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세계
쌍둥이 세계
2024년 3월 1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8:1-4
(18: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18: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18: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녹로’란 ‘두 바퀴’라는 뜻입니다. 이 기구는 한 축을 중심으로 아랫 것은 무겁고 위의 것은 가벼운 두 돌바퀴가 달려 있는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먼저 토기장이가 아래 바퀴를 발로 돌로면 진흙을 엊은 윗 바퀴가 회전하며 그 진흙의 부풀게 되는데 그 부풀어 오른 진흙으로 원하는 그릇을 만들 수가 있도록 한 기구입니다.
따라서 부풀어 오른 그 진흙으로 그릇을 빚다가 자기 생각대로 잘 안되면 그 진흙을 망가뜨려 새로운 그릇 제작에 얼마든지 나설 수 있습니다. 하나의 축에 두 바퀴가 달려있는 겁니다.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자율성을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이 토지장이의 자율권이 신약의 로마서 9장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0-21)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로 하여금 토기장이집으로 가보라고 하신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즉 계시를 위한 환경이 말씀(계시)에 의해서 친히 조성되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토기장이와 토기의 관계를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 →말씀 →관계’로 나아가는 식으로 계시는 환경을 친히 만드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천히 그릇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할 자는 없습니다. 다들 자신을 귀한 존재이기를 원합니다.
다들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바로 인간들의 기대가 토기장이의 자율권을 훼손하는 처사가 됩니다. 자기 자신의 의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방적 관계로 모든 권한을 넘기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율권은 철저하게 갈아엎어져야 합니다. 즉 천국가는 자와 지옥가는 자를 결정하는 원래의 자리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포기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천국 백성의 원래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창세기 25:21에 보면,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의 자리’는 없습니다. ‘잉태치 못한 자리’입니다. 따라서 일단 잉태된 자가, “나 천국 갈래요”라고 나설 입장이 못됩니다.
또는 “저 사람은 꼴도 보기 싫으니 제발 저 인간을 지옥 보낼 주세요”라고 요청할 자격자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은 원래 잉태치 못할 자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이 태어났다’를 알리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출현했다’고 말할 자리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의 언약이 우선입니다.
언약 출현을 위해 하나님께서 쌍둥이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로소 인류의 모든 인간들은 전부 쌍둥이 관계입니다. 동일한 언약을 통해서 하나는 천국가고 하나는 지옥갑니다. 문제는 이왕에 태어난 인간 입장에서는 자신의 운명이나 미래를 결정할 권한이 애시당초 없다는 겁니다.
즉 ‘2’가 태어났지만 ‘1’이 없는 상태에서 태어난 겁니다. ‘0’에서 바로 ‘2’가 된 겁니다. 따라서 ‘1’의 등장을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핵심입니다. 태어난 쌍둥이는 미확정된 장자의 자리를 위해 피 터지게 싸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게임세상’의 진수입니다.
혼인도 게임화되어 버렸습니다. 부부란 한 항아리에 두 나무가 심겨져 있는 겁니다. 안 싸울 수가 없지요. 상대를 자신의 주도권 밑으로 끌어당기려는 게임입니다. 힘으로 돈 힘으로 억누르는 방식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약해 보이고 순수하고 순결하고 정직한 자세를 전략으로 설치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결코 복이 온다는 장자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2-23)
즉 둘이 자체적으로 결코 ‘1’의 자리를 정립할 수 없고 싸우다가 다같이 망하는 길로 가는 코스입니다. 그렇다면 ‘0’과 ‘2’ 사이의 ‘1’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 걸까요? 시편 1:1-2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에서 복과 저주의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의인도 나오지만 악인도 나옵니다. 하나의 당구공을 쳤는데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두 개의 당구공의 방향이 정해지는 겁니다. 천국가는 의인의 특징은 자신의 행함의 능력에 기대를 거는 자가 아니라 자기 보다 선행한 율법의 일방적 조치에 관심을 갖고 관계를 맺게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자입니다. 이는 자신의 운명이 자기 행함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알아챈 겁니다. 당연히 인간의 능력으로서 가능치 않습니다. 장자로 왔지만 모든 이로부터 짓밟히는 자리까지 내려 가신 분이 율법을 ‘하나’로 정립하신 분이십니다. 그 누구도 장자 투쟁에서 승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즉 율법은 홀로 다 이루셔서 둘(2)를 허락하지 않으시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미래를 자기가 결정하려고 시도합니다. 쌍둥이로 시작하는 인간 게임에서 자신을 승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체 이런 인간 게임에 말려들지 아니하시고 악마의 게임에서 이미 승자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게임을 시도하신 겁니다.
인간이 예수님의 게임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자신이 자신을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방적 견해일 뿐입니다. 자신의 견해를 타인에게 강요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견해에 의해서 자신을 핍박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바로 이런저런 인간 게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누구를 싸움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악마와 어떤 전쟁을 벌렸는가에 주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4강-예레미야 18장 1~4절(쌍둥이 세계)24031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8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선지자의 말씀이 그냥 말씀 그 자체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환경과 같이 마주하게 되어있습니다. ‘말씀이 환경을 조장하고 조성한다’라는 그것도 바른 말이고 환경 속에서 말씀은 새롭게 이해된다는 그것도 옳은 이야기입니다. 말씀이 환경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면 이 시공간은 예수님 중심의 말씀을 위하여 시공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지금 이순간 우리가 예레미야처럼 선지자라고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에게 말씀 들었다고 그것이 끝이 아니고 세상에 나가보고 환경을 생각해 보는 겁니다. 내게 주어진 말씀이 이 세상을 내 손으로 적용시키는 게 아니고 친히 하나님께서 환경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조성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얼마나 즐겁고 행복합니까.
세상은 인간 손으로, 인간 머리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말씀이 말씀대로 착착 차질이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참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예레미야도 하나님이 이야기할 때, “예레미야야, 토기장이 집으로 가라” 아주 구체적으로 토기장이 집이라는 아주 작은 제한된 공간에 예레미야를 거기에 보내게 됩니다. 뭘 보라는 거죠. 토기장이 손에서 뭘 만들고 있으니까.
거기 가니까 분명히 토기장이가 있을 거고, 토기장이가 거기서 토기를 만들고 있을 겁니다. 우리 같으면, ‘뭐? 여기서 뭐? 토기장이가 토기 만들고 있는데 그게 하나님 계획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라고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럴 줄 아시고, 여기 3절에 보면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라고 여기에 녹로라는 게 나옵니다. 이게 포인트예요.
‘녹로’란 ‘두 바퀴’라는 뜻입니다. 이 기구는 한 축을 중심으로 아랫 것은 무겁고 위의 것은 가벼운 두 돌 바퀴가 달린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먼저 토기장이가 아래 바퀴를 발로 돌로면 진흙을 엊은 윗 바퀴가 회전하며 그 진흙의 부풀게 되는데 그 부풀어 오른 진흙으로 원하는 그릇을 만들 수가 있도록 한 기구입니다. 부드럽게 된 진흙을 가지고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에이~’라고 하면서 다시 그릇을 녹로 속으로 집어넣으면 다시 옛날 진흙 덩어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뽑아낸 진흙을 가지고 솜씨를 발휘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파상해서(부숴서) 다시 원래 진흙으로 돌려보내는 겁니다. “예레미야야, 보았냐? 토기장이가 토기 만드는 것을 보았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예레미야는 “하나님, 보았습니다”라고 하죠. “뭘 보았느냐?”라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마음에 드는 그릇은 생산해서 따로 놓고, 혹시 마음에 들지 않고 토기장이 생각에 이 그릇이 상품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면 부수는 것을 보았다고 하겠죠. 여기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가르치는 것은 이겁니다. 동일한 진흙이에요. 똑같은 재료의 동일한 진흙입니다.
잘난 그릇, 나중에 상품 가치가 높은 그릇이 저쪽에 못난 그릇을 보고, ‘나는 원래 재질이 달라’라고 주장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똑같은 재료인데, 토기를 만드신 토기장이가 마음에 부합되고 스스로 만족스러우면 그 토기는 토기로 살아남고, 그렇지 않으면 깨지고 부서지는 토기가 되겠지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이 계시는 이스라엘이 지금 망하기 직전에 이스라엘을 두고 처음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를 다시 보게 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일단,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자기가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었고 소속이 되어있어요. 사람이 어떤 집단에 소속이 되어있으면 소속되기 이전의 나를 잊어버려요. 내가 여기 들어올 그런 자격도 입장도 못 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일단 들어왔으니까 나를 괜찮은 존재로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우기는 버릇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습관의 하위 단위가 기억이라는 거예요. 아침에도 언급했지만, 습관이라는 게 기억된 것을 계속해서 되돌리면서 반복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어요. 습관은 이미 자기가 된 것이 원래부터 나는 이렇게 되어야 마땅하다는 그런 고집 같은 것이 습관에 담겨있습니다. 기억 때문에 잘 안 고쳐져요. 고집이 갈수록 더 세지는 거예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원래 재료가 뭐냐고 예레미야에게 주께서 물으시는 계시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질문을 예레미야만 받지 말고 오늘날 우리도 받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가 동일한 질문인, ‘네가 성도냐?’ ‘네, 성도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원래 자리가 어디지? 네가 성도 되었으니까 계속해서 성도 되게 해달라고 습관적으로 고집부리는 거 아니야?’ ‘그거 아닌데...’ ‘그렇다면 너의 원래 자리가 어디지? 성도가 나왔던 자리가 어디지?’라고 훅 들어오시면서 물으면 우리는 뭐라고 답변합니까?
‘성도의 자리?’ 성도의 원래 자리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성도의 자리입니다. 성도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관계거든요. 그래서 하나의 인간은 다음과 같아요.
인간 => 말씀 => 관계
그냥 나는 인간이 그냥 나만 있으면 ‘관계’라는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이 자기 위주예요. 아주 고집스럽게 자기 위주입니다. 그런데 이걸 해체 시켜요. 내가 나로 돌아가는 것을 해체 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부여하고 계시를 부여해서, 계시를 통해서 무엇으로 분해시키느냐 하면 원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으로 이걸 분해해서 집어넣습니다. 그것을 예수 안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안.
예수 안은 우리를 그냥 갈아버려요. 갈아서, 우리 자아를 갈아서 집어넣어요. 갈아버리면 우리 기억은 쓰레기가 되어서 없어지지요. 없어지고 그 대신 예수님의 기억이 우리를 조립하게 되어있습니다. 성도의 재료는 예수님이에요. 그러면 우리 토기가 하나님의 자비로운 토기가 되려면 예수님의 기억이 우리 기억을 대체해야 해요.
대체하려면 우리 기억은 박살 나야 합니다. 완전히 갈아버리고 다 깨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 깨지려는 방법이 하나님의 계시에 있느냐. 있지요. 있습니다. 그걸 지금 이시간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창세기 25장 21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토대가 나옵니다. 21절을 보면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라는 이겁니다. 토대는 잉태하지 못함으로.
이스라엘은 인간 쪽에서 ‘꼭 이스라엘 있게 해주세요. 성도 되게 해주세요’라고 말 못합니다. 아예 잉태치 못했으니까요. 뭐가 먼저 있어야 달라고 할 텐데 아예 없어요. 우리의 바탕은 무(無), 없음입니다. 그래서 이 잉태치 못한 자리를 우리가 고수해야 해요. 이걸 버리면 그다음부터 고집이 나옵니다. ‘주님 믿었는데, 왜 나에게 힘들게 합니까’라는 이상한 소리가 나와요.
아예 이걸 없애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없애는 방법은 제가 말씀으로 갈아버린다는 표현을 했는데, 그 갈아버리는 말씀이 뭐냐. 쌍둥이를 만들어요. 쌍둥이. 이 토기장이에 나오는 토기에 대해서 로마서 9장 20~21절에서는 예레미야의 말씀을 이렇게 활용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귀히 쓸 것과 천히 쓸 것은 전혀 상반됩니다. 갈 길이 달라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내는데, 쌍둥이로 만들어 내요. 한쪽은 지옥 갈 사람을 만들고, 한쪽은 천국 갈 사람을 만듭니다. 문제는 여기서, ‘저 천국 보내주세요’라는 일체의 발언을 주께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 그것은 잉태치 않았기 때문에 권한이 없어요. 뭐가 있어야 ‘나 천국 보내주세요’라고 하는데, 우리는 잉태치 않은 자리가 우리 자리이기 때문에 ‘천국 보내주세요’라는 권한이 없습니다.
동시에 ‘저 사람은 꼭 지옥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권한도 없어요. 지금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죠. ‘저 사람만큼은 꼭 지옥 보내주세요’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왜?’ ‘같이 못삽니다. 도저히 같이 못삽니다. 따로 떨어져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면 ‘너나 지옥 가세요. 너나’라고 하시겠죠. 같이 살 수 없다는 거, 얼마나 이게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입니까?
동양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려고 하면 8천 겹의 인연을 만나야, 이게 결혼이 된답니다.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라는 영화에 보면 나옵니다. 아카데미상 각본상, 작품상 후보로 올라가 있는 영화입니다. 거기에 보면 우리의 만남은 인연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 그게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그게 바로 이미 잉태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운명은 뭐냐.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나는 잉태되었다고 치고, ‘하나님의 언약은 뭡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꼴 보기 싫은 사람 지옥 보낼 수 있습니까?’라는 이런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것은 본래 자리가 아니고 마귀의 자리에서 나올 발언들이에요. 우리는 잉태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국 보내달라. 지옥 가기 싫어요’라고 발언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없습니다.
창세기 25장으로 돌아와 보면 잉태치 못하니까 자식이 없습니다. 없는데 쌍둥이를 낳아요. 쌍둥이를 낳으니까 쌍둥이 형 ‘에서’나 동생 ‘야곱’이나 둘 다 쌍둥이를 통해서 나의 없음의 자리를 발견하고 찾아야 해요. 이게 발견되는 쪽이 천국 가는 사람이고 이거 발견 못 하면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쌍둥이를 낳았다는 말은 없는데 ‘0’에서 ‘1’이 나와서 그다음에 ‘2’가 되어야 하는데, ‘0’에서 ‘2’가 나왔어요.
그러면 이게 뭐냐. 우리가 알지 못하는 ‘1’을 경유해서 다시 ‘0’의 자리로 되돌아와야, 이게 본래의 자리예요. 그래서 쌍둥이를 낳은 것은 ‘2’가 ‘1’을 거쳐서 ‘0’으로 되돌아오는 귀환의 코스를 하나님께서 미리 예언으로 또는 계시로 제시한 겁니다. 그냥 자살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내가 없어지려면, 내가 본래의 내 자리 찾아가려면 반드시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1’의 자리를 경유해서 ‘0’의 자리로 도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쌍둥이를 여기 낳았는데 23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쌍둥이인데 동일하지 않은 쌍둥이, 서로의 관계가 한쪽은 지배하는 관계(복이죠), 한쪽은 지배받는 관계(저주입니다), 노아 때 자식들에게 한 축복과 저주도 마찬가지예요.
지배하는 쪽은 복, 지배받는 쪽은 저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서열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여기 두 민족 가운데서 큰 자가 먼저 생길 것이고, 큰 자가 나중 된 자에게 뒤집기로 나올 거예요. 말씀이 참 어렵죠. 제가 쉽게 말씀드린 정도가 이 정도입니다. 뒤집기에 나선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보다 더 쉽게 하려면 수영 종목에서 다이빙이 있는데, 구름판에서 굴러서 휙 점프해서 30미터, 20미터, 10미터 다이빙할 때, 다이버가 그냥 곱게 내려가지 않아요. 뭐를 하느냐 하면 비틀기를 합니다. 몸을 비틀기. 체조 종목에서 도마 종목이 있거든요. 도마를 ‘탁’ 치고 공중으로 올라가서 그냥 내려오면 그건 아마추어죠. 그건 나도 하겠습니다.
그게 아니고 공중에서 2바퀴 반을 돌면서 몸을 틀고 트위스트로 뒤틀면서 착지는 착지대로 정도 되게 바로 하면 점수가 높게 나오죠.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통해서 뒤틀리기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 뒤틀기를 이해하면 성도고 천국 가고, 뒤틀기를 못 보여주면 지옥 가는 겁니다. 뒤틀기에 제일 모델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으로 계셨지만, 이 땅에 와서 공중 2바퀴 반을 돌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뒤틀기를 했습니다. 왜? 아무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저주받는 것이 주의 복이라고 받아들일 위인은 이 땅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도 없어요. 분명히 없는 데서 만들어놨음에도 불구하고 생겨버린 인간들이 악마가 낼름 점령하니까, 악마 편에 서서 인간들은 없었다는, 다시 사라진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인간 자체가 없던 걸로 사라져야 한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어느 인간도 수긍을 안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살려주기로 하죠. 살려주면서 진짜 없는 자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홀로 없는 자리로 돌아가죠. 그러면 그 뒤틀기하는 과정에서 누가 동원되느냐. 인간들의 오해와 편견들이 동원됩니다. 오해와 편견은 어떻게 생기는가. ‘구원받으면 됐지 굳이 꼭 그것을 알아야 합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굳이 알아야 해요. 왜냐 하면 내가 나를 관찰하는 것이 일방적 견해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예수님처럼 되지 못하는 이유가 본인이 본인을 관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늘 주시하고, 늘 평가하고, 늘 비판하고 하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예가 부부입니다. 부부는 한 항아리에 심어놓은 두 개의 나무와 같아요. 항아리는 하나인데 나무는 두 개가 심어있어요. 자리싸움이 이건 난리도 아닙니다. 이게 뭔 뜻이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싸우라고 부부 된 거예요. 싸우라고.
서로 실컷 원 없이 싸우라는 겁니다. 항아리는 하나인데 둘이 막 싸우는 거예요. 그러나 항아리 깨지면서 둘 다 죽지요. 이질적인 두 사람을 쌍둥이로 만나게 하는 것이 부부잖아요. 제가 수십 년 전에 이 교회에 와서 약간 놀란 일이 있었어요. 어떻게 아내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자기 소유도 아닌데. 이름을 부르면 상대도 내 이름을 부르든지. 이래야 등가가 되니까요.
한쪽은 이름을 부르고 한쪽은 여보 하니까 이게 얼마나 불공평하게 들리는지. 이상한 동네처럼 느껴지죠.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란 것은, 드라마에서 박신양이가 ‘얘기야~’라고 부르고. 다 큰 사람에게. 여주인공 김정은에게 ‘얘기야~같이 가자~’라고 하는 거예요. 물론 상대가 잘생겼으니까 그렇게 불러도 용납을 해주는데, 마음에 들지도 않는 것이 ‘얘기야~’라고 부르면 어디 던질 화분같은 거 찾죠.
왜 싸우느냐 하면 소유 당하지 않고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실컷, 원 없이 실컷 싸우게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배우자 중에 한 사람이 일찍 돌아가시잖아요. 그러면 싸울 사람이 없어서 오래 못 살아요. 얼마 안 가서 싸울 사람이 없어서 자기가 우울증 걸려서 죽어요. ‘아이고~여보~왜 나를 두고 먼저 가노~’라는 이 말은 솔직히 말해서 당신 없으니 싸울 상대가 없어서 내가 외로워서 못 살겠다는 말이죠.
인간은 투쟁과 싸움을 통해서 둘 다 주도권을 쥐지 못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주께서는 이 땅에 살면서 알려주십니다. 하나를 가진다고 만족할 인간이 아니에요. 계속 인간의 소유는 더 욕망을 넓혀가고, 욕심도 넓혀가고, 많이 가져놓고 하나를 빼앗기면 난리도 아니죠. 다윗이 나단 선지자에게 걸린 것도 그거잖아요. 자기 양 많으면서 양 아깝다고 종의 양을 한 마리 잡아가서 결국엔 선지자에게 혼나잖아요.
인간의 본성이, 죄성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그 한 항아리가 인간에 의해서 깨어지게 만들어요. 그 깨어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없음이 두 개의 쌍둥이를 있게 만든 거예요. 잉태치 못한 데서 2개가 나왔으면 잉태된 나를 고집할 것이 아니고, 없는 데서 왜, 무슨 이유 때문에 우리가 살지를 돌아볼 수 있는, 나에서 말씀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해요.
그 말씀이 시편 1편 1~2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당구공 하나를 치니까 당구공 두 개가 서로 상반된 쪽, 반대 방향으로 튀는 거예요. 율법을 주니까 율법에서 복만 나온 것이 아니고 저주가 나오고, 율법에서 의만 나온 것이 아니고 악도 나와요.
아주 신비한 당구 타법이죠. 하나를 탁 때리니까 두 개가 나온 거예요. 원자폭탄의 핵분열 작용같은 거예요. 중성자가 나와서 치니까 이게 핵분열이 일어나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오듯이. 서로가 서로에게 부딪히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한쪽은 의인이 되고 한쪽은 악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묵상하는 자로다”라는 것이 뭔 뜻이냐 하면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의인이 되고 천국을 가느냐.
그것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보다 먼저 전제되어 있다는 거예요. 말씀이 때리니까 우리는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갈 길이 비로소 이게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방을 만날 때 ‘네가 잘났냐, 내가 잘났느냐’라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말씀을 집어넣어 버리는 거예요. 말씀을 집어넣으면 우리는 둘 다 애초에 잘났다, 못났다 할 그런 쨉도 안되고 우리는 그런 입장이 못 돼.
우리는 그냥 없는 데서 생겨났어. 무엇을 위해? 여기 등장한 말씀을 위해서. 이런 말씀의 관계를 유지하면 되는 겁니다. 참, 설명은 굉장히 쉬운데 이게 굉장히 방해를 많이 받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내가 나를 계속 관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분의 글에 보면 세발낙지 글이 나와 있어요. 십자가 마을에.
세발낙지를 사라고 골목골목 돌아다니며 마이크에 대고 외치는데 세발낙지 안 삽니다. 안 사는데 왜 외치죠? 세발낙지가 필요한 사람이 있어서 그래요. 인간치고 말씀은 누구나 안 들어요. 태어나기를 마귀가 함께 있기 때문에 아무도 말씀을 안 듣습니다. 안 듣는데 이상스럽게 나보다 말씀이 먼저라는 것을 발견할, 그러니까 세발낙지 좋아하지도 않지만 세발낙지를 자기와 관련지을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래서 외치는 겁니다.
오후가 되니까 힘들지요. 그러면 더 쉽게 하겠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여자 축구팀과 한국 여자 축구팀과 아시아 여자축구 예선전 차는데 몇 대 몇이냐면 한국이 13 대 0으로 이겼어요. 한국이 13 대 0으로 이겼는데 경기한 것을 요약된 부분을 보게 되면 우즈베키스탄 선수들이 하나도 슬프지 않아요. 왜냐 하면 이건 사람의 게임이기 때문에 그래요.
먼저 사람의 게임을 해놓고, 사람의 게임이 얼마나 주님의 게임을 가리고, 그걸 방해하고, 사람의 게임 갖고 인생 전부를 다 걸고, 13골 넣었다고 좋다고 까부는 그걸 보면서 우즈베키스탄 선수들은 ‘왜, 더 넣지? 더 넣어~14대 0으로 가지 뭐’라는 식인 거예요. 한국 선수들이 시간이 없어서 못 넣었어요. 별로 뛰지도 않아요. 그냥 골을 넣는 그쪽 동네에 다 모여 있어요.
게임을 할 때 주님은 마귀와 게임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에게 부추겨요. 열심히 하라고. 구원받는다고. 주님은 값없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값없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말씀을 스스로 다 이루신 분이 따로 계세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어서 그 죽은 능력으로 한쪽은 일방적으로 천국, 한쪽은 일방적으로 지옥 보내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 십자가가 나보다 먼저 이고 예수님이 나보다 먼저인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안 계시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0’이 돼요. ‘0’이지만 ‘0’ 되시는 분이 ‘1’로 오셔서 ‘1’이 천국과 지옥 가는 사람을 둘로 나눈 겁니다. 이걸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파악하는 거예요.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에게서 그것을 보라는 거예요.
인생? 네 원대로 네 인연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다른 분의 생각대로 우리는 되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그냥 이 세상의 게임이 어떤 게임인지를 살펴보시라고요. 왜 살펴봐야 하느냐. 그게 복음을 가리니까요. 우리는 세발낙지 소리를 늘 귀담아들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일방적으로 했는데 우리가 세상 게임에 푹 젖었습니다. 누가 잘났는가, 누가 돈 많이 버는가, 누가 건강하냐, 누가 오래 사는가 하는 쓸데없는 게임에 몰입해서 정작 주님께서 하신 이 십자가 게임을 우리가 놓치고 있지 않은지요. 다시 성령을 통해서 눈을 떠서 없던 자리에 먼저 계신 주님을 발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