가 포함된 이삭인 거에요. 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복 안에 “맏물, 희생되었다는 맏물의 내용을 담아라” 하는 그것이 바로 십일조에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어떤 소유물도 내 것이라는게 있을 수 없죠. 죽은 자에게 소유물 줘서 뭐 할껀데. 이미 죽었는데. 죽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소유물이 아니고 생명이에요. 부활의 생명입니다. 부활의 열매에요. 따라서 신약성경을 앞두고 구약성경 마지막 말라기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붇지 아니하는가 보라.” 이랬거든요. 봐야지요. 어디서 봐야 되는가? 신약에 와서 봐야죠.

그러면 시험은 뭐냐? 시험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일이라는 거죠. 홀로 하시는 일이다. 그 시험을 했던 경우가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창세기 2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시험하사 네 맏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 한테 바쳐라 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그때 아브라함이 내 아들 죽을 즈음에 옆에 내 아들, 내 이삭 죽지 마라고 옆에 뭔가 준비해 놓을 것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사전에 몰랐어요. 몰라야 돼요. 왜? 하나님이 시작한 일을, 하나님이 하실 것이란 그것만 믿었어요.

아들한테 불쏘시개 들고 가면서 아들이삭이 진짜 참다 참다 못 참아서 묻는 질문이 있었어요. “아버지.” “왜?” “진짜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그래.” “우리 지금 뭐하러 갑니까?” “어, 불 질러서 제물 바치러 가잖아.” “아버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제가 불쏘시개는 있는데 아버지,” “우리 같이 가는데도, 물론 그때 경상도 말로 한 건 아니죠. 아닌데, “아버지,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알아서 준비하실 것이다. 그때까지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된다는 것. 그래서 지금 내가 가는 아들의 모습이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마지막 모습이에요. 끝입니다.

속으로 아들한테 얼마나 미안했겠습니까? “아들아 미안하다.” 이건 뭐 “하나님이 주신 자식 하나님께 바치기 때문에 니 너무 섭섭해 하지 마라.” 뭐 속으로 얼마나 했습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 왔을 때 그 자리에 양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아들만 있고 불쏘시개 있습니다. 불 때워서 아들이 또 도망치고 반항해서 아들을 묶었어요. 아들을 묶어놓고, “제단에 좀 누워 볼래?” 아들이 “뭐 유튜브 찍습니까? 뭡니까? 아버지 장난이 심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버지 나를 죽일 시늉만 하는거죠 진짜 죽일생각 없죠?”

칼 퉤. 칼 갈고. “아버지 칼 갈아도 지금 하나님보고 계시니까 내가 아들까지 바칩니다. 아버지 지금 폼 낼려고 하는거죠.” 아브라함도 몰랐고 이삭도 몰랐습니다. 이게 바로 시험입니다. 십일조 해놓고 그다음에 통장 들여다 보는 것은 시험 아니에요. 10만원 했으니까 우리 집 은행 잔고가 차고 넘치도록 좀 뭐 100배까지는 너무 심하고 30배 정도는, 십일조 10만원 하고 30배가 얼마죠? 300만원 아닙니까? 뭐 이런 펀드가 다 있어요? 이런 펀드가 다 있습니까? 시험 해보라고 해서 시험해봤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300배 100배 줄줄 알고 현재 65년동안 십일조 한 사람 있어요. 65년동안. 아마 죽을때까지해도 없을거에요.

이유는 뭐냐? 내가 살아있다는 이 기초는 주께서 십일조 하든 십의 이조를 하든 안 받는다는 거에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 시험에 통과한 것은 십자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약속된 분이에요. 하루, 이틀,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시고 사흘날에 드디어 부활하셨잖아요. 선악과 따먹은 주제에, 선악과 따먹은 자체가 하나님께서는 안 받아요.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생명 나무와 거부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주는, 천국의 자기 창고를 채울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제도를 만들었느냐 하면, 마태복음 22장 24절부터 약간 긴데 제가 빨리 읽겠습니다. 24절부터 27절까지요.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하고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비 걸기 위해서 이 질문을 한 겁니다.

여기서 이걸 시형제 결혼법이라 하는데요. 시형제 결혼법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스라엘 가운데서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맏이의 자식이에요. 왜? 맏이의 맏이 됨이 그 후손에게 고스란히 가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는 우리 가문의 맏이였다. 맏물이였다. 그 맏물이 계속해서 그다음에도 맏물, 그다음에도 맏물이 되어야 되는데 만약 큰아들이 자식이 없다. 그러면 그 시동생하고 결혼해서 자식을 놓되 그 자식은 시동생의 자식이 아니고 형님의 자식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자식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삼촌으로 불러야 돼요, 삼촌.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의 율법 가운데 시형제 결혼법이라 하는 것은 거기에 죽음이라는 요소가 들어감으로써 맏물은 반드시 죽음이라는 요소가 안 들어가면 맏물이 생성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약속의 땅에 농사짓는다고 하나님께서 받는 게 아니에요. 그 십일조를 받는 게 아닙니다. 죽음을 통과한 과수여야 되고 할례 되어야 되고, 할례받은 과수여야 되고 할례받은 인간, 하나님의 할례 언약이 포함된 인간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는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인생을 살고 세상을 살면서 한번 보세요. 전부 다 사람들이 뭐 때문에 삽니까? 안 죽으려고 살잖아요. 안 죽으려고. 그러니까 말라기 오늘 본문 한번 봅시다. 3장 11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그러니까 만약에 니들이 십일조 안 하면 그동안 메뚜기야.” “예.” “우리 내 백성 십일조 하니까 들어가지마, 들어가지마.” 하고 하나님이 금했는데, 만약에 십일조를 안 하면, “황충아, 싹쓸이 소산물 다 날려버려.” 그러니까 황충이라는 기능은 뭐냐? 하나님이 그동안 은혜 준 것을 철거하고 회수하는 기능이 황충이에요. 메뚜기에요.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한 것은 거기서 밥 먹고 살려고 준 게 아니에요. 생명을 가질 수 없는 어떤 인간도 먹을 수 없는 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생명을 받을 수 없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어서 너희가 그 율법 아래 그 십일조 안에 들어가게 되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생명을 먹게 되는 혜택을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다. 그러니까 니 만약에 이 율법을 거부하면 그동안 너희가 이 땅에서 밥 먹고 살은 이 땅에서의 나는 살기 위해서 하나님 은혜 줬다는 그 살기 위함 자체를 완전히 취소시켜 버리는 겁니다.

취소시켜버려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로마서 8장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통점은 아들의 형상인데, 아들의 형상은 뭐냐? 맏이에요 맏이. 어떻게 맏이가 되었습니까? 어떻게 예수님 자체가 십일조가 되었습니까? 시험을 통과했잖아요. 무슨시험? 아버지께 전적으로 맡김으로 말미암아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그 시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있는 그 시험 통과. 어린 양을 통해서 대신 이삭이 살아나는 그 시험. 그 시험은 바로 예수님만이 통과하고 어느 인간도 통과를 못 했어요.

왜? 모든 인간은 자기가 죽기 싫어서 살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착하게 살면 안됩니까?” 착하게 사는 게 기초가, 부활의 기초가, 생명의 기초가 아니에요. “그냥 죽어줘. 그냥 좀 죽어.” 못 죽겠다는데 어떻게 해 뭐. 안 죽고 십일조해서 부자 되겠다는데 뭐, 어떻게 그걸 천국에 갑니까? 십일조하고 지옥 가고 무슨 이런 일이.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형상을 위해서 로마서 8장에 성령님을 준비했습니다. “성령을 준비해서 네 안에 사는 것은 너가 아니고 예수님이 네 안에 살아.” 부활이고 생명이 네 안에 산다 이 말이죠, 그죠?

요한복음 11장에,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 무슨 뜻입니까? “니가 이거 받을 쨉이 돼?” 이런 뜻이에요.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니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바로 십일조의 완성이고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하늘의 창고가 천국에 그런 자들만 가득 차게 되는 겁니다.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바로 십일조고 예수님의 영이 임함으로써 이제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의 십일조의 완성품으로서 하나님의 소산물로서 약속의 땅의 생산물로서 농사물로서 하나님의 맏이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나라 창고, 천국 창고. 그 누가 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지킬 수 없는 이 십일조를 예수님 홀로 혼자서 다 지키셔서 다 지켰다는 소식을 우리 속까지 집어넣으니 우리는 비로소 십일조도 알고 시험도 알고 주님이 어떤 큰일을 하는 것도 알고 생명이 뭔지를 알고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까지 아니 오직 주님만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240911)요약 말라기 3장 10~12절(십일조와 맏물)

어제 한 수요설교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요약이 가능한 것은 지난 지 24시간이 안됐기 때문에, 아직까지 해마에서 기억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어제 제가 강조한 것은 이겁니다. 하나님이 깡패라는 거. 이걸 웃으면서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성도에요. 깡패 맞습니다. “내가 봐줘서 너희가 지금 숨 쉬고 살지, 안 봐줬으면 5년 전에 너는 이미 죽었어.” “맞습니다, 예에, 그렇지요. 그렇고말고요.”

이렇게 되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 그루밍(grooming, 사전적 의미는 길들이기, 꾸미기 등을 의미함, 그러나 그 뒤에 성범죄라는 단어가 붙으면 친분을 활용해 심리적으로 지배한 후 성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뜻한다.) 돼야 되고, 어느 정도로 이게 가스라이팅(gaslighting, 상황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여 결국 그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당해야 돼요?

그래서 지금 마귀들은 주님에게 가스라이팅 안 당하기 위해서 지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지금 당하면서도 그게 합당하다는 거, 그걸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있어요. 그게 이스라엘에 대한 요구 사항이거든요. “너희들 지금까지 약속의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은 내 덕인 줄 알아.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어.”라고 할 때, “아이고, 지당한 말씀입니다.” 왜 이 말을 안 하고 있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말을 하려면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이 없어야 돼요. 다른 신이 없어야 되는데, 이미 그 사람들은 바알 종교에 물들었습니다. 바알 종교에 대해서는 부산 강의에서 제가 집중적으로 이야기 했어요. 성경에 바알 얘기가 얼마나 많이 나와요? 바알 섬겼다, 아세라 섬겼다. 도대체 바알이 뭔지를 설명도 안 해주고 “바알을 섬겼으니까 너는 이제 저주 받는다. 내가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했지? 그런데 왜 바알을 섬겨?”

바알이 뭡니까? 요새 무슨 바알이 있어요? 요새 현대에 바알이 없잖아요. 그럼 성경책은 뭐냐? 옛날 책으로 끝났나? 요즘은 효용도가 완전히 없어진 그냥 옛날 책인가? 지금은 신 자체를 안 믿잖아요, 신 자체를. “아직도 네가 신을 믿느냐? 복 받기 위해서 신을 믿냐? 네가 알아서 하면 복 얻는데, 아직도 복 달라 하느냐? 믿지 마라.” 그렇게 할 때, 이 말은 누가 들어도 이건 바알이든, 뭐 여호와든, 알라든 아예 신을 안 믿는 시대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시대에 바알 종교를 믿어서 그들이 망했다는 게 지금 우리한테 무슨 의미로 다가옵니까? 아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바알 종교의 특징은 바로 자연신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옛날 사람들이 똑똑해요, 지혜로워요. 무슨 질문을 던지느냐 하면, 자연은 왜 질서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진짜 자연 같으면 자연이 혼돈스러워야 자연스러워요. 자연에 규칙이 있으면 안돼요. 왜, 해는 규칙을 갖고 있느냐?

그게 그들에게 무서움으로 다가가는 거예요, 무서움으로. 뉴튼이 오면 안 무서워요. 이거는 뭐냐, 만유인력의 법칙에 준하기 때문에 안 무서운데, 세상의 해와 달과 별이 하나의 질점이에요, 질점. 물체의 추상적인 개념이 질점이에요. 물체를 물체라 하지 말고 하나의 물리적인 운동의 점으로 봤을 때는 이건 질점이 되거든요. 그 질점과 질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정확한 관계가 있으면, 그건 물리학 공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전에는 그게 없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뭐냐? 이건 정확한 신이 있어서 정확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한 겁니다. 우리가 넘볼 수 없는 신이. 그런데 신이 뭘 하느냐? 분명히 겨울 되면 죽는데, 분명히 죽어 없어졌어요. 그런데 봄 되면 딱 어디 숨겨놨다가 기어 나오게 만들어요. 부활하게 만드는 거예요. “아, 죽어도 사는구나. 그러면 이 신을 믿어야지.” 바알 신의 특징은 뭐냐? 바뀌지 않고, 내가 죽었다가 내가 산다는 데에 있어요. 부산 강의에서 했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바알 종교를 믿고 보니까 바알 종교는 나를 안 건드리더란 말이죠, 나를 안 건드려. 왜냐하면 바알 종교의 내용은 자연에서 왔기 때문에 인간도 자연의 일부잖아요. 자기의 뜻을 반영하고 거기에 대해서 어떤 기적적인 행운을 쟁취하면 거래가 끝나는 신이에요. 정성을 다하여 믿고 바치면, 저쪽에서도 내 정성을 보고 응답하는 거예요.

왜? 내 정성이 자연 속의 일부로 파급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양자역학으로 말하면 양자 얽힘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게 일어나는 것이 저쪽에 원인이 있어서 내게 일어났고, 그 원인에 내가 반응을 보이면, 반응을 보이는 이걸로 인하여 추가되는 결과가 저쪽에서 나한테 보내주는 것, 양자 얽힘, 양자 얽힘에서 나오는 양자 중첩도 비슷한 내용이라 볼 수 있어요. 현대는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이건 쉽게 말해서 자연이 곧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모세가 애굽에 내려갔을 때, 자연 작살났습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그 재앙들에 대해서 애굽의 마법사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이거는 사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으로 파악이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보내주세요.” 라고 했거든요. 바로 어제 수요일 날 했던, 파악되지 않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깡패에요.

인간의 모든 권한과 권리, 가치, 의미를 일방적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종속시키는, 일방적으로 종속시키는, 그루밍도 이런 그루밍이 없어요. 이런 가스라이팅이 없어요. 그냥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죽으라 하면 죽고, 살라 하면 살아, 그것뿐이에요. 끝이에요. 그래서 어제 김또깡(김두환) 이야기를 했잖아요. 영화배우 외할아버지인가 하는 깡패. 깡패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성경을 보겠어요, 덮고 멀리 하겠습니까? 덮고 멀리하잖아요. 이거는 말이 통하는 분이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침투하고, 지적하고, 나무라는 것을 주특기로 삼는 신이기 때문에 주고받는 게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거에요. 이미 하늘나라 창고, 천국이죠, 천국에 갈 사람은 언약에 부합되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언약이 뭐냐? 세상의 혈육과 끊어져야 돼요. 세상의 혈육과 끊어지는 것이 할례입니다. 끊어졌다 이 말이죠. 아까 강의(240912 안양)처럼 우리의 어머니가 하늘에 있다는(갈4: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이 뭔가 끊어진 거예요.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러면 약속의 땅에서 농산물이 나오지? 그게 바로 뭐냐?

언약에 의해서 메뚜기가 제 때 안 오게 했던, 애굽에게 내렸던 열 가지 재앙이 똑같은 인간이고, 똑같은 속성을 가진 인간이고, 육이지만, 나는 특별 조치로, 깡패이기 때문에, “다른 시라소니파가 침투 못 하도록 내가 막아준 결과다. 그래서 너희는 나한테 몽땅 바쳐도 너희는 그걸 당연한 걸로 여겨야 돼. 내가 막아줬으니까. 내가 다른 파에서 자릿세 뺏는 거 내가 막아줬잖아. 그러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십일조 내.“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면 십일조는 뭐냐? 십일조는 맏물이죠. 이 십일조를 뭐로 바꾸느냐? 맏아들로 바꾸는 겁니다. 이게 출애굽기의 유월절에 맏아들만 받기 때문에, 항상 복은 맏이에게 오지, 다른 데엔 오지 않아요. 야곱도 그렇고, 이삭도 그렇고, 아브라함도. 맏이한테 복이 와요. 맏물이 되는 거예요. 맏물은 할례를 행해야 돼요. 아브라함에게 할례, 할례를 행해서 육에서가 아니고,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분이 맏물이 되고, 그 맏물만 하나님께서 그 동안 금지되어 있던 생명나무를 허락을 해버립니다.

그러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시스템을 만드는데, 그게 시형제 결혼법이에요. 형이 자식이 없이 죽었어요. ”아이고, 형은 안됐다. 자식도 하나 없이.“ ”아니야. 줄줄이 시동생이 있는 이유가 뭔대? 시동생이랑 혼인해서 죽은 아버지의 자식으로 해라. 그러면 죽은 아버지는 뭐냐? 죽은 계명이 살아있는 거예요. 죽은 계명이 뭘 만든다?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거예요.

이게 마태복음에 보면, 시형제 결혼법을 이야기 하면서 “네가 부활을 오해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죽음으로 끝나는 하나님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하나님, 나는 산 자의 하나님이다. 산 자의 하나님이다. 죽었는데 살아 있잖아. 아브라함도 살아있고, 이삭도 살아있고, 야곱도 살아 있잖아.”(마22:32-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그게 바로 창고에 채울 수 있는, 창고를 채우기 위한 십일조의 취지였던 거예요. 성경은 그렇게 엮여져 가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깡패처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냐? 말라기라고요. 그 이야기 해놓고 그 다음에 와서 십일조 해라 하는 게 아니고, 그 뒤에 4장으로 넘어가면 뭐냐? 하나님께서 작살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십일조 하라’는 말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안할 걸 알고, 이미 안한 존재로 확정됐다는 것을 내가 뻔히 알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창고에 못 들어가도록 아주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겠다는 이야기가 뒤에 나와요. 심판 받을 때 “하나님 깡패 같아.” 그런 소리 하지마. 이미 율법 줄 때부터 깡패였어, 율법 줄 때부터.

그래서 지난 수요일도 그랬고, 어제도 마찬가지지만, 십일조 하는 그 자체가 이게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일조하면 자기 소유물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창고가 가득하니까, 뭐 자기 창고 아니고, 하나님 창고지만, 그게 쏟아지면 재래식 화장실에 가면 물 땡기는 거 있죠? 잘못 땡기면 물바가지 씁니다. 십일조가 땡기는 줄이에요.

땡겨버리면 준비된, 흥부전에 나오는 박 썰면 금은보화 쏟아지듯이 십일조만 땡기면 바가지로 쏟아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십일조는 뭐냐 하면, 아까 쌍둥이 얘기 했죠? 내가 죽을 때 비로소 영생 얻는 쌍둥이가 나오듯이 나를 죽이는 것이 사도바울의 소원이듯이 나를 죽여주시는 게 웃을 일이고, 고마운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