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증거의 무더기

아빠와 함께 2024. 6. 6. 08:53

증거의 무더기 

2024년 6월 5일                   본문 말씀: 말라기 1:1-5

(1:1)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1: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1: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페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1:5)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And your eyes will see this and you will say, "The LORD be magnified beyond the border of Israel!"

 

세상은 각자 자기 형편대로 삽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는 일은 ‘사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는데 편하게 수월하면 ‘복’이라고 말하고 힘겹고 원활하지 아니하면 ‘저주’라고 말들합니다. 따라서 행여 자신의 일의 결과가 대자연의 변덕에 의해서 황폐해지면 지나간 것은 잊고 다시 쌓아올리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당연하고 상식적이고 평범한 이런 생활 방식이 하나님께서 저주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온통 저주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하나님의 저주에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여태껏 모든 인류가 한결같이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약’에 의한 삶이 방식이 이질적으로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야곱의 생애’입니다. 그런데 정작 야곱 본인은 다른 이들의 평범한 삶과 전혀 차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복과 저주라는 차별성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지정하신 겁니다. 야곱과 그 외 모든 민족이나 에돔의 민족들은 자신들 공동체의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여타의 모든 가정들이 종족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언약의 개입없이 인간들만의 존재성만으로는 차이나지 않습니다. 이 ‘차이 없이’이 바로 다양성의 물결, 다양성의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삶을 독자적으로 꾸려 나가고 이런 면들을 서로가 존경해주고 인정해주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언약이 투입되면 사정이 확연히 차이납니다. 언약에 의해 사랑을 받은 자는, 다른 모든 인간들 사이에 간격이 생깁니다. 균열이 나타납니다. 언약으로 인해 경계가 발생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일하시면서 생겨나는 특이함입니다.

이 특이함과 이질성으로 인해 여타의 모든 자들과 구분되어 ‘복’ 혹은 ‘사랑받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언약 투입이 사건화되어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창세기 21:30-31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웃하는 이방민족 아비멜렉과 격차가 생기는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생겨나게 하신 겁니다.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26:26-29에 보면,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삼촌 집에서 20년을 기거하게 되어 있는데 이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삼촌의 가족과 야곱의 가족에 균열이 생기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야곱의 두 아내는 라반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하나님의 작용으로 갈라서게 됩니다.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창 31:14-16) 어느날 야곱의 가족은 라반 몰래 도주하게 되는데 라반은 집요하게 야곱의 일행을 10일 동안이나 추격합니다.

야곱이 자신의 재산을 가져가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시비걸지 못하게 되었지만 문제는 라반의 자기 신, 곧 드라빔을 야곱이 가겨 간 것에 대해서 라반은 용서가 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휴대용 신을 가져가 자는 야곱이 아니라 라헬이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라반에게 공격을 당할 만한 형편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드라빔을 가져온 것을 들키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야곱 가정의 개입은 어디까지는 재산 문제가 아니라 신(神)의 문제였던 겁니다. 즉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신을 자유로인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하는 이 세상 풍토가 곧 저주라는 겁니다. 참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대중적으로 누구나 믿을 수 있는 신을 일체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와 존재 사이에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사건을 일으켜서 언약적 대상자가 그렇지 않는 일반 신을 믿는 자를 단호하게 분리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라반이 드라빔을 자신의 신이라고 여기고 야곱이 믿는 하나님을 보편적이고 유일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창 31:29-30)

이처럼 자기 존재성을 지키기 위해 믿는 모든 신은 드라빔 류에 해당되는 우상입니다. 심지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믿고자 하면 그것은 또 다른 드라빔의 일종입니다. 예수님은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소위 합당하고 정당한 야곱의 후손이라고 여긴 그들마저 하나님의 복받은 민족이 아니라 저주받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간 존재로부터 죽음을 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존재를 자신이 지키겠다는 그들의 의해서 살해당한 하나님이 곧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성취하신 그 십자가 사건은 모든 존재를 산 자로 보지 않고 죽은 자로 보십니다. 예수님의 이 사건을 성령님께서 가지고 이 세상에서 복과 저주를 구분짓는 일을 하십니다.

즉 성도란 복과 저주 사이에 간격으로 자리잡는 사건 속의 인물로서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사이에 십자가가 자신의 중심에 있는 자들이라서 전의 언약의 인물들처럼 증거의 무더기로서 사건화된 삶을 삽니다. 따라서 이들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겁니다.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갈 5:1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뭘 해서 구원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사랑하고 복된 자되게 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강-말라기 1장 1-5절(증거의 무더기) 240605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1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아멘.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말라기라는 선지자입니다. 이 선지자는 역시 이스라엘이 멸망이 기정사실화 된 상태에서 찾아온 선지자이기 때문에 여기 1절에 보면 “이스라엘에게 경고”했다. 경고 했다는 말은 정신 바짝차리면 살 수 있다는 그런 뜻 보다는 이스라엘이 무너진다 할찌라도 이스라엘에게 남겨진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 언약의 말씀은 조금도 차질없이 완성 된다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경고라는 것은 ‘니가 잘되어야 된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너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은 여전히 매사가 잘 되고 있으니 너는 그 하나님의 잘 되심을 믿어야지 너의 형편가지고 쭈물딱 거리고 자기 형편가지고 뭐 “에게, 나 이것밖에 없네, 이것만 남았네. 나 절망이다”라는 이야기는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경고라는 말 자체가 갖고 있는 것은 어떤 뜻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기대하는 뜻과 일치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의 뜻은 같이 하나로 묶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이 묶을 수 없다는 그 하나님의 뜻이 언약에 실려있고요, 그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뜻이 함께 할수 없다가 역사속에서 계시가 되게되면 야곱은 에서와 함께 하나가 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에돔과 함께 같이할 수 없다를 분명히 하는겁니다.

함께 할수 없다는 거에요. 둘 사이는 짜그라져야되고 쪼개져야되고 분절되어야 되고 균열 되어야 된다는거에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된다는 겁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이런 말씀을 하셔요. “에서는 야곱의 형이아니냐?” 이래 되어있어요. 2절에보면. 에서는 야곱의 형이죠. 무슨 뜻이냐 하면 에서와 야곱은 같은 집안사람이란 말이죠. 같은 집안사람이라면 우리의 상식에 의하면 절대로 쪼개지거나 깨어지거나 도저히 남남일 수 없는 관계.

그게 바로 형제고 그 형제중에서 쌍둥이라 하는 것은 태어날 때 같은 어머니 태에서 동시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같이 떨어진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생각 못하죠. 그런데 가장 가까운, 그것도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지간에 하나님께서 둘로 쪼갠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다룰 때 아무리 가까운 인간이라 할찌라도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단절되어있고 끊어진 상태에 있다. 그걸 야곱과 에서의 출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의 예를 들어서 야곱의 갈길과 에서의 갈길이 서로 달랐다. 서로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겁니다. 그냥 다른 길로 가게 되면 야곱도 독자적으로 하나고 에서도 독자적으로 하나다. 이거는 뭐 모든 인간이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어릴때는 한 식구지만 결혼하고 난 뒤에 뿔뿔이 헤어지게 되면 어떻습니까? 전화도 안오죠. 뭐 이렇게 유교집안 같으면 1년에 강제로 추석날과 설에 강제로 조상 제사지낼때는 강제로 얼굴 보이지만, 제사 없어버리면 지금 3년째 5년째 10년째 얼굴 안봅니다.

주로 10년째 헤어지더라도 가족이랍시고 모이는 경우가 있어요. 그거는 뭐냐하면 연세많은분의 장례식 할 때, 그때는 봉투에 부조 좀 가지고 돈 넣고 파티마 병원 장례식장이나 큰 병원 장례식장 뭐 억지로 만나죠. 만났는데 심지어 형님 죽었는데 찾아오지않는 동생도 있어요. 저 압니다. 별볼일없다는거에요. 우리 만나지말자. 어떤 구실로도 만나지 말자. 그정도로 이 세상은 결혼하게되면 자기 식솔이 있으면 전부다 못만나요. 혹시 모르죠. 또 돈빌려달라는지, 안그러면 담보잡힐일 있으면 누나한테 전화해서 “누나 은행 대출좀 부탁하자.” 이러면 모르겠지만, 거의 만나질 않습니다.

그걸가지고 뭐냐? 다양성이라고 이야기해요. 다양성. 각자 각자 독보적 존재면서 동일한 입장에서 여럿이 되는거에요. 여럿. “그래, 니는 니 종교 믿든지, 천주교, 불교, 난 기독교 믿고.” 각자 각자 다양하게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겁니다. 그러면 이 다양성 있는 이러한 인간들끼리 어쨌든 간에 뭔가 세상을 쳐다보게 되면 인간이 다양하다는 것은 각자 자기 인생을 따로 산다는 것은 누가 누굴 관여못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실험적으로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어요.

그들이 각자 따로 사는데 따로 살면서 결혼해서 자기 자식들이, 가족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들은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하루일과를 살아가는가? 자기 식구끼리는 대화해요. 대화한다는 것. 그 대화한다는 관계가 공동체 관계입니다. 어릴 때 같이지낸 형제 일가친척 삼촌 아재 뭐 전혀 대화 안해도 아침에 눈만 뜨면 자식이나 손자보고는 대화가 되지요.

예를 들면 작약 꽃을 피우는 어떤 시골의 농장하는 사람 실제 생활 모습이 인간극장 kbs 아침에 보면 쭉 나오는데, 저는 유념히 봐요. 그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대화를 하는가? 작약꽃을 농장하기 위해서 친정엄마 다 부르고 딸도 다 부르고 약학대학 준비하는 애까지 부르고 다 불러서 농장을 하는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대화. 그 대화, 다시 말해서 인간은 도대체 뭘 하고 사는가?

인간은 뭘 하고 살지요? 자기 식솔들 그냥 일하고 생존에 필요한 일들 하는 것, 그러며 살지요. 각자 각자. 그걸 성경에서 뭐냐하면 육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육. 육이고 그 공동체 육은 나름대로의 저들끼리는 대화가 되는데 그 다른 바깥에는 대화가 안되지요. 그럼 전체 성경을 보면 그거를 가지고 뭐라고하냐하면 비일관성이라고 합니다. 각자 각자가 따로 따로 노는거에요. 하나로 통합이 안되는거에요.

그러면 그들이 만약에 어떤 종교를 갖는다. 믿음을 갖는다. 또는 신을 갖는다면 신이 사람수 만큼 신이 많아요. 이걸 이 세계를 무슨 세계라 하느냐? 다신의 세계. 신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 신의 세계가 인간세계입니다. 여럿 신의 세계. “니는 니 믿고 싶은 신 믿고 나는 내 믿고싶은 신 믿든지 아니면 안믿든지 그거는 내맘대로다.” 이런 시대에요. 그러한 비일관성. 자기 가족의 생계에 몰두하는 대화만 주고받는 그 세계. 그 세계가 에돔입니다. 그 세계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돔이에요.

그래서 에돔의 특징은, 에서 형이 만든 후손들의 나라, 그게 에돔인데 이 에돔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은 언약적으로 저주받았다고 이야기 하는거에요. 언약적으로 저주받았다. 그러면 같은 형제간인데 에서는 저주 받았다면 그러면 야곱은 뭘 받았는가? 야곱은 사랑받았다고 되어있어요. 여기 2절 끝에,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절에 보면, “에서는 미워했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로마서도 이걸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나님의 뜻은 여럿을 인정하지 않아요. “다 같이 개성있고 다 같이 자존심 있으니까 다 인정해주자.” 이거는 하나님께 저주 받고 미움 받는 자들의 안목이고 생활방식이에요. “인간은 자기 편한대로 살면 됩니다.” 이게 바로 저주에요. 자기들 끼리 공동체로 대화하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렇다면 그들이 저주 받는다는 의미는 뭐냐? 거기에 나왔어요. 여기 3절에 보면 저주 받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 여우죠. “짐승에게 붙였느니라.”라고 3절에 해놓고 4절에, “그럴지라도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한곳을 다시 쌓으리라.” “다시 복구하면 되지, 회복시키면 되지”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에돔의 의식을 언약앞에서 이렇게 말라기를 통해서 알려주는 것은 오늘날 일반인들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한번 보라는 거에요. 그러면 전부다 에돔이에요. 저주받은 사람들입니다. “내 인생이 만약에 좀 차질이 있다. 그러면 내가 더 열심히 해서 원상복구 하면 되잖아. 왜? 그게 그렇게 해야 내가 사니까.” 거기에 필요한 대화, 사고방식, 그리고 지혜, 노력 그거는 우리가 조달하면 되니까. 그게 평소에 인간들이 사는겁니다.

그러니까 말라기의 선지자의 말이 듣는사람 입장에서는 좀 의아해요. 상식적이지 않아요. 말라기 선지자의 말이. 그냥 우리가 아는 대로 살면 각자각자 그냥 제각기 자기 삶 살면 돼요. 그게 바로 정상인데, 성경은 그걸가지고 그게 하나님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 듣는 에돔은 기분 되게 나쁘겠죠. 그러면 야곱은 사랑받았다는데 그 사랑받은 모습좀 봅시다. 도대체 야곱은 사랑받았다는 것이 무슨뜻이냐는거에요.

야곱은 전체를 볼 때 비일관성이 아니고 야곱에게만 일관성이 있고, 야곱에게만 하나님께서 언약을 거기다가 집중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야곱에게만 집중시킨거에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야곱에게 주었던 그 언약과 그리고 에돔한테 없던, 에돔뿐만아니고 다른 민족에게도 없는 그것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요. 균열이 뭐냐? 경계, 경계선, 차이남, 갈라짐, 섞이지 않음 이런걸 의미하는겁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서 하나님께선 생명나무 심어 놓으시고 인간을 생명나무 없는곳으로 보내시면서 인간이 사는 것과 생명나무 있는 곳에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불꽃으로 균열을 시켜놨어요. 이 구조, 이 구조를 그대로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는 이 세상 바닥에 그걸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적용시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되어있는 사람은 그 일상,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과 어딜 가도 경계선이 발생되고 균열이 생기는 현상이 일어난다는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언약.

그러면 야곱은 균열이 일어나도록 그렇게 애를 썼느냐? 천만의 말씀. 절대로 야곱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야곱도 보통 고만고만한 인간이에요.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 뭐 요셉도 마찬가지고, 전부다 고만고만한 인간입니다. 에돔하고 전혀 다르지 않아요. 따라서 야곱은 그냥 자기가 존재가 있고 자기가 살아야 되니까 그냥 열심히 살 뿐이에요. 열심히 사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똑같이 열심히 사는데 야곱이 가게되면 다른쪽이 야곱을 건드리면 그 다른쪽이 사달나게 되어있어요. 이것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야곱의 아버지 이삭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그 하나님을 뭐라고하느냐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야곱의 할아버지 되는 아브라함에게 이상스럽게 건드리면 아주 저주를 받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창세기 20장에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이라는 그러한 땅에 갔다가 그 족장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뭐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건드릴 뻔 했어요. 건드릴 뻔. 뻔했는데 아비멜렉 족보의 여자들이 임신을 태가 닫혀버렸어요. 임신이 안되어버렸습니다.

이게 뭐냐하면, 한쪽은 미워하고 한쪽은 사랑한다는 주의 의지가 강렬하게 아브라함을 데리고 이 지상에 그걸 펼쳐 나가고 전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일을 벌이는 것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는거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뭐 그 전에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이 아내를 가지고, 가뭄이 있어서 애굽을 내려갔다니만 애굽에 그 바로 왕이 그 아브라함의 아내, 그거는 건드릴 뻔 이 아니고 건드렸지요. 그날 밤에 죽을 뻔했습니다. 바로왕이. 그걸 식겁했다해요. 건들지 말아야할 자를 건드린거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기도해 주니까 다시 태가 열렸는데, 그다음에 창세기 21장 22절에서 34절까지 긴게 나오는데요. 어떤 내용이 나오느냐 하면 이걸 압축해서 이야기하면, “아베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되” 뭐냐하면 우물가지고, 우물이 있어야 생계가 유지되잖아요, 목축하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우물에 대해서, 25절 그냥 읽어 볼게요.“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뭐 우물 때문에 쟁탈전이 벌어진거에요. 종들사이에. 그러니까 그때서 뭘 했느냐 하면, “그렇다면 이거는 몰라서 그랬으니까 여기서 우리가 우물 가지고 맹세하자”라고 해서 31절에, “두 사람이 맹세하므로 이름을 브엘세바라 하였으니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었다.”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이렇게 만났는데 그 두 존재가 만났는데 맹세의 우물이라는 그러한 새로운 이름이 등장하는데는 그 아비멜렉의 존재와 아브라함 존재 사이에 다퉜다는,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차이나는 균열된 사건이 일어나서 두 존재가 격리된 거에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 하냐하면요. 존재를 믿으면 구원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존재, 예수님이라는 존재, 성령의 존재를 믿는다고 해서 구원되는게 아니에요. 그게 뭐냐하면 그거는 언약이 없을 때 지식적으로 그렇게 믿게 되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구원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냥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구원하는게 아니고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언약을 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구원을 해주시는거에요. 근데 그 언약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에요.

구원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 존재를 인정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예수님, 성령께서 일으킨 사건이 있어요. 그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은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겠다는거에요. 이땅에 있는 어떤 존재도. 왜냐하면 인간은 생명나무 들어가는데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가 뭐 그득그득 까딱까딱 걸으면서, “나는 생명을 따먹으러 간다.” 이런 것 없어요. 착하면 구원받는다고요? 착해서 왜 구원을 못받느냐 하면, 그 두루도는 화염검 때문에 생명나무 근처를 갈 수가 없어요.

근데 인간은 자꾸 자기속의 착함을 키워서 착함이 키워진 나라는 존재를 나라는 존재로서 생명나무 가는 곳 거기에 합류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나로 착함으로 무장해서, 예수님은 착할거니까, 예수님 착함과 내 착함이 일치되지 않겠는가? 서로 공통된 요소가 있으니까 아는 사이가 되어서 구원받는게 아닌가? 자꾸 이런 아이디어를 하는데 그건 존재라는 존재 개념에서 나온 아이디에요. 그 존재는 잘라져야돼요. 사건에 의해서 토막나야 돼요. 갈라져야 돼요. 사건에 의해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터지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그 십자가 사건으로 내 존재가 사건 안에서 내가 죽은 존재로 사건화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구원 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말라기 보면서 제가 은근히 염려가 되는게 뭐냐하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죠.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야곱이란 존재는 구원받고 에서란 존재는 지옥간다. 이렇게 해석하는데, 야곱도 구원 못받아요. 야곱이 구원 받으려면 아브라함이 구원 못 받듯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찾아와서 아브라함이 사건화 되어야 되듯이, 이삭도 마찬가지고요, 야곱이 구원 못받아요.

야곱은 하나님에의해서 갈라짐을 통해서 이스라엘로 바뀌어야 돼요. 야곱이라는 존재가 이스라엘 사건화 된 야곱이어야 된다 이말이죠. 참 이게 말로하니까 어려워요. 야곱이 구원 받지 못합니다. 야곱이 구원받으면요, 야곱의 후손인 유대인들 다 구원받아요. 그게 아니고 주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했다는 말은 그 야곱이 예수님이고요. 예수님이 사건을 일으킨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은 종전의 나와 주님께서 인정하는 나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내가 알던 나는 십자가로 죽었고, 내가 알지 못하는 나는 십자가 안에서 살았고” 이렇게 사건을 증거 할 수 있어야 돼요. 사건을. 그 다음에, 이삭을 한번 봅시다. 여기 이삭 보기 전에 창세기 31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창세기 31장에보면, 라반하고 야곱하고 틀어져서 지금 헤어질 마당에 있었어요.

라반이 20년 동안이나 무임금 무노동으로 자기 조카를 열정페이 하나로 부려먹었어요. 그러니까 누가 불만이냐하면 딸들이 불만을 일으키는 겁니다. 가족간의 대화가 안되는거에요. 공동체가 안되는거에요. 공동체에 균열이 일어납니다. 딸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역시 그걸로 인하여 야곱도 불만이 있었어요. 그런데 31장 내용을 쭉 보게 되면, 어떤 내용이 나오느냐 하면 31장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을 꼽으라 하면, 그것은 뭐냐? 야곱의 하나님과 야곱의 그 삼촌되는 라반의 신이 다르다는거에요.

5절에,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야곱이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서 막대한 소유가 증가하게 되었어요. 버드나무 이상한 방식으로 해가지고 실하고 통통한 양들은 전부다 야곱것이 된 그 사건 이후입니다. 이후에, 라반의 종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라반의 종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라반의 아들들이라고 되어있는데, 라반의 아들들 또는 종들이,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라고 31장 1절에 하고 있습니다.

결국 한 식구가 라이벌 관계에요. 누가 더 많은 재산이 있는가? 지금 라반하고 그 사위하고 아들 패 하고 싸우고 있는거에요. 정말 이거는 재벌 가계 구도에서 후보자가 아들이냐 사위냐 그런 문제에 돌입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5절에 뭐냐하면 전에보니까 재벌 총수죠. 삼촌. “라반의 안색이 우리보는 안색이 많이 달랐어”라고 낌새를 하면서 “그럴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있다.” 여기 내 아버지가 누구냐하면 바로 이삭이에요. 이삭의 하나님은 지금 나와 함께있다는거에요. 이삭의 아버지가 나의 하나님으로 계속 연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삭에게 하나님은 언약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가? 그게 창세기 26장 20절 22절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에섹이란 다툼이라고 했고요.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서로 적이 되었어요. 그걸 신나, 대적이라 했다 이말이죠.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그때부터 이삭은 브엘세바로 올라갑니다. 따라서 이 브엘세바라는 곳이 뭐냐하면, 언약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다루는 방식과 일관되게 언약이 있는 사람과 비일관적으로 자기가 하고싶은 사람과의 완전히 차별화, 완전히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그러한 격차를 보여주는 장소가 브엘세바에요. 그 브엘세바에서... 브엘세바 나오죠. 그러고 난 뒤에 그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이 거기서 맹세합니다. 또 맹세해요. 여기서 까지는 너꺼고 이거는 내것이다 라는 구분을 지어줘요. 구분을.

창세기 31장에 보면 똑같은 일이 또 반복됩니다. 라반이 자기의 재산을 뺏을까 싶어서 라반이 양털깎는데 가요. 양털깎는 그 사이에 도주를 합니다. 야반도주죠. 소유 다 끌고 아내 둘 끌고 다 데리고 야반도주를 시도합니다. 시도 할 때 3일 만에 조카가 자기 재산 다 빼돌려가지고 도망쳤다는 것을 알아요. 3일 알면서 며칠 동안 추격전을 벌이느냐 하면 7일동안 추격전을 벌입니다. 그래서 잡아요. 드디어 10일만에 잡아요. 그 때 이동한 터키에서 이스라엘쪽으로 내려오면서 도망친 거리가 640km. 그러니까 얼마나 황급하게 야곱이 도망쳤느냐 하면 하루에 64km씩 간거에요.

그래서 하면서 이런말을 합니다. 야곱을 추적할 때 29절에 보면, “너를 해칠만한 능력이 내손에 있으나”라고 되어있거든요.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젯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를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되어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반이 여호와라고 말한게 아니고 야곱, 너의 신이 어젯밤에 나한테 가타부타 너를 해치지 말라고 나에게 언질을 줬다는거에요. 너의 신이. 그러면 삼촌 라반의 신은 어디있죠? 라반의 신은 포터블, 휴대용 신이 있어요. 가지고 있는신. 그게 드라빔입니다.

라반은 이 드라빔을 섬겨도 아무 이상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라반은 언약적 존재가 아니에요. 언약적 존재가 아니니까 일반 사람들이 흔히 자기 종교를 갖는 것이 자유이듯이 거기에 비일관적으로 각자 자기 종교 하는 것이 그게 전혀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문화속에 있었던거에요. 자연스러움 속에. 특별함속에. “야곱 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고, 니는 니대로 살아 나는 나대로 살아.” 이게 상식적인데 문제는 그런 생각 자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심어준 그 하나님의 마음은 아니다 이말이죠. 그뜻은 아니에요.

드라빔은 어떤거냐하면 드라빔은 대중적이고 그리고 보편화된 신이에요. 보편화는 다양성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인간이 지가 필요하면 나름대로의 지 부적같은 것 할 수 있는 휴대용 신. 갖고 갈수 있는 크기가 30cm정도. 그게 발굴이 되었으니까 드라빔들이. 드라빔을 좀더 축소하면 펜던트. 목걸이에 달수 있고 장식도 할 수 있겠죠. 요즘같으면. 그 당시에는 돌로 만들고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장식품 하기는 뭐하지만, 어쨌든 간에 뭔가 일을 결정할 때 사업을 할 때, 거래처 할 때 장사 할 때 농사 지을 때 수시로 나만을 위한 신이에요. 나만을 위한. 우리 가족과 가정을 위한 신이 뭐냐? 그걸 가신이라해요. 가신. 가정의 신. 그게 드라빔이였습니다.

딸 라헬은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누구한테? 아버지한테. 아버지한테 그러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라반의 가족 자체에 균열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딸을 못믿고 딸이 아버지를 못믿어요. 딸이 보기에 아버지가 자기만 사랑하고 딸의 가정, 그러니까 야곱이죠. 사위를 철두철미하게 이용했다는 것을 알아요. 14년동안, 결혼하기 위해서 14년동안 그냥 무상으로 일하게 했고 6년동안 그냥 무상으로 일했어요. 야곱이 철저하게 일했습니다. 근데 삼촌은 그런 야곱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니는 우리 집안이잖아. 사위 잖아. 내것이 니것이고 니것이 내것이잖아. 그 뭐 꼭 품삯을 받아야 돼? 내 다 니 물려 주는거야.” 라는 식으로 속여왔던거에요. 10번씩이나 속여왔던거에요.

그걸 누가 아느냐? 딸들이 알았어요. 그래서 31장 14절에,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앵벌이도 이런 앵벌이가 없습니다. 딸 노래 잘한다고 딸이 항상 소녀때 가수 무대에 올려 놓고 아버지는 그돈가지고 사업하다가 다 말아 먹고, 우리나라 연예계 한두번이 아니잖아요. 수두룩 하잖아요. 아내 노래 잘한다고 아내 노래시키고 지는 사업한다고 다 떨어먹고. “우리 집안인데 집안끼리 돈이 뭐?” 이런식이에요.

딸들은 화가 끝까지 났습니다. 그 라헬은, 라헬은 언니보다 얼굴은 이쁘지만 성질은 아주 매운데가 있는 모양이죠. 아버지를 복수하는 방법이 뭘까? 20년동안 이용당한 그 복수를 한번에 할 복수는 뭐냐? 평소에 아버지가 죽고 못사는게 있었다는거에요. 아버지가 돈보다 자식보다 더 소중한게 있었습니다. 그건 아버지의 신이였어요. 드라빔이었습니다. 그걸 훔쳐나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황급하게 나올까를 뻔히 알았어요. 그래서 31장 30절에 보면,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니가 너희 아버지 집에 들어가는건 인정하겠는데,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 이 삼촌이 야곱보고 니는 니 신한테 돌아가지 왜 내신까지 도둑질해야 되느냐.

“니는 니대로 니 신 믿고 나는 나대로 신이 있잖아. 왜 남의 종교를 그렇게 폄하하느냐”, 이런식이에요. 그러니깐 이 라반이라는 사람은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그동안 언약적 원칙,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대해서 라반은 완전히 감각이 없어요. 완전히 죽었어요. 죽고 나는 내가, 내 잘되고 우리집안 지킬 수 있는 신이 있다면 그걸로 나는 족하다는거에요. 왜냐하면 그건 나의 존재와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내 존재가 멀쩡하게 잘된다면, 그 신이 드라빔이든, 오늘날 드라빔이 뭐냐? 예수에요. 하나님이고 성령이고 이게 드라빔이에요.

왜? 내 존재를 강화시켜주니까요. 내 존재를 쪼개지는 않잖아요. “니 죽어 마땅해.”가 아니잖아요.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믿는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요. 예수님이 나를 지켜주는 예수님이 아니고 나를 죽이는 예수님이에요. 주님이 나를 죽이는 이유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내존재만 생각하고 존재만 지키고 존재만 사수하는데 정신이 다 팔려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식으로 불을 통과못해요. 두루도는 화염검을 통과 못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 교회를 보면서 이게 우상이다, 우상의 재단이다, 단체라고 보시면 돼요. 그냥 우상이에요. 드라빔. 오늘 드라빔 몇 명왔는가 보자. 드라빔 신봉자들이에요. 드라빔 신봉자. 그러니까 32절에서 야곱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외삼촌 신이에요. 우리는 아버지의 신, 이삭의 하나님이고, 외삼촌은 외삼촌 신 그게 드라빔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드라빔은 라헬이 자기 엉덩이로 깔고앉았지요. 그리고 난 뒤에 들키지 않았습니다. 들키지 않음으로써, 들키지 않게 하시는 것이 바로 주께서 묻지 못하게 하시는 겁니다. 들키지 않음으로써 여기에 4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 들키지 않은 상태에서, “그래, 내 신을 안가져 갔으니까 내가 잘못생각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니는 니 길을 가거라.” 중간에 오고가는 이야기는 옛날 과거이야기, 삼촌이여 나를 20년 동안 사기쳤잖아요. 그런 이야기, 주고받는 이야기. 결론이 뭐냐? “그래, 보내줄게. 가거라. 우리 좋게 가자. 그리고 여기서 까지는 내꺼고 여기선 니꺼다”라는 것을 또 아브라함 또는 이삭이 했던 것처럼 여기서 돌을 가지고 무더기를 만듭니다. 그것을 가지고 47절에, ‘여갈사하두다’ 이거는 라반동네의 사투리고요. 이걸 히브리 말로 하면, ‘갈르엣’ 또는 ‘미스바’라고 하는데 이게 뭐냐? 무더기. ‘증거의 무더기’에요. 증거를 나타내는 무더기.

이 증거는 너 인생하고 내인생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사건으로 개입하심으로써 완전히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 있음으로써 우리는 완전히 다른길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거에요. 자,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말라기를 통해서 끝으로 생각해야 될 것은, 이것은 지금 삼촌이고,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은 외인들이에요. 그러나 말라기에 보면, 마지막은 뭐냐? 삼촌하고 원래 삼촌이니까 이촌간이 아니잖아요. 멀잖아요. 근데 여기 형제간에 야곱과 에서 사이에도 꼭 이같은 사건이 터져요. 사건이.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

‘유대인들은 천국간다’, 이게 아니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사건이 와요. 그 사건으로 언약이 완성된 야곱, 그건 뭐 십자가 사건 속에 새로 만들어진 언약적 이스라엘이죠. 야곱. 그 외에는 전부다 에돔. 가장 가까운 형제간 까지 오게 되면, 에서와 야곱이 형제간인데 형제간 마저 둘로 쪼개지는 최후의 사건,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게 증거의 무더기에요. 하나님이 언약을 완성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그러한 새로운 사건의 결과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이 어디있느냐? 오늘날 성도 안에다 집어넣었어요. 성도안에다가.

그래서 성도를 건드리면 저주받아요. 이건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성도를 해꼬지하면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신다 했어요. 이게 뭐냐하면, “봐, 내 존재 중요하지.” 그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과연 나라는 존재가 존재로서 붙들고 있는지 아니면 매일 삶이 세상에 나가서 십자가 사건을 뿜어내고 있는 사람인지, 그것부터 결정해야 되죠. “거봐 나 성도 맞잖아.” 그거는 소용없어요. 그건 백날 건드려야 잘건드렸다 할거에요. 우리가 드라빔이 아니고 나로하여금 죽은자로 매일같이 만들어 내고 그 하나님의 십자가란 증거만 우리속에 계속해서 뿜어져 나올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야곱, 성도로가 이야기하는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 나를 전제로 한 것이 치명적인 오류였고 잘못된 생각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십자가로 새로 만들어내신 십자가를 증거하는 증거의 무더기로서 저희들을 사용함을 새삼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