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함께 2024. 3. 21. 09:08



2024년 3월 20일                 본문 말씀: 스가랴 13:1-2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13: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샘이란 은밀하게 숨어 있으면서 만물을 살리는 물이 분출되는 곳입니다. 따라서 샘이란 국소적입니다. 편재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근원적인 출처를 찾아 나서고자 한다면 철저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심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샘터는 인간이 우리 자신의 멀쩡하게 유지하는 것을 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숨겨놓은 생명의 샘터는 인간의 죄와 더러움과 만나게 됩니다.

이는 곧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전적으로 죄요 더럽다는 생각을 할 위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하나님을 찾아나서 보겠다는 시도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가 누구냐에 대한 관심사를 병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샘터는 죄와 더러움을 동반하면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동안 인간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참된 샘터주님을 찾을 수가 없었던 걸까요? 그 예가 누가복음 5:8에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주님의 조언에 의해 고기를 예상보다 많이 잡았으면 예수님고 붙어 다녀야지 왜 예수님보고 떠나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인간들에 있어 최종 자신의 근원은 자기 자신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죄와 더러움이요 거짓 선지자요 악한 귀신의 영향력입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창피스러운 상황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들의 심보는 자신이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상한선으로 두고 대인관계에 나섭니다.

그래서 끝까지 자신을 지키려는 성향 때문에 계속해서 죄와 더러움을 쌓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면서 인간의 본질을 노출하시는 식으로 생명의 샘을 알려주십니다. 그 예가 출애굽기 17장에 나옵니다. “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 17:1-6)

샘은 단단한 반석 아래 숨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반석은 찢어지고 깨어지지 아니하면 사막을 통과하는 이스라엘을 살리는 물은 어디에서나 구할 수 없게 됩니다. 이 바위의 깨어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 죄와 더러움이 된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를 못했습니다.

이처럼 죄를 씻어 생명을 주는 샘인간의 오해와 늘 맞딱드리는 경우를 통해서 열립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십니다. 여기서 동일한 오해가 발생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3-15)

이처럼 이 세상에는 영원한 생명의 샘이 없습니다. 이 ‘없는 샘’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것은 다윗족속과 예루살렘 거민과 관련해서 주어지게 하십니다. 이들이 잘나가서가 아니라 그들이 모든 인류의 죄와 더러움을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그 사건의 환경을 조성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와서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서 드러나듯이 예수님께서 최종적인 생명의 샘이라면 이는 곧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세상에 없는 듯이 출현’되는 방식이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인간이 우상을 제작하는 것은 이미 존재한다고 자부하는 인간 자신을 긍정적으로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신이 없기에 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신에게 눈과 코와 귀와 입을 달아 붙이는 것은 보고 듣고 보고 말하는 것은(시편 115:4-8) 신의 제작자인 인간쪽에서 실시하기 위함입니다. 곧 인간 자신을 자기를 위한 최종 샘으로 살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우상이 아닌 참된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에 없는 식으로 샘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여성성(性)입니다. 창세기 3:15에 ‘여자의 후손’이 나옵니다. 이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아담은 아내를 보면서 ‘생명’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흙으로 죽을 운명임을 하나님으로부터 통보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사도는 여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고전 11:5-6)

이는 남자의 존재함에 있어 여자는 그 남자에게 복속되어 없는 존재로 보여야 한다는 마땅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서 여성의 생명됨을 꾸준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잠언 5:18에 보면,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 맨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마감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잠 31:30-31) 잠언이 말하고자 하는 지혜는 여호와와 하나님과 관련지은 아내의 존재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아가서의 샘은 ‘사랑의 구현체로서의 여인’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아 4:12,15)

최종적인 것은 하늘나라의 샘입니다.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 21:6) 이 모든 것은 그 샘이 곧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욜 3:18)

그래서 십자가 사건과 관련해서 다윗 족속과 예루살렘 거주민이 특별한 위치를 보여줍니다. 죄인이기에 그 죄 씻음이 되는 샘의 터짐과 관련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새로움이 쉬지 않는 샘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6강-스가랴 13장 1-2절(샘) 24032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스가랴 13장 1절에서 2절입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아멘.

샘이라는 것이 평소에 여러 군데 잘 눈에 띄지를 않고 숨어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강과 바다는 어디든지 찾아가면 찾아갈 수 있는데 샘은 깊숙한 수풀 속에 숨어있죠. 강의 근원, 강이 처음 시작한 그 지점 그거는 바다가 시작한 지점이기도 하고요. 땅에 강이 흘러서 바다로 간다. 그러면 바다라는 그것도 대단하지만 인간에게는 인간과 함께 있을 때 그것이 인간에게 의미가 있거든요.

바다는 넓지만 인간은 바다에서 사는게 아니니깐.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개시점. 출발점. 굳이 찾지 않더라도 그냥 옆에 지나가지만 그 샘 하나가 이 땅을 적시면서 인간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샘의 특징은 ■특정 지점에 있다는 것과 그리고 그 샘은 거기서 ■솟구친다는 것, 분출한다는 특징이 있어요. 그러면서도 생명의 근원이면서도 사람 눈에 띄지 않고 ■은밀한 곳에 있는 겁니다.

그처럼 여기 주님께서 오늘 약속하기를 샘에 대해서 약속을 합니다. 은밀하게 있던 샘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그 날이 오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바다만 좋아하고 강을 좋아하지만 샘의 특징은 인간의 노동력과 관계 없다는 거에요. 이미 인간 이전에 그 자연 속에 친히 마련된 겁니다. 사람이 애써서 우물 파는 게 샘이 아니에요. 우물의 반대말이 샘이고 샘의 반대말이 우물입니다.

인간의 노동력이 전혀 제공되지 않고 인간보다 먼저 있으면서 인간을 살려내는 그 무엇. 그게 샘이라는 표시로 된 거죠. 그런데 여기서 산다는 것이 사람이 물 없이는 못 사는데 여기 13장 1절에서는 인간은 죄와 더러움을 씻지 못하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물 없으면 못산다. 너무나 당연한 거죠. 누가 부정합니까. 인간의 몸이 75퍼센트가 물로 되어 있다는데.

그래서 “인간의 몸은 75퍼센트가 물이기 때문에 물 없이는 못 산다.” 이것이 인간의 지식의 한계입니다. 이거는 뭐 의사들 다 파업해도 소용없어요. 의사들도 모르는 게 뭐냐 하면 물이 있어서 그래서 물 마시고 살고 밥 먹고 산다는 것, 이것을 오늘 2절에 보면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짓 선지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너무 비약을 심하게 했나요?

비약 심한 정도가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샘이라는 것은 은밀하게 숨어있어서 인간의 관심사에서 소외된 거에요. 그러면 인간의 관심사는 뭐냐? 이미 내 육신이 있고 육신을 어떻게 살릴까에 관한 겁니다. 내 죄를 씻고 내 더러움을 씻는 그 샘이 존재한다는 것 나는 그것 모르겠고 내 죄를 씻어주는 것 그것은 모르겠고 이 육신이 얼마나 배부르고 잘 먹고, 잘 살고 편하게 사느냐, 여유롭게 사느냐 나는 거기에 인생을 몰빵하겠다. 거기에 정신을 다 팔겠다. 그게 우리 일상의 주 관심사가 되는 겁니다.

근데 이 이야기가 성경 안에 스가랴 13장 1절로 박혀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창조자, 우리 주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천국은 어떻게 생겼을까? 상당히 궁금해 하죠. 주님에 대해서 어떻게 파악하느냐 이전에 이 스가랴 13장 2절에 의하면 주님 파악하기 전에, 샘은 은밀한 곳이니까, 뭐부터 해야 되는가?

거짓 선지자를 어떻게 파악하냐와 병행해서 비로소 숨어있는 은밀한 우리의 진정한 인간이 인간됨의 근원이 나온다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를 파악하자. 거짓 선지자를 파악하면 돼요. 여기 우상, 거짓 선지자 2절에 나와 있죠. 더러운 사귀, 더러운 귀신들. 이걸 파악을 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이 더러운 귀신, 우상, 사귀, 거짓 선지자 이것 파악하려면 어디 괴기영화나 봐야 되고 뭐 파묘 영화 봐야 되고 그래야 되는 겁니까?

이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 파악은 쉬워도 너무 쉬워요. 이게. 너무너무 쉬운 거에요. “아, 이게 이토록 쉬웠어? 왜 이 쉬운 걸 이 거짓 선지자, 귀신을 이제껏 왜 몰랐지?” 할 정도로 너무 쉽습니다. 그 쉬운 이유를 제가 말씀드리죠. 누구하고 이야기할 때 내가 목숨 바칠 내용이 아니거든 사실은 들을 필요가 없어요.

그 이야기 듣고 “오케이, 그 이야기 듣고 내 목숨 바칠래.” 하는 이야기만 들어야 되는데 일상에 모든 인간들은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한 게 없기 때문에 남들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내 목숨을 내놓는 것이 아니고 내 목숨을 강화하는데 필요한 도움되는 이야기로 덧붙이려고 하죠. 모든 인간이. 이것 귀신 들렸습니다. 이게 귀신 들린 인간이에요. 내가 하는 일, 내가 듣는 일이 내 목숨을 유지하는 데 어떤 보탬이 될 수 있느냐? 내게 이익이 되느냐?

그게 바로 거짓 선지자에요. 그런데 왜 이게 거짓 선지자가 되어야 될 이유가 뭐냐? 정말로 주님을 발견했으면 우리는 아낌없이 “주님 제 목숨 가져가도 괜찮아요.” 이렇게 되는 거에요. 주님을 발견했다면. 왜냐하면 주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거짓 선지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13장 1절에 죄와 더러움이 나오는데 죄와 더러움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파악되는 것이 죄고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파악되는 것이 더러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거룩한 곳에서 사시던 분이 이 땅에 왔거든요. 하늘나라에서 사시는 분이에요. 하늘나라에 비교해서 이 땅은 정말 더러운 곳입니다. 이사야 6장에 나온 말처럼.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더러운 백성들 중에 하나의 일원이다. 백성만 더러운 것이 아니고 그 더러운 백성 중에 나도 포함됩니다.” 할 정도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앞에서 나는 추악한 존재인 것을 드러내죠.

그러면 추악한 존재인 것을 드러낼 때 그 거룩한 주님 앞에서 계속 추악한 자기 존재의 가치를 계속 붙들고 있겠어요? 못 붙들죠? 차라리 이렇게 고백하세요.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경험은 실제로 총각들에게도 간접 경험할 수가 있어요. 특히 총각들. 요새는 유부남도 해당됩니다만. 총각들이 자기가 어릴 때부터 10년동안 어릴 때부터 사모했던 자기 첫사랑 같은 게 있을 수 있거든요, 사춘기에.

근데 그 첫사랑을 늘 연모하던 첫사랑을 우연히 어릴 때 나중에 헤어졌는데 한 10년 뒤에 우연히 시내 번화가에서 만났을 때. 혼자 짝사랑한 거죠. 만났을 때, 그쪽에서는 편하게 같은 동창생이니까, “어, 영철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자기는 너무나 지난 10년도 아름다웠지만 점점 더 아름다운 그 미모에 반해서 어이고 뭐 이거 말을 높여야될지 말아야될지 모르고 더듬거릴 때, 그 때 뭐냐 자기의 존재감이 아주 존재감이 순간적으로 사라져버리죠.

그럼 이제 “동창생인데 오랜만에 점심이나 같이 할까?” 할 때 자기가 그렇게 흠모했던 그쪽이 점심 먹자 하는데 밥값을 여자보고 내게 하겠습니까? 아낌없이 돈 내는 것, 이것 자기부정입니다. 돈이 하나도 안 아까워요. 오히려 영광스러워요. 그 순간 빛나는 그 여인 앞에 자기가 소멸 되는 것 자체를 내 자신이 존재감이 없이 된 것을 그렇게 그 사실을 영광스럽게 고맙게 황공스럽게 생각하는 겁니다.

정말 더 사모하면 이런 고백까지 나오죠. “마마,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당신이 죽인다면 흔쾌히 죽겠나이다” 뭐 이런 것. 뭐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를 제가 예를 들었습니까? 바로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그렇게 된거에요. 비교해볼 때 그동안 나, 나, 나는요, 나는 이렇게, 나는 뭐 어떻고 어떻고 그 모든 말들이 쑥 들어가 버렸어요. 욥기 40장에서 욥이 하나님 만났을 때 그동안 나는 뭐가 문제인지, 나는 뭐 잘못됐는지 그 나 나 나 나 나로 연속되는 그 모든 자기 생각이 쏙 들어가 버린 거에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자기의 근원을 만났기 때문에. 오늘 본문대로 하면 샘을 만난거에요.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은 뭐냐? 죄와 더러움에 반드시 필히 생성되어야 되고 만들어져야 돼요. 왜냐? 샘이 샘의 역할과 그 기능을 보여주려면 이 샘은 죄와 더러움과 만남에서 비로소 출현되는 겁니다. 나타나는 거에요. 그 나타나는 지점은 특정 지점입니다. 샘 자체가 특정 지점이에요.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는 게 아니고 특정 지점에 있어야 돼요. 그 특정 지점을 여기에 소개해놨습니다. 13장 1절에.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 그렇게 되어있다고요.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 이들이 뭐지? 이들은 왜 특혜를 입죠? 하나님의 샘의 근원이 되는 왜 이런 특혜를 입느냐 이 말입니다. 이런 특혜에 대해서 구약에서 줄거리를 갖고, 하나의 흐름이 있는데요. 그 흐름을 이야기하면 복잡하니까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요한복음 4장 13절부터 15절입니다.

“당신은 야곱보다 큽니까?” 이렇게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만나서 이야기할 때 이 여인은 물길으러 온 거에요. 그냥 물길으러 온 거에요. 샘에. 샘에 물길으러 왔을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이 샘. 자연의 샘. 이 물을 먹어도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이 사마리아 여인은 이 물과 이 물을 동일한 물로 사용해야 돼요. 동일한 물인데, 그러니까 동일한 물인데 예수님 쪽에서 말하기를 이게 샘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쪽, 니가 행할 수 있는 것, 니 행함으로 길을수 있는 물은 니 바깥에서 니가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물이라면 이 새로운 샘은 니가 노력하지 않더라도 아예 그 여인 속에 꽂아놓은 딱 이렇게 심어놓은 우물이 있다는 거에요. 들판에 향기로운 꽃이 있다. 그러면 길 가다가 들판에 가서 꽃에 가까이 가야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잖아요. 근데 꽃을 꺾어서 우리 집에 꽂는다면 이거는 자동적으로 집에서 꽃향기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나오죠. 물론 좀 있다가 죽겠지만, 일시적으로서는. 안 나온다하면 안 돼요. 나온다 해야 돼요.

여기에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그다음에 뭐라 하느냐 하면 “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했습니다. 샘물이. 예수님이 그 여자 속에 들어간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여인은 아직까지 착각을 해서 육신적인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물이 필요한데 그 물을 제공하는 분이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목마르지 않는 물을 준다’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15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그래서 뭐냐?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이 여인은 스가랴 13장 1절을 몰라요. 오늘 본문 13장 1절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예언과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을 때 여인의 특징은 뭐냐? 거짓 선지자 같아요. 뭐냐? 내 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식. 이게 거짓 선지자의 공통점이잖아요. 자기 목숨을 잃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제가 언젠가 신천지하고, 제가 찾아간 게 아니고 신천지가 와서 이야기를, 전도하려고, 날 전도하려고 했는데, 대화를 나눴는데요. 한 5분간.

신천지의 특징은 뭐냐 하면 본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근원적인 샘을, 근원적인 우물로 ‘내가 여기 있다’가 대체하고 있어요. 신천지 하는 모든 이야기가 “나 여기 있습니다, 나 여기 있습니다.”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당신이 있는 게 아니고 성경은 말하기를 주님이 당신보다 먼저 있다. 그렇게 하니까. “예, 그건 뭐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하거든요. 내 말을 못 알아 듣는 거에요. 내 말은 뭐냐? “내가 여기 있어. 나는 구원 받아야 되겠습니다.” 하는 그것이 진짜 계신 분을 가리는 거짓 선지자의 일관된 주장이에요. 그게.

교회 와서 구원 받겠다는 그게 거짓 선지자의 주특기에요 그게. 그게 거짓 선지자가 세운 교회고. 내 구원 받겠다 하는 것은 교회 나오면 안되죠. 거짓 선지자가 교회 나와서 뭐 할게 뭐가있는데요? 프로이트라는 정신분석학자가요 자기의 손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자기의 손자가 이렇게 엄마가 시장가고 난 뒤에 자기 손자가 노는걸 봤어요. 한 1년 6개월 된 애인데, 1년 6개월 아주 애인데. 엄마 없고 나니까 뭔가 허전하잖아요. 그러니까 실타래를 가지고 침대 밑으로 쭉 당겼어요. 쭉 던지니까 실타래가 침대 밑으로 들어갔잖아요. 실은 자기가 쥐고 있고요. 실타래만.

하는 말이, “오, 오, 오.” 이러면서 실타래 하는 거에요. 해놓고, 다시 실을 잡아당기니까 “다!” 하는 거에요. ‘있다’ 또는 ‘내 앞에 현존한다’ 이런 뜻이에요. 있다. 그럼 ‘오’는? 방금 있음을 전제로 할 때 이게 없는 게 돼요. “없네?” “있네?” “없네?” “있네?” 이걸 언제까지 하느냐 하면 자기 엄마 시장 갔다 올 때까지 하는 거에요. 이건 뭐냐 하면 엄마에 대해서 호소를 하고 있는거에요. 실타래가 엄마를 대신해서 호소를 하고 있는 거에요. “엄마, 내 곁을 떠나지 마. 엄마, 있어 줘.”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없어지면 안돼. 나는 꼭 있어야 돼. 엄마 있는 것이 나 있는 거야.’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에게서는 있다, 없다를 누가 결정하느냐? 본인이 결정하는 거. 그러니까 인간은 거짓 선지자에요.

샘이 되는 분은 이 땅에 없습니다. 주님이 결정해야 돼요. 있다, 없다는 주님이 결정해야 돼요. 근데 거짓 선지자는 뭐냐? 내가 있으면 내가 허전할 때는 내 쪽에서 뭐를 만들어야 되느냐? 내 쪽에서 신을 만들면 되잖아요. 내 쪽에서. 내 쪽에서 신을 만든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이 세상에 육신으로 있는 거에요. 육신이 이렇게 있잖아요. 자연적으로 육신이 있다 이 말이죠. 좀 어려운 이야기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어요.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여러분 하늘에서 비가 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비가 왜 오죠? 뭐 먹구름이 와서 어떻게 중력으로 떨어지고 하나의 먼지가 뭉쳐서 온도가 낮아지면... 그런 이야기로 해명이 안 돼요. 신기함이. 과학적으로 이야기하면요. “얼음은 왜 있어야 되는데, 먹구름은 왜 모이는데?” 질문은 계속 되는거에요. 그 과학적 질문이 아무런 해답을 제시할 수 없어요. 문제는 하늘에서 비가 온 다는게 신기하다는 겁니다.

상당히 인간에 대해서 긍정적 표현을 할 때 비가 와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신기함을 이야기하는데요. 또 비가 오는 것을 한쪽에서 생각하면 이렇게 생각 할 수가 있어요. “왜 나는 하늘에서 오는 비 없이는 못 사는 존재가 되었는가? 아 슬프다.” 이럴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동일한 비 오는 현상인데 한쪽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이 자연의 현상이에요. 자연의 현상입니다. 분명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제가 왜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아까 그 실패를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내가 있어요. 근데 내가 있다는 것이 굉장히 인간들은 굉장히 신기하면서도 그 신기함이 불편해요. 내가 왜 있는지를 아무리 따져도 알 수가 없어서 그게 불편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신기하니까 내가 존재한다니까 신기한 거에요. 마치 엄마가 시장 간 날 엄마의 아이와 같은 마음이다, 이 말이죠. 그 아이가 나중에 어른 되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증명하는 방법은 뭐냐? 신이 없기에 뭘 만들어야 돼요? 신이 있어야 돼요. 진짜 종교가 만들어진 이유입니다.

신이 없기에, 이 자연에는 신이 없어요. 신이 없기 때문에 신을, 상상을 하든 어떻든 만들어서 신이 있다고 믿어줘야 내가 편해요. 내가. 내가 편해요. 그 어린애 하고 똑같아요. 엄마는 없어요. 엄마는 없는데 실타래로 계속 오, 오 하다가 감격스러워서 있다. 다(Da). 그게 fort da라는 놀이입니다. “없다, 있네? 없다, 있네?” 나 혼자 있으면 내 근원을 모르니까 이게 마음이 정서적으로 불안하잖아요 근데 신을 믿으면, “그렇지 신이 만들었지, 신이 창조했지. 창세기 1장 1절. 창세기 봐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잖아. 그걸 믿는 순간 내 마음은 왜 이렇게 편하지?” 이것, 거짓 선지자에요. 귀신 들린 겁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요. 믿고 떤다까지 했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정말 인간의 순수한 본심은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켜줘야 순수한 본심이 나옵니다. 그게 아까 이야기했지만, 일부러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에 고기를 못 잡게 했어요. 그것도 밤새도록. 그때 고기 못 잡은 것이 7시간 30분 되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여튼.

해놓고 그다음에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그 근처 고기 다 뒤집었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명령에 따라서 배 오른편에 던지니까 배가 침몰 될 직전까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때 베드로의 고백이 솔직한 자기 심정이었어요. “내가 죄 덩어리입니다.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그 다음에 뭡니까? “주여 떠나소서.” 무슨 뜻일까요? 내가 신을 믿는 것은 내게 필요해서 내가 만든 신이었던 거에요. 이 자연의 신. 그래서 인간이 만든 이 우상은 자연의 일부고 자연의 연장이고 자연의 연속입니다.

시편 115편 4절에서 8절에,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왜 이렇게 눈, 코, 입은 있는데 왜 말을 못하는가? 눈, 코는 어디서 나왔는가? 인간에게 달려있는 게 눈, 코잖아요. 인간에게 달린 것을 그대로 신에게 박아 넣은 거에요. 근데 그 신은 신이 말을 못 한다. 그거는 신은 말하면 안 되죠. 내가 신을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말해야 되죠. 그게 철야기도 아닙니까? 그게 새벽기도 아니에요? 그게 종교 생활이잖아요. 다 기도해놓고 뒤에다가 뭐만 붙이면 돼요? 주의 이름으로 아멘 하면 끝나죠.

본인이 신이에요 본인이. 내가 신이기 때문에 뭔가 신인데 있는 이유는 모르겠고 있는 이유를 억지로 어떻게 만들어 내야 되지 않습니까? 그 만들어 내는 게 뭐냐? 누가 나를 창조했겠지. 그게 누구냐? 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내가 만든 하나님을 내가 믿는 거에요 그냥. 여러분 여기 거짓 선지자라는 말이요. 하나님 관계없다가 아니라 하나님 관계있기 때문에 선지자인데 앞에 뭐냐? 거짓된 선지자에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 거짓된 선지자가 어디서 등장했는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등장했던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거짓 선지자가 다른 데도 있지만 이 모델로, 이스라엘을 모델로 삼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은 이방 나라에도 다 똑같이 일어난 거에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일어난 것이 이스라엘이거든요. 그 이스라엘 나라에서 이 거짓 선지자가 왜 이렇게 구체적인 역사물로서 왜 일어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만큼 이스라엘은 진짜 샘이 그 이스라엘 내부로 그들이 닿는 그들의 여정 속에 진짜 샘이 고개를 내밀기 때문에 그래요.

, 샘의 특징특정 지점에 있다. 두 번째는 없는데 분출한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출애굽기 17장 7절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께서 일부러 사막에다가 집어넣었어요. 광야에다가. 물 없는 곳까지 가니까 뭐 백성들은 자기의 목숨 지키는 것이 일생의, 필생의 사명 아닙니까? 내 육신 계속 먹고 사는 게 필생의 임무지요. 그 외에 더 최종적인 업무가 있습니까? 없죠. 그래서 물이 없다 이 말이죠. 물이 없으니까 물 달라고 한 거에요. 왜 물이 없느냐?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물 없는 곳으로 몰아세웠기 때문에 그래요.

현재 광야 가면서 여러분들이 모세가 인도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모세가 인도한 게 아니고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인도했어요. 이거는 주께서 친히 이스라엘 사람들을 물 없는 사막 쪽으로 몰아 세웠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숨어 있는 샘을 찾아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샘은 그러면 어디 있느냐? 어떤 지점에 있느냐? 샘은 어떤 지점에 있어서 찾아가는 게 아니고 우리 이스라엘 속에 있는 그 죄가 드러나는 드러내게하는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것이 바로 숨어있는 샘이에요.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샘이란 죄와 더러움과 맞닥뜨리면서 비로소 샘이 나오기 때문이에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우리는 평소에 내가 뭐 양심에 가책 든 것, 나쁜 짓 한 것 반성하고, 반성하면 샘이 어디 있는지 영생의 샘이 어디 있는지 눈에 들어오겠네” 하잖아요. 그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은요, 내가 내 죄를 내 선에서 처리하려는 또 하나의 죄를 추가한 게 돼요. 솔직하게 노골적으로 자기 본색 드러내면 되는 거에요. 아까 그 본색 드러내는 사람 제가 언급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그 물 어디 있습니까? 그 우물 있으면 제가 이 물 길러 온 수고 안 할 건데.” 또 자기 편할 생각만 하죠. “예수님, 그 물을, 우물을 저한테 주소서” 이렇게 나오듯이요. 사마리아 여인은 그게 죄인 줄 몰랐던 거에요. 모르죠. 주님께서는 모세를 향하여 그들이 원망하게 되어 있고 그 다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제야 “반석을 쳐라.” 지팡이 가지고 반석을 쳐라 했습니다.

반석을 치니까, 지팡이가 깨져야 되는데 이상하게 반석이 깨져버렸어요. 단단한 반석이. 반석이란 특징은 뭔가 숨겨 있어서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면 숨어있는 것이 공개되지 않는 그러한 도무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장소에서 지팡이 가지고 한 지점을 치니까 거기서 샘인데 분출돼요. 터져 나오는 거에요. 마치 바위가 아파도 너무 아픈 것 같애. 바위가 찢어지는 것과 동반해서 안에서 샘이 나오니까 그 샘은 너희들이 그 분출되는 물이 나올 때마다 너희들은 너 사는 것 밖에 생각하지 못한 그것이 그게 바로 니 죄고 더러움이라는 겁니다.

니는 니 생각이 최종적인 생각이라는 말이죠. 그게 그 생각이 인간은 막혀있어요.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만들기 전에 하나의 원칙을 딱 세운 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데, 여러분들이 성경에 나오는 샘을 다 알려고 하면 시간이 굉장히 길기 때문에 제가 함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꾸 결론 부분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하면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뱀을 이김으로써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는 겁니다. 물론 인간의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해산된, 잉태된 자가 특정 인간인들이 있는데 그들만 생명 얻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샘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에요. 거짓 선지자에요.

그렇게 하면서 3장 18절에 뭐냐 하면, 아담보고 하는데,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니 이름대로 흙으로 돌아가라”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아담이 그 이야기를 듣고 아담이 자기에 대한 미래를 포기해버려요. 이미 규정이 끝났어요. “나는 죽는게 이게 내 팔자다”하고 이미 자기한테는 마감을 해버렸어요.

자기에 대한 기대를 자기는 완전히 철회해버리고 남은 게 뭐냐 하면 자기 말고 아내가 있거든요. 아내를 보고 뭐냐 하면 자기는 죽어요. 근데 자기는 죽으니까 자기와 반대되는 그 아내를 보고 생명이라고 하는 거에요. 왜? 방금 들었던 약속이 뭐냐?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러면 제가 여기서 힌트를, 방금 힌트를 드린거에요. 샘은 뭐냐? 샘은 여성성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여성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 땅에 태어난 여성들은 전부 다 남성의 소유가 돼요. 여성은 얼굴을 가려야 돼요. 왜? 얼굴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니까요.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써야 돼요. 여성은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여성의 존재를 남성이 대신하기 때문에 여성은 여성의 얼굴을 가림으로써 여자는 남성에 복속된 그래서 남녀가 하나가 된다는 창세기 2장의 원칙을 결혼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이어나가는 겁니다.

그걸 하라는 말이 아니고 원칙이 모든 인간의 혼인 속에 들어있는 거에요. 원칙은 지킬 수가 없어요. 인간은 행함으로. 하지만 원칙을 내려주신 하나님의 원칙은 지키든 말든 계속해서 유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 여성은 없습니다. 더 세밀하게 이야기해서 남성 없는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 여성이 되는 거에요. 그럼 이 땅에 남성 없는 여성을 뭐라고 하느냐? 과부라고 이야기합니다. 홀로 있는 여성이라고 하죠. 홀로 있는 여성이에요.

잠언서 5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여기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여기 샘이 나오거든요. 둘이 결혼을 했는데 남자하고 여자하고 결혼했으면 두 사람이죠. 두 사람 중에 다 샘이 아니에요. 그중 한 사람이 샘인데 샘의 역할을 누가 해야 되는가? 아내가 샘의 역할을 해요. 샘의 특징은 뭐냐? 나타나지 않으면서,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계속 생명을 분출하는, 활기를 분출하는 그 특정 지점이 샘이에요. 그 샘의 역할을 누구냐? 여자가 하는 거에요. 아내가 하는 거에요.

그래서 남편은 “네 샘을 복되게 하라 니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 하라.” 이 말은 뭐냐? 그 아내에서 새로운 즐거움이 계속 나오게 하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잠언서 전체의 내용이 뭐냐? 전체의 주제는 뭐냐? 니가 남자가 출세하고 성공하고 뭐가 부자가 되더라도 그 출처는 따로 있다는 게 잠언서의 핵심이고 이게 잠언서가 말하는 지혜입니다. 지혜는 나타나지 않고 숨어있고 숨어있으면서 나대지 않고 오히려 다른 쪽을 돋보이게 해준다는 거에요.

그래서 잠언서의 제일 마지막에 보면 이런 게 나옵니다. 잠언서 31장 29절에,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여자 중에 최고의 여자는 여호와와 관련성을 맺은 아내가 최고의 여자라는 거에요. 와. 우리 아내 곱다. 필요 없다. 우리 아내 아름답다.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거짓되다.

곱고 아름다운 것. 뭐 배 나온 것 그것 전부 다 상관없어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그거 아니에요. 남자는 죽음, 여자는 생명이에요. 노래 가사 바꿔야 돼요. 단, 그 여자는 어떤 여자냐? 남편 쳐다보는 여자는 아니에요. 역시 거짓 선지자하고 같은 동급자에요. 남자하고 똑같아요. 오직 여호와를 쳐다보는 여인. 그 여인이 바로 생명이라고 합니다.

아가서에 보면 그걸 결정적으로 최종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가 4장 12절에서 15절. 아가서는 마치 구약에 있는 신약의 최종적인 상태를 아가서에서 다 표현해주는 것 같아요. 구약에 있는 신약 같아요. 아가서 4장 12절에 보면,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 흑인 여자를 만나서 너무나 반해버렸는데 그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표현할 때 그냥 여인으로 보지 않고 샘, 생명의 샘으로 보는 거에요.

손 대고 톡하면 터질 것 같아요. 봉선화 연정. 15절에 보면 뭐냐 하면,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레바논은 산지잖아요. 눈이 쌓여요. 해발 2천 미터 넘으니까. 백두산보다 더 높으니까. 백두산 비슷하게 돼요. 높진 않겠구나. 거기서 흐르는 그 눈 녹은 물, 시원한 물. 그게 레바논 남쪽에 있는 이스라엘 토지를 적시는 거에요. 자연에 있는 현상으로 표현된 영적 표현. 영적 표현입니다.

집안에 이런 아내 들여올 의향 없습니까? 카드 일시불로 끊으세요. 또 할부로 하지 마시고. 샘의 특징은 계속해서 새로움이 나온다는 거에요. 요엘 3장에 보면 왜 그게 새로움이 나오는가, 요엘 3장에 보면 나옵니다. 3장 18절에,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뚝뚝 포도주가 떨어지고, 풍성하다 이 말이죠. 젖이 넘쳐서 흐를 것이고,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그 이유가 뭐냐? 여호와의 전에서부터 그 생수가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샘이라하는 것은 한번 샘이 나오고 끝이 마는 게 아니고 끊임없이 나오는 거에요 끊임없이. 새로움이 계속 나오는 거에요. 이러한 자연적인 샘터를 통해서 이야기하던 그 비유가 요한계시록 21장 6절에 보게 되면 이게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생명수 샘물이라고 되어 있어요. 생명수 샘물이 값 없이 주리라.

에덴동산에서는 두 개의 나무를 중심으로 해서 샘이 거기서 샘이 되어서 두 개의 강을 통해서 적시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2장에 보면, 나무가 있는 에덴에서 강이 에덴에서 발현하여 동산을 적시고 샘이 이제 하나가 되죠. 강이 몇 개 있느냐? 첫째 그곳에 네 개의 강이 흘러요. 네 개의 강으로 분산돼요. 그 네 개의 강이 나오는 출처는 생명 나무와 선악과 나무. 따라서 생명 나무 선악과나무 취지가 결합이 되면 그게 새로움이 영원히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했던 예수님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목사님 하나님 나라 어떻게 갑니까?” 간단해요. 내가 바로 우상인 것을 깨달으면 하늘 나라 가신거에요. 내가 자체가 더럽고 내가 자체가 거짓 선지자고 내가 자체가 우상이고 나는 뭐 죽으나 사나 내 사는 것 밖에 없고 내가 근원적인 샘을 틀어막고 있는 나밖에 모르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물인 것을 틀어막고 날 구원해 봐라, 이런 식으로 교회 나오고. 날 구원해주면 내 하나님 믿을 용의 있지. 그거는요 1년 6개월 된 애가 실타래하고 노는것 하고 똑같아요.

자기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없는 신을 만들어 내는 것. 그래서 자기를 영원히 긍정적으로 하려고 하는 것. 그런 꼼수가, 그 꼼수가 무슨 사건을 일으켰는가? 십자가 사건을, 진짜 하나님을 죽여버리는 사건을 유발한 거에요. 그런 꼼수가. 그러면 우리는 그 꼼수를 못 벗어나죠. 못 벗어나면 간단해요. “주여 십자가 앞에서 저는 꼼수 썼습니다.” 이러면 되죠. 그러면 뭐냐? 나머지는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죄의 더러움이 누구 일이 되는가? 바로 주님의 일이 되고 그 주님의 일로 변하면서 우리는 솔로몬의 사랑하는 아내가 되죠.

죄가 있는 곳에 샘이 있다는 원리. 내가 너를 신부로 만들었다는 원리. 아담이 하와를 만든 것처럼 예수님이 자기 신부를 자기가 해산시키고 잉태하고 해산하는 그 말씀으로, 언약으로 주님의 의해서 만들어졌을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내 누이 내 사랑하는 너는 나의 봉한 샘이다. 내가 너 안에 들어가서 너를 영원한 우물로 만들겠다. 새로움이 계속 나오겠다.

여러분도 여러분 안에서 예수 안에 계시면서 주님이 주신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그 사랑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그 폭을 그 사랑의 풍성함을 날마다 새롭게 느껴지시기 바랍니다. 그 조건은 뭐냐? 날마다 내가 거짓 선지자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더욱더 깊이 알면서 같이 동반해서 감사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살기 위한 목마르지 않는 물이 아니라, 우리 자체를 아예 샘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찾아오시고 우리 손에 죄인의 손에 죽으시고 다시 성령으로 찾아오신 그래서 기어이 우리를 샘으로 만드시는 작업에 그저 감사 외에는 할 것이 없음을 저희가 고백합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이 고백이 이제부터 신나는 감사와 고마움으로 반복될 수 있는 그런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